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마을 어르신 이야기
눌산2리 방고개마을 송영도 어르신
법전을 다녀 봐도 방고개는 참으로 듬이다. “이 길도 전에 비하면 고속도로야” 좁고 가파른 산기슭 길을 따라 방고개로 들어가며 친구가 한 말이다. 방고개는 눌산2리의 독립된 마을이다. 해발530미터의 고개위에 고려시대에 형성된 마을은 아주 오래전부터 옹기종기 모여 순박하게 살았다.
이 오지에 송영도(宋榮道 96세)할아버지가 사신다. 방고개와 함께 그 분의 인생이 궁금했다.
“워낙 듬이라 부족한 것은 많았어도 예나 지금이나 인심 하나 만큼은 넉넉했어.” 어르신의 첫마디에는 마을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한때는 50여 호가 살았고 ‘방현(芳峴)’이라 불리는 만큼 봄에는 지천으로 피는 꽃으로 마을 전체가 꽃동네가 된다.
1928년 일제강점기에 영양에서 8남매의 둘째로 태어난 어르신은 열네 살에 부모를 따라 영양을 떠나 법전의 양지마로 들어왔다가 고누골을 거쳐 건문골에서 해방을 맞았다. 농사일과 철도부설공사일이 있던 시절에 어르신은 살기위해 여러 가지 일을 가리지 않고 해나갔다. 참으로 어수선하던 해방 후, 법전은 골짝마다 빨갱이들이 출몰하여 마을을 비우게 하고 강제로 이주를 시켰다. 그리고 22세가 되던 해, 6.25가 터졌다. 8월에 징집명령을 받고 포항훈련소로 입대했다. 전쟁의 비참함이야 눈뜨고 볼 수 없을 지경이지만 국군이 밀려서 낙동강전선을 최후 방어선으로 밀고 밀릴 때, 생사의 기로를 넘나들며 북진을 하고 제11사단 수색대에 배치되어 언제나 최전방 수색정찰을 임무로 여러 전투에서 고지를 넘나들었다.
“어르신의 군대이야기가 궁금한데요?” 하고 물었다. “전쟁 중의 군대는 살인을 해야 하는 일이어서 참으로 끔찍했어. 밀고 밀리는 고지탈환 싸움은 지루한 공방이고, 그저 죽고 죽이는 일밖에 없제.” “그게 사람이 할 짓인가?” “중부전선은 최악의 전투지역으로 중공군과 마주쳤지. 춘천위의 고지에서 우리분대 10명 중 7명의 전우가 한꺼번에 포탄공격으로 몰살했어. 나는 살 운명인지 그날따라 다른 참호에서 잤지. 전우들의 죽음은 오랫동안 괴로웠지”
군대이야기에 눈을 반짝이는 어르신은 신나는 이야기로 전쟁의 참화를 회고하셨지만 동료의 죽음에서는 처연한 심경을 드러내셨다. “언제 제대하셨나요?” “휴전되면 제대시켜 준다더니만 강제로 장기복무 시켜서 이등병으로 입대해서 5년 후 일등중사로 제대했지” “제대 후에는 어떻게 사셨어요?” “제대하니 29살 노총각이야. 제대한 해에 바로 결혼하고 열심히 살았어. 마침 방고개에 농토가 있어서 이곳으로 들어왔지. 그때 방고개는 모두 소개되고 몇 집 없었어. 군에서 중사로 제대했으니 아무도 깔보는 이가 없었제." 이제 노병은 귀가 어두워 고함을 질러야 겨우 알아듣는다.
“1960년 둘째가 태어나던 해에 이 집을 지었어. 나는 아들 셋에 딸 하나, 4남매를 두었지.” 방고개 마을은 부트내에서 들어오다가 마너무 들어가는 길과 갈라져 가파른 비탈길을 올라서야 마을이 있는데, 송영도 어르신의 집은 고개아래 첫 집이다. 고개 너머의 북풍은 산위로 불고 고개아래에는 평온하고 따뜻한 기운이 돈다.
“부모님은 철암에 사시던 형님에게로 들어가셨고, 아내는 마흔일곱에 병으로 병원에서 처방한 약을 먹었는데 잘못돼서 죽었어.”
아내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어르신을 너무 힘들게 했다. 재혼도하지 않고 홀로 사남매를 키우고 출가시켰다. 지금도 그때의 상황에 잠시 눈시울이 붉어지신다. “참으로 팔자가 기구해. 아이들은 많은 공부를 시키지는 못했어도 잘 컸어. 큰애는 공무원하고 막내는 자동차회사에 다니고 스스로들 잘 살아. 다행이야.” 자식에 대한 자부심과 기대를 하신다. 나보다는 잘살 것 이라는 위안과 잘못 살지 않았음을 되새기고 있다. “열심히 일해서 스무마지기 농토도 장만했는데, 이제는 힘이 없어 일부는 팔았어.” “요즘은 혼자 어떻게 사세요?” “참전용사라고 유공자연금이 30만원이 나오고, 기초생활연금이 20만원가량 나오니 충분하고, 반찬도 도와주고 도우미도 파견하니 살만하지.” 송영도 어르신은 참전용사로 국가유공자다. 그 자부심이 대단하다. 목숨을 걸었던 유공자들이 더 많은 보상으로 노후를 편히 지낼 수 있게 예우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만나 뵙고 큰절로 세배했다. 작은 선물을 드리면서 절대 끼니 거르지 마시고 힘들더라도 걷고 운동하시라 당부 드렸다. 아직 우리는 남북대치의 위험이 끝나지 않았고 선진적 경제의 풍요와 문화의 바탕은 이런 분들의 고귀한 희생으로 세워진 것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는 숙연한 마음을 갇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