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0.30.日. 맑고 따스함
10월30일, 1박2일 지리산 사찰순례.
검은 관冠에 흰 도포道袍 차림인 벽송사碧松寺.
검고 하얀 바둑알을 올려놓은 반상盤床처럼 네모반듯하고 단정한 서원書院 같은 분위기라고 생각을 했다. 비스듬히 자란 키 큰 벽송 옆에 서서 도량을 내려다보고 있던 월광화보살님이 어째 절이 꼭 서원 같은 기분이 드네요. 라고 말씀하셨다. 그렇게 느끼는 것이 나뿐 만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범종각을 제외하고는 모든 전각의 기둥이나 처마에 단청이 없는데다 마치 도산서원처럼 건물이 다닥다닥 붙어있어서 그런 느낌이 드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본당 구실을 하고 있는 벽송선원은 석가모니부처님을 모신 채 한쪽 벽에는 병신년丙申年 하안거夏安居 용상방龍象榜이 붙어있었고, 그 옆으로는 2층 누각인 간월루看月樓가 위엄 돋게 앉아있었다. 본래 조그만 누각이었던 간월루를 새로이 2층 건물로 지었다고 하는데 예전부터 내려오는 간월루看月樓라는 이름에서 벽송사가 선종사찰이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축대 한 단 위쪽으로 원통전이 있는데 관세음보살님이 모셔있었고, 그 옆으로는 산신각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왼편 비스듬한 길을 따라 거대한 벽송이 있는 비탈을 올라서면 삼층탑이 서있는 평평한 평지가 나왔다. 그런데 삼층탑이 본래부터 여기에 있다는 말은 어쩌면 예전에는 이 주변이나 뒤편에 금당인 본당이 있었다는 뜻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도량 한가운데 위치한 벽송선원碧松禪院의 자리가 무언가 도량내의 구조와 어울리지 않다보니 자연 원통전의 자리나 산신각의 자리도 어쩐지 어색하게 되어버린 형국으로 보였다. 조선 중종대인 1520년에 벽송 지엄선사가 창건을 하고 부용 영관선사나 서산대사, 부휴선사, 사명대사께서 수도하여 도를 깨달았다는 벽송사는 아마 지금과는 전혀 다른 구조의 도량이었을 것이라고 생각을 했다. ‘한국선불교의 근본도량’ 이라는 자부심과 함께 그 어른들께서 수행했을 당시에 추상秋霜 같은 선풍禪風이 아니라 이렇게 묵향墨香 감도는 서원 분위기는 아니었을 테니까.
오늘 11월3일이 무슨 날인지 인터넷 기사에도 한 줄 오르지 않고 누구도 관심을 갖고 있지 않은 듯합니다. 오늘은 1929년 광주지역 학생들이 주동이 되어 일으켜 전국적으로 민족독립만세운동으로 확산이 된 항일독립 투쟁인 광주학생운동 기념일이랍니다. 제가 다녔던 학교에는 광주학생운동 기념탑이 있어서 해마다 11월3이면 운동장에서 기념식을 하고 학생운동 기념탑 앞에 묵념과 헌화를 했었거든요. 그리고 학생운동 기념탑에는 ‘다하라 충효. 이어라 전통. 길러라 실력.’ 이라는 교훈이 쓰여 있어서 항상 자랑스러운 마음으로 학생탑을 바라보면서 6년 동안 등하교를 했던 기억이 가슴속에 짱짱합니다.
벽송사에서 내려와 가까운 서암정사에 들리기로 했으나 그 즈음부터 몸 상태가 중도中道를 유지하지 못하고 컨디션이 조금씩 쳐지기 시작을 했다. 스스로 오온五蘊이 비었음을 비추어보지 못하고서 모든 괴로움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아마 얼마 전 추돌을 당한 교통사고 후유증과 면역력이 떨어진 몸이 며칠 전부터 감기몸살 기운에 시달리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앞 순례지인 금대암에서는 여기저기 돌아다니지 않고 금대선원 쪽마루 양지쪽에 가만히 앉아 햇볕만 쬐고 있어서였든지 몸이 조금 회복하는 듯싶더니만 양광陽光한 금대의 햇볕 기운이 떨어져 가는지 다시금 몸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우리 차는 서암정사 순례대신 주차장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다가 서암정사에서 돌아 나오는 일행의 차를 만나 모두 저녁공양을 하러 차 방향을 잡았다. 남원 부근에 왔으니 남원 추어탕을 먹어보는 것은 미각으로나 지역경제를 살리는 일환으로나 좋은 일이라고 생각을 했다. 예전 한동안 중구 신당4동에 살았을 적에 학교에서 거리가 가까워 장충동 족발이나 신당동 떡볶이를 많이 먹어보았는데, 장충동에 있는 족발집이라고 해서 또는 신당동에 있는 떡볶이집이라고 해서 족발과 떡볶이가 다 맛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했었다. 그러다보니 모임이나 회식 때마다 여기저기를 들쑤셔 가는 것이 아니라 그중 맛난 음식점 한두 곳을 정해놓고 다니다보면 그게 바로 단골집이 되어버렸다. 그렇게 맛난 집을 골라 단골집으로 만들기 때문에 단골집 음식은 맛이 있을 수밖에 없다고 본다. 서울에 살면서도 어쩌다 추어탕을 먹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서울 추어탕 집들은 대체로 체인점들이고, 대체로 체인점들은 인심이 후하지가 않고, 인심이 후하지 않으면 대체로 음식 맛이 별로 없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쪽 잠실, 송파 쪽이 유독이도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감칠 맛 나는 추어탕 집이 별로 보이지 않더라는 것이다. 내가 먹어본 최고의 추어탕은 이십여 년 전 햇살 누런 어느 가을날 오후 담양방면으로 가는 길가의 허름한 추어탕 집에서 먹어보았던 뚝배기에 가득 담긴 모락모락 하얀 김 오르는 한 그릇이었다. 뭐니뭐니 해도 추어탕이 맛이 있으려면 살이 통통하게 오른 싱싱한 미꾸라지가 많이 들어가야 하고 거섶으로는 무청 시래기와 우거지와 깻잎과 청양고추와 된장이 끈끈하고 담백한 조화를 잘 이루어야한다. 원한다면 조미료나 들깨가루나 산초는 각자 입맛대로 쳐서 먹으면 되는 것이고.
추어탕으로 식사를 마치고 음식점 밖으로 나와서 귀향길에는 호남고속도로 여산휴게소에서 만나 차를 한 잔씩 하자고 했으나 지난해 가을 사찰순례 귀향길에도 똑같은 약속이 지켜지지 않은 것으로 봐서는 오늘 밤에도 가능성이 별로 없는 약속일거라고 생각을 했다. 나는 차를 몰아 저녁7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 여산휴게소에 들어갔는데 다른 일행들은 벌써 호남고속도를 지나쳐 논산-천안 고속도로 이인휴게소까지 도착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하지만 논산-천안 고속도로 입구에 4Km나 지체가 되고 있다는 정보를 보고는 여산휴게소에서 아애 한숨을 붙이고 가자고 의견을 나누었다. 차에 웅크리고 앉아 그런대로 단잠을 자고났더니 밤10시40분이 되어있었다. 차안에서 거의 세 시간 반가량이나 잠을 잔 것이다. 이 시간에는 차가 밀리도 않을 것이고 막힐 염려도 없어서 커피를 한 잔 마신 서울보살에게 운전대를 넘겨주고는 보조석에 앉아 멀거니 차창車窓 밖을 쳐다보면서 서울로 돌아왔다. 집에 들어와 욕실에서 개운하게 씻고 나왔더니 새벽2시가 되어있었다. 지난번 지리산 사찰순례에는 구례, 하동 쪽을 돌아보았으나 이번에는 남원, 함양 자락을 둘러보았다. 지리산은 큰 산이라 높은 봉우리와 큰 골이 많이 있어서 큰절, 수려秀麗한 절, 양명陽明한 절을 많이 품고 있었다. 기억에 남을 맑은 순례 길이었다. 천장암 일요법회 팀을 이끌어주신 우리 스님과 일행들을 반가이 맞아주신 심운스님, 선일스님과 매사를 편안하고 매끄럽게 운영해주신 우리들의 총무이신 무진행보살님과 1박2일 지리산 사찰순례를 함께 한 도반님들께 마음깊이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항상 고맙고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