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문으로 섬기는 자의 상태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니라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 하는바 악은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7:14-20).
7장의 내용이란 몇 마디로 아니,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 할지니라”(6) 하는 한 구절로 요약이 된다 하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는 같은 내용을 다른 방향에서 반복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구제불능의 “죄인”이라는 점을 깨닫는 것이 그처럼 어렵고도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14-24절 안에는 “나”라는 인칭(人稱)이 무려 22번이나 등장합니다. 그러면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14) 하고, 탈출(脫出)하기 위해서 몸부림을 치는 “나”라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바울 자신을 가리키는가? 바울 자신이라면 과거의 경험을 말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현재 그가 겪고 있는 갈등인가?
사도는 그가 “누군가”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가 “어떤 상태(狀態)에 처해있는 사람인가”를 보여주려는 것입니다. 둘째 단원에서는 “율법은 선한 것”이라고 하고, 먼저 율법을 옹호했습니다. 그런데 셋째 단원에서는 율법주의자들에게, “의문의 묵은 것”으로 섬기려고 한다면 어떤 상태에 놓이게 되는가를 보여주려는 것입니다.
①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14) 합니다.
㉠ “죄 아래 팔렸도다” 하는 “나”는 누군가? 이런 문제들은 호기심을 끌만하고 또 궁금하기조차 합니다만, 그렇다고 해도 사도가 이 문단에서 말씀하려는 바는 이런 것들이 아닙니다.
㉡ 로마서는 경탄할 만큼 논리적인 서신입니다. 따라서 말씀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 갑니다. 그러하기 때문에 이 논리성과 문맥을 놓치게 되면 길을 잃고 중심주제에서 이탈하게 됩니다. 사도는 13절에서 율법을 주신 목적을,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 함이니라” 하고 말씀했습니다.
② 그런 후에 14절에서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하고, “나”라는 사람을 등장(登場)시키고 있는 문맥입니다.
㉠ 이런 문맥으로 보면 이 문단에 22번이나 등장하는 “나”라는 사람은,
㉮ 첫째는, 율법을 통해서 “죄가 드러남”을 당한 사람, “죄로 심히 죄 됨”을 인하여 탄식(歎息)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 그런데 둘째는, “의문의 묵은 것”으로 해결해보려고 몸부림을 치고 있는 상태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③ 눈으로 볼 수 없는 사람의 내장(內臟)을 CT 촬영을 통해서 관찰하듯이, 사람 속에 죽은 듯이 숨어 있는 죄성(罪性)을 드러내고, 파헤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속에” 라는 말이 4번이나 반복적으로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 17절에서,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하고,
㉡ 18절에서도,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하고,
㉢ 20절에서도,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하고 고백합니다.
④ 사도는, “죄가 죄로 드러나게 하고,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 함”(13)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줌으로 죄의 사악성을 깨닫도록 적용을 시켜주고 있는 것입니다.
㉠ 그래서 인칭(人稱)을 일인칭(一人稱) 단수인 “나”라고 표현하면서, 그것도 현재 시제(時制)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는 “나” 라는 말을 속사포를 쏘듯이 우리 심장(心臟)을 향해서 무려 22번이나 퍼부어대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가 왜 이런 방식으로 진술하고 있을까요? 그의 의도하는 바가 어디에 있다고 여겨집니까?
⑤ 그 의도하는 바는 로마서 7장의 이 문단을 대하는 사람이면 동서고금, 누구를 막론하고, “본문이 말씀하고 있는 <나는, 바로 나다>” 하는, “죄가 죄로 드러나게 하고,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는데” 있는 것입니다.
㉠ 그리하여 이 사람으로 하여금,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9) 하고, 항복을 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25) 하고,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7장의 사람으로 하여금,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하고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도록”(6) 8장으로 인도하려는 것입니다.
⑥ 사도는 3:21절에서,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하고 선포한, “하나님의 의”, 즉 복음을 계속 붙잡고 있는 중인데,
㉠ 7장의 사람은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워보려고 몸부림을 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점을 살펴보면,
㉮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14), 이는 병명의 여지가 없는 노예상태입니다.
㉯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치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15), 이것이 죄의 노예 된 자의 속박입니다.
㉰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17), 죄라는 상전이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는 것, 이것이 죄 아래 팔린 자입니다.
㉱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18), 이것이 죄 아래 팔린 자의 무능입니다.
㉲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바 악은 행 하도다”(19), 이것이 죄 아래 팔린 자의 슬픔입니다.
㉳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20), 이것이 죄 아래 팔린 자의 신세입니다. 노예는 자기 의사와는 관계없이 주인이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21),
㉵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23), 이는 생포가 되어 끌려오는 절망적인 상태를 의미입니다.
㉶ 급기야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24) 하고 비명을 지르기에 이릅니다.
⑦ “하나님의 의”는 바로 이런 사람에게 필요한 복음(福音)입니다. 사도는 이 사람에게,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다”는, “하나님의 의”를 입혀주려는 것입니다.
㉠ 이상에서 살펴 본 바대로 7장의 사람은,
㉮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6:18) 한 사람이 아닙니다.
㉯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자로”(6:11) 여기고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6:14) 하고, 굳게 서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6상)의 사람이 아닙니다.
㉲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5) 한 사람입니다.
㉳ 이 사람은 자신을 “죄 아래 팔렸도다(14),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온다”(23) 하고 말하는, 노예요, 포로인 것입니다.
㉡ 성경은 “구스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 있느뇨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렘 13:23) 하십니다. “전적타락, 전적무능” 한 인간이 의지할 것은 “하나님의 의” 외에는 달리는 소망이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⑧ 한마디로 14-24절의 사람은,
㉠ “영(靈)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7)의 사람이 아니라,
㉡ “의문(儀文)의 묵은 것”으로 섬기고 있는 사람의 상태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분명합니까?
⑨ 그러므로 7장의 사람처럼 정죄감에 사로잡혀서 탄식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3:21절로 되돌아가지 아니하면 아니 됩니다. 그 사람은 지금까지 사도가 증거한 복음의 영광스러움을 올바로 깨닫지 못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 이 문단을 통해서 우리가 또 하나 확고해야할 점은, 율법은 우리에게 의롭다함만을 주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성화까지도 주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 그러므로 결론은 “그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 지니라”(6하) 한, 7장을 해석하는 열쇠로 귀결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의문으로 섬기는 자의 상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