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영덕군 남정면 장사리 "장사해수욕장">
장사상륙작전은?
6,25전쟁의 교착상태에서 새로운 돌파구인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을 성공하기 위한 양동작전으로
당시 미국 군사전문가들조차 성공확률 ‘5000분의 1’로 점치며
만류했던 20세기 마지막 상륙작전을 성공케 만든 장사상륙작전은
1950. 8. 24 대구를 중심으로 모집된 772명을 주축으로
8월 27일 밀양에서 이명흠소령을 대장으로 하여
창설된 육군본부직할 독립제1유격대로 8월 31일까지 밀양에서
기초적인 교육을 받은 후 1950년 9월 8일 부산 육군본부 청사로 옮겨
9월 11일까지 기본적인 유격교육을 받으며 부대를 편의상
정규사단 형태로 편제하고 임시계급을 부여 상륙작전에 대비 하였다.
1950년 9월 10일 정식으로 장사동 상륙작전명령제174호를
받음과 동시에 급식과 통신은 인근 포항부근에서 전투 중이던
국군 3사단의 지원을 받는다는 계획아래 9월 13일 2,700톤급 LST인
문산호(선장 황재중)에 승선. 장사동을 향해 부산항을 출발했다.
당시 이 일대에는 북괴군의 가장 정예부대인 「무정군단」
이 방어하고 있었다.
아군은 원래 계획상 상륙일인 9월 13일 새벽에 첫 상륙을 시도했으나
워낙 심한 파도와 풍랑으로 하루를 연기. 14일 새벽 4시경 상륙작전을
개시하였다.
그 당시 장사지역 해역에는 짙은 안개와 거센 파도로 풍랑이
극심했으며, 아군의 상륙을 인지한 적은 부경리 200고지와 부흥리
125고지에다
설치한 박격포를 비롯한 집중포화를 문산호를 향해 일제히 퍼부어대기
시작했다.
약 두 시간에 걸친 적의 집중포화를 배의 앞머리에 맞고 문산호는
한쪽으로 기울기 시작했고 이에 불안을 느낀 700여 학도병들은
점차 동요되면서 감히 상륙할 엄두도 내지 못 하였다.
비오듯 쏟아지는 적의 총탄과 집어삼킬 듯 일렁대는 파도를 뚫고
맨 먼저 바다에 뛰어든 사람은 5중대 부관이었던 박계담소위였다.
박소위의 「돌격!」 소리와 함께 넘실대는 바다 속으로 뛰어든
학도병들은 이때 수많은 익사자를 내고 말았다.
<바다밑 모래사장에 좌초된 LST문산호>
수많은 사상자를 내면서도 간신히 밧줄을 해안 바위에 매는 데 성공한
학도병들은 쏟아지는 적의 총탄을 무릅쓰고 밧줄을 타고 하나둘 장사리
해안으로 상륙하기 시작했다. 이때에도 아군은 적의 사격과 파도에
수십명의 사상자를 냈다.
옷이며 배낭이며 모두가 젖은 채 겨우 부대를 정돈한 후 아침 8시경
아군의 함포지원과 공군의 지원폭격을 받으며 고지점령에 나선 아군은
이날 낮 12시쯤 고지를 탈환하는데 성공했다.
산위에서 내려다 본 장사리 바다에는 아군의 시체와 배낭이 여기저기
둥둥 떠 다니고 있었다.
그러나, 이날 밤 적은 4대의 탱크를 앞세우고 3면에서 다시 공격을
가해오기 시작했고, 600여 학도병들은 결사사수의 정신으로 일주일간을
버티면서 많은 희생자를 내고 18일에야 철수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올 때 타고 왔던 문산호는 완전히 좌초되었고 엄습하는
공포 속에 학도병들은 거의 반 체념상태로 빠져들고 말았다. 다행히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LST 조치원호를 이용. 보슬보슬 비가 내리는
가운데 20일 하오, 전사한 전우들을 수습하지도 못한 채 눈물을 삼키며
부산항으로 귀환했다.
이후「명」부대는 상륙작전 시 산화한 300여명을 제외한 나머지
대원들 일부는 3사단 32연대에 편입되고 일부는 뿔뿔이 흩어지는
불운을 맞았으며 그해 12월 19일 「한성여중」에서 해체되고 말았다.
장사상륙작전은 학생들이 단일부대로 참전, 가장 많은 사상자를
낸 전투이기도 했다.
장사상륙작전에서 대부분 중학생인 학도병 600여명이 참전했는데
군사 작전 개념상 상륙작전은 최정예부대가 담당하는 것이 상식인데
왜 이런 어려운 작전을 훈련이 미숙한 「학생부대」에 맡겼는가
하는 것은 아직도 수수께끼로 남아 있으며, 사전 지원약속이 되었다던
포항부근의 3사단에는 사전 통보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충격적이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6.25당시 입은 영덕지역 피해를 보면 전사 69, 사망(민간) 563, 부상 233,
납치 81, 학살 73, 행방불명 603명이며, 특히, 장사상륙작전에서의
피해는 전사 139, 부상 92, LST문산호 1척으로 기록에 전하고 있으며,
이와 비교해 인천상륙작전에서는 전사 29, 부상 219명으로
집계되고 있다
아직도 장사상륙작전 희생자들에 대한 예우와 명예회복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실정이며,
세계전사적으로 우뚝선 인천상륙작전의 제1성공요인이었던
장사상륙작전 성과를 재평가하고 참전용사 및 유족의 명예회복과
호국정신을 계승 발전시키고 역사적 사건을 보전, 국민정신교육의 장을
마련하기 위해 김병목 영덕군수 는 장사리 일대에 승전기념공원 조성을
추진하고 있으며,
이들 영혼을 달래기 위해 영덕군에서 1990년부터 매년 9월 위령제와
추모음악제를 개최해 오고 있으며, 금년 9월 14일경 해병대사령부
(해병1사단)과 협조하여 장사상륙작전 재연행사를 추진할 계획이다.
March.23.2015 深谷입니다·´˝"`˚♣♡♨深谷 姜文學印
<경상북도 영덕군 남정면 장사리 "장사해수욕장">
제2인천상륙작전(장사상륙작전)으로 인천상륙작전 며칠전에
학도병들로 구성된 위장 상륙작전으로 수많은 학도병들의 희생이
큰 곳으로 유명함 "가운데 송림속에 위령탑이 있음"
첫댓글 총무님! 소중한 자료 고맙습니다. 항상 풍부한 얘깃거리와 정보, 우슴만땅거리 등 감사해야할 일이 한두가지가
아닙니다. 감사! 감사! 또 감사!
많이 이용해주시어 몸둘바를 모르겠습니다,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