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비규환」
이대용 공사 역시 미국 측의 「전원 철수」약속을 믿고 안심하고 있었다.
(이대용씨의 회고)
-「 30일 0시가 지난 후 통용문이 활짝 열리고 별관에 남은 사람이 모두 본관으로 들어갔다…. 본관 정원에는 약 9백 명으로 추산되는 인원이 네모지어 동쪽과 북쪽 두 곳에 앉아 탑승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헬리콥터 이착륙장에는 2대의 헬리콥터가 약 30분 간격으로 와서 인원을 실어가고 있었다. 4월 30일 새벽 4시 15분경, 한국인 집단 바로 앞줄 사람들과 한국인 일부(안병찬 기자도 포함되어 있었다)가 헬리콥터를 타고 미 7함대로 떠났다.
한국인들이 무더기로 탑승할 차례가 왔다고 모두들 안도의 숨을 쉬고 있었다. 바로 이 때였다. 대사관 경비와 민간인 철수를 통제하고 있던 미 해병들이 갑자기 수상한 거동을 보이더니 우방 국민들 약 4백 50명을 향해 최루탄을 터뜨려놓고 등을 돌려 화살같이 현관 쪽으로 달아나는 것이었다.」-
「나는 대한민국 공사다. 장성이다. 너희들 지휘관은 어디 있느냐?」그는 해병들의 뒤를 따랐다. 그들과 함께 대사관 본관으로 진입할 수 있는 기회는 아직 있었다. 그렇게 하면 옥상을 통해 미 해병과 함께 탈출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남아있는 약 1백40명의 한국인들을 생각하고, 그곳에 지휘자가 없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는 발길을 돌렸다. 그러자 최루탄 연기 속에서 누군가가 「이곳에 시한폭탄이 장치되어 있다」고 소리쳤다.
그 소리에 모두들 미 대사관을 벗어나느라고 또 한 번의 아비규환이 연출되었다. 이 어설픈 탈출극으로 월남 최후의 새벽은 대단원의 막을 내리고 말았다. 남지나해상 미 7함대의 항공모함에 분산 수용되어 있던 한국 공관원들은 서로의 안부가 궁금하고 안타까워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수소문을 하고 있었다. 김영관 대사와 이달화 소령이 유독 그랬다.
「항공모함 통신실로 가보니 굉장히 바쁘게 설치고 있었다. 대위 한 사람을 붙들고「우리 대사가 어디 있느냐」고 수소문해 줄 것을 부탁했다. 대사는 해군 참모총장 출신이었기 때문에 7함대의 귀빈으로 환영받았던 탓으로 금방 소재가 밝혀졌다.
내가 탄 항모가 행코크호였는데 대사는 오키나와호로 옮겨져 있었다. 오키나와호로「우리 공관원 10명이 못 나왔으니 긴급 조치해 주시오」하는 내용의 전문을 보냈다.
잠시 후에 또 통신실로 가서 방콕에 있는 미국 대사관 무관을 통해 한국 무관을 경유하여 서울의 윤홍정 정보국장에게 닿을 수 있도록 복잡한 경로의 전문을 보냈다. 내용은 정대령을 비롯 국방부 소속 요원은 전원 철수했다는 요지였다. 그래 놓고 식당으로 가니 마침 스피커에서 「이소령」을 찾는 방송이 나왔다.
갑판으로 올라가니 나를 데리러 헬기가 한 대 와 있었다. 김대사가 보낸 것이었다. 대사는 내 전문을 받고 곧장 7함대 기함 미드웨이호로 날아가 마틴 대사를 만난 후 방금 오키나와호로 되돌아오는 길이었다.
대사는 나에게 「방금 마틴 대사를 만나니 자기가 한국 대사관원을 모두 철수시키고 나왔다고 하던데 대체 무슨 소리냐」고 물었다. 내가 사정을 얘기하자 대사는 큰 주먹을 내리치며 「그럴 수가」하고 통탄해 했다.」-
김대사와 이소령이 있는 오키나와호는 한국 공관의 「임시 해상본부」가 됐다. 여기서 7함대의 18척 함정에 모두 전문을 보내 「한국인은 모두 신고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이어 보고를 받았다. 그 내용은 그대로 서울의 TV에 방영되어 가족들에게 전달되었다.
(이달화씨의 증언)
「항공모함은 붕 타우 밖의 바다에서 왔다갔다하며 마치 잃어버린 물건을 찾는 양, 또는 아쉬움이라도 남은 것처럼 하루를 머물렀다. 그 사이에 월남 해군들이 똑딱선을 타고 탈출하여 항모로 기어올라오고, 미 공군 헬기는 끊임없이 오르락 내리락하고…. 마침내 수많은 헬기가 용도 폐기되어 바닷속으로 내던져졌다. 전쟁이 끝난 것이었다.」
▣ 마틴 미 대사의 잘못된 판단 ▣
항모로 철수한 사람들의 일부는 필리핀의 수빅만으로 옮겨져 그곳에서 곧장 서울로 날아왔고, 일부는 오키나와의 수용소로 옮겨졌다가 귀국한다. 김대사와 이달화 소령은 전자의 경우였다. 이소령은 수빅만에 내려 클라크 공군기지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전부터 묘한 인연이 있던 서머스 중령과 다시 조우한다. 이소령은 서머스 중령에게 「월남에 남아 있는 한국인들을 구출해달라」고 간청했다.
그러자 서머스 중령은 이소령을 비행기 안 화장실로 데려가 가방 속에서 미국 측의 철수작전에 대한 보고서 사본을 건네줬다. 그 보고서에는 미 대사관 요원들이 30일 새벽 4시 45분, 한국인, 미대사관 고용원 일부를 포함한 잔류자를 뒤에 남겨놓은 채 서둘러 철수작전의 막을 내려버린 잘못을 「마틴 미 대사의 조급한 판단 때문」으로 적고 있다.
마틴이 왜 그런 실수를 했을까? 아직 시간을 충분했는데 그 엄청난 미국의 힘을 어디 두고 왜 그렇게 서둘렀을까? 그 어설픈 철수작전의 가장 큰 피해자였던 이대용씨는 이렇게 분석하고 있다.
-「마틴이 큰 실수를 했다. 그는 아마 새벽에 베트콩이 사이공강을 건너왔다는 허위보고를 받고 정신이 나갔던 모양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새벽 4시 30분에 철수를 중단시킬 이유가 없었다」-
이대용씨는 베트콩의 노획문서 등 당시의 여러 정보를 종합해 볼 때 베트콩의 사이공 진입 예정일은 5월 2, 3일로 계획되어 있었던 것이 확실하다고 했다. 그런데도 4월 30일 이전에 공황 상태가 일어난 것은 탄손누트 공항에 대한 반란군의 공격으로 철수로가 좁아졌고, 마지막으로 4월 30일 새벽에는 「베트콩이 다리를 건너고 있다」는 허위정보 때문에 결정적으로 일을 그르치게 되었다고 했다.
미국의 일부 월남전 보고서적들이 「새벽 4시에 베트콩이 다리를 건넜다」고 쓰고 있는 것은 모두 허위라는 것이 이씨의 주장이었다.
그러면 베트콩들은 어디까지 진격해 있었던 것일까?
사이공강 건너 뚜 덕에 들어와 있었다고 이씨는 말한다. 뚜 덕 다리에서 독립궁까지는 2분도 채 안 걸리는 거리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진격할 수 있는 위치에서 베트콩들은「약속의 날」인 5월 2일까지 대기하고 있었다.
▣ 제풀에 놀란 미국 ▣
그러나 제풀에 놀란 미국 측이 서둘러 빠져나가느라 북새통을 치고, 여기에 베트콩이 흘린 가짜 정보에 화다닥 놀라 새벽 4시 30분에 우방국의 공관원들마저 팽개치고 철수를 끝내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했다는 것이 이씨의 분석이었다. 그럼 베트콩은 과연 언제 사이공에 진입한 것일까?
현지에 남아 있었던 사람들은 베트콩의 사이공 진입시간을 4월 30일 정오경이라고 말하고 있다. 철수가 중단된 뒤로부터 베트콩이 들어오기까지 약 8시간의 공백이 있었다.
이 시간을 이용하여 이대용 공사를 지휘자로 삼은 한국인 잔류자들은 일본 대사관, 프랑스 대사관 등을 전전하며 안전하게 숨을 곳을 찾을 여유가 있었고, 그 와중에 한 사람도 사상자를 내지 않는 행운을 얻을 수 있었다.
결국 월남 패망일의 사이공에서 바라본 시각으로는 「미국은 병든 나라이며, 덩치 값을 못하고 서두르다 월남전 사상 최대의 수치스런 대미를 장식했다」는 것이 이씨의 평가였다. 모든 책임은 미국에게 있다는 것이었다.
김영관씨도 「당시 미국 CIA의 판단과 행동은 지금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당시 외무부 아주국 심의관으로 본분에서 월남 철수를 초조하게 지켜봤던 공로명 외교안보연구원장은 한국 대사관의 입장에서 「완전 철수」에 실패했던 원인을 이렇게 꼽는다.
첫째 교포들이 적지에 붙들리는 것과 공관원이 붙들리는 것은 차원이 다른 얘기다. 따라서 공관원들은 교포들 철수만을 생각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철수부터 먼저 생각했어야 옳았다. 그런 점에서 일부에서 김영관 대사에게 「혼자 먼저 떠났다」고 비난한 것은 옳은 생각이 아니다. 대사는 대사로서 행동을 해야 하고 김대사는 당연히 그 지침에 따랐을 뿐이다.
둘째, 마지막까지 남아 공관의 짐이 되었던 2백∼3백 명의 우리 교민들에 대해 원망스러운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패망하는 나라에서 일확천금을 꿈꿀 것이 아니라 LST편으로 전원 철수해야만 했다. 그들이 철수했더라면 우리 공관원들이 그토록 곤욕을 치르지 않았을 것이다.
공로명씨의 말에 따르면 한국 공관원의 완전철수 실패는 그 원인이 일차적으로 교민들의 이기심 때문이고, 두 번째는 역설적으로 우리 공관원들의 동포애 때문이었다는 풀이가 된다. 그리고 이것은 앞에서도 한번 살펴본 것처럼 좀처럼 정답을 구하기 어려운 문제이다.
공관원이 그 신분상의 문제 때문에 민간인들보다 일찍 철수해야 하느냐? 최후까지 남아 동포들을 다 내보내는 역할을 담당해야 하느냐? 하는 것은 입장에 따라 다른 대답을 내놓을 수 있는 까닭이다.
끝까지 남았다가 적의 수중에 잡히면 국가의 큰 부담이 되고, 일찍 떠나버리면 「도의적인 견지에서」 비난을 받기 쉽기 때문이다.
공로명 원장은 그러나 「공관원은 먼저 철수해야 한다」는 원칙을 강조했다. 국가에 짐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 「지금도 속죄하며 살고 있다」 ▣
1975년 4월 30일, 청와대에서는 박정희 대통령이 김동조 외무장관으로부터 김영관 대사가 무사히 철수했다는 보고를 받고 즐거워하고 있었다.
박정희 「김대사 들어오거든 즉시 다른 곳에 대사로 내 보내시오」
김동조 「현재로서는 자리가 나지 않습니다」
박정희 「거 왜 있잖아. 한병기(칠레 대사) 불러들이고 그쪽으로 보내면 되지않소
대통령의 김대사에 대한 신뢰는 아주 컸다. 사위를 불러들이고 그 자리에 내보낼 생각을 했을 정도니까.
이 소식은 외무부 총무과장을 통하여 김대사의 부인에게도 전해졌다. 그러나...
바로 그 다음날 박대통령은 월남에서 날아온 한 통의 눈물겨운 전보를 받는다.
9명의 공관원, 1백 40명의 교민들과 함께 적지에 떨어진 이대용 공사가 보낸 비장한 내용의 전보였다.
이 전보를 받은 날로부터 박대통령은 한시도 이공사의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대신 철수하여 돌아온 김대사에게는 상대적으로 곱지 않은 감정을 갖게 되었고 그의 귀국인사조차 받으려 하지 않았다. 김대사는 공관원 다수를 적지에 남겨놓은데 대한 도의적 책임을 지고 대사직을 사임, 야인이 되고 만다.
그런 후 지금까지 그는 「월남 최후의 날」에 대해 줄곧 입을 다물어 왔다. 김영관씨는 당시「완전철수」에 실패한 총체적 책임은 대사였던 자신에게 있으며 「지금도 고생했던 공관원들과 그 가족들을 생각하며 속죄하며 산다」고 했다.
한편 사이공 탈출 헬기를 타지 못하고 적지에 남은 한국 교민 1백 40병은 나중에 1백 65명으로 증가, 공관원 이대용 공사, 김창근 서기관, 이규수 참사관, 안희완 영사, 신상범 서기관, 서병호 영사, 김경준 영사, 김교양 통신사, 양종렬 통신사 등 9명의 공관원들이 공산화된 사이공(호치민시로 개칭)에 남아 겪은 참담한 억류의 세월에 대한 이야기는 별도의 장으로 기록되어야 할 부분이다.
간단히 그 귀추를 정리해 보면 이들은 미 대사관을 떠난 직후부터 이공사의 지휘 하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일본 대사관, 프랑스 대사관 등에 보호를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한 이후 환 딘풍가 53번지의 프랑스인 소유 건물에 머물면서 한국인으로서의 긍지를 잃지 않고 의연하게 지내다가 국제적십자사 등의 노력에 의하여 최고 1년여만에 모두 조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1년뒤에는 귀국했으나 돌아올 수 없는 사람들이 있었으니 이대용 공사, 서병호 영사, 안희완 영사 세 사람이 그들이었다. 이들은 대사관 내에서 정보업무를 다루는 특수한 신분이었기 때문에 월남 당국에 의해 체포되어 5년 가까이 공산국가의 감옥에서 불안하기 그지없는 감옥살이를 하게 된다.
(김상우 목사(LA 거주)의 증언)
-「1975년 10월 1일, 우리나라의 국군의 날 저녁이었다. 이공사가 나에게 「꿈이 이상하다. 목사님, 혹시, 상황이 잘못되어 내가 못 나가게 되거든 대통령에게 김대사에게는 잘못이 없으며 내 잘못으로 철수를 못하게 되었으니 죄송하다고 말해 주시오. 나는 죽어도 조국을 사랑한다는 말과 함께」...그런 말을 했다. 내가 「이제 유언입니까?」하자 그는 「유언」이라고 분명히 말했다. 그 다음 다음날인 10월 3일 이공사는 구속됐다」-
▣ 부담을 안게 된 한국 정부 ▣
이공사와 다른 두 요원의 구속은 한국 정부와 박대통령에게 엄청난 외교적 과제를 안겨줬다. 이들이 평양으로 끌려가기라도 하는 날에는 어찌할 것인가? 이공사는 1급비밀 취급자였고, 나머지 두 사람은 2급비밀 취급자였다.
우선 정부는 우리의 우방국 중에서 공산 베트남과 외교관계가 있는 나라, 주로 프랑스의 외교루트를 통해 옥중의 이공사에게 편지를 전달할 수 있도록 백방으로 노력을 기울였다.
옥중에 있는 사람의 불안 중 가장 두려운 것은 「미래를 알 수 없다」는 심리상태에서 오는 절망감이다. 따라서 본국정부가 손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이공사에게 알리는 것은「희망」을 심어주는 것이므로 아주 중요하다.
마침내 선이 닿았고, 이공사는 본국에서 보내 온 편지와 의약품을 전달받았다. 그리고 편지를 써서 본국으로 보내오기도 하였다.
그동안 이공사는 적지의 감옥에서「조국을 배반하는」, 말하자면 「자백」같은 것을 일체 하지 않고 외교관의 신분임을 내세워 꼿꼿하게 견뎠다. 이렇게 견딜 수 있는 사람은 특수신분의 외교관들 중에서도 아주 보기 드문 예인데 이공사는 인간으로서 하기 힘든 일을 해낸 것이다.
북한에서 두 번이나 심문관이 와서 이공사를 심문했다. 그러나 저들이 평양으로 데려가서 심문하겠다는 제의는 공산베트남 정권이 단호히 거절했다. 베트남 정권은 자주성이 강했고, 자존심이 깊었다. 이 점은 이공사 일행을 위해 크게 다행한 일이었다.
1978년이 되자 공산 베트남 정부는 한국의 끈질긴 석방교섭에 대하여 「북한이 동의하면 석방하겠다」고 가능성을 엿보였다. 즉시 한·월·북한의 3자회담이 극비리에 뉴델리에서 열렸다.
근 1년이나 끌어온 이 회담은 성과가 없었다. 북한이 내세운 조건이 너무 황당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이 회담에 관여한 외무부 인사는 「북의 요구는 당연히 남파간첩과 교환하자는 것이었다. 그 조건이 합당했으면 박대통령은 응했을 것이다. 그러나 1대 1의 교환이 아니라 엄청난 것을 요구하는 바람에 무산됐다. 결국 북한은 비현실적 수확을 꿈꾸다가 아무 것도 얻은 것이 없었다」
3자회담에 참석한 공산베트남의 대표조차도 북한의 황당무계한 요구에 인상을 찌푸리며 우리측 입장에 내심 동조했을 정도였다.
결국 박대통령의 「무슨 일이 있어도 이공사를 구출하라」는 엄명에 따라 아이젠버그를 중간에 넣어 비로소 구출작전을 성사시키게 된다. 도중에 박대통령은 서거했으나 전두환 합수본부장이 이 「사업」을 인수하여 계속 추진하였다.
▣ 월남에 대한 애정 ▣
형식적으로는 스웨덴 외무차관 레이프랜드와 외무부 비서실장 넬슨이 이공사를 인수해 가는 것으로 되어 있었으나 아이젠버그의 하노이 지사장이 구출작전의 실무를 맡아 수행했고, 베트남을 떠날 때도 아이젠버그의 개인 비행기를 이용했다. 아이젠버그는 한국 정부와 벌이는 「사업」이 많았던 때였으므로 이 역할을 기꺼이 수행한 것이었다.
「월남 최후의 날」에 대한 이야기를 모으면서 김창근 서기관의 대탈출극을 빼놓을 수 없다.
김서기관은 철수에 실패하고 뒤떨어진 지 사흘 만인 5월 2일, 사이공을 탈출하여 붕 타우까지 죽음의 여행을 한 후, 붕 타우에서 해상 탈출에 성공한 장렬한 드라마 속의 주인공이다.
그러나 나머지 한국 공관원들과 교민들 전부는 이 탈출극의 성공 가능성에 의문을 품고 아무도 따라 나서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이 「영웅」의 이야기를 기억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 「베트남 엑소더스」의 주인공들 대부분에게 공통된 점이 하나 있었다. 그토록 사선을 넘는 고생을 했으면서도 월남과 월남 사람들, 심지어 오늘날의 공산화된 월남 정부에 대해서조차 적대감을 느끼지 않을 뿐 아니라 따뜻하게 흐르는 그 어떤 정감을 느끼고 있다는 놀라운 사실이 그것이었다.
이에 대해 주월 대사관에서 오래 근무한 경력이 있는 경창헌 외교안보연구원은 「월남 사람들의 섬세함과 한국인의 진취적 성격이 아주 잘 어울리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월남 사람들은 아주 자존심이 강하고 합리적 사고를 지닌 신사들이다. 그러나 왠지 한국사람들에게는 순하고 친밀하다. 한국사람들도 월남사람들에게는 금방 친척을 만난 것 같은 포근함과 신뢰감을 느끼게 된다.
두 나라의 관계는 한번 맺어지기만 하면 급속하게 발전될 것이다」★
-------------------------------------------------------------------------------- 통일의 교훈은 독일보다 월남에서 찾아야 -이대용-
월남 패망시의 駐越 한국대사관 경제담당 공사로서 현지의 교민철수 임무수행 후 월맹군에 체포돼 5년간 억류생활을 한 쓰라린 경험이 있는 전임 육사 총동창회장 이대용장군의 글을 아래에 옮깁니다. 통일의 교훈은 "우리와 역사·문화적 배경이 다른 독일에서 찾는 것보다는 유사한 환경이었던 월남의 패망에서 찾는 것이 더욱 현실적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월남과 한국은 일란성 쌍둥이
우리와 월남의 역사는 너무나 닮은꼴이다. 그래서 평소 나는 한국과 월남을 일란성 쌍둥이라고 표현한다. 우리가 역사를 표현할 때 흔히 「반만년 배달민족」 이라고 하는데, 월남은 「반만년 황룡(黃龍)의 후손」 이라고 말한다.
세계사적으로 보아도 국가 체제를 이룬 역사적 시기도 비슷하고, 중국이 팽창하면 조공(朝貢)을 바치다가 중국이 혼란에 빠지면 자주독립을 유지하는 것도 비슷하다. 중국의 주변 민족으로서 끝까지 한족에 동화되지 않고 살아온 점 역시 같다.
월남이란 지명은 중국 전국시대에 월족이 인도차이나 반도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 세운 나라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전 세계에서 과거제로 관료를 선발하는 문치주의의 나라는 그 제도의 본고장인 중국을 제외하면 조선과 월남이 대표적인 표본이다.
모든 역사와 인명을 한자로 기록한 것도, 중국의 주변부에서 민족이 소멸 당하지 않고 생존한 것도 양국이 비슷하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한국은 한번 성립된 왕조는 그 수명이 보통 400∼500년인데 비해 월남은 120년으로 우리보다 상당히 짧다는 점이다. 그것은 월남 민족이 우리 민족보다도 분열이 더욱 심했다는 뜻이다.
중국의 지배권에 있다가 식민지를 경험한 것도 비슷하며, 식민지에서 해방될 때 남북의 허리가 잘려 분단된 사실, 그리고 북에는 공산정권, 남에는 자유 민주정권이 수립된 것 역시 비슷하다. 양측이 무력을 동원한 동족상잔의 전쟁을 벌인 사실도 동일한 역사적 패턴을 보인다.
지역 감정이 드센 것, 식민잔재 청산 문제(한국은 친일파, 베트남은 친불 친일 친중파)로 인한 정통성 논쟁, 각 정치 세력간의 끝없는 분파(分派)와 이합집산, 그리고 정쟁을 벌이는 것까지도 어찌 그리 닮은꼴인지 모른다.
1954년 7월 21일 프랑스 원정군이 베트남 독립군에게 패해 프랑스가 물러가면서, 제네바 협정에 따라 북위 17도선 이남에는 자유 민주주의 정부인 베트남 공화국(越南)이, 그리고 이북에는 공산정부인 베트남 민주공화국(越盟)이 수립됐다 .
이후 월남은 독자적인 힘으로 자주국방을 하지 못해 미군의 도움을 받았고, 결국에는 미군을 중심으로 연합군이 파병돼 공산군과 싸운 것까지 한국과 비슷하다. 청렴결백했지만 독재로 기울었던 고 딘 디엠 정권이 쿠데타로 쓰러지면서 수차에 걸쳐 군부 쿠데타가 반복되었다.
이 와중에 정권은 부패와 내부분열을 거듭했다. 전쟁에 지친 미국이 월맹과 휴전을 위한 비밀협상에 돌입한 것은 1968년 5월 10일이다. 그 무렵 미국은 직접전비(直接戰費)와 간접전비를 합쳐 연간 495억 달러(1968년), 508억 달러(1969년)를 퍼부었고 미군 병력도 53만 6,000명 선을 파병할 정도로 전쟁의 절정을 이루던 시기다. 미국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식으로 진행되는 베트남戰에 진저리를 쳤고, 결국 수렁에서 발을 빼기 위해 월맹의 레둑토와 비밀 협상을 시작한 것이다.
파리에서 미-월맹 간 비밀 협상이 시작되기 전 해인 1967년 9월 3일에 벌어진 월남 대통령 선거에는. 무려 11명의 입후보자가 난립하여 이전투구(泥田鬪狗) 양상을 보였다. 이 선거에서 당선자인 웬반티우에게 차점(次點)으로 낙선한 야당 지도자 쭝딘쥬는, 선거 유세에서 「동족상잔의 전쟁에서 시체는 쌓여 산을 이루고 있다. 우리 조상이 이처럼 외세(外勢)를 끌어들여 동족들끼리 피를 흘리는 모습을 하늘에서 내려다보며 얼마나 슬퍼하겠는가. 월맹과 대화를 통해 얼마든지 평화 협상이 가능한데, 왜 북폭(北爆)을 하여 무고한 인명을 살상하는가. 내가 대통령에 당선되면 북폭을 중지시키고, 평화적으로 남북문제를 해결하겠다」 고 주장하며 미국과 월남 국민들의 반전(反戰) 여론을 자극했다. 이처럼 월맹에게 호의적이던 그가 공산군의 프락치였음이 밝혀진 것은 월남 패망 후의 일이다.
한편 미국과 월맹이 파리에서 비밀 평화 회담을 진행 중인 사실이 알려지면서, 월남 내부에서는 국론(國論)이 두 갈래로 갈렸다. 여당은 강력한 반공정책을 주장하며 평화회담 참여 거부를 주장한 반면, 야당은 앞다투어 포용정책을 들고 나와 정부에 압력을 가하고 회담 참여를 지지했다. 고민에 빠진 월남 정부는 어쩔 수 없이 회담 테이블에 나가야 했고, 1969년 1월 15일부터 미-월맹 2자 회담은 미-월남-베트콩(베트남 인민해방전선. 후에 베트남 임시혁명정부)-월맹의 4자 회담으로 확대되었다.
한쪽에선 평화회담, 다른 쪽에선 대남(對南)공작
1973년 1월 27일 프랑스 파리에서는 5년여 협상 끝에 베트남전을 종식하는 역사적인 휴전 회담이 열렸다. 이 휴전의 담보를 위해 키신저는 월맹에 40억 달러(20억 달러는 미국 직접원조, 20억 달러는 국제은행(IBRD) 차관)의 원조를 제공, 이것으로 피폐한 월맹의 경제 재건을 돕기로 하고 교전 당사국인 미국 월남 월맹 베트콩(베트남 임시혁명정부) 등이 서명했다.
美 국무장관이었던 키신저는 보다 확실한 휴전을 담보하기 위해 휴전감시위원단인 캐나다·이란·헝가리·폴란드 4개국을 서명에 참여시켰다. 이리하여 4개국 250명으로 구성된 휴전감시위원단온 하노이와 사이공, 그리고 휴전선을 감시하게 되었다. 한편 월맹에서는 하반라우 외무차관이 150명의 고문단과 함께 사이공에 체류했다.
일종의 인질 형식이었다. 하지만 이것도 믿지 못한 미국은 영국·소련·프랑스·중공 4개국 외무장관까지 서명에 참여시켰으니, 파리 휴전협정은 4+4+4 즉 무려 12개국이 담보하고 보증한 값비싼 서명문서였다. 그리고 월남과도 방위조약을 체결, 이제 미군은 철수하지만 월맹이나 베트콩이 휴전협정을 파기(破棄)하면, 즉각 해공군력이 개입하여 북폭을 재개하고 월남 지상군을 지원키로 굳게 약속했다.
더불어 주월미군이 철수하면서 그 동안 미군이 보유하고 있던 각종 최신 무기까지도 모두 월남에 양도하여, 그 무렵 월남 공군력은 전세계에서 4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이처럼 철저한 제도와 장치를 마련했기 때문에, 키신저는 주월미군이 철수하더라도 휴전체제가 최소한 10년은 갈 것이라고 낙관적으로 생각했다.
수년간 미국의 골칫덩어리였던 베트남전이 휴전을 맞게 되면서 전세계에는 평화의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닉슨의 데탕트 정책과 한반도에서 1972년부터 시작된 남북대화 등으로 세계평화는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대세(大勢)라고 믿었던 것이다.
이와 더불어 파리 휴전협정의 성과로서, 미국의 키신저와 월맹의 레둑토는 1974년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결정됐다. 그런데 레둑토는 『나는 한 일이 별로 없다. 나보다 평화에 기여한 사람이 많다』며 수상을 거부했다. 이에 대해 세계인들은 그가 월맹의 당 서열 5위였기 때문에, 자신의 위에 있는 지도자들을 염두에 둔 「동양적 겸양의 표시」라고 이해했다. 결국 키신저 혼자만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그러나 결국 이 생각은 착각이었다. 그들은 미군의 북폭과 경제봉쇄로 피폐해진 나머지 전쟁 수행 능력을 상실하자 평화회담에 나섰으나, 그것은 전략은 변함이 없은 채 전술만 바꾼 셈이었다. 레둑토가 키신저와 평화회담을 벌이는 한편에선 1950년대 중반에 수립된 대남 기본전략이 더욱 공고히 다듬어졌다.
그것은 「베트남에서 침략군을 몰아내고 민중봉기를 일으켜 인민민주주의 정권을 남반부에 창출하고, 무력으로 남반부를 해방시켜 조국통일을 달성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지금도 북한이 견지하고 있는 대남전략과 단 한 치의 차이도 없다.
월남의 90%를 정부가 지배했지만…
휴전협정이 체결되었을 때 월남 국토 44개 성(省) 중 12개 성의 곳곳에만 표범의 반점처럼 공산군 점령지가 남아 있었다. 총 인구의 90.5%는 월남이 지배하고 있었고, 나머지 중 5%는 낮에는 월남, 밤에는 공산측이 지배하는 경합(競合)지역, 그리고 4.5%는 공산측 지배지역에 있었다.
그래서 월남은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우월성과 경제력 우위를 바탕으로, 공산측 지배를 월남 내(內)에서 자연스럽게 소멸시킨다는 전략을 세웠다. 휴전 무렵 월맹은 오랜 기간의 전쟁으로 인해 매년 80만∼100만t의 식량부족, 물자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월맹은 줄기찬 대남공세를 끝까지 멈추지 않았다.
휴전협정 이전부터 숱한 공산당 프락치들이 월남 곳곳에 침투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호치민이 1930년 2월에 창당한 베트남 공산당과, 베트남 민족해방전선 의장인 웬후토가 1962년 1월에 창당한 인민혁명당에서 침투시킨 조직원들이었다. 그래서 월남 패망 당시 월남에는 공산당원 9,500명과, 인민혁명당원 4만 명, 즉 전체인구의 0.5% 정도가 월남 사회의 저층(底層)에서 밑뿌리를 뒤흔들고 있었다.
1969년 6월 6일 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이 베트남 임시혁명정부로 개편될 당시 이 정부의 법무장관이었던 쫑뉴탄의 증언에 의하면, 캄보디아 국경선근처 빈룽성 내의 지하 땅굴에 있던 혁명정부 청사에는 월남정부의 각부처와 월남군 총사령부에서 이루어지는 극비 회의내용이 단 하루 후면 상세하게 보고될 정도로 티우 정권의 핵심에 공산 프락치가 침투해 있었다고 한다.
1967년 대선(大選)에서 차점으로 낙선한 쭝딘쥬와, 당시 모범적인 도지사로 평판이 자자했던 녹따오를 위시한 많은 정치인·관료들이 모두 공산 프락치였음이 알려진 것은 월남 패망 후의 일이었다. 반면 월남에서는 군사 쿠데타가 벌어질 때마다 대공(對共) 전문가들이 쫓겨나는 바람에, 월남 대공기관과 정보기관은 형해(形骸)만 남아버렸다.
그들은 대(對)월맹 정보 수집은 말 할 것도 없고, 심지어는 월남 내부에 침투한 공산 프락치 검거조차도 무기력했다. 한 나라를 망하도록 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무엇보다도 그 나라의 정보기관부터 무력화시키는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 정보기관과 대공기관이 정권의 부침(浮沈)에 따라 평지풍파를 겪으면서, 결국에는 간첩 하나 못 잡는 이빨 빠진 고양이로 전락한 사실을 나는 너무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월남 패망 당시, 외적(外敵)이 아니라 내부의 갈등으로 인해 무너지는 모습과 너무나 흡사하기 때문이다.
휴전협정 이후 월남은 월맹보다 경제력은 물론 군사력에서도 월등히 앞서 있었다. 그래서 월남 지도부와 국민들은 상황을 너무도 쉽게 낙관했다. 「그럴 리야 없겠지만, 만의 하나 월맹군이 도발하더라도 즉시 미국의 해공군이 개입하여 북폭을 재개할 것이고 이후 대(對)월맹 경제 원조도중단하면, (당시) 세계 4위를 차지할 정도로 월등한 월남군 기동력과 화력으로 월맹군의 공세에 당연히 맞설 수 있다」고 믿었다.
따라서 그 누구도 공산군이 남침하리라고 믿지 않았다. 오랜 전쟁 후에 온 휴전 체제에서 평화를 거부하는 사람은 없었고, 그래서 국방과 안보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사람은 전쟁에 미친, 혹은 정신 나간 사람 취급을 받았다. 결국 그 믿음이 국방을 소홀히 하도록 하였고, 내부적으로도 극심한 정쟁의 원인을 제공한 것이다.
1975년 9월에는 월남 대통령 선거가 예정되어 있었다. 정치인들은 대선 승리를 위해 이합집산과 분열, 반목, 대립과 갈등을 유감 없이 연출했다. 고질적인 사회악이었던 뇌물과 마약, 매춘과 도박이 정치권의 혼란과 맞물리면서 마치 전염병처럼 전 국토를 휩쓸었다. 정부의 부정부패는 국민의 사기를 떨어뜨렸고, 계층 간 갈등이 조장됨으로써 공산 프락치들의 활동공간은 점점 넓어져 갔다. 결국 이 선거가 최후의 자유선거가 되고 말았다.
정규군 58만 명 중 10만 명이 위장휴가
더욱 심각한 문제는 군내(軍內) 부정부패였다. 당시 월남 정규군은 58만 명이었는데, 이 중 10만 명이 뇌물을 주고 비공식 장기휴가를 받아 대학에 다니거나 취업하고 있었다. 심지어는 장군들이 운영하는 사(私)기업에 파견되어 무보수로 일하는 사례마저 있었다. 이처럼 이름만 있고 실체는 없는 군인들을 가리켜 당시 월남에서는 「유령 군인」, 「꽃 군인」이라 불렀다.
나는 군 재직 시절, 미 육군참모대학에서 훗날 월남 대통령이 된 티우씨와 만난 일이 있었다. 그 후 주월대사관 무관(武官)으로 파견됐을 때, 티우는 대령으로서 사이공 부근의 사단장으로 재직 중이였다. 그가 쿠데타로 대통령이 되자 박정희 대통령이 나를 다시 월남으로 보낸 것이다. 그래서 대학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티우 대통령과는 속 깊은 이야기를 자주 나누었던 기억이 난다.
비록 독재로 기울기는 했지만 대단히 청렴결백했던 고 딘 디엠 대통령 시절, 월남군은 용맹하게 공산군과 맞서 싸워 빛나는 전과를 올렸다. 그 덕택에 휴전 당시 월남은 전 인구의 90%를 지배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문제는 지도층의 부패였다. 티우 대통령의 사위가 군에 입대했는데, 그는 이름만 군적(軍籍)에 둔 채 외국 유학을 떠나 버렸다.
대통령 사위가 그럴 정도였으니, 다른 고관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지도층 아들들은 입대 영장이 나오면 일단 입대한 다음 뇌물을 써서 선진국으로 유학을 보내는 일들이 비일비재했다. 게다가 월남 지배층은 사리사욕과 부정축재, 황금 만능주의에 빠져 천민자본주의의 극단을 보였다. 반면 「국가에 대한 의무」라는 말에는 코웃음을 치며 등한시함으로써 체제파괴 세력들에게 공격의 빌미를 제공했다.
오늘날 기회가 날 때마다 사회 지도층 인사와 그 아들들의 병역기피 사례가 언론에 공개되는 모습은, 25년 전 월남에서 벌어진 바로 그 일들이 그대로 반복되고 있는 것 같다.
후방이 부패와 혼란에 빠지고, 사회에 정의감이 상실되자 일선(一線)의 군인들은 「저따위 썩은 정권과 나라를 위해 내가 목숨을 바쳐야 하는가」하며 전의(戰意)를 상실했다. 또한 화해와 평화의 분위기가 퍼져 나가자 공산군에 대한 경계심도 같이 사라져 버렸다. 이것이 월등히 높은 경제력과 막강한 화력을 가졌던 월남 군대가, 식량 부족으로 고민하던 월맹군에게 허수아비처럼 붕괴한 가장 큰 원인이다.
시민·종교단체를 좌익이 장악 한편 이 무렵 월남에서는 천주교의 짠후탄 신부, 불교계의 뚝드리꽝 스님 등이 모여서 「구국(救國) 평화 회복 및 반(反)부패 운동 세력」이라는 단체를 결성해 활동하고 있었다. 이 산하에 사이공대학 총학생회, 시민단체들이 연합하여 일종의 시민연대를 구성하고, 반부패 운동에 나섰다.
그러나 문제는 이 순수한 반부패 운동 조직에 공산당 프락치들이 대거 침투하여, 거대한 반정부·반체제 세력으로 변질시켜 버렸다는 점이었다. 휴전협정이 체결되어 미군과 한국군이 철수하자, 사이공에는 100여 개의 애국단체, 통일 운동단체들이 수십 개의 언론사를 양산하여 월남의 좌경화 공작에 앞장섰다.
목사, 승려, 학생 그리고 좌익인사들이 한데 뒤섞여 반전운동, 인도주의 운동, 문화운동 등 상상할 수 있는 그 모든 운동단체들을 총동원하여 티우 정권 타도를 외치고 반정부 시위를 벌였다. 1975년의 월남은 월맹 정규군의 무력침공과 베트콩의 게릴라전에 패배한 것 이상으로 이들 100여 좌익 단체의 선전전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던 것이다.
1974년 10월, 월남에서는 유전(油田)이 발견되어 온 국민이 흥분에 휩싸였다. 나라 전체가 평화 무드에 젖어 있던 상태에서 석유까지 발견되자 사람들은 더욱 자유분방함과 안일주의에 기울어 갔다. 그러나 바로 그 무렵, 월맹의 하노이에서는 극비리에 남침을 위한 비밀 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레준 서기장은 당시 닉슨 대통령 사임으로 어수선한 미국이, 월맹이 남침공세를 펴도 월남 방위공약을 이행하지 않을 것이라며 남침 전쟁의 결정을 내렸다.
1975년 1월 8일, 월맹군 18개 사단 총병력을 월남 공격에 투입하기 위한 군사력 배치가 개시됐다. 이 총공세를 현지에서 지휘하기 위해 월맹군 육군참모총장 반띠엔둥 대장이 1975년 2월 5일 하노이 공항에서 AN-24기를 타고 극비리에 이륙했다. 반띠엔둥 대장은 2월 6일 호치민 루트를 타고 중부월남 고원지대의 전략 요충인 반 메뚤의 서쪽 밀림 지대에 잠입하는 데 성공했다.
한편 그가 중부월남으로 잠입한 사실을 기만하기 위해 하노이에서는 그와 비슷하게 생긴 가짜 반띠엔둥이 볼가 승용차를 타고 매일 저택에서 월맹군 총사령부로 출퇴근을 하도록 했다. 반띠엔둥은 배구를 즐겼는데, 운동 시간이 되면 가짜 반띠엔둥이 나와 배구를 하는 등 치밀하게 철저한 위장을 했다.
그러나 이미 거덜이 난 월남 정보기관은 이 사실을 까맣게 몰랐다. 이 무렵 나는 월맹군의 움직임이 아무래도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고, 티우 대통령에게 면담을 신청했다. 당시 월남군 정예부대는 공수사단과 해병사단이었다.
나는 티우 대통령에게 「지금 월남은 자유라는 미명하에 게릴라들 전쟁터가 됐습니다. 아무래도 조짐이 이상한데 정보기관에서는 이렇다할 아무런 보고가 없으니, 일단은 도지사 소속으로 되어 있는 민병대 병력을 무장시키고 공수사단과 해병사단을 각각 군단으로 강화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고 제안했다.
그러나 티우 대통령은 허허 웃으면서「지금 우리 정규군 병력이 58만 입니다. 또 미국과의 방위조약이 시퍼렇게 살아 있고, 월맹도 북폭으로 거덜이 난 상태인데 저들이 침략할 힘이 남아 있겠습니까」며 완곡히 거절했다. 티우 대통령은 확고한 반공 지도자였지만 평화에 눈이 멀어 유비무환을 잊었던 것이다. 그의 머리 속에서는, 월맹은 경제가 허약하고 식량과 물자 부족이 심화돼 조만간 붕괴할 체제에 불과한 것으로, 우습게 보았던 것이다.
우익 ·애국인사 암살
월남은 몇 개월 후의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극심한 혼란상을 연출하고 있었다. 거대 여당이었던 대월당(大越黨)은 대통령직에 눈이 먼 인사들의 탈당으로 분열, 각개약진을 거듭했다. 오늘날 어떤 정당에서 공천을 못 받았다 해서 뛰쳐나가 자신이 몸담았던 당의 지도자를 공격하는 모습은 25년 전 내가 월남에서 체험했던 정쟁과 어찌 그리도 닮은꼴인가.
그 무렵 반공(反共)을 외치고, 나라를 위기에서 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우익 인사들은 다음날이면 시체로 발견됐다. 1973년까지 연 평균 무려 840명이나 암살을 당할 정도였다. 티우 대통령이 수상으로 지명하려 했던 유명한 반공지도자 웬반홍, 사이공대학의 우익 학생 지도자, 그리고 반공을 주장하는 언론인들이 쥐도 새도 모르게 암살되면서 지식인과 중산층, 언론은 침묵을 선택했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언론과 지식인들이 국가 안보와 반공, 국가 정통성 수호를 외치면, 말과 글과 구호로 무장한 좌파 인사들이 무차별 공세를 펼침으로써 「말없는 다수」들이 침묵하는 상황도 25년 전 월남과 다름이 없다. 이 와중인 1975년 3월 10일 새벽 2시, 월맹 공산군이 중부월남에서 오래 전부터 침투해 있던 프락치들을 이용, 주민들을 선동하며 총공세를 감행했다.
그러나 각지에 분산·고립된 채 총체적 부패와 의 상실에 빠져 있던 월남군에게는 이미 나라를 지켜야겠다는 의지가 없었다. 월남군은 곳곳에서 패퇴하며 밀리기 시작했다. 월맹군에게 허를 찔린 티우 대통령은「즉각 정쟁을 중지하고 일치단결 하여 침략군을 무찌르고 자유월남을 지키자」고 호소했다.
한편 국제휴전감시위원단에게 「공산군의 북위 17도선 이북으로의 철수」를, 미국에는 방위공약의 이행을 요청했다. 그러나 이들 중 어느 것 하나 이행되지가 않았다. 티우 대통령의 간곡한 대국민 호소가 발표되자 「구국평화 회복 및 반부패 운동세력」의 지도자인 짠후탄 신부는 이렇게 대답했다.
「중부월남 고원지대에서 반민주, 부정부패를 일삼는 티우 독재정권에 항거하는 민중봉기가 일어났다. 그곳에 월맹군은 없다. 티우는 책임지고 사퇴하라」.짠후탄 신부는 미국의 대월 방위공약을 철석같이 믿고서, 더 이상의 월맹군 공세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오히려 이 기회를 이용해서 티우 대통령에게 타격을 주고 몇 개월 후 실시될 대선에서 자기들이 미는 후보에게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이런 발언을 한 것이다. 다른 야당지도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그들은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월맹을 이용한다며 격렬히 비난했다. 이 와중에 웬까오끼 前 부통령은 티우 대통령제거를 위한 쿠데타를 계획했으나 내부분열로 실패하는 사건도 벌어졌다.
반체제 운동가들 - 통일 후 감옥으로
반띠엔둥이 이끄는 월맹군이 중부월남 고원 지대에서 승리를 거둔 후 월남군은 지리멸렬(支離滅裂)해 버렸다. 그들은 전투다운 전투 한 번 못한 채 후퇴만 거듭하다가 결국 50%의 병력이 붕괴, 해산됐다. 3월 26일 다낭이 함락됐고, 이후 월맹군 18개 사단이 사이공을 향해 무인지경(無人之境)을 달리듯 파죽지세로 남하했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 「유령 군인」과 「꽃 군인」들은 가족과 함께 배와 비행기로 월남을 탈출하고 있었다. 4월 21일 티우 대통령이 하야(下野)하고 재야(在野) 정치인 정반민 예비역 대장이 대통령에 취임했다. 그러나 남침 후 한 달이 지난 이때까지도 미국은 대월 방위공약을 이행하지 않고 있었다.
4월 29일 월맹 공산군 14개 사단이 사이공을 포위했다. 사이공에는 패잔병들만 남아 있었다. 라이케에 주둔 중이던 월남군 제5사단장 레웬비 장군은 국가와 운명을 같이 하기로 결심, 사단 병력을 이끌고 사이공으로 진격하기 위해 월맹군 포위망을 공격했다. 그러나 수적으로 비교가 되지 않았던 월남군 제5사단은 월맹군 1군단 대병력과 결사 항전을 벌이다 궤멸 당했다. 레웬비 장군은 조국의 패망을 비통해 하면서 권총으로 자결, 나라와 운명을 함께 했다.
4월 30일 정오, 월맹 공산군 제2군단은 사이공 시내로 진격하여 탱크부대가 월남 대통령 집무실과 관저가 위치한 독립궁을 점령했다. 월남 대통령 정반민은 포로가 됐고, 이로써 군사력과 경제력에서 월맹을 압도한다고 자랑하던 월남은 월맹군에 의해 너무도 허무하게 지도상에서 사라졌다.
미국은 사이공 함락 직전, 월남군 장성과 그 가족을 헬기에 실어 남지나 해상의 항공 모함으로 철수시킨 후 미국으로 망명시켰다. 그러나 월남군제2군단장 만푸 소장, 특별부대사령관 반토 소장, 제4군단장 웬꼬아 남 중장 제5사단장 레원비 준장, 제7사단 장 웬반하이 준장 등 5명은 무너지는 군대를 보면서 조국과 운명을 같이 하기로 결심하고 망명 거부, 모두 권총 자결했다.
「거지군대」에 패망한 월남
사이공 함락 후 월남의 군인·경찰은 무장 해제되고 수용소에 보내졌다. 그리고 월남의 공무원과 지도층 인사, 언론인, 정치인들도 모두 체포돼「인간개조 학습소」에 수감됐다. 이중 대부분은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공산 정권은 수많은 공무원들을 잡아넣는 형무소가 모자라자 과거 월남군부대 시설을 형무소로 개조해 그곳에 공무원과 지도층 인사를 수용하기도 했다.
반정부·반체제 운동을 벌이던 교수, 종교인, 학생, 민주인사들도 모조리 체포 처형됐다. 그들의 수감 이유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반정부 활동을 하던 인간들은 사회주의 사회에서도 똑같은 것을 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었다.
하층(下層)의 월남 국민들은 소형 선박을 이용해 목숨건 탈출에 나섰다. 보트 피플의 숫자는 약 106만 명. 이 중 바다에 빠져 죽거나 해적에게 살해당한 숫자가 11만 명이었고, 살아서 해외로 이주한 사람이 95만 명으로 집계됐다. 나는 이 참혹한 패망의 역사를 그 현장에서 지켜보면서, 강대국과 맺은 방위공약이나 공산주의자들과의 협정은 절대 신뢰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뼈저리게 체험했다.
나는 티우 대통령이 미국에게 구원을 호소하는 모습을 내 두 눈으로 보았다. 그러나 무질서와 공산 프락치들로 인한 국론 분열에 빠진 월남에 고개를 가로 저었던 미국은 처음부터 약속을 지킬 생각이 없었다. 자기 국가의 안전,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국가안보는 미국과의 방위공약도 아니고 공산당과의 휴전협정도 아닌, 오직 자국(自國)의 군사력이 담보할 뿐이다. 체제가 안정되었다거나 경제력이 우수하다는 말은 조국에 충성하는 국민의식과 군사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전부 잠꼬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외교관이었던 내가 체포되기 전 사이공 시내에서 직접 목격한 놀라운 사실은, 월맹 군인들은 소금만 가지고 하루 두 끼 식사를 겨우 할 정도였고, 속옷은 구경조차 힘들었다는 점이다. 월맹군은 전차 부대를 제외하고는 군화를 신은 사람도 없었다. 그들은 타이어를 잘라 끈으로 묶은 채 질질 끌고 다니며 월남군과 전투를 했던 것이다.
이런 군대가 최신무기로 완전무장을 한 월남 군대를 붕괴시켰다. 부패한 군대, 분열된 사회는 최신 무기를 고철로 만든다. 파리 휴전협정 체결 과정에서 외국의 몇 및 언론은 「키신저가 노벨평화상을 받기 위해 휴전협정을 너무 서두르고 있다」며 걱정스럽게 지적했었다.
그러나 이런 충고를 무시한 키신저가 수상한 노벨평화상은 결국 자유월남의 시체 위에서 얻은 비극의 노벨상이 되고 말았다. 미국이 영국과 프랑스, 중공과 소련까지 동원해가며 맺었던 「방위조약」은 단순한 휴지조각이 되어 버렸다. 그들은 월남의 패망과 아비규환(阿鼻叫喚)에 빠진 월남 국민의 절규에 대해 침묵으로써 대답했다.
월간조선 ‘越南 패망의 현장 목격자 李大鎔 (당시 駐越대사관 공사)의 惡夢’(2000.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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