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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1월 4일, 나는 멤피스(미국 동남부 테네시 주에 있는 도시로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암살당한 도시로 유명하다/편주) 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동부에서는 투표소들이 곧 문을 닫을 시간이었다. 3시간 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나는 가장 먼저 마주친 사람에게 이렇게 물었다. “누가 이겼는지 아세요?” 그 흑인 수하물 직원은 내게 선거인단 확보 결과와 몇 개 주에서 더 이기면 버락 오바마가 승리를 굳히게 되는지 조곤조곤 설명해나가기 시작했다. 그의 모습에서 나는 민주주의 아래서 자유를 누리기보다는 오랜 세월 억압을 받아온 사람들에게 이번 선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다음 날 나는 마틴 루터 킹이 암살당한 모텔(Lorraine Motel/편주)에 세워진 미국 민권 박물관(The National Civil Rights Museum)을 찾았다. 성년기를 남부에서 보냈기 때문에 잘 알고 있기는 했지만, 나는 민권 운동의 역사를 담은 기록화들을 다시 둘러보았다. 노스캐롤라이나 주 그린스보로의 간이식당에 앉아있는 용기 있는 대학생들.* 불량배들은 그들의 머리카락에 담뱃불을 비벼대고 얼굴에 케첩과 머스터드를 뿌리고 발길질을 했다. 백인 경찰관들은 그런 광경을 빤히 보면서 웃기만 했다. 물대포를 맞아 날려갈 듯 휘청거리는 버밍햄의 가냘픈 아이들. 불타버린 앨라배마 프리덤 라이드(Freedom Ride) 버스.** 그리고 미시시피에서 발견된 주검들.
투표를 할 수 있는 권리, 식당에서 밥을 먹을 수 있는 권리, 여관에 묵을 수 있는 권리, 대학교에 다닐 수 있는 권리―제임스 메러디스(James Meredith, 백인 인종주의자들의 극렬한 반대 가운데 1962년 미시시피 대학교에 입학한 첫 흑인/편주)가 첫 수업에 들어갈 때 군인 200명이 그를 호위했지만, 폭동이 일어나 사상자가 발생했다―같은,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하는 기본적인 요소들을 구하는 사람들에게 실로 믿기 어려운 폭력이 가해졌던 것이다.
박물관 바깥에는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마지막 연설, “산정에 올라가보았습니다”(I’ve Been to the Mountaintop)가 강철판에 새겨있다. 오바마가 대통령에 당선되고 몇 시간이 지나지 않은 햇살 좋던 그날, 나는 그 연설을 읽고 목이 메었다. “저는 그곳에 여러분과 함께 가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오늘 밤 여러분이 알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그 약속의 땅에 들어갈 것입니다.” 이 연설을 하고 다음 날, 킹 목사는 내가 서 있던 바로 그 자리에서 피를 흘리고 숨을 거두었다.
그렇다고 내가 몇 가지 정책과 관련하여 오바마와 다수의 복음주의자들 사이에 중대한 차이점이 있다는 사실을 무시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다만, 지금 이 순간만이라도 우리는 미국이 건국되고 오랫동안 이 나라가 고수했던 인종차별이라는 죄에 우리 모두가 가담했었다는 사실을 반성해야, 아니, 회개해야 한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남침례교는 150년이 지나서야 노예제도를 지지했던 과오에 대해 용서를 구했다(이 교단은 남부 백인 사회를 기반으로 1845년에 창립됐고, 교단 창립 150주년을 기념한 1995년 교단 총회에서 인종화해 결의안을 채택했다/편주). 그 석 달 전에는, 1971년까지 흑인 학생의 입학을 거부했던 밥 존스 대학교(Bob Jones University,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에 소재하고 있는 근본주의 전통이 강한 기독교 사립 대학교/편주)가 잘못을 시인했는데, “우리는 주님[의 모습]을 선명하게 드러내지 못했고,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같이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라고 하신 명령을 실천하지 못했다”고 밝힌 밥 존스 대학교의 사과문은 우리에게도 적용된다. 많은 복음주의자들이 민권 운동을 강력하게 반대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인종차별의 상처를 치유하고 화해하자 부르짖은 한 지도자의 요청에 응할 수 있을까?
선거 운동 기간에, 나는 오바마를 비방하는 이메일을 여러 번 받았다. 오바마는 (“사탄의 영을 숭배하고 피와 폭력이 지배하는 암흑의 대륙”) 아프리카의 아들이요, (“모든 이교도들을 무력과 폭력으로 다스리는 신에게 절대 복종하는 종교”) 이슬람의 아들이요, “사기꾼이자 거짓말쟁이라는 사실이 입증됐고 지옥의 불길이 타오르는 입술을 갖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과연 우리가 그동안 얼마나 진보해온 것인지 참으로 의심스럽다.
선거가 끝나고 두 주 뒤에, 나는 인도를 방문해 제도화된 차별이라고 할 수 있는 카스트 체제를 타파하기 위해 애쓰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만났다. 한 학자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미국인들은 고작 250년 노예 생활을 하고서 흑인이 대통령으로 당선됐다고 축하하고 있군요. 우리는 카스트 아래에서 살아온 지 400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해방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달리트 자유 연맹(Dalit Freedom Network)은 1억 6000만 달리트, 그냥 불가촉천민이라고 불리는 이들을 위해 일하고 있다. 달리트는 명목상으로는 힌두교도지만 힌두교 사원에도 들어갈 수 없다. 이들 가운데 많은 수가 최근 몇 년 사이에 기독교를 포함하여 다른 종교로 개종하고 있다. 달리트 바로 위에는 “기타 하위 카스트들”이 있는데, 그들은 6억 인도 인구의 절반을 넘어선다. 진리를 찾는 사람들(Truthseekers)이라는 단체가 이들을 위해 앞장서서 노력하고 있다. 이러한 계급 출신의 활동가들은 힌두교를, 현재의 카스트에 그들을 가두어 두기 위해 고안된 억압적인 종교로 보고 있다. 물론, 현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기를 바라는 힌두교 근본주의자들은 동요의 낌새가 조금이라도 보이면 즉각 반응―종종 폭력적인―을 보인다.
전인도기독교협의회(All India Christian Council) 조셉 드소우자(Joseph D’Souza) 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초기 선교사들은 상위 카스트인 브라만에게 정성을 쏟았습니다. 복음에 담긴 해방의 메시지가 억압받는 사람들에게까지 흘러내려오기를 바라면서 말입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아래로부터 위로 일하고 있습니다.” 인도 기독교 역사를 설명하는 그의 말을 들으면서, 나는 미국과 유사한 점을 발견했다. 미국의 일부 복음주의자들은 더 이상 권력에 접근할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에 심사가 뒤틀려 있다. 우리도 이제 아래에서 위로 일해야 할 때인 것 같다.
* 1960년 2월 1일 노스캐롤라이나 주 그린스보로의 한 식당에 아프리카계 대학생 넷이 의자에 앉았다. 백인은 앉아서, 흑인은 서서 식사를 하게 되어 있는 흑백분리(흑인차별) 식당이었으니, 그 자리는 “백인 전용”이었다. 인종차별에 맞선 용감한 네 학생에서 시작되어 며칠 사이에 수백 명의 학생들이 가세한 이 조그만 간이식당 연좌 농성은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민권 운동에 또 하나의 기폭제가 됐다.
** 대중교통의 흑백분리를 금지한 연방대법원 판결(1960)이 묵살되고 있는 미국 남부의 인종차별 실태를 고발하고 개선하기 위해 나선 프리덤 라이더(Freedom Rider)들은, 1961년 5월 4일 수도 워싱턴을 출발, 버지니아, 노스캐롤라이나, 사우스캐롤라이나, 조지아, 앨라배마, 미시시피를 거쳐 루이지애나 뉴올리언스까지 이르는 미국 동남부 7개주 장거리 대중교통 타기 운동에 나섰다. 그 노정에서 프리덤 라이더들이 크고 작은 위협을 받거나 구금되는 일이 일어났고, 앨라배마 주 애니스톤에서는 백인 폭도들이 프리덤 라이더들이 탄 버스를 공격하고 불태우는 사건이 발생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