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장애(이상심리학 참조)의 진단 및 통계 편람이라고 하는 DSM은 미국정신의학회(APA ; American Psychiatric Association)에서 만든 정신장애의 진단 매뉴얼이다. 비록 미국에서 만들었지만 세계의 여러 국가에서 정신장애의 진단과 분류, 연구 목적으로 사용한다. 이와 함께 세계보건기구(WHO ; World Health Organization)에서 만든 국제질병분류(ICD ; International Classification of Diseases)도 정신장애의 진단 기준을 포함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진단 부호는 ICD를, 진단 기준은 DSM을 따른다. 그 이유는 우리나라의 의학계가 보고서용의 공식 진단체계로 ICD를 따르고 있지만, 진단 기준은 DSM이 더 자세하기 때문이다. 부호는 ICD, 기준은 DSM을 따른다니 무엇인가 이상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DSM과 ICD의 정신장애 부분은 매우 밀접하게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발전해왔기에 둘 사이의 차이는 크지 않다. 또한 WHO에서 ICD를 만든 목적은 기본적인 건강 통계의 자료의 수집이지 정확한 진단이나 연구가 아니기 때문에 여러 나라에서 학술과 진단 목적으로 DSM을 사용한다.
역사
DSM 1판(DSM-I)은 1952년에 출간되었는데, 이는 처음으로 정신장애가 포함된 ICD 6판을 변형, 발전시킨 것이나 다름없었다. APA에서 DSM을 만든 이유는 2차 세계대전 참전 군인들의 정신 상태를 진단하고, 퇴역 군인들을 돕기 위한 정신장애의 진단 기준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이전까지도 의사들이 일반적으로 사용하던 개략적인 정신병리의 진단명(MMPI( MMPI · MBTI 참조)의 척도)과 기준이 존재하기는 했으나 공식화된 기준은 이때 처음 만들어졌다. 1판과 크게 달라진 점이 없는 DSM 2판(DSM-II)은 1968년에 출간되었으며, ICD 8판과 맥락을 같이 하고 있다.
정신분석의 원인론을 따르는 1판과 2판은 신경증과 정신증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정신분석에서는 자아 (자아심리학 참조)를 중심으로 정신장애를 설명한다. 자아가 초자아와 원초아 사이에서 힘의 균형을 잃을 경우 자아 기능이 손상되고, 그 정도에 따라서 정신증과 신경증으로 구분한다.
1980년에 출간된 DSM 3판(DSM-III)은 이전과는 확연히 다르게 접근했다. 우선 정신분석이라는 특정 원인론을 배제하고 중립적인 입장에서 기술적(descriptive) 접근을 하게 되었다. 이전까지는 정신분석이 정신장애에 대한 유일한 이론이었지만, 생물학과 다양한 심리이론을 비롯해 정신장애를 바라보는 관점이 다양해진 결과다. 또한 명확한 진단 준거를 제시했으며, 진단간 위계를 설정했다.
게다가 다축체계 분류(multiaxial classification)를 도입했다. 다축체계란 정신장애를 진단할 때 단지 정신장애에만 초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건강 상태(축 3)나 환자의 심리사회적 환경(축 4), 그리고 전반적인 적응과 기능의 정도(축 5)까지 고려하도록 하는 방식이다. 또한 다축체계에서는 어떤 계기로 인해 발생해 일정기간 동안만 지속되는 정신장애(축 1)와 만성적으로 오랫동안 지속되는 정신장애(축 2)를 구분했다.
성격 장애와 발달 장애(developmental disorder)를 축 2로, 나머지 모든 정신장애는 축 1로 분류하도록 했다. 하지만 DSM 3판은 진단 기준이 모호하고 불일치한 점들이 여럿 드러나 개정에 들어갔고, 1987년에는 3판의 개정판(DSM-III-R)이 출간되었다.
1994년에 출간된 DSM 4판(DSM-IV)은 1992년에 출간된 ICD 10판과 보조를 맞추고 있다. 4판은 시대에 따른 정신장애의 변화를 반영했다. 수동-공격성 성격 장애를 삭제하고, 급성 스트레스 장애를 추가했다. 또한 몇몇 정신장애의 명칭을 수정했으며, 축 2에 있던 발달 장애 중 정신 지체(지능 참조)를 제외한 나머지를 축 1로 이동시켰다. 결국 축 2에는 성격 장애와 정신 지체만 남게 되었다. 2000년에는 4판의 진단 기준을 그대로 유지한 채 최근의 연구 결과를 추가하고 설명문안의 일부를 수정해 4판의 TR(Text Revision) 버전을 출간했다.
4판이 나온지 19년 만인 2013년 5월에 DSM 5판(DSM-5)이 출간되었다. 정신장애에 대한 연구결과와 치료 성과 등 그간 축적된 여러 증거를 반영하면서도 4판과의 연계성을 유지하려고 했다. 특히 신경 생물학의 연구결과를 반영하려는 흔적이 역력하다. 무엇보다 정신장애를 심각도에 따라 연속선상에서 평가하도록 요구하고 있는데, 이는 그 동안 여러 정신장애를 별개라고 본 범주적 접근(categorical approach)에 더해 차원적 접근(dimensional approach)까지 고려한다는 의미다.
3판부터 도입되었던 다축체계 분류를 공식적으로는 포기했다. 그 동안 다축체계 분류에 대한 유용성과 타당성에 많은 전문가들이 문제를 제기한 결과다. 하지만 실제 내용을 보자면 축 1부터 3까지는 진단기준에, 축 4는 각 진단별 사례에 포함시키고 있으며 축 5는 그대로 사용함을 알 수 있다.
정신장애의 범주를 재구성했는데, 대표적으로는 4판의 기분 장애(mood disorder)를 우울 장애와 양극성 및 관련 장애로, 불안 장애(anxiety disorder)를 불안 장애와 강박 및 관련 장애, 외상 및 스트레스 관련 장애로 구분했다. 대부분의 범주가 재구성되었는데, 성격 장애 범주는 바뀌지 않았다. 또한 4판까지는 I, II, III, IV처럼 로마자를 사용했는데, 5판부터는 아라비아 숫자를 사용하고 있다. 앞으로는 개정 작업에 더 빠르고 유연하게 대처하겠다는 것이다.
논쟁
정신장애의 진단과 분류는 전문가들 사이에서 논쟁이 되는 주제 중 하나다. 신체적 질병과 장애는 진단과 분류가 비교적 명확하며 사회적 오명이 적은 편이지만, 정신장애의 경우는 다르다. 진단 기준을 끊임없이 향상시키려고 노력했음에도 여전히 모호한 표현들이 많아서, 진단 일치율이 신체적 질병에 비해 여전히 낮은 편이다. 특히 성격 장애가 그렇다. 여기에 더해 정신장애는 개인차가 워낙 커서, 단 하나의 진단명으로는 그 사람의 상태를 충분히 표현하기 어렵다는 문제점이 있다. 또한 사회적인 오명은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기도 하며, 자신의 진단명을 알게 되면 자기충족적 예언으로 작동할 가능성도 있다.
그럼에도 전문가들 사이에 의사소통을 원활하게 하고, 정신장애 원인과 치료 방법의 연구를 위해 진단과 분류가 필요하다는 주장도 있다. 또 한편으로는 현대 의학과 의료보험 시스템 안에서는 진단을 해야만 처방할 수 있기 때문에 진단의 현실적 유용성도 무시할 수 없다. 하지만 병원이 아닌 곳에서 활동하는 많은 심리학자들은 진단을 거부하고, 병원에서 활동하는 정신과 의사들은 진단을 옹호한다. 진단에 대한 논쟁과 갈등을 첨예하게 보여준 사건은 유명한 로젠한(David Rosenhan)의 실험이다.
로젠한은 자신을 포함해 멀쩡한 사람 여덟 명을 여러 정신병원으로 보내 정신과 의사에게 무슨 소리가 들린다고 말하게 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한 사람은 조울증(우울 참조)으로, 나머지 사람들은 정신분열로 진단을 받아 입원을 하게 되었다. 입원 후에는 모두가 평소처럼 정상인의 모습으로 생활했지만, 그들에게 진단을 내린 의사와 간호사들은 그들의 모든 행동을 진단과 일치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길게는 52일, 짧게는 7일이나 병원에 있었고, 일시적인 증세 회복으로 겨우 퇴원이 가능했다.
로젠한은 이 실험 결과를 발표하면서 정신의학의 진단이 얼마나 오류가 많은지 역설했고, 이 소식을 들은 많은 정신과 의사들은 이 실험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우선 통제된 실험이 아니었을뿐더러 의사가 환자의 의도적인 속임수에 속았다고 해서 진단이 잘못되었다고는 할 수 없다는 내용 등이었다. 로젠한이 이 실험을 진행했을 당시 정신의학계는 DSM 2판을 사용하고 있었다. 2판은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1판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 말은 당시만 해도 제대로 된 진단 기준 없이 의사들의 경험과 직감에 근거해 진단을 했다는 의미다.
물론 지금의 정신병원은 이때와 현격히 다르다. 환자의 보고에만 의존하지 않고 온갖 심리 검사를 실시한다. 필요하다면 생리학적 검사나 뇌 검사를 실시한다. 그럼에도 진단의 유용성과 해악성에 대한 논쟁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어떤 주장의 옳고 그름이 아니라 정신장애로 고통받고 있는 사람의 회복과 치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