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단법석
불교의 생사관
성화性和 스님
(부산 진여원眞如阮)
생生과 사死를 어떻게 생각하며 어떻게 보는가? 삶과 죽음이다. 라고 간단히 표현한다면 삶은 무엇이며 죽음은 무엇인가? 조금 세련된 표현으로 모든 생물이 과거의 업業의 결과로 개체를 이뤘다가 다시 해체되는 일이다. 업연業緣따라 모였다가 해체되었다가 모였다 하는 모습놀이다.
공간적空間的으로는 성주괴공成住壞空하고 시간적時間的으로는 생주이멸生住異滅한다 하는 이 표현의 설명도 어디까지나 현상적 모습의 반쪽 안목이요, 반쪽 설명이요, 반쪽 표현이다.
공간적으로 성주괴공하고 시간적으로 생주이멸 하는 모습놀이, 업연따라 천차만별의 모습놀이를 하는 모습을 보고 생각하며 말하는 그는 누구이며 무엇인가 말이다.
그는 공간에도 걸리지 않고, 시간에도 얽매이지 않고, 나지 않고, 죽지도 않고, 빛깔도 없고, 냄새도 안나고, 소소영영한 법성法性인 마음입니다. 나고 죽는 것은 모습인 이 몸뚱이지 법성체法性體는 나고 죽는 것이 아닙니다. 이 법성체를 깨쳐서 생生사死의 성품이 허공虛空과 더불어 비었음을 안다면 거짓 모습인 생사生死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최상승 차원의 경계에서 하는 말입니다. 점진적인 수행을 요하는 중생입장에서는 생生도, 사死도 인정하고, 공덕도 인정해서 단계적으로 회귀해야합니다. 참 생명 회복의 길, 영원히 불생불멸 하는 생명의 고향으로 말입니다.
인간의 길흉화복이나 빈부귀천이 모두 타의에 위한 것이 아니고 모두 자신에게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원인을 심어 싹트게 하여 좋은 것이거나 안좋은 것이거나의 결과를 얻는 것입니다. 원인 없는 결과 없고, 결과 속에는 반드시 원인이 있게 마련입니다.
모든 것은 인연에 따라 일어나고 인연에 따라 멸滅합니다. 바로 자업자득인 것입니다. 우리 사람들은 자기自己라는 말로써 스스로를 표현합니다. 이 자기라는 말을 가만히 살펴 뜯어보면, 복합적인 말의 뜻으로 표현 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자기自己에는 외外적인 자기와 내內적인 자기가 있습니다. 외적인 자기는 물질적 자기요 내적인 자기는 정신적 자기입니다. 물질적 자기는 육체의 자기요, 정신적 자기는 영성靈性의 자기입니다. 이 육체의 자기와 영성의 자기가 조화로운 결합으로 표현된 모습, 이 모습을 나我라고 표현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표현된 모습이 존재하므로 우리는 서로를 인정하고 의식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물질인 나의 육체는 세포의 집성된 총화의 표현이요, 표현하는 세포의 개체는 광물질의 총화요 표현입니다. 광물질의 한개한개의 개체는 원자의 집성된 총화요 표현입니다. 원자는 전자의 집성된 총화의 표현이요, 전자는 소립자의 집성된 총화의 표현이요 미진의 소립자는 광자의 집성된 총화의 표현이요 광자는 이온의 집성된 총화의 표현입니다.
이온이란? 대전帶電상태에 놓여있는 생명의 기氣라 말합니다. 서양에서는 이것을 생명에너지라 표현합니다. 조금 더 말을 풀면 전기성을 띤 상태의 모습 또는 현상…인간의 말로서는 더 이상 표현 할 수 있는 말이 없습니다. 그래서 현대물리학에서는 불확실성이라 했습니다.
우주는 이온의 집성된 총화의 표현입니다. 모래알처럼 널려있는 별들도 태양도 지구도 지구안에 서식하는 모든 생물도 유정무정 삼라만상의 일체모습이 그대로 이온의 집성된 총화의 모습입니다.
대우주생명은 내 생명의 확대생명이요 나의 생명은 우주생명의 축소생명입니다. 그러니 우주생명 따로 나의 생명 따로가 아니라 그대로 나의 생명이 우주생명이요 우주생명이 그대로 나의 생명인 것입니다. 나의 생명이대로 우주생명 실상인것입니다. 생명력生命力은 팽창하고져 합니다. 팽창하는 조화의 파동이 있는가 하면 역으로 되몰아오는 파동이 있습니다. 이 파동이 조화를 이루었을때 선善이라 표현하고 역으로 부딪쳤을때 일어나는 부조화 현상의 이름을 악惡이라 표현합니다.
이 생명의 조화로운 질서속에서 사는 우리네 모두의 나는 생명을 호흡하고 마시고 먹고 살고있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감사한 사실인가?
우리의 몸은 음식물의 화신입니다. 먹는 자는 먹히는 자를 닮습니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자연의 조화와 질서에 도전하는 자는 도태 당합니다. 먹는 원인에 따라 먹히는 자를 닮는 결과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내가 요즘 뒷목이 땡기고 혈압이 높아진다고 하는 사람은 그런 결과를 얻을 수 밖에 없는 원인의 먹음질을 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혈압이 높다, 암이다, 당뇨다, 알레르기성이다, 등등의 생체거부반응은 모두가 먹음질이 잘못되어진 결과입니다. 우주생명법칙은 조금도 용납이 없습니다.
영성靈性에 묻은 때[業]를 씻어야 합니다. 우리는 부처를 먹고 부처를 마시고 부처와 더불어 부처로 삽니다. 부처라는 말은 소리말입니다. 소리말로서는 뜻이 의미가 전달이 잘 안됩니다. 뜻말이 들어가야 우리말은 제대로 전달이 됩니다. 부夫, 처妻, 지아비부, 아내처, 지아비는 남자요, 처는 여자입니다. 남자는 양陽이요, 여자는 음陰입니다. 음양양성은 우주생성의 근원이라 했습니다. 생명근원으로 이루어진 실상, 에너지의 집성된 총화의 표현이대로 부처라는 말입니다. 에너지를 먹고 마시고 더불어 사는 이대로 부처를 먹고 마시고 더불어 사는 부처들입니다. 이 부처님들의 영성에 때가 묻어 흐려진 모습이 중생이라는 이름으로 모습놀이를 하고 있는것입니다. 짓으로 입으로 뜻으로 때를 자꾸 묻혀 미혹으로 빠져가고 있습니다.
우리네 중생들은 육신의 때를 씻기 위해서는 사흘이 멀다하고 목욕탕에 갑니다. 아니 여름철에는 하루에도 몇 번씩 목욕탕에 들어갈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몸의 바탕이요, 주인공이 안주하는 영성, 법성신에 묻은 때를 씻는데는 게을리 한단 말입니다. 절의 법당은 생명정화공동목욕탕입니다. 물질인 이 몸뚱이를 씻는 비누는 물질로 만든 것이지만 영성인 법성신의 때를 씻기 위해서는 진리의 말씀으로 빚은 비누가 있습니다(경전). 생명정화공동목욕탕에는 참생명 살림살이를 잘 꾸릴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스님이 계시지요.
항상 자비로운 사랑이 충만한 생활인으로 감사하는 마음의 부처님 자성의 부처님 잘 모시는 분으로, 항상 뜻(목표)이 살아있는 생활인으로 봉사하는 마음의 부처님 자성의 부처님 잘 모시는 분으로, 항상 밝음만이 충만한 생활인으로 슬기롭게 살아가는 마음의 부처님 자성의 부처님 잘 모시는 분으로 익어갈 때, 여기에는 욕심내는 마음의 때도 화내는 마음의 때도 어리석음이 판놀이하는 미혹의 때도 깨끗이 씻겨 지워져서 밝고 밝은 광명만이 영광된 축복으로 영원할 것입니다. 이 영광된 축복의 고향으로 회귀하는 길을 안내하는 가르침이 불교입니다. 이 불교의 가르침대로 보는 생사는(生死觀), 말 자체가 성립이 안되는 것입니다. 생사生死라는 말 자체가 붙을 곳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번뇌망상으로 빚어진 현재의 모습 그대로가 불성이요 부처인데 번뇌와 부처를 따로 보기 때문입니다.
선한 성품이든 악한 성품이든, 시끄러운 성품이든 다 같은 뿌리에서 연유하는 것입니다. 모습의 상대성을 쓸지언정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말아야 합니다. 심경일여心境一如라 마음과 경계는 하나, 이 도리를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범부인 중생은 이 도리를 모르고 있습니다. 거울에 비친 그림자로서 거울을 알 듯이 경계로 나타난 가짜인 모습을 통해 진짜인 마음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참부처[眞佛]는 내 마음입니다.
살아도 내가 살고 죽어도 내가 죽는 것입니다. 죽고, 살고, 살고 죽는 이 모습이 내가 아닌 것입니다. 지금 이 원고를 쓰는 글 내용도 모두 가짜입니다. 방편으로 쓰고 말하는 것이지 여기에 안주해서도 안됩니다. 이 가짜를 붙잡고 내 마음 내 자성의 부처를 보고 만나야 합니다. 새소리 물소리 바람소리 붙들고 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마음을 볼 수 없습니다. 새의 소리와 새의 마음이 둘이 아닙니다. “심경일여”입니다. 이 도리를 깨달으면 온 누리 전체가 우리의 성품과 하나입니다. 욕계, 색계, 무색계, 천상, 지옥, 우리의 성품을 여윈 일이 본래 없습니다. 그러히 그러니 천상, 지옥, 삼라만상등 온 누리를 붙잡고 우리의 성품, 마음, 자성의 부처를 찾아야 합니다. 이렇게 들어가면 누리와 나는 하나가 되고, 하나인 누리는 나요 나라는 이것도 이름 붙일 것이 못되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마음과 경계가 둘이 아니라 심경일여心境一如인 것을 여실히 알게 될 것입니다.
우주의 진리를 사실대로 아는 일이 성불成佛입니다. 일체중생은 본래 부처입니다. 눈과 귀와 입과 손과 발이 있는 이 몸뚱이는 기관일 뿐 진짜 나는 허공虛空과 더불어 영특한 영원성이요 이름이 없습니다. 업연業緣따라 잠시 나투어진 모습, 인연이 다하면 본래 그대로입니다. 본래 그 자리 그대로 허공이요, 말 빌려 법신 이대로입니다.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디사바하 우리 함께 갑시다. 영원히 불생불멸하는 저 피안의 언덕 넘어 생명의 고향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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