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마와 숙녀 / 박인환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生涯)와
목마(木馬)를 타고 떠난 숙녀(淑女)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목마)는 주인(主人)을 버리고 그저 방울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상심(傷心)한 별은 내 가슴에 가볍게 부서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少女)는
정원(庭園)의 초목(草木) 옆에서 자라고
문학(文學)이 죽고 인생(人生)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愛憎)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木馬)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때는 고립(孤立)을 피하여 시들어 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작가(女流作家)의 눈을 바라다보아야 한다
등대(燈臺)에 ……
불이 보이지 않아도
그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未來)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木馬) 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그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意識)을 붙잡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두 개의 바위 틈을 지나 청춘(靑春)을 찾은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 잔의 술을 마셔야한다.
인생(人生)은 외롭지도 않고
그저 잡지(雜誌)의 표지(表紙)처럼 통속(通俗)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木馬)는 하늘에 있고
방울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 바람 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
핵심 정리
[이 작품은] 전쟁이 가져다 준 삶에 대한 허무와 절망, 시대적 불안과 애상을 ‘버지니아 울프’라는
영국의 여류 작가와 도시적 센티멘털리즘을 통해 노래하고 있다.
*갈래 : 자유시, 서정시
*성격 : 애상적, 체념적, 주지적, 상징적, 허무적
*제재 : 목마와 숙녀
*주제 : 절망적 현실과 모든 떠나가는 것들에 대한 애상
*특징
① 의미보다는 분위기 위주임.
② 전후의 허무주의적 색채가 짙음.
③ 산문체이면서도 경쾌한 리듬감이 느껴짐.
*출전 : “박인환 시선집”(1955)
시어 풀이
*페시미즘(pessimism) : 염세주의. 세계나 인생을 불행하고 비참한 것으로 보며, 개혁이나 진보는
불가능하다고 보는 경향이나 태도. ↔ 낙관주의
*통속(通俗)하거늘 : 비전문적이고 대체로 저속하며 일반 대중에게 쉽게 통할 수 있거늘.
작품의 구성
[1~11행] 떠나가는 것들에 대한 허무와 절망
[12~25행] 절망적 현실의 체념적 수용
[26~32행] 인생에 대한 페시미즘적 태도
이해와 감상
이 시는 6·25 전쟁의 체험을 통해 시인이 느낀 문명과 인간에 대한 한없는 절망과 좌절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이 시는 전체 분위기에 따라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 부분(1~11행)에서는 떠나가는 것들에 대한 화자의 슬픔을 말하고 있다. 가치 있는 것으로 여
겨지는 것들이 부정적 의미의 서술어와 결합함으로써 화자가 마주선 허무와 절망을 보여 주면서 시의
감상적 분위기를 고조시키고 있다.
두 번째 부분(12~25행)은 절망적 현실을 수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대해 말하고 있다. 시적 화자는 '~
해야 한다'는 당위적 종결법을 반복하고 있지만, 그것은 당위나 결단의 모습이라기보다는 절망적 현실
을 수용할 수밖에 없다는 체념에 가깝다.
이는 작가가 현실에서는 더 이상 삶의 지표를 찾을 수 없다고 판단한 것에서 기인한 것으로, 극한적인
절망과 비애의 감정 표출이라고 볼 수 있다. 마지막 부분(26~32행)은 절망적 현실과 인생에 대한 페시
미즘적인 태도를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부분적으로 시적 화자가 인생을 돌아보고, 체념적 상황에 대해 반성하기도 하지만, 그가 삶에 대해 갖
고 있는 비관적 태도를 극복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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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연구실 전후의 허무감
이 시는 '목마'와 '숙녀'로 대표되는 가치 있는 것들이 떠나가는 것에 대한 상실의 정서를 드러내고 있
다. 또한 '~ 해야 한다', ' ~ 할 수밖에 없다'는 표현을 사용하여 절망적인 현실에 순응할 수밖에 없는
체념적 태도를 보여 주고 있는데, 이는 6·25 전쟁을 통해 시인이 느낀 절망감과 허무감에서 기인한 것
이다.
'목마'와 '숙녀'의 상징적 의미
‘목마’는 땅에 내려오지 못한 채 헛된 발길질만을 계속하며 제자리를 반복해서 맴돌 뿐이다. 그래서
이 시에서 '목마'는 현실에 정착하지 못하고 허공을 헤맬 수밖에 없는 인간의 슬픈 운명을 상징한다.
때묻지 않은 순수와 정결의 이미지를 갖고 있는 '숙녀'는 미숙함 때문에 더럽고 추악한 이 세상에 발
을 내려놓자마자 상처를 입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이시에서 '숙녀'는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이 암시하는 것처럼, 과거에
는 화자의 삶의 중심에 있으면서 삶의 좌표 구실을 했으나 지금은 떠나가 찾을 수 없는 사람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 곧 '사랑의 사람'이 겪은 슬픈 삶의 모습을, 절망과 허무로 당대 현실
과 불화하다 자살하고 만 버지니아 울프의 슬픈 생애와 함께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처럼 이 시에서 '목마'와 '숙녀'는 이 시 전체의 분위기를 이끌어 가는 매개체로, 절망적 현실에 삶의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떠나갈 수밖에 없는, 지난 시대의 아름답고 소중한 가치들을 상징한다.
버지니아 울프의 생과의 관련성
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olf, 1882`~1941)는 영국의 여류 소설가로 '의식의 흐름'을 파악하는 기법으
로 인간 심리의 가장 깊은 내면을 추구하는 작품을 쓴 작가이다.
그녀는 제2차 세계 대전 때 허무주의적인 분위기 속에서 불안과 강박 관념에 시달리다 결국 템즈 강에
서 투신자살하고 만다.
시인은 아마도 6·25 전쟁으로 인한 폐허 속에서, 버지니아 울프가 느꼈던 심정에 깊이 공감하고 있었을
것이다. 전후(戰後)의 상황에서 느꼈을 절망감과 허무감, 더 나아가서는 자살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그녀의 심경을 떠올렸을 것이다. 결국 이 시는 버지니아 울프가 등장한다는 사실만으로도 허무와 애상의
정조를 띨 수밖에 없다.
작가 소개 - 박인환(朴寅煥, 1926~1956)
시인. 강원 인제 출생. 1946년 "국제신문"에 '거리'를 발표하며 등단했다. 1949년 김수영·김경란 등과 함
께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이라는 5인 공동 시집을 발간하여 모더니즘 시 운동의 주역이 되었다.
전후에는 죽어가는 모든 것에 대한 슬픔을 허무와 절망의 시각으로 그려 냈다. 시집으로 "박인환 시선집
"(1955)이 있다.
함께 읽어보기 ‘초토의 시 1’, 구상/전쟁의 폐허에 대한 태도
'초토의 시 1'은 6·25 전쟁이 남긴 참혹한 삶의 현장에서 좌절하고 절망하던 화자가, 비극적 현실을 피하
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초극하여 민족의 미래에 대한 낙관적 인식에 도달하는 모습을 보여 주는 시로,
전쟁이 남긴 상처에 대해 좌절하고 절망한다는 점에서 이 시와 공통점을 갖는다. 하지만 '초토의 시 1'의
화자는 폐허 속에서도 미래에 대한 희망을 발견하는 반면, 이 시의 화자는 인생과 미래에 대해 비관주의
적인 태도를 취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