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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BC 성서연구 - 제21B강 역대기상하 메시야 왕국의 대망
(20) 참아서 이기는 승리(1) 역대상 19:1-5
어디를 가든지 가는 곳마다 승리를 안겨주시는 하나님, 자기와 자기의 집이 무엇이관대 그토록 사랑해주시고 돌보아 주시는지, 하나님이 맺어주신 놀라운 언약 속에서 다윗은 늘 승승장구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자기만 받고 자기만 누리는 사람이 아니었지요?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의 의미를 잘 알았습니다. 오늘 내가 받은 은혜는 흘러 보내라고 주신 것이지요?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과분한 사랑을 받고 있으니, 나도 하나님의 은혜를 베푸는 사람이 되는 것이지요? 특별히 지난 수요일 본문 18장 14절, 다윗이 온 이스라엘을 정의와 공의로 다스리는 왕이 되었다고 이야기하는데, 엄정하게 법대로, 검사왕국을 만든 것이 아닙니다. 지켜보고 있다가 책망하고 바로잡는 일만 하는 것이 아니지요? 정의와 공의로 다스리는 왕, 그는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흘러 보내는 왕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 그 놀라운 언약으로 베푸시는 은혜를 경험한 다윗은 신실함으로 이웃을, 백성을 돌아보는 것이지요? 그렇게 자기에게 빚진 자의 빚을 탕감해주는 것입니다. 죄인의 죄를 용서해주는 것입니다. 갚아주어야 할 원한을 오히려 은혜로 갚아주는 것이지요. 역대기에는 요 내용이 생략되어 있는데,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를 깨닫고 누리고 있는 다윗은, 오늘 요나단을 기억합니다. 사무엘하 9장 1절입니다. “다윗이 이르되 사울의 집에 아직도 남은 사람이 있느냐 내가 요나단으로 말미암아 그 사람에게 은총을 베풀리라 하니라”
여러분, 은혜를 입은 사람이 은혜를 베풉니다. 사람에게 은혜를 입어야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는 사람말고, 하나님께 은혜받은 사실 하나로,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 수 있는 사람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무엇보다 내게 도로 갚을 수 없는 사람에게, 아니, 그 이전에 먼저 내가 크던 작던 은혜를 입은 사람에게, 나를 사랑하고 아껴주고 희생해준 사람에게, 은혜를 갚아나가는 사람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오늘 다윗은 사울의 집안, 요나단의 아들이 아니었어도, 요나단을 생각해서 사울의 집안에 남아있는 자손을 돌보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 남아 있었다고요? 그토록 그립고 만나고 싶은 요나단의 아들이 남아있었던 것이지요. 당장에 그를 찾아 그의 조부 사울의 재산을 돌려주고, 남은 생애 다윗과 함께 한 상에 앉을 수 있도록, 모든 지위와 존귀함을 회복시켜주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받은 하나님의 은총을 나만의 것으로 고립시키지 않고 고여있어 썩는 것으로 만들지 않고, 늘 새로운 은혜를 누릴 수 있는 삶을 살았던 것이지요.
그렇게 은혜를 기억하며 은혜를 베풀며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를 행하려 살고자 할 때, 오늘 본문 다윗에게 또한번, 은혜를 베풀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암몬왕 나하스가 죽고 그 아들 하눈이 암몬의 왕이 되었던 것이지요? 다윗이 조문 및 축하사절단을 보냈던 것입니다.
“후에 암몬 자손의 왕 나하스가 죽고 그의 아들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 다윗이 이르되 하눈의 아버지 나하스가 전에 내게 호의를 베풀었으니 이제 내가 그의 아들 하눈에게 호의를 베풀리라 하고 사절들을 보내서 그의 아버지 죽음을 문상하게 하니라 다윗의 신하들이 암몬 자손의 땅에 이르러 하눈에게 나아가 문상하매”(대상19:1-2)
언제였지? 궁금해서 제가 성경과 주석을 뒤져 확인한 결과, 암몬왕 나하스에게 다윗이 은혜를 입은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성경에서는 확인이 되지는 않는데, 학자들은 이 본문 주석에서 두 가지를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는, 다윗이 왕이 되었을 때, 나하스가 축하사절을 보내왔지 않았을까, 또 하나는 사울과의 전쟁에서 이미 한번 크게 패했던 나하스가 훗날 사울로부터 도망 다니던 다윗을, 적의 적은 동지라고 하듯, 조금 보살펴준 적이 있을 것이라는, 추측으로 이루어진 두 가지 견해가 있었습니다. 어느 것이 맞는 것인지는 이제 천국에 가서 다윗에게 물어보기로 하구요. 본문이,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다고 하니 더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으려 합니다.
다윗은 오늘 이 나하스에게 받은 은혜를 기억하면서 선왕의 죽음을 조문하고 새로운 지도자와 좋은 관계를 맺고자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랬더니 오늘 그 신하들이 이렇게 반응합니다. 3절입니다.
“암몬 자손의 방백들이 하눈에게 말하되 왕은 다윗이 조문사절을 보낸 것이 왕의 부친을 존경함인 줄로 여기시나이까 그의 신하들이 왕에게 나아온 것이 이 땅을 엿보고 정탐하여 전복시키고자 함이 아니니이까 하는지라”(대상19:3)
나라 안의 대소사는 물론이고, 외교적인 일에도 여러 가지 해석과 견해의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을 여러 사람에게 듣고 조율하고 가장 좋은 결정을 내려야 하는 것이 이제 지도자인 것이지요? 그리고 그 결정에 대한 전적인 책임은 이제 조언한 백성이나 신하가 아닌, 결정을 내린 왕이, 지도자가 지는 것입니다. 암몬의 모든 신하들이 다, 다윗에 대해서 험담을 한 것인지, 아니면 일부 다윗에 관한 좋은 해석들을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배제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저신하들의 조언들을 종합해, 오늘 저 새로운 어린 왕 하눈은, 다윗이 암몬을 넘보는 것으로, 그 신하들을 모조리 간첩이요, 스파이요, 정탐꾼으로 간주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르호보암과 그와 함께 자라난 엘라딤이라고 불리운 어린 신하들 같은? 그런 느낌이 들죠? 그래서 결국 자신에게는 불행이요, 다윗에게도 마음이 상하는 결과를 낳게 되었던 것입니다. 선의를 악의로 오해하고 왜곡한, 오늘날 우리도 늘상 겪으며 괴로워하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꼭 기억하십시오. 내가 기꺼이 은총을 베풀려는 좋은 의도와 생각으로 말미암은 말과 행동이, 상대방에게도 늘 선의로 좋은 행동으로 받아들여지지는 않는다는 것을 말입니다. 사람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아주 이기적이고 연약한 존재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필요하고 돕는 배필이 필요하고 늘 반성과 자기성찰이 필요한 것입니다. 놀라우신 조언자가 그래서 필요한 것입니다. 주변의 작은 입김에도 전혀 다른 해석을 내려버리고 마는 연약한 인간, 우리 주변에 늘 좋은 사람들, 좋은 이야기, 좋은 계획, 좋은 생각, 좋은 기준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허락해 주시기를 우리는 늘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자녀들은 더더욱 좋은 선생님과 좋은 친구들을 만나는 축복을 하나님께서 더해 주셔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하눈은 어찌하여 정확한 근거도 없으면서 다윗의 사절단을 의심하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을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중 하나는 나보다 잘난 저 다윗을 향한 시기심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 다윗은 인기 절정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 오늘 마귀는 이런 다윗의 성공과 인기, 하나님의 법도대로 살며 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이 되어, 직접 집을 세워주시겠다며 언약하시고 축복을 베푸시는, 어딜 가든지 늘 도와주시고 승리케 하시는 다윗이 견딜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저 다윗을 어떻게든 무너뜨리고 싶었는데, 오늘의 악역, 마귀의 생각에 사로잡혀 하지 말아야하는 행동을 저지르고 마는 존재로, 오늘 저 신생왕 하눈이 선택되고 말았던 것이지요? 마치 사탄이 가룟유다에게 예수 팔 생각을 집어넣어(요13:2) 예수님을 넘겨주게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놀라운 것은 미담이나 좋은 소식은 잘 전해지지 않고 이내 묻혀버리고 마는 반면, 악의 적인 소문, 좋지 않은 소문은 정말 침소봉대하여 금새 퍼지게 된다는 것이지요? 이때 그 소문은, 세 사람이 모여 만들어낸 없는 호랑이는, 아니 땐 굴뚝에 피어올랐다고 증언된 그 연기는, 그 소문의 당사자를 정말로 고통스럽게 하고 죽게 만드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애매히 고난을 당하고 수치를 당하게 되었을 때, 여러분, 오늘 다윗처럼 오해를 받고 그들의 해석과 판단과 반응이 상상의 나래 속에 나온 전부 거짓이요, 참으로 속상하고 억울할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나의 본심을 알리기 위해서 가서 심장이라도 꺼내서 보여주어야 할까요? 나는 그런 뜻으로 한 것이 아닙니다. 나는 모르는 일입니다. 찾아다니며 변명이라도 해야 할까요?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바는, 참아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반응한들, 저들의 눈에는 암몬을 멸하려 하는 다윗으로밖에, 우리의 모든 말은 오늘 저에게 치졸한 변명으로밖에, 거짓말로밖에 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럴 때는 “저들이 또 마귀의 사주를 받아 나를 시기하는구나”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저들의 마음속에 또 사탄이 악한 생각을 집어 넣었구나. 마귀가 또 오늘 나를 넘어뜨리려고 사람들에게 참소하고 있구나.” 이렇게 생각하시고 오히려 반응하지 말고 지켜 보시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펴나가도록 놔둬 보세요. 저가 어디까지 추하고 못나게 생각을 하게 되는지, 그 사람의 본성의 악함과 추함을 다 보게 될 것입니다.
‘아, 저 사람이 여지껏 나에 대해, 인간에 대해, 세상에 대해 저런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구나.’를 얼마나 위선과 거짓으로 사람들을 대해 왔던 가를 확인하게 되실 것입니다. 그러니 이 참아 기다리는 것은 어쩌면 더 힘들고 고통스러운 시간일 수도 있습니다.
또한 여러분, 어제까지 호의적이었던 사람이 오늘 나에게 적대적인 사람이 되는 것을 하나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사람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신뢰할만한 대상이 아닌, 긍휼히 여기고 사랑해줄 대상인 것이지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히13:8), 그래서 오늘 우리가 경배할 수 있고 경배해야 하는 믿고 의지할 유일한 분은, 한 분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보십시오. 오늘 하눈에게는 시기하는 마음에, 경쟁심리도 작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아버지는 어리석어서 너에게 은혜를 베풀었는지 모르지만, 나는 아버지와 다르다! 그쵸? 다윗의 신하들을 망신 줌으로 다윗의 콧대를 한번 꺾어주고 싶은 마음이 오늘 하눈을 어리석은 결정을 내리도록 만들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다윗왕의 사절단에게 크디큰 치욕을 경험하게 만듭니다. 4절 볼까요?
“이에 하눈이 다윗의 신하들을 잡아 그들의 수염 절반을 깎고 그들의 의복의 중동볼기까지 자르고 돌려보내매”(대하19:4)
조문을 받고 축하를 받기는커녕 실컷 모욕과 수치심만 주고 돌려보낸 것입니다. 오늘 이 사람들이 겪은 일은 당시 사람들에게 있어서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낫다고 하는 참으로 치욕스러운 일이라고 합니다. 수염을 잘리고, 의복을 잘립니다. 중동볼기까지 잘렸다고 이야기하는데, 이것은 엉덩이 부분까지 옷을 자른 것으로 속옷을 입지 않은 사람들이 앞뒤로 하체가 다 드러나는 부끄러움을 당하도록 한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의 복장을 여러분 잘 아시지요? 위로부터 아래로 통으로 짜낸 옷입니다. 그래서 옷도 되고 이불도 되는 것이지요. 법궤를 메어오던 날 다윗이 베옷을 입고 막 춤을 추니까 하체가 다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갈이 핀잔을 했던 것이지요? 당시에 유일하게 속옷을 입었던 사람들이 제사장들입니다. 내 제단에 오르거나 회막에 들어올 때 네 하체를 보이지 않게 허리부터 허벅지까지 속바지를 만들어 입으라고(출28:42) 그리하지 않으면 죄를 짊어진 채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이지요? 우리 하나님은 의관을 정제하여 갖추어 입으며 두려움으로 섬겨야 했던 것입니다.
이게 어떤 의미죠? 사절단이 당한 치욕은 곧 다윗이 당한 치욕과 같은 것입니다. 자신을 반토막짜리 취급하며 권위의 상징인 수염을 잘라버리는 하눈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제가 다윗의 입장이었으면 아마 당장에 군대를 소집했을지도 모릅니다. 은혜를 모르고 원수로 갚는 저 배은망덕한 나라를 싹 지워버리라고 명령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다윗은 그만큼 힘도 실력도 능력도 있었던 왕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가는 곳마다 이기게 해주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아주 선하고 좋은 마음으로 갈멜 사람 나발에게 다윗이 종들을 보냈던 일화가 떠오르시지요? “각기 칼을 차라” 아비가일이 아니었으면 나발의 집은 그날로 끝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다윗은 왕이 된 이후여서인지, 그 일을 겪으면서 왕으로서의 정체성을 확고히 한 까닭인지 이 모욕을, 이 수치를 참는 것입니다.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 모든 분하고 불쾌한 감정을 하나님의 손에, 하나님의 심판에 맡겼던 것입니다. 그리고 신하들이 오늘 당한 모든 부끄러움과 상처를 씻을 수 있도록 그들의 모든 일에 성심껏 배려 하는 것입니다. 그 장면을 함께 보십니다. 5절입니다.
“어떤 사람이 다윗에게 가서 그 사람들이 당한 일을 말하니라 그 사람들이 심히 부끄러워하므로 다윗이 그들을 맞으러 보내 왕이 이르기를 너희는 수염이 자라기까지 여리고에 머물다가 돌아오라 하니라”(대하19:5)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요? 내 이름으로 나아갔던 사절단이 망신을 당했다는 소식을 들었다면 말입니다. 좋은 의도와 은혜를 베풀겠다는 마음으로 나를 대신할 사람과 선물을 보내었건만, 말할 수 없는 모욕으로 돌아오게 되었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것을 그대로 감정적으로 대응해서 싸워야 하겠습니까?
아니면 없었던 일로 생각하고 그저 가만히 있어야 하겠습니까?
우선 감정적으로 대응해서 싸우려 하면 우리는 똑같은 인간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사실 똑같은 인간이기에 오늘도 이땅의 싸움은 멈추지 않는 것이지요. 그렇다고해서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자니 상대방인 자기가 이겼다고 생각하고 자기 주장이 옳다고 더욱 의기양양해서 떠들어댈 모습이 참 불편합니다.
게다가 대개의 경우 이럴 때 속좁은 리더들 같으면 오히려 그 신하들에게 호통치고 분풀이를 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들이 경험한 상사들은 어떠셨습니까? 지금 여러분들은 어떤 상사가 되어 계십니까?
“어떻게 일처리를 해서 일이 이렇게 되었냐” “너희들을 믿고 어떻게 일을 맡기냐!” “너희들이 칠칠치 못하니 이런 결과가, 이런 말들이, 이런 도전들이 생겨난 것이 아니냐!” 저 킹더랜드 구화란처럼 “저거 치워!” 여러분의 직장에서는 이런 말들을 조금도 듣지 않으셨기를, 그리고 여러분도 이런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으셨기를 바랍니다.
다윗은 역시 리더였습니다. 자기 왕에게 누가 되지 않도록, 사절단으로서 모든 경우에 예를 다하며 격식을 갖추었을 것을, 다윗에게 누가 되지 않도록, 오늘 그 사절단이 다윗의 이름으로 최선을 다했을 것을 다윗은 믿고 있었고 그 믿음대로 저들을 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단 한 마디도 사절단을 나무라거나 질책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크게 부끄러워하고 송구스러워하는 신하들을 배려해서 한동안 여리고에 머물도록, 그곳에서 수염이 예전과 같이 다 자라도록 기다려 주고 좋은 옷을 보내서 부끄러움을 씻고 돌아오도록 배려해 주는 것이지요. 이런 수치를 전혀 경험하지 않은 것처럼, 다른 사람들이 아무도 모르게끔, 그들의 입장을 생각하고 돌아보아 주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보십시오. 다윗은 감정적으로 일을 처리하지 않습니다. 신중하게 참았고 기다렸던 것입니다. 여러분도 일단 참으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께 늘 맡기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이 해결해주실 것입니다.
변명, 변호 이런 거 안하셔도 됩니다. ‘그럼 왜 그때 말 안했냐’고 ‘저건 입이 있어도 할 말도 못한다’고 자기 멋대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인간들의 그릇 앞에, 우리의 변명, 우리의 변호는, 저 돼지우리에 던져진 진주같이 훼손되기만 할 뿐입니다.
하나님께 맡기면 하나님께서 오해도 풀어주시고, 높일 자는 높이시고 낮출 자는 낮추십니다. 여러분, 이렇게 맡기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이 억울함을 계속해서 감수하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정말로 도저히 미칠 것같이 참기 어려운 순간, 한 번 더 참아보시길 축복합니다. 오늘 다윗에게 허락하시는 승리를 마침내 우리에게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 나는 오늘 왜 하나님께 못 맡기고, 왜 인내하며 참지 못할까요? 하나님께 맡겼다가는 내 속내가 다 들통나고, 사건의 진실이 밝혀져, 오히려 반전이 일어나는 저 무수한 사건들처럼, 알고보니 다 내가 잘못한, 초라하게 낮춰질 자이기 때문은 아닐까요? 내가 다윗의 입장이 아니라, 하눈의 입장이기 때문은 아닐까요?
자, 다윗이 참고 기다립니다. 잠잠하고 길이 참습니다. 은혜를 원수로 갚는 은혜를 모르는 자에, 거기에 악행을 행한 이들을 참습니다. 힘이 있지만 참습니다. 하나님께 맡깁니다.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다음 수요일 저녁에 이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오늘도 참아야 할 일이 생기실 것입니다. 못 참고 파르르 불같이 일어나지 마시고, 일주일만, 아니 하루만 더 참아보십시오.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시게 될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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