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중의 달 유월에는 지독히도 나라를 걱정하던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한시로
잠시 잠깐이나마 나라를 걱정해보고저 한다.
1)한산도가(閑山島歌)
寒山島明 夜上戍樓(한산도명 야상수루)
撫大刀深 愁時何處(무대도심 수시하처)
一聲羌笛 更添愁 (일성강적 경첨수)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戍樓)에 혼자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는 차에
어디서 일성호가(一聲胡茄)는 남의 애를 끓나니.
*한산도 : 조선조 선조 때 일부 해군의 기지가 있던 남해의 섬
*수루 : 적군의 동정을 살피기 위하여 높이지은 망루
**1597년 8월 15일, 열선루(전남 보성 관아에 있던 누각)에 앉아 지어 읊은 날이다.
한산도의 원래 한자명은‘한가(閑暇)하다’는 뜻의‘閑’자로 쓴다. 이순신은 ‘한산도가’의
제목은 이 ‘閑’자로 그대로 하고, 서두는‘寒’(춥다, 쓸쓸하다) 자로 썼다
(친필 시조에는 ‘寒’자로 되어 있음).
왜 그랬을까?
칠천량에서 전멸한 조선 수군, 전장을 함께했던 동지들의 죽음...
통제사에 복권되었지만 모병을 위해 고을들을 둘러보니 관아와 민가는 폐허가 되어
텅 비어 있었다.
그나마 남아 있는 보성 관아의 군기를 모아서 말에 싣게 했는데,
곧 들이닥칠 12만의 왜군에 비해 너무도 초라했다.
그러한 심경을 ‘寒’자로 표현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2)무제(無題)
萬里江山 筆下成 (만리강산 필하성)
空林寂寂 鳥無聲 (공림적적 조무성)
桃花依舊 年年在 (도화의구 년년재)
雲不行兮 草自生 (운부행혜 초자생)
만 리 강산은 붓끝에서 이루어지고
텅 빈 숲은 적막하니 새도 울지 않네.
복숭아꽃은 예전처럼 해마다 피어나고
구름 지나가지 않아도 풀은 저절로 자라네.
*조무성 : 새소리도 없는
*도화의구 : 예전의 복숭아 꽃
3)무제(無題)
蕭蕭風雨夜 (소소풍우야)
耿耿不寐時 (경경불매시)
懷痛如嶊膽 (회통여최담)
傷心似割肌 (상심사할기)
山河猶帶慘 (산하유대참)
魚鳥亦吟悲 (어조역음비)
國有蒼黃勢 (국유창황세)
人無任轉危 (인무임전위)
恢復思諸葛 (회복사제갈)
長驅慕子儀 (장구모자의)
經年防備策 (경년방비책)
今作聖君欺 (금작성군기)
비바람 부슬부슬 흩뿌리는 밤
생각만 아물아물 잠 못 이루고
간담이 찢어질 듯 아픈 이 가슴
살이 에이듯 쓰라린 이 마음
강산은 참혹한 모습 그대로이고
물고기와 새들도 슬피 우는데
나라는 허둥지둥 어지럽건만
바로잡아 세울 이 아무도 없어라
제갈량 중원 회복 어찌했던고
말 달리던 곽자의 그립구나.
원수 막으려 여러 해 했던 일들이
이제 와 돌아보니 임금만 속였네.
**이 한시를 지은 때는 전쟁이 소강상태로 접어든 1594년 9월이다.
1593년 5월, 남해안으로 전격 퇴각해 내려온 왜군들은 이순신의 조선 함대가
견내량을 막아서서 자신들의 서해 및 전라도 진출을 봉쇄하자 남해안 요해처에
왜성을 쌓고 장기전에 돌입하는 한편, 명-왜 간의 강화협상을 통해 모종의 변화를
모색하려 했다,
견내량 남단. 앞에 보이는 섬이 해간도. 해간도를 넘어서면 한산도 앞바다이다.
이순신은 해간도를 등지고 왜군들의 서해 진출을 원천 봉쇄했다.
강화협상에 적극적이던 명군은 “강화협상 중에는 전쟁행위를 일체 중단하자”는
왜군 측의 요청을 받아들여 조선 수군에게 전쟁금지령을 내렸고, 선조 임금은
(명군 몰래) 조선 수륙군 장수들에게 거제도 일대에 주둔해 있는 왜적을 공격하라는
밀지(密旨)를 하달하게 된다.
이순신에게도 밀지가 전달되었는데, 아래는 그날의 <난중일기>이다.
9월 3일. 비가 왔다. 새벽에 밀지가 들어왔는데 ‘바다와 육지의 여러 장수들은
팔짱을 끼고 서로 바라보기만 하고 한 가지라도 계책을 세워서 적을 치는 일이 없다’고
하였다. 3년 동안이나 바다 위에 있었는데 그럴 리 만무하다. 여러 장수들과 함께
죽음으로써 원수를 갚자고 맹세하고 날을 보내고 있지만 험한 곳에 소굴을 파놓고
그 속에 들어가 있는 적들을 경솔하게 나가 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더구나 (병법에서도) 나를 알고 적을 알아야만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고
하지 않았던가. 초저녁에 불을 밝히고 혼자 앉아 나라 일을 생각하는데
(작금의 상황은) 엎어지고 자빠지고 위태롭기 그지없건만 구제할 대책이 없으니
이 일을 어찌하랴, 어찌하랴. <난중일기>(1594. 9. 3.)
이순신은 전략적 차원에서 왜군들의 발목을 한려수도 이동에 묶어두기 위해 그동안
견내량 방어선을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위와 같은 질책성 밀지를 받자 황망하고 답답했다.
‘이제 와 돌아보니 임금만 속였네’라는 싯귀는 자신의 전략적 의지와는 달리 ‘팔짱만 끼고
바라보기만 하고...’라는 인식을 낳았기에 결과적으로는 임금을 속인 것이라는 자책과
한탄의 표현으로 보인다. **
4)선거이 수사와 작별하며..
北去同勤苦(북거동근고)
南來共死生(남래공사생)
一杯今夜月(일배금야월)
明日別離精(명일별리정)
북쪽에 갔을 때도 같이 일했고
남쪽에 와서도 생사를 같이했지
오늘 밤 달 아래 한 잔 술 나누지만
내일엔 우리 서로 헤어져야 하네
**1586년 함경북도 병마절도사 이일(李鎰)의 계청군관(啓請軍官)으로 선거이 장군이
임명되고 충무공이 처음 공직에 나간 녹둔도 둔전관으로 재직 시절부터입니다.
그러므로 충무공에게는 공직생활의 시작부터 끝까지를 함께 지낸 맹우중 맹우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충무공의 녹둔도 둔전관 재임 시 패전의 책임을 물어 절도사 이일이 충무공을 죽이려
했을 때 선장군은 생명을 걸고 조정에 알려 이순신을 변호함으로서 참수를 면하고
방면 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다음해 조산만호(造山萬戶)이었던 이순신(李舜臣)과 함께 녹둔도(鹿屯島)에서
여진족을 막아 공을 세웠습니다. 1588년 7월에는 한산도해전에 참가하여 전라좌수사
이순신을 도와 왜적을 크게 무찔렀습니다. 그 뒤 충청병사에 올랐으며, 한산도에
내려와서는 이순신을 도와 둔전(屯田)을 일으켜 거만(巨萬)의 군곡(軍穀)을 비축하여
공을 세운 바도 있고, 1594년 9월에는 이순신과 함께 장문포(長門浦)해전에서
공을 세웠습니다. 1594년, 이순신이 조정에 장계를 해서 자신과 반대적으로만 행동하는
원균을 자르던지 자신을 자르던지 조치를 취해 달라고 하자, 당시 조정은 경상 우수사
원균을 충청 병사로, 당시 충청 병사였던 선거이를 충청 수사로 그리고 공석인 경상
우수사 자리에 배설을 임명하였습니다.
선거이가 충청 수사로 오자 수군 통제사 이순신은 매우 기뻐했으며 그와 더불어 술잔을
나누고 순시와 작전을 짜는 등, 충무공의 견내량 봉쇄에 아주 크게 일조했습니다.
다음해 선거이가 황해병사로 발령을 받아 헤어지는 시점에서 위의 한시가 나온다.**
5)한산도 야음(閑山島 夜吟)
水國秋光暮(수국추광모)
驚寒雁陣高(경한안진고)
憂心轉輾夜(우심전전야)
殘月照弓刀(잔월조궁도)
한바다에 가을 빛 저물었는데
찬바람에 놀란 기러기 높이 떴구나.
가슴에 근심 가득 잠 못 이루는 밤
새벽 달 창에 들어 칼을 비추네.
*수국 : 바다에 많은 섬을 말한다.
*잔월 : 새벽녘에 맑은 달을 말한다.
6)무제(無題)
不讀龍韜 過半生 (불독용도 과반생)
時危無路 展葵誠 (시위무로 전규성)
峩冠曾此 治鉛槧 (아관증차 치연참)
大劍如今 事戰爭 (대검여금 사전쟁)
墟落晩烟 人下淚 (허락만연 인하루)
轅門曉角 客傷情 (원문효각 객상정)
凱歌他日 還山急 (개가타일 환산급)
肯向燕然 勒姓名 (긍향연연 륵성명)
병서도 못 읽고 반생 지내느라
위태한 때 충성 바칠 길 없네.
지난날엔 큰 갓 쓰고 글 읽다가
오늘은 큰 칼 들고 싸움을 하네.
마을의 저녁연기에 눈물 흘리고
진중의 새벽 호각 마음 아프다.
개선의 그날 산으로 가기 바빠
공적 기록 신경 쓸 겨를 없으리.
8)무제(無題)
北來消息 杳無因 (북래소식 묘무인)
白髮孤臣 恨不辰 (백발고신 한불신)
袖裡有韜 摧勁敵 (수리유도 최경적)
胸中無策 濟生民 (흉중무책 제생민)
乾坤黯黲 霜凝甲(건곤암참 상응갑)
關海腥膻 血浥塵(관해성전 혈읍진)
待得華陽 歸馬後(대득화양 귀마후)
幅巾還作 枕溪人(폭건환작 침계인)
북쪽 소식 아득히 들을 길 없어
외로운 신하 시절을 한탄하네.
소매 속엔 적 꺾을 병법 있건만
가슴속엔 백성 구할 방책이 없네.
천지는 캄캄한데 서리 엉기고
산하에 비린 피가 티끌 적시네.
말 풀어 목장으로 돌려보낸 뒤
두건 쓴 처사 되어 살아가리라.
9)진중음(陣中吟)
天步西門遠 (천보서문원)
君儲北地危 (군저북지위)
孤臣憂國日 (고신우국일)
壯士樹勳時 (장사수훈시)
誓海魚龍動 (서해어룡동)
盟山草木知 (맹산초목지)
讐夷如盡滅 (수이여진멸)
雖死不爲辭 (수사불위사)
님의 수레 서쪽으로 멀리 가시고
왕자들 북녘으로 위태로우니.
나라를 근심하는 외로운 신하
장수들은 공로를 세울 때로다.
바다에 맹세함에 어룡이 감동하고
산에 맹세함에 초목이 알아주네.
이 원수 모조리 무찌를 수 있다면
이 한목숨 죽음을 어찌 사양 하리오.
<이순신은 누구인가>
본관은 덕수(德水)이고, 자는 여해(汝諧),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서울 건천동(乾川洞)에서 태어나 충청도 아산의 뱀 밭에서 살았다.
1572년(선조 5) 무인 선발시험인 훈련원 별과에 응시하였으나 달리던 말에서 떨어져
왼쪽다리가 부러지는 부상으로 실격되었다. 32세가 되어서 식년 무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권지훈련원봉사(權知訓練院奉事)로 첫 관직에 올랐다. 이어 함경도의 동구비보권관
(董仇非堡權管)과 발포수군만호(鉢浦水軍萬戶)를 거쳐 1583년(선조 16)
건원보권관(乾原堡權管)·훈련원참군(訓鍊院參軍)을 지냈다.
1586년(선조 19) 사복시 주부를 거쳐 조산보만호(造山堡萬戶)가 되었다.
이때 호인(胡人)의 침입을 막지 못하여 백의종군하게 되었다. 그 뒤 전라도 관찰사
이광에게 발탁되어 전라도의 조방장(助防將)이 되었다. 이후 1589년(선조 22)
선전관과 정읍(井邑) 현감 등을 거쳐 1591년(선조 24) 유성룡의 천거로 절충장군·
진도군수 등을 지냈다. 같은 해 전라좌도수군절도사(全羅左道水軍節度使)로 승진한 뒤,
좌수영에 부임하여 군비 확충에 힘썼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포에서 일본 수군과 첫 해전을 벌여 30여 척을 격파하였다
(옥포대첩). 이어 사천에서는 거북선을 처음 사용하여 적선 13척을 격파하였다
(사천포해전). 또 당포해전과 1차 당항포해전에서 각각 적선 20척과 26척을 격파하는 등
전공을 세워 자헌대부로 품계가 올라갔다. 같은 해 7월 한산도대첩에서는 적선 70척을
대파하는 공을 세워 정헌대부에 올랐다. 또 안골포에서 가토 요시아키[加藤嘉明] 등이
이끄는 일본 수군을 격파하고(안골포해전), 9월 일본 수군의 근거지인 부산으로 진격하여
적선 100여 척을 무찔렀다(부산포해전).
1593년(선조 26) 다시 부산과 웅천(熊川)에 있던 일본군을 격파함으로써 남해안 일대의
일본 수군을 완전히 일소한 뒤 한산도로 진영을 옮겨 최초의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다.
이듬해 명나라 수군이 합세하자 진영을 죽도(竹島)로 옮긴 뒤, 장문포 해전에서 육군과
합동작전으로 일본군을 격파함으로써 적의 후방을 교란하여 서해안으로 진출하려는
전략에 큰 타격을 가하였다. 명나라와 일본 사이에 화의가 시작되어 전쟁이 소강상태로
접어들었을 때에는 병사들의 훈련을 강화하고 군비를 확충하는 한편, 피난민들의 민생을
돌보고 산업을 장려하는 데 힘썼다.
1597년(선조 30) 일본은 이중간첩으로 하여금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바다를 건너올
것이니 수군을 시켜 생포하도록 하라는 거짓 정보를 흘리는 계략을 꾸몄다. 이를 사실로
믿은 조정의 명에도 불구하고 그는 일본의 계략임을 간파하여 출동하지 않았다.
가토 기요마사는 이미 여러 날 전에 조선에 상륙해 있었다. 이로 인하여 적장을
놓아주었다는 모함을 받아 파직당하고 서울로 압송되어 투옥되었다. 사형에
처해질 위기에까지 몰렸으나 우의정 정탁의 변호로 죽음을 면하고 도원수 권율의 밑에서
두 번째 백의종군을 했다.
그의 후임 원균은 7월 칠천해전에서 일본군에 참패하고 전사하였다. 이에 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된 그는 12척의 함선과 빈약한 병력을 거느리고 명량에서 333척의 적군과 대결,
31척을 격파하는 대승을 거두었다(명량대첩). 이 승리로 조선은 다시 해상권을 회복하였다.
1598년(선조 31) 2월 고금도(古今島)로 진영을 옮긴 뒤, 11월에 명나라 제독 진린과
연합하여 철수하기 위해 노량에 집결한 일본군과 혼전을 벌이다가
유탄에 맞아 전사하였다(노량해전).
무인으로서 뿐만 아니라 시문(詩文)에도 능하여 《난중일기》와 시조·한시 등 여러 편의
뛰어난 작품을 남겼다. 1604년(선조 37) 선무공신 1등이 되고 덕풍부원군(德豊府院君)에
추봉된 데 이어 좌의정이 추증되었다. 1613년(광해군 5) 영의정이 더해졌다. 묘소는
아산시 어라산(於羅山)에 있으며, 왕이 직접 지은 비문과 충신문(忠臣門)이 건립되었다.
통영 충렬사(사적 제236호), 여수 충민사(사적 제381호), 아산 현충사(사적 제155호) 등에
배향되었다. 유품 가운데 《난중일기》가 포함된 《이충무공난중일기부서간첩임진장초》는
국보 제76호로, 장검 등이 포함된 이충무공유물은 보물 제326호로, 명나라 신종이 무공을
기려 하사한 충무충렬사팔사품(통영충렬사팔사품)은 보물 제440호로 지정되었다.
이밖에도 그와 관련하여 많은 유적이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그의 삶은 후세의
귀감으로 남아 오늘날에도 문학·영화 등의 예술작품의 소재가 되고 있다.
<작가의 말>
세월이 흘러가매 모든 간신들의 영화와 권력은 드러나지 않으나 충신들의 업적과 사상은
후대에 전해 사상과 정신을 계승함은 현존하는 후손의 몫일 것이다. 여기 천안에서 1시간
남짓 충청도 아산 땅 뱀 밭은 덕수이씨의 세거지이다. 선조의 정문이 있고 충무공
이순신장군의 넋을 기리는 사당과 묘소가 있다. 1960년까지만 해도 일반 사대부 집의
사당 이였으나 고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 성역화되어 지금 현재는 전국 제일의 규모이다.
사당 내에 전각과 홍살문 옛집 우물 유물전시관 활을 쏘던 곳 등 여러 유적과 유물
그리고 묘소를 돌아보며 공이 남긴 한시들을 찾아보니 많은 시간을 진중(陣中)에서
보내서일까 보이는 것 전부 다 나라를 걱정하는 시(詩)뿐 이다.
그 중 몇 편을 선정하여 진중 보은의 달 6월에 감상하며 잠시 나마 나라를 걱정하며
이 시들을 감상하고서 한다. 나라가 위급에 처한다면 총을 들고 진중에 나가 적군을
죽이며 싸우는 것 매우 중요하다. 지금 이 시절에도 별반 다르지 않다. 세계적으로 몇
안 되는 분단국가이고 지척에서 총성이 오가며 싸우고 있지 않은가? 우리 내 부모들이
목숨을 걸고 지킨 이 나라며 수천 수백 년을 지켜온 이 땅에서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물론 전후세대이기는 하지만 요즘 젊은이들은 나라는 없다 태어났으니 자기 나라이지,
지금의 나도 목숨을 내어 놓고 싸울 의사는 없다.
일반 국민이 이러할진대 위정자(爲政者)들은 자신의 재산 불리기에 혈안이 되어 국민의
안위(安瑋)는 없다. 임기 중에 재산 불려 고향에다 저 살집이나 짓는 위정자와 나라가
풍전등화(風前燈火)의 위기에 전 재산을 독립운동(獨立運動)에 쓰고 후손들은 끼니
걱정을 하며 날품을 팔게 하는 이 나라, 어느 놈이 목숨을 바쳐 싸우겠는가?
모든 역사는 올바르게 전해져야 한다. 고려의 간신이 조선의 충신이 되고 조선의 충신이
일제강점기의 간신이 되어 부귀영화를 누렸으나 지금의 후손들은 일제 36년의 치욕을
청산한다고 오적과 일제강점기에 아부하여 모은 재산을 환수(還收)하는가 하면 친일파
사전(親日派辭典)을 만들어 자손만대(子孫萬代)에 치욕을 주고 있다.
마음 한구석에 남아있는 그 무엇인가를 찾아서 예전에야 목숨을 내어 놓고서 싸우는 자도
충신(忠臣)이요, 윤두수처럼 자신의 영달을 추구하며 윗전의 판단을 흐리게 말 한자도
당시엔 충신이었을 것이다. 부질없는 영욕(榮辱)이야 접어두고 민초들의 아픔을 알아주며
근심하며 밤새우는 자 진정한 위정자일 것이다. 이제 좀 있으면 많은 위정자가 국립묘지나
참배하면서 생색내는 가증스런 사진들이 방영될 것이다. 잠시 생각해 본다.
나라를 위하여 싸우다 평생을 병원에 누워 또 병마(病魔)와 싸우는 자. 젊되 젊은 나이에
시집와 유복자를 낳고서 청상(靑孀)이 되어 날품으로 평생을 보낸 주름진 노인의 얼굴, 또
이 나라를 구하겠다고 모든 재산을 다 바쳐 독립운동하고 그 자손은 지금 끼니 걱정하며
월세를 못내 길거리에서 천대받으며 살아가는 독립군의 후손(後孫)들, 여러분도 잠시 잠깐
주위를 돌아보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 후손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 지를, 가난은
나라에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많은 이 나라는 그들을 위해 무엇을 해주었는가.
이해도 안 가는 이 한시 몇 편을 올려놓고서 장황히 떠들어 본들 무엇하겠는가, 이 시들은
동인과 서인으로 봉당(封堂)의 정치에서 그래도 올 곳은 한 장수의 울부짖음이다.
온 들녘이 푸르고 청량한 이 밤 서쪽 새 목 놓아 울뿐이다.
<참고인용도서>
덕수이씨대동보(도서관)
충무공이순신전(도서관)
만성보
난중일기(도서관)
인터넷 충무공 이순신장군의 한시
인터넷인명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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