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양<金陽>
김 양의 자는 위흔이니, 태종대왕의 9세 손이다. 증조는 주원 이찬이오, 조부는 종기 소판이오, 부친은 정여 파진찬이니 대대로 모두가 장상이었다. 양은 태어날 때부터 영특하였다. 태화 2년, 흥덕왕 3년에 고성군 태수가 되었으며, 얼마 뒤에 중원 대윤으로 임명되었다가 곧 무주 도독으로 전직되었는데, 가는 곳마다 정치를 잘한다는 칭송을 들었다.
개성 원년 병진에 흥덕왕이 죽고 그를 계승할 적장자가 없자 왕의 당제 균정과 당제의 아들 제륭 간에 왕위 쟁탈전이 벌어졌다. 이 때 양은 균정의 아들인 아찬 우징과 균정의 매부인 예징과 함께 균정을 왕으로 세워 적판궁에 들어가 사병으로 숙위케 하였다. 그 때 제륭의 도당인 김 명, 이 홍 등이 적판궁을 포위하였다. 양은 군사들을 궁문에 배치하여 그들을 막으면서 말했다. "새 임금이 여기 계시는데 너희들이 어찌 이토록 흉악하게 거역할 수 있느냐?" 그는 드디어 활을 당겨 10여 명을 쏘아 죽였는데, 제륭의 부하 배 훤백이 양을 쏘아 다리를 적중시켰다. 균정이 말했다. "저 쪽은 군사가 많고 우리는 군사가 적으므로 그 세력을 막을 수 없다. 공은 물러나는 체하여 후일을 도모하라!" 이에 양이 포위를 뚫고 나와서 한기(韓岐)[한기(漢祈)라고도 한다.]시에 이르렀고, 균정은 반란군에게 살해되었다. 양은 하늘을 향하여 통곡하면서 해를 두고 결심을 다진 다음, 아무도 모르게 산야에 숨어서 때가 오기를 기다렸다.
개성 2년 8월이 되자 전 시중 우징이 남은 군사를 수습하여 청해진으로 가서 대사 궁복(장 보고)과 손을 잡고 불공대천의 원수를 갚고자 하였다. 양은 이 말을 듣고 참모와 병졸들을 모집하여 3년 2월에 해중으로 들어가 우징을 만나 그와 함께 거사할 것을 모의하였다. 3월에 정예군 5천 명을 거느리고 무주를 습격하여 성 밑에 다다르니 고을 사람들이 모두 항복하였다. 그들은 계속 진군하여 남원에 이르러 신라군과 싸워 승리했다. 우징은 군사들이 오랫 동안 싸워서 피로해졌다 하여 다시 해진으로 돌아가서 병마를 휴양시켰다. 겨울에 혜성이 서쪽에 나타났는데 광채나는 꼬리가 동쪽을 가리키니 여러 사람들이 서로 축하하며 말했다. "이는 낡은 것을 없애고 새 것을 펴며, 원수를 갚고 치욕을 씻을 좋은 징조이다." 양을 평동장군이라 하였다. 12월에 재차 출동하자 김 양순이 무주 군사를 거느리고 왔으며, 우징이 또한 용사들인 염 장, 장 변, 정 년, 낙 금, 장 건영, 이 순행 등 여섯 장수를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오자 군사의 위풍이 막강하였다. 북을 치며 행군하여 무주 철야현 북쪽에 도착하니, 신라 대감 김 민주가 군사를 출동시켜 대항하였다. 장군 낙 금과 이 순행이 기병 3천 명을 거느리고 상대 군중으로 뛰어들어 그들을 모두 살상하였다.
4년 정월 19일, 양의 군사가 대구에 도착하자 왕이 군사를 보내 항거하였다. 양의 군사가 이들을 역습하니 왕의 군사가 패배하여, 양에게 생포되거나 죽고 노획 당한 것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이 때 왕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이궁으로 도망쳐 갔으나 군사들이 곧 찾아서 살해하였다. 양이 이에 좌우 장군에게 명하여 기사를 인솔하게 하고 널리 알렸다. "이 싸움은 본래 원수를 갚기 위한 것이었다. 이제 그 괴수가 죽었으니 의관, 사녀, 백성 모두는 각자 안심하고 살 것이며 망동하지 말라!"
그가 드디어 서울을 수습 정돈하니, 백성들이 마음을 놓고 살게 되었다. 양이 훤백을 불러 말했다. "개는 저마다 제 주인이 아니면 짖는 법이다. 네가 네 주인을 위하여 나를 쏘았으니 의사로다. 내가 탓하지 않을 것이니 너는 안심하고 두려워하지 말라!" 여러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말했다. "훤백에게도 저렇게 하니 다른 사람이야 무엇을 근심하랴?" 그들은 감복하며 기뻐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4월에 왕궁을 깨끗이 정리하고 시중 우징을 맞아 들여 왕위에 오르게 하니, 이가 신무왕인데, 신무왕이 7월 23일에 죽고 태자가 뒤를 이으니 이가 문성왕이다. 양의 공로를 추가로 기록하여 소판 겸 창부령을 제수하고, 다시 시중 겸 병부령으로 전임시켰다. 당에서 빙문하고 동시에 공에게 검교 위위경을 제수하였다.
대중 11년 8월 13일에 양이 자기 집에서 죽으니 향년 50세였다. 부음이 알려지니 왕이 슬퍼하며 서발한을 추중하고, 부의와 염장을 모두 김 유신의 장례 때와 같게 하여, 그해 12월 8일에 태종대왕의 능에 배장하였다.
양의 종부형 흔은 자가 태이며 부친 장여는 벼슬이 시중 파진찬에 이르렀다. 흔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영특하였으며 학문을 좋아하였다. 장경 2년에 헌덕왕이 당에 사신을 보내려 했으나 적당한 사람이 없었다. 어떤 사람이 김 흔을 추천하면서 말하기를 "이는 태종의 후예요, 두뇌가 총명하며, 도량이 깊고 침착하니 뽑아 보낼 만하다"고 하므로 드디어 그를 당에 보내 숙위하게 하였다. 그가 한 해 남짓 당에 있다가 귀국하기를 청하니 황제가 조서로써 금자 광록 대부 시태상경을 제수하였다.
그가 귀국하자 국왕이 그가 왕명을 욕되게 하지 않았다 하여 특별히 남원 태수를 제수하였고, 그 후 여러 번 자리를 옮겨 강주 대도독에 이르렀으며, 얼마 안 되어 이찬 겸 상국 벼슬을 더 주었다.
그는 개성 기미 윤 정월에 대장군이 되어 군사 10만을 거느리고 대구에서 청해진의 군사를 방어하다가 패전하였다. 그는 스스로 생각하기를 전쟁에서 패하였고 또한 전사하지도 못하였다 하여 다시는 벼슬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소백산에 들어가 칡옷을 입고 나물밥을 먹으며 중들과 함께 지내다가 대중 3년 8월 27일에 병으로 인하여 산재에서 죽었다. 향년 47세였다. 그 해 9월 10일에 나령군 남쪽 언덕에 장사하였다. 아들이 없어서 그의 부인이 상사를 주관하였는데 그녀는 후에 비구니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