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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에 남는 또 한 분의 스승
지오 홍사성(知吾 洪思誠)|불교방송 방송본부장
“이 녀석이 내가 지난번에 말했던 그 녀석입니다.…… 어서 인사 올려라. 광덕 사숙님이시다.”
1971년 여름 어느 날, 서울 종로 봉익동 대각사 큰방에서였다. 나의 은사 성준스님이 쥘부채를 활활 흔들며 처음 뵙는 스님에게 인사를 시켰다.
“자네가 지오수좌인가? 스님이 자랑을 많이 하던데 공부는 잘하는가?”
“…….”
“공부 열심히 하시게. 그래서 큰 동량이 되시게. 내가 지켜볼 거야. 알았지?”
나는 거의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네” 하는 대답만 간신히 했다.
광덕 사숙님. 사숙님과 나의 첫 대면은 이렇게 이루어졌다. 그날 처음 뵌 사숙님의 인상은 선사(先祀:성준스님으로 설악산 신흥사를 중창하고 정화불사에 앞장섬. 이하 나의 은사스님에 대한 호칭)와는 전혀 다른 느낌을 주는 분이었다. 선사께서는 성격이 직선적이고 무서운 편인데 반해 사숙님은 얼핏 문약해 보이는 듯하면서도 무척 자애로운 보살의 모습이었다. 얼굴은 잘 생긴 달덩이처럼 환하고 사람을 대할 때는 언제나 입가에 연꽃 같은 미소가 피었다.
광덕 사숙님은 절집의 한 문중(龍城祖師)으로 굳이 세속적인 항렬과 촌수로 말하면 나에게 오촌당숙이 되는 분이다. 광덕 사숙님은 용성 문하의 10현(十賢:동산, 동헌, 고암, 자운, 인곡, 회암, 고봉, 동암, 운암, 소천)의 으뜸으로 꼽히는 동산 노스님의 고족이시고, 선사는 역시 십현 중에 조계종 종정을 지내신 고암 노스님의 제자이시다. 말하자면 사숙님과 선사와는 4촌 형제 사이인 셈이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문중의 어른이라는 뜻을 더 살려 ‘사숙님’이라고 호칭하겠다. 어쨌거나 이런 법 인연 때문인지 사숙님과 선사께서는 무척 가깝게 지내셨다. 종단의 대소사는 물론이고 문중의 일도 자주 머리를 맞대고 상의했다. 정화 이후 통합종단이 출범했으나 여러 가지 사정으로 종단이 어지러울 때 두 어른은 만나기만 하면 밤새워 토론하기가 예사였다. 두 분의 그런 모습을 자주 보아왔기 때문일까, 나는 지금도 사숙님 하면 왠지 아득한 그리움 같은 것이 목젖을 타고 올라오는 것이 느껴진다.
1970년대 초 대각사는 용성문중의 도제(徒弟)들이 서울 나들이를 할 때면 으레 의식주를 해결하기 위해 주로 찾는 절이었다. 당시 주지는 지금 서울 목동 법안정사의 회주이신 효경 사숙님이었다. 효경스님은 천성이 매우 착하신 분으로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객스님들의 수발을 다들었다. 당시만 해도 절집의 시퍼런 법도는 밖에서 라면이나 자장면 한 그릇 먹는 것도 문제가 되던 시절이었으므로 스님들이 여관 잠은 더더욱 허용되지 않았다. 여행을 하려면 묵을 절부터 먼저 정해놓고 길을 떠나야 했다. 그때 선사께서는 당시 설악산 신흥사 주지로 계셨는데 서울에 오시면 언제나 종로 대각사에서 묵으셨다. 그래서 나는 스님을 뵈올 일이 있으면 대각사로 가곤 했다.
어느 날도 나는 선사를 뵐 일이 있어 대각사로 갔다. 약속시간보다 약간 일찍 도착한 나는 큰방에서 선사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사숙님이 문을 열고 들어오셨다. 엉겁결에 벌떡 일어나 인사를 올리자 사숙님은 나를 당신 방으로 데리고 가셨다. 사숙님의 방은 여러 가지 책으로 빼곡했다.
“자네가 책을 많이 읽는다지?”
멋쩍게 웃는 나에게 사숙님은 책을 한 권 내놓으셨다. 『보현행원품』이었다.
“이걸 읽게. 내가 번역한 건데 불교를 공부하는 사람은 모름지기 이렇게 살아야 하느니.”
그러나 나는 스님이 번역한 『보현행원품』을 끝내 다 읽지 못하고 말았다. 돌아오는 길에 누구를 만나 이야기를 하다가 그만 책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얼마 뒤 스님은 나를 만나자 『보현행원품』을 읽었느냐고 물었다. 나는 책을 잃어버렸다고 솔직하게 고백하지 못하고 그냥 ‘아직 다 못 읽었다’고 얼버무리고 말았다. 그러자 사숙님은 이렇게 다짐을 두었다.
“보현보살이 세운 열 가지 행원 가운데 한 가지만이라도 본받아 실천하면 어디 가서 살든지 나쁜 사람 소리는 듣지 않을 걸세. 시간을 내서 꼭 읽어보도록 하게.”
그 뒤 내가 사숙님을 다시 뵌 것은 선사께서 갑자기 입적한 1977년 가을 설악산 신흥사에서였다. 선사께서는 불사 때문에 서울을 가시다가 교통사고로 입적하셨는데 소식을 듣고 사숙님이 가장 먼저 찾아오신 것이었다. 나는 사숙님이 오셨다는 말을 전해듣고 찾아가 인사를 올렸더니 물끄러미 쳐다보시다가 이렇게 말씀했다.
“자네 스님이 자네를 얼마나 아끼고 사랑했는지 아는가? 돌아가시기 얼마 전에 자네 스님을 만나니 자네 걱정이 대단했었네. 한번 찾아오지도 않는다고 섭섭해 하시던 것을 자네는 모를 걸세. 그 어른이 겉으로는 엄해 보여도 속은 아주 따뜻한 분이었네. 그런 분은 제자들이 잘 모셨어야 하는데…….”
나는 할 말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무렵 나는 대학을 다니느라고 머리를 기르고 양복을 입고 있었다. 아마도 선사께서는 그 꼴이 마음에 들지 않으셨던 모양이다. 사숙님은 그때 선사께서 털어놓았던 아쉬움과 섭섭함을 자세하게 전해주셨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만 떨구고 있었다. 그러자 사숙님은 이렇게 말씀했다.
“이제 자네 스님은 돌아가셨네. 스님이 베푼 그 큰 자비는 쉽게 갚아지는 것이 아닐세. 부디 자네에게 걸었던 은사스님의 기대를 저버리지 말게. 어떤 것이 스님이 자네에게 바랐던 것인지는 나보다 자네가 더 잘 알 것이니 이제부터 정말 잘 해야 하네.”
사숙님의 조용한 타이름이 계속되는 동안 내 등줄기에서는 식은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 뒤 나는 환속해서 회사생활을 하다가 다시 불교계로 돌아왔다. 불교신문사 기자로 일하게 된 것이었다. 나는 몇 번이고 사숙님을 찾아뵙고 인사를 올리고 싶었으나 선뜻 그러지 못했다. 평소 여러모로 특별한 관심을 가져주셨는데 중노릇을 제대로 못해낸 것이 못내 죄송스러웠기 때문이다. 인사가 차일피일 늦어지자 나중에는 아예 찾아뵙기조차 겁이 났다.
그러다가 사숙님과 마주친 것은 뜻밖의 장소에서였다. 어느 해 부처님 오신 날 봉축법요식이 열린 여의도 광장에서 사숙님을 만난 것이다. 그때 스님은 불광사 식구들과 함께 여의도에서 마련된 특설 법회장 단하에 앉아 계셨다. 종단 내의 위치로 보나 무엇으로 보나 사숙님은 단하에 앉아 있을 분이 아니었다. 단상 높은 곳에 여러 큰스님들과 같이 계셨어야 했다. 그러나 사숙님은 굳이 단상을 사양하셨다. 당신은 불광사 신도들을 인솔하고 나왔으니 당연히 신도들과 함께 단하에 앉아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좀 뭣한 말이지만 여의도법회는 우왕좌왕 하는 불자들 때문에 언제나 무질서의 표본 같은 행사가 되고 있었다. 그러나 불광사의 경우는 달랐다. 사숙님이 그렇게 좌정을 하고 계시니 신도들은 누구 하나 자리를 이석하는 사람이 없었다. 행사는 저녁 5시경에 시작돼 6시가 되어서야 행진이 시작되었는데 사숙님은 한번 좌정을 한 뒤 뜨거운 뙤약볕 아래서도 끝까지 앉아 계셨다.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나는 인사를 드려야겠다는 생각으로 겸연쩍게 사숙님 곁으로 갔다.
“사숙님, 저 설악산의 지오입니다.”
“아니, 자네가 여기에 웬일인가?”
“실은 「불교신문」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나는 명함을 꺼내 사숙님께 공손히 드렸다.
“아, 자네가 홍사성이야? 자네가 쓴 기사 여러 번 보았네. 참 반갑네.”
사숙님은 내가 그동안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별로 물어보지 않았다. 그저 부처님 일이나 잘 하라고 격려했다. 나는 속으로 좀 더 일찍 찾아뵙지 못한 것을 몇 번이고 후회했다.
사숙님은 여의도 행사가 끝나자 불광사 식구들을 이끌고 조계사까지 벌이는 행진의 맨 앞에 섰다. 나는 취재를 위해 앞뒤로 다니며 행진의 대오를 살펴보았다. 불광사만큼 질서정연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준 단체는 없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사숙님이 직접 모범을 보여주었기 때문이었다.
불광회가 10주년을 맞이하던 1984년 가을. 나는 사숙님을 찾아뵙겠다고 전화를 드리고 잠실 불광사로 갔다. 인터뷰를 하고 싶다고 하자 그런 것은 하지 않아도 되니 그냥 와서 차나 한잔 하고 가라고 해서 찾아간 길이었다. 나는 그날 동료기자 C와 함께 사숙님을 찾아뵈었다. 사숙님을 뵌 우리는 버릇대로 취재수첩과 볼펜을 꺼내들었다.
“이 사람아, 인터뷰는 사양한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만두고 편안하게 차나 한잔 들게. 오랜만에 만났으니.”
사숙님은 끝내 인터뷰는 사양했다. 그러나 사숙님은 천성이 자비로운 분이었다. 머쓱해 하는 우리가 안돼 보였던지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해 주었다.
“나도 옛날에는 신문에 나는 일 많이 해보았네. 그러나 다 쓸데없는 일이야. 신문에 얼굴이 난다고 특별하게 훌륭해질 것도 없고, 안 난다고 초라해지는 것도 아닐세. 모든 사람이 자기 본분에만 충실하면 되는 것이지.”
“기왕 찾아뵈었으니 이것 한 가지만은 꼭 여쭙고 싶습니다. 수행자로서 여러 가지 할 일도 많았을 텐데, 다른 것은 다 접어두시고 불광법회에만 전념한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사숙님은 미소 띤 모습으로 ‘그것 기자로서 질문하는 것이 아니지?’하면서 이런 요지의 답변을 해주셨다.
“자네도 알다시피 정화 이후에 종단이 얼마나 어지러웠는가. 한때 나는 종단의 제도를 정리하고 바로 세워야 불교가 잘될 것으로 생각했네. 자네 스님하고 총무원에 같이 있으면서 그런 문제에 대해 참 많이 토론하고 무슨 모임도 만들어서 불교중흥을 주장하곤 했지. 그런데 그렇게 하려고 하니 자꾸 시비만 생기고 되는 것이 하나도 없어. 도리어 불교의 위상만 추락시키더라구. 왜 그럴까를 또 생각하다가 부처님은 어떻게 하셨는가를 돌아보았지. 그분은 무슨 복잡한 제도로 사람을 가르치려고 하지 않으셨어. 오직 설법하고 몸으로 실천하면서 모범을 보이셨지. 인도에서 불교가 그렇게 빨리 넓은 지역에 전파된 것은 바로 부처님의 부처님다운 면모 때문이었지. 나는 이걸 깨달은 거야. 그래서 비록 부족하기는 하나 나 하나만이라도 바른 종교운동을 해보자, 이런 생각으로 불광법회를 조직하고 바라밀 신행운동을 펼친 거지. 불광법회가 한국불교에서 하나의 작은 성공의 사례로 꼽힌다면 그때의 내 판단이 아주 터무니없는 것은 아니었던 셈이 되겠지.”
사숙님은 자리를 일어나는 우리를 향해 이런 당부를 덧붙였다.
“「불교신문」에 종단 정치를 다루는 기사가 너무 많아. 그런 것은 작게 다루고 불자들 의식을 개발하는 기사를 많이 썼으면 좋겠네.”
1999년 2월 어느 날, 누군가로부터 전화가 왔다. 사숙님이 입적하셨다는 것이다. 나는 눈앞이 갑자기 하얗게 변하는 것 같았다. 사숙님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소식은 몇 년째 바람결에 자주 듣고 있었다. 그때마다 한번 찾아뵙고 문안을 여쭈어야지 하면서도 이런 저런 핑계로 정초에 연하장이나 보내는 것이 고작이었던 것이 여간 죄송스럽지 않았다. 사숙님의 입적 소식은 나로서는 또 한 분의 스승을 잃은 것과 같은 크나큰 슬픔이었다. 나는 만가지 일을 제치고 영결식이 열리는 부산 범어사로 향했다. 범어사로 가는 금정산 길은 평소 나와 비슷한 추억을 간직하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모두가 저마다의 인연을 떠올리며 모여든 범어사 앞마당. 영결식장에서는 사숙님의 육성이 흘러나오고, 문도와 불자들은 굳이 슬픔을 감추려하지 않았다. 여기저기서는 도용한 오열이 넘치고 있었다. 무엇이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가슴에 눈물을 고이게 하는 걸까. 그때 문득 떠오른 것은 『장아함경』『유행경』에 나오는 부처님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부처님이 노쇠해질 대로 노쇠한 몸을 이끌고 쿠시나가라에 이르렀을 때의 일이다. 부처님은 이제 기력이 쇠잔해서 더 이상 가망이 없었다. 아난다를 비롯한 모든 제자들은 이제 더는 부처님의 자애로운 모습을 볼 수 없을 것을 예감하고 무거운 침묵에 휩싸여 있었다. 그때 나이가 120살이나 되는 노인이 부처님을 찾아와 한번 뵙기를 청했다. 아난다는 부처님이 위중한 상태이므로 친견이 어렵다고 말했다. 그러나 부처님은 아난다를 나무랐다.
“아난다야, 그 노인을 막지 말라. 내게 와서 의심나는 것을 묻게 하라.”
그리하여 그 노인은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깨우침을 얻은 마지막 제자가 되었다.
사숙님의 모습이 그러했다. 건강이 좋지 못했던 사숙님은 말할 수 있는 기력이 있는 한 누가 찾아오면 자비스러운 웃음으로 맞았다. 그리고 적절한 설법으로 깨우쳐 주셨다. 저렇게 오열을 참지 못하는 사람들도 모두 그런 인연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물론 나도 그 중의 하나였다. 어찌 가슴에 슬픔의 눈물이 고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영결식이 끝나고 사숙님의 영정을 앞세운 운구 행렬이 일주문을 빠져 나가고 있었다. 나는 합장을 하고 마음속으로 나지막하게 말했다.
“사숙님, 잊지 않고 있습니다. 보현보살의 10가지 행원 가운데 한 가지만이라도 실천하라던 사숙님의 간곡하신 말씀을. 어렵기는 하지만 꼭 그렇게 살도록 노력하고 정진하겠습니다. 부디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이루소서.” 나무 마하반야바라밀.
첫댓글 광덕스님의 생활 속의 모범을 보여 주는 좋은 예화입니다.
멀리서 큰 일을 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생활 속에서 섬기고 받드는 모습, 10가지 행원 중 한가지라도 실천하는 오늘이 되시길~~~
고맙습니다. 마하반야바라밀 _()()()_
홍선생의 책과 기사는 여러번 보았는데 출가했다가 환속하신 분이네요...아무튼 속세에서 큰 일을 하고 계시니 고마울 뿐 입니다...나무마하반야바라밀
공양 감사합니다. 기사에 애끓는 마음이 그대로 녹아있는 것 같아 저도 가슴이 뭉클하네요. 최근 어지러운 일을 맞아 제 마음이 많이 거칠어진듯한데 큰스님의 행장이 마음을 다시 다잡게 하십니다. 나무마하반야바라밀..._()()()_
공양 감사합니다..모든 일에는 시비분별이 생기는것을 큰스님께서는 부처님 법에 비추어 풀어 나가시는 모습은 저희 카페에서도 배웠습니다..스스로 타오르다 꺼지면 그만이다 라는 말씀이 생각 납니다..나 하나라도 밝음을 일으키면 주위도 함께 밝아지는...큰스님의 일상생활속 모습을 다시 보고 갑니다..마하반야바라밀.._()()()_
큰스님, 감사합니다!!! 나무마하반야바라밀! _()()()_
마하반야바라밀...._()_
생생한 글로 울컥합니다. 부처님처럼..큰스님처럼...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_()()()_
10가지 중 한가지라도 실천하는 모습으로 살겠습니다.
귀한 글 감사합니다. 마하반야바라밀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