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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향 원문보기 글쓴이: 박소향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다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겅루 앞에 선
내 누님 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이 시는 아주 많이 읽히고 있고 또 그만큼 좋은 시임에 틀림없다.
한 송이 국화꽃은 어머니가 길러 내는 한 사람의 훌륭한 자식이라 해도 좋고 한 예술가가 만든 불후의 명작이라 해도 좋다. 어쨌든 어떤 새로운 창조적인 작업에 있어서 그것이 지닌 탄생의 아픔을 아주 적절한 비유로 표현한 것이다.
1915년에 전북 고창군에서 태어난 서정주는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후 아주 많은 시를 써왔다. 그리고 정부수립 후부터 그는 서서히 한국 시단에서 가장 대표적인 시인의 자리를 굳히기 시작했다.
그가 대표적인 시인이 되어 대학에서 시를 가르치고 문예지에서 시인 추천을 하니 그의 제자가 많아질 수밖에 없다. 아마도 그만큼 많은 시인들을 시인으로 등단시키고 많은 후배들이 따르는 영광을 누린 사람은 그밖에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는 말하자면 우리나라에서 시인으로서 가장 성공하고 출세한 셈이다. 그의 고향인 전북 고창군의 선운사(禪雲寺) 입구에는 그를 기념하는 시비(詩碑)가 세워져 있어서 관광객들의 눈길을 끌게 한다. 그리고 이 나라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닌 사람이면 누구나 그의 시를 교과서에서 배웠기 때문에 <국화 옆에서> 같은 시가 누구의 것인지 모른다면 그는 해방 후 이 나라에서 학교를 안 다닌 사람으로 봐도 좋을 것이다.
흔히 ‘가난한 시인’이란 말들을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대표적으로 꼽힐 만한 시인들은 대개 일찍부터 대학 교수직을 얻었기 때문에 가난하지는 않다. 교수직을 갖고 제자들을 가르치며 사회적으로도 어디서나 대접받을 수 있는 유명 시인, 원로 시인이 되고 수많은 후배 시인들이 받들어 모신다면 이 세상에 시인으로 태어난 사람으로서 이 이상 더 무엇을 바랴랴!
그러면 이 같은 시인으로서의 출세는 어떻게 해서 가능해진 것일까?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인생론적인 입장에서 이 시인이 걸어온 길을 더듬어 보면 이 사회에서의 출세의 방법으로서 한 가지 비결을 알게 되는 것 같다.
시인으로서 출세하려면 물론 시를 잘 써야 한다. 그런 점에 있어서 이 시인은 이 나라의 대표적인 몇몇 시인에 들어갈 가치가 있다. 그만큼 우수한 시인의 감각과 기교를 갖추고 있으며 일제시대부터 써왔으니 작품량도 많은 셈이다. 그리고 어떤 평론가는 그를 세계적인 시인으로 떠받들기도 했다.
그러나 이 땅에서 출세한다는 것은 자기가 타고난 재능만으로는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특히 지식인의 경우는 그렇다. 그가 처음 활동하던 일제시대를 생각해 보자. 한용운, 이육사, 이상화, 윤동주 등은 모두 다 일제시대에 죽어 버리고 말았다. 그들이 해방 후까지 살아 남았다면 그들이 남긴 일제시대의 저항적인 시와 함께 누구보다도 먼저 이 나라에서 존경받는 대표적인 시인이 되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들은 저항을 했기 때문에 오래 살지 못한 것이다. 감옥에서 죽거나, 아니면 투쟁적인 생활에서 육신이 오래 견디지 못하고 병들어 죽은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누가 장차 이 세상에 오래 남아 출세의 영광을 차지하게 되는지 짐작하게 된다. 이육사 등이 아무리 위대한 시를 썼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정의감을 갖고 불의에 맞서는 이상 생명은 오래가지 못한다. 그러니까 출세가 될 까닭이 없다.
<국화 옆에서>를 쓴 시인은 시인의 재능도 있었지만 이 같은 난국에서 살아남는 기교도 훌륭했다. 아니 그냥 살아남는 정도가 아니었다. 시인으로서도 살아남는다는 것은 침묵으로도 가능하다. 일제에 대하여 비난도 하지 않고 빼앗긴 들에도 봄이 온 것을 한탄하지도 않고 그냥 입 다물고 있어도 생존은 가능하다. 그런데 이 시인은 너무 많이 글재주를 일제의 전쟁도구로 헌납했다.
지원병들의 뒤를 이어서 인제부터 젊은 사람들은 스물 한 살만 되면 부절(不絶)히 일어서서 일본제국 군인으로서의 자기를 단련해 갈 것입니다. 제국군인! 앞으로 이렇게 하여 십년만 지내면 거리 위엔 허우적거리는 나태하고 서글픈 반도의 청년은 한 사람도 없을 것 아닙니까, 아! 이 얼마나 찬란한 감격의 때에 우리는 태어난 것입니까?
(1943. 10. <조광>)
이 글은 <스무 살 된 벗에게>란 그의 글에서 마지막 부분을 인용한 것이다(한자는 한글로 고치고 맞춤법도 고쳤음.). 제목과 작자의 이름은 붓글씨를 그대로 사진동판으로 떠서 정중하게 모셨는데, 그 내용은 ‘가나우미’라는 청년의 글을 받고서 그를 칭찬하고 격려하며 한반도의 모든 징집대상자들에게 어서 나가서 일제를 위하여 싸워서 죽으라고 선동한 것이다. 일제의 태평양전쟁이 제국주의 침략전쟁이요 이에 대한 적극적인 협력이 우리 민족에 대한 배반인 이상 이 당시 이 시인이 선택한 길은 큰 과오임에 틀림없다.
단, 이런 경우에 그를 사랑하는 수많은 이 땅의 문인들은, 아니 사랑과 존경은 하지 않더라도 그들은 내게 이런 변호를 해준다. 그 당시의 일제의 억압이 얼마나 컸으며, 거기서 나약한 문인들이 얼마나 겁에 질렸었을지를 생각해 봐야 한다고, 그리고 우리 자신이 그런 위치에서 일제로부터 그런 글을 쓰라고 요구받았다면 거부할 사람이 몇이나 있겠는가 하고, 아마도 이 말은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일제 말기의 공포분위기에서 한 사람의 나약한 시인이 겁에 질려서 썼다고 하더라도 몇 가지 의문은 남는다. 그때 역시 시인들은 많았는데 왜 이 시인이 그처럼 남보다 많이 썼느냐 하는 것이다. 당시에는 이보다 더 나이 많고 더 많이 알려진 유명시인들이 많았으며 이 시인의 존재는 별로 주목받을 만한 것이 될 수가 없었다. 그는 그때 겨우 30대를 바라보며 아직 20대에 머무르고 있던 시인이었고, 세상에 별로 주목받을 만한 작품도 없었으니까, 그런데 왜 그가 그렇게 특별히 친일문학을 잘한 사람이 되었을까?
둘째는, 더욱 의심스러운 것은 그 친일 문학에 있어서의 친일의 밀도다.
제국군인! 앞으로 이렇게 하여 십년만 지내면 거리 위엔 허우적거리는 나태하고 서글픈 반도의 청년은 한 사람도 없을 것 아닙니까, 아! 이 얼마나 찬란한 감격의......
다시 인용해 봤는데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글이다. 이 시인을 한국인으로 이해하려고 할 때 전연 이해가 불가능한 것이다. 그는 여기서 한국 청년들이 나태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이제 제국군인이 되니까 이렇게 십년만 지나면 한국 청년들은 부지런해질 것이라는 논리를 펴고 있다. 한국 청년이 게을러도 보통 게으르다는 지적이 아니다. 제국군인이 되어서도 10년쯤 지나면 그때에야 부지런해질 것이란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일제하에 살던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으니 그들을 붙들고 물어 보자. 다시 우리 조상이 남긴 모든 업적과 기록을 통해서 물어 보자. 한국인이 언제 나태하였던가?
한국인은 지금도 너무 부지런해서 외국에 나가면 오히려 극성스러운 한국인이라고 비난을 받기도 한다. 외국에 진출한 한국인들은 세계 도처에서 하루 8시간 근무가 따로 없고 공휴일이 따로 없다. 남들이 놀고 잇는데 한국인 상점만 문이 열려있고 남들은 춤추고 노는데 한국인 회사의 사무실만 밤늦도록 불이 켜져 있고 너무 빠른 속도로 돈을 벌어 나간다. 일부 외국인들은 이런 한국인을 무서워하고 비난마저 하고 있다. 이것이 오늘의 한국 청년들인데 일제시대로 돌아가 보자. 그들이 만일 학교를 다니고도 빈둥빈둥 놀고 있었다면 그것이 한국인의 나태 탓인가? 모든 것을 다 빼앗긴 한국인들이 그 악랄한 수탈정책 밑에서 얼마나 모두들 일자리를 못 얻고 빈곤 속에서 절망해 있었는지, 그리고 서민들이 일자리를 얻었다면 그것은 대개 일본인들이 부리는 자리였다.
거기서 가난한 임금에 발길질을 받고 온갖 모욕을 받으며 늘 한국 청년들이 일본인들로부터 듣던 욕이 ‘나마께모노’였다. ‘게으른 놈’이라는 욕, 그들은 한국인을 그렇게 닦달하며 혹사했다. 최서해 작 <큰물 진 뒤>의 주인공 윤호도 하루 50전짜리 흙일을 겨우 얻어서 하다가 감독한테 발길로 채이고 코피가 터지고 해고당한다. 그때 그는 지게 다리가 부러져서 잠시 멈춘 것 때문에 역시 꾀부리고 게으름 핀 놈으로 간주된 것이다.
‘나태한 놈’이란 말은 항상 지배자가 피지배자에게, 부리는 자가 부림을 받는 자에게, 주인이 종놈에게, 그들을 최대로 착취하기 위해서 하는 말이다.
<스무 살 된 벗에게>라는 제목에서 한국 청년을 징병제 실시에 적극 협력하도록 선동하더라도 거기서 가려 써야 할 말이 있다. 일본인들이 이 글을 읽고 어찌 생각했을까? 자기네한테 협력하는 것도 좋았겠지만 한국의 시인이 그처럼 한국 청년을 게으른 자들이라고 비난하며 이제야 제국군인이 되어 십년만 기합을 받으면 정신 차릴 것이라는 논조의 이 글을 썼으니 그들은 오히려 이 글의 임자를 경멸하지 않았을까?
아무리 친일을 해도 왜 이렇게 자기 민족을 헐뜯으며 했을까?
친일행위를 한 문인들은 많다. 그 중에는 적극적 가담자와 소극적 가담자가 있다. 그리고 민족에 대한 배반정도나 작가로서의 나약성 정도 등에 따라서 이들은 더 몇 단계로 세분화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그 중에서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적극적인 가담자다. 그런데 적극적인 가담자의 대표자격인 이광수도 우리 민족에 대하여 가장 모욕적인 게으름뱅이란 욕을 하지는 않았다.
우리의 ‘세계적인 시인’이라고까지 평론가에 의하여 격찬 받아온 사람의 문제점은 거기에 있다. 즉, 우리 민족을 헐뜯으면서 적극적으로 친일을 한 문인은 오직 이 한 사람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또 한 가지 이 글에서 나타나는 그의 과오는 허기진 우리 민족에 대한 고의적인 외면과 비정한 무관심이다.
거리에서 ‘허우적거리는 나태하고 서글픈 반도 청년’은 그들이 실직자였다는 사실만으로는 설명이 충분치 않다. 현진건은 <운수 좋은 날>에 나오는 김첨지는 언제부터 굶었는지, 어쨌든 그날도 완전 공복상태로 인력거를 끌고 나와서 비를 맞고 달린다. 앞의 <큰물 진 뒤>의 주인공도 역시 굶은 상태로 지게를 지고 있다.
20년대의 이 같은 굶주린 민족의 모습은 40년대가 되면 일부의 농민이나 도시 빈민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보편적인 현실로 나타난다.
식민지 수탈행위가 패전을 앞두고 극한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그 무렵에 거리에서 방황하던 젊은이들은 일부를 빼고는 모두 그처럼 허기진 사람들이었다. 당대의 시인이 그것을 몰랐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누구나 모두 자기 눈으로 보는 일상적 현실이었으니까, 그러므로 그들을 나태한 반도 청년들이라고 비난한 것은 고의적인 진실의 왜곡이며 동족의 고통에 대하여 너무도 비정한 무관심이다.
이 게으르고 비겁하고 깨끗한 척하면서도 사실은 한정 없이 인색한 놈아, 이제야 겨우 스무 살밖엔 되지 않은 소년들도 총칼을 들고 제1선에 나서서 눈 둘 곳을 찾아야 하는데, 너는 십년 동안을 대체 어디서 먹은 나이냐! 일어나거라 네가 비겁하고 헛되이 오만한 고슴도치의 죽엄을 면할랴거든 지금이 그때다. 어서 일어나거라!
여기서 말하는 바 “게으르고 비겁하고......”는 이 시인이 자신을 책망하는 말이다. 거리의 ‘게으른 반도청년’이 그 시인이 본 한국의 민중을 말한다면 ‘게으르고 비겁하고 깨끗한 척’하는 시인 자신은 민중을 내려다보고 있는 당대의 지식인의 한 사람이다. 그런 뜻에서 그는 자기 자신을 책망하는 간접적 화법에 의하여 당대의 지식인 모두를 “게으르고 비겁하고 깨끗한 척 하면서도 사실은 한정 없이 인색한 놈”이라고 비난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면서 특히 자신에 대한 침회론적 질책으로 감격의 눈물을 치솟는 듯한 선동적인 문장을 쓰고 있다. “어서 일어나거라!”하고 외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시인이지만 그 무렵에 <최체부(崔遞夫)의 군속 지망>이라고 소설도 발표하고 있다(1943. 11. <춘추>). 시로서는 ‘사이판도(島) 전원 전사의 영령을 맞이하여’라는 부제가 붙어있는 <무제>가 있고, <반가(反歌)>가 있고, <항공일(航空日)에>가 있으며 이것은 모두 일본문이다. 그리고 아아 가장 감격적으로 써서 바친 시는 <마쓰이 고쬬(松井伍長) 송가(頌歌)>일 것이다. ‘한또(半島)노 센징(鮮人)’으로서 감히 가미까제(神風) 특공대의 영광을 얻고 천황폐하가 하사한 술잔을 마신 후 전투기에 올라타서 마침내 전사했다는 그를 찬양한 시다.
머리털이 샛노란 벌레가튼 병정을 실코
우리의 땅과 목숨을 빼스러 온
원수 영미국(英美國)의 항공모함을
그대
몸둥이로 내려쳐서 깨였는가?
깨뜨리며 깨뜨리며 자네도 깨졌는가!
......
아아 레이테는 어데런가
몇 천길의 바다런가
귀 기울이면
여기서도 력력히 들려오는
아득한 파도ㅅ소리......
아득한 파도ㅅ소리......
(1944. 12. 9 (매일신보)>
그런데 이 감격적인 시는 1944년 12월 9일이니까 패망하기 반년 전에 씌어진 것이다. 이탈리아도 망하고 독일도 망하고, 그래서 사이판도에서는 전원이 몰살당하고, 마지막으로 가미까제 특공대의 육탄돌격이라는 광적 안간힘만 남았는데 이 시인은 마지막까지 이런 시를 써서 바치고 있다. 그리고 이듬해 여름에 일제는 패망하고 우리는 해방된 것이다.
역사가 바뀌면 반드시 여기에 따르는 것이 있다. 억압당한 정의가 그때 되살아나고 역사의 심판이 따르는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 문학사에서는 이광수 한 사람을 역사적 심판의 제물로 삼았을 뿐 그 밖에 적극적인 가담자 일부가 잠시 반민특위에 끌려갔다가 풀려났고 이 시인에겐 아무 일도 없었다.
일제가 패망하기 직전까지 무슨 일을 했든 간에 그는 계속해서 시인의 재능을 발휘해 나갔다. 해방되자마자 시집 <귀촉도(歸蜀道)>(1946)를 내어 칭찬을 받고, 정부가 수립되자 문교부 예술과장에 취임한다. 대한민국 최초의 예술과장이다. 그리고 계속해서 문단의 대표적인 시인으로서 자리를 굳히고 소위 시인이 세속적으로 누릴 수 있는 거의 모든 영광을 한몸에 지닌다. 우리는 국어 교과서에서 그의 이름 그의 작품이 일제시대에 민족을 위해 혹독한 고문을 받아가며 저항하다가 해방도 못 보고 죽어간 시인들과 나란히 실력 있음을 보게 된다. 우리는 누구나 모두 그 교과서로 공부했으며, 거기서 참고서를 통하여 그가 국가의 훈장까지도 받은 것을 모조리 암기한다.
우리는 여기서 한 시인이 걸어온 미묘한 길을 통하여 삶의 방법에 대한 특수한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실로 인생의 출세문제와 아울러 연구해 볼 만한 많은 가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어느 개인에 대한 흥미가 아니다. 우리가 여기서 봐야 할 것은 ‘한국이란 무엇인가?’ 또는 ‘한국인이란 무엇인가?’하는 것이다. 그 같은 미묘한 삶이 있었다면 그것은 반드시 그 같은 삶을 있도록 허용해 온 환경에 문제가 있다. 양심을 말하고 순수를 말하고 아름다움을 말하는 대한민국의 숱한 지식인들이 불의와 타협화고 야합하고, 무사주의자, 이기주의자, 도피주의자가 되고 있지 않았다면 그런 한 개인의 특이한 삶도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책임은 우선 이 같은 우리들 자신에게도 있는 셈이다. 그 많은 사람들은 하나의 단합된 힘을 소유하고 있다. 그래서 어느 누군가가 올바른 진실을 밝히려 하면 그들은 까마귀 떼들처럼 한데 몰려들어서 그의 생존을 위협한다.
정의를 배반한 자와 그들과의 야합집단이 너무도 큰 세력으로 뿌리를 내려왔기 때문에 그처럼 별난 시인의 삶도 있을 수 있게 되는 셈이다.
그러나 우리들 중 많은 사람들을 그 같은 야합집단으로 단정하려면 그들에게 그 같은 적당주의적 삶을 요구해 온 역사적 배경이 더 큰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이다. 해방 후 미군은 친일분자들을 미군정청의 요직에 앉히고 이승만은 그들과 야합해서 정치적 세력을 구축해 나갔다. 그 동안에 김구를 비롯한 진정한 민족주이 세력의 기둥들은 하나하나 암살 제거되고, 일제하의 악질 경찰간부들은 해방된 조국 땅에서 정치적인 고문행위를 다시 시작하고 이승만을 지원했다.
반민특위가 백주에 이 같은 최고 경찰간부의 지시로 습격당하고 그 뒤에 이승만이 있으니 세상은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다. 세월이 흐르면 역사가 바뀌고 정의의 심판이 있다는 만고의 진리는 적어도 한국의 역사에서는 진리가 아니었다. 친일문인들이 해방 후에 친일에 대한 심판을 받지 않고, 이광수를 제외한 거의 모두가 무사하게 가고 싶은 길을 갈 수 있었던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리고 이렇게 역사의 심판이 없는 나라임이 입증되므로 말미암아 다수의 후배들도 이 나라의 풍속에 적응해서 살아가는 습관을 기를 것이다. 우리는 북한의 나쁜 것을 너무도 많이 알고 있지만 해방 후 그곳에서는 친일파에 대한 심판이 따랐었다. 입이 열 개라도 우리는 이에 대하여 스스로를 변명할 아무런 구실도 못 갖고 있다. 공산주의를 싫어하던 많은 순수문학인들까지도 월북해 버린 것을 보면 우리의 역사적 과오는 짐작이 갈 것이다.
김우종 (김우종문학평론집 순수문학비판 19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