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미술이란 무엇인가(丸善, 1994)
스가와라 노리노(管原敎夫) 지음
현대미술이란 무엇인가? 이 책은 이러한 문제에 다각적으로 접근하고 있다. 최근 국제 미술계에서 유력한 작품 제작 스타일로 각광받고 있는 인스톨레이션을 분석하고, 전후 최고의 비평가 미국의 클리멘트 그린버그의 평론을 축으로 한 회화론을 오늘의 시점에서 되돌아본다. 미술과 현대사상과의 관계를 해외의 연구 성과를 토대로 조명한다. 저자는 저널리스트로서의 오랜 취재 경험과 이를 뒷받침하는 문헌자료로 내용을 풀어간다. 알기 쉽고 간결한 어구를 따라가면 현대미술을 한 단계 깊고 높게 이해할 수 있다.
저자는 1951년에 태어나 동경대학 법문학부를 졸업하고, 요미우리(賣讀) 신문사에 입사, 80년부터 문화부에서 미술담당을 맡았다. "쉬운 미술" 등 미술 저서를 여러 권 펴낸 미술전문기자다. 옮긴이와는 동종 직업의 인연으로 개인적으로 서로 알고 지내는 사이. 아트북스(대표 정민영)에서 출판 진행을 하고 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제1장 오늘의 미술 1. 베니스 비엔날레 국제전의 시대/나치즘의 문제/독일 관의 파괴 2. 일리야 카바코프와 소련/러시아 붉은 파빌리온/카바코프의 예술관/미술이란 무엇인가(1) 3. 여러 가지 인스톨레이션 눈에 띄는 인스톨레이션/딴 세계로의 여행/소장된 인스톨레이션 4. 인스톨레이션의 배경 베를린의 한스 하케/조각에 대한 불만/미술관을 뛰어나온 제작 5. 모던과 프리 모던 자우주의와 사회주의/프리모던의 시점 6. 미디어아트 도쿠멘터Ⅸ의 주목할 작품/비엔날레의 백남준/포스트 휴먼
제1장 오늘의 미술
1. 베니스 비엔날레
국제전의 시대 현대미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금 현재 어떤 작품이 제작되고 있는가를 파악하는 일이 우선 필요하다. 그래서 이 책도 맨 먼저 1993년에 개최된 베니스 비엔날레부터 써나가겠다. 베니스 비엔날레는 1893년에 출범한 국제미술전. 1895년 제1회 전시가 개최된 이후 대개 2년에 한번씩 열렸지만, 전쟁으로 중단된 적도 있어 93년 비엔날레는 45회 째다. 세계에서 가장 전통 있는 미술올림픽이라고 생각해도 좋다. 현재 베니스 비엔날레에 버금가는 국제미술전으로 독일 카셀에서 약 5년에 한번 열리는 카셀 도큐멘터가 있다. 제2차세계대전 패전 후 독일의 젊은이들이 해외미술을 접촉하고, 세계를 알 수 있도록 기획된 이 행사는 1955년에 시작되었다. 여기에 비하면 베니스 비엔날레의 역사는 확실히 길다. 베니스 비엔날레와 도쿠멘터 이외에도 80년대에 들어서 세계 각지에서 여러 국제미술전이 기획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지난 10여 년간의 미술은 ‘국제전의 시대’였다고 할 수 있다. 미술 관계자들 사이에는 이러한 비엔날레나 도쿠멘터 같은 국제미술전의 역할이 이젠 끝났다는 목소리도 있다. 국제미술전은 몸집이 너무 거대해져 움직이기 어렵고, 이젠 미술의 진정한 동향을 전할 수 없다는 지적이 있다. 그러나 어찌되었건 세계 각국의 작품을 한자리에 모은 미술올림픽은 비록 축제 형식이라 하더라도 거기에 출품된 작품은 분명 미술 현상의 한 부분을 드러내고 있다.
나치즘의 문제 제45회 베니스 비엔날레는 이탈리아 미술평론가 아킬레 보니토 올리버가 기획한 것으로, 예술에 있어서 유목성(遊牧性)이 주제의 하나였다. 국경을 초월하여 왕래하는 미술의 측면이 부각되었다. 독일이 한국 태생의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白南準)을 기용한다거나 헝가리가 미국인 조셉 코수스(Joseph Kosuth)를 대표로 선정한 것은 그러한 테마를 반영한 것이다. 더욱이 이 작가들은 각기 그 나라와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다. 백남준은 뒤셀도르프의 미술학교에서 가르치고 있고, 또 코수스의 경우 그가 오랜 세월에 걸쳐 실천해 온 개념미술의 영향을 받은 작가가 헝가리에 적지 않다는 사정이 있다. 여하튼 민족주의의 대두가 두드러진 현재의 세계 상황에서 예술에 국경이 없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하려는 의도가 이 테마에 들어 있다고 생각해도 좋다. 전람회 전체 인상은 젊은 작가의 제작이 비교적 활발하지 못한 것에 반해 베테랑의 활약이 눈에 띄었다. 각 국의 파빌리온에는 베테랑들의 작품이 많이 출품되었다. 따라서 회화를 비롯하여 수상 대상 작가도 대부분 그들이었다. 그 가운데 가장 주목받은 작품이 독일 관의 한스 하케(Hans Haacke)다. 하케는 1936년에 쾰른에서 태어나 61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이후 줄곧 뉴욕에서 활약해 왔다. 60년대 후반부터 왕성하게 작품 활동을 펼쳤기 때문에 경력이 꽤 길다. 그는 1993년 베니스 비엔날레에 〈게르마니아〉라는 작품을 출품했다. 이 작품은 지금까지 독일 파빌리온 입구에 있던 사나운 독수리 마크를 1마르크의 동전으로 바꿔놓은 것으로 시작된 제작이다. 파빌리온 입구에는 또 내부를 감춘 붉은 칸막이가 설치되어 있고, 거기에는 검은 테두리를 친 히틀러의 사진이 장식되어 있어, 보는 사람을 더욱 더 도발시킨다. 독일하면 히틀러가 연상된다고 하면 어폐가 있지만, 히틀러의 나치즘은 전후 독일 지식인이 절대적으로 넘어야 할 장애물이었다.“아우슈비치 이후 시를 쓰는 일은 야만이다.”이것은 독일의 사상가 테오도르 아도르노의 너무나 유명한 말이다. 실제 나치즘이 행한 유태인 학살의 역사는 모든 창조 행위를 헛되게 느끼게 할 정도로 독일의 양심을 괴롭혀 왔다. 80년대 미술의 중심이 되었던 화가로 독일의 안젤름 키퍼(Anselm Kiefer, 1945∼)가 있는데, 이 작가도 이런 문제를 떠맡는 작품을 계속해 왔다. 미술은 언어에 비해 애매한 반면, 보는 사람의 상상력을 자극한다고 할 수 있다. 키퍼의 작품에 자주 나타나는 나치즘의 심볼도 이런 이유에서 여러 가지로 해석되어 왔다. 93년에 일본에서 개최되었던 키퍼의 전람회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그 실제 작품을 접할 수 있었다. 히틀러와 관계된 작품으로, 예를 들어 〈아시카 작전〉이라 불리는 그림이 있다. 그림 제목은 히틀러의 영국 침공 작전을 의미한다. 히틀러 총통은 실제 배스터부에 물을 붓고 군함 모형을 띄워 작전의 이미지를 그렸지만 실행에 이르지는 못했다고 한다. 그림은 그 모양을 재현하여, 그 어리석음을 비웃는다. 이 그림에는 역사에 스스로 가치를 부여하려는 키퍼의 노림이 있다. 그는 역사란 기존의 것을 막연히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고, 사람들 스스로 의미를 부여하여 완성시켜야 하는 것이라 주장한다. 우리 일본인들은 과연 그렇게까지 역사에 대하여 자신이 이것을 만들었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이런 반성을 하게 한다. 신화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키퍼는 게르만이나 북방의 신화를 자주 그림으로 표현했는데, 이것 역시 신화를 스스로 해석한다는 주체적인 생각을 반영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 신화들 역시 나치즘의 민족 교육, 세뇌에 자주 이용되어 왔기 때문이다.
독일 관의 파괴 내처 독일 파빌리온 앞에 멈춰 서 있을 수는 없다. 그러나 전시장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조금 덧붙여야 할 것이 있다. 이 히틀러의 사진이 1934년 베니스 비엔날레 전시회장을 방문했을 때 찍은 것이라는 사실이다. 사진 밑에 그렇게 표기되어 있다. 오래된 사진을 본 김에 독일 관의 역사를 소개해 두자. 독일 관은 1909년 애초에는 독일의 한 지방이었던 바바리아의 파빌리온으로 지어졌다. 독일 관이 된 것은 그로부터 3년 뒤의 일이다. 사진을 보면, 그 때 건물은 고전적인 띠 모양의 장식을 가진 외관을 갖추고 있다. 그것이 현재의 튼튼한 디자인의 건물로 개축된 것은 히틀러 시대인 1938년이었다. 이 개축 디자인은 파시즘 건축의 전형을 나타내는 것이며, 말할 것도 없이 여기에는 제3제국의 위신이 깃들어 있었다. 〈게르마니아〉의 내부에 보이는 것은 황량함이다. 거기에는 미술에서 보통 찾을 수 있는, 뭔가가 전시되고 있는 것이 아니다. 한 면이 기와조각과 자갈로 덮여 있으며, 게다가 자세히 보면, 이 기와조각과 자갈은 다른 곳에서 운반해 온 게 아니다. 바닥 돌이 모조리 벗겨지고 갈라져 있다. 요컨대 독일 관이 파괴된 것이다. 그 위를 걸으면 으지직하고 메마른 소리가 파빌리온 속에 메아리쳤다. 정면 벽에 크게 쓰인‘GERMANIA'라는 글자가 더욱 더 눈에 들어온다. 한스 하케는 무엇 때문에 독일 관의 바닥을 파괴한 것일까? 현대미술을 이해하려면 이러한 소박한 의문에 대해 하나하나 생각해 나가는 일은 기본이다. 먼저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것은 히틀러에 대한 비판, 나치즘이 초래했던 정신의 황폐를 직시하도록 하려는 작가의 의도일 것이다. 작품 제목에 있는 게르마니아란 것은 게르만인의 땅을 의미하는데 그 땅은, 그 정신 풍토는, 이처럼 황폐해 있다. 이 작품에는 그 현실을 딛고, 그 토양을 먼저 경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작가의 메시지가 담겨있다. 그렇다면 입구에 있는 1마르크의 동전은 무엇을 말하는가? 이 의문을 풀기 위해서는 앞서 기술한 파빌리온의 역사적 흐름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나치즘의 붕괴 이후에도 이것을 상징하는 독수리 마크는 독일의 파빌리온에서 떼 내지 않았다. 전후 이 관은 서독이 사용했고, 서방 문화의 쇼윈도가 되어 요셉 보이스(1976년)와 게오르그 바젤리츠(1980년) 등의 첨단적인 작품이 전시되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독일의 어떠한 정신에 바탕을 두고 있었던 것인가? 이렇게 질문할 때, 그것이 매우 애매했다는 것은, 같은 패전의 경험을 가진 일본인이라면 잘 이해할 것이다. 세계 평화, 인권 존중, 평등. 일본 헌법이 주장하는 이러한 기본적인 이념은 서방 세계에 공통된 것이며, 거기에 일본의 정신적인 아이덴티티는 그다지 보이지 않는다. 전쟁의 기억과 결부하여 일본 정신이 강조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며, 똑같은 일이 서독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독수리 마크를 내건 파시즘 양식의 파빌리온 건축은 전후의 서독으로서는 의미 없는 폐허가 되었지만, 이것에 대신할 만한 정신의 거점을 독일인은 갖지 못했다. 이렇게 해서 파빌리온은 그대로 사용되어 왔던 것이다. 전후 일본이 경제 부흥으로 엔 가치를 높여 갔던 것처럼 서독은 강한 마르크를 새로운 신화로 만들어갔다. 그것이야말로 서독의 아이덴티티로 될 만했다. 하케는 그 때문에 마르크의 코인을 파빌리온에 명시했던 것이다. 그러나 전쟁의 상흔인 동서분열이라는 사태가 독일 통합으로 해제된 지금, 독일은 새로운 역사를 걷기 시작해야 한다. 그 때는 히틀러의 지긋지긋한 기억으로 가득했던 독일 관도 정산되어야 할 것이다. 하케는 파빌리온에서도 신생 독일의 탄생을 맞이하기 위해 구 파빌리온의 파괴를 단행했던 것이다.
2. 일랴 카바코프와 소련/러시아
〈붉은 파빌리온〉 제45회 베니스 비엔날레는 파빌리온의 구성에서 전회(1990년)와 어느 정도 양상이 달랐다. 전회까지 있었던 동독일 관과 소련 관이 모습을 감춘 것이다. 최근의 사건인 독일 통합과 소련 해체 때문이라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독일 관은 종래의 서독일 관으로 통합되었고, 또 소련 관은 러시아 관으로 새롭게 바뀌었다. 이러한 관의 변화에 잘 착안한 작품으로 러시아 대표 일리아 카바코프(Ilya Kabakov, 1933∼)의 인스톨레이션(가설건축물)이 있다. 러시아 관은 판자 울타리로 둘러 싸여 있다. 그것은 울타리라기보다 차라리 공사 현장을 둘러싼 담장이라고 하는 편이 어울린다. 실제 관내로 들어가면 공사 현장 그 자체다. 어둑어둑한 내부에는 발판이 엇갈려 있고, 판자 조각과 벽돌이 널려 있으며, 양동이에는 도료 같은 것이 들어 있다. 러시아 관은 이제 막 개축 중이지만, 좀체 원만하게 진행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이 소연방 붕괴 이후 러시아 사회의 개혁 현상이라는 이미지를 불러일으킴으로써 작품에 리얼리티가 있다. 어두운 공간을 빠져나가 관의 뒷쪽 문으로 나가면, 행진곡을 연상시키는 활기찬 음악이 들려온다. 담장으로 둘러싸인 뒷마당에는 분홍과 빨강으로 칠한 탑이 서 있고, 음악은 그 위쪽에 있는 스피커에서 흘러나온다. 그런데 이 예쁜 탑은 무엇인가? 자세히 들여다보면 상부 벽에 낫과 해머 그림이 보인다. 일찍이 소련 국기에 있던 그 낫과 해머. 이 관은 예쁘면서도 소련 관이라 할 수 있다. 흐르는 음악도 아마 소련시대 것일 게다. 이 작품을 어떻게 해석하면 좋은가? 고르바초프를 구금한 1991년 여름의 쿠테타가 실패한 이래, 그래도 일본의 논단에서는 러시아에서 스탈리니즘의 부활을 걱정하는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러니까 아마도 이 작품에 어리둥절해졌던 것이다. 아무래도 일본인의 소련/러시아에 대한 이해는 피상적인 것 같다. 왜냐하면 이 소련 관에는 예쁜 외관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관의 후방에서 앞으로 나갈 기회를 지그시 엿보고 있는 낌새가 있다. 카바코프는 일찍이 소비에트연방을 지옥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발언과 겹쳐 생각해 보면, 이것은 사회주의 지옥을 뼈에 사무치도록 겪은 작가로서 할 수 있는 경고를 담은 작품이라 봐도 좋다. 개혁을 꾸물꾸물하다 보니...라는 식이다. 과연 작품 제목은 〈붉은 파빌리온〉이었다. 이 카바코프의 작품이 발표되고 수개월 후, 러시아에서는 자유와 민주주의를 내건 엘친 정권의 전복을 기도하는 수구파의 행동이 또 일어났다. 그리고 그 해 말 국회에서 우익 세력이 크게 약진했다. 카바코프의 〈붉은 파빌리온〉은 그때 한층 리얼리티를 획득했던 것이다.
카바코프의 예술관 1933년 우크라이나에서 태어난 일랴 카바코프는 글라스노스치(정보 공개)의 흐름을 타고 87년 처음으로 고국을 떠나 오스트리아에서 작품을 발표했다. 이후 그는 서방측 전람회에 자주 초대되었고, 가장 바쁜 예술가 중 한 사람이 되었다. 처음에는 회화를 발표했다가 낡았다는 말을 듣고, 이후 오직 인스톨레이션만 다루게 되었다. 그것은 뭔가를 새롭게 만드는 제작이라기보다 앨범의 옛날 사진이나 텍스트를 전시하기도 하고, 후라이팬 등의 일용품을 나열하기도 하는 등 기존의 물건을 배치 구성하여 특이한 공간을 연출하는 제작이 많다. 그 중에는 소련 시대 공동주택의 가난한 살림살이를 전하는 작품이 특히 흥미를 끈다. 92년 카셀 도쿠멘터Ⅸ(독일 카셀)에는 야외에 공중변소를 만들어 화제가 되었다. 역시 공동주택 시리즈의 한 작품이라 생각해도 좋다. 이 설치작품 속에 들어가면, 확실히 변기가 몇 개 나열되어 있는데, 그 곁에는 방금 전까지 거기에 누군가 있었던 것 같이 식기 등이 흩어져 있는 테이블이 하나 놓여 있다. 게다가 그 테이블을 잘 보면, 아르 누보, 세기말의 정교한 디자인을 했고, 상당한 사치품이다. 노출된 변소와 쾌적한 식당, 거실이 서로 인접해 있는 이 불균형이랄까, 대조를 어떻게 생각하면 좋을까? 그것은 분명히 분열적이다. 이런 것에 소련(러시아)의 이해할 수 없음을 느낀다. 더불어 카바코프 자신이 어느 인터뷰에 응해서, “공동 주택의 가난함을 재현하는 것은 서방측 관객이 거기에 리얼리티를 느낄 터이기 때문이다”라는 전략적인 제작 의도를 피력했다는 것을 알면, 그 미심쩍은 느낌은 한층 강하게 된다. 이해할 수 없는 하나의 이유는, 서방측 전위 예술가들의 이미지로 그를 받아들이려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 서방측의 미술가란 무엇인가? 그것은 미래의 예언자로서의 미술가이다. 예언자인 미술가는 당연히 진지한 성격을 갖는다. 그러면 카바코프는 진지하지 않은 걸까? 그럴 리 없다. “때로는 심각하고, 때로는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고 그는 인터뷰에서 대답하고 있다. “예언자로서의 미술가의 심각성은 여느 보잘것없는 사람, 작고 그리 중요하지 않는 인생상의 문제 쪽이 훨씬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처지에서 보면, 아무래도 우스꽝스럽게 보인다”고 카바코프는 말한다. 이렇게 고답적이지 않고 지극히 보통 사람들과 공유하는 낮은 시점과 더불어 카바코프의 제작을 특색 있게 하는 것은 작품이 자신의 인생과 밀접하게 관계되어 있다는 점이다. 자전을 이루는 편지·기록·사진·개인의 추억들이 가득 찬 물건을 그는 작품에 사용하고 있다.“그것은 러시아의 문학, 도스토예프스키의 오랜 전통입니다. 러시아에서는 문학과 미술을 묶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그렇게 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습니다”라는 것이 그의 코멘트다. 자기를 속이지 않고, 무리하지 않는 이러한 태도는 역시 60세를 넘긴 작가의 모습이라 할 수 있다. 동시에 개인적인 체험을 강조하는 그의 발언은 아마도 제작의 리얼리티를 지탱하는 소재를 보여주는 것이다.
예술이란 무엇인가(1) 분열적인 부분이 있는 카바코프의 작품은 그가 자기에게 정직하면 할수록 그 자신에 뿌리 박힌 소련 사회의 특이성을 부조시키고 있다. 소련은 그 나라 사람들도 잘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것은 치료용의 긴 의자에 누워 정신 분석을 받는 환자와 유사하다고 매우 적절하게 형용했던 모스코바의 예술가가 있다. 게다가 소련에서 러시아로 된 단계에서 이 환자는 또 다른 병에 걸린 것 같다고 한다. 파벨 페파스타인이라는 미술가에 따르면, 애초 소비에트공화국연방에는 이름부터 모순이 있었다. 왜냐하면 소비에트란 모든 것끼리 서로 이야기한다는 의미이다. 인간끼리 머물지 않고, 하늘은 대지와, 냇물은 숲과, 그리고 공장은 철도와 이야기를 나눈다. 이것은 실로 아름답고 감동적인 이미지다. 그리고 사실 이 소비에트라는 개념이야말로 사회주의의 가혹한 면을 부드럽게 해 왔다. 사회주의의 쇠를 덮는, 말하자면 빌로도의 역할을 맡아왔던 것이다. 이에 대해 다른 유럽의 사회주의 국가에는 이 모든 것이 서로 논의한다는 빌로도의 시스템이 없었기 때문에 사회주의는 엄격한 것이 될 수밖에 없었다는 견해가 가능하다. 그 엄격한 사회주의에서 동구권이 해방으로 향한 것은 물론 페레스트로이카가 계기가 되었다. 이상 소련 미술의 특이성을 말하고 난 뒤에 페파스타인은 카바코프의 작품을 분석한다. 대저 인간은 여러 경험을 서로 얘기할 때에 두 가지 기본적인 종류를 구별해야 한다. 하나는 이 곤란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것에 관계되는 경험이다. 즉 병과 싸우거나 살기 위해 매일 싸워 빵을 얻는다든지 하는 경험이다. 또 하나는 딴 세계로 뛰쳐나감으로써 자신을 구해내는 경험이다. 사람은 살아 남지 않으면 안되고, 또 자기를 구출해내는 방법도 알아야 한다. 말하자면 양쪽을 모두 체험해야 한다. 그러면 그 경우에 무엇에서 자신을 구출해내는 것일까? 그것은 평범한 것에서이다. 예술의 큰 존재 의의가 여기에 있는 것이리라. 그것은 과학처럼 철저히 합리적인 것이 아니고, 종종 애매하며 수수께끼를 내포하고 있지만, 그 때문에 사람들을 현실에서 구해내기도 하고, 삶에 희망을 주는 것이다. 카바코프의 작품에 준해서 말하면, 평범을 피한다는 것은 다른 삶의 공간을 찾는다는 것이다. 이 다른 삶의 공간이 그의 인스톨레이션에 생성되어 있다고 페파스타인은 말한다. 역시 그 작품에는 하나 하나의 요소, 곧 언어·디자인·과거·꿈 등은 소련/러시아인에게 낯익은 것이다. 그러나 변소와 세련된 디자인의 테이블이 이웃해 있는 풍경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각 요소가 만나는 작품은 딴 세계를 만든다. 그 딴 세계로 향하는 것으로써 자기를 구하는 것이 이 세상에는 필요한 것이다. 예술이란 무엇인가? 이 물음에 대한 최초의 해답을 먼저 카바코프의 작품과 연계해서 찾아보았다. 말하자면 사람들이 왜 미술을 만들고, 거기에 대하여 말하는가 라는 관점에서 그 존재 의의를 기술했던 것이다.
3. 여러 가지 인스톨레이션
눈에 띄는 인스톨레이션 한스 하케의 〈게르마니아〉든 일랴 카바코프의 〈붉은 파빌리온〉이든 제45회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눈에 띄었던 작품은 인스톨레이션이었다. 아니, 베니스 비엔날레에 한정되지 않는다. 92년의 도쿠멘터Ⅸ에서도 주목받았던 작품은 그 안에 들어가 공간을 체험하는 인스톨레이션이었다. 최근 미술에는 이 인스톨레이션이 유력한 표현 스타일이 되어 있다. 인스톨레이션은 러시아 혁명기의 미술가 라자르 엘 리씨츠키(Lazar El Lissitzsky, 1890∼1941)가 최초로 시도했다고 한다. 그것은 회화·조각·연극·음악 등 모든 분야의 제작을 종합한 예술 양식이며, 장르의 횡단이 거론된 최근의 미술 동향과 매치되고 있다. 그럼 인스톨레이션은 어떤 구조로 표현의 강도를 얻고 있는 것일까? 먼저 인스톨레이션은 그것을 구축함으로써, 그때까지 볼 수 없었던 사회나 문화 구조가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하는 그런 종류의 제작이다. 실제 〈게르마니아〉에서 부조된 것은 독일의 파빌리온이 히틀러 시대에 개축된 건물을 대신하고 새로운 아이덴티티를 가질 수 없었다는 것으로 상징되는, 전후 독일의 의지할 곳 없는 정신 풍경이다. 또 〈붉은 파빌리온〉이 나타낸 것은, 좀처럼 개혁이 진행되지 않는 러시아 사회에 살며시 다가오는 스탈리니즘의 부활을 두려워한 것이다. 이러한 작품 구조를 뒤집어 보면, 인스톨레이션은 작품 배경에 당연히 부조되어야 할 사회나 문화의 문제를 미리 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즉 독일 통합이나 소연방 사회주의의 붕괴라는 역사적 대사건이 하케나 카바코프의 작품 배경에 있고, 거기에서 나온 여러 가지 문제를 그들은 시각적으로 드러낸 셈이다. 두 개의 인스톨레이션이 비엔날레에서 눈에 띄게 되었다는 것은, 이 사실에 대해 미술이란 본래 이런 제작만이 문제되어서는 안 된다는 비판을 포함해서, 미술올림픽인 국제전이라는 자리를 둘러싸고 여러 견해를 불러일으켰다. 즉, 비엔날레와 같은 대규모 국제전에는 상의 선고(選考)와도 얽혀, 남의 눈을 끌어당기는 대규모의 화려한 작품이 유리하며, 그 점에서 인스톨레이션이 효과적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현실의 정치·사회와 밀접하게 관계 있는 이런 작품에는 항상 사회 동향과의 관계로만 미술을 자리매김하는 경향이 있고, 미술이 정치나 사회 문제의 설명으로 빠질 위험성을 안고 있다는 비판 등이다. 다만, 하케나 카바코프의 작품을 변호한다면, 전후 세계를 지배했던 냉전 붕괴는 이러한 비판의 힘을 뛰어넘는 너무나도 큰 사건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오늘날 인스톨레이션이 화제가 된 것은 모두 역사에 새겨진 큰 사건과 관계가 있는 경우에만 한정된 것은 아니다. 한 걸음 물러선 정적인 관점에서, 현재의 상황을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작품도 있다. 카와마타 마사시(川*正)의 인스톨레이션이 그런 예이다. 목재를 건물에 기생, 증식시킨 구축물을 다룬 이 작가는 구미의 여러 도시에서 정력적인 활동을 계속했다. 1987년의 〈도쿠멘터8〉에는, 독일의 카셀에 있는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교회를, 또 92년에는 뉴욕의 루즈벨트 섬에 있는 천연두 병원의 폐허에서 이러한 프로젝트를 시도했다. 이런 프로젝트로 현장에 무엇인가를 덧붙이는 것이 목적은 아니다. 그 장소, 그 건물에 본래 갖추어져 있는 역사이자 정신성이 묻히고 잊혀진 상태를 드러내는 일이었다. 루즈벨트 섬의 경우를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 장소에는 19세기에 천연두 격리시설이 운영되었다. 카와마타의 제작은 사람들의 주의를 이 장소로 향하게 함으로써, 현재는 마천루의 이미지로 가려져 있는 뉴욕의 과거에는 그러한 시대가 있었다는 사실을 드러내고, 현재 문명과의 대조를 보여주었다. 그의 이러한 제작은 어느 사이에 시작되었다가 금방 없어져 잠깐 가시에 찔린 것과 같은데, 그렇기 때문에 쉽게 잊기가 어렵다.
딴 세계로의 여행 여기까지 예로 들었던 작품은 제작 장소의 역사·사회 등과 관계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인스톨레이션 가운데는 사회와 관련되기는커녕, 오히려 대중화 균질화된 사회에 있어서 평범한 일상에서 동떨어진 개별의 구역을 가르려는 작품과도 만난다. 그것은 사람들이 자기의 깊은 내면으로 정신적 여행을 하는 작품이라 부를 수 있다. 도쿠멘터Ⅸ에 출품했던 아니조 카프아의 작품이 그 예이다. 카프아는 1954년 인도의 봄베이에서 태어나 런던에서 미술 교육을 받았다. 90년 제44회 베니스 비엔날레에 영국 대표로 출품, 35세 이하의 젊은 작가들에게 수여하는 ‘2000년 상’을 받았다. 그 베니스 비엔날레에 출품하기 얼마 전에 나는 런던에 있는 그의 작업장을 방문했다. 이전에 창고였다는 넓은 실내에 들어가면, 짙은 군청색의 큰 원과 직방체의 돌 표면에 가늘고 긴 검은 모양이 찰싹 달라붙어 있는 작품이 눈에 들어온다. 가까이 가서 보니, 평평하게 보였던 짙은 군청색 원은 실제로는 밥공기 같은 반구체. 또 돌에 붙어 있는 얇고 긴 모양은 아무래도 구멍 같다. 두개의 작품 모두 구멍이 나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고, 원근감이 없다고 말했더니 카프아는 웃으면서, “작품은 바로 그걸 의도하고 있다”고 대답했다. 도큐멘터Ⅸ에 출품한 〈지옥 변두리에 내리다〉도 같은 경향의 작품이었다. 야외에 설치된 상자 같은 건물에 들어가면, 마루 중앙에 빌로드를 깔아놓은 것 같은 검은 원형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 역시 깊이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데, 누군가가 일부러 떨어뜨린 것 같은 은색의 동전이 바닥에 보이기 때문에 이것이 꽤 깊은 구멍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카프아의 이러한 작품에서는 원근감을 분명하게 지워 없애는 독특한 안료가 표현을 성립시키는 중요한 요소이다. 카프아는 안료가 “인도에서 종교 의식에 사용되는 것으로 신상 등에 칠해져 있다”고 말한다. 카프카의 작품은 그저 눈을 속이는 것만은 아니다. 아마도 그 특유의 도료는 원근감을 없앨 뿐만 아니라, 존재를 그 고정된 의미에서 해방하여 또 다른 의미를 가진 존재로 바꾸어버리는 것이다. 예를 들어 무거운 것을 가벼운 것으로, 대지를 하늘로, 그리고 무를 존재로…. 관객은 거기에서 이 세상의 일체의 약속으로부터 자유로워진 듯한 해방감에 잠길 것이다. 그 체험은 확실히 딴 세계로 놀러 가는 것 같은 신비한 감각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그의 작품이 인간 정신에로의 이 같은 작용을 의도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야외의 상자 같은 장치는 거기에서 번잡한 현실에서 인간을 격리시키고, 개인의 내면과 직면케 하는 역할을 한다.
소장된 인스톨레이션 다른 세계로의 여행을 권유한다는 점에서 유사한 성격을 가진 작품으로, 제임스 터렐의 빛을 사용한 인스톨레이션이 있다. 최근에는 1992년 바젤에서 열린 〈트랜스포메이션(변환)〉전 등에 출품되었던 그의 작품은 자연광, 인공광의 신비한 표정이 인상적이다. 그의 작품을 상설 전시하는 곳이 펜자 컬렉션이다. 밀라노 북쪽, 고모호 근방에 바레제라는 마을에 있는 펜자 관을 방문하면, 미니멀리즘 작품이 두드러진 이 컬렉션 중에서도 터렐의 작품은 압권이다. 보턴 조작으로 직사각형으로 잘려진 창, 천정이 열리고 닫히고, 거기에 하늘과 구름이 들여다보이며, 야외의 여러 가지 색의 빛이 흰 벽에 투사된다. 파랑에서 오렌지로, 그리고 또 짙은 보라색이나 검정 색 등으로…, 기후와 시각에 따라 시시각각 변해 가는 그 표정은 빛으로 그린 그림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1943년 로스엔젤레스에서 태어난 터렐의 작품이 이같이 빛과 공간과의 관계를 묻게 된 것은 항공기술자였던 부친의 영향 탓일까? 미국화가 마크 로드코(Mark Rothko)의 종교적 신비적 회화 또는 모네가 〈쌓은 짚〉 연작에서 추구했던 빛이 변화하는 모습에 대한 관심을 그는 말하고 있다. 터렐이 이탈리아 실업가 쥬제페 펜자와 만난 것은 1973년의 일. 그의 작품이 마음에 들었던 펜자는 바레제에 소유하고 있는 18세기에 세워진 별장에 작품을 영구 전시하도록 터렐에게 의뢰했다. 펜자의 별장 일부를 작품용으로 개축해서 가능해진 터렐의 전시는, 인스톨레이션의 보존을 둘러싼 하나의 시점을 제공한다. 왜냐하면, 이 작품이 나타내듯이 인스톨레이션은 애초부터 미술관에 소장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사실 카바코프가 도쿠멘터Ⅸ에 출품한 〈화장실〉 등 이미 소장된 작품도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한스 하케의 〈게르마니아〉 같은 작품은 비엔날레 전시장의 독일관이라는 장소를 얻어서 비로소 의미를 달성한 것임에 틀림없다. 독일 관의 역사라는 문맥과 분리해서 그것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여러 가지 종류의 인스톨레이션을 살펴 보았지만, 미술관에 소장되기 좋은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있다. 이 문제를 고찰하는 데 중요한 것이 지금까지 인스톨레이션과 미술관과의 관계다. 그것은 인스톨레이션의 본질에 관계된다는 점에서도 충분히 검토해도 좋을 테마다. 다음에 이 문제를 살펴보자.
4. 인스톨레이션의 배경
베를린의 한스 하케 1990년 동서독의 통합에 앞서 베를린에서는 이것을 기념하는 미술전이 열렸다. 〈자유의 극한〉이라는 제목의 이 전람회는 세계에서 선발된 아티스트 11인이 베를린 각지에서 작품을 발표하는 기획이었다. 참가 작가는 크리스찬 볼탄스키·한스 하케·레베카 혼·일리야 카바코프·야니스 크네리스 등 잘 알려진 작가들이 대부분이다. 하케가 이 때 발표했던 작품은 이 작가다운 급진적인 비판 정신에 가득 차 있었다. 권력이나 기업의 추잡함을 줄곧 파헤쳐 온 그의 비판의 화살은 여기에서 벤츠 사로 향해 있다. 다임러를 모 회사로, 메르세데스를 그 자동차 부문으로 하는 벤츠 사는, 독일 최대의 기업이자 미술과 관계해서 예술 지원에 열심인 기업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그 벤츠 사가 어떻게 비판을 받았을까? 하케는 먼저 기업의 역사를 상세하게 조사했다. 조사는 마치 예리한 저널리스트 같이 했는데, 조사에 의하면 벤츠 사는 일찍이 히틀러 시대에 노동자 착취를 바탕으로 엔진 개발 등으로 군수 산업의 일익을 담당했다. 또 전후에는 남아프리카나 이라크 같은 국가들에 역시 군비 지원을 했다. 더욱이 동서베를린의 통합에 즈음해서는 동 지구의 중심이 된 포츠담 광장의 토지를 시로부터 부당하게 싼값으로 싸들이는 등 행정 당국과의 불투명한 관계가 발각되어 심한 비난을 받았다. 하케는 지금은 없는 베를린 장벽을 따라 설치되었던 감시 탑을 작품 장소로 선택했다. 이 감시 탑은 서치라이트를 갖추고, 일찍이 동에서 서로 탈출하려는 동독민을 감시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냉전시대에는 서로 도망치려 했던 적지 않은 시민들이 살해되었는데, 이 감시 탑이야말로 그러한 동독 측의 권력 장치로 운영된 것이다. 권력장치로서의 감시 탑이라면, 프랑스의 사상가 미셀 푸코가 《감옥의 탄생》에서 언급한 ‘일망 감시장치(panopticon)’이 떠오른다. 영국의 법학자 제레미 벤담의 발상이 된 이 장치는 19세기이래 감옥에서 자주 이용되었다. 그것은 고리모양으로 배치된 독방을 건물 중앙에 설치된 탑실에서 감시하는 장치로, 각각의 독방에서는 탑 속이 보이지 않지만, 감시하는 쪽에서는 각 방 안의 상태를 손바닥 보듯이 알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일방적인 지배관계를 만들어낸 것인데, 베를린의 감시 탑도 그와 유사한 성격이었다고 생각된다. 하케는 이 감시 탑의 옥상에 별 모양의 메르세데스 벤츠 트레이드마크를 걸었다. 네온에 빛나는 이 마크는 베를린 중심부에 있는 유럽센터라 불리는 쇼핑센터 빌딩 옥상에 보이는 마크와 같은 것이지만, 전쟁에 가담하고 이익 추구를 쫓는 벤츠에 대한 강렬한 비판이 이 작품 속에 들어 있다. 왜냐하면 이 작품에서는 ‘보다/보이다’라는 관계가 반대이기 때문이다. 별 모양의 마크로 상징되는 벤츠는 그 행동을 대중의 감시 하에 두고 있고, 그 의미는 푸코가 말한 파놉티콘의 구조가 뒤집혀져 있다. 아니, 그보다는 중앙에 있는 벤츠 마크가 주위의 눈에 띄는 구조는 파놉티콘보다 오히려 핍쇼(peep show 엿보는 쇼)의 그것과 통한다.
조각의 불만 베를린의 하케 작품은 동서를 분단하고 있던 벽을 가진 베를린이라는 장소 때문에 비로소 리얼리티를 획득하고 있다. 다른 장소에서는 이 작품이 성립될 수 없다는 점에서 그 장소는 이 작품에 특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작품을 위하여 특별한 장소를 찾는 일은 일스톨레이션의 경우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조각에도 특별한 장소를 찾는 움직임이 끝임 없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현대 조각은 어느 시대이건 인스톨레이션으로 향하는 움직임을 내포하고 있었다. 알기 쉬운 예가 로댕의 〈칼레의 시민〉이다. 〈칼레의 시민〉은 스스로를 희생하여 함락된 칼레 시를 구하려 했던 시민 6명의 영웅적인 행동을 기리는 작품이다. 그것은 영국 왕의 침입을 받았던 14세기의 역사에 연유한 모뉴멘트이며, 작품 공모에 응모했던 로댕에 의해 작품은 당초부터 칼레에 놓여지도록 구상되었다. 요컨대 〈칼레의 시민〉은 칼레의 역사적 문맥에 두어야 그 본래 의미를 획득하는 것이었다. 또 한 예로 브랑쿠지의 조각을 들어보자. 브랑쿠지는 작품을 놓는 장소로 자신의 아틀리에를 상정했다. 그래서 그는 미술관에서의 전시에 즈음해서 관내에 자신의 아틀리에를 전부 재현하고, 그 속에 자신의 작품을 설치하길 바랬던 것이다. 여기에서는 조각의 스케일과 공간의 관계가 문제되고 있다. 즉 그의 조각은 아틀리에의 공간을 근본으로 해서 크기가 결정된 것이며, 전시 공간이 달라지면, 그것에 걸맞게 스케일을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브랑쿠지의 조각은 오늘날 그의 희망대로 비공개되고 있는데, 아틀리에와 함께 파리의 퐁피두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처럼 어떤 특정 장소에 놓는 것을 전제로 제작된 조각을 그 공간에서 분리하여 전시하게 된 것은 근대미술관의 제도를 따랐기 때문이었다. 근대미술관의 공간은 화이트 큐브(흰 입방체)로 형용되는 중성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공간의 개성을 배제함으로써 작품의 자립성을 두드러지게 하고, 보는 사람의 관심을 작품의 조형성에 집중시키기 위한 것이다. 만약, 작품이 장소의 고유성으로부터 분리될 수 있는 것이라면, 어디에 놓이건 그 의미는 변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어서, 작품은 확실하게 자립성을 획득한다. 바로 이 자립성이야말로 모더니즘 미술의 특징이며, 작품의 코스모폴리턴적 성격을 구성해온 것이다. 자유롭게 작품을 이동할 수 있는 것은, 또 소비사회의 요청에 부응하는 것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소비사회는 모든 것을 상품화시키는데, 작품의 이동가능성이 작품의 상품성을 보증하기 때문이다. 사실 근대에 있어서 작품은 부르조아의 거실을 장식하거나 또는 미술관의 컬렉션에 들어가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작품이 특정 장소로부터 분리된 것이 예술의 상품화를 진척시켰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로댕이나 브랑쿠지의 어떤 작품이 그런 것처럼, 작가들의 제작은 종종 특정의 장소, 공간에 놓이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장소에서 분리되어 미술관이라는 장치 속에 전시된 조각은 본래 지니고 있던 의미의 일부를 잃고 말게 될 것이다. 미국의 위대한 화가 바네트 뉴만은 조각 작품도 제작했는데, 그는 그런 이유로 미술관에 놓였던 조각은 본래의 의미를 상실하고 있으며, 그림을 보기 위하여 의존하는 장치 같은 것이라고 농담처럼 말했다고 한다.
미술관을 뛰어나오는 제작 조각이 안고 있던 미술관 공간에 대한 불만은 60년대 미술의 전환기에 미술관을 뛰쳐나오는 제작으로 결실을 맺는다. 60년대의 드래스틱한 미술의 전환이라는 것은 그때까지의‘회화와 조각=미술’이라는 도식에서의 이탈을 의미하고 있다. 거기에는 회화나 조각을 이미 특권적이라고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원래 회화와 조각이 미술이라고 보는 견해는 19세기에 활발히 건립된 미술관에 의해 보증되었다. 미술관이라는 제도는 본래 소수 엘리트인 패트런에 의해 육성 보존되었던 미술을 대중에게 공개한다는 점에서 당초부터 타협적인 성격을 안고 있었다. 여하튼 작품 공개로 인해 사람들이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는 회화·조각이야말로 예술이라고 인식하게 된 것은 사실이다. 동시에 미술관의 오픈은 또한 일종의 정보 공개였으므로 본연의 미술 연구를 과학적으로 하고, 그것이 회화와 조각만이 미술이라는 이해에 지적 기반을 제공했으리란 것도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60년대에 현저해진 미술관을 뛰쳐나오는 제작으로 인해 필연적으로 미술관이라는 제도에 의해 보증되어온 ‘미술=회화와 조각’이라는 견해도 바뀌어야 했다. 그럼, 미술관을 뛰쳐나오는 제작이란 어떤 경우를 가리키는 것일까? 예를 들어 거대한 댐 같은 건축을 상상해보자. 댐은 그것이 가동되었을 때 확실히 댐으로서의 기능을 가지게 되고, 그렇기 때문에 댐이라 부를 만한 의미를 갖게 된다. 막 완성된 댐은 이름을 붙일 수 없는 건축물에 불과하다. 그것은 일찍이 본 적이 없는 인공물이며, 게다가 또 기능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탓에 보는 사람은 그 모습에 경탄한다. 기능과의 관계에서 말하면, 차라리 사용하지 않게 된 활주로 쪽의 예가 더 이해하기 쉬울 지도 모른다. 과거에 예가 없고, 게다가 지금 기능이 없는 그것은 미술이 아니지만, 미술작품에 뒤떨어지지 않는 현대 문명의 풍경을 사람들에게 줄 것이다. 실제 이처럼 전통을 가지지 않은, 기능을 빼앗긴 인공물이 몇몇 예술가의 관심을 끌었다. 조각가 토니 스미스, 그리고 대지를 소재로 한 작업, 즉 대지미술을 다루었던 로버트 스미슨(Robert Smithson, 1938∼73)과 같은 미국 미술가들을 그런 예술가로 들 수 있다. 미국 미술가들이 많은 이유는 그 나라에 공업 문명이 절정에 달했고, 그러므로 본 적이 없는 인공물이 많았다는 이유를 들어도 틀리지 않다. 그들에게 그때 미술관에 전시되는 회화·조각은 르네상스 이후의 가치관, 곧 진실·미·고전이라는 전통적 가치에 다만 의존하고 있는 작품으로 오히려 왜소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회화는 창이다’라는 말은 예로부터 해왔다. 그러나 로버트 스미슨에 의하면, 창이 회화라고 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걸맞은 내용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시 회화를 왜소하게 생각하는 작가들에게 그것은 이미 중요한 내용을 가진 특권적인 공간일 수 없다. 그때, 이 창=회화와 그 주위에 펼쳐지는 벽은 모두 평면과 선으로 환원되고 말 것이다. 그런데 현대 도시에서는 사무실에서도, 또 상점에서도, 창은 간결한 유리 격자로 이루어져 있다. 지금 이 투명한 유리의 존재를 중시한다면, 환경을 투명하게 의식할 수 있음에 틀림없다. 미술관 공간은 그런 때에 밀폐된 것이 아니고, 열려진 구조를 가지게 되며, 그 내부는 외부이고, 거꾸로 외부는 내부이기도 한 것이 아닌가? 이런 생각에 기반을 둔 미술이 미술관 외부로 뛰쳐나왔다고 설명할 수 있는데, 그 배경에는 감성적 요인과 함께 사회적 요인도 지적할 수 있다. 단적으로 말하면, 60년대 후반 체제비판이 성행했던 시대에는 모든 계층성이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회화는 그래서 미술의 정점에 서는 것으로서 규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또 미술관이 여러 보물을 사람들로부터 차단해서 밀폐한다는 권력 장치로서의 성격을 가진 이상, 역시 열려야만 했던 것이다. 권력이란 것은 모두 정치 레벨에서만 작용하는 것이 아니다. 사회는 물론 문화의 모든 세부적인 것에도 잠재하는 구조이며, 그것은 미술관이라는 문화 장치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여하튼 미술관을 뛰쳐나오는 작품은 이상과 같이 조각의 불만, 미술관이라는 장치에 대한 비판을 배경으로 나타났다고 설명할 수 있다. 특히 인스톨레이션은 그 유력한 제작 스타일이었다.
5. 모던과 프리 모던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여러 가지 인스톨레이션을 살펴보면서 독자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눈치채지는 않았을까? 사회와 강력하게 관계되는 제작, 반대로 자기 내부를 깊이 파고 들어가는 제작. 이 두개의 대조적인 작품이 보인다. 한스 하케·카바코프와 같은 작품은 말할 것도 없이 전자에 해당된다. 반대로 카프아나 터렐의 작품은 후자로 분류될 것이다. 하케와 카바코프의 작품은 각각 독일 통합과 소비에트 사회주의의 붕괴라는 근년의 격동의 국제 정세를 받아들이고 있는데, 최근 미술에는 이같이 사회와 어떤 연관을 의도하는 제작이 눈에 띈다. 이 문제를 미술의 자유주의에서 사회주의적 시점의 도입이라는 관점에서 생각해 보자. 자유주의에 있어서 사회주의적 요소의 도입이라는 것은 정치·경제 수준에서 이미 실현되고 있는 일이다. 예를 들어 경제에서는 자본주의의 폐해를 제거하기 위해 세제를 비롯한 여러 제도적 측면에서 공산주의적 정책이 취해지고 있다. 자본주의는 그 목적지에 다다를 무렵 스스로 무너진다고 말했던 마르크스의 예언이 적중하지 않았던 것은 자본주의가 현실적으로 행동해서 자신들의 결점을 수정해 갔기 때문임이 분명하다. 그럼, 미술에서 자유주의란 무엇인가? 그것은 개인의 자유를 최대한 존중하는 태도이다. 타인의 일, 사회 일은 거기에서는 생각할 필요가 없다. 애초 자본주의가 가져온 물질만능의 사회는 혐오스러운 것이기 때문에, 그 추잡한 현실에서 벗어나 작품 속에 사람에게 침해당하지 않는 성역을 구축하는 일 자체가 중요한 과제가 된다. 이상이 미술의 자유주의 이념이다. 20세기에서 모더니즘 미술은 대강 이 일을 실현하는 행위의 역사였다고 해도 좋다. 러시아의 말레비치, 칸딘스키 그리고 네덜란드의 몬드리안을 비롯, 전후 미국의 추상표현주의 화가들까지 이 흐름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프랑스의 소설가 플로베르는 예술은 쓸모 없는 것이라는 의미 있는 말을 했지만, 그것은 예술이 자기와의 대화이며, 사회에 어떤 도움이 되는가 라는 문제를 고려하지 않은 자세를 알려주고 있다. 같은 태도가 이들 화가들에게도 꼭 들어맞는 것이다. 예를 들어 말레비치는 이렇게 말했다.“미술은 이미 국가에도 종교에도 봉사하지 않는다.” 이 발언은 지금은 당연하게 들리지만, 미술의 오랜 역사를 돌이켜 보면, 혁신적인 말이었다. 왜냐하면 예전에는 종교나 세속의 권력에 봉사하기 위해 그림이 그려졌다. 벨라스케스와 같은 궁정화가의 입장을 생각해도 좋다. 또 미켈란젤로가 로마 교황의 명령으로 힘들게 바티칸 궁전의 시스티나 예배당 그림을 완성한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다. 거기에서는 제작이 단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다. 자기의 자유를 제한해서라도 왕후나 교황과 같은 성속의 권력, 또는 사람들의 기쁨을 위하여 그림을 그렸다. 완성된 시스티나 예배당 천정화나 벽화를 본 사람들이 감동했던 것은 거기에 사람들이 공유할 만한 종교의 세계가 실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비하여 말레비치가 태어난 시대는 사람들이 종교를 공유할 수 없는 시대였다. 이미 종교가 사회의 공통 기반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신을 그림에서 구했던 것이다. 자신이 그린 검은 사각형 속에서 신의 얼굴을 본다고 말레비치는 말하고 있다. 미술을 정신의 지고의 장이라 했던 이러한 태도는 사회의 반응을 헤아리지 않는다. 애초부터 그것은 정치 경제 사회를 초월하는 것이기 때문에 당연하다.“당신은 작품이 사람들을 감동시키는가 어떤가에 관심이 있습니까?” 이렇게 질문을 받았을 때, 미국의 추상표현주의 화가 클리포드 스틸(Clifford Still)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아니,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그런 일은 만화가 하는 것이다.”“그럼, 당신은 당신 자신을 위해 그림을 그리는 것인가?" “그렇소." 세속과 동떨어진 미술. 그것은 예술을 이해하는 사람만 이해하면 좋은 것으로 자리매김한다. 이러한 태도는 당연히 미술의 수용 층을 한정시키고, 엘리트주의를 초래한다. 미술은 대중과 동떨어지고, 개인적이며, 자칫 혼자만 잘 난 행위가 되며, 때로는 나르시시즘에 빠진다. 그러므로 사회는 예술가를 마치 미친 사람처럼 이 세상의 맨 끝에 있는 인종이라 간주했다. 마르크스주의가 이 철저한 개인주의에서 자본주의 문명이 다다랐던 불모와 퇴폐를 본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전위미술은 사람들의 생활에 공헌하지 않는다. 예술에는 더욱 사회적인 역할이 존재할 터이다”라고 마르크스주의는 주창한다. 이러한 주장에서 생겨난 사회주의 미술은 그러나 큰 결함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메시지만 강하고, 프로파간다가 되며, 예술성이 뒤떨어지는 것이었다. 스탈린 시대의 소련미술의 품질이 이 사실을 실증하고 있다. 지나친 자유, 개인주의는 그러나 오늘의 사회에 여러 가지 문제를 던지고 있다. 환경 파괴, 자원 고갈, 사람들의 고독, 공공심 결여, 정치 무관심. 성장의 한계를 알고, 다른 사람과의 공생을 구하는 삶의 방식이 이러한 폐해를 제거하기 위해 필요하게 되었다. 현재의 사회 시스템이 지나친 자유주의를 수정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미술에서도 또 개인의 자유 구가와, 사회가 요구하는 공통의 가치나 도덕과의 조정이 필요하게 되었다. 한스 하케 유의 작품은 자기의 세계는 아니고, 이 세계가 어떤 것인가를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사회성을 가진 미술이라 할 수 있다.
프리모던에 대한 시점 제임즈 터렐의 작품은 현대미술에서 하나의 흥미 깊은 시점을 제공한다. 그것은 그의 작품이 보는 사람을 인도하는 다른 세계란, 어떠한 세계인가라는 것과 관계가 있다. 빛이 가져다주는 그의 작품의 신비한 체험은 아마도 근대라는 틀에서 사람들을 해방시키는 것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근대라는 것은 어떤 일이든 수량화해야 하는 합리적 세계관에 의해 특색지워지지만, 빛이 옛날부터 사람들을 매료시켰던 신비한 힘을 잃지 않은 것은 현대인이 빛의 소용돌이로 구성된 우주공간으로 끝없는 동경을 품고 있다는 것으로 증명할 수 있다. 역시 터렐은 자신의 작품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예술가는 오랫동안 빛에 매료되었다. 나는 단지 빛에 대한 그림만을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겔트 사람 또는 이집트 사람 또한 남서부의 인디언이 살고 있는 장소에도 우주를 향한 빛의 이벤트를 동반한 작품이 있다. 이것들은 이젤을 사용하는 회화에 앞서 이루어진 것들이다.” 이젤 회화는 약 5백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우주를 향해 발신하는 빛의 이벤트는 훨씬 오랜 기원이 있다. 그 유구한 시간을 응시하는 시점이 아마도 터렐의 작품에 개방감을 가져오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있는 시점은 모던에 앞선 시대를 의미하는 프리모던이라 할 수 있다. 프리모던을 시야로 받아들이는 미술은 모더니즘에 막다른 길이 보였던 60년대에 현저하게 이루어졌다. 독일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요셉 보이스의, 물질의 제시로 인간과 사회를 개혁하려는 연금술사를 연상케 하는 작품이 그 예가 된다. 또는 프리모던의 시점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로서 미국의 대지미술가 로버트 스미슨의 〈나선의 제방〉을 들어도 좋다. 1970년 유타주에 있는 그레이트 솔트 레이크에 제작된 이 제방이 나선형을 하고 있는 것은, 태고에 이 호수가 지하수로로 태평양과 연결되어, 그 때문에 호수 면에 소용돌이가 생겼다는 전설을 상기시키기 위해서다. 이 작품을 본 사람들은 설령 그것이 사진이긴 하더라도, 그 전설을 반추함으로써 태고의 시간과 대화한다. 그것이야말로 작품이 담당하는 프리모던의 성격이라 할 것이다. 과거 10년 간 일본의 유력한 작품도 이러한 프리모던의 성격이 농후한 것이었다. 토다니 세게오(戶谷成雄)의 〈숲〉 연작, 또는 둥근 고리를 사용했던 엔도 토시카쯔(遠藤利克)의 〈에피타프〉 등의 작품이 그것에 해당한다. 함께 나무를 주 소재로 하는 두 사람의 제작은 과연 모더니즘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토다니의 젠소로 뚫은 구멍의 반복, 엔도의 원, 사각형이 보여주는 미니멀한 형태가 그것이다. 그러나 토다니의 경우, 작품의 의도는 동아시아 특유의 풍토나 문명의 기층을 드러내려는 데 있다. 또 엔도의 조각은 태고의 세계에 갖추어져 있던 카오스, 혼돈으로의 충동을 품고 있다. 두 사람의 제작 의도는 이처럼 합리주의가 지배하는 근대 이전의 세계를 사정거리에 두고 있다는 점에서 프레모던의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이다. 모더니즘의 종말이 이야기하게 되면서 이러한 프레모던의 관점을 지닌 작품은 이 책의 제3장에서 접하게 될 포스트모더니즘 미술과 함께, 아니 일본의 경우에는 그 이상으로 현대미술의 중추 역할을 하고 있다.
6. 미디어 아트
도쿠멘터Ⅸ의 주목할 작품 1992년 카셀 도쿠멘터에서 특히 주목받은 제작은 비디오 아트다. 게리 힐, 빌 비올라 같은 미국작가들의 작품이 많은 관객의 흥미를 끌었다. 게리 힐의 발표에는 좁고 긴 암실 속 좌우 벽에 각각 7개씩 모두 14개의 영상이 떠오른다. 각각의 영상에는 남녀노소가 한 사람씩 비추어지고, 각각이 앞뒤로 갔다가 되돌아오는 왕복운동을 되풀이한다. 맞은 편에서 흔들흔들 흔들리면서 걸어오는가 하다가도 발길을 되돌려 역시 흔들리는 걸음걸이로 물러난다. 다가왔다가 멀어지는 그 14인의 모습은 마치 관중 한 사람 한 사람이 이 암실에 들어와서는, 회장을 떠나가는 광경과 겹친다. 그러나 이 작품은 비추어진 인물들이 어떤 시스템으로 인해 되돌아오는지 알게 되면 더욱 흥미로울 것이다. 그것은 때마침 관중이 이 영상에 주목했을 때, 이곳을 향하거나 등을 돌리는 동작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 방에는 아무래도 보는 사람의 움직임을 탐지하는 장치가 갖추어져 있어, 그 반응에 따라 방향 전환이 일어나고 있을 것이다. 인간의 움직임에 반응하는, 그것은 저 유명한 공룡 티라노사우루스의 행동 패턴을 생각하게 된다. 이러한 작품에서는 관중이 일반적으로 작품을 수용하는 것이 아니다. 관중도 작품의 존재에 참가하고 있으며, 그 의미에서 쌍방적 투웨이다. 이것에 비해 빌 비올라의 작품은 오히려 영상 그 자체의 높은 질에 매력이 있었다. 역시 암실 속의 매우 큰 스크린에 비추어진 모노크롬의 영상은 물질의 세부 운동을 확대한 듯한 생성감이 흘러 넘치며, 음향 효과와 어우러져 숭고함이라 해도 좋은 체험을 보는 사람에게 주고 있다. 비디오를 사용한 두 사람의 작품은 미술이 회화, 조각 같은 전통적인 미디어만 아니라 일취월장하는 새로운 미디어에 의해 새로운 시대를 맞고 있다는 느낌을 안겨 준다.
비엔날레의 백남준 도쿠멘터Ⅸ에 이어서 비디오 아트의 현재를 알렸던 것은 93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백남준의 작품이었다. 한스 하케와 함께 이 때 독일 대표로 뽑혔던 백남준은 좌우 양 날개의 넓은 공간을 사용해서 박력 있는 두 개의 비디오 인스톨레이션을 전시했다. 한 작품에는 중앙의 발판에 설치된 42개의 프로젝터에서 주위의 벽 둘레와 천장에 어지럽게 변화하는 영상들이 투사된다. 마이크를 가진 요셉 보이스가 있는가 하면, 바다 가운데의 물고기 떼도 있으며, 누드도 있다. 바로 이런 영상의 바다는 그 빠른 변화 템포에 맞춘 음악의 비트와 서로 어울려 전시장의 흥분을 고조시킨다. 영상에는 보는 사람의 신경에 작용하는 독특한 감각의 질이 갖추어져 있다. 더구나 프로젝터에서 벽에 투사된 영상과 수상기에 비추어진 그것은 관중에게 색다른 감각을 느끼게 한다. 독일 관 좌측 날개의 또 다른 공간에서는 수상기에서 피어나는 빛의 바다를 체험하게 된다. 〈일렉트로닉 수퍼하이웨이〉라 이름 붙인 이 작품은 가로 폭 30미터, 높이 7미터의 벽에 약 2백50개의 텔레비전 모니터가 빽빽이 채워져 있다. 직사각형으로 또는 비스듬하게 배치된 모니터들은 컴퓨터의 프로그램에 기초하여 4개 내지 5개의 시스템으로 변하고, 인체인지 존 케이지인지 영상이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그 끊임없는 흐름은 음향과 서로 어울려 역시 관객을 흥분시킨다. 백남준이 이러한 대규모 인스톨레이션을 시도한 배경에는 각국의 작품이 북적거리는 비엔날레라는 장에서는 자신의 작품이 다른 작품보다도 강한 임팩트, 자극을 가진‘볼거리’가 아니면 관중의 주의를 끌지 못한다는 계산이 있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동시에 이것은 미술에 대한 어떤 사고에 기초한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오늘의 사회 원리와 원칙이 된 자본주의에서 예술가의 역할에 대한 그의 통찰이다. 한스 하케가 같은 자본주의를 문제로 삼으면서 이것을 비판해마지 않았음에 비해 백남준은 대조적으로 그 원리의 근본에서 사회를 어떻게 발전시킬까, 거기에 예술가는 어떻게 참가할 것인가를 생각한다. 베니스 비엔날레에 즈음해서 간행된 카탈로그에서 백남준은 인터뷰에 응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오늘날의 유럽·미국·일본이 불황인 이유는 사람들이 이미 무엇이든지 모두 사버렸기 때문이다. 세탁기든 무엇이든 그들은 모든 하드웨어를 소유해버렸다. 이제 아무 것도 사고 싶은 것이 없다. 새로운 소프트 개발과 전쟁으로 인한 파괴만이 자본주의를 다시 작동시킨다. 그러나 전쟁은 역시 바람직하지 않기 때문에 적어도 예술가란 닌텐토의 텔레비전 게임보다도 더 뛰어나고, 더 깊은 무언가를 만들어 사회를 구해야 한다. 1930년대의 예술가는 자본주의에 적대 관계였지만, 90년대는 그 구제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베니스 비엔날레에 출품한 백남준의 작품은 이러한 의도에 근거한 하나의 실험이었다고 할 수 있다.
포스트 휴먼 백남준의 발언 중에서 닌텐토의 텔레비전 게임이 인용된 것은 실로 흥미롭다. 엑사이팅한 패미콘 게임만이 아니라, 오늘의 텔레비전이나 비디오는 2, 30년 전에는 생각하지 못했던 진보된 오락을 제공하고 있다. 그 대중문화의 압도적인 힘 앞에 예술도 때로 체통을 잃고 있다. 아니, 대중문화뿐만이 아니다. 사무실에 가득 찬 전자 기기를 비롯, 사회의 모든 국면에서의 하이테크화는 그 속에서 사는 인간의 감각·심리 그리고 도덕에 변화를 가져다 줄 것이다. 변화하지 않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오늘날의 환경에서는 인간상도 불변일 수는 없고, 또한 예술의 의미도 일정할 수 없다. 휴머니즘을 하나의 원리로 삼았던 근대미술에 대해 이제 도래할 사회로부터 버려질 성 싶은 자의 외침도 아울러 포스트휴먼의 미술이 이야기되는 까닭이다. 하이테크 사회에서 예술은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가? 특히 전자 테크놀로지의 진보에 그 발전이 좌우된다는 점에서 비디오·텔레비전·패미콘과 베이스를 같이 하는 비디오 아트의 경우 그 미래는 어떻게 그려질 것인가? 우선 대답은 백남준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예술은‘더 뛰어난, 더 깊이 있는 것’이 아니면 안 된다는 사실이다. 그가 이 문제에 대해 나에게 말해 준 것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사회가 진보하면 우리들 비디오 아티스트가 살아 남는 길이 있는가 라는 것이 문제가 된다. 그러나 산업은 기본적으로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목표로 하는 것임에 비해 인간에게는 개성이라는 것이 있고, 어느 시대이건 여러 사람이 있다. 비디오 아트는 그 다양한 사회 안의 일부를 사람들을 향해 제시할 수 있다. 그것은 마이너리티의 문화일지도 모르지만, 거기에는 대중 상대의 비디오와는 다른 더 양질의 문화가 제공될 수 있을 터이다.” 확실히 이렇게 선택할 수 있는 여러 문화가 있고,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을 거기에서부터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어야 진보된 사회라 부를 수 있다. 비디오 아트는 여러 문화 중 하나라 할 수 있는데, 그럼 구체적으로 어떠한 형태로 그 다름과 좋음이 드러나는 것일까? 백남준은 앞으로 비디오 아트의 향방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비디오 아트는 단지 보는 것만으로는 시시해질 것이다. 역시 투웨이(커뮤니케이션)이고 재미있는 작품이 나올 것이며, 또 가상현실도 바로 그런 것이 될 것이다.” 기계와 대화하는 투웨이 시스템이나 실제의 흔들림을 동반해서 다른 차원의 공간을 여행한다는 가상현실의 공간은 역시 이제까지의 인간상을 서서히 바꿔갈 것이라는 점에서 포스트 휴먼이 미술에 도입될 것은 분명하다.
http://artinculture.co.kr/webzine/wzine_2200_content.asp?idx=299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