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1376년, 염불마저 없어진 곳(無念處)이 생사 벗어난곳 – 나옹 화상
<자료 1> 경기도 양주군 회천면 회암리 회암사(현재 모사품)
지관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리편)
각련(覺璉), 『나옹화상어록(懶翁和尙語錄)』
고리나라(高麗國) 왕의 스승(王師) 대조계종사 大曹溪宗師 선교도총섭 禪敎都摠攝으로 지혜를 부지런히 닦고(勤脩本智), 조사의 바람을 일으키고(重興社風), 나라를 복되게 하고, 세상을 도운(福國祐世) 보제普濟 존자 · 시호 선각禪覺의 탑 글(塔銘)과 머리말.
전 조영대부朝列大夫 정동행중서성征東行中書省 좌우사랑중左右司郞中 추충보절 推忠保節 동덕찬화공신同德贊化功臣 중대광重大匡 한산군韓山君 예문관사藝文館事 겸 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 신臣 이색李穡이 왕명을 받들어 비문을 짓고,
수충찬화신공輸忠贊化功臣 광정대부匡靖大夫 정당문학政堂文學 예문관藝文館 대제학 大提學 상호군上護軍 제점提點 서운관사書雲觀事 신臣 권중화權仲和 교지에 따라 주사舟砂로 전액篆額과 글씨를 쓰다.
1) 공민왕 때 왕의 스승이 되다.
현능玄陵(공민왕)께서 왕위에 오른 지 20년 만인 1370년 9월 10일 스님을 개경으로 맞아들여 16일에 스님이 주석하는 광명사에서 2종宗 5교에 속한 여러 산사의 납자들이 스스로 얻은 바를 시험하는 공부선功夫選 고시장을 열었는데, 스님도 나갔고 임금께서도 몸소 행차하여 지켜보았다.
스님은 향을 올린 뒤 법상에 올라앉아 말씀하기를 “고금의 함정(窠臼)을 깨트리고, 범인과 성인의 업적을 모두 쓸어버렸다. 납자 생명의 근본을 베어 버리고, 중생의 의문 그물(疑網)을 함께 털어 버렸다. 부리는 힘은 스승의 손아귀에 있고, 변통하는 수행은 중생의 근기에 있다. 3세 부처님과 역대 조사가 교화 방법은 같은 것이니, 이 고시장에 모인 모든 스님은 바라건대 사실대로 질문에 대답하시오”라 하였다.
이에 모두 차례로 돌아가 대답하되 긴장된 모습으로 몸을 구부려 떨면서 진땀을 흘렸으나 모두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어떤 이는 이理는 통하였으나 사事에 걸리고, 어떤 이는 한 말을 되풀이하고 이치에 닿지 않는 말을 이러쿵저러쿵 지껄이다가 한 마디 질문에 갑자기 물러가기도 하였다. 이 광경을 지켜본 공민왕의 얼굴빛이 언짢은 듯이 보였는데, 마지막에 환암幻庵 혼수混脩 선사가 와서 3구三句와 3관三關에 대한 물음에 낱낱이 답하였다.
스님은 이 공부선 고시가 끝나고 회암사檜嵒寺로 돌아갔다. 1371년(공민왕 20) 8월 26일 공부상서 장자온張子溫(?~1388)을 보내 친서 · 직인 · 법복 · 발우들을 보내 “왕 스승(王師) 대조계종사大曹溪宗師 선교도총섭禪敎都摠攝으로 본디 지혜를 부지런히 닦고(勤脩本智) 조사의 바람을 일으키고(重興社風) 나라를 복되게 하고 세상을 도운(福國祐世) 보제普濟 존자”라는 칭호와 함께 왕사로 책봉하였다. 어이 송광사 동방 으뜸 도량이므로 왕명으로 그곳에 머물러 살도록 하였다.
1372년 가을에는 갑자기 “세 산과 두 강 사이(三山兩水之間)에서 머물라는 지공指空 스님의 수기가 떠올라, 곧 화암사로 옮기려 하였는데, 때마침 왕의 부름을 받아 화암사 법회에 나아갔다가 거기에 머물러 달라는 청을 받았다. 스님이 이르기를 ”돌아가신 스승 지공 스님께서 일찍이 이 절을 더 세우려 하셨는데 전쟁으로 불타 버렸으니 그 뜻을 계승해야 하지 않겠는가?”하고, 대중 스님과 협의하여 전당殿堂 넓히는 공사를 하여 1376년 (우왕 2) 4월에 크게 낙성법회를 열어 회향하였다. 이때 대평臺評 벼슬을 하는 유생儒生이 불교가 왕성함을 시기하여 ”화암사는 서울과 매우 가까운 거리이므로 청신사와 청신녀들이 밤낮으로 왕래가 끊이지 않고, 혹은 지나치게 맹신하여 생업을 폐하는 지경에 이르니 금지하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교지를 내려 나옹 스님을 서울과 멀고 외딴곳인 형원사瑩原寺로 가서 살도록 하였다.
2) 입적하니 산꼭대기에 오색구름이 덮이고, 3일간 신비한 빛이 비쳤다.
그리하여 출발을 재촉하여 가던 도중 스님이 병이 났다. 출발 당시 가마가 삼문三門을 나와 못가에 이르러 스님 가마가 열반문을 지날 때 여러 대중이 무슨 까닭인지 의심하면서 큰 소리로 울자 스님께서 그들을 돌아보시고 말하기를 ”노력하고 또 거듭 노력하여 내가 슬픔에 잠겨 중도에 그만두는 일이 없도록 하라. 나는 가다가 마땅히 여주(驪興)까지만 갈 것이다“라고 하였다. 한강에 이르러 호송관인 탁첨卓詹에게 이르기를 ”내 병세가 심하니 뱃길로 가자“하여 배로 바꾸어 타고 7일간 거슬러 올라가 여주(驪興)에 이르렀다. 이때 또 탁첨에게 부탁하기를 ”며칠만 머물러 병을 다스리고 떠나자“라고 하니 탁첨이 그 뜻을 받아들였다. 신륵사에서 머물고 있는데, 5월 15일에 탁첨이 또 출발을 독촉하므로 스님께서 이르기를 ”그것은 어렵지 않다. 나는 곧 이 세상을 떠날 것이다“라하고, 이날 진시辰時에 조용히 입적하였다. 군민들이 바라보니 산꼭대기에 오색구름이 덮여 있었다.
다비가 끝나고 타다 남은 유골을 씻으려는 순간,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에서 사방 수 백 보 안에서만 비가 내렸다. 사리가 155알이 나왔는데, 기도하니 558과로 분신分身하였다. 뿐만 아니라 대중들이 재 속에서도 얻어 개인이 스스로 몰래 감춘 것도 헤아릴 수 없었으며, 3일간 신비한 빛을 비추었다. 석달여釋達如 스님 꿈에 화장장 불사르는 곳 밑에 서려 있는 용을 보았는데, 그 모양이 마치 말과 같았다. 상주를 태운 배가 화암사로 돌아오는데, 비가 내리지 않았는데 갑자기 물이 불어났으니, 이 모두가 용의 도움이라 했다.
8월 15일에 부도를 화암사 북쪽 언덕에 세우고, 정골사리頂骨舍利는 신륵사에 탑을 세워 간직(厝藏) 하였으니, 열반한 곳임을 기리기 위해서이다. 이처럼 사리를 밑에 모시고 그 위에 돌 종으로 덮었으니, 감히 누구도 손을 대지 못하게 함이다. 스님이 입적한 사실을 조정에 보고하니 시호를 선각禪覺이라 내리고, 신臣 색穡에게는 비문을 짓고 신 중화仲和에게는 주사로 비문과 전액을 쓰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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