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대문형무소에서 첫 번째 사형수 된
대법원장 출신 의병장ㅡ허위
1908년 10월 21일 정오,
허위 선생은 경성감옥의 교수대에 올랐습니다.
안색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고 태도는 당당했는데요.
일본 승려가 다가와 불경을 읽으며 명복을 빌어 주려 하자 그는 단호하게 물리쳤습니다.
충의의 넋은 스스로 하늘에 오를 것이니
너희의 도움은 필요없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왜 마지막 순간에도 흔들리지 않았을까요.
허위는 구한말에 대법원장을 지낸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안정된 자리에 머물지 않고 의병을 일으켜 13도 창의군의 선봉에서 서울 진격을 노렸는데요.
전국 의병을 이끌며 일제와 맞선 끝에 붙잡혔고, 사형을 선고 받았습니다.
당시 그의 나이는 53세 였습니다.
검사는 사형 직전 시신을 거둘 친족이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허위는 죽은 뒤의 일은 마음에 두지 않으니
옥중에서 썩어도 좋다며 속히 형을 집행하라고
답했습니다.
털끝만큼의 흔들림도 없었다고 전해집니다.
곧 사형이 집행됐고, 그는 경성감옥, 지금의
서대문형무소 제1호 사형수로 기록됐습니다.
그가 남긴 유서에는 이런 뜻이 담겨 있었습니다.
나라의 치욕과 백성의 수모가 이에 이르렀으니
죽지 않고 무엇을 하겠는가.
아버지의 장례도 치르지 못했고 나라의 주권도 되찾지 못했으니, 불충불효한 몸이 죽은들
어찌 눈을 감겠는가.
대한매일신보는 하늘의 태양이 빛을 잃었다는 뜻의 '천일무광'이라는 말로 그의 죽음을 애도했습니다.
죄수들과 도성 안팎의 백성도 통곡했다고 하는데요.
시신을 수습한 사람은 제자 박상진이었습니다.
그는 하얀 천으로 스승의 시신을 감싸 안고 나와서 구미시 금오산 아래에 묻고 장례를 치렀습니다.
상주인 장남 허학과 유족들은 독립운동에 가담하고 있어 모습을 드러낼 수 없었습니다.
경북 구미시 임은동의 생가터에는 왕산 허위선생 기념공원이 조성돼 있습니다.
생가의 옛 모습을 알 수 없어 복원하지 못한 자리를 장손 허경성 씨가 사비로 매입해 구미시에 기증한 곳인데요.
높은 관직을 내려놓고 의병의 길에서 최후를 맞은 한 사람의 이름을 후손들이 지켜 온 셈입니다.
허위 선생은 대법원장을 지내고도 나라를 되찾기 위해 모든 것을 내놓은 의병장이었습니다.
교수대 위에서도 당당했던 그의 마지막과 상주조차 나설 수 없었던 쓸쓸한 장례를 우리는 영원히 기억하겠습니다.
왕산 허위. 대법원장. 13도 창의군.
서대문형무소에서 의병장 허위를 사형.
박상진 제자가 시신을 수습하여 구미로 모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