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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백성호
㉘ 예수 당시 로마의 황제는 신이었다
예루살렘 성전의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의 반감이 더욱 커졌다. 예수는 서서히 그들의 표적이 되고 있었다. 예수는 종교성에만 매달리는 유대의 율법주의를 향해 공격을 퍼부었다.
바리사이들은 발끈했다. ‘어떻게 하면 말로 예수님께 올가미를 씌울까’(마태오 복음서 22장 15절) 하고 머리를 굴렸다. 결국 자신의 제자들을 예수에게 보내 이렇게 묻게 했다.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합당합니까, 합당하지 않습니까?(마태오 복음서 22장 17절)
“예!”라고 답해도 올가미에 묶이고 “아니오!”라고 답해도 올가미에 묶인다. 세금을 내라고 하면 ‘유대의 반역자’가 되고, 세금을 내지 말라고 하면 ‘로마의 적’이 된다. 바리사이들은 그 점을 노렸다.
예수 당시 예루살렘 성전이 있던 자리에 지금은 이슬람의 황금 모스크가 들어서 있다. 이슬람교를 창시한 무함마드가 이곳에서 승천했다고 해 이슬람교 3대 성지 중 하나로 꼽힌다. 황금 모스크 바로 앞에 통곡의 벽이 있다. 백성호 기자
예수는 이 물음에 숨겨진 올가미를 꿰뚫어 봤다. 그리고 세금으로 내는 동전을 가져오라고 했다. 당시 데나리온 동전의 앞면에는 로마 황제의 얼굴이 새겨져 있었다. 예수는 이렇게 되물었다. “이 초상과 글자가 누구의 것이냐?” 그들은 “황제의 것입니다”라고 답했다.
그러자 예수가 답했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드려라.(마태오 복음서 22장 21절)
그 유명한 “가이샤의 것은 가이샤에게(Caesar the things which are Caesar’s)”라는 구절이다.
당시 로마는 여러 신을 섬기는 다신교 사회였다. 로마 황제는 그 많은 신 중 하나로 여겨졌다. 로마인에게는 어차피 신이 여럿이므로 별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유일신을 믿는 유대인에게는 달랐다. 식민지 백성으로서 로마에 세금을 바치느냐 마느냐 하는 차원이 아니었다. 우상을 섬기느냐 마느냐의 문제였다.
유대인들은 오직 하느님에게만 제물을 바쳤다. 그런데 로마의 식민지가 되면서 농작물과 세금 등을 로마 황제에게도 바쳐야 했다. 거기에는 ‘로마의 신’인 황제에게 바친다는 의미가 녹아 있었다. 그러니 로마에 세금을 내는 일 자체가 유대인에게는 씻을 수 없는 치욕이었다.
바리사이들은 정확하게 그 지점에 올가미를 놓았다. 그러나 예수는 걸려들지 않았다. 예수는 명쾌한 답을 내놓았고, 바리사이들조차 그 말에 감탄하며 돌아설 정도였다.
정통파 유대인들이 통곡의 벽 앞에 와서 기도하고 있다. 유대교의 안식일은 토요일이다. 백성호 기자
플라비우스 요세푸스가 쓴 역사서 『유대 고대사』에는 이와 관련된 일화가 기록돼 있다. 로마가 파견한 유대의 총독 빌라도가 로마 황제가 그려진 군기를 한밤중에 예루살렘으로 들여오려고 했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목숨까지 내놓으며 농성을 벌였다고 한다.
이유는 하나였다. 자신들의 종교적 신념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십계명에 기록된 ‘우상 숭배’ 금지 항목 때문이었다. 구약에는 “너는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든,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든, 땅 아래로 물속에 있는 것이든 그 모습을 본뜬 어떤 신상도 만들어서는 안 된다”라고 명시돼 있다.
유대인들은 집 안의 창살이나 창틀에도 문양을 새기지 않았다. 헤롯 안디바의 궁전은 동물 형상으로 장식됐다는 이유로 유대인들이 불을 지르기도 했다. 황제의 얼굴이 새겨진 군기는 우상과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황제에게 세금을 내야 하나, 말아야 하나라는 질문은 치명적인 독을 품은 올가미였다.
충돌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율법주의자들은 예수를 잡기 위해 계속 올가미를 놓았다. 급기야 예수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경고했다.
율법 학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긴 겉옷을 입고 나다니며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즐기고,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잔치 때에는 윗자리를 즐긴다. 그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으면서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한다. 이러한 자들은 더 엄중히 단죄를 받을 것이다.(마르코 복음서 12장 38~40절)
예수는 율법주의자와의 논쟁을 피하지 않고, 하늘의 이치로 그들을 꾸짖으며 일깨우려 했다. 제임스 티소의 작품.
예루살렘 도성에서도 예수는 파격적인 가르침을 멈추지 않았다. 성전의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예수를 표적으로 삼기 시작했다. 죽음의 그림자가 점점 예수에게 드리우고 있었다.
짧은 생각
모세가
하늘로부터 받았다는
십계명 돌판에는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계명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우상 숭배 금지,
거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상 숭배가
진리를 가리기 때문입니다.
우상으로 인해
진리가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세가 받은 십계명에는
우상을 섬기지 말라고
돼 있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계명은
하나의 철칙이 되고 맙니다.
우상 숭배 금지는
절대적 명령이 돼버립니다.
사람은 대부분
우상을 밖에서 찾습니다.
눈에 보이는 상징물,
손으로 만져지는 석상만
우상이라고 생각합니다.
간혹
경직된 사고를 하는 기독교인이
절에 가서
불상을 모신 법당에
불을 지르는 불상사도
이런 맥락에서
벌어지는 일입니다.
그들은
우상 숭배 금지라는
절대적 명령만 알지,
왜 우상을 섬기지
말라고 했는지는
묻지 않습니다.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이유는 명쾌합니다.
진리를 찾기 위함입니다.
진리를 가리는 장애물을
치우기 위함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그런 우상은
밖에만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내 안에 있을 때가
더 많습니다.
나의 고집과 욕심 때문에
하느님(하나님)의 뜻이
보이지 않을 때가
더 많습니다.
그런 순간마다
우리는 어김없이
신의 뜻이 아니라
나의 뜻을 섬기고 있습니다.
나의 뜻에 가려서
신의 뜻이 보이지 않는 겁니다.
그때는
무엇이 우상입니까.
그렇습니다.
하늘의 뜻을 가리고 있는
나의 아집이 바로 우상입니다.
나는
하늘의 뜻보다
나의 아집을 더 섬기고 있으니
말입니다.
우상을 섬기지 말라.
저는 여기에
아주 깊은 뜻이
담겨 있다고 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우상을
무너뜨리고,
우리 안에 깃든
하느님을 만나라는
간절한 메시지라고 생각합니다.
바깥에 있는
수많은 우상을
모두 무너뜨린다 해도,
내 안의 우상이
그대로 남아 있다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는
죽었다 깨어나도
내 안의 하느님을
만날 수 없겠지요.
나의 우상이
끝없이
진리를 가릴 테니 말입니다.
그래서 물음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에 담긴
모든 메시지,
예수가 던진
모든 메시지.
그 모든 메시지에
“왜?”라는 물음을
던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더 깊은 영성.
더 깊은 깨달음,
더 깊은 평화를
길어 올릴 테니 말입니다.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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