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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4년 12월 31일 화요일
[(백) 성탄 팔일 축제 제7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말씀의 초대
요한 사도는, 그리스도의 적들이 보여 주는 거짓에 홀리지 않고 진리 안에서 친교를 이루며 살아야 한다고 권고한다(제1독서). 요한 복음사가는, 말씀이신 그분을 받아들이는 이는 은총을 받고, 그분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어둠 속에 머물게 될 것이라고 한다(복음).
제1독서
<여러분은 거룩하신 분에게서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모두 알고 있습니다.>
▥ 요한 1서의 말씀입니다. 2,18-21
18 자녀 여러분, 지금이 마지막 때입니다.
‘그리스도의 적’이 온다고 여러분이 들은 그대로,
지금 많은 ‘그리스도의 적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이 마지막 때임을 압니다.
19 그들은 우리에게서 떨어져 나갔지만 우리에게 속한 자들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우리에게 속하였다면 우리와 함께 남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그들이 아무도 우리에게 속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20 여러분은 거룩하신 분에게서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모두 알고 있습니다.
21 내가 여러분에게 이 글을 쓰는 까닭은,
여러분이 진리를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진리를 알기 때문입니다.
또 진리에서는 어떠한 거짓말도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의 시작입니다. 1,1-18
1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2 그분께서는 한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3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4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5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
6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요한이었다.
7 그는 증언하러 왔다.
빛을 증언하여 자기를 통해 모든 사람이 믿게 하려는 것이었다.
8 그 사람은 빛이 아니었다. 빛을 증언하러 왔을 따름이다.
9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
10 그분께서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11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12 그분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당신의 이름을 믿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다.
13 이들은 혈통이나 육욕이나 남자의 욕망에서 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난 사람들이다.
14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
15 요한은 그분을 증언하여 외쳤다. “그분은 내가 이렇게 말한 분이시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다.’”
16 그분의 충만함에서 우리 모두 은총에 은총을 받았다.
17 율법은 모세를 통하여 주어졌지만
은총과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왔다.
18 아무도 하느님을 본 적이 없다.
아버지와 가장 가까우신 외아드님, 하느님이신 그분께서 알려 주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부임 첫 본당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새해 첫날 이른 새벽에 사제관에 전화가 왔습니다. 본당 총회장님이었습니다.
“신부님, 이른 아침부터 죄송해요. 저희가 성전에 모여 있는데, 잠깐 오셔서 강복 좀 주실 수 있나요?”
성전에 들어가 보니, 몇몇 교우들이 성체 조배를 하고 있었습니다.
“새벽부터 웬일이세요?” “
"신부님, 다른 사람들은 일출 보러 바다로 산으로 떠났는데, 저희는 예수님 만나고 싶어서 왔어요.”
참된 믿음은 하느님의 은총과 생명이 어디에 있는지를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요한 1,4).
말씀이신 예수님 안에 우리의 생명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충만함에서 우리 모두, 은총에 은총을 받았다.”(1,16)라는 복음 말씀처럼, 그분께서는 은총의 샘이십니다. 그러나 사목 현장에서 만난 교우들 가운데에는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의 은총보다 다른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더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거룩하신 분에게서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모두 알고 있습니다”(1요한 2,20).
제1독서의 이 말씀처럼 우리는 또한 예수님에게서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 은총과 생명, 구원의 빛이 있다는 진리를 알고 있습니다. 언제까지나 이 진리를 지키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한 해의 마지막 날입니다. 그동안 하느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에 감사드리며, 좋았던 모습도 그러지 못하였던 모습도 모두 그분께 봉헌하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다가오는 새해에도 여전히 우리와 함께 계시는 예수님 안에서 영적인 생명을 얻어 나가는 신앙인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분의 충만함에서 우리 모두, 은총에 은총을 받았다.” 아멘.(김재덕 베드로 신부)
충만하신 하느님 앞에 우리는 얼마나 옹색한 존재인지요?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 모두 또다시 한해의 끝자락에 서 있습니다. 올 한해를 돌아보니 즉시 떠오르는 표현이 하나 있습니다. 다사다난(多事多難)!
이 정도 선에서 올해가 마무리되나 싶었는데, 설상가상이라고 제주 항공 여객기 참사가 우리 모두를 깊은 슬픔에 잠기게 했습니다. 하느님도 무심하시지! 하는 탄식이 절로 입에서 터져 나옵니다.
순식간에 수많은 소중한 생명을 앗아간 초대형 참사를 바라보며 너무나 안타깝고 안쓰러워 할 말을 잊습니다. 그 많은 꿈과 희망, 애틋한 사연들, 못다한 이야기들이 순식간에 산산조각 나버렸습니다.
자비하신 하느님께서 이번 참사로 세상을 떠난 희생자 한분 한분을 당신의 크고 따뜻한 품에 꼭 안아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저리 황망히 떠나보내고 깊은 슬픔에 잠겨 있는 유가족 한분 한분을 따뜻이 어루만져주시기를 청합니다.
대형 참사를 접할 때마다 온몸과 마음으로 체득하게 됩니다. 우리 인간이 아무리 난다긴다할지라도, 정말이지 보잘것없는 존재라는 것 실감합니다. 우리네 인생 일장춘몽이라는 것, 그래서 하루하루에 감사하며, 매일 매일을 마지막으로 여기며, 충만한 하루를 살아내야겠다고 다짐합니다.
갖은 우여곡절 속에 살아온 한해였지만, 돌아보니 지나온 한해, 비록 실패와 상처투성이, 죄와 십자가의 연속인 우리네 삶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모두 좋으신 주님으로부터 은총에 은총을 폭포수처럼 받았습니다.
“그분의 충만함에서 우리 모두 은총에 은총을 받았다.”(요한 1,16)
‘충만(充滿)함’이란 표현이 제 마음을 크게 요동치게 만듭니다. 하느님의 본성 중에 우세한 측면이 충만함입니다. 충만함이란? 풍성함, 넉넉함, 완전함, 너그러움...참 다양한 함의(含意)를 포함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에 비해 우리는 얼마나 옹색한 존재인지요? 얼마나 빈약하고 비천한지요? 얼마나 약하고 불완전한지요? 이런 우리의 불완전함을 메꿔주기 위해서 아기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언제나 부족해서 허덕이는 우리이기에 너무나도 당연히, 완전하고 충만하신 그분께로 나아가야하겠습니다.
충만하신 그분께로 나아가서 풍요로우신 그분으로부터 에너지를 충전시켜야겠습니다. 백만 볼트 에너지로 가득 충전시킨 후에, 세상과 가난한 이웃들을 향해 나아가야겠습니다.
가끔씩 완전 방전된 밧데리 상태의 제 영혼을 확인하곤 합니다. 내 한 몸 서 있기에도 벅찬 순간에는 영적 생활이고 이웃사랑의 실천이고 무의미할 뿐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틈만 나면 충만하신 하느님께로 나아가야만 합니다. 방전된 우리의 플러그를 초강력 에너지원이신 하느님이란 전원에 꼽아야겠습니다. 그것이 기도 생활이요 영적 생활입니다.
우리가 매일 스마트폰 충전 상태를 확인하듯이, 매일 우리의 영적 충전 상태를 확인해야겠습니다. 이틀에 한 번 사흘에 한 번 충전으로는 부족합니다. 우리가 매일 스마트폰 바라보듯이, 매일 영적 충전을 위해 그분께로 나아가야겠습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충만 그 자체이신 하느님, 부유하고 풍성하신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충만함을 빈약한 우리를 위해 무모할 정도로 헤프게 사용하시는, 아니 남김없이 모두 써 버리시는 사랑의 하느님이십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하느님께 감사할 일이 있었습니다. 뉴욕에서 손님들이 왔습니다. 반가운 마음에 이야기꽃을 피우다가 늦게 잠들었습니다. 다음날 운동하기로 하고 헤어졌습니다. 9명이라서 한 명이 남았습니다. 제가 양보하려고 했는데 손님을 초대해 놓고 빠질 수 없었습니다. 한 분이 양보하겠다고 해서 8명이 운동하려고 출발했습니다. 날씨도 제법 쌀쌀했지만 즐겁게 운동을 시작하려는데 본당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어르신 한 분이 위독하신데 병자성사를 청한다는 전화였습니다. 저는 당연히 가겠다고 했고, 양보하기로 한 분에게 저 대신 운동하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날씨도 춥고, 피곤하기도 했는데 그래도 거절할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하느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방법으로 제게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어르신도, 어르신을 모시는 따님도 모두 기뻐하였습니다. 저는 이번뿐만 아니라, 하느님께서 저를 보살펴 주시는 걸 많이 느꼈습니다. 잘 거절하지 못하는 저의 성격을 아시는지, 하느님께서는 어쩔 수 없이 제가 거절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 주시곤 합니다.
오늘의 성서 말씀은 신앙인들이 가야 할 길과 가지 말아야 할 길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제1독서는 가지 말아야 할 길이 무엇인지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의 적”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영적으로 그리스도의 적은 칠죄종이라고 합니다. ‘교만, 인색, 음욕, 분노, 탐욕, 질투, 나태’입니다. 적그리스도는 많이 배운 사람들을 쓰러뜨리기도 합니다. 적그리스도는 영적인 스승을 괴롭히기도 합니다. 적그리스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를 끊임없이 공격하였습니다. 복음은 신앙인이 가야 할 길이 무엇인지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를 따름‘입니다. 영적으로 그리스도를 따름은 성령의 은사입니다. “슬기, 통달, 의견, 지식, 굳셈, 효경, 두려워함’입니다. 성령의 은사는 지친 이들에게 위로를 줍니다. 성령의 은사는 죄지은 이들이 하느님께 돌아올 수 있도록 용기를 줍니다. 성령의 은사는 겸손한 이들이 열매를 맺도록 합니다. 성령의 은사와 함께하는 2024년의 마지막 날이 되면 좋겠습니다.
요한복음은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예수님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아들, 하느님의 아들일 뿐만 아니라, 말씀이셨고, 말씀은 하느님이셨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라, 태초부터 계셨던 분, 말씀이셨음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자칫 예수님에 대한 기록으로 머물 뻔했던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요한복음은 우리에게 영적인 세계를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심오한 철학적인 주제들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4장, 8장에서 우리는 지혜로운 예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0장과 15장에서 우리는 교회를 사랑하는 목자이신 예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우리를 영적인 세계로 인도해 주는 안내서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 사도가 있어서 마음이 든든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요한 사도가 있어서 십자가 위에서도 눈을 감을 수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우리들 또한 요한 사도처럼 주님의 마음을 든든하게 해드려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편히 쉴 수 있도록 해드려야 하겠습니다. 우리들 때문에 주님께서 행복할 수 있도록 살아야 하겠습니다.
한해의 끝자락에서 프란치스코 성인의 ‘평화를 구하는 기도’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주여, 나를 당신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신앙을,
그릇됨이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두움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는 자 되게 하소서.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여주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주님의 은총과 축복이 가득하시기를 기도합니다.
<나 있음에>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 사람은 빛이 아니었다. 빛을 증언하러 왔을 따름이다.”(요한 1,8)
나 비록
빛은 아니지만
빛 머금은 나
세상을 비추어
빛께서 더욱
빛날 수 있었기를
올해 마지막 날
뒤늦게 바래봅니다
그리하여 새해엔 더욱 더
나 비록
말씀은 아니지만
말씀 품은 나
세상에 울려 퍼져
말씀께서 더욱
말씀하실 수 있었기를올해 마지막 날
뒤늦게 바래봅니다
그리하여 새해엔 더욱 더
나 비록
생명은 아니지만
생명 깃든 나
세상에 스미어
생명께서 더욱
생명 돋우실 수 있었기를
올해 마지막 날
뒤늦게 바래봅니다
그리하여 새해엔 더욱 더
나 비록
하느님은 아니지만
하느님 모신 나
세상을 보듬어
하느님께서 더욱
하느님이실 수 있었기를
올해 마지막 날
뒤늦게 바래봅니다
그리하여 새해엔 더욱 더
오늘의 성인
성 조티코 (Zoticus)
신분 : 신부
활동지역 :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
활동연도 : +350년
성 조티쿠스(또는 조티코)는 로마(Roma)의 사제였다.
그런데 그 당시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제국의 수도를 로마에서 콘스탄티노플로 옮김에 따라 그 역시 콘스탄티노플로 이주하였다.
그리고 새로운 수도에 가난한 사람들과 고아들을 위한 자선시설을 설립하였다.
고아들의 부양자로서 헌신한 그는 아리우스파(Arianism) 황제인 콘스탄티우스 2세 황제 앞에서 그리스도교의 정통신앙을 증거하였다.
성 요한 프란치스코 레지스 (John Francis Regis)
신분 : 신부 선교사
활동연도 : 1597-1640년
같은이름 : 요한네스 요안네스 조한네스 조안네스 조반니 존 죤
성 요한 프란치스코 레지스(Joannes Franciscus Regis)는 프랑스 남부 랑그도크(Languedoc) 지방의 나르본(Narbonne) 교구의 한 마을에서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불과 10여 년 동안만 예수회의 신부로서 선교사로 활동하였지만 17세기 프랑스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으로 꼽힌다. 그의 활동 영역은 주로 오베르뉴(Auvergne)와 랑그도크에 한정되었지만, 가난하고 버림받은 사람들을 위해 헌신적으로 일하였다. 그는 몸으로 그들과 함께 산 사람이었다. 그는 1716년 교황 클레멘스 11세(Clemens X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1737년 교황 클레멘스 1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그의 축일은 일부 지역에서 6월 16일에 기념하고 있다.
성 실베스테르 1세(Silvester I)
신분 : 교황
활동연도 : +335년
같은이름 : 실베스떼르, 실베스뗄, 실베스텔, 실베스트로
성 실베스테르는 로마(Roma) 사람이었다. 그는 313년에 신앙의 자유를 얻고 평화를 획득한 시기에 교황 성 멜키아데(Melchiades, 12월 10일)를 계승하여 로마의 주교로 선출되었다.
그의 이름이 교회사에 종종 등장하긴 하지만, 사실 알려진 것은 거의 없다. 그는 318년 도나투스파에 대항해 아를(Arles)에서 열린 지역 공의회에 직접 참석하지 않고 사제 두 명과 부제 두 명을 파견하였다.
그리고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의해 325년 니케아(Nicea)에서 개최된 공의회에 초청받았으나 연로하여 참석하지 못했다. 그는 살라리아(Salaria) 가도에 있는 프리스킬라(Priscilla) 카타콤바에 안장되었고, 그때까지의 교회사를 보면 순교하지 않은 최초의 교황이었다고 한다.
성녀 멜라니아 (Melania)
신분 : 과부, 자선가
활동지역 :
활동연도 : 383-439년
같은이름 :
성녀 멜라니아는 로마 원로원인 푸블리콜라와 이교 사제의 딸 또는 그리스도인이 된 체이오니아의 딸로 태어났다.
그녀는 불과 14세의 나이로 사촌인 성 피니아누스(Pinianus)와 결혼했는데, 이 결혼은 자신의 뜻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고 한다.
두 아이가 태어났지만 곧 죽었는데, 남편인 성 발레리우스 피니아누스는 아내의 신심을 인정하여 그녀의 부친이 사망하면 하느님께 대한 봉헌생활을 하도록 허락했다고 한다.
이리하여 그녀의 부친이 막대한 유산을 딸에게 남긴 채 사망했을 때, 그녀와 성 피니아누스 그리고 그녀의 어머니 알비나(Albina)는 로마(Roma)를 떠나 신앙의 중심지인 자기 고향으로 돌아갔다.
성녀 멜라니아가 자선사업을 목적으로 막대한 재산의 일부를 매각하자 집안의 심각한 반발을 샀지만, 황제 호노리우스에게 호소하여 그의 도움을 받게 되었다.
이때부터 그녀는 당대 최고의 박애주의자가 되었다.
그녀는 이집트, 시리아, 팔레스티나(Palestina) 등지에 수도원을 세웠고, 유럽의 여러 성당과 수도원을 도왔으며, 가난하고 병든 이들, 포로들과 순례자들을 도왔고, 2년 동안 약 8천명의 노예들을 해방시켰다.
406년 그녀와 그 일행들은 고트족의 침입을 피하여 메시나(Messina)로 갔고, 거기서 다시 카르타고(Carthago)로 건너갔다.
그들은 리파리 섬에 좌초하였으나 해적들에게 속량금을 줌으로써 풀려날 수 있었으며, 410년경에는 누미디아(Numidia)의 타가스테(Tagaste)에 정착하였다.
여기서 그녀는 남자와 여자를 위한 수도원을 각각 세우고, 자기 자신도 엄격한 수도생활을 하며 지냈고, 417년에는 남편과 어머니 알비나와 더불어 성지를 순례하고, 이집트 사막의 은수자들을 찾아보고는 예루살렘에 정착하였다.
여기서 그녀는 사촌 바울라(Paula, 1월 26일), 조카 성 에우스토키움(Eustochium, 9월 28일)을 만났고, 이들의 안내로 성 히에로니무스(Hieronymus, 9월 30일)가 지도하는 베들레헴의 수도자들과 합류하게 되었다.
그 후 14년 뒤에 알비나가 사망하고 그 이듬해에는 성 피니아누스가 운명하자 그녀는 그들의 무덤 곁에 움막을 짓고 엄격한 보속생활을 하였다.
그래서 많은 제자들이 모여들므로 자신이 원장이 되었다.
그녀는 439년 성탄절을 베들레헴에서 지내고 그 해 12월 31일에 예루살렘에서 사망하였다.
성녀 골룸바 (Columba)
활동년도 : +273년
신분 : 동정순교자
지역 : 상스(Sens)
같은 이름 : 골롬바, 꼴롬바, 꼴룸바, 콜롬바, 콜룸바
에스파냐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성녀 콜룸바(또는 골룸바)는 16세 때에 아우렐리아누스 황제의 박해를 피해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오늘날의 프랑스 지방으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곧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다. 전설에 의하면 그녀가 감옥에 있을 때 한 간수가 그녀를 범하려고 했으나 한 마리의 곰이 나타나 간수를 공격하여 그녀를 구해주었다고 한다. 하지만 성녀 콜룸바와 동료들은 얼마 후 상스 또는 모(Meaux) 근교에서 순교하였다.
또 다른 전승에 의하면 그녀의 순교와 거의 동시에 아우베르투스(Aubertus)라는 한 맹인이 그녀에게 전구를 청하여 눈을 뜨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즉시 성녀의 처형장으로 가서 시신을 수습해 장례를 치렀다. 그녀의 무덤에는 곧이어 경당이 건립되었고, 프랑스 전역으로 그녀에 대한 공경이 퍼져나갔다. 오늘날에도 상스에 남아있는 여러 역사적인 유적들이 그녀에 대한 예전의 공경을 잘 보여주고 있다. 교회미술에서 성녀 콜룸바는 왕관을 쓴 처녀로서 개나 곰과 함께 그려지거나 책과 공작 깃털을 들고 있거나 참수 당하는 모습 등으로 묘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