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에 대한 그리움의 시작은...
저는 맞선을 보고 어른들이 정해준대로 배우자를 택했다
결혼하기전에 두달정도 자주 만나서 밥도먹고 영화도보고 어두컴컴한 찻집에도다녔다
아내도 보수적인 가정인지라 별다른 마음이 없었다
저도 아이가 테어나고 십여년이상을 살아왔지만 그냥 그런느낌이고 애절한 마음이
있었냐 싶었다
그리고 저는 직장에서 세상에 내쳐져서 아주 정신적으로 혼란하게 살았다
그런중에도 저는 성당에 가서 매달렸지만 아내는 집에 방치되었지만 그 아내는
결심을 해서 집에서 가까운곳에서 옷가게를 열었다.
임대료가 있는 매장이 아니라 수수료매장이었다. 어느정도 보증금만 걸면 팔지못한
나머지는 다 반품이 가능했지만 일하는시간에 비해서 들어오는 수익은 낮은편이다.
저는 그때에는 어디라도 갈수가 있었다
그래서 얻은기회가 포항에서이다. 저는 포항에 있는 직장을 택하면서 그 회사에 몇가지를
요청했는데 주거지를 제공해야한다고 했다
회사는 포항시내에 있었지만 제가 일하는 포항제철은 공단안에 있었고 시가지에서 다리를
건너가면 여러회사가 있는 공단이 있었다.
공단안에 해군부대가 있고 그안에는 서울을 오가는 여객기를 만날수가 있었다
서울에서 포항까지는 기차선이 놓여있지만 동대구에서 경주를거쳐서 포항을 가는기차선로는
단선이었다. 서울로 오는 기차는 하루 2번 새마을호였다. 한번은 포항에서 출발하고 또다른
한번은 울산에서 출발하는것이었다
포항공항을 지나서 언덕위에 숙소가 마련되었다
시내에서 구룡포로가는 좌석버스가 유일한 대중교통이었다 저녁때 이버스를놓치면
택시를 타고 다녔어야했다. 숙소안은 세탁기와 냉장고만있었고 동료 몇사람이 같이 살았다
그곳에서 식사를 하지는않았다. 아침일찍 내려와 회사버스를 타고 도착하면 먼저식당에
가서 아침식사를 했다. 그리고 근무하고나서 점심 저녁식사를 하고 집으로 곧장 오지않고
저녁근무조가 퇴근할무렵인늦은저녁에 퇴근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곤했다
아직 서울에 아는 사람들도 많고 해서 처음 얼마동안안 매주 서울로 올라갔다
처음 서울로 갔을때를잊을수가 없었다. 성탄전야일이었다 가족 3명이 같이나왔다
성당근처에 있는 식당에서 같이 저녁식사를 했다 얼마만인가 하는 생각에 감회가 새로웠다
아내도 같은 생각이었을 것이다. 그날 저녁은 저를 축복이라도 하듯이 성당마당에는 눈이
내리시시작한다 아이들은 강아지모양 데굴데굴 굴렀다
그리고 그다음날 저녁에 다시 대구로 내려갔다. 대구에 부모님이 계시기에
거기서 하루밤을 자고 그다음날새볔에 직장으로 바로갔다
한달에받는 돈은 200만원인데 저는 어떤일이 잇어도 집에 150만원을 보내야하겠다는
다짐을했다. 몇 년동안 집에한푼도 가져다주지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요 제가 식비와 용돈에다가 매주 서울을 오고가고 할 수는 없었다
서울에 올라달려면 기차나버스를타고 가야했고 모처럼 가게되는데 빈손으로
갈수가 없었다. 주말에 가게되면 적어도 10만원은 쓴 것 같았다. 그래서 몇 달이가기전에
저는 한달에 한번도 안되게 올라간 것 같았다. 평일 근무하는 날은 별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가장 힘들었던 것은 주말이었다. 토요일오후서 부터는 일요일내내 회사식장은
운영되지않았다. 가까운 경주에 있는사촌형집에 가기도 하고 부모님이 계시는 대구로
가기도 하였다. 대구에 매주 갔던 것 같았다
세월이 흘려 봄이 되고 낮이점점 길어지지만 저녁이 되면 어둠이 몰려오고
언덕위로 올라가게되면 반대쪽 바닷쪽에는 불빛이있는 여러집들이 있었다
홀로 올라가면서 잠시 집에 들어가기 전에 밖에 머물러서 먼곳을 바라본다
내가 왜 홀로 쓸쓸히 이런생활을 할까 하는 마음이 온몸에 전율을 이룬다
아내가 보고싶고 아들이 그리워진다. 같이 살고있었을때에 그 애틋한 마음이 있었느냐
싶었지만 그때 그느낌은 말로 다할 수가 없었다
포항을 떠나기전에 몇 달동안은 일이없어서 사무실에 가서 하루종일 시간만 보내다가
그냥돌아오곤했다 사장님이 하루는 불러서 더 이상 도와줄수가 없다고 하셨다. 회사에 아무런
매출에 기여하지않으면서 회사로부터월급을 받아왔던 것이다. 아침은 포철식당에서 해경한다
고 하지만 점심저녁은 식당에서 해결했어야 했다
점심은 가까운식당에서 한다고 하지만 숙소에까지 들어와서도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속옷을 삶기위해서 전기곤로를 구입했다. 이는 저녁준비를 위한 도구이기도했다
라면에다 순두부를 넣어 먹는습관이 생겼다. 다른사람들은 저녁을 먹으러 간다면 밖으로
나갔다. 다들 단기간계약으로 들어왔기에 언제까지 출근이 가능한지도 알수가 없어서
사람들 모두가 굉장히 예민하였다. 친한 부산친구가 어느날 갑자기 차를 갖고와서
시내에 가자고 했다. 사내에 가서 간단히햄버거를먹고 그근처에 있는 성당에 들어가보자고
했다. 그때에서야 그의 마음을 읽을수가 있었다.
그는 저에게 대뜸 안수기도를 해달라고 했다. 그는 내가 성당에 다니는 줄은 알았지만
그는 평소에 관심이 별로 없었는데 얼마나 절박했으면 그런말을할까 하는 생각을 했다
같이 살았던 아내와 아들이 그리워지는 시기였다
일요일에 포항에 있을경우에는 포항시내에 있는 성당에 나갔다
포철다니던 분을 만나서 레지오회합에도 함께 했다. 때로는 단장님이 집으로 초대하기도
하셨고 자주 회합후에 술집에서 간단한나눔을 가졌다 포항에서 싼안주가 과메기였다
저에게는 잘 맞지않았다 기름기가 많아서인지 이를 먹고나면 설사가 나오곤했다
회합후에 간단한 술자리로 마음놓고 할 수가 없었다. 숙소로 가는 좌석버스가 일찍 끊어지기
때문이었다. 택시를 한번타게되면 2~3일식사비가 들어가기때문이었다.
포항에서는 12개월간 있었는데 8개월간은 정신없이 근무를 했고 거의대부분의 시간을
공장내에 머물렀다. 그리고 문제는 나머지 4개월간이었다. 그기간동안 저녁6시이면 숙소로
돌아가야 하는시간이기에 여유있는 시간에 어디로 갈수도 없고 만나지도 못하고 하는
서글픔이밀려들었다. 여름 어느날 아주무더운날이었다 모처럼 포항시내를 나갔다 가방을
가지고 나갔다 북부해수욕장 백사장에 겉옷을 벗어서 가방속에 놓고 저는 바닷물속에
들어갔다. 그리고 바닷물에 적은 옷을 조금 말린후에 그몸으로 2시간이걸려서 기차를
타고 대구부모님 집으로 왔다. 그곳에서 옴몸을 씻었다.
아내와 저는 먹고살기위해서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방치하였으며
그로인하여서 대학을 중도에 그만두게했으며 그는 새상에서 자신감을 잃게되어서
30대후반인 지금도 제역할을 하지못하는 안타까움이 있다.
친척을 만나든가 누구를 만나도 아들이야기를 잘 하지 않는 바릇이 생겨난다
다 이들은 아버지를 잘못 만난 탓이라 여겨진다
이글을 쓰는 지금도 안쓰럽고 저의 잘못으로 속쓰리기도 한다
지금은 매주 한두차례 성당이나 바깥에나갔다 올때에 아들이 사는집에 잠시
들렀다 이런저런 애기를 해주곤하지만 늘 안타까운 마음뿐이다
엄머라고해서 일주일에 2번쉬는날이면 아들집에 가서 돌봐주는 것 같다.
이모든 것이 저로 비롯되었음을 늘 생각한다
저는 포항생활이후 서울로 올라와서 우리은행에서 일년간 근무했다
한두해 더 실직하다가 사촌동생의 도움으로 안산시청에서 계약직으로 근무할 수가 있었다.
최저임금의 수준이었지만 아내는 늘 나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다니라고 하였다
아내는 저도 모르는사이에 알게모르게많은 공부를하였다
모자라는 아들과 저를위해서 말이다.
다행히도 대구와 경주에 살고있는 처고모님이 계셔서 가끔씩 아내를 불러서
위로도 해주고 같이 식사도 하는 모양입니다
이모자라는 놈이 저의 부족한 마음을 정리하면서 이글을 쓴다.
우리부부는 이런 애뜻한 마음이 서로에게 어려움을 경험하면서 더욱 새록새록 다져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