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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위(朝士位) 위판 명록 중 옥천 조씨 조숭문. 조철산에 대한 자료
조숭문 趙崇文
사망 1456년(세조 2) 조선전기 병마절도사로 단종복위사건과 관련된 무신.
본관은 옥천(玉川). **옥천은 순창의 다른 이름이다.1861년(철종 1) 간행된 『신유보(辛酉譜)』에서부터 본관을 옥천으로 바꿨는데
1456년 당시로 가늠하면 순창 조씨가 된다.
자는 무백(武伯), 호는 죽촌(竹村). 아버지는 부정 조유(趙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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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및 활동사항
세종 대에 무과에 급제하고, 1456년(세조 2) 병마절도사 재직 중에 성삼문(成三問) 등의 단종복위사건에 연루되어 아들 조철산(趙哲山)과 함께 죽임을 당하였다.
1779년(정조 3) 경연관(經筵官) 송덕상(宋德相)의 상계에 의하여 구기(舊基)인 전라남도 순천시 주암면 죽림리에 정려가 건립되고, 1791년에 단종묘정에 배향되었다. 또, 구기에 건립된 겸천서원(謙川書院)과 동학사(東鶴寺)내에 건립된 숙모전(肅慕殿)에도 제향되었으며, 뒤에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절민(節愍)이다.
*겸천서원(謙川書院) : 숙종 경인년에 세웠다.
조유(趙瑜) : 호는 처곡(處谷), 고려조의 절신(節臣)인데, 태조조(太祖朝)에 들었다.
조숭문(趙崇文) : 유(瑜)의 아들이며, 사육신(死六臣)과 함께 화를 입었다.
병사(兵使)를 지냈고, 추향되었다.
조철산(趙哲山) : 숭문(崇文)의 아들이요, 성승(成勝)의 사위다.
육신(六臣)의 변에 함께 화(禍)를 입었다.
-연려실기술 별집 제4권 / 사전전고(祀典典故) / 서원(書院)
옥천(순창)조씨 대종회 홈
조숭문 (趙崇文) - 6世.
崇文(숭문) 字武伯(무백) 道尙(도상) 號竹村(죽촌)
세종(世宗) 때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가선대부(嘉善大夫) 함길도 병마절도사 겸경성도호부사(咸吉道兵馬節度使兼鏡城都護府事)를 지내셨다.
세조(世祖) 丙子(一四五六) 사육신(死六臣)과 함께 단종(端宗) 복위운동(復位運動)에 가담하여 화(禍)를 당한 사실이 『노릉지(魯陵誌)』 및 『동학사초혼기(東鶴寺招魂記)』·『해동충의록(海東忠義錄)』·『홍재전서(弘齋全書)』·『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등에 기록되어 있다.
세조(世祖) 戊寅(一四五八)에 왕(王)이 동학사(東鶴寺)에 머물면서 병자년에 억울하게 죽은 여러 신하들의 성명을 써서 비석에 새기고 제사지낼 전답을 주라 명한 후, 초혼(招魂)하여 제사를 지냈는데 공은 아들 철산(哲山)과 함께 초혼각(招魂閣)에 배향(配享)되어 있다.
정조(正祖) 己亥(一七七九)에 왕이 겸천서원(謙川書院)에 배향할 것을 명하고
辛亥(一七九一)에는 장릉(莊陵:端宗의 陵) 별단(別壇) 제십삼위위(第十三位)로 배향(配享)되어 제사를 받게 되었다.
己未(一七九九)에 자헌대부(資憲大夫) 병조판서 겸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도총관(兵曹判書兼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都摠管)을 추증(追贈)하면서 임금이 전교(傳敎:왕의 말씀)하기를「조숭문의 충성심과 절의는 성승(成勝)·성삼문(成三問) 부자와 같다」라고 하셨다.
헌종(憲宗) 癸卯(一八四三)에 절민(節愍)이란 시호(諡號:죽은 후 훌륭한 사적이 있는 사람에게 나라에서 내리는 號)를 내렸는데 시법(諡法)에 「제도를 삼가 행하는 것을 절(節)이라 하고 백성들이 슬프게 여기는 것을 민(愍)이라 한다[謹行制度曰節 使民悲傷曰愍]」라고 하였다.
좨주(祭主) 송환기(宋煥箕)가 공의 충절사적(忠節事蹟)을 짓고 판서(判書) 김이양(金履陽) 영의정(領議政) 조인영(趙寅永)이 시장(諡狀:시호를 내리는 글)을 짓고, 참판(參判) 김정균(金鼎均)이 행장(行狀) 및 영모재기(永慕齋記)를 지었으며 참봉(參奉) 최영조(崔永祚)가 정려중수기(旌閭重修記)를, 안동(安東) 김순동(金舜東)이 신도비명(神道碑銘)을, 은진(恩津) 송재성(宋在晟)이 충절비명(忠節碑銘)을 짓고 글씨를 썼다.
고종(高宗) 甲辰(一九0四)에 숙모전(肅慕殿)에 나라에서 액(額: 懸板)을 하사하였는데 공은 전정(殿庭) 서쪽채에 모셔졌다.
配 정부인(貞夫人) 昌寧成氏(창녕성씨) 생졸 연대(生卒年代)가 자세하지 않다.
墓 순천시 상사면(上沙面) 운곡(雲谷) 해좌(亥坐)인데 상석과 망주가 있다.
父 양혜공(襄惠公) 성달생(成達生) 祖 문숙공(文肅公) 성석용(成石瑢) 曾祖 문정공(文靖公) 성여완(成汝完) 外祖 부윤(府尹) 풍양(豊壤) 조운개(趙雲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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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철산(趙哲山)
이칭 : 진경(鎭卿), 구천(龜川).
사망일 : 1456년(세조 2)
정의 : 단종복위운동과 관련된 지사.
본관은 옥천(玉川). **옥천은 순창의 다른 이름이다.
자는 진경(鎭卿). 호는 구천(龜川).
조원길(趙元吉)의 증손,
할아버지는 부정 조유(趙瑜),
아버지는 병마절도사 조숭문(趙崇文).
생애 및 활동사항
1456년(세조 2) 단종복위운동을 하다가 고신(告身)을 환수당하고 원지에 유배되어 아버지와 함께 처형되었다. 정조 때에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추증되고, 단종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승주(昇州) 겸천사(謙川祠)에 제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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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관공 조철산 (趙哲山) - 7世.
哲山(철산) 初諱鐵山(철산) 字鎭卿(진경) 號龜川(귀천)
어려서부터 기개(氣槪)가 뛰어나셨고 성리학(性理學)에 마음을 쓰시어 매죽헌(梅竹軒) 성삼문(成三問)이 칭찬하기를 「그의 독실한 행실과 학문은 나도 따를 수 없다」고 하였다.
병자년 단종복위(端宗復位) 운동이 발각되어 사육신(死六臣)과 함께 아버지 죽촌공(竹村公)의 가르침에 따라 부자(父子)가 같이 순절(殉節)하셨다.
자세한 사적은 『노릉지(魯陵誌)』·『동학사초혼기(東鶴寺招魂記)』·『해동충의록(海東忠義錄)』등의 책에 보인다.
세조(世祖) 戊寅(一四五八)에 임금이 동학사(東鶴寺)에 머물면서 병자년에 억울하게 죽은 충신(忠臣)들의 이름을 써 내려주면서 전답을 하사하시고 인하여 초혼(招魂)하여 제사를 지냈는데 이때 초혼각(招魂閣)에 부자(父子)가 함께 배향(配享)되셨다.
정조(正祖) 己亥(一七七九)에 겸천서원(謙川書院)에 배향할 것을 명하시고 辛亥(一七九一)에는 장릉(莊陵:端宗의 陵) 별단(別壇)에 배향되었으며 기미년에는 동몽교관(童蒙敎官) 조봉대부(朝奉大夫)를 추증(追贈)하였다.
고종(高宗) 甲辰(一九0四)에는 숙모전(肅慕殿)에 판액(板額:懸板)을 내려 공은 전정(殿庭) 서쪽 채에 모셔졌다. 그리고 임금이 전교(傳敎)하시기를 「조숭문 부자의 충성(忠誠)과 절의(節義)는 성삼문 부자와 마찬가지이다」라고 하셨다.
또『홍재전서(弘齋全書:正祖 임금의 文集)』에는「조숭문 부자가 서로 마주보고 울었으니 그 충절은 성삼문 부자와 같다」라고 되어 있다.
墓 전하지 않아서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곡성군 죽곡면(竹谷面) 봉정리(鳳亭里) 산수동(山水洞) 해좌(亥坐)에 초혼(招魂)하여 단(壇)을 만들어 해마다 한번에 제사를 모시고 있다.
단비(壇碑)는 술암(述菴) 송재성(宋在晟)이 지었다.
配 영인(令人) 竹山朴氏(죽산박씨) 생졸 연대(生卒年代) 미상(未詳) 墓 부좌(?超埰?) 父 군수(郡守) 박홍문(朴弘文) 祖 정랑(正郞) 박섬(朴贍) 曾祖 대사헌(大司憲) 박중의(朴仲宜) 문충공(文忠公) 박덕룡(朴德龍)의 후손 外祖 전주(全州) 최집(崔?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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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유 趙瑜
본관은 순창(淳昌). *옥천은 순창의 다른 이름이다.
호는 옥천(玉川)·처곡(處谷).
옥천부원군(玉川府院君) 조원길(趙元吉)의 아들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408년(태종 8) 지군사로서 영광염소(靈光鹽所)에 침입한 왜구를 격퇴하였으며, 1416년 도관찰사 권진(權軫)에 의하여 불경죄에 대한 추궁의 결과, 검교한성윤(檢校漢城尹)의 직첩이 환수되기도 하였다.
1455년(세조 1) 12월 현령으로서 좌익원종공신 2등에 책록되었으나, 아들 조숭문(趙崇文)과 손자 조철산(趙哲山)이 사육신과 함께 화를 당하자 고신(告身)이 추탈되기도 하였다. 어버이상을 당하여 3년 여묘살이를 하여 효자로 칭송되었으며, 1710년(숙종 36)에 세워진 겸천서원(謙川書院)에 아들 조숭문, 손자 조철산과 함께 제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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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재전서 제60권 / 잡저(雜著) 7 / 별단(別壇) 236인 / 수사(收司)에 연좌된 사람 / 조서 중 조숭문`조철산 자료
《문헌비고(文獻備考)》를 상고하니,
병사(兵使) 조숭문(趙崇文)은 고려 충신 유(瑜)의 아들로서 병자년(1456, 세조2)에 아들 철산(哲山)과 함께 죽어서 모두 순천(順天) 겸천사(謙川祠)에 배향하였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춘관조두부(春官俎豆簿)》에는 겸천향현사(謙川鄕賢祠)는 고려 부정(副正) 조유(趙瑜)를 주향으로하여 절도사 조숭문과 사인(士人) 조철산을 배향하였고,
창녕 성씨 족보에는 성승(成勝)의 매부 조숭문은 본관이 순창(淳昌)으로, 병자년에 부자가 화를 입었다고 하였으며,
순창 조씨 가보에는 세종 때에 숭문이 무과에 급제하였는데 상왕이 왕위를 내놓자 질병을 핑계로 벼슬자리에서 물러나 살며 부자가 마주 대하여 눈물을 흘리곤 하더니, 병자년에 처형 성승과 성승의 아들 삼문 및 박팽년 등과 함께 화를 당하였다고 하였다.
이를 근거로 할 때 숭문과 성승의 관계는 마치 봉여해(奉汝諧)와 박팽년과의 관계와 같이 아주 가까운 친척이었기 때문에 혼자서만이 모면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가 질병을 핑계로 벼슬자리에서 물러나 살며 마주 대하여 눈물을 흘린 남다른 행적은 부자가 똑같으나, 다만 실록과 《혼기》에는 그 이름이 보이지 않을 뿐이다.
내가 기해년(1779, 정조3)에 일찍이 정려(旌閭)를 명하였으니, 겸천사의 배향에서 유덕(遺德)을 입증할 수 있고, 정려를 세운 것으로써 표창은 벌써 베풀어졌다.
비록 국승(國乘)의 확실한 고증은 없다 치더라도 여러 서책에 그럴 만한 근거가 있는 이상, 지레 삭제하는 것은 너무 까다로운 선별이 될 듯하고 함께 기록하는 것이 의문대로 남겨 두는 취지에 나쁘지 않을 것이므로 다시 성삼빙(成三聘) 등의 여러 사람 아래에 배열하여 연좌된 이유를 밝혀 두는 바이다.
혹자는 《성종실록》에 보인, “순천에 부처(付處)된 조철산 등을 방면하였다.”를 가지고 그만 철산으로 의심하여 한데 배열하여서는 안 된다고 하나, 이는 또 한 사람의 철산이 따로 있어서 그러한 것일 뿐이다. 《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紀略)》에, “세조의 7남 익현군(翼峴君) 이운(李璭)이 평양 조씨(平壤趙氏) 소윤(少尹) 철산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하였고, 《세조실록》에, “병자년에 의금부에 전지(傳旨)하여 전농시 소윤 조철산 및 조청로(趙淸老)의 아들 영서(英緖)의 아내 등은 연좌시키지 말라고 하였다.” 하였으며, 또 “철산은 청로의 숙부(叔父)이자 익현군 이운의 아버지이고, 영서의 아내는 익녕군(益寧君) 이치(李袳)의 딸이므로 이러한 분부가 있었던 것이다.” 하였는데,
숭문의 아들 철산은 사인(士人)이며 본관은 순창이고,
청로의 숙부인 철산은 소윤이며 본관은 평양이니, 이는 벌써 쉽게 구분되는 일이다.
그리고 소윤 철산은 청로의 사건에 연루되어 익현군 때문에 방면되었으니, 만약 숭문의 아들이라면 마땅히 그의 아버지의 사건에 연좌되었지, 그의 조카의 사건에 연좌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 숭문의 부자가 일찍이 순천에 살았기 때문에 그대로 겸천향현사에 배향되었으니, 순천에 부처한 철산을 이 사람으로 지목한다면, 죄를 지어서 귀양 보내는 자를 어떻게 고향의 군으로 보낼 수 있겠는가. 이는 곧 이름이 마침 서로 같아서이지 의심스러운 점은 찾아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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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 세조실록 >
세조 2년 병자(1456)6월 27일(을축)
의금부에 성희ㆍ성조ㆍ성연ㆍ권경해 등을 벌 할 것을 명하다
의금부(議禁府)에 전지하기를,
“성희(成熺)ㆍ성조(成照)ㆍ성연(成然)ㆍ권경행(權景行)의 고신(告身)을 거두어 먼 지방에 안치(安置)하고, 이정원(李貞元)과 조철산(趙哲山)의 고신도 역시 거두어 먼 지방에 유배시키고, 신이중(辛以中)은 제주(濟州)의 〈관노로〉, 박휘겸(朴撝謙)은 거제(巨濟)의 관노(官奴)로 붙이고, 성구연(成九淵)ㆍ홍택(洪澤)ㆍ조주(曹注)ㆍ이원효(李元孝)ㆍ최종말(崔終末)ㆍ박장수(朴長守)는 변방 고을의 관노로 길이 붙이게 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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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 정조실록 > 정조 3년 기해(1779)7월 28일(경술)
《경종실록》의 구권과 신권을 둘 다 남기기로 하다
경연관(經筵官) 송덕상(宋德相)을 소견(召見)하였다. 송덕상이 또 아뢰기를,
“고(故) 병사(兵使) 조숭문(趙崇文)의 아들 조철산(趙哲山)은 육신(六臣)과 함께 죽었으므로 아주 없어져서는 안되니, 청컨대 그 옛터에 정표(旌表)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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玉川趙氏
[정의] 조장을 시조로 하고 조영을 입향조로 하는 전라북도 순창군 세거 성씨.
[개설]옥천 조씨(玉川趙氏) 시조는 조장(趙璋), 본관을 옥천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 오고 있다.
순창 지역 옥천 조씨 입향조는 조원길(趙元吉)의 큰아들 조영(趙瑛)이다.
2000년 통계청의 인구 조사 자료에 따르면 전국적으로 1만 5346가구, 4만 9847명이 거주하고 있다.
[연원]
옥천은 순창의 다른 이름이다.
시조 조장은 고려에서 광록대부 검교 대장군 문하시중(光祿大夫檢校大將軍門下侍中)을 지냈다.
원래 이름은 조준(趙俊) 또는 조준장(趙俊璋)이다.
『순창 군지』에 조장과 아들 판서 조홍규(趙弘圭)와 손자 옥천군(玉川君) 조전(趙佺)에 관한 내용이 보인다.
이들 삼대가 순창에 살았고, 그들의 후손들이 세거해 오면서 처음에는 본관을 순창으로 써 오다 1861년(철종 1) 간행된 『신유보(辛酉譜)』에서부터 본관을 옥천으로 바꿨는데,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다.
현재는 대부분 본관을 옥천으로 하고 있으나 극소수는 순창을 본관으로 삼고 있다.
『순창 군지』에 “고려 중엽 조장이 음사로 검교 대장군에 임명됨[高麗中葉趙璋以蔭仕官檢校大將軍]”이라고 되어 있어 조장의 득관(得貫)을 뒷받침하고 있다.
조장의 증손자 농은(農隱) 조원길(趙元吉)이 고려 후기인 1389년(창왕 2)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설장수(偰長壽), 성석린(成石璘) 등과 함께 공양왕(恭讓王)을 즉위시킨 공으로 대광보국 광록대부(大匡輔國匡祿大夫)로 검교 문하시중 겸 전공 판서로 옥천 부원군(玉川府院君)에 봉하여졌다.
조원길은 고려가 망하자 순창에 들어가 다시 벼슬하지 않고 끝까지 절의를 지켜 목은(牧隱) 이색(李穡), 정몽주,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 야은(冶隱) 길재(吉再) 등과 함께 5은(隱)으로 불렸다.
조원길의 아들 조영과 조유(趙瑜) 역시 고려가 망하자 순창에 은거하며 벼슬하지 않았다.
태종(太宗)으로부터 부자 삼현(父子三賢)이란 칭송을 들었다.
부자 삼현이란 조영, 조유 그리고 아버지 조원길을 말한다
[입향 경위]
조원길의 큰아들 조영이 적성면 내월리 내적 마을에 은거하여 들어와 정착한 이후 그 후손이 세계를 이어 오고 있다.
조원길의 둘째 아들 조유는 전라남도 순천으로 이거하였는데, 이때부터 순천 주암을 중심으로 조유의 자손이 번성하여 전라남도 일대의 거족으로 자리를 굳힌다.
조영의 후손인 모충재(慕忠齋) 조여관(趙汝寬)은 적성면 운림리 임동 마을 출신으로 임진왜란 때 금산 전투에서 중봉(重峰) 조헌(趙憲)의 휘하에서 싸우다가 순절하였다.
[현황]
2000년 순창 지역 옥천 조씨는 212가구, 54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1989년 순창군에서 실시한 인구 통계 자료에 따르면 당시 순창 지역의 옥천 조씨는 적성면 운림리 임동 마을과 내월리 내적 마을에 15가구가 집성촌을 이루며 세거하였으나, 2013년 현재 운림리 임동 마을에 10가구, 내월리 내적 마을에 12가구가 세거하며 대부분 조영의 후손들이다.
[관련 유적]
전라북도 순창군 유등면 건곡리 산86-14번지에 자리한 옥천 부원군 조원길 묘 및 묘표가 2005년 12월 16일 전라북도 기념물 제124호로 지정되어 관리받고 있다.
묘는 조원길과 옥천 군부인 조씨를 함께 장사한 봉토분으로 묘역의 형태와 배치가 고려 시대 능묘와 매우 유사하다.
묘비는 1391년 조원길 예장 당시 아들 조유가 세운 것으로, 길이 2m, 폭 50㎝, 두께 30㎝ 정도이다.
묘표 윗부분에만 문자가 새겨져 있어 비대석이나 가첨석 없이 비신석만 땅 속에 절반쯤 묻어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마멸이 심해 비문을 식별하기 어려우나 정밀 탁본을 통해 42자의 글씨를 밝혀냈다고 한다.
비문 내용은 “1391년(홍무 24) 신미 신축 삭 삼십 일 임오에 전공 판서 조원길과 옥천 군부인 조씨를 함께 장사한 묘이며, 효자[부모의 제사 때 자식을 가리키는 말] 전 부정 조유 찬서자”로 되어 있다.
고려 시대 묘역과 금석문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첫댓글 2019년 7월 13일 옥천 조씨 문중에서 영월 장릉을 찾아와 장판옥에 모셔져 있는 조숭문`조철산 부자 충신에 대한 문중제례를 거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