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2월 말경에 개봉을 한 <쌍화점>이란 영화가 있습니다. 이 영화는 공민왕과 노국공주에 관한 이야기죠. 영화를 보시면서 고려말기의 시대상이라는 것도. 고려 말기의 왕 공민왕, 그리고 원나라의 공주였던 노국공주. 이들은 서로 다른 문화적 배경을 갖고 자라 혼인을 했지만, 세기의 사랑을 나눈 한 남자와 한 여자였습니다. 영화를 보니 전 고려 말 시대상과 공민왕, 그리고 노국공주를 알면 더욱 재미있게 영화를 관람하실 수 있을 것 같아 작업을 해서 올려놓습니다. 약 650년 전 작은 반도에서 아름다운 로맨스를 그린 사람들의 이야기로 들어가 볼까 합니다. [한국사 傳]
1367년 1월. 공민왕이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부인의 영정을 앞에 두고서……. 아내를 잃은 지 벌써 3년째 왕은 여전히 공주의 죽음을 부정했다. 노국공주의 초상화 마주 앉아 평상시처럼 지냈던 공민왕.1) 그는 요동을 정벌하고 권문세족을 숙청했던 개혁군주였지만 노국공주를 잃은 공민왕은 심증(心疾) 즉 정신병에 걸린 군주일 뿐이었다. 사랑을 잃은 왕의 마지막은 시리고 또 아팠다.
신화가 된 공민왕과 노국공주 공민왕 그는 고려의 개혁군주로 평가받는 인물입니다. 공민왕이 즉위할 때 고려는 이미 기울어가고 있었지만 그가 왕이 됨으로써 고려는 다시 한 번 화려한 전성기를 맞았습니다. 공민왕 이후에도 18년간 우왕, 창왕, 공양왕 등이 제위 했지만 고려는 사실 공민왕으로서 마지막 불꽃을 태웠죠. 그런 공민왕이 정신질환을 앓았다. 공민왕이 이룬 업적과 달리 공민왕 개인에 대해서 역사는 정신병이라는 단어로 못 박고 있습니다. 그에 관한 기록이 고려사에 아주 자세하게 실려 있는데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139권의 방대한 기록 고려사. 고려왕의 대한 세세한 기록은 물론 열녀와 간신까지 포함한 천여 명의 열전까지 실은 역사서다. 그중 공민왕의 대한 평가를 살펴봤다. “왕위에 23년 있었으며 나이는 45세였다.” 공민왕의 본래 모습은 왕다웠다. 엄격하고 신중했으며 예의바른 성격이었다. 그러나 말년에는 의심이 많고 사나운 성품으로 변했다.2) 같은 사람으로 여겨지지 않는 그야말로 급격한 변모. 그 시작은 아내의 죽음이었다. 과도하게 슬퍼한 나머지 스스로 자신의 의지를 상실한 것이다.3) 왕비의 죽음을 공민왕은 감당치 못했다. 공민왕은 손수 공주의 초상을 그려 밥을 먹을 때에도 슬피 울 때에도 언제나 곁에 두었다.4) 그녀는 몽골 사람이었다. 공민왕은 공주가 생각날 때마다 몽골 음악을 듣고 또 연주했다.5) 시간이 흘러도 그리운 마음을 바래지 않았다. 공주의 영정은 빗물에 상하지는 않는가 늘 살피고 걱정했으며 공주의 생일에는 연회를 베풀었고 공주의 기일에는 직접 제사를 지냈다. 공민왕은 생시처럼 공주를 극진히 챙겼다. ‘공주 한잔 받으시오.’ 공주를 보낸 지 8년지 지나도 공민왕은 여전히 공주의 부재를 감당하지 못했다. 공민왕 22년 공주가 유독 그리웠던 10월. 공민왕은 무덤을 찾아 제사를 지낸 뒤 그곳을 떠나지 못하고 능 밑에서 밤을 보냈다.6) 신용구 정신과 전문의 “공민왕에게 있어서는 그 노국공주가 어떤 단순한 연인의 존재는 아니었다고 봅니다. 오히려 훨씬 성스럽고 때로는 정신적 지주가 될 수 있는 어머니와 같은 표상으로 존재했으리라 생각합니다.”
공민왕은 예술적 감수성이 남달리 풍부했다고 평가받고 있다. 그의 유품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공민왕 금(琴). 공민왕 금은 수덕사의 승려 만공이 고종의 둘째 아들인 이강으로부터 1899년에 물려받은 거문고다. 노국공주가 죽은 후 밤마다 슬픔을 달래려 뜯었다고 하는 거문고엔 공민왕 금이란 금명이 선명하다. 거문고 바닥엔 조선시대 유학자였던 이조묵의 시도 새겨져 있다. 공민왕이 신령스러운 오동나무를 얻어 만들게 됐다는 유래다. 음악을 사랑한 감성적인 공민왕 그의 성품은 섬세한 만큼 슬픔이 깊었다. 공민왕은 공주를 잃은 충격에서 쉽게 빠져나오지 못했다. 다시 1372년 10월 1일에 고려사 기록이다. 공민왕의 기묘한 버릇 그것은 여장이었다. 공민왕은 항상 자신을 여자처럼 화장하고 있었다고 한다.7) 분명 기이한 모습이다. 밤낮으로 공주를 생각하다 결국 정신병이 생긴 탓이라고 역사는 판단하고 있다.8) 한 사람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깊을 수 있는지 그 슬픔의 깊이가 고스란히 고려사 속에 스며들어 있다. 노국공주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깊었기에 그야말로 국경을 넘어 영혼이 통하는 사랑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고려 왕자였던 공민왕과 멀디 먼 원나라에서 온 노국공주와의 사랑은 언제 어떻게 시작됐던 것일까요. 고려가 처했던 현실 속에 그 답이 있습니다.
중국의 베이징. 베이징은 공민왕이 살았던 시절에도 대도라 불리는 원나라의 수도였다. 원나라 황제가 살았던 황도인 만큼 토성 등의 유적지가 곳곳에 남아 있다. 가로 24m 높이 12m였던 토성은 600여년의 세월에 늙어버려 이제는 작은 언덕으로 변해있다. 토성 내부는 공원으로 꾸며져 있는데 한편에 쿠빌라이 칸(원 세조)의 성물을 세워두었다. 중앙아시아를 정복하고 베이징에 입성을 할 당시 모습이다. 원은 세계 역사상 유래가 없는 거대한 제국을 건설했다. 전무후무. 가장 넓은 영토를 소유했던 나라에 문화와 예술은 화려하게 발달했다.
이때에 수많은 유민족이 유입됐고 원나라는 그들을 위한 관청을 따로 설치해 관리했다. 진따수 교수(베이징대 고고연구소)의 말을 들어보자. “원나라 대도에는 외국인들을 접대하는 전문관청이 있었다. 그 관청은 대도성을 설계할 당시에는 외성 쪽에 지어졌다. 그런데 교류가 늘어나면서 불편함을 느끼게 되자 황성의 앞부분과 지금의 왕푸징에서 자금성에 이르는 북동쪽에 외국인 관련 시설이 집중 배치되었다.” 현재의 자금성은 명나라가 건국되며 새로 지은 것이다. 오백여 년 간 24명의 황제가 살기 이전에 이곳에 공민왕이 있었다. 1341년 12살의 나이에 볼모로 끌려온 어린 공민왕. 공민왕은 황제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황태자의 시중을 들었다. 짱판 교수 베이징대 역사학과 “몽골족은 원나라를 세운 뒤 투항한 정권의 자제들을 인질로 삼았다. 그리고 이 인질들을 주로 원 황제의 호위군이 되었다. 고려의 많은 왕들 역시 젊은 시절 원의 대도(수도)에서황제의 호위군을 맡았다.” 그러나 고작 12살. 이곳에서의 공민왕은 단지 어머니와 생이별한 어린 아이었다. 외롭고 두려운 볼모생활이었다. 고려에 대한 원의 지배는 왕자를 인질로 잡아두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그들은 고려의 왕을 마음대로 인명했고 또 폐위시켰다. 공민왕의 아버지와 형은 왕위를 두 번씩 주고받는 기행까지 겪었다. 고려의 왕권은 더 이상 존엄하지 않았다. 고려왕의 귀양살이도 흔했다. 형 충혜왕이 왕위에서 내려오며 귀양길에 겪은 수모는 특히 모욕적이었다. 원나라 사신은 고려의 왕 충혜를 발로 차며 포박했고 또한 꾸짖기까지 했다.9) 충혜왕은 북경에서 2만리 떨어진 게양10)으로 귀양을 가야했다. 수행하는 자가 없어 손수 옷 보따리를 들고 떠나는데11) 그 길로 단명하고 말았다. 충혜왕의 나이 스물아홉이었다. 그것은 고려의 비극이자 공민왕의 개인적인 원한이기도 했다. 짱판 교수 “원의 집권기는 독특한 시기였다. 몽고족은 뛰어난 군사력으로 세계를 정복했다. 그래서 몽고족이 정복한 국가는 거의 멸망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고려는 멸망하지 않았다. 그러나 고려 역시 국가의 독립은 보장받지 못했다. 원 집권기 중국과 동아시아의 관계는 매우 특수했다.” 고려의 반란을 막기 위해 원은 고려의 왕과 원의 공주를 혼인시켰고 그 아들을 북경에 데려다 인질로 삼았다. 결국 몽골 공주와 결혼한 자가 고려의 왕이었고 몽골 공주의 아들 된 자가 고려의 왕이었다. 힘들이지 않고도 효과적으로 통치하는 방법이었다. 자연히 모계혈통인 원나라의 왕자에게 왕권은 돌아가게 된다. 다섯 명의 고려왕은 모두 일곱 명의 몽골 공주와 결혼했다. 이들은 일곱 명의 부인 앞에서 고려의 왕인 아닌 신하로 살았다. 심지어 쿠빌라이 칸에게 장가든 충렬왕은 부인에게 맞고 살았을 정도다.12) 공민왕에게 원나라 공주왕의 결혼은 피하고 싶은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공민왕은 1349년 원나라 여인 노국공주와 결혼식을 올린다. 공민왕의 적극적인 선택이었다. 이유는 무엇일까. 1344년 형 충혜왕이 유배 길에 사망하며 공민왕이 왕위에 올라야 했지만 조카 충목왕이 보위에 오른다. 그 후에도 충혜왕의 서자 저가 공민왕을 제치고 충정왕이 됐다. 홍영의 국민대 연구교수 “공민왕은 두 차례에 걸쳐서 왕위계승에 실패를 하게 되죠. 실패하는 과정에 아마 자신의 정치적 한계를 느꼈을 것이고 그 정치적 한계가 바로 원 황실과의 부마관계를 형성하는 것, 그런 정치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아마 노국공주하고 결혼을 했을 것이…….” 게다가 공민왕의 어머니는 고려인이었다. 공민왕에게는 든든한 후원자가 필요했다. 공민왕은 두 번째 왕위를 빼긴 지 불과 5개월 뒤 노국공주와 서둘러 혼례를 치렀다. 그리고 2년 뒤 공민왕은 드디어 왕위에 오른다. 반원주의자인 공민왕과 원나라 여인 노국공주와의 결혼. 그것은 당연히 정략결혼이었습니다. 하지만 공민왕과 노국공주는 천생의 인연이 됐고 이들은 목숨을 걸고 서로를 지켰습니다.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공민왕의 것으로 전해지는 유물 한 점이 보관돼 있다. 원래를 두루마기 형태였으나 일부만 남아 있다. 수렵도라고도 불리는 천산대렵도, 사냥꾼들이 말을 타고 내달리는 광경이 정교한 필치와 깊이 있는 색조로 묘사 돼 있다. 공민왕은 고려의 대표적인 화가다. 그 실력은 최고의 실력으로 평가받고 있다. 공민왕의 그림은 세상 사람이 그린 것 같지 않다거나13) 필력이 신의 경지로까지 일컬어진다.14) 그림과 음악에 조예가 깊었던 공민왕. 그는 고려의 다른 왕들과는 기질이 달랐다. 예술적 감수성이 뛰어난 대신 고려의 호방한 기질과는 영 거리가 멀었다. 공민왕은 고려란 나라에서 사냥을 하지 않는 유일한 왕이었고 심지어 말도 타지 못했다.15) 공민왕과 노국공주는 정략결혼으로 만났지만 감성적 코드가 일치했다. 이들의 사랑이 얼마나 깊었는지 1359년 4월의 기록에 나타나 있다. 신하들이 노국공주에게 후궁을 드리자는 청을 하고 있었다. 이때가 결혼 11년차, 혼인한지 10년이 넘도록 공민왕은 후궁을 드리지 않았다. 부부에게 아이가 없었기에 대신들의 청은 어렵게 이루어질 수가 있었다.16)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사랑은 시련을 이기며 돈독해졌다. 20만 명의 홍건적이 무서운 속도로 남침해 20일 만에 평양이 함락되고 두 달 후 개경까지 넘어갔을 때 공민왕과 노국공주는 피난을 떠났다. 길은 험했다. 왕의 옷은 젖고 얼었다. 공민왕은 옷섶으로 불을 피워 몸을 녹였다.17) 한 달 뒤 12월 마침내 공민왕 일행은 안동에 도착했다.
영호루 안동의 대표적 정자다. 고려 말 유학자인 정몽주나 유학의 대가인 삼봉 정도전의 편액이 걸려있다. 안동에 머물렀던 공민왕도 영호루에 사액을 내렸다. 영호루의 현판은 공민왕이 안동 피난 시절 직접 쓴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공민왕은 영호루를 자주 찾으며 심신을 추슬렀다.18) 고려의 개국공신이었던 안동권씨와 김씨, 장씨의 위패를 함께 모신 태사묘. 이곳에는 공민왕이 안동주민들에게 고마운 마음으로 선물한 유물들이 남아 있다. 색실로 복숭아 꽃, 나리 꽃, 무궁화, 모란 등의 꽃무늬를 수놓은 비단, 모란 무늬로 장식된 금대인 허리띠 금대를 비롯한 두 종류의 혁과대는 관직에 많이 등용되라는 뜻이 담겨있기도 하다.
또한 공민왕이 직접 사용했던 은식기도 남아 있다. 은식기와 은수저는 안동백성들의 식복을 축원하고 있다. 노국공주가 사용했던 부채도 있다. 부챗살이 없는 특이한 모양에 비단부채다. 안동에 옛 이름을 딴 읍지인 영가지. 여기엔 공민왕이 안동을 도읍으로 승격시킨 이유가 기술돼 있다. 고을사람들이 피난 온 왕의 일행을 지극정성으로 맞았던 것이다. 안동의 환대는 공민왕에게 큰 힘이 됐다. 안동대 박물관장 배영동 교수 “공민왕은 안동을 떠날 때에 ‘안동이 나를 중흥시켰다’ 이렇게 얘기를 했고 또 복주목을 대도호부로 승격시켰을 뿐 아니라 안동부에 대해서 대도호부에 대해서 세금을 면제해 주고 여러 가지 선물을 내리고 그랬습니다. 이런 것은 모두다 안동부민들이 합심해서 공민왕이 잘 머무를 수 있도록 한 것에 은혜를 표현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때부터 안동에 전해져 내려오는 놋다리밟기(경북 무형문화재 제7호). 놋다리밟기는 실감기, 실풀기, 놋다리의 세 가지 춤으로 구성돼 있다. 포로나 다름없는 공민왕이 그 신세에서 벗어나는 것이 실감기와 실풀기 그리고 노국공주가 안동주민의 정성으로 무사히 다시 길을 가는 것이 놋다리다. 김경희 놋다리밟기 보존회 예능보유자 “왕의 일행을 맞이하러 나갔던 안동부의 부녀자들이 자진해서 엎드려서 긴다리를 놓아서 왕후인 노국공주를 무사히 건너게 했다는 것에서 유래했습니다.”
유래는 이렇다. 안동에 도착한 노국공주가 개울을 건너게 됐는데 마을의 부녀자들이 등을 굽히고 그 위로 공주를 건너게 했다. 안동사람들은 노국공주를 극진히 대접했고 공민왕은 깊게 감동했다. 안동은 해마다 노국공주를 기리는 제사를 지내며 잔치를 벌인다. 시련의 시기 사랑은 상하지 않았다. 오히려 깊어졌다. 노국공주는 안동에서 공민왕을 설득해 말 타는 연습을 시키기도 했다.19) 천생의 배필이었다. 2년 뒤 흥왕사.20) 괴한 오십 여명이 공민왕의 처소에 침입했다. 반역이었다. 그런데 목숨을 걸고 그녀가 나섰다. ‘저 방에 들어가려거든 내 목을 베고 들어가라.’ 반란군은 원나라 공주의 기세에 역모를 포기했다. 이형우 박사 서울시 문화재과 팀장 “공민왕의 그런 움직임들을 노국공주가 동조하지 않았다면 그러니까 적극적으로는 아니더라도 호응을 하지 않았다면 그런 반원계획은 어떻게 보면 불가능했을 수도 있었다고 추측할 수 있고 그 이후의 흥왕사의 난이라든지 이런 것들로 볼 때 노국공주가 보여준 것은 단순한 어떤 개인적은 부부관계를 넘어서서 정치적으로도 공민왕의 어떤 정치적 목적에 상당히 동조해가지고 같이 움직이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사랑이야기는 백성들의 입에서 입으로 7C가 지나도록 이어졌다. 서울 마포의 광흥창터엔 공민왕의 사당이 모셔져 있다. 그런데 공민왕 사당엔 그 홀로 모셔져 있는 것이 아니다. 노국공주도 함께다. 사당의 부부를 함께 모시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하지만 공민왕은 노국공주와는 따로 떨어져 생각할 수 없는 존재인 것이다. 노국공주는 공민왕의 든든한 후원자이기도 했습니다. 노국공주와의 사랑을 배경으로 공민왕은 거침없는 개혁정책을 펼쳐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자 이제 반원의 기치를 내건 피의 숙청이 시작됩니다. 고려사절요는 고려사의 내용을 축약한 역사서다. 고려사의 누락된 내용들이 다수 실려 있는데 공민왕의 일화도 첨가돼 있다. 고려사절요의 그 날의 기록이 생생하다. 1356년에 고려는 피비린내로 진동하고 있었다. 1356년 5월 18일 공민왕의 은밀한 계획이 드디어 드러났다. 그것은 친원세력의 처단이었다. 기철과 그의 아들 유걸, 조카 소감과 그 측근 권경 등 기씨 일당은 대부분 이날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대대적인 숙청이었다. 고려사절요에 따르면 피가 궁문에 낭자하고 칼날이 길에 가득했다고 한다. 기철 일당의 처단 그것은 위험한 선택이었다. 기철은 바로 원나라 기황후의 친오빠였기 때문이다. 누이가 황후에 조카가 황태자 기철은 스스로를 신하라고 칭하지도 않았다. 오만함을 도를 넘었다. 친원파는 고려를 원의 속국으로 만들고자 했다.21) 원나라에 기댄 권문세족들은 아녀자를 범하고 돈으로 관직을 사고팔고 각지에 농장을 만들어서 수탈했다. 권력을 위해서라면 그들은 자신의 딸들을 원나라에 기꺼이 조공했다.22) 홍영의 국민대 연구교수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인사권을 전횡한다든가 탈정을 한다든가 고리대금업을 한다든가 이러한 경제적 수탈, 정치적 수탈을 자행을 하기 때문에 바로 그들이 개혁에 척결대상이라고 생각 된 거죠.” 공민왕은 계엄령을 선언한 뒤, 이것이 공정한 처사였음을 원에 알렸다. 기철은 권력을 빙자해 임금의 통제에서 벗어났고 심지어 국법도 제멋대로 운용했다고 보고했다.23) 베이징의 후퉁 거리, 원나라의 골목구조가 아직도 남아 있는 곳이다. 하지만 원대의 흔적은 많지 않다. 보수중은 원 만송 노인탑은 유일하게 남아 있는 원나라의 전탑이다. 공민왕이 친원세력들을 제거할 당시 원나라는 각종 농민 반란 등으로 흔들리는 말기였다. 고려에 정벌군을 보내기엔 역부족인 상황. 공민왕은 이 정세를 노렸다. 짱판 교수 “당시 공민왕이 친원세력들을 척결한 까닭은 원나라 정권이 불안정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농민봉기까지 일어나 원이 고려에게 보복할 만한 여력이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래서 기황후의 가족을 살해했다.” 원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자주국가 고려를 건설하려고 하는 공민왕의 꿈은 즉위와 함께 실현되기 시작한다. 10년 만에 귀국한 공민왕은 먼저 100여 년간 이어지던 풍습부터 바로 잡았다. 스스로 먼저 변발을 풀고 몽골복을 벗었다.24) 풍습을 바꾸기란 쉽지 않다. 우리 고유의 것으로 알고 있는 전통혼례에도 몽골의 풍습이 스며들어 남아 있다. 신부의 족두리나 연지 곤지가 그렇다. 풍속은 섞이면 정착하기 마련이다. 공민왕은 또한 원의 연호 사용을 금지하는 한편 고려에 설치된 원나라 관아 정동행성 또한 폐지시켰다. 이것은 시작에 지나지 않았다. 공민왕에겐 더 큰 포부가 있었다. 쌍성총관부를 격파하고 잃어버렸던 북방영토를 수복한 것이다.
고려의 땅을 되찾는데 불과 두 달이 걸렸을 뿐이었다. 고종 무호년에 원나라에 함몰된 뒤 무려 99년 만에 이룬 눈부신 성과였다.25) 북벌에 대한 공민왕의 야심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고구려의 옛 땅까지 수복하겠다고 결심했고 그 각오는 마침내 요동을 점령하게 된다.26) 홍영의 교수 “요동 이 지역들은 이전부터 고려 영토라고 인식되어 왔었고 그런 과정 속에서 원명교체시기가 이 시기에 일어나게 되는 것이죠. 바로 국제 질서에 틈바구니를 공민왕은 절묘하게 이용을 했고 그래서 요동을 잠시 점령했던 것이죠.” 공민왕의 목표는 한 가지였다. 자주독립국가 고려. 노국공주는 자신이 자란 모국을 배반하는 것이었지만 공민왕의 가장 큰 조력자이자, 동반자는 바로 노국공주였다. 공민왕의 거침없는 개혁에 대해서 기득권층의 반발은 극심했습니다. 고려사절요의 한 기록을 보겠습니다. 전답을 몰수하고 조세를 징수하자 오히려 이 제도의 폐지를 요구하는데요.27) 공민왕은 권문세가에 대해서 이렇게 응수합니다. ‘좀도둑이 밤에 다니다가 달 밝음을 미워하는 격이구나’28)라고 말이죠. 공민왕의 개혁정책은 제위기간 내내 지속적으로 추진되었습니다. 무려 네 번에 걸쳐 개혁교서를 발표했는데요. 빼앗긴 토지를 돌려주고 노비의 신분을 회복시켜 주는 등 파격적인 정책을 펼쳐나갔습니다. 노국공주의 사랑과 거침없는 고려의 개혁 하지만 행복한 시간은 거기까지였습니다. 공민왕의 말로에는 비극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16년 만의 첫 번째 임신 공주가 위중했다. 산달이 되며 병이 위독해지자 공민왕은 일급 죄인까지 사면하며 무탈을 빌었다. 그러나 공주는 죽었다.29) “나라를 가지고 가정을 가지는데 배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이렇게 내조의 공을 세운 이에 대해서는 더욱 잊을 수 없는 것이다 노국공주 덕에 우리나라가 오늘까지 존속하게 되었다 영원히 국가를 지키고 함께 살아야 할 터인데 그만 세상을 떠났구나! 슬픈 마음은 더욱 깊어만 같다” <고려사> 후비열전 개성시 개풍군에 노국공주의 정릉이 있다. 그리고 그 곁에 공민왕의 현릉도 있다. 고려시대에 왕과 왕비를 함께 모신 유일한 쌍릉이다. 노국공주의 능을 만들며 공민왕은 쌍릉을 계획했다. 공주의 능을 지으며 또한 한편에는 대규모 토목공사를 진행시켰다. 광통보제선사. 3천명의 승려가 지낼 수 있는 영전. 즉 공주의 초상화를 걸어둘 전각을 짓기 위해서였다. 광통보제선사의 부역엔 모든 관원들이 참여해 나무와 돌을 운반했다. 그로 인해 ‘어기어차’하는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며 밤낮으로 끊이지 않았다. 나르다 죽은 소은 길에 연이어 넘어져 있었다.30) 공주가 죽은 지 8년 뒤, ‘어찌하여 비빈들을 가까이 하지 않소.’ ‘공주만한 여자가 없습니다.’ ‘한번 죽는 것은 당연한 이치요. 왕도 마침내 죽음을 면하지 못할텐데. 어찌 그다지도 심히 슬퍼하시오. 남들 웃음거리가 될까 두려우니 다시는 그렇게 하시 마시오.’ <고려사절요> 1373년 3월 공민왕은 신돈을 등용시켜 정사를 돌봤다. 신돈을 통해 개혁정치를 이어가고자 했지만 그는 곧 타락했다. 공민왕이 슬픔에서 헤어 나오지 못할수록 신돈의 권력은 막강해져만 갔다. 백관들은 궁궐로 가지 않고 그의 집으로 출근했다. 결국 공민왕은 신돈을 주살한다. 공민왕이 마지막으로 의지했던 신돈의 사망 직후 그는 자제위를 설치한다. 미소년들로 이루어진 경호집단이었다. 공민왕은 자제위를 늘 곁에 두고 새로 맞은 왕비조차도 가까이 하지 않았다. 이 무렵부터 고려사는 공민왕을 정신이상으로 보고 있다.31) 공민왕은 극도로 문란해져 갔다. 자제위 소년들의 밤을 훔쳐보는 것은 예삿일이었다. 기이한 왕의 행적, 아내들을 멀리한 후 여장을 하고 또한 지나치게 총애한 자제위까지 고려사의 기록은 참아 입에 담기 부끄러울 정도다.32) 그렇게 2년 공민왕은 자제위에 의해 살해당했다.33) 고려의 개혁군주로 23년 노국공주의 남편으로 16년 그리고 그리움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체 9년 45살. 왕의 죽음은 허무했다. 공민왕은 생전에 바람대로 노국공주의 곁에 잠들었다.
고려의 왕릉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능으로 평가받는 공민왕릉의 내부 죽음이 갈라놓지 못하도록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쌍릉은 특별한 구조로 건축돼 있다. 작은 구멍이 바로 그것이다. 공민왕의 현릉과 노국공주의 정릉을 연결하는 통로 왕릉엔 영혼의 길이 놓여 있다.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지극한 사랑은 고려가 패망하고 조선이 들어선 뒤에도 곧잘 회자됐다. 공민왕과 노국공주는 지극한 사랑을 비유한다.34)
조선을 정수를 관통하는 종묘. 조선의 임금과 왕비가 아니면 모실 수 없는 곳이다. 그런데 이곳에 공민왕이 있다. 그리고 공민왕의 곁에는 노국공주가 있다. 공민왕을 모시기 위해선 노국공주로 함께 있어야 했던 것이다. 이형우 박사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사랑이라고 하면 사랑 관계가 일반 다른 왕들과 왕비들과는 달랐기 때문이 아닌가 그런 것들을 후에 어떤 신하들이나 백성들이 그렇게 전해 들었고 또 그렇게 믿었기 때문에 적어도 공민왕이 가시는 데는 노국공주가 같이 가야하고 노국공주가 가시는 데는 공민왕이 같이 가야한다는 그런 민간신앙 같은 것들이 바탕이 되어 가지고 어떤 공민왕의 신당의 영정이라든지 종묘에 있는 공민왕 사당의 영정들이 그렇게 만들어진 게 아닌가 추측됩니다.”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사랑은 역사의 신화가 된 세기의 사랑이었다. 공민왕의 마지막 모습이 이처럼 기이한 것은 고려사가 조선에 의해 써졌다는 점도 있습니다. 조선 건국의 정당성을 위해서 고려와 공민왕의 말로는 이처럼 어둡게 쓰여져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노국공주와의 사랑만큼은 조선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공민왕을 폄훼할 수 있어도 그 사랑까지는 모욕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고려의 마지막 부흥기를 가능케 했던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사랑은 650여년 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시간을 초월한 사랑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 저작권은 KBS <한국사전>에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1) <고려사> 공민왕 16년. 2) <고려사> 공민왕 23년 9월. 3) <고려사> 공민왕 23년 10월. 4) <고려사절요> 공민왕 14년 4월. 5) <고려사> 공민왕 21년 10월. 6) <고려사> 공민왕 22년 10월. 7) <고려사> 공민왕 21년 10월. 8) <고려사> 공민왕 21년 10월. 9) <고려사> 충혜왕 후4년(1343). 10) 연경(베이징)에서 2만리나 떨어진 곳. 11) <고려사> 충혜왕 후4년(1343) 12월. 12) <고려사>. 13) ‘세밀함이 현실 같으니 진실로 세상 사람의 그림 같지 않았다.’ 傳 : 양엽기. 14) 조선 숙종. 15) 고려사. 16) ‘재상들이 공주가 아들이 없으니 명문집 딸로서 아들을 낳을 만한 여자를 선택할 것을 청하였다.’ <고려사> 공민왕 8년 4월. 17) <고려사> 공민왕 10년 11월. 18) ‘왕이 영호루에 가서 배를 타고 놀았으며 호숫가에서 활을 쏘았다.’ <고려사> 공민왕 10년 12월. 19) <고려사>. 20) 1363년 윤3월. 21) ‘이운, 조익청, 기철 등이 백성들을 안착시키기 위해 고려를 원나라의 한 성으로 만들어달라고 원황제에게 상소하였다.’ <고려사> 충혜왕 후4년(1343) 22) ‘복안부원군 권겸이 원나라 황태자에게 딸을 바쳤다’ <고려사절요> 공민왕 원년. ‘경양대군 노책이 딸을 원나라에 바쳤다.’ <고려사절요> 공민왕 3년. 23) <고려사> 공민왕 5년 6월. 24) <고려사절요> 공민왕 원년. 25) <고려사절요> 공민왕 5년 7월. 26) <고려사절요>. 27) “收其田仍追累年之租 請罷” 28) “穿?夜行惡月之明” 29) ‘왕은 분향하며 단정히 앉아서 잠시도 공주의 곁을 떠나지 않았으며 공주는 이내 죽었다. 왕은 비통하여 어쩔 줄을 몰랐다’ <고려사> 후비열전. 30) <고려사>. 31) ‘공주가 죽은 후 여러 왕비를 받아들이기는 했으나 별궁에 두고 가까이 하지 않았으며 밤낮으로 공주를 생각하여 드디어 정신병이 생겼다’ <고려사> 공민왕 21년. 32) ‘김홍경과 홍륜 등을 불러 들여서 난잡한 행동을 하게하고 왕은 곁방에서 문틈으로 엿보았다’ <고려사> 공민왕 21년. 33) 1347년 9월. 34) ‘내가 어찌 공민왕이 노국 공주에게 하듯이 할 것이냐’ <세종실록>. ------------------------------------------------------------------------------------------------- 공민왕 팩션사극 <쌍화점> 공민왕, 노국공주, 자제위 어떻게 다뤘나? 개봉 9일만에 187만 관객을 동원하며 200만 돌파 초읽기에 들어간 2009년 첫 흥행대작 <쌍화점>의 모티브가 된 고려말 공민왕과 자제위에 얽힌 야사가 온라인에서 뜨거운 화제다. 개혁군주인 공민왕이 개혁 정치를 실현하기 위해 설치했다는 일설부터, 문란한 공민왕의 침소를 드나들며 시중을 들었다는 설까지 의견이 분분한 자제위 야사는 지금까지도 사가들 사이에서 끊임없는 논란의 대상이다. <쌍화점>의 흥행과 더불어 그 진위여부가 네티즌들 사이에서도 뜨거운 이슈가 된 이 야사를 영화 <쌍화점>은 어떻게 다루고 있을까? 공민왕은 개혁군주? 문란한 실정자? 잘 알려진 것처럼 <쌍화점>에서 주진모가 분한 고려왕은 고려 31대 왕인 공민왕에서 캐릭터 모티브를 따왔다. 공민왕은 사랑하는 아내 노국공주의 죽음 이후 실의에 빠져 방탕한 생활로 고려의 몰락을 초래한 실정자로 기록됐으나, 한편에선 이러한 기록이 조선 건국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조선시대 사가들에 의해 왜곡됐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쌍화점> 역시 공민왕이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원나라에 대항하는 한편 북진정책을 실시하고, 친원파를 숙청하여 왕권강화를 도모했던 개혁군주로 보고, 극중 고려의 왕의 모습도 왕권을 위협하는 대신들의 음모를 철저히 파헤쳐 응징하는 등 카리스마 넘치는 군주의 모습으로 그리고 있다. 왕후의 모델은 노국공주? <쌍화점>에서 송지효가 연기한 왕후 역시 공민왕의 부인인 노국공주를 캐릭터 모델로 삼았다. 유하 감독은 “영화 속에서 등장하는 자제위, 대리합궁에 관한 이야기들은 공민왕의 부인이었던 노국공주 사후의 이야기이지만, 왕후 캐릭터는 노국공주를 생각하면서 설정했다” 고 밝힌바 있다. 원나라 황족 위왕의 딸이었던 노국공주는 정치적 복속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원의 정책에 따라 고려 공민왕과 정략결혼했다. 그러나 원나라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노국공주는 자신을 고려사람이라고 칭하며, 공민왕의 반원정책을 지지했다고 한다. 극중 송지효는 고려왕을 위협하는 원나라 사신과 원나라에 영합하려는 대신들에게 일침을 가하며 왕을 지원하는 등 역사 속 노국공주 캐릭터를 재현하고 있다. 그러나 역사와는 달리 영화 속에서 왕후는 왕의 사랑을 받지 못해 괴로워하는 캐릭터로 그려진다. 자제위는 공민왕 집권말기의 최대 오점? 영화 속 왕의 친위부대 ‘건룡위’ 역시 공민왕이 집권말기에 명문자제들로 구성했던 특별관청 ‘자제위’를 모티브로 삼았다. 야사에 의하면 명칭 상으로만 왕의 경호를 담당했을 뿐 공민왕의 침소를 넘나들며 궁중의 풍기문란을 야기한 미소년 부대라고도 한다. 그러나 많은 사가들은 자제위가 신돈의 실각 이후 권력기반이 필요했던 공민왕이 친왕세력을 육성하고 개혁정치를 다시금 도모하기 위해 설치한 기구로 보고 있다. <쌍화점> 역시 후자의 가설에 의거해 ‘건룡위’를 원의 압력에 맞서 왕권을 위협하는 세력을 비밀리에 조사하는 고려시대 최고의 인재 집단으로 그리고 있다. 역사적 논란의 대상인 공민왕과 자제위에 얽힌 흥미진진한 비사를 재조명한 <쌍화점>은 원의 억압을 받던 고려 말, 왕의 호위무사와 그를 각별히 총애한 왕 그리고 정치적 음모에 휘말려 그들 사이를 가로막게 된 왕후의 금지된 사랑과 배신이 만들어낸 운명의 대서사극. 조인성, 주진모, 송지효 주연, 유하 감독이 연출한 2009년 첫 흥행대작 <쌍화점>은 극장에서 절찬 상영 중이다. 사이트 주소 http://blog.cine21.com/_manager/75491 ---------------------------------------------------------- 사랑과 질투의 변주곡, 「쌍화점」 김인호(중세사 1분과) 「쌍화점」은 정통 사극영화가 아니다. 단지 고려말 공민왕 시대에 우리 인간의 한 단면을 옮겨 놓을 뿐이다. 이 영화의 드라마적 요소는 셰익스피어의 「맥베드」와 닿아 있다. 그래서 비극이다. 나는 운 좋게도 영화평론가를 알고 있다는 죄 때문에(?) 「쌍화점」의 첫 언론 시사회에 공짜로 갈 수 있었다. 공짜라는 점이 중요하다, 왜 나는 공짜라면 양잿물도 마시니까. 그래서 학기말 성적 처리 등으로 남들은 다 바쁘다는 와중에, 나는 한가하게 영화 한 편을 볼 수 있었다. 주인공인 조인성과 주진모, 그리고 유하 감독의 얼굴까지 본 것은 차라리 덤이었다. 쌍화점이 만두가게이고, 이것이 고려 충렬왕 때 지어진 노래라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다 안다. 만두를 사러간 여인의 손을 잡는 회회아비, 그 남녀간의 ‘상열지사’에서 우리는 인간의 사랑과 육체 관계(왜 ‘섹스’란 용어를 쓰면 사람들이 천박하게 보는지 잘 이해는 안되지만, 학회 홈페이지 올리는 것이니까 점잖은 용어를 써보자)를 떠올리게 된다. 이것이 영화 제목이다. 당연히 우리는 이 영화가 지향하는 인간의 문제를 여기서 출발할 수 있다. 영화는 공민왕(주진모)과 부인 노국공주(송지효), 그리고 공민왕의 총애를 받는 건룡위 대장인 홍림(조인성) 등의 세 사람 사이에서 벌어지는 사랑과 질투의 변주곡이다. 공민왕과 노국공주는 정략 결혼을 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애정이 약하고, 형식적 사이처럼 보인다. 공민왕이 먼저 알았던 사람은 홍림이다. 두 사람의 관계는 두 사람만이 알 뿐이라는 신윤복 그림의 화제(畵題)처럼, 이 둘의 관계가 상식 밖이다. 홍림은 공민왕이 젊은 시절에 자신을 호위하기 위해 만든 건룡위에서 처음 만났다. 공민왕은 홍림과 같이 무술을 수련했는데, 같이 했다기 보다 가르쳤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이 점은 영화 끝의 두 사람의 대결을 이해하는 중요한 키워드다. 두 사람 사이는 동성애 관계다. 그러나 공민왕이 홍림에 대한 사랑이 정신적이고 육체적인 애정이라면, 홍림의 공민왕에 대한 사랑은 충성을 바탕으로 한다. 따라서 좀 다르다. 이 점은 영화 후반부 홍림의 고백에서 드러난다. 공민왕 역시 홍림이 자신을 사랑하는 것을 충성의 일환으로 본다. 이 둘을 이어지는 매개가 등장한다. 그것이 공민왕이 그렸다는 ‘천산대렵도’다. 이 그림은 공민왕이 그렸다고 전해지는 것인데, 영화에서는 두 사람이 같이 말을 달리며 활을 쏘아야 하는 것으로 등장한다. 영화를 보지 않은 분들은 이 말의 뜻이 잘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영화의 ‘천산대렵도’ 그림에는 공민왕 한 사람 만이 활을 쏘고 있고, 그 옆의 홍림은 나란히 말을 달리는 장면을 그린 것으로 되어 있다. 이것이 두 사람의 파국을 예고한다. 파국의 계기는 원나라 사신의 도착이다. 원나라 사신은 공민왕이 자식이 없음을 이유로 후계자를 지정하고자 한다. 자신의 위치가 흔들릴 것을 염려하는 공민왕. 그가 생각한 방법이 홍림과 노국공주 사이에서 아이를 낳게 하는 것이다. 두 사람 모두 국왕의 명령으로 시작한 잠자리는 처음엔 어색했지만, 진정한(?) 사랑으로 발전한다. 육체적 관계가 남녀 사랑의 근간인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이것은 분명 공민왕과 홍림의 동성애와 대비된다. 노국공주가 홍림을 사랑하는 정표는 두 가지다. 직접 만들어준 두건과 만두였다. 이렇게 노국공주와 홍림의 관계가 가까워질수록, 공민왕과 홍림의 관계는 멀어지는 쌍곡선이 그려진다. 그럴수록 홍림에게 더욱 집착하는 공민왕. 질투의 변주곡이 시작되는 것이다. 비극은 잉태되고, 여기에 더해 공민왕을 제거하는 음모와 공민왕의 반격이 이어진다. 그런데 영화의 스토리를 다 얘기하면 혹 나중에 보실 분들이 재미 없을 것 같다. 역사학을 공부하는 입장에서 보면 영화 쌍화점은 분명히 사극이 아닐 수 있다(역사적 사실과 드라마가 결합된 팩션의 장르다). 역사적 사실은 뒤 섞이고, 등장 인물 역시 공민왕 노국공주 만이 실존 인물이다. 이는 의도적이다. 자제위의 이름이 건룡위로 바뀌고, 만들어진 시기 역시 맞지 않는다. 심지어 공민왕을 죽인 홍림은 실제 홍륜이란 인물이고, 유명한 시중(요즘의 수상격) 홍언박의 손자란 점도 고려시대를 조금 아는 사람은 다 안다. 더구나 그 유명한 신돈은 영화에 그림자도 비추지 않는다. 특히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지극한 사랑에 대해 아는 사람들은 더 많다. 이런 통념들 때문에 감독은 이름을 바꾸고, 역사적 사실에서 모티브만을 따왔을지 모른다. 나는 역사학자들이 이런 점을 가지고 열을 낼 필요는 없다고 본다. 물론 그렇다고 모든 것을 양보할 수는 없다. 역사학자로서가 아니라 관객의 입장에서 나는 원나라 사신의 후계자 지정으로 인한 파국의 시작이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원나라의 입장에서 후계자 지정을 서둘러야 할 당위성이 영화 속에서는 잘 보이지 않았다. 여기에는 공민왕이 원나라에 반대한 반원 개혁의 선봉자였다는 역사적 관념이 강하게 깔여 있다고 나는 느낀다. 공민왕이 원나라 제도를 고려식으로 돌리려 했다는 것은 모두가 안다. 그렇다고 공민왕이 원나라에 반대했을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그는 반원 개혁 후에도 원나라와 외교관계도 다시 맺었다. 공민왕은 자신의 권력 유지에 집착했던 인물이다. 삼수 끝에 왕위에 오른 공민왕은 즉위해서 충정왕을 독살했다(자기 손으로 직접 죽인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면 할 말은 없다). 이후로도 그는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수 많은 쿠데타 속에서도. 그러면서 공민왕은 어떤 세력도 끝까지 믿지 않았다. 그는 단지 사람들을 권력 유지에 이용했을 뿐이다. 나는 심지어 역사 속에서 노국공주와의 사랑도 때로 의심이 간다. 혹 공민왕이 공주 추모사업을 정치적으로 이용해 먹은 것은 아니었는지 말이다. 흥분하시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가 공민왕을 ‘인간’이란 차원에서 보았을 때의 한 시각일 뿐이다. 오히려 영화 속에서 공민왕의 질투와 광기는 좀 미약했다. 그가 홍림을 소유하고 싶어할수록, 이 소유욕이 권력욕과 변주를 이루었다면 나는 더욱 웅장하게 이 영화를 보았을 것 같다. 이 영화가 「맥베드」와 같은 비극이지만, 이 비극은 어딘가 허전하다. 그 이유는 좀 더 고민을 해보아야 할 것 같다. 원문출처 : http://www.koreanhistory.org/ |
출처: 책을 벗 삼아 원문보기 글쓴이: 문화재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