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자촌이 조성된 대구면 용운리 일대는 청자제작에 관련된 ‘화기지설’이 전해 오는 땅이다. 대구면 미산리, 사당리, 용운리, 용문리, 항동 일대 마을 사람들은 아주 예전에 이 곳 정수사의 스님들이 중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서 그릇 굽는 기술을 가르쳐 주었다.
당시 정수사의 스님의 말에 의하면 “대구면 일대는 화기의 땅이기 때문에 그릇을 굽게 되면 이로울 것이나, 화재가 자주 발생해 피해를 당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불을 이기려면 여러 곳에 우물을 파서 재앙을 막아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우물(못, 둠벙 또는 관정)을 여기저기 수 백군데 팠는데, 현재 청자를 구웠던 가마터는 일백여개 발견되었지만 우물을 판 장소는 발견되지 않았다. 이러한 이야기는 상당히 타당성 있는 말로 불을 많이 다루는 가마터가 수 백군데 있었다면, 흙을 굽는데 쓰이는 물이나 허드렛물도 꽤 많았으리라 생각된다. 사시사철 가마의 불이 꺼지지 않은 가운데, 그에 따른 화재예방 조치로써 소방수의 확보 또는 불을 끄는 화재진압 기술도 상당히 발달했으리라 생각된다.
이에 대해 미산부락에 사시는 이화종 씨와 나눈 이야기이다.
“전에 계치 조씨가 있었는데, 말을 들으면, 청룡서 불이 나든지, 계치서 불이 나든지 해야, 불이 나야만 된다는 그런 말이 있었어. 어려서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어.” “불이 나면 물이 필요했겠네요?”
“옛날엔 계치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 갔제. 미산에는 건수라도 있는디, 당전에는 물이 안 나왔어. 우물을 파도 물이 안나와. 그러니깐 아마, 저 욱에 정수사 골짜기 물을 갔다 썼을 것이여. 지금은 저수지로 되었지마는. 자기를 구울려면 물이 상당히 필요했을 텐데, 어떻게 공급했는지는 잘 모르제.”
옛날 이곳 대구면 에서도 당시 대부분의 마을이 그랬듯이 아마 공동우물의 형태나 우물이 없는 곳에서는 냇물이나 강 자체가 공동 우물의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용샘 또는 참샘’이라는 지명이 미산이나 수동마을 또는 백사(나까똘)에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일제시대 공글샘이라고 콘크리트로 만든 공동우물이 있었는데, 논 귀퉁이에 있어서 논물을 댈 때는 건수가 스며들어 우물로 사용하지 못했다고 한다. 한번은 양모 아이가 우물에서 놀다가 빠졌는데, 깊은 물속이고 미끄러운 콘크리트 벽에서 30여분 버티고 있다가 마을에서 가져온 간지대(대나무)를 잡고 올라와 살았다고 한다.
2. 붉은 바위와 욕심 많은 고동영감
사당리 당전 마을에 있는 고려청자 사업소에서 서북쪽으로 산 중턱에 "붉은 바우(위)"라고 불리는 바위가 있다. 옛날에 이 바위틈에서는 쌀뜨물이 흘러 나왔는데 붉은 바위 위쪽에 있었던 절의 도승이 바위 속에 쌀을 가득 저장해 두었기 때문이라고 전해 오고 있었다.
어느 봄날 술꾼들이 주막에 모여 앉아 붉은 바위 이야기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중에 잔꾀가 많고 부황한 소리를 잘하는 한 사람이 고동영감에게 흥정을 붙여 공술이나 얻어먹자고 제안을 했다.
그래서 먼저 산 주인에게 승낙을 받아내고 건너 마을에 사는 욕심쟁이 고동영감을 찾아가, 바위 속에 수만 석의 쌀이 들어 있으니, 이 바위를 사두면 큰 부자가 될 것이라고 그럴 듯 한 말로 관심을 사게 만들었다.
그러면서 현장까지 확인 시켰다. 욕심 많은 고동영감은 이 말을 그대로 믿고 행여나 다른 사람이 먼저 사버리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생겨, 그 날로 많은 대금을 지불하고 바위를 샀다.
그 후 고동영감은 남 몰래 붉은 바위에 올라가 바위틈 사위를 막대기로 쑤시면서 쌀이 나오는가를 시험해 보았다. 그러나 쌀은 고사하고 쌀뜨물마저 나오지 않은 것이었다.
의심이 생긴 고동영감은 흥정꾼들에게 쫓아가 대금을 반환해 달라고 소리를 질러댔다. 흥정꾼들은 도리어 화를 내면서 "누가 쌀이 나오는 구멍을 쑤시라고 하더냐, 그대로 두고 있으면 쌀이 저절로 나오는 구멍을 쑤셔버렸으니 구멍이 막혀 이제 쌀이 나오기는 영영 글렀다고" 하면서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하도록 붉은 바위를 바라보면서 통곡을 했다고 한다.
이후부터 붉은 바위라 불리던 것을 "고동바위"라고도 불러오고 있다.
또 실제로 들었다는 다른 이야기이다.
“여그 양칠중 씨라고 있었는디 성전양반이라고도 했어. 그런데 수동에 사는 윤치호 라는 사람이, 그 당시 얘기 들어보니까, 술값은 아쉽고 그러니깐 ‘금바우’라고 속여 양씨한테 폴아(팔아) 먹었어. 그 뒤로 고동바우 고동바우 했는디, 그 성전양반은 양자 들여서 살다가 돌아가셨지. 그러한 말이 있었고 내 귀로 직접 들었다.” 어려서 수동에 사신 적이 있는 이화종(미산 거주) 씨의 이야기이다.
3. 구강포와 구십포
가. 구강포
구강포(九江浦)는 강진만의 가장 남쪽에 있는 대구, 칠량, 강진읍의 어딘가에 해당된 포구(浦口)의 명칭인데, 아직도 제대로 정의가 되어 있지 않다.
그런데 “중동지역 동남부에 위치한 아랍 에미리트 사람들이 6세기경 대구면의 하저에 왔다 갔다”는 말과, 저두리의 산 이름인 저두산에 구십동이란 지명이 있어 이를 두고 ‘구십포’라 이름했다 한다.
그래서 산(山)에 관한 기록인 산경포(山經袌)와 물(水)에 관한 기록인 수리지(水利志)에서 관련 내용을 찾아보았지만 신통한 게 없었는데, 오직 1481년에 작성된 동국여지승람에 기록이 보인다.
구강포(九江浦)에 관련된 자료는 1723년에 작성된 호남좌도금릉현 천태산, 정수사여지승람, 1859년에 엮어진 동환록, 1967년에 간행된 강진군지 등이 있다.
‘정수사 여지승람’은 이웃하는 산세를 설명하는 계국(界局)편에 “도선국사(道詵國師, 827-898)가 이른 바, 구강포(九江浦) 30리쯤에 명산(名山)이 있다”고 한 것은 정수사가 있는 천개산(天盖山)을 두고 한 말인 것 같다.
다산의 외손자인 윤정기가 지은 ‘동환록(東寰錄)’의 강진 편에 “구십포는 곧 구강포인데 남당(南塘)이라고도 한다. 강진현의 남쪽 5리에 있고 탐라국의 성자(星子)가 신라의 조회에 참여하거나 나라에 토산물을 바칠 때 배를 정박하던 곳이니 곧 탐진(耽津)이라 한다”고 한다.
1967년에 간행된 강진군지 상권에 있는 읍면의 지세와 산천편의 군동면과 대구면에 대한 설명이 있다. 군동면 편은 “월출산에서 시작된 작천과 장흥의 가지산에서 발원한 예양강(탐진강)의 큰 냇물이 장흥읍의 송암리 동쪽으로 합류하여 군동면의 중앙을 통과 금천, 나천, 호계, 삼신리의 큰 들판에 물을 대주고 구강포(九江浦)에 유입한다”고 하고, 대구면 편은 “천태산에서 발원한 ‘뒷내’라는 계천은 동북에서 흘러와 대구면의 중앙을 통과하여 구강포(九江浦)에 유입한다”고 되어 있다.
강진은 포구를 낀 지명이 많은 데, 마량의 원포(垣浦), 대구의 구십포(九十浦), 칠량의 장포(長浦), 군동의 영포(令浦)와 백금포(白金浦), 강진읍의 남포(南浦), 도암의 율포(栗浦)등이 있다.
나. 구십포
우선 구십포(九十浦)에 관련된 자료로는 1481년에 간행된 동국여지승람과 동국여지지(1659-1674), 호남좌도 금릉현 천태산, 정수사여지승람 (1723-1885), 강진군지(1923) 등이 있다.
‘동국여지승람’은 세 가지로 나누어 적었는데 “첫째 ‘구십포’는 강진의 남쪽 6리에 있고, 둘째 물이 흘러오는 근원은 월출산에서 시작하여 남으로 흘러와 강진현의 서쪽에서 흘러나오는 물과 합하여 「구십포」가 되고, 셋째 탐라국의 성자(星子)가 신라의 조회에 참여하거나 나라에 토산물을 바칠 때 타고 온 배를 이곳에 머물렀다. 그래서 탐진(耽津) 이라고도 한다”고 하였다.
‘강진군지’ 대천(大川)편에 “구십포는 강진의 남쪽 5리에 있다. 여러 고을의 개울과 냇물들이 이 구십포에 흘러와 합하여 넓고 큰 바다로 흘러간다. 그래서 구십포라 한다. 탐진(耽津)은 옛날에 탐라국의 성자(星子)가 신라의 조회에 참여하거나 나라에 토산물을 바칠 때 배를 이곳의 나루에 정박하였다. 그래서 탐진이라 부르고 고을의 명칭으로 삼았다. 또 성자진(星子津)이라고도 한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대구면 하저(下猪)에 위치한 저두산(猪頭山, 347) 골짜기인 구십동(九十洞)에서 유래되었다고 추정되는 구십포(九十浦)는 17세기부터 구강포(九江浦)로 불리우게 되었다 한다.
또 탐라국 사람들이 육지로 오고 갈 때에 배를 정박하던 나루터의 뜻으로 성자진(星子津) 또는 탐진(耽津)이라 하였으며, 고을의 명칭도 탐진현(耽津縣 757-1417)이라 하고, 탐진현의 나루는 남당포(南塘浦)라 하였으니 지금의 남포(南浦)이었음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대구면에 있는 하저마을의 옛 명칭이 구십포(九十浦)이고, 그 때의 나루터는 강진읍의 남포마을로 보아도 크게 잘못된 일은 아닐듯하다. 따라서 구십포의 영역은 가우도의 동쪽인 대구면의 중저 마을부터 남쪽에 있는 백사 마을까지가 될 것 같다.
이상과 같이 구십포의 물은 칠량의 장포, 구십동 계곡, 항동의 여섯 골짜기 물, 청용 관찰봉 정상에서 발원한 물들이 합해서 이루어졌을 것이다.
4. 고(괴)바우 공원
가. 유래
고바우 공원은 대구면 저두리와 사당리의 경계 해안가에 위치하며 당전마을 뒤에 있는 여계산이 서쪽으로 시원스레 달리다 바다에 잠긴 끝부분이다. 이 곳에는 국도 23호선이 산 중턱을 감싸고 지나며 행정 구역으로는 저두리 하저 마을에 해당이 된다. 대중교통이 발달하기 전 장을 보러 다니거나, 나무를 하러 다니던 사람들이 지친 다리를 쉬어가던 곳이다. 그런데 그 명칭이 조금 이상했다.
“고바우 공원이란 명칭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요?” 미산부락에 사시는 이화종 씨의 대답이다.
“말은 고바우라고 했는디, 그것이 ‘괴바우’란 것 일꺼여. 그란께 괴바우란 말을 고바우라 했어. ‘괴’라는 것은 고양이를 말하는 거여. 그 바우가 지금 공원 있는데, 위산에 있어. 거가 내가 산일을 하러 많이 가봤는디, 그 산속으로 들어가면 솔찬히 큰 바우가 누워 있어. 그란디 그 당시에, 괴바우란 생각을 못했는디, 지금 생각해보니 그것이 괴바우라 그랬나 봐. 그것은 고바우라는 것이 안맞다는 말이여... 고바우는 말이 안 된다. 어째 그라냐 하면, 괴바우란 데가 지금은 길이 나... 그것이 산세를 보면 ‘비룡도강’이라고, 용이 강을 건너가려고 탁 내려오다 주둥이를 물에다 대고 버티고 있는 형국이라. (물을) 건너가려고 하고 있는디, (산을 깍아) 주둥이를 깍아버렸단마시, 그래서 (비룡도강 형국이) 배려부렀단마시. 우리 아버님 묘도 거기 풀 잔등에 있었는디 옮겼제.” 풍수지리에서 나오는 이야기이다.
도로를 넓혀 포장하고부터는 옛 쉼터 기능을 잃었다가, 최근에 ‘고바우 공원’으로 조성해 강진만에서도 전망 좋은 곳 중의 하나이다.
나. 아들바우와 삼바우
고을 어디에나 큰 바위에 얽힌 이름과 전설이 내려오는 데, 여기에도 아들바우와 삼바우가 있었다. 아들바우는 고바우를 기준으로 북쪽으로 30여 미터 바닷가 벼랑에 잔가지가 별로 없는 100년이 넘는 소나무가 서있고 그 근처에 있던 바우의 이름이다.
예전에 “아들을 못 낳는 사람들이 지나다가 이 바위에 돌을 던져서 위에 얹혀지면 소원을 들어준다”하여 반쯤은 믿고 반쯤은 의심하면서도 한번씩은 시험해 보았다는 바우이다.
또 삼바우는 북쪽으로 200여 미터 지점인 현재 주택들이 있는 앞의 바닷가에 바우 세 개가 줄지어 있어서 유래한 데 도로를 넓힐 때 없애 버렸다. 이 곳은 한 십여 호가 예전부터 살아오다가 1977년경에 하저마을로 옮겨가고 두어 집만 살았다. 그러다가 도로가 2차선으로 확장이 되고부터 다시금 사람들이 모여 살게 되어 오늘은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살고 있기도 하다.
다. 산골(구리)
산골은 구리의 일종으로 사람의 뼈가 부러졌을 때 맞춘 다음 갈아서 먹으면 잘 붙는다는 접골약으로 쓰이던 광물인데, 고바우는 산골이 매장되어 있다. 좀더 설명하자면 청황색을 띠고 4각형의 젓가락을 도막낸 것처럼 된 모형을 하고 있다.
약으로 쓸 때는 사기접시에 산골을 놓고 물을 섞어 숟가락으로 힘주어 눌러갈면 쉽게 풀린다. 이물을 마시면 되는데 전하는 이야기로는 “힘 센 장수를 낳으려 하면은 아이 벤 어머니가 산골을 갈아서 마시면 그 아이는 장수가 되지만 어머니는 오해 살지 못한다”는 전설도 있다.
라. 풍수지리
사람이 살아서도 잘해야 하지만 세상을 떠난 이를 길지에 모시면 복을 받는다는 풍수지리설이 여기에도 있다.
“옛날 고바우에서 북쪽으로 100여 미터 지점의 도로 위쪽에다 사시(10시-11시경)경에 묘지를 썼는데, 오시(12시-1시경)에 운이 틔어 복이 닥쳤다는 즉 발복(發福)을 했다”는 일화가 있다.
또 “그 터는 닭이 우는 터라 하고, 묘지를 쓰고 나자 검은 황소가 물을 건너왔다 하고, 또 하나는 장삿배가 와서 물건을 맡겨놓고 찾으러 오지 않아서 부자가 되었다”는 등 구구한 이야기들이 전해 온다.
5. 저두리
가. 해상 실크로드
서기 600년경 물물교역차 아랍 상인들이 오간 해상실크로드 돛머리는 저두산(猪頭山, △347m)자락에 있다. 강진만 바닷가를 따라 국도 23호선이 나있고 칠량의 희목재에서 고바우까지의 4km는 바다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데, 사시사철 계절마다 바뀌는 아름다운 풍광으로 유명하다. 이를 강진만의 구십포라 하며 수백 년 전부터 바다를 오갈 때 배를 대던 순수한 우리말의 항구이며, 서쪽건너 도암(월구지)에서 바라보면 참으로 아름답게 보여서 감탄이 저절로 나게 하는 명승지이기도 하다. 마을의 명칭은 저두산(猪頭山)에서 따오고, 강진만의 구십포(구강포)는 저두산의 구십동(九十洞)에서 유래한다.
저두리의 유적으로는 “별공(別貢)으로 쇠붙이를 바치던 부리터 즉 야철지(冶鐵址)에 해당되는 안골 밭과 바재밭이 있고, 잡공(雜貢)으로 옻칠을 바치던 칠재소(漆材所)가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칠촌(漆村)으로도 불렀다” 한다.
내려오는 전설도 있는데 “길을 새로 낼 때 희목재에서 피가 나오고, 도둑골에는 금절구통이 묻혔다”고 하며 명당 터로는 조리, 오시발복, 삼밭재 등이 있기도 하다.
나. 저두산과 구십동
저두산과 구십동은 그 이름을 잊은 지 오래이다. 그러나 그 기록은 1723년부터 1885년까지 기록된「호남좌도 금릉현 천태산 여지승람」에 있다. 먼저 저두산은 계국(界局)조에 있는데 ‘천태회위내백호 이위저두산 이외백호(天台廻爲內白虎 以爲猪頭山 爲外白虎)’라 하니 설명하면 “천태봉이 감싸고 돈 곳(동쪽)은 내백호가 됐고, 내려 뻗힌 곳(서쪽)은 저두산이 됐다” 이다.
구십동은 산천(山川)조에 있는데 ‘저두산 재천태지외 유구십동 봉학유수 위승관(猪頭山 在天台之外 有九十洞 峯壑幽邃 爲勝觀)’이라 하니 내용은 “저두산은 천태봉우리의 바깥쪽에 있으며 구십동도 있다. 산봉우리와 골짜기들이 그윽하고도 깊숙해서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느끼면서 즐길만한 경승지이다”라는 뜻이다.
현재의 호칭은 하저를 기준으로 북에서 남으로 적으면 궁시리, 가마골, 양지쪽등, 안고랑(구십동), 삼밭재, 새종기, 방애골, 매물등, 삼바우, 고바우가 있다. 또 구십동에 대해서만 북에서 남으로 적으면 양지등, 땅까시바탕, 지챙이, 대소잠박, 옹지샘, 홈, 도둑, 밤나무골, 대소요등, 시리봉(두류봉, 頭流), 홍두깨잔등, 조리명당, 중산골, 벙구나무골, 동백나무잔등, 삼밭재가 있다. 등성이는 양지, 대소요, 홍두깨, 동백, 삼밭이고 골짜기는 지챙이, 대소잠박, 옹지샘, 홈, 도둑을 합친 합수골, 시리봉골, 중산골이 해당된다.
다음으로 샘은 옹지, 벙구나무, 요등, 시리봉, 중산골에 있으며 집터로 추정되는 곳은 중산골 바우밑과 도둑골에 있고 논은 요등샘발치의 댓마지기, 시리봉골 서너다랭이, 중산골의 칠팔다랭이가 있으며, 벙구나무골의 시누대와 동백나무잔등 묘지에 동백나무가 있었다.
사람이 사는 곳마다 길지라는 곳이 있는데 하저마을은 조리명당, 오시발복, 닭이울터 등이 있다. 첫 번째는 구십동, 두류봉 정상에 있으며 금릉8학사와 쌍효자로 알려진 창녕 조씨 몽린의 묘소며, 두 번째는 삼바우 길 위에 있는 진주 강씨 묘소며, 세 번째는 삼밭 재에 투묘했다 파냈던 곳이 해당된다.
다. 황가오리
하저의 고기잡이 역사는 아주 오래 됐지만 시작은 알 수가 없다. 옛 방법을 적으면 돌을 쌓아 잡던 독살, 대발로 막아 잡던 덤장, 그물을 둘러친 개매기 등이 있다. 개매기는 조석 간만의 차가 큰 바닷가 갯벌위에 그물을 쳐놓은 후 밀물 때 조류를 따라온 물고기 떼를 썰물 때 가둬 잡는 전통적인 고기잡이 방식이다.
하저 앞바다에는 독살터가 남아 있으니 예전에는 다섯 곳이고, 덤 장터는 삼바우 둘, 모래등 둘, 횟집 앞 하나이다. 수면에는 항상 상쾡이(돌고래)떼가 떠다니고 뻘에는 반지락, 새꼬막, 참꼬막, 꼬막, 비틀이, 멩기고동, 소랑고동, 뻘떡기, 하랑기, 설키가 나오고 물속은 오징어, 줄치, 넙치, 황가오리, 세대, 장대, 농어, 광어, 돔, 쎄미, 한새치, 미금장어, 중하, 대하 등이 잡혔다.
라. 도사공(都沙工)
배를 부리는 일을 업으로 삼던 사람 중에 으뜸을 말하며 하저와 월구지 사이에 1975년까지 운영하던 나룻배와 관계된다. 조선왕조실록 1448년 8월 27일의 기록에 ‘연해주현의 여러 섬과 곶(串)의 소나무가 잘 자라는 땅을 찾아가 기록하라’는 내용에 “강진은 월이곶(串), 좌곡곶, 산달도, 완도, 고시도, 선달도가 있으니...” 구십동과 월이곶의 나루는 이 무렵부터 시작이 됐지 않았을까 추정해 본다. 폐지할 때는 이재수와 곽상철이 운항했고 배는 노를 젓던 돛단배였다.
그 때에는 주막이 하저에 두 군데 월구지에 한군데 있어 바닷길을 건너 오가는 이들의 슬픔과 기쁨을 함께 하였다 한다.
마. 명당과 정 총각
옛날 저두리에 정씨 성을 가진 총각이 있었는데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한 분을 모시고 근근이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모친이 병을 얻어 자식의 극진한 봉양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슬픔에 잠긴 총각은 묘자리를 구하지 못하고 모친을 가매장한 후, 어느 날 산으로 나무를 하러 갔는데 한 스님을 만나게 되었다.
마침 가져온 점심 도시락을 함께 나눠 먹은 총각의 딱한 사연을 들은 그 스님은 모친을 위하여 묘지를 한 곳 잡아 주었다.
총각은 감사의 마음으로 좋은 날을 잡아 모친을 이장시키기에 이르렀는데, 때는 엄동설한 겨울이라 갑자기 눈보라가 앞을 가릴 지경이 되었다. 그래서 땀을 흘리면서 묘자리를 파고 있는데, 마을앞 바닷가에 (중국) 대상선 한 척이 다가와 이 총각을 부르더니, 배를 잠시 ‘맡아 달라’ 이르고는 전마선(큰 배와 육지를 연락하는 배)을 타고 넓은 바다로 떠나 버렸다. 그 뒤 들려오는 소문에 그 선원들이 폭풍으로 침몰되어 모두 죽었다는 소식이 들렸다. 며칠을 기다린 총각은 그들에게 아무런 소식이 없자 마침내 그 배 안에 들어가 살펴보니, 고급비단이 가득하여 그 비단을 팔아 모친의 장례를 성대하니 치르고도 큰 부자가 되었다고 한다.
이는 정총각의 효성이 지극하여 천지신명(하늘)이 명당을 내려주고, 그 즉시 발복하였다고 하는 풍수설에 의한 전설로 풀이된다. 그래서 이 지방에서는 묘를 잘 쓰고 집에 돌아오면, 먹을 음식이 갑자기 생기게 되었다느니, 자식들이 출세하게 되었다느니 하는 설이 항간에 회자되고 있다. 그 뒤 정총각은 훌륭한 규수를 아내로 맞아 백년해로 하였다. 그러나 그 묘가 어디 있는지, 정총각이 누군였는지는 알 수 없다고 한다.(출전, 강진향토지. 1978년).
바. 영화 ‘봄날은 간다’의 촬영장소
두 남녀의 짧은 만남과 헤어짐 속에서 사랑에 대한 긴 성찰을 담아냈던 허진호 감독의 영화 '봄날은 간다'는 감정의 흐름이 유연하게 펼쳐지는 이야기 자체로 큰 호응을 얻었다.
또 영화 속에 잔잔하게 녹아 있는 풍경들도 많은 사랑을 받았다. 강진군 대구면 저두리의 하저마을도 그 중 하나다. 바로 그 곳, 청보리와 살구나무가 유난히 아름다웠던 그 곳이 이제는 복어 양식장에 들어서 살구나무만 뎅그라니 비탈길에 서 있다.
“나도 그 영화를 봤어. 한 5분정도 우리 마을의 살구나무가 나와. 도로에서 보리밭 뒤로 살구나무가 있는디, 우리가 봐도 멋있든마. 그런데, 묵구(먹고) 살라한께, 그것(양식장이)이 만들어지고 그런 것이 아니여(겠어)?” 중저리 차경환(61세)의 이야기이다.
‘봄날은 간다’를 본 사람이라면 반드시 기억할 수 있는 풍경이 있다. 푸른 보리가 바람에 흔들리며 드넓게 펼쳐지고, 상우(유지태)는 그 위에서 마이크를 양팔로 벌린 채 바람과 청보리가 만들어내는 소리를 녹음한다. 보리밭 가장자리로 오래된 살구나무 두 그루가 서 있고, 넓은 바다는 아주 조용히 가라앉아 있다. 영화 '봄날은 간다'의 마지막을 장식했던 장면이다.
강진읍에서 대구면을 향해 달리다 보면 강진만이 길게 이어진다. 그 바다 중간인 저두리 하저마을이 바로 그 풍경을 품고 있는 곳이다. 사실 이곳은 영화 '봄날은 간다'가 아니더라도 즐겨 찾는 사람들이 많았다. 봄이면 영화에 담긴 그 장면을 잡기 위해 화가나 사진 작가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영화가 개봉된 후 그 관심의 폭이 일반에까지 확산되었다.
그런데 이 곳에 최근 땅 주인이 복어 양식장을 지었다. 불과 일이년 사이에 야윈 살구나무만이 예전의 그 곳임을 증명할 뿐 보리를 키우던 밭은 두껍게 다져지고, 콘크리트로 뒤덮였다.
최근 인기 있는 영화나 방송 드라마의 촬영지를 관광명소로 부각시키려는 지자체들의 노력에 비추어 보아도, 촬영지를 보존하려는 주민들의 의지가 부족했다. 이제 한 번 사라지고 나면 그 아름다운 자연은 복구하기엔 어려운 것이기에 아쉬움은 더욱 크다. 매년 하저마을 해변과 살구나무에 봄날은 다시 찾아오겠지만, 그곳에 영화 속의 그 아름다운 '봄날' 은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6. 구수리 구곡마을
가. 구곡의 유래
경주이씨가 마을에 처음 입촌해 생활한 것으로 알려지는 대구면 구곡(九谷)마을은 뒷산의 모습이 거북모습으로, 예전에는 구곡(龜谷)으로 사용했으나 한자가 복잡해 일제시대에 개칭됐다는 말이 전해온다.
현재 50여호 1백여명의 주민들이 생활하는 구곡마을은 크게 6개 부락으로 나누어진다. 마을의 중앙에 해당하는 한골목, 마을의 서편으로는 새편돔, 마을의 동편으로 건너돔, 마을에 중앙에 위치한 통샘주변인 통샘거리, 사장나무를 경계로 윗사장등, 아래사장등으로 나뉜다.
마을의 뒤편에는 과녁을 설치해 활을 쏘았다는 가장매, 개당산이라 불리는 지당매가 마을을 든든하게 버티고 그 앞으로는 개가 앉아있는 모양이라는 개밭등, 안산중앙에 있는 거북형태의 거북바위, 마을입구의 위치에 활을 쏘던 자리였다는 군실샘, 마을의 동쪽으로 15m높이에 윗부분에 둥그런 달모양의 무늬가 있다는 달바위, 바위가 크고 웅장하고 바위 밑에서 호랑이가 살았다는 범바위, 예전 서당이 있었다는 서당골, 돌 밑으로 물이 흐르고 있다는 석풍골, 옹기모양으로 우묵하게 생겨 불린 옹동골, 마을회관옆에 위치해 마을주민들의 식수로 이용됐던 줄샘, 지금은 수몰되고 없으나 향상 맑은 물이 나왔고 환자들이 물을 마시면 병이 나았다는 홍가다름이, 마량으로 가는 길목으로 산도적이 자주 나왔다는 도둑골, 해안가에 위치한 논으로 배를 매두기도 했다는 배암논등이 마을사람들의 입에 구전되고 있다.
나. 노송과 구성리
마을입구에는 한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웅장한 모습을 자랑하는 노송이 위치하고 있다. 지방보호수로 지정돼 있는 소나무는 5백여 년을 넘긴 수령으로 나무폭도 5m가 넘을 정도로 마을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마을안쪽에도 5백여 년을 넘긴 팽나무가 서 있어 매년 여름 주민들에게 시원한 그늘을 제공하고 있다.
마을 자랑거리의 하나는 만호성지이다. 인근 남호마을에서 시작해 구곡마을을 돌아 장흥대덕, 회진까지 이어지는 성터는 예전에 비해 파손되어 손실된 것이 많지만 아직도 옛 위용은 남아있는 듯하다.
그래서 속칭 마을 이름이 ‘구성리’ 이다. 남호의 ‘성머리’ 에 해당하는 옛 성터라는 뜻이다.
다. 도깨비 전설
마을에는 도깨비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마을에서 장사로 통하는 김천조씨가 병으로 몸이 쇠약해져 도깨비가 나타나자 사생결단으로 도깨비를 잡아 장독대에 묶어놓았다. 아침에 찾아가 보니 도깨비는 없고 그 자리에 싸리 빗자루가 묶여있었다”는 얘기가 전해오고 있다.
또 “일제시대 박진등이란 사람이 마량에서 술을 먹고 밤늦게 까지 오지 않아 그 부인이 찾아보니, 다리독 근처에서 입에 풀을 잔뜩 물고 돌 틈에 끼어 있는 것을 보고 끄집어내어 집에 데려 왔으나 얼마 살지 못하고 죽었다고 해. 도깨비에 씌였다고 해. 도깨비가 풀을 먹여 사람을 죽였다고...” 이준길 씨의 이야기이다.
라. 구곡사
마을의 북쪽으로는 구곡사가 자리하고 있다. 경주이씨의 중시조를 모시는 사당으로, 익제 이제현 선생과 백사 이항복 선생을 모시고 매년 가을에 제사를 지낸다. 구곡사에는 구곡사사적기, 중수기 등 사적과 함께 구곡사 제관명단이나 제사운영, 제사를 모시고 사당을 유지하기 위해 유림들이 조직한 계책과 익제선생과 백사선생의 책 등이 남아 있다. 그러나 교지는 도중에 분실되었다고 한다.
구곡사는 익재 이제현(1287∼1367)과 백사 이항복(1556∼1618)의 영정이 모셔져 두 분을 제사지내 온 사당이다. 해마다 추석 한달 후인 9월 보름에 제사를 모신다고 한다.
7. 청자가마터 발견기
가. 청자의 기원
청자의기원은 중국 한나라 때 절강성 월주가마에서 원시적인 청자가 처음 제작되었으며 5∼6세기경부터 점차 발전되어 당나라를 거쳐 송나라 때 절정을 이루었다.
서울의 백제 몽촌성과 석촌동 고분에서 4세기말 중국의 원시청자가 발굴되었고 공주의 무녕왕릉에서는 양질의 중국 청자 항아리 2점이 발굴되어 6세기 초 활발했던 중국과의 청자문화 교류를 알 수 있게 한다.
중국 청자문화의 변화는 9세기 안록산의 난 이후 전국이 참화를 겪으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신라의 왕자 김교각은 안록산의 난을 피해 수도 장안에서 사천성 성도(成都)로 몽진중인 당나라 현종을 시종하면서 전란의 비참함과 양귀비의 자살을 목격하고 세속의 절대 무상함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리고 홀연히 신라에서 데리고 간 삽살개 한 마리와 함께 안휘성 구화산에 입산, 뼈를 깎는 고행 끝에 성도(成道)를 이루었던 것이다. 그는 몸을 더 낮은 데로 임하여 굶주림과 정신적으로 지쳐있는 당나라 민중을 식량과 차와 지장신앙을 바탕으로 온갖 기적과 무한구원을 행하였다.
그러자 당나라 민중은 신라왕자 김교각을 지장왕보살의 화신으로 추앙하였고 오늘날까지 그 전통이 이어져오고 있다.
그 후 김 지장왕보살의 영향으로 절도사라고 불리는 지방 호족세력 사이에 선종(禪宗)불교와 음차(飮茶)의식이 유행되었고 점차 당나라 전역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 동시에 차를 마실 수 있는 찻그릇의 수요도 늘어나 해무리굽 청자찻그릇의 보급은 급속도로 확산되었다.
신라 말 당나라로부터 유입된 선종불교는 수도 서라벌 중심의 궁정불교를 탈피하여 지방의 많은 호족세력의 정신세계와 불교계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 선(禪)의 수행방법으로 좌선시 정신을 맑게 하는 음차(飮茶)의식은 선승들로 하여금 고급차와 월주요에서 구워진 해무리 청자찻그릇을 진중(珍重)하게 만들었다.
그 예(例)로 경주 황룡사지와 안압지, 익산 미륵사지, 산청 단속사지 등에서 월주요에서 제작된 찻그릇 도편이 발견되었다.
신라 말 장보고 장군에 의해 새롭게 도입된 청자하이테크는 이곳 강진군 대구면 일대의 가마터에서 우리 스타일의 새로운 해무리굽 청자찻그릇을 탄생시켰다. 우리나라 청자의 발생시기도 고려 초에서 신라 말로 상한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청자란 철분이 조금 섞인 태토로 기물을 성형한 후 800도에서 초벌구이를 거쳐 다시 철분이 1∼3% 정도 함유된 장석유(長石釉)를 바르고 1,250∼1,300도의 환원염으로 구워 태토 속의 철분과 유약 속의 철분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 청록색으로 나타나는 자기를 통칭한다. 현암 최정간 도예가의 지론이다.
나. 일제시대의 기록
청자가마터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일제시대인 1916년 ‘경성일보’ 기사이다. 이 기사에 따르면 1913년 봄, 강진 대구면 주재소원이었던 ‘나카시마기군(中島義軍)’이 주민들의 제보를 받아 청자가마터를 발견해 보고하고, 1914년 이왕직박물직원(李王職博物職員)이었던 ‘스에마시쿠마히코(末松熊彦)’가 현지답사를 했으며, 1916년에는 조선총독이 방문했다고 한다. 신문에 난 기사를 바탕으로 이야기를 구성하여 본다.
‘스에마시쿠마히코’는 현지답사를 통해 “이번에 발견한 청자요의 소재지는 강진군 대구면의 아주 작은 미산(尾山) 부락으로 미산(美山)이라고도 쓴다. 이 미산의 동쪽에 당전(堂前)이라는 마을이 있다. 이 마을의 상대편에는 만경대라는 산이 있고, 이 만경대와 당전은 남쪽을 향하여 상접되어 있는데, 그 중간의 낮은 계곡은 굴곡을 거듭하면서 북으로 뻗어들어 산곡을 이루었고 그 서편에는 용문리가 있으며 동에는 도독골이라는 산골이 있다”
그는 계속해서 “이들은 모두 그 옛날 도요가 설치되어 있던 유지(遺址)들로 중간에는 맑은 계류가 만경대의 산록을 거치면서 강진만으로 흐른다. 이곳에서 다시 오지로 들어가면 ‘항동’이란 마을이 있는데, 미산에서 항동까지는 6km나 된다. 이 긴 산곡은 그 옛날 요(窯)와 도공의 가옥으로 가득하였을 것이다. 이 산골은 도요의 백연에 휩싸여 끊일 날이 없었으리라!”
그런데 중국 월주요(越州窯)의 고비색(古秘色)과 여주요(여州窯)의 신기(新器)를 능가한 이 고려비색(高麗翡色)의 명성과 도기장(陶器莊)은 국력의 쇠퇴와 변천에 따라 그 기술의 정수는 시들고 혼도 부운에 잠겨, 번창하였던 요는 허물어지고 장인들의 가옥은 보잘것없는 쥐들만이 넘나들게 되었다. 이 후 수백 년 동안 괴멸되었던 요지들은 세인들의 관심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한반도 최남단의 이름 없던 한촌(寒村)은 이번의 발견으로 일약 고려도기장의 대유적지로 지상을 놀라게 한다. 이로써 강진군 대구면은 인간문화의 발전과 고려청자의 고향으로 영원히 잊지 못할 곳이 된다.
원래 강진군은 원(原)과 경선관(慶善官)을 두었던 곳으로 감리사의 필요로 이왕직에서는 매년 직원을 이곳에 파견하는 예가 있어 1914년 3월에도 이왕가에서는 덕수궁의 직원을 강진에 출장케 하였는데, 그 때 출장갔다 온 직원이 건네 준 자기파편 하나가 이 원대한 발견의 계기가 되었다.
“나는 그것이 즉각 청자파편인 것을 알고 다시 유품 몇 점을 구했다. 이들의 영롱한 색깔과 상감의 예술성이 모두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정수품(精髓品)인 것을 알게 되었다” ‘스에마시쿠마히코’의 말이다.
“나는 천재의 기회를 잃지 않고 대구면 현지를 답사하기로 하고 같은 해 4월에 출발했다. 이곳에 당도한 즉시 청자파편이 산재한 곳을 찾아 각처에서 파편을 수집하여 이를 시험하였다. 그 결과 많은 파편들이 개성과 강화 등지에서 발견한 것과 동일한 것임을 알았다”
또한 그 유적이 광대하다는 것을 알고 관원 수명을 파견해 줄 것을 요청하여 조사를 하게 되었다.
“나는 고려 고도요의 도기장이 바로 이곳이요, 명성을 세계에 떨친 고려청자의 원산지가 바로 이곳이었다는 점에 확신을 얻었다”
이후 1925년에는 일본인 도자기 연구가의 현지조사와, 1928년 조선총독부 박물관에서 지표를 조사한 뒤에 청자가마터 분포도를 작성했다. 그 후 노모리겐(野守健) 일행이 조사한 청자가마터의 분포도를 기초로 ‘조선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령’에 의해 1939년 고적 제107호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이들 일본인들에 의한 청자가마터의 발견이나 발굴은 단순히 우리나라 고려청자를 수탈이나 약탈 또는 본국으로의 밀반출을 위해서였을 것이라 추정된다. 이는 여러 이야기에서 보듯이 고려청자의 값어치나 귀중함을 모르던 이 곳 현지인들을 통해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이 일인들에게 헐값에 넘어갔으리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8·15 광복후 대한민국 정부는 1959년 국립중앙박물관과 관계학자들이 조사한 자료를 바탕으로 1963년 문교부고시에 의해 국가사적 제86호로 지정하여 강진군 대구면의 청자가마터 100여 군데와 18만여 평을 구획 보전해왔다.
다. 임진왜란과 도공전쟁
고려조의 멸망과 함께 도공들은 삼삼오오 살길을 찾아 가마터를 떠나고 끼리끼리 저 나름의 요를 지어 사회의 천대를 감수하면서 2백여 년을 두고 그나마 명맥을 이어오다, 임진왜란이라는 폭풍에 밀려 현해탄을 건넌다. 그리하여 미개한 왜국에 도자기술을 전수하여 일본 차 문화를 일으킨 배경도 우리나라 도공들의 업적이라고 볼 수 있다.
임란 6년간 수많은 학자와 도공을 포로가 되어 끌려간 이들은 일본이 이 전쟁을 ‘도공전쟁’이라고 부를 만큼 도공의 포로를 중시했다 한다. 고 차부진 선생의 이야기이다.
라. 막걸리 값에 팔린 청자
일제 시대 일본인들이 우리 도자기의 우수성과 값어치를 알고 이 지역을 자주 찾으면서 대구면 사당리 일대 사람들이 청자를 인근 밭 등에서 발굴해 일인들에게 팔거나, 고물 수집가에게 이를 헐값으로 넘기곤 했다. 또 묘를 이장하면서 묘속에서 나온 청자 유물들도 이를 ‘귀신이 붙은 물건’이니 하면서 터부시 해 집으로 들이지 않고 인근 밭이나 담장 밑에 버려두곤 했나보다.
그래서 한 농부가 묘를 이장하면서 파낸 고려청자를 처리할 방법을 고민하다가, 읍내에 거주하는 일본인 집에 갖고 가면 청자를 후하게 산다는 이야기를 듣고, 청자를 팔아 막걸리 값이나 할 요량으로 지게에 지고 읍내의 일본인에게 가게 되었다 한다.
그런데 강진읍 일본인 집에 도착한 농부는 지게에 지고 가져온 청자를 내려놓고 이를 일본인에게 보여주게 되었는데, 일자무식인 이 농부는 이 진귀한 청자의 값어치를 모르고 전혀 몰랐던 모양이라. 값진 청자를 한번 본 그 일인은 그 농부의 태도를 보고는 그 청자가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태연하게 하고는 “이를 다시 지게에 지고 간다면, 다리만 아플 것이니, 그냥 놔두고, 막걸리 값이나 하라”면서 봉투를 한 장 주면서 돌려보냈다고 한다.
그 농부는 동전 한 푼도 고마운데, 봉투까지 넣어서 주는 것을 보고 감지덕지하고는 주막에 와 막걸리나 한잔 할 생각으로 봉투를 꺼내보니 지전이 몇 장 들어있는 것을 보고는 깜짝 놀라, 그 일인이 돈을 잘못 넣었나 싶어 막걸리고 뭐시고 그냥 집으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돌아왔다 한다. 당시 지전 한 장(10원)이면 밭 한마지기를 살 수 있는 돈이었지 않나 싶다. 이 농부는 집에 와서도 방문을 잠그고 ‘누가 이 돈을 다시 물르러(찾으러) 오지 않나’ 전전 긍긍했다고 한다.
또 다른 이야기로는 “일정시대, 심지어 지서 순경, 마을 이장들이 (일인)지서장 좋아라 하는 거 보라고 갖다 주면, 허리에 달랑달달하고 차고 다녔다.” 한다. “그 모양은 손가락만한 크기의 원숭이, 토끼모양, 여우모양 등 값나가는 것이 많아요. 묘한 고려청자를 갖다 주면 더 좋아했다고 해.” 당시 발굴된 가마터에는 막 가마니로 부어 놓은 것 같은 청자들이 많이 발견되었던 모양이다.
마. 여러 용도에 쓰인 사발
옛날부터 우리 민족은 쌀을 주식으로 하면서 국을 좋아하는 민족이기에 사발을 애용해왔다. 그래서 이 사발에다 밥을 담으면 밥사발, 국을 담으면 국사발, 막걸리를 따르면 막걸리 사발, 개밥그릇으로 사용되면 개밥사발로 전락해 버린다.
과거 일본인들은 임진왜란 전부터 우리나라를 노략질하면서 가장 탐나는 물건이 우리나라의 도자기라고 한다. 특히 도요도미 히데요시가 일본을 장악하던 시기에는 말차 다도가 성행했는데, 거기에 쓰이는 찻그릇으로 우리나라의 사발, 그 중에서도 평민들이 사용하는 사발을 좋아했다고 한다.
양반들이 사용하는 사발보다는 보통사람들의 사발이 꾸밈이 없이 진솔하고 소박해, 그것이 다도에 사용되므로 서 선(禪)의 세계와 일치한다는 그러한 이론 하에 일본에서 다완(茶碗)으로 불리는 그릇이 우리나라에서 생산되었던 사발인 것이다.
이처럼 말차(抹茶, 가루차 : 차나무를 인삼밭처럼 지붕을 씌워서 키운 연한 찻잎 가루로써 이것을 사발에 넣고 솔로 저어서 마시는 차) 다도에 쓰인 사발은 말차사발인 셈이다.
이러한 사발을 구입할 때에는 원래 태토의 상태, 두드릴 때 나는 소리, 차를 마실 때 입술에 느껴지는 맛 등 오감을 총동원하여 감상하면서 골라야 한다.
가. 나무꾼의 전설
이 나무는 예전에 고려청자를 굽던 가마터 부근에 있으며, 도공들의 보살핌으로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관련된 전설로는 “옛날 어느 나무꾼이 이 나무의 가지를 잘랐다가 급사했다는 이야기가 있어... 그 후로는 누가 나무를 벨려고 하지 않지, 그래서 나무의 가지가 땅에 닿도록 자라고 있는거여” 마을 주민 방 모씨의 이야기이다. “전에는, 우리 어려서... 나무에다 제사를 지낸 것을 봤는디, 언젠가부터 지내지 않아. (나무에 제사지내는 것을) 미신이라고 해, 새마을 운동 하면서 믿지를 않고, 지금까지 지내오지.”
이처럼 신목시(神木視)되던 나무는 1960년대까지는 동민들이 제주(祭主)를 뽑아서 동제(洞祭)를 지내도록 함과 동시에 동민단합의 구심점으로 삼았으나 이후 이러한 풍습이 사라졌다.
나. 원인모를 불
다른 전설로는 “한 5백여 년 전부터 고려자기 도요지가 이 근처에 있었지. 그 때부터 자라고 있던 나무가 한 3백여 년 전일까, 큰 바람이 불어 나무줄기가 부러져 버렸다고 해... 그래서 그 나무 둘레에 새로이 싹이 터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고도 하지.”
따라서 나무의 나이는 약 3백년으로 보고 있다.
“전에는 이 나무에 제사를 지내고 마을의 평안을 기원했지. 칠월 칠석에는 마을 사람들이 모여서 이 나무의 관리문제를 의논하고 나무주변을 정결하게 하고 하루를 즐겁게 지냈다고 해... 그러나 제사를 맡은 제주의 역할이 너무 힘들어 1980년대에 들면서 제사가 중단되어 버렸는데, 묘하게도 이 나무에 원인 모를 불이 나고 마을에 좋지 않은 일이 연속되어 다시 제사를 지내기 시작하자 이런 일이 없었다고도 해.”
다. 도공들의 애환
이 푸조나무가 자라고 있는 주변은 고려청자의 요지(窯地)가 많이 있던 곳이다. 그리고 이 나무만이 홀로 자라고 있는 것은 전해 내려오는 전설로 미루어 볼 때 그 옛날 도공들의 보호가 있어 살아남아 온 것이다. 수백 년에 걸쳐 도공(陶工)들의 애환과 도자문화의 부침을 보고 느껴온 이 푸조나무는 이제 청자문화축제의 장인 대구면 사당리 청자도요지의 부활과 함께 그 빛을 발해가고 있으나 마땅히 보호해야 할 선인들의 유산이 되었다.
1986년과 ’93년에는 군에서 시멘트 구조물을 제거하고 주변 토지 매입 및 받침목 받쳐주기 등 보수를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9. 대구 정수사
가. 청목수 전설
대구면 천태산 아래 고즈넉이 자리한 정수사 입구에 있었을 거라 여겨지는 ‘청목수’의 전설에 의하면, 절(정수사)의 청목수(일명 통샘)는 매년 한번씩 솟구쳐 넘친다고 한다.
“어느 해 달밤에 노스님이 지나다 이 광경을 보고 물을 떠먹으려고 하는데, 호랑이 한 마리가 나타나 마시지 못하였다”고 전해진다.
‘‘이 넘치는 청목수 물을 마시게 되면 기운이 넘치고, 무병하고 장수한다”는 설이 있다.
이러한 전설의 의미를 살려 이 고장 청년 불자들인 청목회원들이 성금을 모아 통샘을 복원하였다고 한다.
허나 지금은 사찰 입구 오른쪽에 1987년 8월 세워진 이 ‘청목수’ 복원에 대한 기념비만 남아 있을 뿐, 원래 있던 ‘통샘’의 흔적은 새로 깊이 패인 배수로 공사에 의해 없어진 듯하다.
그러나 지금도 정수사의 물을 받으러 차를 타고 오는 이들은 사찰을 앞쪽을 지나 계곡 깊숙이 위치한 산비탈에서 펑펑 쏟아지는 물을 약수로 여기고 있다.
또한 정수사를 보고 왼쪽 계곡에는 그 옛날에도 물을 막아 도자기를 굽는 용수로 사용했을 것 같은 사방댐이 위치하고 있다.
나. 정수사지(淨水寺志)
정수사(淨水寺)는 신라 애장왕 6년(서기 800년), 도선 국사가 두 곳에 절을 창건하니 묘적사와 쌍계사이다. 묘적사는 천개산의 중턱에 있었으며 천불상을 봉안하였다. 도선 국사가 말하기를 “구강포의 30리쯤에 명산이 있다”고 하였는바 이는 천개산을 두고 한 말로 추정된다.
묘적사는 임란 때에 왜구가 불을 지른 뒤에 아직까지 절을 짓지 못하고 있다. 쌍계사는 정수사 이전의 명칭으로 동쪽과 서쪽에서 흐르는 물이 절의 문 앞에서 만나므로 쌍계(雙溪)라 하였다. 강희년간(1622-1722)에 이르러 명칭을 정수사로 고치고 절에서 쓰는 직인도 바꾸었다.
이 정수사는 한 때 세금을 내지 못하여 정조 17년 의준 스님이 정수사에서 내는 각종 세금을 줄여 달라고 강진현감 이면휘에게 요청하였다. 그래서 정수사가 현재 고금도에 위치하는 관왕묘(關王廟)를 지킨다는 허락을 받아, 스님 20명이 지키는 대신에 정수사에서 바치는 모든 세금을 면제키로 하고 문서로 만들어 오래도록 전하게 하였다.
이 정수사지는 1983년 당시 강진문헌연구회장 양광식 씨가 해남에서 찾아 번역한 것으로 오래전 잊혀진 정수사와 도공들, 임진란의 비사를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이 책머리에 실린 정수사 주지 석수현 스님은 발문을 통해 “정수사는 고려시대 청자문화의 전성기에 도공들의 정신적인 귀의처로 역할을 했다”며 정수사가 우리 민족 도자예술의 발전에 끼친 영향을 긍정하고 있다. 또 “정수사는 조선 선조시대 임진왜란을 당하여 서산 사명이 이끌었던 승의병의 수용사찰로서 유일한 호국도량이었다. 당시 승군이 군호로써 사용했던 산고동(法螺, 소라) 1개와 조정에서 내린 사령장 하나는 보관상 이유로 정수사의 본사인 해남 대흥사로 옮겨갔으며, 침계루에 있는 법고(法鼓) 또한 이관된 것이 확실하다.”고 한다.
또한 정수사는 이순신 장군의 수하로 들어간 칠량의 염 걸 장군이 천태산 골짜기에서 크게 전승한 격전지로 기록되어 전해지고 있다.
<임진란과 앙급평>
임진란(1592년) 때에는 왜구들의 배 만여척이 회령포에 닿았다. 함부로 천개산에 쳐들어와 불을 지르고 위협이나 폭력으로 불상들을 빼앗았다. 묘적사의 법당과 불상3구 십육나한이 남김없이 불탔다. 쌍계를 지날 때 산의 생긴 형세와 절의 큰 건물을 보고 놀라 말하기를 “우리가 방금 전에 절과 불상에 불을 지른 것은 잘못이다. 이제 쌍계사를 보니 진실로 여러 부처를 모시는 선종과 교종의 본부가 될만하다”고 하였다. 그럼 다음 고개를 숙이고 절을 올리면서 경의를 표하고 떠나갔다.
산을 내려가 칠량에 이르러 모든 왜구들이 벼락을 맞아 죽었다. 그 때에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것은 반드시 묘적사를 불지른 죄의 앙갚음으로 받는 재앙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벼락을 맞아 죽은 곳을 앙급평(殃及坪) 이라 부르게 되었다. 후에 왜구들이 은향로 1좌와 왜촉대 1척을 쌍계사에 바쳤다고 전한다.
<쭈구리재와 노적암절터>
임란시 왜적들이 묘적사를 불 지르고 이 고개를 넘다가 ‘쭈구리고 앉은 채로 벼락을 맞아 죽었다’는 데서 유래하는 재가 있다.
노적암 절터는 30여년 전에 마을 사람들 몇이서 청자불상의 어깨가 떨어진 조각들을 보았으며 정 모씨는 60여년 전에 노적암 터에서 깨진 자기불상 조각들을 보았다고 한다. 또 한 사람은 주워서 가져왔다가 부정이 탄다고 하여 던져버렸다고 한다.
<정수사 큰북과 돌다리>
원래는 대웅전 부처님 앞에 있었는데 낫으로 떼꾸리(찌검줄)를 돌려서 북의 온 몸에 칭칭 감아서 항구이던 대구면 미산까지 굴려갔다. 그 곳에서 배를 이용하여 현재의 해남 대흥사로 옮겨 갔으며, 북 앞에 서면 사람보다 키가 더 컸다고 한다.
당초 묘적사에는 천불을 모시고 있었으며, 쌍계사에는 북과 종을 소장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북과 천불이 해남 대흥사로 옮겨 갈 때에, 달구지에 싣고 가던 천불과 큰 북이 목이 메어서인지 당전 앞을 지날 때에 큰 북이 한없이 울었다 한다. 그 때 북을 나르던 스님들과 동네 아낙네들도 따라 울던 것은 마찬가지였다고 전한다.
정수사 입구 돌다리는 이 다리를 놓기 위하여 사람들을 동편과 서편으로 나누어서 어느 쪽이 빨리 하는가 내기를 하였다 한다. 그 때에 한편은 현 위치에 까지 돌을 옮겨왔고 다른 한편은 용문에 사는 김 모 씨의 집 앞에까지 밖에 옮기지 못하여 경기에서 졌으며, 다리는 힘이 센 스님 세 명이 들어다가 놓았다고 전해온다.
<약수터 물과 밥 짓던 물>
천태산의 여름이면 물을 맞기 위해 줄을 섰으며 한 마을에 사는 이 모 씨의 모친이 아들을 낳아 이 곳의 물로 병을 고치기도 하였다 한다. 정수사 안에는 6개의 골짜기가 있고 샘물이 흐르는데, 하나는 용지(龍池)라 하고 또 하나는 석지(石池)라 하며 조계동(漕溪洞)에 있다.
한편 정수사 인근에는 스님들이 많아 밥을 짓기 위하여 씻으던 쌀 씻는 물이 현재의 저수지 위쪽까지 흘러 내렸으며, 정수사에 집을 짓는데 스님들이 용문 앞에 있는 도둑 골까지 늘어서서 손에서 손으로 기왓장을 옮겼다고 전해진다.
<백적산과 장마등>
백적산은 정수사의 남쪽에 있다. 산의 허리에 하얀 돌무더기가 있으며 마치 늙은 잉어와 같다. 이 산은 신령하고 이상하여 비 오기를 비는 제사(기우제)를 지내 면은 반드시 사람들의 기원에 대한 신불(神佛)의 영묘한 감응이 있다고 전한다. 위치는 폭포암의 뒤이며, 양수암의 앞이다.
비슷한 지명으로 장마등(長馬嶝)은 강진군민 전체가 모여와서 기우제를 지내던 곳이며, 제사 때에는 말(馬)을 이 곳에 매어 둔데서 비롯된다.
<성적암과 개천>
성적암은 정수사의 북쪽 1리쯤에 있다. 이 곳은 도선 국사가 월출산에서 처음으로 이 곳으로 와서 절을 지을 때에 머물면서 돌을 다듬었다 한다. 그러므로 암자의 이름을 성적암이라 하고, 골짜기는 숙석동이라고 한다. 한 때 출가하지 아니한 속인으로 불교의 법명을 가진 사당(舍堂)이 부처님께 경배하려고 살다 갔다고 한다.
천태봉 중간에 큰 바위가 있는데 이를 개천(盖天)이라 한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온 세상이 물바다가 되었을 때에 천관산에 있는 미륵불과 다시 만나서 도리(道理)를 말할 때에 이 개천이 푸른 공중에 떠서 온 세상을 덮고 있었다’고 한다. 그 높이는 얼마인지 알 수가 없고 바위 위에 둥근 돌이 하나 있다. 바위가 기이한 모양으로 어긋나 있어 그럴 듯 하다.천개산의 이름이 여기에서 비롯되었고, 바위의 이름도 위의 전설에 연유한다.
<황처사 터>
대구면 정수사 인근 항동 마을. 황처사터라 불리는 데가 있는데, 처사(處士) 황상(黃裳, 1788-1870)은 다산 정약용 선생이 강진에 귀양 와서 맨 처음 동문밖에 살 때에 친구가 되어주고 살아가는데 크나큰 도움을 주신 훌륭한 어른이었다. 위쪽에 집터와 우물, 묘지가 있다. 그가 이곳에 살 때에는 다산과 추사 선생이 찾았다 하며, 추사는 ‘로규황량사(露葵黃粱社)’라는 글을 써 주면서 고매한 학덕을 높이 받들었다. 또 정수사의 법당을 고치는 상량문(上梁文)을 남기기도 하였다. 그가 남긴 시 ‘조계암’ 한 수를 소개한다(양광식 역).
“팽조와 노자가 노던 나무는 시냇가 남쪽에 있으니
연꽃 같은 화산의 암자와 같다.
신기하고 묘한 부처의 도리는 세계에 자랑할 제
뜰 앞의 잣나무는 좌선을 함께 한다.
대 숲에 바람이 일어 향기로 번지고
밤이면 물에 비친 달그림자가 스님의 방을 밝힌다.
다락에 걸린 천기대사의 글귀를 볼 제
책을 펼치니 속세를 떠나 깜박 졸린다.”
<오망골과 작은 오망골>
오망골을 음지골이라고도 하며 서쪽에서 동쪽을 향하고 있다. 작은 오망골은 금(金)으로 만든 복지깨가 우물 속에 있었는데, 옛날 아이를 밴 여자가 이 것을 보고는 금복지깨가 논다고 소리치니 삽시간에 큰 바위가 내려와 우물을 덮어 버렸다고 전해온다.
<백사들과 잉에떨>
백사들은 모래(돌)의 색깔이 하얗게 보여서 유래하고, 제사를 지내던 축대가 남아 있어서 재터골 이라고도 부른다. 또 잉에떨은 백사들의 남쪽에 있으며 잉어가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는 모형을 하고 있으며, 깊은 땅속에서 물이 흘러내리는 소리가 들려온다고 한다.
10. 미산(眉山)
대구면 사당리 미산부락은 한 때 꼬리 미(尾)자를 쓰다가, 현재의 눈썹 미(眉)자로 바꿨다. 이 마을에 사시는 이화종(75세) 씨의 이야기이다.
“지금부터 한 60여년 전에 (이사를) 오니까, 꼬리 미(尾)자를 쓰고 있다 이 말이여. (이치로 봐서) 꼬리 미자가 도저히 해당되지 않은 소린데... 그래서 산세를 보니까, (마을 뒷산) 바로 요것이 눈썹이여. 그러고 나서 보니까, 옛날 여그 사시던 분들이 써 놓은, 동계책을 보니까, 눈썹 미(眉)자를 쓴적이 있더라... 이 말이여.” 마을 뒷산이 사람 눈썹을 닮아서 부른 지명이다.
“그란께 면에서도 미(尾)자를 정확하게 눈썹 미(眉)자로 써야 한다마시, 내가 부락 노인회장을 하면서, 그렇게 부르기로 하고 마을 이정표에도 눈썹 미자로 표기했제. 몇 년 안됐어, 한 3~4년 됐제.”
<용샘과 서주매>
“용바우라고 회관 기준으로 밑으로는 용이고, 욱으로는(위로는) 눈썹이여. 눈썹은 사람 눈썹 모양이라 이 말이고. 용샘이라고 있는디, 바닷가 물이 들어오면 바다고, 물이 나가면 샘이 되곤 했제. 참샘이라고도 하고, 전에 용이 살았다고도 했어. ‘용샘에서 용이 나와 용바위가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는 전설이 있어. 지금은 간척지가 되어 물이 안들어오제. 상여집이라고는 부락에서 생여집을 마람(이엉)으로 엮어 가지고 사람이 죽으면 쓰고 또 갖다 놓고 했지. 지금도 터가 있어. (미산의) 혈맥이 고리(그리) 빠져 놔 있제.”
“여기가 옛날 선착장 이었을 까요?”
“여가 전에 선착장이었다는 유래는 없어. 마을 앞동산이었다는 이야기도 있긴 한데. 그런데 어려서 용바우 너머 놀러 가갔고 굉이로 땅을 파보면 거기서 청자가 나왔어. 손구락만한 말(청자)이 많이 나왔제. 가마니로 두말(가마니)이나 캐오곤 했제. 저기 동산에도 나왔어. 그라면 골동품상이 와 사갔제. 그 때는 아그들이 많아서 많이 다녔제. 지금도 (골동품상이) 다니는데, 청자를 어떻게 주웠다 하면 함부로 팔면 안 돼지. 나라(관청)에다가 신고를 해야 하지.”
지금은 미산 뿌저리(언저리)가 선착장으로 이름이 났다. 근대화 되면서 선착장이 새로 들어섰다는 이야기이다.
“서주매라고 지명이 있었던데요?”
“서주매라는 데는, 내가 생각할 때는, 서주매? 내가 틀림없다면, 여가(여기가) 틀림없이 서쪽으로 나가는 길목에 술파는 주막이 있었다, 이 말이여. 거가 ‘노서학연’이라고, 늙은 쥐가 들로 내려오는 형국이라, 좌청룡은 괴(고)바우 쪽이고 우백호는 여계산이 싸고 있는 형국이제. 옛날에 서주매란 데가 움푹해 가지고, 술을 파는 주막이 있었을 거여. 옛날 옛날 사람들은 알더란 이 말이여. 초군, 즉 농부들이 풀도 베고 나무도 하러가다가, 술도 한잔씩 먹고 가던 주막이 있었다 이 말이여. 백사 미산 당전 사람들이 나무하러 가고, 술도 한잔 하고 그런데라 이 말이여. 거가 (백사 미산 당전에서 보면) 서쪽이제. 거가 틀림없이 ‘서쪽으로 술파는 주막이다’라는 뜻이여.”
11. 수동
가. 수동 대동계
“우리 할아버지들께서 대동계를, 우리 향약, 이 마을은 대동계로, 이 대동계 계측이 영암 구림리 대동계 계측과 같다. 거기서 기록하는 게 구림리 계측을 따온 것이다. 그래 가지고 이 마을을, 계측으로 다스렸는데, 규율이나 행동을 바로 잡았다. 만약 행동을 함부로 했다가는 거기에 대한 상당한 벌을 받는데, 덕석몰기(이)를 한다거나, 모닥매를 때렸다.” 수동리 윤 철(76세) 씨의 이야기이다. 대동계의 유래는 한 4백년 전이라 한다. “모닥매요?”
“음, 잘못한 사람이 있으면 덕석몰이를 해, 마을 사람 여럿이서 매를 때린다는 이야기지.(행동을) 함부로 했다가는, 깐딱 하면 매를 맞는다. 우리 부락뿐만 아니라, 우리 같은 데만 아니고, 백사나 청용, 계치 같은 마을도 잘못한 거 있으면 우리 대동계로 지켜졌다. 그리고 사서삼경, 한학 등을 가르쳤는데, 그 뒤에 책이... 계측(칙) 소학 대학 맹자 논어 주역 책들을 보관하고 있다가, 6․25동란 때 이 책을 한 집으로 모아 보관하고 있으라고 했는데, (그 뒤로) 잊어버렸다고 하고 안줘...” 수동은 현재 대부분 윤씨 자작일촌이다.
“그 것 때문에 우리 대동계 제각이 있는데, 아, 지금은 대동계 계각이라고 하는데, 그 책을 안주고 하니, 집이 값어치가 없는 집이 되고... 모임이 있을 때 그것을 찾을려고 해도 없어. 그 제각에서 모이는 날짜는 강신일이라고, 계측에 대한 낭독을 하는 날이고, 계원들이 계측을 따라야 되고 지켜야 된다는 내용이다. 수계일은 계측을 상책하는 날이다.”
“마을 가운데 동백나무 숲이 있던데요?”
“마을에 동백나무 숲이 있는데, 그것은 한 이백년 정도 됐을까... 지금도 싱싱하다. 우리 6대조 할아버지가 심어 놨다. 그 때는 그 부근이 밭인디, 거기다가 많이 심었다고 해... 많이 죽고 남은 것이 그것이다. 종가 집에서 관리하지.” 다시 화두를 바꾸어 이야기를 계속한다.
나. 수동 동학운동
수동은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동학혁명의 격전지로서 치열한 전투가 치러진 마을이다. 최근 재조명되기 시작한 동학운동은 과거의 ‘동학란’에서 이제 ‘동학혁명’으로 그 명칭이 바뀐 데서도 알 수 있듯이 일제에 의해서도 그렇고 소위 지배자의 논리에 의해서 오랫동안 정당한 평가를 받아오지 못해 왔다. 동학운동이 이 지역에서 치열하게 일어났으며, 또한 격전지로 선택된 배경에는 동학의 주체세력과 정면으로 반대되는 세력간의 첨예한 대립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하면 누르는 힘이 강했기에 튀는 힘이 상대적으로 강해지는 스프링의 원리와 같은 사회구조를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 뒤로 동학은 우리로 (보아) 6대조 할아버지, 그 양반이 동학을 했는디, 이 마을에 대한 멸망적인 역사를 가져오게 했다. 지금은 동학이 농민운동이다 혁명이다 하는디, 그 당시에는 동학이 역적으로 몰리는 그런 위기가 있었다. 이 마을 사람들이 일본 놈들한테 피해를 입고, 그래 가지고 그 집 큰집 작은 집이 아주 망하다시피 했다. 그 양반이 낮에는 산에 숨어있다 저녁에 자기 집에 와... 처음에는 형수가 밥을 하고, 반갑게 해주고 했는데, 나중에는 마을사람들이 알게 되어, 그 양반이 마을언덕에 나타마면, 아무개가 영암양반인디, 마을사람들이 ‘영암양반 들어왔다네’(라고)한께, 마을사람들이 대창을 들고 나와서 쫒아간께, 그 영암양반이 장총을 들고 ‘너희들이 잘못하면 쏴버린다’고 하면서 뒤로 슬금슬금 뒷걸음쳐 도망갔다. 이짝(쪽) 산(마을 앞산)으로 도망해 월악리, 저녁에 도암쪽으로 피신을 했다는 얘기가 있다. 그분이 그러한 관계로 이 동학운동이 끝난 뒤 민족사에 남았다...” 학문을 많이 하던 곳이라 동학에도 밝았던 모양이다.
다. 쇠사슬과 우는 소리
“그 후로는 우리 마을이 6․25 동란 때 난리를 겪었다. 지금은 6․25 동란이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이 이렇게 생각하는디, 이런 말을 해도 괜찮고 하는디, 우리 마을이 한 50호는 피해를 봤는디... 경찰서에서 50여명을 철사 줄로 묶어서, 저기 고금도 쪽으로 끌려가, 바다에 던져졌다고 해.”
“왜 끌려가게 되었는데요?
“그 사람들은 (공산당이) 여그 봐라하면 이렇게 하라 하면 (이렇게) 하고, 저렇게 하라 하면 (저렇게) 하곤 했제. (좌우익을 모르는) 죄가 없는 사람들이라... 그 때 우리 마을은 아무껏(것)도 모르는디, 느닷없이 밤중에 끌려가곤 했는디, 그 사람들의 우는 소린지 몰랐는디, 막 소리를 지르고 끌려갔는데, 그러니깐 우리 마을에서 잡혀간 사람들이, 어깨에 쇠사슬을 메고 마을 앞을 지나는디, 우는 소리가 그 밤중에 우리 마을 앞을 지나갈 때 ‘아이고-’ 소리 지르면서 울었다 한다.
그 후로 고금도 앞바다에 시체가 떴다고 해. 경찰서에서 배를 태워, 고금도 앞바다에 던져버렸다고... 그 때는 풀치 재(강진북부)로 끌려가서 죽고, 솔짓재라고 관산으로도 끌려가 죽임을 당했다고 해. 산으로 끌려가 죽고, 바다로 끌려가 죽고... 당시 우리 마을이 170호 가운데 50호가 피해를 입었제. 그 때는 마을이 탱탱 비었다.” 그리 멀지도 않은 1950년대 사상과 이념을 달리한 동족간의 비극이다.
라. 백사마을과 불싸움
예전에 백사하고 수동과는 꼭 정월 대보름 때 불 싸움을 했다 한다.
“그란지, 불을 홱- 돌리고 하는디, 해방된 후 윤 모 수동 사람이 활을 갖고 불을 쐈던 모양이라. 백사 서 모(전 이장)를 쐈는디, 그 사람 눈을 찔러 부렀어... 한쪽 눈을 잃었지. 공부도 잘하고 초등학교 다닐 때 영리하기가 말할 수 없었제. 나중에 백사 이장도 하고 했는데, 한쪽 눈이 보기 흉하게 되어버렸지. 그래 갔고 그 때, 지금 세상 같아선 살지 못한단 소리가 나왔겠지.” 불 싸움에 대한 이야기이다.
(횃)불은 ‘짚으로 땋아 갔고, 불을 붙여 돌린다’고 한다. 보통은 논 쪽만 태우다 돌아가곤 하는데, 간혹 부상을 입힐 정도로 심하게 했다고도 한다.
“우리들이 한 초등학교 3-4학년 때 그 때 일이니까 사십오-육년 전의 일이지. 삼사십 명씩 이웃 수동마을과 불 싸움을 했지. 그 시절엔 그랬어. 옛날 일인데, 지금도 거기(수동)하고는 사이가 안 좋아...” 백사 이장(61세)의 이야기이다
마. 수동 야학소 노래
꼬불꼬불 논둑길 걸어 가면은
고개 밑에 조그마한 토담집 하나
낮이면 나무하고 아기도 보고
저녁이면 공부하는 우리 야학소
저녁마다 선생님이 하시는 말씀
부지런히 공부하고 씩씩하여라
글 모르면 어리석고 어두웁단다
(제공 : 윤옥님)
12 백사 마을
가. 부뜽과 불무뜽
백사는 ‘흰백(白) 모래사(砂)’라는 지명이다. 백사는 예전에 문화가 전혀 없는 바닷가 마을이었다고 한다. 예전에 이웃 수동마을이 양반들 사는 데였다면, 백사는 상민들이 바다일이나 하면서 사는 수준이 낮은 동네였다고 한다.
“백사는 해방된 뒤로 젊은이 들을 잘 가르쳤어. 신학을 가르쳤지. 어렵지만 다들 중고등학교에 보내고...” 반면 수동은 한학 위주의 서당공부를 하여서 근대화 이후 그 문화의 차이가 역전되었다고 한다.
“한학을 어디다 쓸 거야? 서당에서 부모들이 가르치게 했지만, 부모들이 자식을 진짜 사랑하고 했다면, 그렇게 안해야 할 것인디, 지금도 후회를 하고 있다. 그러니까 그 분들(백사주민)이 전에는 (바다)고기나 팔러 (수동에) 온다든지 했는디, 쌀을 사러 오곤 했는데, 인간적으로 봐준 적이 없었는디... 이제는 그 분들한테 무릎을 꿇어야 할 판이여.” 수동리 한 주민의 이야기로, 지금에 와서는 신학을 주로 배운 백사 주민들이 더 잘살고 있고, 잘 되었다는 회고이다.
또 다른 백사 지명에 관한 이야기이다.
“거가 옛날에는 부뜽이라고 ‘뜰 부 오를 등’ 이란 데가 있어. 지금도 파면 모세(모래)만 나와. 그런데 혈맥(지맥) 있는 데를 파면 빨간 황토 흙이 나온다고 하지. 토질이 좋은 데는 오색토라고, 토질이 좋으면 자손들이 좋다고 해. 좋은 명당이라 이 말이여. 명당을 볼려면 첫째 토질이라 이 말이여, 좋은 흙은 한 손에 넣고 꽉 쥐면 한줌 흙이 그대로 있다고 그래. 그런 흙이 여기 대구에는 없었다고 봐. 근데 청자는 어떻게 구웠나 모르겠어.”
“불무등이라고도 있던데요?”
“불무뜽이라고 대구 경찰지서에서 백사마을까지 가자면 토질이 좋은 데가 있는데, 전에 대장간에 불을 일어서 성냥을 하고 했으니까, 거가 사람이 밥을 먹고 산다, 그랬어. 토질리 좋아, 확실히...”
나. 토질과 명당
전에 구곡마을 앞 논은 토질이 좋아 알곡들도 실했다고 한다. “돌들이 크나 적으나, 그란께는 바우가 듬성듬성 하나씩 있었단 말이여. 근데 구곡 쌀은 죽은 송장도 일어선다고 했어. 쌀이 좋아 메(젯밥)가 좋았다는 말이여. 그래서 구곡 쌀 한말에서는, 아홉 되를 되도(넣어도) (한말) 근수가 나오는디, 계치나 딴 데는 쌀을 열 되를 되도(부어도) 한말이 안나온다고 하제.” 미산 이화종 씨의 이야기이다.
“지금도 객토를 한번 한 땅과 두 번 한 땅과는 천지 차이여. 객토를 많이 한 논에서 쌀이 많이 난다는 얘기지.”
“여기도 기우제가 있었을 까요?”
“명산이라고 비가 안 오면 무제(기우제)를 지내제. 인근에 천관산이라고 있는데, 그런 명산에다 묘를 쓰면 비가 안온다고 하제. 그런 명산에다 묘를 써 가지고 비가 안 온다는 애기여. 그러면 여자들이 소매(오줌)를 퍼가지고 가묘에 뿌리고, 혹은 묘를 파헤쳐 버리기도 해. 또 ‘투장’이라고 있는데 남의 좋은 선산에 가, 남의 묘를 파헤치고, 자기 좋으라고, 자기 조상의 뼈를 갔다 묻는다 이 말이여. 그러면 쓸꺼여(되겠어)? 욕심이제... 그라면 결국 자기 조상 뼈도 잊어버리고 망하게 되는 거여. 그란께 옛날에 아주 좋은 묘는 남이 모르게 평장(묘봉을 안올림)도 하곤 했제.”
“명당이란 어떤 자리일까요?”
“여그 위에 당전이라고 있제. 청자 가마가 나온 데. 거가 여계산이라고, 닭 계자를 쓰는데, 그라면 장탉이 있고 암탉이 있어. 장탉은 계치 뒤 대계산이고, 암탉은 당전 뒤에 있다고 했어. 여계산이란 이름도 거기에 유래하지. 암탉이라는 데가 틀림없이 있는데, 바로 고려자기 터란 이 말이여. 당전서는 저기 위에 내려갔고, 헬기자리 깎아 놓은 디(데), 거가 혈이지 않느냐 생각해. 그래갔고 고려자기(터)가 빠졌다고 보제.”
“일리 있는 이야기이네요? 풍수라는 것은 무엇인가요?”
“풍수란 바람과 물을 본다는 얘기여. 바람 물 사방 자리를 보아 자손들에게 해가 없겠다 싶으면 명당이란 말 이제. 세상은 음양이 있어 서로 당기는 기운이 있다고 봐. 음택은 물의 위험이 있고 양택은 바람의 위험이 있어. 그란께 묘도 음택과 양택을 가려 쓴다 이 말인데, 동서남북 사방을 갖고 명당을 짓는데, 팔방에서 바람이 안 닿으면 진짜 명당이여. 좌청룡 우백호란 말이 있는데, 내(묘의 자손)가 몸통인데, 좌우에서 보호해 주는 것, 즉 내 형제간이 울타리가 되어 보호해 주는 것이라 이런 뜻이제.” 풍수지리에도 밝은 이화종 씨의 이야기이다.
13. 돌 갯벌
대구면 사당리 앞 사거리에서 오른쪽 미산마을 쪽으로 여행을 하자면 바닷가 갯벌을 옆에 두고 있는 해안도로가 있다. 반대편에서 차가 오면 간신히 비켜나갈 만큼 좁은 길이지만 강진과 마량간 해안도로의 진정한 깊이가 그 안에 있다. 길의 초입에서부터 만나게 되는 갯벌은 그 안에 담긴 생명들과 함께 숨을 쉰다. 이곳의 갯벌은 다른 지역과 달리 크고 작은 돌덩이들로 이루어졌다. 해안에서 족히 1Km는 걸어 나가야 진흙으로 이루어진 갯벌을 만날 수 있다. 갯벌은 바다 생태계의 보고이다.
여기 대구앞바다는 돌 갯벌이라고 불린다. 돌 갯벌은 굴(석화)이 살기 좋은 최적의 조건을 만들어낸다. 이곳 사람들이 ‘상구데미’라 부르는 이 갯벌은 겨울이면 그대로 어민들의 삶의 밑천이 된다. 돌에 붙어 자라는 굴은 벌이가 시원치 않은 주민들에게 좋은 소득원이었다. 뿐만 아니라 더 먼 바다로 나가면 만나게 되는 진흙 갯벌에서는 고막과 바지락이 자란다. 그러한 해산물은 생산되고 판매되어 이곳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의 대학 밑천이 되었다. 갯벌은 자기 안의 무수한 생명과 더불어 사람까지 키웠다. 아름다운 풍경에 담긴 진한 삶이 ‘상구데미’ 갯벌을 더욱 아름답고 정겹게 만들고 있다.
이 돌 갯벌은 하루 두 번의 조수에 의해 돌이 다듬어진 것이다. 이러한 조수의 유래로는 “원래 바다는 잔잔하기만 했던 것이 도중에 바닷물이 밀리고 밀려가는 일이 생겼다”고 한다.
그 유래로는 “옛날 바다 속에 큰 이무기가 살았는데, 이무기는 명주실꾸리가 3천개나 들어가는 깊은 바다 속에 큰 구멍을 파고 그 속에 들어가 살고 있었다. 이 이무기가 제 구멍에서 밖으로 나오면 밀물이 되고, 그 반대로 이무기가 제 구멍으로 들어가면 썰물이 되었다. 그리고 바다를 헤엄쳐 다니면 파도가 일어 물결이 생기며 거칠어지면 해일이 인다.”고 전한다.
14. 난산
난산(卵山)은 ‘계치의 대계산(수탁)과 당전의 여계산(암닭)이 낳아 만든 산’이라는 뜻으로 알이 네 개인데, (산)봉 위에다 묘를 써 버렸다 한다. “뒷산이 매봉으로, 매가 알을 놔두고 저기 올라가다가, 저기 시루바위가 되었다. 북매는 매가 날개를 펼치고 있는 모양이지. 북채라고 요것은 본께, 북쪽이 고라져 부렀제.” 공오규(71세) 씨의 이야기이다.
난산은 마을 뒷산이 지네 형국이어서 선조들이 밤나무를 많이 심었다고 한다. 건너편 마을이 계치(닭마을)인데 닭은 지네를 좋아해 마을에 피해가 있기 마련이나, 닭은 물을 싫어하기에 다행히 마을 앞 큰 냇물이 가로막고 있어 양 마을이 피해가 없었다고 한다.
15. 옥녀암과 정승의 논
청용 마을은 마을 뒷산이 대나무로 둘러싸여 항상 푸르다는 마을이다. 이 마을에 사시는 정윤진(89세) 씨는 면에서 나이가 제일 많으신 어른이다. “어르신, 올해 춘추가 어떻게 되십니까?”
“여그 대구면 에서는 내가 최고여. 팔십구... 남자치고는 없어. 다 나밑에 있제. 여(기)가 나 출생지제. 우리 어머니 아버지가 여기서 나를 나았제. 지금까지 살고 있어. 안사람(할머니)하고 아들 내외하고 같이 살어.” 정 할아버지는 지금도 정정하시며 논둑 풀을 베러 다니신다.
“오래사시는 비결이 무엇인가요?”
“시골에서 농사지으며 일하고, 좋은 공기에서, 근심 걱정 없이 살다보니, 나이만 먹게 되었제. 하루 세끼 밥 먹고, 잠 잘 자고, 적당히 일하면서 운동하는 것이 비결이라면 비결이제.”
“약주는 얼마나 드시나요?”
“술? 술은 얼마 안 마셔. 가끔 한잔씩이나 하고... 젊어서는 몰라도 술을 많이 안마시지... 술을 마시게 되면 몸이 상하기 마련이여.”
마을에 내려오는 전설은 많지 않으나, 옛날 배가 닿던 바다 항구로서의 기능을 할 때도 있었던 모양이다. 마량 등지로 올라오는 마필을 청용항구에서 내렸다는 기록이 전하기 때문이다.
마을과 마주한 대계산은 ‘만경대’라고도 하는데, 날씨가 좋으면 멀리 제주도가 보인다고 한다. 그 산에의 지명으로는 문박골, 대머리봉, 호랑이가 출몰한다는 구시골 등이 있다.
마을 위쪽 사장(근평)나무가 있던 자리에는 옥녀암이 있었다고 한다. 옥녀암은 ‘옥녀(선녀)가 앉아 머리를 빗었다고’ 하는 자리가 아직도 남아 있다. “옥녀암은 이 욱(위)에가 있어. 팽나무가 큰 것이 있어. 거그 보고 옥녀암이라고 그래.”
“옥녀, 선녀가 어디서 내려와 머리를 빗었다는 건가요?”
“모르제, 어디서 내려왔든가, 어떻든가 하여튼 옥녀암이라고 그래.”
옥녀암 위로는 서당이 있었다는 서당골이 있으며, 청용저수지 아래로 길게 펼쳐진 논다랑이는 각기 이름이 정해져 불렀다 한다.
“정승의 논, 피리배미, 신피리배미, 장구배미, 소구배미, 장주구 논, 낭주구 논, 판척의 논, 광수구 논, 숭년반그릇... ” 정윤진 씨의 설명이다.
16. 고씨 장사와 호랑이
만경대 아래 계치리 마을에는 전에 조씨 성을 가진 사람이 있었는데, 하루는 산으로 풀을 베러가 낫으로 호랑이를 잡았다고 한다.
실제로 계치마을 어귀에는 ‘범바우’라는 바위가 있는데, 조선조 말기 순조 때 담력이 세고 힘이 장사인 창녕 조씨 석관이란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어느 날 풀을 베러가기 위해 낫을 갈면서 ‘오늘은 호랑이를 한 마리 잡아야 하겠다’고 했다. 그래서 인근 마을로 풀을 베러 가, 잠깐 쉬고 있는데, 조씨의 앞에 호랑이가 나타나 덤벼들 것 같았다. 평소 듣던 바로는 호랑이가 나타나면 옷을 벗어 던지면 된다는 말이 생각나 웃옷을 벗어 호랑이에게 던지니, 그 호랑이는 옷을 덥석 물고 물어뜯는 것이었다. 이 때 호랑이를 덮쳐 왼쪽 옆구리에 끼고 목을 조르면서 주위의 사람을 불러 빨리 지게에 낫을 가져오게 했으나, 동행한 사람들은 무서워 접근하지 못하고 결국 조씨 스스로 호랑이를 옆구리에 낀 채로 낫 있는 데로 가, 호랑이의 배를 갈라 죽게 했다고 한다.
조씨는 호랑이 가죽을 벗겨서 마을 어귀에 있는 바위에 덮어 놓았는데, 하루는 조씨 집 황소가 처음 보는 이상한 짐승이 바위에 있는지라 뿔을 들이대고 힘겨루기를 했다고 한다. 그러나 호랑이 가죽을 둘러 쓴 바위는 꿈쩍도 않고, 화가 난 황소는 뿔이 빠지고 피가 나도록 싸워서 결국 머리가 깨지고 골병이 들어 죽고 말았다고 한다.
호랑이는 배가 갈려 죽었으나 죽은 호랑이는 가죽만으로 황소를 잡았으니 조씨에게 복수를 한 셈이다. 이후부터 이 바우를 범바우라 했다.
한편 “예전엔 호랑이가 저 산에 나타나곤 했지. 그래서 저기 산(만경대 또는 대계산)을 무섬등이라고 하지. 밤이면 호랑이가 나타나 ‘어흥 어흥’ 했다고 해.” 계치리 마을 주민의 이야기이다.
“사람을 해치지는 않았을까요?”
“응, 그 전에는 집에다 대발을 쳤다고 해. 문 앞에다가. 호랑이도 사람을 무서라 하고, 사람도 호랑이를 무서라 해.”
“낫으로 호랑이를 잡을 수 있었을까요?”
“아, 힘이 장사라, 풀 베러 가서 다른 일 보고 있는데, 호랑이가 나타나 씨름하듯이 손으로 잡고서, 다른 사람보고 낫을 가져오라고 해, 낫으로 잡았다고 해. 그만큼 힘이 장사였던 모양이제.”
“지금은 맷돼지들이 설친다면서요?”
“아, 맷돼지들이 먹을 게 없으니깐, 밭으로 내려오고, 또 산에 들어간 사람들까지 해친다고 해. 보통 사람을 보면 도망가는데... 이 근방에 요 근래에도 누가 산에 들어가 죽었는디, 짐승이 내장을 다 파먹었다고 해. 옛날에는 산에 가 풀을 베다, 거름으로 만들어 논에 뿌리고, 나무를 해서 밥해 먹고 해서 민등산 이었는디, 시방은 산에 들어갈 일이 없어...” 나무가 무성해 들짐승이 날뛴다는 것이다.
또한 1800년대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로 호랑이가 집에 들어오지 못하게 울타리를 해 놓았고, 방문 앞에 죽창을 세워 놓으면 되돌아가기도 하고, 대나무 울타리를 하여 놓으면 발로 모래를 던지기도 하였다. 한번은 호산이란 사람을 호랑이가 물고 가버려 마을사람들이 꽹과리를 치면서 찾아 나섰는데, 산 아래서 머리만 남아 있었다고 한다.
한편 호랑이와 관련된 우화로서 “마을에 효자가 있었는데 호랑이를 만나 등에 업고 가다가 내려놓고 앞으로 갔다 뒤로 갔다 하더니, 효자인 줄 알아보고 집에까지 데려다 주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호랑이는 앞으로 가면 해치지 않고 뒤로 가면 해친다고 한다.
17. 남호 만리성
가. 만리성 또는 천리성
대구 구곡리에서 ‘구성리’라 해서 언급한 적이 있는 이 “만리성”은 언제 어떤 연유로 쌓았는지 역사상 밝혀진 바 없다.
“남호에서 구곡 마을 앞을 거쳐 기곗재(지잿재, 계치 위의 재), 회진까지 연결되어 있어. 남호에서 이 성이 시작된다는 뜻에서 ‘성머리’ 라고도 부르지. 우리 마을에서 보면 성벽이 밖으로 나 있어, 요쪽은 방제(어)를 했제. 남호에서 회진까진께 완도 고금 약산 거그서 성을 쌓지 않았나 생각해.” 구곡리 이준길 씨의 이야기이다.
“언제쯤 쌓았을까요?”
“유래가 없은 께, 삼한 시절에 성을 쌓고 살지 않았나 생각해...”
또 다른 사람의 이야기로는, 상기 자료 등을 이유로 “삼별초 시대에 진도에서부터 경상도 남해안 까지 이 성이 축조되었다”는 이론을 펼치고 있으나 “어떠한 역사적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고 이에 대한 더 깊이 있는 연구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된단다.
다음은 마량에서 남호리로 시집와 살고 있는 한 아주머니의 이야기이다. “전에 어려서 띠나무(김을 생산하기 위한 발장에 쓰인 풀의 일종)하러 관찰봉 뒷산에 가보면 큰 돌이 많이 쌓여져 있었어. 기운이 얼마나 있었으면 그렇게 쌓았는지 모르지. 여기 오니까 성머리라고, 성이 여기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는디, 지금도 성의 자리가 마을 앞쪽으로 나있어. 저 바닷가에서 시작되었나 봐...”
“누가 쌓았을까요?”
“우리 어려서 듣기론 ‘남매가 하룻밤 만에 쌓았다고 그래. 동생이 남자였든가, 서로 누가 먼저 성을 쌓나 내기(시합)를 했든가 봐. 누나가 모냐(먼저) 끝난가? 동생이 모냐 끝난가? 그래서 그 성을 하룻밤에 쌓았다고 하제.”
“하룻밤에요?”
“응, 참, 전설 같은 얘기지. 아마 신통력 이었든가 봐. 하루 낮 하루 밤 살기 위해 성을 지었다고도 하지.”
또 다른 사람의 이야기이다.
“어떻게 그렇게 성을 쌓았는지 몰라. 하도 신기해 전에 한번 가봤어. 하룻밤, 하루 살기 위해서, 낮에 천리성을 찌었다고 해. 보지도 못하고 듣기만 하고 말 한거여. 아 그런 돌을 어떻게 반듯반듯하게 쌓았는지 몰라. 기곗재라고 거그 가면 볼 수 있제. 그런데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지 않았느냐 이 말이여. 하루 밤, 하루 낮에 천리를 쌓는다는 것은 말이 아니여. 그란디 그것이, 사람이 쌓았다는 거여. 옛날 양반들은 참 기가 막힌 양반들이여...”
‘이름 하나, 지명 하나 지어 놓은 게 다 이유가 있다’ 이 말이다.
나. 마류장성 또는 연해장성
황 상(黃 裳, 1788-1870)의 자료에 있는 ‘마류장성’은 그 뜻이 ‘말을 머물게 하던 긴 성’의 뜻으로 말한 것 같다. 또 방산 윤정기 (尹廷琦1814-1879)는 ‘연해장성’이라하니 그 뜻은 ‘바닷가를 따라서 쌓은 성’이라는 의미인데 ‘진도에서 시작하여 경상도에서 끝이 난다’라고 하였다. 현재 남아 있는 성의 자취는 강진군 대구면 남호, 구곡, 수동, 난산, 청룡, 지젯재를 거쳐 장흥군의 대덕읍 회진까지 이어졌으며 남호부터 지젯재까지의 거리만하여도 20여 km나 된다.
계참(界站)이란 '머무르는 경계' 또는 '말을 갈아타는 경계' 등의 의미가 있으며 1865년에 작성된 '여지'지에 관련내용이 있어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단종원년 계참곶 토비초요 의양마 축목장 주구십리(端宗元年 界站串 土肥草饒 宜養馬 築牧場 周九十里)'라 했다.
그 내용은 '단종원년(1453)에 계참곶이 토지가 비옥하고 풀이 풍요하여 말(馬)을 기르기에 알맞아 목장을 세우니 둘레가 사방 90리나 된다'이다. 그리고 그 앞 편에는 「목장은 신지, 고금, 조약, 완도에 있었는데 이상의 네 곳은 폐지되었다」고 한다.
18. 구곡 설소리
다음은 대구면 구곡리에 전해 오는 민요이다. 또한 강강술래의 설소리(앞소리)는 스무 살 이전에 시집온 새색시들이 반드시 불러야 할 옛날 구전 민요였다고 한다. 시집온 지 벌써 50여년이 지난 구곡리 한 아주머니의 노랫말이다. 정확한 가사는 아니나 대강의 뜻은 짐작할 수 있다.
<저수지 노래>
일이삼월에 봄바람 불면
흐리 흥안개 열 무리 차고
이 놈의(?) 성화 여름비 오면
방죽마다에 봇물이 출렁
어화야 웃배미 기화야 말 배미
수리조합원 우리네 살림
앞뜰 뒤뜰에 종달새 울고
이 논 저 논에 모심기 노래
내어라 내어 저 절로나 내어
한 치 둘치나 잘 도나 하네
어화야 웃배미 기화야 말 배미
수리조합원 우리네 살림
무명 꽃 피고 녹두꽃 피는
호미 든 저 처녀 웃음꽃 핀다
웃음풍경 시절에 피어난 모습(?)
소 뛰긴 총각이 덩실 춤춘다
어화야 웃배미 기화야 말 배미
수리조합원 우리네 살림
나비야 나비야 범나비야
흥에 성성 범나비야
열두 가지 화초 중에
무슨 꽃이 제일이더냐
긴 날개 방죽 안에
방실 피었다 연꽃일 레
이산 저산 범나비야
경주산천 절을 지어
그 절 안에 피는 꽃은
반만 피어도 화초로세
초당 안에 범나비는
그 꽃을 보고 나를 본다.
Ⅲ. 마량면
1. 마량 까막섬(천연기념물 제172호)
가. 까마귀 섬
마량 앞 바다에 물이 들면 두 개로 갈라졌다가 물이 빠지면 하나로 합쳐지는 둥그런 두 개의 섬이 있다. 1966년 천연기념물 제172호로 지정 될 만큼 울창한 숲으로 한 낮에도 숲 안은 컴컴할 정도로 까맣게 보이는 섬이 바로 까막섬(가막섬)이다.
강진만의 입구에 해당하는 마량항은 ‘강진만을 여자의 질에 비유하면 마량은 그 입구에 해당하고, 까막섬은 강진만 몇 개의 섬 가운데 그 첫 음핵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또 두 개로 구성된 까막섬은 마량항의 눈이라고도 볼 수 있다.
크기는 오른쪽 큰 섬이 6,300평 왼쪽 작은 섬이 4,300평이다. 열대성 난대림 120여종이 분포 되어 있는 이 섬은 주요 수종이 후박나무, 돈나무, 생달나무, 참식나무, 상수리나무, 굴참나무, 챙나무, 쥐똥나무들로 이루어진 천연 상록수림이다.
일설에 의하면 “옛날에 수천마리의 까마귀 떼가 날아와 앉아 섬이 까마귀처럼 까맣게 보인다고 하여 까막섬이라고 불리워졌다”고 한다.
나. 이 충무공의 승전고
“이 섬은 먼 옛날 남국에서 표류하여 이 곳에 머물렀다 한다. 그리하여 이 곳에 까마귀 한 마리가 떴다 앉았다” 하는 설이 있다. 그로 인하여 각막 섬이라 이름하였고, 각막 섬의 식물로는 주로 후박나무 및 상록수, 백여 종의 열대수림이 천연미를 이루고 있어 마치 미용사가 다듬어 놓은 사람의 머리카락 같은 형의 절승가경을 이루고 있다.
“이 곳은 지금으로부터 500여년 전 완도 고마도에 있는 수군만호가 마량으로 이전했고, 전함2척의 거북선을 비롯하여 수십 척의 병선이 있었으며 800여명의 수군이 있었다” 우수영지(右水營誌)에 실린 내용이다.
선조 25년 임진왜란시 고금전(古今戰), 한산섬 해전에 출전하여 승전했으며,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이 섬에 내려 승전고를 울렸다 하니 그 북소리가 귓전에 들리는 것 같다. 그 후 이 곳 전함들은 경남 노량진 해전에 참전하여 전몰하였다는 비화사가 있다.
1969년에 씌어진 ‘강진 명승고적’의 저자 김점석 씨의 기록이다.
다. 영천과 득남의 섬
또 다른 설화로는 “이 섬 안에는 좋은 샘이 있어 임란 당시 이순신 장군 휘하의 병사들이 금복개를 만들어 씌어 음료수로 사용했다”고 전해지며 “이 샘물을 마시면 영생 할 수 있다 하여 영천(靈泉)이라고 불렀다고 하나, 구전되어 오는 이야기로만 남아 있지 본 사람은 없다.”고 한다.
또 항간에는 이 섬이 사내의 불알과 같이 생겨 섬이 바라다 보이는 곳에 집을 지으면 아들을 낳는다는 설이 있어, 이 섬이 보이는 마량에 집이 많이 들어서게 되었다고도 한다.
이러한 설에 의해 마량은 전에 대구면에 속하면서도 면소재지보다 인구가 많았고, 강진에 이어 두 번째로 경제적 유통력을 가진 1종어항 이었다. 섬이 조수의 간만에 의해 하나의 섬으로도 연결되고 두개의 섬으로도 나누어지듯이 까막섬에 얽힌 전설도 가지가지이다.
다음은 마량리 박춘성(83세) 정희연(82세) 최병식(74세) 씨 등으로부터 채집한 전설 내용이다.
라. 남양에서 떠온 섬
원래 이 섬은 적도 부근 남양(南洋)에 있다가 이 곳으로 떠내려 왔다는 전설이 있다. 남양에서 이 섬이 떠 내려와 마량 항구에 접안하려 하였으나, 마량의 어느 임신부가 이를 보고 ‘섬이 떠온다’고 소리쳐 그만 우뚝 서버려 현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다음은 마량 원주민들에게서 채취한 전설 내용이다.
“그 전에 우리가 듣기로는 저 섬이 떠내려 오다가, 그 저 임신한 여자가 ‘네, 아따, 저그 먼 섬이 떠내려 온다’ 그란께는 거가(거기) 주저앉았다고 하는데, 그래서 가막섬이라고 하데요.”
“섬이 떠내려 오다가요?”
“응, 지상 났다(부정 탔다)고 해서 섬이 멈춰부렀어.”
“어디서 떠내려 오는지요?”
“저 아래서, 저 우게서(위에서) 떠내려 온디, 임신한 여자가 ‘워마, 저 섬이 떠내려 온다’ 그란께는 저 지상 났다고 해서...”
“섬은 몇 개 이었나요?”
“두개, 둘이여. 작은 가막섬, 큰 가막섬.”
마. 앉은뱅이와 섬
마량 원포리 주민들의 또 다른 전설이다.
“인자 가막섬이 남쪽에서, 남쪽 바다에서, 서서히 떠내려 오는디... 여그 동네에가 앉은뱅이가 있었던 모냥이야! 앉은뱅이가 하나가 있었는디, 인자, 앉은뱅이 어머니가 아들 하나 낳아놓고 키운디 인자, 산디, 하도 안타까운께 ‘아야, 저그 섬도 인자, 저 걸어댕긴디, 왜 너는 못걷냐?’ 하니께는 그 즉시로 섬은 거기서 멈춰 서 갖고 가막섬이 되었고, 거시기 아들은 그 때부터 다시 걸어 댕겼더라는 그런 전설이 있어.”
같은 내용의 설화로는 ‘옛날 어느 부인이 다리가 불구인 아들을 업고 마량 포구에 나갔는데, 갑자기 서쪽에서 두 개의 섬이 둥둥 떠오는 것을 보았다.’ 이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란 그 부인은 잠시 마음을 가라앉히고 등에 업고 온 아들을 보며,
“애야, 저기를 보아라. 저 섬은 발이 없어도 물위를 걸어오는데, 너는 어찌하여 두발이 있어도 걷지를 못하느냐”며 크게 한탄하였다.
이 말이 끝나자마자 두 섬은 그 자리에 멈춰 서 까막섬이 되었고, 걷지를 못하던 아들은 잘 걷게 되었다. 이는 적도에서부터 육지가 되려는 꿈을 가지고 험한 풍파를 헤치고 바다를 걸어왔던 두 섬이, “다리가 불구인 아들을 등에 업은 한 여인의 한탄을 듣고 육지를 지척에 두고 자기 다리를 대신 그 불구아들에게 내어주었다”는 자연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표현한 우화이다.
2. 마량 만호성(萬戶城)
가. 마도진
‘마도(馬島)’라는 지명을 마량에서는 이를 ‘마두(馬頭)’라 한다.
마두라는 지명을 설명하는 사람에 따라서는 “제주도에서 길러진 말을 육지로 옮길 때, 가장 먼저 이 곳에 운반해 왔기 때문에 ‘마두’라는 지명이 붙여졌다”고 한다.
또 풍수지리 적으로 봐서 “마량 땅의 형국이 말의 머리를 닮았다 해서 붙인 이름이다”고 한다.
기록에 의하면 ‘마두’라는 지명이 민간어원 적으로 해석되어, 주민들 사이에서는 ‘말머리’ 즉 ‘마두(馬頭)’라고 알려지고 있다고 생각된다.
< 마두 >
“그 전에는 말이 여그 들어왔드라여” “어디요?”
“어째서 마두라 하면, 마두라고 해서, 말이 들어와서 마두라고 했어. 말머리 마두(馬頭)요”
“마두요” “마두가 말머리라고 해서 마두라고 헌대. 말이 어디서 어디선가 뛰어 들어와, 요리 들어 오드라야”
“마두라는 말하고, 마량하고는 다르나요?”
“같아요. 옛날에는 마둔디, 인자 마량이라 불러요”
이는 이쪽 지방의 다른 지명 중에 ‘성머리’가 있는데, 성(남호부락의 만리성)의 머리(시작되는 부분)와 유사한 개념이다.
<총각과 아기성>
“어떤 사람이 첫날밤만 치루고 성을 쌓으러 갔어. 마누래가 임신을 했는디, 그 놈(아들)이 커갖고, 나갖고(태어나) 커서, 큰 총각이 되갔고, 즈그 아부지를 찾으러 왔드라여. 그래갖고, 한번 성을 쌓으러 오므는(오면) 좌우간 뭐 늙어 죽도록 쌓는다여.
제주도 분까장(사람까지) 이렇게 해서 성을 쌓(았)다고 우리 애려서 들은 이야기로 그랬어. 중국 사람도 오고, 그란께, 제주 고씨도 들어왔제.”
“인자, 그 놈(아들), 와 부자가 막 보듬고 울거든, 막 보듬고 운께는, ‘와따, 나도 저런 일이 생겼는디’ 그라고 사방에서 울고, 그 날 일을 일절 안해 부렀어.” “어째서 그랬다냐?” 그란께는
“이러이러한 사람이 임신해갖고 (태어나 자라나서) 왔는디, 한 총각이 되갖고(되어 가지고) 왔는디, 즈그(자기) 아들이 낳아갖고 왔는디, 그렇게 옷을 해서 그 어머니가 저 명함(이름)을 써줌시롱 ‘이~양반을 찾아가거라, 그 냥반이 느그 아버지다.’ 그라고(그렇게) 찾아왔어.”
“인자 그걸 보고 울고, 너도 울고, 나도 울고, 모두... 그래갖고 일을 중단해 부렀어. 그란께는 그 원님이 그 사람을 데려다가 죽여부렀어.”
“그 이유는 ‘너 때문에 하루 일을 중단했은께, 너는 벌로 해서 죽어야 쓴다.’하고 죽여 버렸는데, 아 이놈의 것이 그 때부터, 이 날부터, 아 인자, 그 뒷날부터 일을 죽도록 하제. 죽도록 일을 해서 보문, 아이성이 딱 허물어져 불고, 허물어져 불고 그라거등.”
“그란께는 인자 용한 사람한테 가서, 인자, 물어봤어. ‘어째서 이 성이 쌓아노믄 헐어지고, 헐어지고 그란다?’고 그란께는 ‘안 죽일 사람을 죽여서 이렇게 헐어진다고, (죽은 사람이) 한을 품고 이렇게 헐어버릴 것이다’라고 그란께, 거기다가 거 머시기를 해서, 음식을 해서 탁, 차려놓고 제를 지내고, 인자 그렇게 해야 안 헐어진다고 그라고, 그래갖고 인자 한 음식 차려갖고, 총각을 위해 걸게 장만해 갖고 제를 지내고, 그 뒤부터 안 헐어졌어.”
<중구삭금>
“저, 제주사람이 여그 와서 이 공사 때 일을 한디...”
“제주도 사람이요?” “아, 동의(승낙)를 했다고 그렇게 얘기를 한디, 처음에 임신 중에, 첫날저녁에, 이 근방, 시방 같으면, 노비 모양으로, 왜정때 노비모양으로 납치해갔던 모양이여.”
"새벽 무렵에, 그런디 거그서(제주에서) 임신을 됐든가(했든가), 이 놈이 첫 앨배긴디, 하 이 놈이 (커갖고) 어린마음으로 참, 그 사랑이나 받고, 아버지 어무니 사랑이나 받고 댕길 것인디, 엄마 밑에서 즈그 아버지 없는 줄 알고 그란디."
(이웃에서) "아 이, 호로자식아, 호로자식아, 그래 쌌거든, 애비 없는 호로자식이... 그래 즈그 엄마보고, 아, 즈그 엄마보고, 아...
‘엄마, 아빠는 어따(어디) 사실라고 없다냐?’고 그란께는 ‘잉, 어디 간다고 가셨는디 아직 안 온다.’ 그 뒤로는 칼을 갈아 갖고는 딱 뎀시롱 ‘바른대로 얘기 안하면 칼로 죽여 부린다, 어, 같은 동무들한테나, 동네에서 챙피해서 못살겠다. 애비 없는 호로자식이라고 밤낮 이런 소리를 듣고는 댕길 수는 없다.’
그래갖고는 그 때는, 즈그 엄마가 바로 얘기를 해줬는디, ‘이러이러한 사실이 있는디, 첫날 저녁에, 새벽 무렵에 납치해 가부렀단다.’
‘어디로 갔는가?’ 그란께, 가령 전라도믄 전라도, 강진이믄 강진, 그란디 이러한 데라고 그런께, 그 때는 사정사정해서 (면회가) 된다든가, 목돈으로 해서 만나기도 하고, 어떻게 했을 것인디, 딴맘 먹으러 오니께, 사방으로 철조망으로 딱 막고 철문으로 달아놓고, 그 안에가 수백 명이 공사를 한디, 어떻게 말을 잘해서, 만나서, 인자, 아 즈그 엄마, 즈그 아빠, 인자 아, 아들하고 서이(셋이) 목메어 울고 있으니께, 옆에 분들도 ‘우리 집에도 저런 꼴이 있을 것인디, 우리 집에도 저런 꼴이 있을 것인디, 그래쌌오?’ 하고 울어싸니께, 그러니까 감독자가 ‘그 어떠한 사실이냐?’ 그란께는 ‘이리이리해서 첫날 저녁에 장개간 첫날저녁에, 그런 초저녁에, 조숙이 있었던 모냥이죠? 그래갖고 새벽 무렵에 납치해 가부렀는디, 그 아들이 커서 서장에 댕기면서 이런 챙피를 당하고, 부모 상봉해서 저런 꼴이라.’고 그란께는, 명령을 하기를 ‘저 놈들, 즈그 시아배 감독자들한테, 저놈들 잡어다 목을 비어라.’ 그란거야.”
“왜 그랬을까요?” “인자, 일은 않고 면회 와서, 다른 사람들 일까지 방해가 됐는가 싶더란 얘기여.”
“그래, 세 사람 다 죽어 부렀어. 그라니께는 나머지 인부들이, 내일 장차 일을 열심히 하되, 항상 일을 참 방해적으로 할 수는 없거든 이라.”
“열심히 일을 한다고 한디, 조석으로 (침을) 퉤, 그러자 감독자가 뭐이라고 그러냐믄 ‘우리는 언제나 항구랑 도착할 것이냐?’ 그런께는 ‘저 철문이 녹아 자빠져서 느그는 집에 간다. 고향 도착한다.’ 그란께는 아침저녁으로 퉤, 철문아 어서 너는 녹아 자빠져라, 그란께는 말판에는 (철문에) 물이 젤젤 흐르더라 이거여.”
“철문에서 그란께는 이삼일에 녹아 자빠지드라. 그란께, 그 때 말로 해서 ‘중구삭금(衆口鑠金)’ 이라는 말이 있어. ‘여러 중자, 입 구자, 녹을 삭자’ 여러 입이믄 쇠도 녹드라. 그래서 그런 꼴도 있었다고 그런 전설이 있어...”
나. 마도만호
마량(馬良)이라는 지명이 최초로 역사 기록으로 나타 것은 1429년 4월 12일이다. 마량면은 봉대산을 중심으로 산줄기 따라 마을이 형성되어 산골과 바닷가를 주위로 민가들이 들어서고 어족자원이 풍부해 선사시대부터 선인들이 살아왔던 흔적들을 곳곳에서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왜구의 잦은 침입으로 혹심한 시달림을 받았던 때도 있었으며, 그것이 이유였을까 500년 이상 이곳을 이어온 성씨가 없다.
조선 초기에 수군만호가 주둔하게 된 이유도 여기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육지의 출입구이자 삼국시대 중국과 문물의 교환 통로로 이용되고 이후 청해진 장보고 전성기 시대와 청자의 수송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음을 추측케 한다.
또한 수군진이 있을 당시 제주도, 노화도, 완도, 소안도 등 주변의 섬에서 기른 말을 이곳에서 받아 한양으로 올려 보냈는데, 배에서 내린 말들에게 먹이를 먹이던 곳이라서 마량이 되었다고 한다. 마량은 원래 마량(馬粱)으로 표기되었다가 량(梁)이 량(良)으로 바뀐 것이다. 粱이란 뜻은 해안의 돌출부에 위치한 것으로 ‘촌이나 군사기지’의 성격을 갖는다.
삼면이 바다에 둘러져 있는 한반도에 왜구의 침입이 잦았던 당시에는 특히 성의 중요성이 높아 요충지마다 크고 작은 성을 쌓아 침략을 막아 내었다.
이러한 사실은 조선왕조실록 선조 26년(1593년)의 기록에 ‘우리나라는 삼국시대에서 고려말기에 이르기까지 외환이 그치지 않아서, 전쟁이 말할 수 없이 많았는데도 지탱하여 보수할 수 있었던 것은 단지 산성의 이로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옛사람들은 환란을 대비함에 있어 이 일에 제일 관심이 깊었는데, 태평이 계속된 이후로는 전혀 축성하지 않았다. 때문에 흉적들이 한번 일어나면 승승장구하여 이르는 곳마다 붕괴되어, 흩어져 달아난 인민들마저도 몸을 숨길 곳이 없어 모두 적의 칼날에 죽게 되었으니 말하기에도 참혹합니다’라는 기록이 있다.
해상무역의 요충지로 생산물이 풍부했던 강진은 왜구들의 침입이 유달리 많았다. 그래서 조선 초기부터 전라도 서남해안 지역에는 좌·우수영 각 1개소와 만호진 15개소가 설치된다. 원래 강진의 만호진은 탐진포(강진읍 남포)에 있었으나 1417년 병마도절제사영이 강진 병영으로 옮겨오면서 마도(馬島, 지금의 고금도)로 전진 배치된다. 그 후 왜구의 침입이 줄어들고 섬에서의 선상 생활이 불편하므로 병선을 고조눌이(高助訥伊)에 정박시켰다가 원포(垣浦)를 거쳐 1429년 마량(馬梁)에 정착한다.
일설에 의하면 ‘마도 만호성’은 수상생활의 불편함을 해소하고 육상으로 침투하는 적을 방어하며, 군량과 군기를 저장·보관할 목적으로 연산군 5년(1499) 가을에서 겨울까지 쌓았다고 한다. 이 만호성(萬戶城)은 1895년 동학의 난(동학혁명) 때 심하게 파괴되었다고 한다. 그러던 것이 해방전후를 기점으로 원형이 거의 없어져 버리거나 무너지고 훼손됐지만, 역사적으로 의미 깊은 사적지임에는 틀림없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마도만호를 통치하던 ‘정청(政廳)’이 있었고 지금도 정청의 자리에 주춧돌로 보이는 집터가 있다고 한다.
또 이 만호성은 정확한 연장길이를 알 수는 없지만 현지 주민들의 진술로 미루어 대략 1.5㎞~2㎞정도였던 만호성은 태조 실록의 기록으로 볼 때 1417년에 축조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병마도절제사영이 광산에서 도강지역으로 옮기자 병마도절제사 영에 가까운 탐진포에 주둔한 수군을 마도로 옮기고 ‘마도만호’라 명명한 것으로 추정된다.
마도 만호성의 기록들은 태조실록, 세종실록지리지 뿐만 아니라 만기요람(萬機要覽), 연산군일기 등 다양한 역사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육지의 관문으로 탐진현의 중요성이 그만큼 컸음을 보여주고 있다.
조선 초기 탐진현에 탐진호 만호가 배치되었으며, 탐진호 만호가 마도만호로 바뀐 것은 1417년으로 추정해 본다. 그 이유는 1417년 병마절도사영이 광산에서 도강지역으로 옮기자 병마절도사영에 가까운 탐진포에 주둔한 수군을 마도로 옮기고 마도만호라고 명명한 것으로 추측된다.
‘세종실록지리지’ 전라도편에는 수군처치사영이 무안현 대굴포 좌수도만호 선박처가 보성군 동쪽 여도량, 관내의 만호가 8명이니 내래포, 돌산, 축두, 녹도, 회령포, 마도, 달량, 어란 이다. “마도(馬島)는 강진현 남쪽 원포(垣浦)에 있으며 중선(中船) 8척과 군사 510명, 뱃사공 4명을 거느린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후 규모가 축소되어 만기요람 호남읍지 중 강진현 여지승람에는 “방선 1척, 거북선 1척, 하후선 1척, 군병 약 280명 추정”으로 기록된 사실을 볼 수 있다. 특이한 것은 거북선 1척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면 왜 이 곳 만호를 마량만호라고 하지 않고 마도만호라고 하였을까? 거기에 대한 답은 다음의 역사 기록과 구전에 의한다.
“조선 초 조정에서는 왜구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해서 육지에는 병마진을 설치하고 해안에는 수군만호를, 병선을 거느리고 해상을 순시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그러므로 그 도서가 지금은 고금도이다.
“처음에 고금도에 병선을 주둔하고 마도만호라 하였다가 왜구의 침입이 줄어들고 또 도서에서의 선상 생활이 불편하므로 병선을 원포를 거쳐 1429년 마량으로 이전하였으나, 명칭은 마도만호 명칭을 그대로 사용하고 원래의 마도는 고마도(지금의 고금도)라 부르게 된 것이다”라고 구전되고 있다.
다. 만호성
종 4품인 만호가 거느린 마도 만호진의 규모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있으며 “성 둘레 870척, 곡성(曲城)이 6개 이며, 증보문헌비고에는 석축 890척, 높이 12척, 치척(稚堞) 300, 곡성(曲城) 6”이라고 적혀있다. 치첩(雉堞)은 '성가퀴'라 하여 몸을 숨겨 적을 방어할 수 있도록 더 쌓은 낮은 담을 말하며, 곡성은 '굽은 성'으로서 성문 밖으로 둘러 가려서 구부러지게 쌓아 적이 성벽을 타고 올라오는 것을 감시하는 곳이다.
이러한 역사 기록들과 현지 실사로 보아, 성의 길이는 1.6㎞정도였음을 짐작케 한다. 만호성은 동․서․남․북문이 있었다. 곡성이 6개라는 기록으로 볼 때 출입구가 6개라 추측할 수 있지만 어떤 연유에서인지는 모르지만 성문은 4개에 불과했으며, 현존하는 유일한 출입구인 북문외에는 성문은 남아있지 않다.
“마량항 입구는 서문이었으며 마량수협 방면이 동문, 마량 시장 통이 남문이었다”는 것을 주민들의 말을 통해 들을 수 있다.
만호성은 서문부분부터 북문까지 일부는 훼손됐어도 원형이 대체로 보존돼 있지만 북문을 지나 1백여m를 지나면 성터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고 민가들이 들어서 있고 주변에는 성의 기단부분에 사용된 돌들이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성의 흔적은 담을 쌓는 석대나 집을 짓는 석축으로 사용되었고, 1951년 마량 시장이 개설되면서부터 조금씩 없어져 버린 성벽은 1970년 이전에 현재 남아있는 부분을 제외하고 완전히 사라져 버려 아쉬움이 크게 남는다.
라. 마류성
만호성에 대한 기록 중 말을 사육했다는 것은 거의 찾아볼 수 없지만, 마류성(馬遊城)이란 것을 볼 때 말이 많이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또 인근 대구면 청룡마을 선착장은 “옛날에 말(馬)을 배로 이동할 때 이곳을 이용했다”는 구전이 전해 내려오고 있어 말의 사육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또 마량리 마을 중 원마, 숙마, 신마 등 5개 마을이 마(馬)자를 사용하는 것으로 보아 단순히 지형이 말의 형국이란 것 때문에 그런 것만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옛날엔 '오마지간(五馬之間)'이라 하여 '마'자가 들어간 5개 마을이 있다. 원마(元馬)·숙마(宿馬)·원마(垣馬)·백마(白馬)·음마(陰馬)가 그것이다.
이 중 말의 중심부에 해당하는 원마는 다시 1·2구로 나뉘는데, 현재 1구는 마량의 본터 자리이고, 2구는 1970년대 바다를 매립하여 신시가지가 형성된 곳을 가리킨다. 지금의 신마(新馬)마을도 원래는 원마 1구에 속했으나 해방 후 새로 분리됐다. 숙마(宿馬)는 해방 후 간척지가 조성되어 원포마을에서 분리된 마을로 말이 먹이를 먹고 쉬면서 누워 있는 형국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는 조선왕조실록 단종 1년(1453년) 7월 23일에 ‘의정부에서 삼도도체찰사(三道都體察使)의 계본(啓本)에 의거하여 아뢰기를, 전라도 강진현 계참곶이(界站串)는 둘레가 90리이고, 토산이 비후(肥厚)하고 물과 풀이 모두 족하여 말 1천 필을 놓아기를 수 있다’고 하여 ‘점마별감(點馬別監)으로 하여금 여러 포구의 당번선군을 발하여 목장을 만들게 하였다’라는 기록이 전한다.
그리고 예로부터 “대구면 주민들이 마량리 방향의 사람들을 천시하고 터부시 했었다”는 것으로 짐작해 볼 때 “만호성 이전에 말을 사육했던 ‘마류성’의 존재와 말을 사육했던 천민들이 집단으로 주거하고 있었다”는 것을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마류성’이 ‘만호성’으로 바뀌고 또 군사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었다는 것은 옛 말이 되어버린 현재라 할지라도 ‘문화재의 중요성과 관광자원의 활용화’라는 측면을 생각해보면 보존과 관광자원으로서의 복원의 가치는 충분히 있다고 생각한다.
마. 마도진의 축성
마량 마도진은 조선시대 연산군 5년(1499년 7월 12일)에 축성을 시작해 연산군 6년에는 완성된 듯싶다. 연산군일기에 의하면 “장령 손번, 헌납 홍윤덕이 아뢰기를 근래 민력이 너무 피폐한데, 금년 점마(點馬)에 백성들이 이미 소란하고 또 축성의 역사를 일으키고 명년에 서정(西征)하게 되면 백성의 피폐가 어찌 이보다 더함이 있겠습니까. (중략) 축성은 만약 아니할 수 없으면 마땅히 그 완급을 참량하여 축성해야 합니다. 전라좌도는 적의 침략을 받는 가장 긴요한 곳이므로 마도, 달량 등은 금년에 쌓아야 하고...” 기록되어 있다.
이 때 연산군은 “성을 쌓지 않았다가 만약의 사태가 발생한다면 책임지라”는 강한 의지를 보여 축성은 실제로 추진되었던 것 같다. 이듬해인 연산군 6년(1500년 2월 28일)에 전라도 병마절도사 한충인은 “왜선 11척이 마도에 돌입하여 하륙하여 서로 싸웠는데, 만호 및 군관 한명이 화살에 맞았습니다”고 조정에 치계하기를 “이 달 22일 왜가 마도에서 도둑질하므로 만호가 군사를 거느리고 성밖으로 나가 싸웠는데, 만호 및 군관 4인이 화살에 맞았습니다. 만호는 군사를 퇴각하여 성안으로 들어왔는데, 왜도 따라 들어와서 성중에서 싸우다가 군량 80여석을 빼앗고 군사의 의장과 군기도 약탈해 가고, 화살과 칼날에 상한 자가 27인이고 만호 및 군인 11명이 죽었습니다”고 하여 연산군 6년 2월에는 이미 성이 축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하겠다.
성의 규모 및 병력으로 영조 대에 편찬된 ‘여지도서’에 의하면 마도진성은 석축으로 둘레가 890척(尺) 높이 12척, 치첩 300, 곡성 6이며 군관 21명, 이(吏) 18명, 지인(知印) 7명, 사령(使令) 11명 등이다. 치(稚)는 성벽 바깥으로 튀어 나오게 쌓은 성벽으로 그 위에 첩(女墻, 성첩)이 둘러 쳐져 있다. 첩은 성가퀴라고도 하는데 성위의 낮은 담으로 총구와 타구가 있는 구조물을 이른다. 곡성(曲城)이란 굽은 성이라 하며 성문 밖으로 앞을 가리어 반달모양으로 구부러지게 둘러쌓은 시설이다.
이러한 마도진은 탐진포에 만호가 두어졌던 1408년(태종 8)부터 사료 상에 마도진만호라고 분명하게 나오는 1425년(세종 7) 사이의 어느 시기에 설진되어, 1499년(연산군 5)에 축성을 하고 이후 여러 차례 왜구의 침입을 받거나 을묘왜변․임진왜란 등에서 큰 전투를 치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1894년 마도진을 비롯한 각 진은 갑오개혁 때 각 군영을 통폐합하여 군무아문의 소속이 되었다가 수군진은 모두 폐영되었다.
바. 마량의 여러 지명
<마량진>
마량은 강진의 동남쪽 맨 끝에 위치하는 천혜의 항구이다. 마랑진의 지도를 보면 성내에는 동리와 서리가 있고 성밖으로는 성상리, 성하리 외리가 있었으며 북에는 삼마산(三馬山)과 신당(神堂)이 있으며 동에는 천우봉(天雨峰)과 단두(端頭)가 있었다. 또 성의 안 건물로는 동헌, 내아, 3문, 화약고, 환향고, 객사, 장청, 사령청, 이청, 군기고, 남문, 북문, 어변청, 집물고, 물고 등 도 있었던 것으로 표기되었다.
처음에는 제주를 오고가던 관문이었다가 7세기 무렵부터는 중국과 일본에서 쳐들어오는 적을 막기 위해 군사목적으로 개설했던 군항이면서 근처에는 나라에 바치기 위해 제주에서 실려 온 말들을 육지의 환경에 적응할 때까지 임시로 방목하던 목마장(牧馬場)도 있게 되었다.
<수군의 활약>
임진왜란 때 마도진과 마도성 군사들의 활약상 한 가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이순신 장군은 통제사영을 목포 고하도에서 고금도 덕동으로 옮긴 후인 1598년 7월 24일 절이도 해전에서 왜적을 크게 무찔렀다. 이 해전에서 녹도(고흥 녹동) 만호 송여종은 8척의 병선을 거느리고 나가 왜선 6척과 왜군 69명을 포획했는데 이때 마도 수군이 참전하여 용감히 싸웠다고 한다.
이 충무공이 통제사영을 설치한 현 완도․고금도․덕동은 당시 행정 구역상 마량과 함께 강진현에 속하였으며 마도진으로부터 직선거리로 10여리 이내이다. 따라서 이곳에 통제사영을 설치할 때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마도진이 솔선수범하여 여러 가지로 수고와 협력을 아끼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역사속의 마량>
“마량의 이전 명칭은 고마도에서 유래했고 현재의 명칭은 세공마와 관련이 된 것 같다” 강진문헌연구가인 양광식 씨의 주장이다.
“옛일을 더듬어 보자면 서기 757년에 탐진현이라 하고 그 치소는 남원포(南垣浦)에다 두었고, 828년에 청해진이 설치되어서는 물류의 교역 항이 됐을 법하다” 여기의 남원포는 현재의 신마마을 부근이 아니었는가 싶다.
그러다가 1272년에는 삼별초가 탐진현의 집을 불태우고 재물을 빼앗아가며, 1352년에는 왜구가 만덕사를 침략하여 사람을 죽이고 재물을 빼앗고, 1372년에는 왜구가 도강과 탐진을 침략 1500년 2월 21일에 왜선이 침입하는 등 잦은 침탈이 1894년까지 자행 되었다.
그래서 1401년에 마도진이 개설되고 1408년 1월 22일부터는 육지에서 말을 잘 타고, 바다에서는 배를 잘 타는 군인이 싸움배에다 무기와 먹을 식량을 싣고 배위에서 근무하다 간혹 배를 대는 장소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1425년 2월에는 ‘고조눌이’에 파견했던 마도만호의 싸움배 4척을 남원포로 옮겨 닻을 내리고 머물게 하니 그 이유는 해남 쪽의 좌곡 등 11개 마을과 강진의 칠량과 대구에 살고 있던 백성들이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에서였다.
그 뒤인 1429년 4월 12일에는 현 완도 달도에 있던 싸움배를 마량으로 옮겨오고 마량에 있던 싸움배는 회령포로 옮겼으며, 1477년 7월에는 성을 쌓자는 논의가 있었고, 1478년에는 흙담과 나무로 둘러친 방어시설을 하자는 논의도 있었다.
또 1485년 3월에는 만호영으로 승격되어 싸움배 1척, 중선 8척, 군인 510명, 뱃사공 4명이 편제되어 1499년 7월 12일 이후에 성을 쌓게 되었는데, 그 유적이 현재의 만호성이라 추정된다.
<목마장>
한편 목마장에 대해 알아보면 고려 말 원나라가 탐라에다 1279년부터 자기네 말(馬)을 먹여 기를 목마장을 설치하여 15년간을 운영하였다. 그 이후 고려에서 반환요청을 하여 1294년에 되찾고 나서 탐라를 제주(濟州)로 고쳤다.
“아마도 이런 연유로 해서, 제주의 말을 탐진현의 마도로 싣고 와서 내리게 되므로 ‘말을 건네주는 다리’ 즉 마량(馬梁)으로 불리게 된 것 같으며, 또 말을 놓아기르는 목마장이 탐진현에 개설이 되고부터는 「오마지간(五馬之間)」즉 ‘원마(元馬). 숙마(宿馬). 원마(垣馬). 백마(白馬). 음마(飮馬)’ 등의 지명도 생겨나 지금까지 그 일부가 존재한 것 같다”고 한다.
또 말을 기를 때는 수컷 100필, 암컷 15필을 ‘한 떼’라 하고 관리인은 군두(群頭) 1인 군부(群副) 2인, 목자(牧子) 4인을 두고 말은 상등, 중등, 하등의 등급과 망아지, 반성숙마, 성숙마로 구분했으며 마도의 총수는 1,000필을 기르고 총감독은 종4품의 감목관이었다고 기재되었다. 만호시절의 정청(政廳)이 해방이후에도 있었던 듯 하나 지금은 사진으로만 볼 수 있다.
사. 마량 줄다리기
마량에서는 “대보름 날 밤에, 휘영청 둥근 달빛 아래, 성안과 성밖 사람들이 편을 나누어 줄다리기를 했다”고 한다.
위포덕(81세) 박태녀(82세) 씨 등에 의한 구전 민속 내용이다.
“인자, 날이 좋지 않을 때는 횃불을 켜놓고 하고... 줄을 만드는 짚은 각 집에서 갹출했제. 줄은 외줄로 만들어 마량 구장터, 인자 북문 있었던 곳에서 내려오는 곳이여... 장태(터)에서 큰 길을 따라, 전에 수협 있던 곳까지 뻗게끔 길게 만들었제.”
“줄이 상당히 길었나 보군요?” “그라제. 줄은 설(구정)이 온다 싶으면 만드는디, 줄 만드는 사람이 따로 있어, 서너 명이 함께 만들었어.”
줄다리기는 성안과 성밖 두 편으로 나누었고, 남녀노소 모두 참여했으며 옛날에는 성안 사람들이 많아 성안 사람들이 이기다가 나중에는 성밖 사람들이 이기게 되었다. 보통 승부는 삼세판이라고 세 번 겨뤄 승부를 냈다. 이기게 되면 그 마을에 길조가 든다고 생각했다. 줄다리기가 끝난 후 줄은 태워버린다. 줄다리기는 “굿 보러 나간다고 할 정도로 재미가 있어, 인자 여자들은 쫒아 다니면서 응원하고, 상대방이 이기지 못하도록 솔가지를 꺾어 찌르기도 했제.” 줄다리기 할 때 음식은 대보름이라 각자 성의껏 마련해서 서로 대접했다. 이 줄다리기는 일제시대 대동아전쟁 때 없어졌다고 한다.
<공동체 의식과 풍요 기원>
이러한 줄다리기는 주로 농경사회나 어로생활을 영위하던 동남아 일대에서 행해지던 놀이로써 풍수해 등 거친 자연과 싸우면서 농사와 어로를 하던 지방에서 주민들의 단결심을 꾀하고 그 해의 풍요와 풍어를 기원하는 의식에서 행하여 졌다.
우리나라 중부 이남 지방에서 행해졌던 줄다리기는 보통 정월 대보름 저녁에 성행되었는데, 음력 정월 보름은 새해 들어 첫 번째 맞는 만월이다. 가득 찬 보름달은 곧 풍요와 다산의 상징이며, 달(月)은 여신으로 생산과 깊은 관계가 있다. 바닷가 사람들은 조금(만조)이니, 여자들의 월경이 달의 주기와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다고 믿었다.
원래 밤은 신비하고 창조를 위한 활동과 휴식을 취하는 가부장적인 사회나 현대에서도 남여 또는 가족이 얼굴을 맞대고 대화하거나 생산적인 활동을 위한 신성한 시간이라고 인식되어 왔다. 특히 둥글고 밝은 보름달이 휘영청 뜬 새해의 밤은 더욱 신성시되어 각종 하늘에 올리는 제사와 당산제를 지내는 때이기도 하다. 이러한 대보름날 신(또는 여신, 자연)에게 바치는 제사를 지내는 것은 어찌 보면 신비스런 자연의 힘에 대한 선조들의 겸허한 경배였는지 모른다.
아무튼 대보름날 밤 줄다리기는 마을 사람들이 두 편을 갈라 서로 내기를 하여 이긴 편이 풍년(풍어)이 든다고 하는 속설이 있었는데, 줄을 당기는 두 편을 각기 암줄과 숫줄로 정하여 암줄 즉 여성편이 이겨야 풍년이 든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 역시 풍요다산의 의미가 있고, 농경사회의 지신(地神)은 대부분 여신이므로 여신을 즐겁게 하기 위하여 여자편이 이겨야 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 줄다리기에 쓰인 줄은 뱀이나 용으로 비유되며, 용과 비(雨)는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믿어 가뭄 때면 기우제의 한 행사로 줄다리기를 벌인다고도 한다. 또 기우제의 하나로, 짚으로 동아(도마)뱀(용의 화신이라고 함)을 만들어 막대기로 때리고 놀면서 비가 오기를 염원하는 풍습도 있었다.
아. 매구와 마당 밟기
보름 때는 보통 매구를 치고 놀았다. 마량의 매구는 유명해서 해남까지 가기도 했다 한다. “매구끼리 싸움이 벌어지기도 하는데, 다른 부락에 들어가려면 통나발을 오래 불어야 했제. 인자 이 통나발을 오래 불어야 다른 마을에 들어가 매구를 칠 수 있었다는 이야기여.”
또 마량에서는 보름에 마당 밟기를 한다. 매구는 일정한 형태를 이루고 있는데, 매구를 치는 사람들 말에 의하면, 일자 굿부터 십일자굿가지 있다고 한다. 마량에서는 물이 귀해 샘이 중요하기 때문에 제일 먼저 하는 굿이 샘굿이다. 다음으로 선창가에 가서 굿을 치고 나서, 동네 굿을 친다. 동네 굿은 마을회관 등에서 한다. 마당 밟기를 집집마다 돌아다니면 적어도 일주일은 걸렸다 한다.
마당 밟기 순서는 제일 먼저
“주인, 주인 문 열어. 주인, 주인 문 열어.” 하면서 문 굿을 치고, 주인이 문을 열어 주면 마당 밟기를 바로 한다. 그 다음에는 부엌에 가서 정제 굿을 치고 나와서는 다시 마당 밟기를 한다. 그 때 음식을 차려서 두 번째 마당 밟기를 할 때 음식을 먹는다. 음식 외에 쌀이나 돈을 내놓기도 한다. 정제 굿을 할 때에는
“정제구석도 네구석, 방구석도 네구석, 마루구석도 네구석, 12구석에 모든 잡귀는 물러나고 명과 복을 처들이자.”라고 한다. 이 소리는 집집마다 똑같이 한다. 정제 굿을 할 때에 쌀을 한 그릇 떠서 명을 길게 한다고 나무에 실을 감아서 쌀에 꽂아두기도 한다.
자. 출산 지앙동우
출산 때는 미리 지앙상(삼신상)을 차려놓고 아이를 쉽게 낳으라고 빈다. 산모가 난산을 겪으면 시어머니가 ‘지앙동우’에 대고 “우리 어진 지앙님네, 어서 어서 순산하게 해 주십시오. 앉아서 구만리 보고, 서서 삼천리 보는 지앙님네, 우리 애기 명복(命福) 많이 태서 주십시오.”라고 빌게 된다.
지앙상은 바닥에 짚을 깔고 그 위에 상을 놓는다. 상위에는 정화수를 떠놓는다. 상 옆에는 미역과 쌀을 놓아둔다. 이 때 쌀을 오가리에 넣어 놓기도 하고, 그 오가리 위에 미역을 얹어 놓기도 한다. 이 것을 ‘지앙동우’라 부른다.
아이를 낳기 위해 산모가 진통을 시작하면 방을 뜨겁게 지핀다. 아이를 낳을 때는 혼자 낳거나 시어머니 등 집안사람이 와서 출산을 돕는다. 아이는 무릎을 꿇고 엎드린 자세로 낳는다. 누워서 낳으면 출산 후 몸이 좋다고 하지만 진통 때문에 기어 다니다가 낳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난산인 경우에는 남편의 허리띠를 산모에게 둘러주면 쉽게 낳는다고 한다.
아이가 태어나면 지앙상에 차린 미역과 쌀로 첫국밥을 해서 산모에게 먹인다. 이 지앙상은 세이레나 일곱이레 동안 차려두며, 이레마다 지앙상에 물과 밥 미역국을 올린다. 이 때 짚은 상을 치울 때까지 깔아 놓는다.
아이가 태어나면 대문밖에 금줄을 친다. 금줄은 자기 집에서 농사지은 짚으로 왼새끼를 꼬아 만든다. 아들인 경우에는 고추, 숯, 창호지를 꽂고 딸인 경우 금줄만 쳐놓는다. 금줄은 이레 동안 걸어 놓았다가 불사른다.
3. 영동 별신굿
강진 동남부에서는 유일하게 별신굿을 지내고 있는 영동부락을 찾았다. 이 마을에서는 매년 정월대보름 영봉정(정자)에서 제를 올리며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면서 철야 농악(풍물) 놀이를 한다. 다음은 별신굿의 유래에 대해 가장 잘 알고 계신다는 윤재열(78세) 씨와 나눈 별신굿에 대한 이야기이다.
“별신굿이 무엇인가요?”
“아, 이 지방에서는 별신제라고, 옛날 주로 어촌에서 풍어를 기원하거나, 풍년을 기원하거나 하는 제를 올렸제.”
“언제부터 시작됐을까요?”
“옛날부터 백년도 넘었고, 이백년도 넘었고... 오래 됐다고 봐. 지금은 제 지내고 매구치고 노는 것이제.”
“제는 언제 지내나요?”
“정월 대보름, 내일이 보름이다 하는 열 낫날 저녁에 모시제. 매구치고 장구치고 볼만해. 청년회에서 많이 와. 마량면 대구면에서 모두 모여가지고 볼만해...”
“제를 지내는 장소는 어디인가요?”
“저기 사장나무 있는 데, 제각이 있어. 당산 할아버지 할머니를 모시는 쪼깐한(작은) 지각(제각)이 있는디, 당산제라고... 저녁 11시부터 시작해 새벽 세시 네 시까지 지내. 음석(음식) 장만을 많이 해.”
“제관은 누가 하나요?”
“나이 잡순 양반들이 하제. 갓 쓰고 검은 두루마기, 제복을 입제. 그라고 축문을 읽고 잔을 한잔씩 올리제.”
“어디 대회에 많이 나가던데요?”
“남도 문화제 나가고, 입상은 못했는데... 군 공보실 같은 데 가면 비디오로 찍어 놓은 것이 있을 것이여. 재작년인가 낙안읍성 나가고 그럴 때 한번씩 간다.”
“영동에서 특히 유명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유래를 말하자면, 농악 때문이지... 이 마을에 농악이 유명했거든, 목적이 그것인디, 지금은 사람이 없어가지고, 그란께 수동 백사 청룡 계치 아줌마 청년들이 다 모인다. 힘 있는 (젊은) 사람들이...”
곁에 계신 할머니도 곁들여 설명을 하신다. “계치 당전, 군동 한실도 모신다고 해요. 여가 농악이 유명해서, 청자문화제 하고 그럴 때, 군에서 농악이라고 여가 유명하니까, 한 팀씩 넣다 보니까 그런다. 손님들이 장구치고 소구치고 논 데 보면, 참 볼만해요. 군수님, 경찰서장도 오시고 군 의원들도 구경 와요.”하시면서 대보름날 하루 전에 꼭 한번 구경 오라고 당부하신다.
“마을에 다른 전설은 없나요?”
“여가 왜정 때 유명한 것이 뭔가 하면, 매구가 유명했제. 강동수라고 무당인데, 진도에서 무당하다 우리 마을(영동)에 살았거든. 한 팔십년 전에 들어왔어, 그 분이 살았으면 백열 살 정도 된다. 그에게 배운 사람이 한사람 있어.”
“누구신가요?”
“윤채봉이라고 설소리를 잘해 설쇠라고... 참 멋쟁이였어. 그 사람 (동생이) 육자배기를 잘했어. 노래를 부르면 기생들이 홀딱 반했다고 해. 그런 얘기 말고는 전설이란 것은 없어. 내가 볼 때에 별신굿은 백년 전후로 시작했는데, 제 지내고 매구치고 노는 것으로, 지금은 노는 것으로 변했다고 봐야제.”
몸이 불편하신 윤 씨는 다가오는 새해 별신제 모실 일이 걱정이다.
또 이 별신제와 관련해서는 인근에 내려오는 전설이 있는데 ‘예전에 별신제를 모신 사람이 그 날 밤 부인과 동침을 했다’고 한다. 아침에 인기척이 없어 시어머니가 방문을 열자 둘이 붙어서 아무리 용을 써도 떨어지지 않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비가 올 때 소에게 씌우는 소어치(소두데)를 씌우고 무당을 불러 굿을 하자 그 때에야 떨어졌다’고 한다. ‘소어치를 씌워 굿을 했다는 것은 사람으로서는 하지 못할 짐승 같은 짓을 하였다’는 경고적 의미를 담은 구전인 이야기이다.
4. 영춘(永春)마을
현재 40여명의 주민이 살고 있는 영춘 마을은 영동제저수지로 인해 수몰됨에 따라 마을주민들의 대부분이 지난 1978년 가약산 기슭인 말모(머)리등으로 이주한 상태이다.
두루봉아래에 위치해 산동마을에 속해있던 영춘 마을은 해방과 함께 영동에서 영춘 마을로 분리됐다. 해남윤씨가 처음 뒷마을 영동에 터를 정할 때 주위의 지형이 산의 동편에 위치해 산동(山東)이라 불리게 됐다.
말을 몰고 달리는 형태를 나타내고 있는 영춘 마을은 주변의 산과 들판이 각각의 이름으로 향토성을 짙게 풍긴다. 산 정상에서 바라보면 제주 한라산이 보일 정도로 높은 산이었다는 두루봉, 예전 남호 성머리에서 활을 쏘는 과녁판이라 하여 이름 지어졌다는 가역산, 바위 밑에 숨어서 난을 피할 수 있어서 붙여졌을 덤밧산, 돌에 연지를 찍어 놓은 것처럼 붉게 반점이 생긴 각시바우, 덤바산중에 샘물이 두 곳에서 솟는다고 해서 이름붙인 형제샘, 서당이 위치해 학문을 닦아서 붙여진 딱구제, 샛골을 올라가면서 사다리처럼 생긴 새다리골, 나무나 풀을 베러 다니던 사람들이 더위를 식히기 위해 등목을 했다는 등치기골, 예전에 윤씨일가가 살았다는 큰 터, 용이 하늘로 올라간다는 용배 등이 운치를 더한다.
영춘 마을에는 문화적가치가 높은 두 곳이 자리하고 있다. 유사시에 대비해 비상연락 수단으로 봉화 불을 이용했던 봉화대가 봉대산 정상에 아직도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이 봉화대는 6․25전쟁 직후까지 사용했다고 전해진다.
또 마을 앞에 위치한 고인돌 군이 있다. 전에는 23기의 고인돌이 무질서하게 분포되어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는 관리가 되지 않는 상태에서 길게 자라난 잡초로 인해 외관상으로 모습을 찾아보기 힘든 실정이다.
<필봉 필어봉>
구전에 의하면 옛날 산동 윤씨들이 두루봉 밑에서 집성촌을 이룬 잘사는 가문이었다 한다. 윤씨 중에 한 부잣집이 있어 걸객(인)들이 동냥을 하러 오면, 장군(장승)을 만들어 한 주먹씩 집어가게 하는데 장군 입구가 좁아 욕심대로 가져갈 수 없었다. 하루는 스님 한 분이 이를 보고 불쾌하게 생각하고 주인 윤씨를 불러 말하기를 “더 잘살 수 있는 비결을 알으켜 주겠노라. 두루봉 밑에 큰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를 다른 데로 옮기면 더 큰 부자가 된다”고 말하고는 사라졌다.
이에 윤 부자는 어느 날 그 큰 바위를 날려 버리자, 새가 날아가며 “필어봉, 두리필어봉, 필어필어 필어봉”하고 필어봉 쪽으로 날아갔다 이 후 윤씨 가문은 동쪽에 있는 필어봉 쪽으로 옮기게 되었고, 산동에 터를 잡게 되었다고 한다. 현재 필봉 밑에 마을을 영동, 두루봉 밑에 마을은 영춘 이라 부르고 있으며, 1986년 이후엔 영동을 산동이라 다시 부르게 되었다.
5. 원포와 연동
가. 샘굿과 합동세배
마량면 원포는 지명 그대로 ‘원래의 포구’라 이름 할만하다. 이 마을에는 정월 대보름 때 그 해의 ‘우수풍전’을 비는 “샘굿”을 지냈다고 한다. “저녁 밥 먹고 회관에 모여, 병에다 물 길러갔고 가서, 샘굿을 지낸다. 샘굿은 샘물 존대서(좋은 데서) 물 길러갔고, 농악치고 매구치고 가갔고, 물을 뿌리면서 우수풍전을 비는 의식이제.” 김만식(69세) 씨의 이야기이다.
“지금도 어디서 샘물이 나오나요?”
“옛날부터 옹달샘이라고 저 산 쪽에 물이 안 끊기고 나왔는디, 지금은 막혔제. 경지정리 하기전, 좋은 물이 나왔는디, 지금은 지하수를 파서, 전기로 저그 당꼬(물탱크)에 물을 올려갔고, 밑에서 자연급수라고, 이 쪽에 급수를 해. 그러니까 지금은 회관에서 물을 받아가지고 가서... 샘굿을 지내게 되었제.”
“제사를 모시나요?”
“제사는 안지내고, 매구 그런 것을 지금도 해...”하시면서 “여가 옛날에는 모시베, 명베 해 입고, 길쌈이 유명했어. 그란께 물이 귀해 그런 의식을 했다고 생각해. 마당 굿이라고 매구를 치며 상쇠가 와서 마을 각 집을 돌면서 ‘매구여’하면 ‘예-’하고 하면, 말하는 식이여. 그러니깐 ‘올해도 마을에 아무 탈 없이 다 건강하게 해 주고, 농사도 풍년 되게 해주시오’라고 그라제.”
“그리고 우리 마을에는 옛날부터 합동세배를 지낸다. 마을 어른들과 젊은이들이 회관에 모여, 술 한 잔씩 장만해갔고, 인자 먹고 놀고 계시다가, 인자 자정이 되면 합동으로 세배를 하고 (집에) 들어간다. 그라면 각 집에 다니는 세배를 안 해도 된다는 얘기지. 마을인구가 전에는 칠십 몇 호까지 됐는데, 지금은 한 삼십호밖에 안된다. 우리는 계속 지금까지 그렇게 (합동세배를) 해 나가고 있어.”
“마을의 역사는 어떤가요?”
“우리 마을 이정표에 써 있는디, 여가 마량보다 더 포구여 갔고, 만호성보다 앞섰다고 봐야제, 마을로 치면... 마을 앞이 지금은 논밭인디, 전에 파보면 디딜방아에 썼던 합독이나, 싯돌, 기왓장 같은 것이 나왔제. 그니까 여가 기와집, 포구였다고 해. 인자, 여그 내력을 잘 아는 사람들은 여가 원래 포구였다고 해. 마량보다 여가 더 발달했다고 봐야제. 원장을 막기 전, 일정시대, 원(수문)을 막고 나서 마량으로 (사람들이) 많이 다녔다고 봐야제.” 맞는 말이다.
조선 초 기록에 탐진 원포에 수군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또 전에 새밭들에 고인돌이 있었는데, 경지정리로 없어져 버렸다고 한다.
나. 연동 연꽃방죽
“저기 돌아가면 저수지, 연꽃이 있었어.” 연동의 유래이다.
“영동 저수지 막고 그 (연꽃) 저수지는 없어져 버렸제. 전에는 연동 원포 숙마가 모도(모두) 하분까지 한 행정구역 이었제. 일제 이후 떨어져나갔을 것이여.” 이 부락은 효자가 많이 나고 전에는 한학자도 많이 나와 인근 수동에까지 선생이 가서 서당을 열었다고 한다.
“그란께 연동은 원래 ‘목쟁이’라고 하다가, 저수지 막고 ‘연동’으로 바꾼지 얼마 안됐다. 숙마는 ‘춤박골’이라고 그랬제.” 원포 김만식 씨의 이야기이다.
“연동, 원포 앞, 갯포가 그렇게 좋았다고 하지. 해산물이 많이 나왔다는 이야기여. 배가, 이 밑에까지 배를 댄 흔적이 있어. 지금은 원장을 막아 큰 들이 되었지만, 거의 신마 사람들이 (논농사를) 많이 벌제. 연동이나 원포 숙마 사람들은 (논이) 조금밖에 없고...” 여기 연동 원포 숙마 지역은 지형이 좋아 묘자리가 많고, 전에는 말이 뛰어놀기 좋게 분지를 이루고 있다.
그래서 마량 만호성 이전에 제주의 말이 이 원포 지역에 상륙해 말을 먹이다 육지로 보내졌을 거라 생각된다.
또 신마 지역은 10여년 전까지 ‘수제(풍어제)’라고 수문 및 제방의 안녕을 비는 행사가 있었으며 ‘새달패(물개 종류의 수달)’란 곳은 수달이 많이 있어 이름하였고 이곳에 수레바퀴 자국이 있어 과거 여기에서 고금도 용도리에 말을 운반할 때나 물건을 운반하였던 곳으로 전한다.
6. 상흥리
가. 하분(장흥과의 경계마을)
숙마 또는 신마에서 구불구불하고 긴 재(된재)를 하나 넘으면 하천(하분천)을 경계로 두고 강진과 장흥으로 나뉘는 산(용마산) 밑의 마을이 하나 있다. 이름하여 ‘하분’ 마을이며 윗동네인 ‘상분’과 합하여 ‘상흥리’라 한다. 지명의 ‘분(分)’자는 강진과 장흥이 나누어지는 지점이라는 데서 유래한다.
또 전에는 상분과 하분 중간에 ‘명동’이란 동네가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지고 밭과 묘지로 변한 집터자리만 옛 일을 말해주고 있다. 강진에서도 동남쪽으로 끝 동네, 마량까지 걸어서 40-50분 거리인데 전에는 마량초등학교까지 걸어 다니면서 배운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1970년대 들어 장흥 대덕읍 신리에 초등학교가 생기고는 장흥군 학군이 되어, 중고등학교까지 대덕으로 다니곤 했다.
한 때는 1백여 호가 넘던 마을이 어느 시골마을과 같이 한 3분의 1로 줄었다. 그나마 청년들이 한둘 있지만, 대부분 자라면 도회지로 진출하는 것이 통례화 되었다. 이 마을은 전에 큰 원장(제방)을 막기 전에는 바닷물이 마을 앞까지 들어와 반농반어였으며, 상분 쪽은 오지나 다름없는 산간 마을이었다.
상분 마을에는 ‘이촌(李村)골’이라는 지명이 전해오며 이촌 골이 폐쇄된 내력은 호랑이가 사람과 가축을 해치는 것이 두려워 현재의 위치로 이주하였다고 한다.
남쪽 바닷가를 인접한 전형적인 농촌인 ‘하분(下分)’ 마을은 북서쪽에는 ‘용마산’이 동쪽에는 ‘공성산’이 앞에는 ‘오성산’이 자리하고 있어,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마을을 연상케 한다. 여름철 일찌감치 서쪽으로 넘어가는 해는 밤에 맑은 하늘과 초롱초롱 빛나는 별빛을 제공해, 밤 바다일 하러 나간 어부들에게 등불이 되어왔나 싶다.
이 마을은 처음 바닷가(돛머리) 근처에 터를 잡고 살았으나 해적(海賊)이 많아 1720년경 현재 위치로 옮겼으며 마을 앞에는 약 4백년된 정자나무가 있어 휴식처와 식수대를 제공한다.
마을 사람들의 성격은 순후하고 단결심이 강해 6. 25때도 남북한군의 접전지였으나 큰 피해가 없었으며 용마(龍馬, 잘 달리는 말) 모양의 풍수지리 영향인지 마을 출신들이 달리기를 잘한다고 한다.
마을 앞에 있는 간척지 농장은 1960년대 마을사람 6명이 바다를 막아 1,600여 평의 논을 조성해 식량을 생산했으나 지반이 약하고 큰물이 들면 물에 잠겼다. 이후 정부의 간척사업으로 12만여 평의 논이 대덕읍 신리 쪽에 생겼고 상분 쪽으로는 큰 저수지(농경용)가 생겼다.
일제시대 말엽까지 뒷산에 가면 호랑이가 자주 나타났다고 전해지는 하분 마을의 민속놀이로는 대덕 서신리(西新) 마을과 하분 마을이 군 경계 하천을 중심으로 1970년대까지 정월 대보름이면 불꽃싸움과 돌팔매(돌 던지기) 놀이를 하여 마을간 단합심을 과시했다. 과거 청장년이 많았던 당시엔 겨울철 김양식과 장어낚시가 큰 수입원이었다.
나. 최연소 마을이장과 돼지 장사
지금으로부터 오래 전 강진군 마량면 상분리에 최씨 성을 가진 마을 이장이 한 분 계셨다. 올해로 칠순(70세)이 되신 아저씨는 지금도 근력이 좋아, 날마다 농사짓고 땀 흘리시며 일하신다 한다. 지난 가을에도 고추 수확을 3~4백 근(180~240Kg) 하셨다 한다.
최씨 아저씨가 사시는 ‘상분’ 마을은 강진과 장흥의 경계마을로서 상당히 오지마을에 속한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봉대산 동쪽 분지 위에 자리한 마을은 개울을 하나 사이에 두고 앞으로는 대덕읍 분토마을이 아래로는 마량면 하분마을, 고개 너머로는 마량면 영동리가 위치한다.
눈이 호리호리하면서 체격이 다부진 최씨 아저씨는 젊어서 힘이 장사로 교통이 불편한 산간 마을에 사시면서 돼지와 소를 팔러 다니셨다. 그 때가 23살에 마을 이장을 맡은 1958년경으로 이후 20여년 동안 마을의 궂은일과 심부름을 도맡아하면서 젊은 시절을 보냈다. 아무튼 당시 마량이 분면되기 전 대구면 26개 부락의 최연소 이장이었다고 한다.
“스물세 살 때부터 이장을 했어. 겨울이면 이장회의 갈라 그라면, 아, 지각 안할 랑께, 새벽에 저 건너 네박골에 동이 트기 전 이 산꼭대기(봉대산) 넘어가면 날이 희미하게 새곤 했네. 영동 모퉁이 넘어 면(대구) 소재지까진 한 시간 정도 걸렸지.” 최씨 아저씨의 이야기이다.
“지금은 아조(아주) 젊은 사람들이 마을 이장을 하는데, 그 때는 모도(모두) 나이 드신 양반들인디, 나이 지긋하신 분들이 이장을 하셨네. 대구면 26개 부락 이장 중에서 내가 제일 나이가 적었지. 면에 가면 나이 드신 이장들이 아그들(아이들) 마냥 심바람 시키고, 자질구레한 일을 도맡아 했지.” 밭으로 가는 경운기에 걸터앉은 아저씨는 이야기를 계속하신다.
“나도 한자를 쬐끔(조금) 알았지만, 이장회의 때 뜬금없이(갑자기) 백지와 연필을 나눠주고 뭔 보고서를 한자로 써내라고 하는디, 아따 한자를 모르 능께 참 어렵 데야, 아 (어른들한테) 한자를 물어보고 했당께. 어쩔 때가 등에서 땀이 모락모락 날 때가 있대. 지금이야 한글로 쓰겠지만, 한자를 많이 모릉께 죽겄드라고.” 꾸밈없는 아저씨의 말이다.
“그래도 이녁이(본인이) 부끄러하면 안 되거든, 마을일에 관한 거니까 마을 사람들을 위해 부지런히 써야 했거든. 그렇게 곁눈질로 해서 한자를 조금 배운 셈이지. 지금이야 한글로 모두 쓰지마는 그때만 해도 한자를 많이 썼지.” 하시면서 다른 일화도 들려준다.
“또 마을 애경사시 한자 모르면 부조끼(부의록)를 못 잡았네. 같은 한자라도 여러 가지 뜻이 있어서, 같은 병(炳)자도 불화 변의 병자를 쓰기도 하고, 나무목 변의 병(柄)자를 쓰기도 하거든. 그러니까 전에 부락에서 부조 끼를 받아 봤는디, 아따 밖에서 손님들 오면 머단(어떤) 사람은 단체로 써오기도 하고, 머단 사람은 초로(초서로) 써 갖고 온 사람이 있대. 초로 써 온 사람은 (한자음을)물어보기도 하고, 한글로 써주라고 하기도 하고, 알아서 (이름을)써놓고 하면 웃어 쌓고 하든 마. 그 때는 부조끼 잡기 힘들 데야. 그 때 이장하면서 공부를 상당히 했구만.” 하고는 웃으신다.
상분마을은 교통이 불편해 버스를 타고 마량이나 강진 5일장 또는 걸어서 바닷가를 갈려면 하분 마을을 경유하여 가야했는데, 4~5km되는 거리정도는 흔히 걸어서 다니곤 했다. 그래서 최씨 아저씨도 돼지를 매매하기 위해 인근 5일장인 마량이나 칠량, 강진장(약 30Km, 80리)에 다니셨는데 특히 마량과 강진장을 주로 다니셨다고 한다.
“가진 건 없고, 마을 이장질 하면서, 디야지(돼지) 장사 해 가지고, 농사 한 뙈기(마지기) 없는 사람이, 이녁(스스로) 벌어 가지고, 애기(아이)들 갈치고도(가르치고) 했는디. 그 때는 돼지를 싸게 사서 비싸게 팔어 돈을 벌었지. 그래서 전답도 장만하고. 대여섯 되는 애기들 다 광주로 보내는지 힘들 대야. 그 애들 대학하고 전문대 보낼 랑께 가진 전답도 폴고(팔고) 해서 지금은 논 열댓 마지기 밖에 없어.” 구릿빛 얼굴에 아직도 눈빛이 총총한 최씨 아저씨는 얘기를 계속한다.
“디야지 잡아 눕히는 것도 기술인디, 단지 힘만 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지. 내가 디아지 잡는 것을 본 사람들은, 하분(육지) 사람들도 그런디, 섬사람들이 제일 무서워하데. 내가 눈을 한번 크게 뜨면 모다(모두) 나를 피하고 벌벌 떨었지.”
“언젠가 한번은 하분 마을에 내려간께, 일용이 조차 몇이 젊은 층으로 다서 여섯(대여섯) 있든 마, 아, 디야지를 잡아 제사 치를려고 하는디, 디야지를 마을 앞 논으로 끅고(끌고) 나오기는 했는디, 이리저리 아무리 디야지를 자빨실려고 해도 힘이 좋은 디야지가 넘어가야제.” 그래서 내가 물으니까,
“아, 디야지를 잡아야 대사를 칠 터인디, 아, 저 놈들 대여섯 있어도 저라고 있다만 시.” 하고 마을 어르신이 말씀하신다.
그래서 남의 일도 아니고 이웃마을 일인께, “아, 내가 한번 해 볼께라.” 하니까, “혼자? 가망 없네(불가능하네). 다섯이나 저래도 아, 밤나(늘) 자빠져 버린께.” 하고 어르신이 말씀하시데, 그래서 내가 “아재(아저씨), 굿이나 보시오. 내가 해 볼 라요” 하고서는 내가 나서서 “돼지 앞발을 걷어 엎어서 네발을 하늘을 보고 치켜들게 하고는 다리를 묶었제. 그것도 기술이라고 안 해본 사람은 못 한다만 시... 그러고는 디야지를 금새 근달이(저울질) 해주고 온께, 마을 어르신이 한번 어깨를 잡아보더니 ‘어디 나한테만 말해보소? 자네 무슨 약을 먹은 디, 그리 힘이 좋은가? 우리 집안 새끼들이 저렇게 거시기만 커 가지고, 자네 혼자만 못하단 만시.’ 하고 묻대야.” 그래서 “아, 머 머근다? 팽야(평소) 밥하고 술 먹제라, 하고는 따라주는 술(막걸리) 한잔하고 웃고 말았지.”
당시 시골에서 기르는 돼지는 야생 멧돼지처럼 힘이 좋고 살이 쪄 농사를 짓는 가정의 보물단지처럼 소 다음의 돈이 되는 가축이었다.
“그런 일도 있지마는 내가 디야지 다루는 걸 보고 고금, 약산, 완도 섬사람들이 제일 무서워하대. 2백, 2백50근(약 150Kg)짜리 디야지를 보통 앞발 들어(묶어) 가지고, 옆에 사람 아무 필요 없고, 거뜬히 짊어지고 가도 중심을 잡고 안 넘어지고 그랑께...” 대부분 돼지가 꿈틀 움직이면 지게 등짐에서 넘어지기 쉽다.
“디야지가 후떡이면(움직이면) 귀하고 꼬리를 잡고, 가랭이를 딱 벌리고 (기마자세로 선 채) 가만히 서 있어야 해. 걸음을 걸을려면 바로 엎어져 버리거든, 그걸 보고 사람들이 무서워하는데, 머라고 하는 넘(놈) 있으면, ‘지미할 놈의 새끼들!’하고 눈을 부릅뜨고 하면, 무서워 벌 벌해.” 돼지 다루는 데는 천하장사였던 것이다.
그러면서 한번은 돼지장사를 마치고 마량에서 하분 마을에 이르는 ‘된 재’를 지날 때 강도를 만난 이야기를 해준다.
“그 때가 정확히 기억나는디 4월 초이렛날(8일) 밤 12시 반 조금 넘었을 것이네” 최씨 아저씨는 계속해서 말씀하기를
“언제나처럼 돼지를 팔고 남은 내장 대엿근(대여섯 근)을 등에 메고 된재 중간이나(쯤) 올라오는디, 찬 서리(기운)가 딱 미치데.” 된 재는 마량 신마 방죽길 따라 오르면 상당히 경사(40-50도)가 진 오르막길이다. 장을 보고 짐을 멘 사람들은 도중에 한번씩 쉬어가곤 한다.
“아, 나도 통이 상당히 크거든, 요 아래 공동묘지 있는 골창(산골)에서 여름이면 수박밭 원두막을 짓고 자거든. 그 때 돈 9만원이면 상당히 크시(크다), 당시엔 디야지를 소개만 해주고 다니는 판이라, 남은 돈 9만원하고 내장 너근(네 근) 메고 혼자 올라온께, 앞에 무슨 짐승인지 사람인지는 몰라도, 소름이 끼친 거야. 그래서 주먹만한 돌을 손에 쥐고 올라온께 달이 꼬박 져버리더라고”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웬 두건을 쓴 키가 큰놈이 앞을 가로막더라고.” 길이 경사가 져 키가 더 크게 보였는지 모른다.
“말소리 구분도 못하것고, 그러니까 딱, 정강이가 독(돌)을 챈 것처럼 무겁고 걸음이 안 떨어지더라고...” 위기였던 셈이다.
“나는 가만히 있었지. 그러니까 두건이 걸걸한 목소리로 말을 걸더라고” 그러니까 나는 “하분 까지 갑니다.” 하니까, “안 죽을라믄 돈 있는 데로 내놔라” 하더라고, “바로 법관이여, 그 놈들이, 사람들을 죽이고 살리고 한께.” 그라고 있는 차에 10보 거리쯤 떨어져, 주위에선 말소리가 두런두런 들리고...
그래서 생각 끝에 “돈은 가진 거 없고, 디야지 내장만 몇 근 있습니다. 이 고기라도 좀 드릴 까라(요)?” 했어. 그러니까 저 쪽에서
“이 새끼, 말하는 것 좀 보게. 뒤질라고(죽으려고) 환장하네! 하고는 내 앞가슴을 밀더라고. “그리고 나를 칠려고 손을 뒤로 빼는디, 그 손이 오기 전에 봐 버려야지... 하고 돌을 상대방 가슴에 댄께는 ‘워~메’ 하고 쓰러지더라고. 설마 손에 돌을 든 지 몰랐던 거야. 그리고는 목을 쥐고 한두 번 흔들어 놓은께 꼼짝 못하더라고. 그러고는 주위 나무 뒤에 숨어 있는 놈들을 향해 돌을 던지니까, 솔 나무가 맞은 깨로 ‘후두둑 후두둑’ 하더라고. 그 소리에 도적들이 모두 도망을 가고 말았지.”
“그러고 나서 재를 올라 걸음을 재촉하는디, 참 뒤가 안 돌아봐지데. 그 놈들이 따라 올까봐 무섭기도 하고...” 된 재는 넘었어도 마을로 내려오는 구불구불 여러 번 꺾어진 고갯길이 밤에 걷기엔 상당히 오싹하다. “아, 그래. 내장을 짊어지고 마을 점방(가게)에 온께 영근이랑, 일용이랑 몇이 있드랑께, 내가 가져온 내장에다 술 먹을 라고...” 그래서 그들에게 “저기 된재 올라오는디, 이만 저만했다고 하고, 한 숨 돌리는디, 바로 옷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데. 땀이 비 오듯 한 거야. 그라고 술 한 잔하고 깐닥깐닥 집에 갔제.”
이러한 장을 보고 와서는 집에 들어가기 전 하분 마을 점방에 들러 저울이나 소지품을 맡겨놓고 가져온 돼지내장에다 술을 한 잔 하고는 귀가하시곤 했는데, 주로 일행도 없이 혼자 산길을 다니셨다 한다.
“아, 그 때는 머하러 그렇게 혼자 새벽에 일어나 강진까지 걸어 다니면서 고생을 했는가 몰라, 집에 오면 한 밤중이고 하니, 한참 젊을 때 였으니까 가능하지, 지금 생각하면 고단한 날이었지...” 그렇게 말을 마치신 최씨 아저씨는 칠순이 다 되신 지금도 옛날의 기운이 남아있는 듯 총총히 밭일을 하러 가셨다.
요즈음과 같이 기계문명이 발달하여 도보의 필요성이 없어진 지금도 시골에 남아서 고향을 지키시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예전 걸어서 5일장을 다니실 때의 향수와 뚝심을 간직하고 계신지 모른다.
그리고 잊혀져가는 우리 토속 사투리와 민요 또는 전설과 같이 그 분들이 돌아가시면 책으로나마 그 분들이 사셨던 옛날이야기를 듣게 될지 모를 일이다.
7. 서중 물가막섬
서중은 본래 서당이 있었다 하여 서재동이라 불리다가 일제시대 서재동과 중촌을 합해 서중(書中)이라 하고 있다.
이 마을 회관에서 남쪽으로 한 5백여m 쯤에 섬이 있는데, 섬 주위에 염전이 개설되어 조금 때는 모래를 깔고 말려서, 촛물을 받아서 가마솥에 넣어, 장작나무로 불을 떼어 소금을 만드는 곳 이었다. 전하는 이야기로는 ‘물가막섬 (참)소나무에 어린애들이 죽으면 망태에 담아서 걸어놓고, 물가막섬 양지바른 곳에 상여집에 있어 날씨가 흐리면 어린애기 울음소리가 났다’고 한다.
그 후 물가막섬 아래 검정바위 있는 곳에서 가막섬으로 노두(뻘에다 돌을 깔아 놓음)가 있었고, 그 노두를 이용하여 시누대와 피사리대를 찔러 놓아 해태가 길면 이를 채취하였는데, 나중에는 원을 막아 매립하였고 현재는 ‘마량농공단지’가 들어서 있다.
8. 놀래미 타령
다음은 마량면 마량리 윤양기(여, 53세) 씨의 바닷고기의 일종인 ‘놀래미’ 타령이다. 이 노래는 강진청자문화제 ‘남도사투리 경연대회’에서 부른 노래이다.
청산바다에 놀래미, 쇠머리 끝으로 장가 가
갈치 할 놈은 앞제비 꽁치 할 놈은 뒷제비
병어할 놈은 시집을 가고 낚지 할 놈은 질을 닦고
복쟁이 할 놈은 중방을 가고 시애미할 놈은 마부 가
문조리 할 놈은 피리를 불고 장어할 놈은 퉁소를 불고
민애할 놈은 삼가 가고 준애할 놈은 후배가
뻘떡기는 뻘을 치고 둥덩지는 등을 치고
쫄장기는 똘을 치고
쪼글쪼글 늙은 이 배 아니 그것도 아닌 배
희끼바다 갈치 배 아니 그것도 아닌 배
울긋불굿 숭어 배 아니 그것도 아닌 배
호드락 톡톡 멸치배 아니 그것도 아닌 배
이 창 저 창 유리창안에 잠들었다 크내기(큰 애기)들
옳다 그 것은 내 배로구나
9. 민중의 축제 강강술래
가. 강진의 강강술래
예전 남도 특히 바닷가 지방은 강강술래가 유행하여, 각 마을마다 여인네와 아이들이 정월 대보름이나 추석 한가위 저녁이면 둥근 달을 등불 삼아 원무를 그리며 춤과 노래를 즐겼다.
강진에도 예전에 바닷물이 닿던 칠량 명주리의 산간 지역이나 대구의 구수리, 마량의 영동, 그 밖의 부락에서 1970년대까지만 해도 젊은 여인들과 처녀 또는 여자 아이들에 의해서 행해졌었다.
강강술래의 유래에 대해서는 고대 부족사회의 공동 축제로 까지 거슬러 보는 견해도 있으나, 그 기폭제가 된 것은 임진왜란 전후이란 것은 누구나 짐작하는 일이다. 그 설화에 대해 살펴보면,
먼저 명랑해전에서 이 충무공은 불과 12척의 배로 왜의 3백50여척의 전함과 싸우게 되었는데, 중과부적으로 왜적과 맞서기 어렵게 되자 충무공은 아낙네들을 모아 군복을 입히고 수 십명씩 무리를 지어 산봉우리를 돌게 하여 멀리 떨어져 있는 왜적에게 마치 수만의 군사가 산봉우리를 내려오는 것처럼 하여 적군의 사기를 눌렀다고 한다. 이 때 아낙네들이 산봉우리를 돌면서 서로 손을 맞잡고 춤을 추며 부른 노래가 강강술래라는 것이다. 이후 명랑해전에서 대승을 거둔 것은 자명한 일이다.
다음은 임진왜란 당시 바닷가 갯마을 아낙네들이 노래 부르며 춤을 추면서 왜적의 눈을 속였다고 하는 설이다. 그 후 주민들은 이 충무공의 승전을 기리기 위해서 이 때 의병술(擬兵術)로 쓰였던 춤을 놀이화하여 강강술래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또 이 충무공이 옥동(玉洞) 앞바다에서 왜적을 크게 격파하여, 이곳이 왜적의 피로 바닷물이 물들어 이 곳을 ‘피바다’라고 불렀다고 한다. 또 우수영 앞에 있는 울도에다 쇠줄을 매달아 왜선이 지나갈 때 쇠줄을 당기어 격침시켰다고 한다. 그 후 이곳의 어린이들은 ‘울도’ 소리만 들어도 우는 소리를 그쳤다고 한다. 이처럼 왜와 처절한 싸움을 하면서 충무공은 인근의 부녀자들을 동원해 밤이면 강강술래를 하면서 아군의 사기를 올리면서 군사의 숫자가 많은 것처럼 위장해, 이처럼 해전에서의 대승이 남해안을 살리고 나라(조선)를 구한 셈이 된 것이다.
임진왜란이 끝난 이후에도 남해안을 중심으로 유행했던 강강술래는 계속 이어져 마을의 단합과 민중 특히 여인네들의 축제로써 오늘 날까지 전승되어 오고 있다.
끊자 끊자 고사리대사리 끊자
앞산에 고사리 끊어다가 우리 아빠 반찬하세
끊자 끊자 고사리대사리 끊자
제 산 고사리 끊어다가 우리 엄마 반찬하세
고사리 대사리 끊자 나무 대사리 끊자
유자꽁꽁 재미나 넘자 아장아장 벌이오
<기와밟기>
어디골 기완가 장작골 기와지
몇닷냥 주었나 석닷냥 주었지
어디골 기완가 전라도 기와지
몇닷냥 주었나 열닷냥 주었지
어디골 기완가 경상도 기와지
몇닷냥 주었나 스무냥 주었지
어디골 기완가 함경도 기와지
몇닷냥 주었나 서른냥 주었지
어디골 기완가 충청도 기와지
몇닷냥 주었나 마흔냥 주었지
어디골 기완가 평안도 기와지
몇닷냥 주었나 쉰-냥 주었지
어디골 기완가 경기도 기와지
몇닷냥 주었나 예순냥 주었지
어디골 기완가 강원도 기와지
몇닷냥 주었나 일흔냥 주었지
(목마타기의 일종으로 계속 이어가면서 목마를 할 수 있다)
<대문놀이>
문지기 문지기 문 열어라 열쇠 없어 못 열겠네
어떤 대문에 들어갈까 동대문에 들어가
문지기 문지기 문 열어라 열쇠 없어 못 열겠네
어떤 대문에 들어갈까 남대문에 들어가
문지기 문지기 문 열어라 열쇠 없어 못 열겠네
어떤 대문에 들어갈까 서대문에 들어가
문지기 문지기 문 열어라 덜커덩 떵 열렸네
(많은 어린이들이 두 편으로 나누기 위해 부르기도 하고,
술래를 정할 때 두 사람이 두 손을 맞잡고 문을 만들면
그 밑을 일렬로 지나가다가 ‘덜커덩 떵 열렸네’ 할 때
잡힌 사람이 술래가 되던지, 아니면 잡힌 사림을 데리고 가
‘콩 먹을래, 팥 먹을래’ 하고 물어 편을 가른다)
<어깨동무요>
어깨동무 사발동무
제사집에 가는 동무
한잔 술에 눈물난다.
두잔 주면 웃음난다.
<불 불 불어라>
불 불 불어라 불무 딱딱 불어라
불무불무 불어-라 이 불무는 뉘불무
경상도는 대불-무 전라도는 골불무
이 쇠가 어-디쇤가 황해도는 재령쇠
불무값이 얼만가 이천 삼백 서너푼
불무불어 뭐할까 무쇠솥을 만들어
백옥같은 밥을 지어 우리 아기 먹이지
불 불 불어라 불무 딱딱 불어라
다음은 일제시대 고금도에서 마량으로 시집와 한평생을 사신 한 황씨 아주머니의 이야기이다. 생활이 넉넉지 못했던 당시 육지생활의 궁핍함과 섬 부유층의 생활이 담겨있어 소개한다.
“오빠 네들이 일제 때부터, 방학 때면 일본 노래 부르고, 연애했던 노래 잘 알제... 그 때는 교통(배편)이 불편해서 돛단배(도선) 대절해 가마타고 (육지에) 올랐어. 4형제인디, 돛대머리에서 가마타고 올라, 그라면 호랑이 가죽을 가마위에 둘러쓰고 오거든, 액(운)을 면한다고, 섬이었지만 아버지는 은행원이었고 논 50마지기와 염전을 가지고 있었제. 아 그런데 우리 집 어른이 육지에 산소가 있어 강진 대구 이 쪽 사람들을 만나다 보니까, 어른들끼리 인물도 괜찮고 육지에 살고 해서, 사돈을 맺자고 했는가 봐. 그래서 신랑 얼굴도 안보고 이 곳 마량 00에 시집을 왔는디, 말이 아니란 마시. (생활) 수준도 낮고 형편도 넉넉잖아, 시집살이가 말이 아니 드라고, 어른은 모셔야제. 살림살이는 없제. 00 땀(흙담)집에서 살았어. 친정은 집이 네 채나 되는지, 행랑문 미닫이 쪽문 열고 하는디... 친정 어매가 와서 보고는 ‘나 이런 적이 없다’고 죽어 버렸당께. 그래서 하도, 친정에 가면 울고, 아무래도 못살겄다고, 집이 없어, 교통도 없고, 인자 내가 못살겄다고, 시집살이 안 간다고 한께, 친정아버지가 나 땜에 죽었다고 해, 딸 시집 잘 못 보냈다고. 출입한 사람이 그런 것도 안보고... 집이 없어 (땀집에 살고). 그런데 친정에선 ‘아무리 못살겄어도, 놈 부그런께 너는 절대 그 집 빼다구니까, 얼른 죽어, 마량 앞 바다에 빠져 죽으라고. 큰 딸이랑 빠져 죽으라’고 해. 그라면 울고 오제. ”
“결국 자식이 생겼구먼요?”
“응, 시집온께, (남편이) 군에 가 5년 만에 와. 군에 간 아흐레(9일) 만에 00이(딸)를 낳고, 00이(아들)를 스물여덜에 났어. (남편) 제대한 해에 고모부가 완도 국회의원 이었어. 남편이 수협에 들어갔제. 시아제는 외입(집을 나와) 나가 서울에 가 지금은 떵떵거리고 잘 살제마는... 그 때 애기가 없었다면 안 살았었어. 그랄 때는 잔뜩 배가 고픈께 (군대에서) 돌라먹다(몰래먹다) 앵기고(들키고), 짠밥 돌라먹다 얻어맞고 할 판이여. 그러니깐 시아부지가 인물 좋고 풍채 좋고 여기 마을이장 한 십년하면서 향교 출입하고, 친정아버지하고 교류하면서 해남윤씨라고... 사돈맺자고 했는가봐. 친정 오빠는 식모 딸려서 딸 시집보내고 했는디, 여그 가정행동 수준이 하늘과 땅(친정과 시집) 차이더라고... 해남 윤씨 양반인디, 솔직히 말해 **(놈)의 행동하고 그라더라고. 그란께 ‘부모가 자식 안 성가시게 하고 지식이 부모 안 성가시게 하고, 그렇게 살아야 해’ 외가집 뿌리도 좋아야 한다마시.” 그러면서 집안내력과 어머니 역할을 강조하신다.
“남편은 55세 때 고혈압으로 죽었제... 남편 없는 께 ‘이 자슥들 어떻게 하나’ 눈에가 불이 써 지든마, 불빛이 나드라고. 남편 퇴직금 이자 갖고 (아이들) 갈쳤어. 그이 살아선 ‘항시 애들 대학원까지 갈치자고 했는디...’ 해남윤씨 중에서 제일 잘산다는 애들 작은아부지 한테 말해 아들은 독립시키고, 막내딸까지 그래도 대학원 다 마쳤지. 지금은 의사 남편들 만나 다들 잘 사는디, 막내만 아직 유학 간다고 공부하고 있제. 다들 마을에선 00이 엄마만큼 교육열이 높은 사람은 없다고 해. 혼자 살면서도 다 대학원 보내고 하니깐... 그것이 다 친정 교육 때문이라고 생각해. 그러니깐 뿌리(근본)가 중요하단마시... 항상 건강하니 부모 형제들 걱정 안 끼치고, 성가시게 안하는 것이 효도하는 것이란 마시...” 애써 주장하시는 세상사는 지혜와 철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