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누구의 무슨 말을 해주려는 것인가?' (사진: 노컷V 유튜브 갈무리) |
엄마부대
지난 1월 4일 엄마부대 등 보수단체 회원들이 기자회견을 열었다. 그들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에게 한일 위안부 협상 결과를 받아들일 것을 요구했다. 팻말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이제 아베의 사과를 받았으니 남은 여생 마음 편히 지내십시요. 엄마부대.’
문구를 읽는 순간 누군가의 표현처럼 ‘혼이 비정상’이 된 것 같은 비현실감을 느꼈다. 세상에 바로 그 일본 남성들에게 유린당한 상처를 안고 일생을 살아오신 할머니들에게 같은 여성으로서 이렇게 무지막지 무례할 수가 있을까? 국가를 위해서라 했다. 단체 대표인 중년여성은 더 놀라운 발언들도 쏟아냈다. 그녀는 엄마부대가 그동안 벌여온 세월호 유가족들에 대한 반대집회에 관해 묻는 기자의 질문에 ‘세월호 유가족이 악랄하다’고 말했다. 내가 주목하는 것은 그들의 단순하고 어떤 의미에서는 순수할지도 모를 주장이 아니다. 그것을 표현하는 도구와 방식이다.
여기쯤서 확인해두고 싶은 노파심이 생긴다. 궁금하다. 즉 내 이런 판단은 누구에게나 지극히 당연한 윤리적 상식이 아닐까? 직관에 속하는 보편 반응으로 좌우, 보수·진보의 문제는 아니지 않을까? 이런 합의조차 공감이 불가능하다면 절망적인 상황이 아닐까? 그런데 말을 꺼내면서도 왠지 불안해진다.
프랑스에도 극우주의자가 있고 독일에도 신(新)나치가 있다. 내가 살았던 러시아에도 외국인에게 무차별 테러를 일삼는 극렬 민족주의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 독일, 러시아 사회가 그들을 대하는 태도에 일말의 의구심이나 불안한 노파심이 들지는 않는다. 곧 사회의 병적인 부분으로 한 팔 접어두는 것이지 근간을 위협하는 요소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나는 왜 우리나라에서 부쩍 목소리를 높여가는, 정치적 갈등 현장에 어김없이 출몰하고 뉴스의 한 대목을 이루는 이 사람들에게서, 그들을 대하는 집권자들의 태도에서 불안한 의혹을 감지하는 걸까?
‘엄마부대(봉사단)’란 생소한 단체를 처음 대했을 때 지난 시절 그리고 지금도 억척스러움으로 가계를 꾸려나가는 어머니들의 이미지가 떠올랐다. 전투적이라 할 수도 있을 그녀들의 헌신과 열심을 ‘부대’란 명칭에 담은 것이려니 했다. 그러나 점차 그 의미가 아닌 것으로 확인됐다. 그들의 봉사(?)가 이름을 증명했다. 이를테면 사회적 체면 때문에라도 차마 말 못할 누군가의 말을 그녀들이 대신해주는 듯. 이발난초(已發難初). 괴악으로 논의를 차단하고 막장으로 논리의 입을 막는 것. 삼가고 거리낌 없는 집단적 태도가 ‘부대’의 자의식이다.
‘이제 아베의 사과를 받았으니 남은 여생 마음 편히 지내십시요.’ 그런데 이 말은 누구의 말일까? 어쩜 가장 원초적인 형태로 누군가 하고픈 말일 수 있겠다. 그리고 엄마부대가 그런 말의 도구라면 적어도 내게는 성공이다. 뉴스를 통해 그녀들 말하는 방식과 내용을 보게 되면 반드시 후회하게 된다. 몰랐으면 좋았을 부정에 닿은 것처럼, 다시 보고픈 생각이 들지 않았다.
열왕기하 3장에는 이스라엘과 유다의 연합군이 모압과 벌인 전투를 기록한다. 모압왕은 전세가 극렬해 어려워지자 결사대 칠백과 에돔 철퇴를 시도한다. 그러나 작전은 실패한다. 왕은 다급한 나머지 이스라엘 군이 지켜보는 가운데 세자를 성 위에서 번제로 불사른다. 기록에는 이 장면을 본 이스라엘에게 ‘크게 (하나님의) 격노함이 임하여’ 이스라엘군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각기 고국으로 돌아갔다고 썼다. 문제는 왜 하나님의 격노가 모압을 향한 게 아니라 이스라엘을 향했느냐는 점이다. 엄마부대를 대할 때 내 안에 이는 격노는 나를 향한다. 그것은 자신들을 엄마라 부르는 부대의 이질적 비현실성에서 발생한다.
나는 이것을 하나의 징후처럼 느낀다. 이런 엄마들이 국가 의제 전면에 나라를 선도해 나가는 것처럼 등극했다는 점. 그리고 그네들 목소리가 사회적 병리로서가 아니라 장려되고 확산 중인 세력으로 인식 소비되고 있다는 점. 물론 그런 인식과 소비의 매개는 언론이다. 언론 자의에 따라 국민들이 알고 싶고 알아야 할 사안조차 단 한줄 보도되지 않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보도해야 할 뉴스는 얼마나 많고 시간과 지면은 얼마나 부족한가. 그런데도 엄마부대 소동은 자주 야당대표 발언보다 비중 있게 다루어진다.
무엇이 저 엄마들―실제로 누군가의 엄마일 것이다―을 부대로 뭉치게 했을까? 이 내력 모르게 체득된 생의 분노를 엉뚱한 약자들 앞에서 표출할 사명을 부여받은 엄마 병사들은 정녕 누구일까? ‘봉사단’이라지만 봉사를 위해 모인 단체가 아닌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지난 시대 억척스러웠던 살림꾼 엄마들의 변태(變態)쯤 되는 건가? 어느 인터뷰에 자신들은 ‘강남(江南)에 살고 각기 대단하신 분들’이라는데, 어쩌면 이들과는 상관없는 강남과 대단함이 이들과는 상관없이 이들을 절망적 역기능으로 변태시켰는지 모르겠다. 지금 대한민국에서 인간들이 변태 중인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엄마의 변태는 모든 종류의 변태의 마지막이거나 완성이 아닐까? ‘어머니 무서워요. 저 울음소리, 어머니조차 무서워요’라 노래했던 기형도 시인의 예감이 확인되는 게 아닐까?
어버이연합
이 이름은 이미 고전이 되었다. ‘어버이연합’은 ‘엄마부대’의 원조이자 모태쯤 될 것 같다. 물론 명칭의 그로테스크함은 이들이 원조다. 어버이들의 연합이라니, 그러나 이 어버이들은 노년을 그럭저럭 안락하게 보내는 우리 동네 어버이들과는 다르다. 우리 동네 어르신들은 통상 매일 아침 마을회관에 모인다. 같이 밥 해 먹고 게이트볼을 치거나 화투를 잡거나 텔레비전을 보며 소일한다. 몇몇 분들은 아예 허클베리 핀처럼 친구들과 회관에 상주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 어버이연합의 어버이들은 평범한 노인들과는 다르다. 특히 유별나게 정치적이다. 이들은 보수단체 집회에 동원되거나 야당 및 진보단체들의 시민불복종 현장마다 출현해 종북몰이를 해댄다.
엄마부대의 무기가 ‘엄마(여성)’라면 이들의 무기는 ‘노인(늙음)’이다. ‘어버이’란 특히 자신들 ‘늙음의 권위’를 강조하는 명칭이다. 그래서인지 이분들 주장이나 말들은 꾸짖음 일색이다. 대상도 일관성 있다. 항상 야단치는 반대편을, 곧 정부나 여당이나 기업이나 보수언론을 회초리질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엄마부대에게 자애로운 엄마 자태를 기대할 수 없듯 어버이연합에게 따사로운 어버이 자태를 기대해선 안 된다.
엄마부대가 강남 사는 대단한 사람들로 자신들을 소개하거나, 자신들은 정치적 편향이 아니라 오로지 애국하는 엄마들이라 주장함에도 (적어도 내 주위에서)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은 별로 없다. 사실 그녀들을 어떻게 대해주어야 할지 모르는 그것이 그들의 무기다. 어버이연합 역시 어버이의 권위를 이름의 요구만큼 인정받지 못한다. 오히려 반대다. 사람들은 이들을 ‘가스통 할배’라 비난하지만, 가스통과 할배의 이질적 조합은 그 이질성만큼 슬픈 울림을 준다.
몇몇 노인들의 인터뷰에 실소한다. 민망하게 자신이 무슨 집회에 참가하는 것인지, 누구를 욕해야 하는 건지도 모른다는 진실을 쉬 드러낸다. 이들 중 80세가 넘어 거동조차 불편한 분들도 있다. 국민들은 이들이 누군가에게 동원된 노인일 것이고 그 대가도 받을 것이라 짐작한다. 미구엔 진상이 알려질 날도 올 것이다. 그러나 이 노인들에겐 자신들의 사회적 위상을 고려할 만큼의 여유 따윈 없는 듯싶다. 이 점 이 노인들을 미워할 수 없고 도리어 긍휼히 보게 되는 난센스를 낳는다. 누구인가, 우리 사회의, 엄마들이고 어버이들임에는 틀림없지 않은가. 미움 받고 비난 받아야 할 자들은 정작 누구일까?
동원이든 자발이든 어버이연합의 존재 의의 역할과 기능과 소비의 방식은 엄마부대와 동일하다. 이들은 선봉의 연대를 이룬다. 괴악으로 논의를 차단하고 막장으로 논리의 입을 막는 것. 역시 누군가 하고픈 말을 대신해주는 것이다. 싸워야 할 자들이 누구인지 조금 분명해지는 대목이다.
한기총
‘한기총’은 ‘한국기독교총연합’의 약자다. 나는 과거 ‘한기총 탈퇴선언’이라는 글을 써본 적이 있다. 누가 이들을 한국기독교의 대표기구로 세워줬는지 의문이 들었다. 그것은 가령 내가 지지하지 않는 대통령의 통치하에 살아가는 것과 같은 것일까? 지지하지는 않았더라도 이미 나는 거기에 가입되고 소속돼 그들이 어떤 입장을 표명할 땐 내 의지까지 거기 포함되는 그런 것일까? 그러나 그런 것이라면 이 경우는 국가의 경우와는 달라 내 기독교신앙으로 볼 때는 난센스일 뿐이다.
개신교 프로테스탄트 정신은 로마 가톨릭의 독재와 독점과 전체주의 지배에 반대해 진리사수를 위한 자유의 저항에서 시작되었다. 한기총이라는 이름은 정확히 그 반대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총연합’이란 명칭은 아무리 선의로 봐줘도 독재와 독점과 지배욕망에 다름 아니다. 그들은 내 동의를 구하지도 않고 나를 거기에 가입되도록 만들었다. 그래서 나는 그들이 한국기독교총연합의 이름으로 어떤 성명을 발표할 때마다 내가 거기에 가입되지 않았고 동의하지도 않는다는 점을 밝혀야 할 수고를 하게 되었다. 가령 이 문제는 그들의 회장 자리를 둘러싼 암투와 금권선거 같은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한기총의 회장이 누가 되든 회장이 되기 위해 얼마의 금전을 뿌렸든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러나 그들이 한국기독교총연합 이름으로 주장하고 표명하는 입장들은 내게 문제가 된다. 한기총은 세월호 사건 때도 그랬듯 위안부 문제 합의에서도 (적어도 내 판단에서) 이 나라 국민의 정의로운 양심과 인류적 진실 요구를 외면한 정부 여당에 협력하는 정치적 처신을 보여주었다. 놀라운 것은 12월 28일 한·일 간 밀담(密談)으로 성립된 합의에 한기총(한교연도 마찬가지)은 30일 발 빠른 찬성의 입장을 표명했다. 막 국민적 논란과 저항이 시작되던 시점이다.
한기총은 성명에서 ‘답보 상태였던 위안부 문제를 풀어 갈 단초가 마련됐다며 긍정적으로 평가’한다고 했다. 이렇게 되면 정부 합의나 한기총의 성명이나 마찬가지다. 내용을 떠나 누가 어떤 합의의 과정을 통하여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로 합의했단 말인가? 또한 ‘일본 정부가 책임을 통감하고, 군의 관여를 인정한 것은 외교적 합의의 큰 성과’라 했다. 일본 정부가 책임을 통감했는지, 군의 관여를 인정했는지, 독심술이라도 있는 건가? ‘외교적 합의의 큰 성과’란 말 그대로 정부의 아전인수식 자기광고에 다름 아니다. 과시 한국기독교가, 총연합하여, 왜 정부의 면피용 홍보를 대행해주는 것인가? 그뿐 아니다. ‘일본 정부 예산으로 기금을 조성하기로 한 것도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한 배상으로 봐야 한다.’ 그 기금은 일본 정부예산도 아닐뿐더러 ‘배상’도 아니고 ‘배상으로 봐야 한다’라 한다.
나는 한기총의 그 재빠름과 친(親) 권력 일변도의 행태가 너무나 야속하다. 세월호든 위안부 문제든 누구보다 고통 하는 유가족과 피해자들의 입장에서 가해자와 책임자들을 향해 그들의 하지 못하는 말을 대신해주어야 할 기독교가 아닌가? 그런데 과연 누구의 하지 못할 말들을 대신해주는 것인가? 비록 내가 가입한 바 없는 총연합이라 할지라도 나는 그들이 좀 기독교의 위상을 세상권력 위에 드높이는 내용을 가졌으면 싶다. 가졌어도 지지할 바 없을 텐데 하물며 갖지도 못했으니 무슨 말을 더하랴. 그러나 한기총이 엄마부대나 어버이연합처럼 항상 동일한 기능과 역할을 한다는 점만은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한기총이 정녕 정부의 종교분야 기독교 파트의 관변단체로 인식되기를 바라는 기독교인은 없을 것이다.
고상한 선생들
구랍 24일 <중앙일보>에 실린 이재철 목사님의 성탄 인터뷰 기사를 읽었다. 같은 무렵 페이스북에선 이어령 선생님과 이재철 목사님의 대담이 실린 기사가 링크되어 회자되었다. 2011년 것이었다. 나는 이 두 기사에서 동일관점의 동일 문제를 보게 되었다.
이어령 선생님은 성경읽기는 신학의 문제가 아니라 국어 실력의 문제라 주장했다. 나는 이점 전적으로 동의했다. 그는 ‘사람이 떡으로만 살 수 없다’는 성경구절에 대해 국어 실력 문제를 제기했다. ‘빵만으로 살 수 없다’와 ‘빵으로만 살 수 없다’는 포함과 배제라는 전혀 다른 뉘앙스를 담고 있는데 우리는 모두 ‘배제’의 뜻으로 읽고 있다는 것이었다. 말인즉 ‘빵만으로 살 수 없다’고 할 때는 빵도 중요하고 또 다른 중요한 가치도 있다는 뜻이 되지만, ‘빵으로만 살 수 없다’고 해버리면 빵에 대한 배제가 된다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은 한 번도 ‘빵이 필요 없다’고 하신 적이 없고, 기독교에서 빵은 정말 중요하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빵의 중요성 사례를 열거했다.
나는 한참을 ‘빵으로만’과 ‘빵만으로’가 어떻게 이 성경 본문에서 포함과 배제의 차별적 구문이 되는지 이해해 보려고 내 국어 실력을 다 동원해 노력해 보았다. 너무 집중했던지 나중엔 머리가 하얗게 됐다. 그런데 딱히 그 말에 동의할만한 어감에 도달하진 못했다. 이어령 선생의 구분법은 그저 빵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한 말장난(wordplay)에 불과하다고 느껴졌다. 그리고 그것은 빵을 무시하는 기독교적 해석에 대한 그분의 주관적 불만족일 것이다. 하지만 이어령 선생의 그 주관적 불만족 때문에 그 구절은 마침내 빵의 중요성으로 도로 환원되고야 말았다.
그런데 빵의 중요성이란 게 무엇일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일까? 그것은 그 반대를 생각해 보면 어느 정도 짐작이 간다. ‘인간이 빵으로만 사는 게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 했을 때 오로지 빵으로, 빵의 논리와 권력과 원리로 살아가는 자들의 빵 일색에 대한 배제의 정신이 강조된다. 이어령 선생님이 말씀한 포함이 아니다. 도리어 철저히 그것을 배제해 버림으로써 예수님은 마귀의 유혹을 완전하고 단호하게 물리치셨다. 그리고 이런 배제는 그가 걱정하는 것처럼 빵을 무시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빵의 권세와 그 유혹을 너무나도 꿰뚫어 아시기 때문에 하신 말씀이다.
이에 대해 이재철 목사님은 “오병이어의 표적을 베풀고 돌덩이로 떡을 만드는 게 기적이 아니라, 그렇게 할 능력이 있음에도 하나님 말씀을 목적으로 삼는 삶, 그것이 기적임을 우리가 깨닫게 된다”며 “먹는 걸 목적으로 삼는 삶은 결국 고깃덩어리 위에 사는 것이지만, 예수님께서는 먹지 않는다는 말씀이 아니라 먹더라도 보다 높은 ‘영원하신 말씀’을 목적으로 사는 수단으로 먹으심을 알 수 있다”고 거들었다.(라고 기사는 쓰여 있다.)
표면적으로 이 목사님의 말씀은 이 선생님의 말씀과 부합하지 않는다. 이어령 선생님은 빵의 중요성을 기독교가 간과했음을 지적함으로써 논의를 출발한 것이고, 이재철 목사님은 빵을 목적으로 삼는 삶을 고깃덩어리에 불과한 것으로, 빵을 가차 없이 폄하해 버린다. 서로 같은 말을 하는 것 같으나 다른 말을 하는 중이고, 다른 말을 하면서도 같은 말을 하고 있는 중이다. 내 생각엔 두 분이 다 예수 말씀의 진의를 주관적으로만 생각하시는 게 아닌가 싶었다. 어느 경우 빵의 논리와 원리와 권세는 철저히 부정되고 배제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빵을 추구하고 빵의 정의를 희구하는 삶이 고깃덩어리의 삶에 불과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 반대다. 따라서 어느 경우는 철저히 빵의 중대함을 한 조각까지라도 강조해야 한다. 이 두 가지 지점을 한군데 모아놓고 전체 상황을 도매로 매기는 것도 국어 실력의 문제는 아닐는지.
내가 진실로 하고자 하는 말은 두 분의 성경 해석이 대개는 그리스도께서 배제한 빵의 논리를 도리어 중대하게 논하거나, 그리스도께서 중대히 여기신 빵의 문제를 너무나 가볍게 배제해버리는 주관적 태도에서부터 기독교사상의 대의에서 벗어나게 된다는 점이다. 같은 논리적 관점으로 이 목사님은 성탄 인터뷰를 통해 흙수저들의 자조(自嘲)를 비판했다. 스티브 잡스나 조지 루커스처럼 노력하면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는데 흙수저 금수저 같은 빵의 논리에 갇혔기 때문에 박탈과 좌절감에 빠진다는 것이었다. 또한 같은 논리적 관점, 교회 안에는 여/야와 보수/진보 좌/우가 다 함께 공존해야지 어느 한편에 치우쳐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러나 묻고 싶은 건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눅 5:23) 하는 질문 식으로 바로 이거다. ‘한국교회의 정치 편향이 문제시 될 때 과연 ‘진보 일색’이 문제일까, ‘보수 편향’이 문제일까? 어느 것이 진짜 문제일까?’ 신학적 보수주의가 그대로 정치적 보수주의로 전화되어 있는 한국교회에서 말이다.
고백건대 나는 엄마부대나 어버이연합이나 한기총처럼 이어령 선생님이나 이재철 목사님의 강의와 설교들 역시 어떤 말들을 대신해주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차이라면 도구와 방식의 적나라함과 고상함의 차이랄까. 물론 그분들이 내 말에 동의할 리 없겠지만, 오해가 우려되기도 한다. 그분들이 모종 의식적으로 의도적으로 그렇게 말하고 행동한다는 뜻이 아니다. 이런 판단에 비난이나 조롱의 의도도 없다.
나는 내 변명을 미하일 바흐친이 설명한 소설미학의 다성성(多聲性, polyphony)이라는 이론에 기대어 본다. 바흐친에 따르면 소리(설교)의 생산자(수신자도)나 그 소리 자체는 벌써 어떤 사회적 맥락에 속해있다. 설교자는 자신의 특별 환경에 의해 형성된 특정 사회나 특정 언어 공동체에 소속되어 있다. 중립을 가르치든 편향을 설파하든 그는 벌써 자기가 속한 사회 상황의 개체인 것이다. 하고픈 말의 핵심을 둘러싼 중립의 점잖은 포오즈와 지식의 고상한 분위기란, 초점을 모호하게 하는 권위의 도구이자 변명을 가려주는 목책들이 아닐까? 생각기에 진정한 설교자라면 국어 실력 못지않게 자신에 관한 중립과 객관이 절실하다. 내가 그렇다는 것을 알고서 인정하면서 하는 설교랄까? 그러면 굳이 중립을 강조하거나 편향을 꾸짖을 필요가 없을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일찍이 감독 직분에 대해 ‘믿은 지 얼마 안 되는 사람이 감독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그가 교만해져서 마귀가 받은 것과 같은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딤전 3:6)라 쓴 바 있다. 우리는 모두 믿은 지 얼마 안 되는 초신자에 불과할지 모른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마치 창세 전부터 통달했고 태생으로부터 노숙한 이 모습으로 살아온 것 같은 태도를 보인다. 다만 ‘예 예, 아니오 아니오’ 하는 맛(멋)이 없다. 중요한 것은 ‘누구의 무슨 말을 해주려는 것인가’ 하는 문제다. 엄마부대든, 어버이 연합이든, 한기총이든, 고상한 선생들이든. 흐르는 강물처럼.
천정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