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ON
연암연구소 소장 능재(能在) 이선웅 박사 (사)한민족역사연구소(The Institute of korean History) 총무이사 글_박정원 사진_이정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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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연구소 소장 능재(能在) 이선웅 박사 (사)한민족역사연구소(The Institute of korean History) 총무이사
5천 년 이래 최고 문봉이자 실학사상가인 박지원 선생의 삶, 21세기 오늘에 승화, 선진도덕사회 건설 위한 개혁 분위기와 환경 조성, 국민 의식고양 이끈다
“우리 한민족의 바른 역사 연구 통해 민족의 정통성과 자주성회복에 기여한다” 정부의 외국국토순례 기획, 국난극복현장 탐방, 역사체험으로 잃어버린 한민족역사 재조명 ? 나는 믿는다. 역사는 현재에 남아 있는 미래라고……. 지나간 것을 현재의 사람이 읽는 것이며 또, 과거의 것을 미래의 눈으로 보고, 짓고 하는 것이기에 내가 그 가운데요, 과거와 미래는 이어져 있다. 모두 지금 이야기임이 분명하다. ? 군인들은 평시는 훈련하고 전쟁이 나면 적과 싸워야 하는 생사의 현장에 서 있지만, 군대 밖으로 나오니 교활함으로 뒤덮인 밀림이라는 생각을 했다. 전역하고 재취업의 문 앞에서 오히려 ‘박사라는 학력의 벽’에 부딪쳐 고배를 마시기도 했다. 군 시절, 한 생명을 잃어보고서 새 생명들의 소중함과 살아가는 것에 대한 감사함을 알았다.
국가수호시설의 역사적 가치 조사 연구, 한민족 정신 계승 위한 연구 이선웅 박사는『論語』〈學而篇〉의 子貢曰: "貧而無諂, 富而無驕, 何如?" 子曰: "可也. 未若貧而樂, 富而好禮者也."를 통하여 자신의 철학을 피력했다. 해석하여 보면… 자공이 "가난하면서도 아첨하지 아니하고, 부유하면서도 교만하지 않다면 어떠하겠습니까?"라고 여쭈어 보자 공자께서 "괜찮기는 하나 가난하면서도 즐길 줄 알고, 부유하면서도 예를 좋아하는 것만 같지는 못하느니라."라고 대답하셨다. 능재(能在) 이선웅 박사는 도덕적 존재인 인간이 가난과 부에 언행이 달라진다면 그보다 비참한 일이 있을 수 없으며, 모름지기 인간은 겸손과 배려, 예의와 양보를 갖추어야 한다고 인생철학을 논했다. 이 박사는 현재 연암연구소 소장으로서 (사)한민족역사연구소(The Institute of koreans History, 소장 최용호) 총무이사로 근무하고 있다. 그리고 (사)전쟁과 평화연구소가 서울시로부터 위탁받아 시행하고 있는, 교사 학부모 학생들에 대한 국난극복의 현장탐방과 대한민국 역사박물관 추진사업의 일환으로 현대사 분야별 자료조사를 연구용역 받아 진행하고 있다. 지난 6월 1일 전쟁기념관에서 열린 국가수호시설의 재조명을 위한 세미나를 통해서는 전적기념물의 효율적 관리와 등급화를 주장하기도 했다. 연구소는 한민족의 역사연구와 탐방, 학술자료의 외국어판 발간 및 국제교류 사업을 추진한다. 연암연구소는 5천 년 이래 최고의 문봉이자 실학사상가인 연암 박지원(1737~1805) 선생의 삶을, 21세기 오늘에 승화해 보고자 하는 바람에서 첫걸음을 시작했다. 연암이 ‘낭환집' 서문에서 “螳螂自愛滾丸, 不羨驪龍之如意珠. 驪龍亦不以如意珠, 自矜驕而笑彼?丸”라고 했다. “제 말똥을 사랑하는 말똥구리는 여의주를 부러워하지 않으며, 용 또한 자기에게 여의주가 있다고 말똥구리의 말똥을 비웃지 않는다.”는 것이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자신이 가진 것에 무의미한 것은 없기에 서로 비웃거나 부러워하지 않고 어울러 사는 것이다. 이 박사는 연암의 말처럼 생긴 대로 이용후생(利用厚生)하고, 법고창신(法古創新) 하는 노력을 하고자 했다. 공자(孔子)가 교육에 우선을 두고 백성을 부유하게 할 것을 강조하고, 맹자(孟子) 또한 민산(民産)을 풍부하게 하는 것을 왕도(王道)의 필수조건으로 여긴 점과도 일맥상통한다. 연암은 눈을 믿지 말고 마음의 눈으로 세상을 보라고 권고했다. 진리란 꼭 눈에 보이는 곳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삶의 의미가 자신의 생각에 달려 있고 내 마음에 예수가, 부처가 있는 것과 같은 이치라 할 수 있다.
두루 살아가는 사람의 진솔한 삶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곳, ‘굿꼴테’와 ‘염암연구소’ “지금이다. 이 사람이다. 이야기다. 굿꼴떼이다.” 이 박사가 오늘날 내세운 삶의 모습이다. 그의 블로그와 카페를 대변하는 ‘굿꼴테’의 ‘굿’은 무속신앙 ‘굿’을 말하지만 ‘풀자’라는 의미이며, ‘꼴’은 ‘꼬라지’, ‘떼’는 ‘무리’를 말한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 두루 살아가는 사람의 진솔한 삶의 이야기가 무엇보다도 귀하고 중요한 것이다. 그는 피눈물의 깊은 골짜기를 지나고 울음소리 가득한 삶을 보듬고 살았다. 그래서 ‘울음’과 ‘웃음’은 한 줄에 매달린 것이라고 했다. 과거(科擧)를 포기하고 글을 통하여 부패하고 잘못된 사회구조들 바꾸고자 한 연암의 노력은, 지금 이 시대에 절실히 요구되고 있는 자화상이다. 연암을 통한 실학사상과 그 메시지를 오늘에 되살려 선진도덕사회 건설을 위한 개혁의 분위기와 환경을 조성하고, 국민의 의식고양을 이끌어내고자 한다. 연암연구소는 연암을 통해 사회행복지수를 높이고자 하는 분들과 소중한 교류를 원한다. 연암연구소 터의 시작은 미미하지만, 장차 동참하는 분들의 다양하고 폭넓은 이야기들로 재미나고 멋진 정신적 세계가 구축될 것으로 믿는다. 이 박사는 1957년 1월 7일(음력) 경남 함안에서 출생했다. 부유한 가정에서 어려움을 모르고 자라다가 한창 공부할 나이인 사춘기에 집안이 몰락하고, 혼자의 힘으로 삶을 해결해야만 했다. 칠서초등학교에 입학하여 마산 완월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마산 동중학교에 입학, 수영선수생활을 하면서 당시 전국체전에서 동메달을 획득하기도 했다. 운동과 공부에 가능성이 활짝 열려 있었고, 모 고등학교도 수석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먹을 것조차 없었다. 그렇지만 그런 일들은 그저 집안 사정일 뿐이었다. “부모님은 초등학교 5학년 때 우수한 성적과 두뇌를 믿으셨던지, 기울어져 사는 가세에도 칠서에서 마산으로 유학을 보내주시고, 사회의 동량이 되라고 보이스카우트까지 시키셨다.”면서 “아… 그때 공부만 할 것을, 시골에서 좀 산다고 무게 잡던 그 시절을 돌이킨다면 보이스카우트 같은 것을 하지 않겠지만, 학교 대표로 나가서 국민교육헌장 발표의 현장에서 국민교육헌장을 암송하고 당시의 박정희 대통령과 악수한 기억은 참 좋았다.”고 말했다. 한때 범어사의 말사인 영구암으로 출가해서 산중의 아침과 저녁을 오래도록 체험하고, 부처님에게 아주 귀의한 듯 살았다. 아버지의 사업실패와 그로 말미암은 별세. 인생에 대한 고뇌를 한창 공부에 전념해야 할 고등학교 2학년 정도에 많이 했다. 그러한 고뇌와 방황으로부터 얻은 결론은 누구도 나를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 후의 이야기는 하고 싶지도 않고, 잊을 수 있다면 기억에서 지워버리고 싶다. 지금도 출가 수행한 그때의 사진을 보며 가끔 인생의 허무함을 생각한다.
해군포털사이트에 ‘오늘의 한자이야기’ 6년간 일일연재, 해군과 해병대가 인정하는 지식인 이 박사는 1977년 해병대 정보통신병과로 입대했는데, 군의 정규교육과 보수교육에 거의 수석을 차지하였고 자신의 업무에 충실하여 통신지원우수부대, 무사고부대의 주역이 되기도 했다. 이는 어느 경우이든 최선을 다하는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주었던 결과이다. 다방면의 재능이 있었던 그는 1987년 국군방송모니터를 하고 마라톤도 완주에 도전하여 성공했으며, 출가의 경험이 인연이 되어 불교대학과 대학원을 마치고 장병법회를 주관하기도 하고, 대중 불교 결사운동과 대원회의 김포지구 간사를 맡는 등 신행 활동에 열중했던 시절도 있었다. 방송통신대학교에서는 교육학을, 대학원과정에서는 역사학을, 박사과정은 국어국문학을 전공하여, 연암 박지원의〈열하일기 연구-문학적 특성을 중심으로〉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해병대 사령부에 근무하면서 토?일요일을 이용 한국서당교사연수원을 5년여 다니며. 각종 최고의 한자자격증과 국가공인 한자?한문전문지도사 훈장자격도 받았다. 한문교사중앙연수원의 기수별 회장을 하고, 제6대 한서회 회장을 역임했다. 해군포털사이트를 이용해 ‘한자이야기’를 6년간 일일연재하고 해군과 해병대에서는 나름 알아주는 한자박사(?)로 통했다. 총장의 지시로 그동안 연재했던 이야기를 모아 출판도 하고, 신문과 방송에도 출연해보았다. 여러 방면에서 지식인으로 통했던 이 박사는 백령도에 근무 시 군의관이 ‘말라리아’를 ‘백혈병’으로 오진한 탓에 백령도에서 긴급 후송되고, 죽음의 문턱에서 크고 작은 삶의 흔적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는 절박한 상황을 경험했다. 그때가 인생을 정리하는 시간을 가져본, 절호의 기회였으며 진심으로 유서를 써 보았는데 “그 때의 문장이 최고였다.”고 한다. 당시 집사람도 급성간염으로 백령도에서 후송되어 백령의 그 큰 병원에 집사람을 혼자 입원시키고 간호하기도 했다. 그 때 이 박사 내외를 돌보아 준 동료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고마움에 보답하고자, 백령도의 유일한 사찰인 흑룡사에서 주민과 학생을 대상으로 한문강의를 했다. 이 같은 일이 신문에 보도된 후에는 여러 장애인단체 등에서 성금을 내라는 전화가 빗발치고, 모 단체에서도 상장을 준다고 하면서 금전을 요구하여 인생의 어려운 방정식을 다시 한 번 실감했다고 한다. 인간만사새옹지마(人間萬事塞翁之馬)라고 했다. 김포에 근무할 때는 생각만 해도 바람 가득한 풍선에 바늘을 댄 것 같이, 모든 것이 순간에 빠질 듯하며 생각조차 옮기기도 싫은, 가슴에 묻혀 파낼 수도 없는 일이 있었다. 그는 닿기만 해도 터질 듯한 고통의 사연들을 너무 세계 묶어 두었기에 아직 다 풀어 본 적이 없다고 한다. 차라리 더 밝은 세상에서 총명함으로 웃는 날을 기다려 보는 것이 현명한 일이라면서, 시간이 모든 것을 자연스럽게 해결해 주길 바라고 있었다. 부인의 허약함으로 해병대 사령부에서 정년을 채우지 못하고 31년 만에 전역한 이 박사는 “군인들은 전쟁이 나면 적과 싸워야 하고 먼저 쏘고 맞히지 못하면 죽기 때문에 죽이는 것을 배우지만, 군대 밖으로 나오니 교활함으로 뒤덮인 밀림에서 서로 잘 살면서도 죽이는 야생의 법칙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털어놓았다. 믿었던 사람들에게 아프게 모은 돈을 맡기고 받지 못한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큰 아이가 심장수술을 받은 것도 아무것도 아니었다. 교활한 수법에 할 말을 잃었다. 그동안 안전하게 삶의 틀이 되어준 군대에서 방호막이 없는 사회에 나온 이 박사는 뭔가 배우는 것을 무척 좋아하지만, 궁극적인 목적은 험난한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배우고 또 배우면서… 배우면서 진리와 해답을 찾는 것이라고 했다.
집사람은 보살이면서 천사, 이웃에서는 “저 집이 잘못되면 하늘이 없다”고 했다 이 박사는 어머님과 장모님을 모셨다. 어머님은 몰락한 집안의 한(恨)에 대한 ‘눈물’도 다 흘리지 못하시고 일찍이 군대 생활 중에 돌아가셨다. 한잔하시면 부르시는 노래는 ‘못 견디게 괴로워도 울지 못하고…’ 이다. 워낙 졸병 시절이라 부조 한 푼 받지 못해 섭섭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훨씬 전에 돌아가셨는데, 그리움이 가득 맺혀 요즘은 남의 부모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조차 부럽다고 한다. 지금은 감사할 양가 부모님도 안 계신다. 장모님이 노환과 치매로 누우시고 돌아가시기까지 집사람은 이 박사의 어머니에게 보살이었듯이 장모님에게도 천사였다. 같이 목욕시키며 모든 외출을 같이 하길 6여 년, 그리고 세상을 떠나셨다. 장모님이 돌아가시기 전, 모든 경조사의 부조와 부의를 하는 대상에 특별한 의미와 구분을 두지는 않았다. 그러나 장모님 장례식 후에는 조문해준 명단을 기준으로 한다. 이 박사는 ‘집사람은 사랑이 가득한 사람’이라고 하였다. 이 박사는 탐방 등의 행사에서 자신의 울타리이자 에너지인 아내를 ‘박안해’로 소개한다. 이웃들은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고 효도하는 부부를 보고 “저 집이 잘못되면 하늘이 없다”고 말할 정도로 ‘항상 같이 다니는 부부’로 통할 만큼 동고동락했다. 철없던 연애 시절의 일화도 들려주었다. 고등학교 시절 지금의 부인을 보고 어느 날 첫눈에 반한 이 박사는, 하교하는 지금의 아내를 한 번 더 보기 위해 자전거를 타고 기다리다가 또 한 번 더 보기 위해 마산의 자산동에서 자전거를 타고 시내버스를 따라서 회성동까지 먼저 달려가 쳐다보고 돌아오기를 여러 번 하였단다. 동갑인 부부는 철없이 만나 철 지난(?)부부로 잘살고 있다면서 웃었다. 이 박사는 “길다면 긴 세월,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집사람과 같이 쉬고 싶다.”면서 “하루는 지루할 때가 많았지만 평생은 빠르다.”고 했다. 이제는 ‘끊는 법’을 실천하며 “아이의 탯줄을 끊어내듯 끊으면서 사는 것이 인생을 잘사는 길인 것 같다.”고 허심탄회한 심경을 털어놓았다. 배우는 것을 좋아하는 만큼 산지식을 널리 알리는 것을 좋아하는 이 박사는 그동안 대학의 특강과 러브하우스 자원봉사, 충효교실, 한자교실, 문화강좌, 문화탐방, 유적지순례 등 수많은 강의를 했는데, 그 활동상이 언론에 보도되어 유명인이 되어 보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뜬구름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집사람은 원래 약한데다가 가슴에 묻은 아픔으로 생긴 알 수 없는 병명과 ‘공황장애’로 긴 세월 고생했다고 한다. 이 박사는 그런 부인을 위해 가까운 곳으로 전출을 요구하였는데 묵살 당했다. 그래서 즉시 전역을 결심하고 용감(?)하게 전역지원서를 냈다. 해병대에 같이 입대한 동기생보다 3년 정도 일찍 나온 셈인데, 전역지원서의 사유란에 ‘집사람을 위하여 하고 싶은 일과 공부를 위하여’ 라고 사실 그대로 적었다고 한다. 마지막 황금 같은 시기에 그는 내 던질 줄 아는…, 더 소중한 것을 위하여 소중한 것을 버리는 용기를 실천한 것이다. 그리고 그 기념으로 ‘신혼여행이라는 이름’을 붙여 중국과 베트남을 여행했다. 지금 생각해도 ‘참 잘한 일’ 이라고 했다.
한 번뿐인 인생, 다만 웃을 수 있고 후회 없이 산다면 백억으로 보상이 되겠는가! 인생에 대해서 자신의 입으로 말할 수 없는, 그 무엇의 원인을 알고 싶어 동양철학(운명학)을 2년여간 수강하며 공부도 해보았다. 하지만 “인생은 정해져 있지 않음으로 운명을 참고할 뿐, 내가 정한 길이 내 길이며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나라는 사실만 확인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원래 배우기를 좋아하지만 잘 까먹는 관계로 이 박사는 반복하는 것을 공부의 첩경으로 삼는다. 어디든지 격을 따지지 않고 배우러 다닌다. 누구에게 무엇인들 못 배울 것이 무엇인가. 그의 말 한마디 한 마디에 명품사람으로서의 품격이 절로 배어 나왔다. 이 박사는 한자교육진흥회의 경기지부장으로서 한자자격시험 관리를 하고 있다. 고전을 공부하고자 하는 이들을 위한 논어강좌와 경기도 민원모니터, 수원 지방검찰청 시민위원, 아동성폭력 관찰관, 역사사랑 모임회원, 경기문화연대 운영위원, 수원시 권선구 주민참여예산 행정분과위원장과 시위원으로서 사회의 일부에 자원봉사로 관여하며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군 생활 중에도 항상 몇 명의 아이들을 가르쳤던 이 박사는 강화도 청소년수련장에서 어린이학교를 운영하기도 했다. 김포의 청룡사와 강화도 무애원에서는 설봉 스님이 희사한 법당에서 매주 장병 법회를 주관하고, 성지순례를 기획하고 김포청년회를 조직했으며 애기봉행사를 진행하는 등 불교적 신념과 의지가 강했다. 그는 재미있게 배우기를 좋아한다. 반복을 공부의 첩경으로 생각하여 교육받고 교육한 것들을 순서 없이 생각나는 대로 이야기한다. “장차는, 아니 지금부터라도 문학과 역사, 철학이 있는, 사람 살던 시대의 이야기로 다니고 싶다. 그리고 이야기를 듣고 싶다. 블로그와 카페의 특이하고도 인상적인 이름 ‘굿꼴떼’처럼 사람과 어울려 풀면서 살고 싶고, 그냥 배우는 것 자체를 배우고자 한다. 배우는 것 자체를 내 인생이라고 여긴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좋아하는 한시(漢詩)라면서 한수 읊어 주었다.
山中答俗人이라 산중에서 세상사람에게 답하다 問余何事栖碧山고 나에게 묻기를 왜 푸른 산에 사느냐고 笑而不答心自閑을 웃기만 하고 대답하지 않으니 마음이 저절로 한가롭다 桃花流水杳然去하니 복숭아꽃이 물 따라 묘연히 흘러 가버리니 別有天地非人間이라 이곳은 인간세상 아닌 별천지라네.
2008년 5월부터 한자교육진흥회의 경기 남부지부장을 맡으면서 ‘한자는 사람을 명품으로 만든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지만, 생각을 고치지 않고 융통성 없이 외곬으로 산다는 것은 어쩌면 정체된 물과 같은 삶이 될 듯해서, 조심스레 한자사업에서는 손을 놓을까도 생각중이지만 쉽지가 않다고 한다. 학교 다니기를, 강의 듣는 것을 좋아하는 그는 불교인이지만 기독교의 ‘아버지학교’도 다녔다. 별난 학교, 별난 강의는 거의 꿰뚫어 놓치지 않는다. 한 가지를 열심히 하여야 할 터인데, 다 알고 싶음에 자신을 제어할 수 없단다. “아버지학교는 좋은 점도 많지만, 너무 가벼운 아버지를 만드는 듯하다.”고 살짝 귀띔해준다. 사람의 삶은 강 위에서 나룻배를 타고 가는 것과 같은 것일 것이라면서 아내가 아파서 자주 여행을 다니곤 했다는 이 박사! 그는 박사학위를 받고도 공부를 또 하고, 배우러 다닌다. 그리고 나름의 글을 써 보리라 다짐한다. 박사학위를 위하여 목매달아 밤을 새우며 살 당시 ‘세상사 박사가 뭔 소용이며, 명예가 뭐란 말인가?’ 하고 많이 생각도 했다고 한다. 하루에도 여러 번 망설이다 다시 책을 잡곤 했다. 이루지 못한 젊은 날의 꿈은 나이 들어 다할 수 없지만,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한 공부는 늦어도 가능하리라 생각한다. 다만, 돈을 생각지 않고 신바람 나게 할 수 있다면……. 학원을 경영하는 큰아들은 “아버지께서 일찍이 수학공부를 계속하셨더라면 돈방석이라고…….” 말했다. 아니나 다를까 공직 생활을 하면서 중?고생의 수학 과외를 했는데, 작은 봉급으로 생활하면서 그 수입이 종잣돈이 되어 지금의 안정을 그나마 마련해준 내 인생의 기회가 되었단다. ‘2017 百億成’. 서재에 있는 책상, 우측 벽면에 붙어있는 글이다. 그렇다면 몇 년간의 座右銘 이라고 해도 좋다. 돈의 노예는 싫지만, 돈이 필요한 것이리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고 한다. 이 박사는 환갑(還甲)이 되는 2017년까지 순수한 돈 100억을 모아보는 것에 목표를 두어 보기도 하지만, 인생의 목표가 금액으로 환산된 것은 아니어서 그만큼, 그 정도의 가치일까 싶어 돈으로 나름 계산해 본 것이라고 한다. ‘재주 없음에야 공부의 값으로라도…’ 라는 생각이 어찌 안 들겠는가. 한 번뿐인 인생을 다만 웃을 수 있고, 후회 없이 산다면 백억으로 보상이 되겠는가. 삶의 그 자체만으로 이미 온 세상의 것이 자신의 것이라고 확신하는 그는, 군대에서 전역하고 ‘박사라는 학력의 벽’에 부딪쳐서 오히려 힘들어하기도 했다. 당시 박사라고 하면 받아 주는 곳이 없었지만, 이제 혼돈으로 가득한 사회의 이치를 나름대로 터득했다면서 좋아하는 노래가 ‘귀거래사’와 ‘사랑밖에 난 몰라요’이고 요즘 배운 노래는 ‘지중해’라고 한다. 제천에 조그마한 농가를 구입해 둔 이 박사. 조만간 그곳에서 조그마한 텃밭을 일구면서 그냥 편안하게 글 읽고 글 쓰며 생긴 것들을 생긴 대로 사랑하고 유유자적(悠悠自適) 하면서 살고 싶다고 말하는 그의 모습에서 편안함과 정겨움이 느껴진다.
글_박정원 사진_이정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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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굿꼴떼 원문보기 글쓴이: 능재(能在)이선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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