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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이지 않고 걸려오는 축하전화를 받고있는 큰며느리 윤혜라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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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실로 들어서자 홍일씨의 부인 윤혜라씨(47)가 전화를 받고 있었다. 연방 울려대는 전화벨 소리와 하나둘씩 모여들기 시작하는 축하화분들로 집은 서서히 활기와 분주함이 돌기 시작했다.
이야기를 10초 이상 잇기 어려운 지경인데도 윤씨는 일일이 전화를 받고 메모를 하고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곤 했다. 수녀님, 친구들, 친인척, 홍일씨의 고향사람들`─ 끝이 없었지만 윤씨는 귀찮은 표정 없이 인사를 한다. 하기야 이런 전화는 아무리 받아도 힘들지 않을 것이다. 윤씨의 얼굴도 피곤해 보이긴 했지만 행복한 미소가 잔잔히 퍼져 있다.
이들 부부는 투표 전 이틀 동안 밤을 새다시피 했고 투표일에는 또 작은아버지(김대중당선자의 동생 김대의씨)가 갑자기 세상을 뜨는 바람에 정신을 못 차릴 정도였다.
“작은아버님은 고생을 많이 하셨어요. 눈을 감으시면서도 이번엔 꼭 됐으면 좋겠다고, 선거가 완전히 끝나기 전까지는 당신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고 하셨어요. 하루만 더 사셨다면 당선되는 걸 보셨을 텐데, 너무 가슴이 아파요.”
동교동 집엔 일산집과는 달리 아직은 찾아오는 사람이 없어(모 구의원이 왔다가 메모만 전하고 돌아갔다) 번잡하지는 않다. 윤씨는 전날 준비했다는 축하 떡과 귤을 내왔다.
전날 저녁 시아버지가 대통령이 되느냐 마느냐 판가름이 나던 때 큰며느리 윤혜라씨는 성당에 있었다. 성당에 갔다기에 아마도 대통령 당선을 기원하기 위해 갔나 보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천주교인으로서 꼭 받아야 할 판공성사(判功聖事·크리스마스 전에 보는 고해성사)를 받기 위해 갔단다.
“저녁 8시에 판공성사가 잡혀 있어 딸과 함께 가기로 약속했는데 투표 전날 밤까지 바쁘게 움직이다 보니 잊어버렸어요. 그래도 갔다오긴 했죠.”
김대중당선자 가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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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산 집엔 사람들이 워낙 많아 발디딜 팀도 없고 그저 아버님께 인사만 하고 왔지요. 집 앞에는 의경들이 늘어서 있어 오가는 사람들을 확인하고. 그런데, 이전에 연금상태였을 때가 생각났어요. 그때 이 동교동 집엔 늘 전경들이 장막을 치고 있었고 가족들도 신분증을 보여야 겨우 드나들 수 있었어요. 그래서 집에 들어올 때면 늘 가슴 아프고 눈물이 나곤 했는데, 지금은 다른 이유로 이렇게 경찰들이 서 있는 걸 보니 기분이 참 묘하더군요. 그땐 이런 날이 올 줄 몰랐는데…”
대통령 당선이 확정되고 난 후 윤혜라씨는 축하전화를 받으며 처음 울었다. 연이어 오는 전화에 이젠 눈물도 말랐지만 인터뷰 도중 걸려온 친정아버지의 전화를 받자 다시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74년 결혼하여 시아버지와 남편이 겪어온 고초의 세월을 그도 함께해왔기 때문일까. 80년 시아버지는 사형선고받고 남편은 교도소 가 있을 때 제일 힘들었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이번 선거에도 큰며느리인 그가 고생을 안할 수는 없었다.
“선거 때마다 우리들은 주로 시장을 다녔어요. 어머니부터 며느리들 모두 시장 사람들 만나는 게 선거운동이었지요. 이번 선거는 마지막이니 최선을 다하자는 생각으로 열심히 뛰었어요. 다들.”
선거운동을 하게 되면 강행군을 하게 마련이다. 그 역시 아침부터 밤까지 뛰었다. 다행히 대학생인 큰딸 지영과 둘째 정화, 막내 화영(중 2)이 세자매가 저희들끼리 잘 지낼 수 있으니 살림걱정은 덜했다. 윤씨는 남편 후배인 소병식씨와 사촌언니 석순징씨와 함께 세 사람이 한조가 되어 전국의 시장바닥을 훑었는데 “우루사와 박카스는 원없이 먹어봤고” 체력을 보충하기 위해 링거도 한 차례 맞았다.
“사람들 만나보니 이번에는 되겠다는 느낌이 왔어요. 92년 선거 때와는 확실히 다르더군요. 요번엔 확실히 찍어준다고 확신을 주시더라구요. 그래서 처음부터 자신감을 갖고 꼭 된다는 신념으로 뛰었습니다.”
몇번 선거를 치러본 경험이 도움이 된데다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각오도 있었다. 그리고 이번 선거는 여느 선거보다 한결 깨끗해진 것 같아 비교적 분통터지는 일이 덜 했다. 큰며느리인 윤씨는 경기도 강원도 서울의 시장을 찾아다녔고 바로 손아랫동서인 신선련씨(43)는 경북 지역을 맡았다. 둘째인 홍업씨(48) 부인인 신선련씨는 대구 출신. 현재 미국계 증권회사인 메릴린치사 인사부 부장으로 있는 신씨는 돌아오는 여름 휴가까지 끌어 한달 간 경상도를 누비고 다녔다. 투표 다음날 새로 출근한 그에게 직장사람들의 축하인사가 쏟아진 것은 물론이다.
김홍일, 윤혜라씨 부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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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경상도 표를 많이 받았다고 하지만 솔직히 저는 더 나올 줄 알았답니다. 제가 경상도를 다닐 때 반응이 굉장히 좋았거든요. 대구나 경상도 사람들은 무척 순박해요. 금방 마음을 열어주지요. 그래서 제가 기대를 많이 했어요.”
신씨와 홍업씨와는 경희대 선후배 사이. 불문과 출신인 신씨는 대한항공 스튜어디스를 잠깐 하는 사이 홍업씨를 만났다. 그후 캐나다대사관에서 4년, 미국계 보험회사에서 1년간 근무하다 84년 3월 미국에서 혼례를 올렸다. 당시 김대중씨 일가는 미국에 망명중이어서 신씨는 사랑을 찾아 단신으로 미국으로 건너간 것이다. 그는 88년 귀국하기 전까지 미국에서 불문학 석사학위를 따낸 학구파이기도 하다.
힘들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신선련씨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했다.
“많이 걷고 하는 것은 젊은 사람들이니 괜잖죠. 오히려 사람들을 만나면서, 우리 서민들이 힘들어하는 점을 배우고 함께 나눌 수 있어 참 좋았습니다.”
두 며느리가 입을 모아 말하는 ‘새로운 경험’ 중 하나는 사찰을 방문한 일. 윤혜라씨는 천주교, 신선련씨는 개신교 신자로, 솔직히 이전에는 절에 갈 기회가 거의 없었다.
“저는 경남 지역 사찰을, 동서는 경북 지역 사찰을 다녔어요. 이전 선거에는 절에 갈 생각을 못했는데 이번에는 당의 불교모임 ‘연등회’에서 스님들을 만나는 게 어떠냐고 해서 처음으로 다니게 됐어요. 경상도 스님들께서 많이 북돋워주셨어요.”(윤혜라씨)
매주 일요일 점심은 온가족이 모여 함께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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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도 많고 말도 많은 게 선거다. 한때 비자금 사건이 터져 홍일씨가 거론됐을 때 마음고생을 꽤 했을 것 같은데.
“꼭 그렇지는 않았어요. 우리는 떳떳하니까요. 다만 친정식구들에게 미안했어요. 다 사업하는 사람들인데…. 은행통장이 자신도 모르게 뒤짐당하는 게 얼마나 기분 나빴겠어요. 그 점이 속상했지요.”
시아버지가 수사를 원치 않았던 것은 뭐가 있어서가 아니라 선거운동 기간 중 검찰을 드나들면 이미지가 나빠질까봐, 그 점을 우려해서였다고 덧붙인다. 그런 이유로 홍일씨 부부도 당시 수많은 인터뷰 요청에 대해 (할 말도 많았지만) 입을 꾹 다물고 참았다고 한다.
홍일씨는 선거 운동 기간 내내 조용하게 움직였다. 현직 국회의원(전남 목포 신안 갑)이기도 한 홍일씨는 앞에 나서지 않고 주로 뒤에서 일했다.
“여러 사람들의 의견과 불만을 들어주고 처리하는 일을 했지요. 사실 그런 일이 더 힘들잖아요.”
미국 유학중 잠시 귀국한 막내 홍걸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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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아들’이라는 부담스러운 자리에 오른 데 대해 국민들은 과거 경험상 염려가 되기도 한다고 말했더니 전혀 걱정하지 마시라며 밝게 웃었다.
“현철씨 사건 때도 우리 부부가 얘기한 적이 있어요. 우리는 조심하자, 저런 실수를 저지르지 말자구요. 남편은 일찍이 아버님과 함께 정치생활을 해왔기 때문에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연금시절에 아버님을 대신해서 일을 했지만 무리하게 일을 벌인 적이 없었습니다. 지금도 당에서 직책 하나 갖고 있지 않은걸요.”
직책이 문제가 아니다. 비공식적인 입김과 파워가 염려되는 것이다.
“남편은 자신의 지역구가 있어요. 그 일 외에는 대통령 아들이라고 특별히 따로 일이 생길 게 있습니까. 남편은 늘 ‘아버님에게 누가 되지 않을까’ 싶어 조심하고 참는 사람이고, 아버님 역시 그런 문제는 분명한 분이니까요.”
‘아버지의 권한과 나의 권한을 정확히 가를 줄 안다’는 홍일씨의 말로는 ‘정치 9단’으로 불리는 아버지는 무슨 문제가 생길 때마다 아들에게 “네 생각은 어떠냐”고 묻곤 하지만 그 자리에서 답을 말해주지 않는다고. 아버지의 해법은 늘 아들의 그것과는 다르지만 그것도 한참 뒤에나 알게 되니 부자가 머리를 맞대고 무언가를 의논하는 것과는 다르다.
며느리들 입장 역시 마찬가지다. 평소에는 기자들을 잘 만나주는 사람들도 ‘로열 패밀리’가 되면 갑자기 얼굴 보기도 힘들어지는데 제발 이번 대통령 가족은 서민들도 쉽게 만날 수 있는 가까운 사람이 됐으면 좋겠다고 했더니 윤씨는 “아니 왜 못 만나요? 대통령 며느리 되면 갑자기 할 일이 많아진대요? 갑자기 바빠지나요? 제 자리는 주부예요. 제 자리로 돌아와야죠” 했다.
신선련씨 역시 마찬가지. “내가 왜 인터뷰 대상이 되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인터뷰 자체도 거부했다. 그저 두 아이(초등학교 5학년과 2학년 아들)의 엄마이자 직장인으로 살아갈 뿐이라고. 남편 홍업씨는 기획실을 이끌고 있다.
두 며느리말고 김대중당선자에겐 막내며느리가 또 있다. 묘하게도 세며느리는 모두 경상도 출신. 큰며느리 신씨는 부산 출신인데 부모는 이북사람들이고 둘째며느리 신씨는 대구 경북(PK), 셋째며느리는 부산(PK) 출신이다. 미국 유학중인 막내 홍걸씨와 임미경씨 부부는 이번 선거를 맞아 귀국, 선거를 도왔다. 막내 며느리는 아이가 아직 어려 크게 뛰지는 못했지만 부모님 곁을 지켰다.
“평소 시어머님도 우리에게 특별한 요구를 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사는 방식을 존중해주시지요. 아버님이 아버님 길을 가셨다면 우리는 우리 길을 갈 뿐이지요. 남편도 마찬가지구요.”(윤혜라씨)
“일주일에 한 번 시댁을 찾아 함께 점심을 듭니다. 그런 가족 만남으로 넉넉한 것 아닌가요?”(신선련씨)
며느리들이 가까이서 본 김대중씨는 다정다감한 멋쟁이. 그리고 한 길을 일관되게 가는 ‘심지 깊은 분’이라고 표현했다.
“정의라고 믿는 길을 계속 걸어가시니까요. 이번에 마침내 그 뜻을 이루었으니 제 마음도 기쁘죠.”
며느리로서 본 시아버지 김대중씨는 어떨까. 우선 자식들에게 너그럽다고 한다.
“낮잠을 주무실 때, 아이들이 떠들어 조용하게 할라치면 괜찮다고 놔두라고 하세요. 대범하시죠. 참, 잠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언제 어디서나 잘 주무십니다. 남편도 그렇지만 아무리 시끄럽고 긴장된 상황에서도 주무실 수 있는 특이체질이세요.”
자연스럽게 김대중 당선자의 건강 문제가 나왔다.
“혈압도 정상이고 건강하세요. 그렇지 않다면 자식들이 먼저 말리죠. 무엇보다 건강이 제일 중요한 거 아닙니까.”
윤혜선씨는 인터뷰 내내 “나 혼자 한 게 아닌데, 다른 동서들도 꼭 해야 한다”고 말했다. 맏며느리 특유의 넉넉한 마음 씀씀이가 보였다. 신선련씨는 전화통화에서 “제가 왜 합니까. 형님이 다 하셨는데요”하고 거부하고. 선거 운동 기간 내내 자매처럼 늘 의논하고 열심히 뛴 두 사람은 운동을 끝내고 서로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 정말 최선을 다했지? 불안하지 않지?”
그렇다. 경상도 며느리들은 최선을 다했고, 그 최선은 멋지게 보답받았다.
글·한경심 기자 /사진·정경택, 이종승 기자
첫댓글 김대중 대통령님과 그리고 그주변분들 이야기들은 언제봐도 감동 그자체임니다.
부일협력자들이 득세하고 군사반란을 일으켜 권력을 탈취한 자들의 정권이 결국 외환위기와 함께 반세기만에 막을 내리던 8년 전 오늘을 기억해봅니다.. 김대중 후보가 당선되던 8년 전 오늘..역사적인 날이었지요...대통령님 내외분의 만수무강을 빕니다...^^
윤혜라 님은 광복회장 윤경빈 님의 따님이시지요 ? 윤경빈 광복회장 님은 백범 김구 주석의 경호원이셨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