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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맡은 아들
히브리서 3장은 (예수를)
모세보다는 나은 분을 이야기한다.
전체적으로 하나님은
사람을 지으시고 나서 안식하셨다.
그리고 그날을 복 주어서 기억하겠다는 말씀인데, 이것을 체계적으로 찾아 정리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예수는) 모세보다 나은 사람이다. 모세는 집 맡은 사환(히브리서 3장 5절 참고 : 모세는 장래의 말할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사환으로 충성하였고)으로 충성했지만,
예수는 집 맡은 아들로 충성을 했다. 사환과 아들로 구별해놓았다.
이것은 유태인들에게 도저히 있을 수 없는 말이다. 하나님을 대신해서 200만이 넘는 유대인을 이끌고 나왔고, 홍해를 건너서 길도 없고 먹을 것도 없고 마실 물도 없는 광야를 40년을 방황하면서 그 백성이 순종할 때까지 기다리던 모세는,
결국 애굽에서 나왔던 사람들이 다 죽고 새로운 세대가 태어나서 가나안 땅에 들어간 것을 보고, 그리고 비스가 산에서 그리워하던 가나안 땅을 바라보고 죽었다고 한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모세만큼 위대한 선지자는 없고, 비교한다는 것은 정말 어이가 없는 그런 일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히브리인들에 대한 모욕이고 역사에 대한 모욕이다.
간단한 이야기가 아니다.
사환은 어디까지나 사환이고 아들은 어디까지 그냥 아들이다. 그러면 왜 예수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 십자가에 못 박혀서 내려오지도 못하고 죽은 사람, 유대인에게 조롱을 받고 죽은 그 사람,
제자들에게 버림받은 사람,
본인 스스로도 하나님께 버림받은 사람, 그런 사람이 어떻게 아들이 되냐는 말이 아니겠는가? 이것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고, 인간의 상식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우리가 알고 있었던 예수, 기독교가 말하고 있는 예수는 적어도 모세보다
훨씬 나은 그런 예수를 말하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모세는 비록 하나님 역할을 했어도,
그 안에 신성은 없었는데 예수 안에는 신성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을 지금 하는 이야기니까 그렇지, 그 당시로서 있을 수가 없는 말이다.
상상할 수 없는 말이다.
왜, “집 맡았다. 집 주인이다.”는 구절이 생겼는가? 집주인이란 말은 상속자라는 말이다. 아버지의 모든 것을 그대로 물려받은 사람이다.
과연 예수 같은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모든 것을 다 맡을 수가 있는가? 이것을 이방인에게 물어봐도 안 되는 말이고, 유대인들은 더욱더 안 된다.
기독교인들도 예수를 진실로 알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안 그런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예수는 집 맡은 아들이라 한다.
집 자체라 한다. 하나님의 모든 것을 그대로 상속받은 사람이다. 이것이
신약, 새 언약의 내용이기도 하다.
어린아이로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다 하나님을 알게 된다. 그래서 어린아이들이라도 하나님을 알려고
할 필요가 없게 된다는 것이다.
지난번에 우리 교회 누구 이야기할 때인데, 하나님 믿으면 얼마나 좋은가? 시시한 예수보다 어마어마한 하나님을 믿으면 얼마나 좋은가?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을 믿으면 시험이 끝나지 않는다.
굳게 맹세하고 믿어도 시험이 오고 또 시험이 온다고 고백한다. 그것은 사실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무리 잘 믿어도, 믿고 가다 보면 시험에 걸려
들게 되고 또 시험에 걸려들게 된다.
중세 기독교의 명작인 천로역정이
그런 책이다. 혼?나는 길, 시험의 길을 믿음으로 믿음으로 통과해서 천국까지 간다는 이야기인데, 그때의 기독교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소설이 천로역정이다.
그런데 지금은 사람들이 그렇게까지 안 한다. 그렇게 애쓰면서 예수 믿는 사람은 거의 드물다. 그렇게 예수 믿으라고 하면, 예수를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OO 전체가 시험 속에 살아가는 것인데, 그렇게 하려고 예수를 믿는 사람이
누가 있는가? 어떤 목사가 그것을 강조하는 설교를 할 사람이 있겠는가? 그러면 사람들이 다 떨어져 나간다.
올 사람이 아무도 없다. 옛날에는 그 길밖에 없으니까 따라갔지, 요즘은
길이 얼마나 많은가? 자유가 얼마나 많은가? 그러니까 그럴 필요가 없다.
그런데 참 묘하게 십자가에 못 박혀서 내려오지 못하고 죽은 예수가 그 안에 하나님이 지은 모든 사람을 다 한꺼번에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 신의 한 수다.
이것이 신의 한 수다. 위대한 사람들은 불가능한 것이다. 쓸모없고 버려질 수
밖에 없는 이 사람이 그것을 하고 있다.
이것이 영원한 복음이다.
어떤 복음도 이 복음을 당해낼 복음이 이제는 없다. 왜냐하면 예수 이상의 사람도 없고 예수 이하의 사람도 없고,
높이 오르기로만 한다면
예수같이 오를 사람이 없고, 내려가기만 해도 예수같이 내려갈 사람이 없다.
그러니까 만유가 포함되려면 이 사람이 없으면 안 되는 것인데, 이 사람이 묘하게 만유를 포함했다.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자기가 지은 모든 세계가 다 하나로 그의 통치 앞에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구약은 결국 다윗 한 사람의 출생을 위해서 있었다고 볼 수가 있다. 왜냐하면 왕국이 다윗으로 인해서 출현하게 되기 때문에 나라가 최종적인 목표였다.
구약의 목표는 나라였다.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 그 나라의 왕이 될 사람을 위해서 구약성경이 쓰여졌다고 해야 된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이야기는
왜 있는가? 모세의 이야기는 왜 있는가? 선지자들의 이야기는 왜 있는가?
결국 다윗왕 때문이다.
야곱은 열두 아들 중에서 유다가
상속자가 됐다. 그런데 다말에게서
태어난 베레스, 그 사람이 상속자가 되었다. 이런 역사를 가지면서까지 다윗왕의 계보가 이어져 간다.
라합의 아들, 룻의 아들, 참 세상 속에 끼어들 수가 없는 사람들이 왜 거기에 끼어들었는가? 다윗왕 때문이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온 인류의 나라, 한 나라를 위해서
누구를 사용할 것인가? 우리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다. 어떻게 다말이 낳은 아들이 다윗왕의 조상이 되겠으며,
라합이 낳은 아들이 조상이 되겠고, 이방인 룻의 아들이 조상이 되겠는가? 똑같은 이치다.
어떻게 나사렛 목수의 아들
예수가 후사가 될 수 있는가? 어떻게 마리아를 통해서 사람이 났는가?
창세기 3장의 약속을 인한 것이다.
“뱀은 너의 발꿈치를 물겠지만, 너의 후손은 뱀의 머리를 상할 것이다.”
역사 속에서 뱀의 머리를 상한
사람은 예수밖에 없다.
그래서 역사가 건너뛰어 건너
뛰어 결국은 예수로 온 것이다.
아무도 사탄의 머리를 밟은 사람이 없으니까, 어떤 종교도 어떤 믿음도 사탄을 이긴 종교나 믿음이나
신앙이 없다.
계속 시험 속에 살아가고 있는 것인데, 일시에, 한꺼번에 온 인류가 사탄의 머리를 밟아버린 세계 안으로 참여하게 했다는 것이 복음의 핵심이 된다.
우리가 전하는 복음이 그냥 시시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보통 일이 아니다. 얼마나 어떻게 믿고 어떻게 순종하고 어떻게 거룩하게 생활해서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하고 사탄을 물러가게 하겠는가?
어떻게 유황불 불붙는 곳으로 집어넣겠는가? 1000년을 가둬도 안 죽었던 놈인데, 어떻게 유황불 붙은 구덩이로 들어가겠는가?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했다는 말이다. 예수의 영광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니까 예수 없는 모든 것, 기독교는 말할 것도 없지만, 모든 것이 전부 다 사람을 보고 이렇게 해봐라 저렇게 해봐라는 것이다. 이러면 된다거나
저러면 된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된 것이 아무 것도 없다.
그것은 길이 달랐다는 이야기 아닌가? 길이 달랐다. 노선이 달랐다.
집 맡은 아들, 집 맡은 모세,
집 맡은 아들, 이 구별은 보통 일이 아니다. 아무리 위대하더라도 집을 관리하는 사람과 집 자체인 사람은 다르다. 이론적으로 생각하면
모세가 예수를 증거하긴 했어도,
주인은 안 된다는 말이다.
증거는 했지만 (주인이) 안 된다. 베드로와 바울이 예수로 증거하기는 했지만, 집은 안 됐다. 집을 만나지
못한 그 하나님 안에 어떻게 우리가
다 포함되겠는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굳게
결심했는데 계속 시험이 온다는
이야기를 들으니까, 예수보다
더 큰 이가 하나님인데 그분은
믿었는데 왜 시험이 계속 오는가?
우리도 마찬가지다.
그런 경험을 우리는 다 가지고 있다.
결심 안 해본 사람이 누가 있는가?
작정 안 해본 사람이 누가 있는가?
다 했지만 안 됐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더 크고 위대하고 놀라운 분이지만, 그러나 우리를
구원할 수 없다. 그 낮은 사람,
밑바닥에 버려진 사람, 이 사람이
우리를 구원할 사람이니까,
이 사람을 아는 것이 하나님
아는 것보다 더욱 중요하게 됐다.
이 사람을 알고 나면 하나님을
알라고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알라고 할 필요가 없다.
위대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기독교 안에도 놀라운 사람들, 빛을 남긴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어디까지였는지는 모르지만 그것을 계속해서 시험 중에 있었다. 언제 시험에 걸릴지 모르는 사람들이다. 절대로 시험이 없는 세계가 오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리 위대하다 하더라도 시험 중에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시험을 이기고 이기면서 위대해진 거니까, 다른 사람은 못 따라간다. 그 사람들만큼 재수 없고 따라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을 고생만 시켰지, 복되게 만들어주지 못했다.
그러나 예수는 아무것도 해준 거 없다. 해줄 수도 없다. 그런데 나를 자기 집안에 포함시켜 주니까 내가 집이 된 것이다.
우리가 집이 된 것이다.
집에는 서까래도 있고 기둥도 있고 구들장도 있고 여러 가지가 있다.
바로 우리가 부분들일 수 있다.
서까래인 사람도 있고 기둥인
사람도 있고 구들장에는 돌이 된 사람도 있고 여러 가지가 있다. 하지만 그것은 집이다. 이것은 빠져나갈래야 빠져
나갈 수 없는 그런 존재들이 된 것이다.
서까래가 없으면 집이 안 된다. 기둥이 없으면 집이 안 된다. 주춧돌이 없으면 집을 세울 수 없다. 어느 하나도 빠지면
안 되도록 된 것이 하나님의 집이다.
그래서 우리는 상상할 수 없는 복음을 전파하고 있는 셈이다. 상상도 못 했던 것을, 가능성이 있는 것을 전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전혀 가능성이 없는 것을 전하고 있다.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사람을 구원하시길 기뻐했다.”
바울로서는 많이 알고 많은 경험을
가지고 있고 놀라운 체험을 한 사람이다. 우리는 그것을 못한다. 그것을 알 수가 없다. 다메섹에 가다가 우뢰 소리를 들을 수 없고, 아라비아 사막에 가서 3년 동안 바울과 동행할 수가 우리는 도저히 없다. 그래서 기독교는 이렇게 혼란 중에 빠진 것 같다.
내가 생각해봐도 나를 보고 따라왔던 형제들이 좋았다. 그동안 참 편안하고 좋았다. 그런데 갈 길이 없었던 것이다.
더 이상 갈 길이 없었다.
지금 생각하니까, 만일 그대로 내가 죽어버렸으면 우리 형제들은 산산이 헤어졌을 것이다. 각자 자기 생각대로... 그리고 어떤 신학이 들어오면 그 신학에 휩쓸리게 되고, 끌려가게 되고,
그 천재들에게 끌려가지
않을 수가 없다. 그렇게 되고 만다.
그런데 신학적인 천재들이 과연
사탄의 머리를 상하고 인류에게 평화를 가져오는가? 그것도 역시 불가능하다.
그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이야, 저렇게 복잡하니까 헷갈리겠구나.” 싶다.
김윤동 교수의 진짜 예수를 찾아서
강의를 열심히 듣고 있는데, 듣고 있다 보면 휘말려 들어가겠다. 아주 그럴싸한 것이 너무나 많고, 무엇을 이것만이라고 할 수가 없는 그런 세계를 설명한다.
이것만이라고 출현하기 어려운 세계를 얘기하고 있다. 인류사니까 세상에서는 그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를 만나고 보면, 모든 것이 다 뒤로 물러가고 오로지 한 길만 보인다. 다른 길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쓸 데가 없고, 있어도 쓸 데가 없다.
우리가 이 씨를 뿌려야 또다시 열매가 나지, 씨 아닌 다른 것을 아무리 뿌려봐야 시대가 잡아먹어 버리고, 신앙이 잡아먹어 버리고, 종교가 잡아먹고 다 잡아먹는다.
모세보다 나은 예수, 종 보다 나은 아들, 집을 관리하는 관리인보다 집 자체인 아들이신 예수를 우리가 알아가고
있다는 것이 너무나 큰 일이다.
그리고 이 씨가 땅에 떨어져서 싹이 나면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게 된다. 여기에는 위대한 사람이 전혀 필요하지 않다. 사람들이 볼 때, “저래야 되지.”
하는 그런 사람이 필요하지 않다.
흙이 좋다 깨끗하다 완전하다는 것이 있다. 땅을 파다 보면은 그런 흙이 있는데, 거기다 심어 놓으면요 몇 년이 가도 안 된다. 개나리를 심어놓았더니, 몇 년이 가도 한 개 그대로 있다.
퍼지질 못하고 있다. 쌩땅이다.
썩은 땅에 그것을 심어놓았더라면 몇십 배로 불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역설이다. 농부는 쌩땅을 찾는 것이 아니고 썩은 땅을 찾는 것이다. 땅이 생긴 이래 한 번도 흙이 너무 낡아서 못 쓰겠다는 흙이 없다. 오래된 흙일수록 더 좋다.
요즘에 인분 비료는 안 쓴다.
옛날에는 비료가 있었겠는가?
그냥 똥을 잔뜩 먹고 썩고 또 썩고 해서 알곡을 만들어내는 것이 그 흙이니까, 아무리 오래되어도 흙은 망가지거나
못 쓰게 되지 않고 오히려 역설적으로
더 좋은 흙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 시대에 하시던 말씀들이다.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세례 요한이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판에,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하고 시골로 내려가 버렸다.
다음 날 세례 요한은 목이 잘려서
헤롯 왕 앞에 갔다. 의로운 죽음이라는 말이 남을 것이다. 그것은 참 의로운 죽움이고 의로운 사람이었다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모두) 다 세례 요한처럼 살겠는가? 세례 요한처럼 산다고 세상이 바뀌어지는가?
지금도 정의를 추구하는 사람들,
믿음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많다.
기독교 안에도 많은데, 그것은 다 자기를 위한 것 같다. 자기를 위해서 그것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지, 하나님을
위해서는 아무 필요가 없다. 농사짓는
농사꾼에게는 아무 필요가 없다.
이것을 우리가 알고 복음을을 전파하지 않으면 헛일하고 만다. 농사짓는 사람은 어떤 흙이 농사가 잘 되는가? 이것을 알아야 된다. 어떤 흙이 더 좋은 흙인가?
그래서 한국 교회는 그런 곳과 같은 찌꺼기에 남아있는 것은, 빈민층 평민층으로 기독 교회가 들어갔기 때문이다. 일본은 그와 반대로 아주 상류층으로 들어갔다.
그래서 일본 기독교는 그대로 있다.
옛날 그대로 보존하고 있지만 발전이
전혀 없다. 근데 한국은 그래도 엎치락뒤치락 지금까지 살아왔다.
그러니까 어떤 것이 좋은 결과가 올지 기대해 봐야 한다. 끝까지 기독교가 세상에서 좋은 종교가 되려고 한다면 완전히 실패로 가야 될 것이고,
세상에서 욕을 먹더라도 확실한 씨가 있다면 승리하게 될 것 아니겠는가.
지금 실제로 우리 교회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 때문에 신경을 쓰고 있다. 세상이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우리가 이렇게 하면 세상이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물론 부도덕하다든지 하는 것은
아니지만, 정상적으로 자기들이 받은 믿음을 표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마음에 거슬리는 것이다. 계속 거슬리는 것이다. 그래서 “나도 안다.
나도 다 알고 있다.” 하면서 계속 경계선에서 비판만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교회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가 바로 그 문제다. 내가 어지간히 그러겠는가? 교회를 염려해서 그렇다고 하니까, “그렇다면 나 이상 교회를 염려한 사람이 누가 있겠냐? 염려는 내게 좀 맡겨주라. 맡겨주고 교회에 대한 염려를 좀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오죽하면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겠는가?
그렇지 않은가? 교회가 불명예
스럽다면 누가 불명예스러운 것인가?
첫째는 내가 그런 것이다. 그들이야
다른 것이 많이 있지만 나는 그거밖에 없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위해서다. 하나님 위해서다.” 하는 것은 말짱
되지 않을 말이다.
어린아이가 부모를 걱정하는 거나
똑같은 것이다. 밥 잘 먹고 공부 잘하고 하라는 대로 하고 이런 어린아이가 장땡이다. 어려서부터 벌써 부모
걱정하고 있다면 아무것도 못한다.
공부도 못하고 아무것도 못한다.
나는 집 자체이신 분에게 잡혔다는 것이 너무너무 감사하다. 집 맡은 관리인에게 잡힌 것이 아니라, 집 자체이신 분에게 잡혔다는 것이 너무너무 감사하다.
그만하겠다. 이 문제를 놓고
좀 심각하게 생각해 봤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