동해를 따라 경주에서 울산에 걸쳐 있는 산이 관문산이다. 경주에서 불국사역을 지나 입실을 거쳐 울산에 들어가는 경계에 신라시대의 관문이 있었다. 관문산의 이름은 이로 인해서 생겼으며 여기를 기점으로 천리장성의 별명이 있는 관문산성이 축조되어, 산의 능선을 따라 연연 수십리에 이르고 있다.
관문산은 이와 같이 서라벌을 바다에서 오는 적을 방어하는데 중요한 자리에 있는 것이다. 산에 오르면 동해의 푸른 파도가 바로 눈앞에 전개되며 옛날의 군사적 의의는 고사하고 등산 코스로도 안성맞춤이다. 지금은 산 일대에 큰 목장이 있어 관광에 또 하나의 흥미를 더해 주는 것 같다. 관문산의 북쪽 산을 별도로 나누어서 남봉(南峯)을 사성산 (四聖山), 또는 사영산(四 山)이라고 하고 북봉(北峯)을 봉서산(鳳棲山)이라고 하며, 신라 때의 명찰(名刹) 원원사 (遠願寺)는 이들 산 밑에 있다.
삼국유사의 '명랑 신인종(明朗 神印宗)' 이야기 가운데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신라서울 동남쪽 20여리에 원원사가 있는데 세간에 전하기를 안혜(安惠), 낭융(朗融), 광덕(廣德), 대연(大緣) 등 사대덕(四大德)이 김유신, 김의원(金義元), 김술종(金述宗) 등과 함께 발원하여 세운 것이며, 사대덕(四大德)이 유골(遺骨)이 모두 절의 동쪽 봉우리에 묻혔으므로 여기를 사영산(四 山) 조사암(祖師岩)이라고 한다" 김유신과 같은 호국의 영웅들이 국태민안이라는 구원(久遠)의 염원(念願)을 담아 이룩한 원원사(遠願寺)가 관문산의 서록(西麓)에 있다는 것도 관문산이 얼마나 중요한 산이었는가를 말하는 것이다.
삼국사기 불기에 보면 "성덕왕 21년(A.D.722년) 동(冬) 10월에 모벌군성(毛伐郡城)을 쌓아 일본적로(日本賊路)를 막았다"로 했고 삼국유사에서는 보다 상세하게 성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효성왕 개원 10년(A.D.722년) 임술(壬戌) 10월, 비로소 모벌군(毛伐郡)에 관문(關門)을 쌓았으니 지금 모화촌(毛火村)이다. 경주의 동남경(東南境)에 속하며 곧 일본을 막는 요새이다. 주회(周廻) 6,792보(步), 오척(五尺)이며 역종(役從) 삼만구천이백육십이인에 총감독은 원진각간(元眞角干)이다" 동경잡기(東京雜記)에는 "일명 만리성(萬里城)이라고도 한다"고 별명까지 소개하고 있다.
삼국유사에서 성을 쌓은 연대를 개원(開元) 10년이라 하면서 당시의 왕을 효성왕이라고 한 것은 잘못된 일이다. 개원은 당 현종의 연호이며 그 10년은 성덕왕(聖德王) 21년에 해당하며 삼국사기의 기록과 일치한다. 33대 성덕왕은 나라를 잘 다스려 태평 세월을 노래하면서도 국방에 대비함을 소홀히 하지 않아 이 관문성에 만리장성을 축조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경주와 울산의 경계를 이루는 현재의 행정구역으로 경주시 외동읍 모화리에 속하는 관문산에는 지금도 산성의 일부가 남아 있다.
경주부근에서 남아 있는 산성 가운데서 가장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으며 성벽(城壁), 성문(城門), 창지(倉址) 등을 잘 볼 수 있다. 산성에서 바라보는 전망 또한 웅대하며 동해로부터 오는 왜적의 행동을 관찰하는 최적(最適)의 장소 일 것이며 왜적을 방어하기 위해서 축조했다는 축조 목적에 가장 합당한 장소임을 알 수 있다.
◎ 찾아가는길
경주에서 불국사역을 지나 입실을 거쳐 울산에 들어가는 군계(郡界)에 위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