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로운 마을에 울린 총소리
증언자: 노득기(남)
생년월일: 1947. 2. 25(당시 나이 32세)
직 업: 부화장(현재 무직)
조사일시: 1988. 12
개 요
노득기 씨는 남평 쪽으로 퇴각하던 공수대와 부근을 지키던 공수대 사이에 오인사격이 있던 5월 24일, 진월동으로 도망쳐 온 일부 군인들이 마을을 향해 무차별 사격을 할 때 집안에 있다가 총에 맞았다. 그 후 기독병원에서 치료하는 과정과 부상자회에 참여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벽을 뚫고 날아온 총알
나는 광주 진월동에서 태어나 줄곧 이 마을에서 살아왔다. 우리 집은 광주-목포간 도로에서 지원동으로 통하는 군사도로의 바로 옆에 위치해 있다.
1980년 당시 나는 서른두살이었다. 아내는 둘째 아이를 임신중이었고, 나는 사람 둘을 데리고 집에서 조그마한 부화장을 하고 있었다.
광주시내에서의 일은 소문을 통해 대강 알고 있었지만 우리 마을 사람들은 거의 항쟁에 참여하지 않고 있었다. 젖소를 키우고 있던 마을 사람들이 교통이 두절되고 공장이 가동되지 않아 남아도는 우유를 도로에까지 가져가서 오가는 시민들에게 나눠주는 정도였다.
5월 24일 점심을 먹은 후 고단해서 좀 누워 있으려는데 난데없이 요란한 총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인지 궁금해 나가보려고 일어서는 순간 양철벽을 뚫고 총알이 날아왔다. 내 오른쪽 팔과 옆구리에 총알이 박히며 피가 솟았다. 가족들이 모두 집에 있었지만 다른 방에 있어서 내가 부상당한 사실을 아무도 몰랐다. 살아야겠다는 일념으로 병원에 가기 위해 피를 질질 흘리면서 밖으로 나갔다.
집 앞 도로에는 군용 트럭과 탱크들이 즐비하게 서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군인들이 실수로 총을 잘못 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군인들을 보고도 위협을 느끼지 않았다. 그런데 손을 들고 대문을 나서자마자 30-40미터 거리에서 놈들이 또다시 총을 쏘았다. 그때는 용케도 총에 맞지 않았다. 재빨리 방으로 들어갔다. 그때서야 나를 본 식구들은 당황해 어쩔 줄을 몰랐다. 어머님은 펄쩍펄쩍 뛰기만 하고 아내도 허둥대다가 우선 상처부위를 응급처치해 줬다. 안 되겠기에 혼자서 집 뒤로 해서 마을 변전소 쪽으로 병원을 찾아갔다. 살려달라고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경황이 없던 때라 밖으로 나와서 도와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마을 뒤쪽의 변전소 부근에 이르자 마침 우리 마을에 사는 방위병이 집으로 돌아오는 중이었다. 그가 자전거에 태워 백운동까지 데려다 주었다. 백운동에서부터는 평소 알고 지냈던 백운오토바이 주인이 손님에게 부탁해서 오토바이로 기독교 병원까지 가게 되었다.
기독교병원에 입원하여
오후 3, 4시경 병원에 도착했는데, 그사이 피를 너무 많이 쏟은 때문인지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정신을 잃어버렸다. 수술이 끝난 뒤에야 복도에서 의식을 되찾았다. 백운동까지 태워다준 방위병과 백운오토바이에서 연락을 해줬는지 가족들이 곧 병원으로 찾아왔다. 아내는 임신중인 데다가 집안일을 돌봐야 했으므로 주로 어머님께서 병간호를 해주셨다.
병원은 환자들이 밀려 외래환자를 전혀 받지 않는데도 많은 사람이 복도에서까지 치료를 받아야 했다. 창자가 빠져 나온 사람, 치료 도중 다리를 절단하는 사람, 척추를 다친 사람 등 별의별 환자들이 다 있었다. 그들이 고통을 못 이겨 신음하는 소리를 들을 때면 정말로 안타까웠다.
나는 6개월간 입원해 있었다. 부상당한 5월 24일 바로 수술을 한 번 했고, 몇 달 뒤에 또다시 다리의 살을 떼어 팔에 붙이는 피부 이식수술을 했다. 오른쪽 팔 뒤꿈치와 옆구리를 다쳤는데, 옆구리에 박힌 파편은 지금도 남아 있다. 처음 수술할 때 신경에 닿아 있어 빼내지 못하고 꿰매 버렸는데 손으로 만져보면 잡히기도 한다. 심하지는 않지만 약간의 통증이 있어 오른쪽으로 눕기가 불편하다. 일상생활에서도 몸을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없으니 아무래도 불편한 건 사실이다.
특히 오른쪽 손가락으로 전해지는 신경이 죽었는지 엄지와 새끼손가락을 뺀 가운데 세 손가락의 감각이 무디다.
기독교병원의 의사와 간호원들은 그 와중에도 환자들에게 친절히 잘 대해 주었 다. 치료비에 대한 공식 얘기가 없을 때 자신들의 봉급을 털어 치료비를 대주기로 결정했다. 그런가 하면 합동수사본부에서 조사를 나와 자리를 비켜달라고 하자, "우리는 환자들을 보호할 의무가 있다."며 버티는 모습이 너무나 감동적이었다.
합동수사본부에서 나온 사람들은 부상장소, 경위 등을 묻고는 그들의 눈에 의심스러워 보이는 젊은이들은 통합병원으로 데려갔다. 내가 있는 병실에는 그런 사람이 없었지만 다른 방에서는 여러 명이 통합병원으로 옮겨갔다고 들었다.
부상자회와 함께
1984년에 부상자회 회장을 한 바 있는 김용대씨와는 처음에 같은 병실에 있었다. 그러다가 기독병원에는 신경외과가 없어 그분은 조선대병원으로 옮겨갔다.
퇴원할 무렵 부상자회 결성을 위한 모임을 갖자는 말이 오갔지만 시기상조라고 생각하여 참여는 뒤로 미루었다. 퇴원 후 바로 모임을 구성하려고 했지만 정보기관의 끈질긴 방해로 실패하고 1982년에야 무진교회에서 '5.18 광주의거부상자회' 발족식을 가졌다. 약 20명 정도로 시작된 당시의 모임은 이광영씨가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나는 죄도 없이 총에 맞은 것이 너무나 분하고 억울해서 아주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부끄럽게도 부상자회가 둘로 나누어진 후부터는 모임에 참석하지 않는다. 둘로 나뉘어 양쪽 모두가 하는 꼴이 마음에 안 들어서 전혀 활동을 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1980년 당시 경영하던 부화장은 경기도 좋지 않았을 뿐 아니라 내가 육개월간 이나 병원 신세를 져야 했기 때문에 계속 경영하기가 힘들어 그만두고 그 후 '지역개발협의회'에서 준 보상금으로 식당을 해봤지만 그것도 실패해 지금은 그냥 집에서 쉬고 있다. 나는 집을 일부 세내 준 돈으로 그럭저럭 살고 있다. 하지만 생활의 곤란을 겪는 부상자와 유족들이 너무나 많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모든 피해보상을 돈으로 해결하려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정신적인 피해를 돈으로 보상하려고 하면 안된다. 그리고 정치정당과도 협력해서 진상규명을 해야겠지만 피해자 위주의 진상규명이 먼저 되어야 할 것이다. 나는 군인들이 왜 아무 죄도 없는 사람들을 향해 민가에까지 무차별하게 총을 갈겨댔는지, 그리고 내가 왜 총을 맞아야 했는지 그 이유를 아직까지도 모르고 있다. 이러한 내용들에 대한 철저한 진상규명이 하루 빨리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조사.정리 양선화, 양난희) [5.18연구소]
첫댓글 자료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