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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을 여행하는 사람들이 가장 살아보고 싶어 하는 도시 1위는 어디일까?
예술가나 문학가들이 가장 사랑하는 도시 1위는 또 어디일까?
유럽을 여행해 본 사람들이 꼭 다시 찾아가 보고 싶어 하는 도시 1위는 과연 어디일까?
물론 이런 객관적 평가의 기준은 어디까지나 개개인의 주관적 관심도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하여 여기에서의 선정은 한 유명 여행사가 전 세계의 이용자들에게 위에 제시한 세 가지 질문항목에 대해서 설문조사를 한 결과만을 가지고 이야기한다는 점을 전제해야 하겠다. 어쨌거나 이렇게 해서 산출된 결과는 역사. 예술. 문화. 건축. 쇼핑. 음식. 숙박. 자연환경과 그 도시에서 살아가고 있는 현지인들의 생활환경까지를 모두 포함시켜 나온 결과라고해도 무방할 것이다.
이 대목에서 많은 여행자들은 선뜻 가장 먼저 떠오르는 유럽의 유명 관광도시 이름이 다들 있을 것이다. 어쩌면 하나가 아니라 여럿일 수도 있겠다. 개중에 더러는 다녀 온 도시들의 이름이 입가에 맴돌기는 하지만, 위에서 제시한 세 가지 항목에 모두 일치하는 하나의 도시를 선정하는데 어려움을 겪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하여, 세 가지 기준에 모두 합당하는 최고의 도시 하나만을 선정하는데 약간의 도움을 드리기 위해 충분히 후보에 오를 수 있는 유럽의 유명한 도시 몇 개를 힌트로 먼저 알려드려보겠다.
당신이 유럽을 여행하는 사람이라면 어디를 선택하시겠습니까?
- 영국 런던.
- 프랑스 파리.
- 이탈리아 로마.
- 이탈리아 베네치아.
- 스위스 취리히.
- 오스트리아 비인.
- 독일 뮌헨.
- 스페인 바르셀로나.
- 그리스 산토리니.
- 체코 프라하.
어떤 선택들을 하셨는지 궁금해진다. 물론 맞으면 기쁘고 아니어도 별 상관은 없겠지만 말이다.
아쉽게도 나는 틀리고 말았다. 아니지. 틀린 것이 아니라 내가 가장 사랑하고 좋아하는 도시의 이름이 아예 후보 리스트에도 오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위의 예시대로 하자면 나는 이탈리아의 피렌체를 가장 살아보고 싶고, 사랑하고, 몇 번이고 다시 가고픈 도시로 당연히 뽑고 싶었는데, 아쉽게도 피렌체란 도시는 이름조차 올리지 못할 꼴이 되고 말았다. 피렌체가 아니라면 피렌체보다도 아주 쬐끔 더 좋아하는 도시가 있기는 한데, 이스탄불 역시 지리적이나 역사적인 이유와 배경에서인지 유럽의 대표도시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이스탄불이나 피렌체를 제외하고 후보에 올라있는 도시 중에서 최고를 골라야 한다고 나름 고심을 해 보았는데, 도무지 파리와 바르셀로나 사이에서 결론을 내지 못하겠다. 틀림없이 그 둘 중에 하나일 것 같은데 말이다.
함께 여행하는 내 파트너 챠밍여사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쾌도난마(快刀亂麻)의 솜씨로 단칼에 무우 자르듯이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무조건 파리(Paris)’라고 아주 명쾌하게 대답했을 것이다. ‘한 달 살기를 하고’ ‘예술가들이 사랑하고’ ‘ 다시 가고 싶고’하자면 의당히 ‘파리’가 무조건 정답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아무렴 너무도 당연한 수순이지 싶다.
그런데 아니었다. 나도 아내도 모두 틀렸다.
정답은 ‘바르셀로나(Barcelona)’였다.
거듭 ‘한 달 살기 좋고’ ‘예술가들이 넘쳐나고’ ‘꼭 다시 찾아가고 싶고’하는 면에서는 어쩌면 아주 쬐끔 파리가 바르셀로나를 분명히 앞서 보이는 것이 틀림없는 사실이겠으나. 바르셀로나에는 그 외에 파리에 없거나 파리보다 월등한 다른 것들이 더 있었던 것이다.
그중에서 최고 점수를 받은 항목이 바로 ‘쾌적하고 온화한 바르셀로나의 날씨’가 가장 큰 몫을 차지했다. 우수와 낭만을 찾을 때는 좋았을지 모르겠지만, 늘 희뿌연 파리의 안개와 흐린 날씨는 하루 이틀 다녀가는 여행자에게는 약간의 불편함일 수 있겠으나, 오래 머물며 살다보면 우울증에 걸리거나 여러 가지 질병에 걸릴 것 같다는 의견이 의외로 많았다. 날씨를 포함한 자연의 축복이 넘쳐나는 바르셀로나는 파리가 가진 장점들 위에 눈부신 햇쌀이 부서져 내리는 해변과 해양문화를 즐길 수 있는 커다란 장점을 가지고 있다.
아쉽게도 파리는 모든 면에서 바르셀로나를 앞지를 수 있었지만, 현지인들의 생활 만족도와 더불어 날씨와 대자연의 풍요로운 혜택과 코발트 빛 지중해를 품은 바르셀로나를 끝내 이기지 못하고 말았던 것이다.
'두 번째 바르셀로나(Barcelona)!'
이번 여행의 목적지를 파리를 시작으로 하여 남프랑스 지중해 연안을 여행하여야겠다고 마음먹은 순간부터 마지막은 바르셀로나에서 귀국 비행기에 올라야겠다고 처음부터 아예 그렇게 계획을 했었다. 4년 만에 다시 바르셀로나를 찾게 되는 것이지만 그 이유나 목적은 지극히 간단하고 명료했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Temple Expiatori de la Sagrada Família)의 일요 미사에 참석’하는 것이 이번 바르셀로나 여행의 목표이자 전부였던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좋고 예전과 다른 새로운 여행이 전혀 없어도 무방했다. 4년 전에 이미 웬만큼 바르셀로나를 충분히 즐기고 누렸었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초 동유럽(체코. 헝가리. 크로아티아)을 계획하다가‘더 늦기 전에 프랑스’를 강조하는 마눌님 기분을 맞춰주려고 노선을 급선회하면서, 예정에 없던 바르셀로나가 느닷없이 다시 튀어나온 경우라 해야 하겠다. 우리의 바르셀로나 재방문은 빨라야 2026년 이후로 생각했었다. 파밀리아 성당의 완공 예정이 2026년이었기 때문이지만, 당연히 몇 년은 예정보다도 더 지연 될 거라 단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 ‘왜 바르셀로나를 그렇게 꼭 다시 와야 한다고 생각했을까?’에 대한 해답 또한 너무나 간단했다. ‘파밀리아 성당의 일요 미사를 참석하고 싶어서’가 그 대답이다.
4년 전 여행에서도 ‘성당 미사 참석은 바르셀로나 여행 최우선 버킷 리스트’였었다. 일요일 밤 비행기가 예약되어 있어서 토요일을 비워 성당에를 갔다. 일찍 들어가 보거나 아니면 입장표를 예매해 두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아뿔싸!!!! 파밀리아 성당 입장권은 현장 판매가 없었다. 온라인 예약만 가능했다. 그때는 핸디폰 로밍 서비스도 무시하고 맨 몸으로 부딪치는 여행을 하던 때라 갑자기 모바일 이용이 불가능했다. 어렵게 어렵게 작은 여행사를 찾아가 예매를 신청했는데...... 당일과 일요일 입장권이 매진된 상태였다.
성당을 두 바퀴나 돌면서 실컷 구경을 했고, 밤에 지하철을 타고 다시 찾아가 야간 풍경도 감상했다. 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성당의 내부를 보지 못하게 생겼다는 아쉬움이 너무나 컸다. 그러다 숙소 매니저에게서 ‘파밀리아 성당의 일요일 오전 미사는 국제 미사로 영어로 진행하는데, 이 미사에는 여행하는 가톨릭 신자들을 위해서 무료로 입장을 시켜 준다’는 놀라운 소식을 접했던 것이다. 일요일 아침 일찍 배낭을 대충 꾸려놓고 서둘러 성당으로 달려갔다. 아미 수많은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고 있었다. 기다리고 기다려서 입장이 시작되었는데........ 오 마이 갓. 하늘도 무심하시지. 여행자 무료입장의 줄이 우리 열 번째 정도 앞에서 끝나고 만 것이다. 십오 분만 일찍 왔을 것을....... 또 오 마이 갓!!!!
그래서 아내를 달래려고 공수표를 남발하기 시작한 것이다.
‘성당 다 지으려면 아직도 멀었어. 그때 다시 와서 보면 되겠지 뭐. 지붕이 제대로 완공이 되어야 실내도 제대로 만들어질 것 아니야? 지금은 어설플 거라고. 그때 꼭 다시 올게.’라고 대충 공약으로 얼버무렸던 것이 느닷없이 프랑스 때문에 현실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물론 아직도 성당 완공은 한참이나 남았는데 말이다. ‘원님 덕에 나발 분다고’ 어쨌거나 유럽 서쪽 끝자락까지 왔으니 바르셀로나 들렸다 가지 뭐.
‘이번엔 기어코 파밀리아 성당의 일요 미사를 꼭 참석하고 말리라. 지극히 높은 곳에 계신 분이시여. 굽어 살펴주소서. 아멘.’
아마도 내가 기억하기로 여러해 전에 있었던 다녀왔던 ‘코카서스의 조지아. 아르메니아 여행’ 때이지 싶다.
비행 스케줄에 맞춰 공항 가는 방법으로 충주에서 출발하는 새벽 첫 공항버스를 사전에 일찍 예약한 것이다. 그런데 정초(1월1일)를 기점으로 예약한 버스 시간표가 바뀐 것이다. 하루 전에 올라가 공항 근처나 간단하게 잠만 잔다는 슬리핑 룸을 생각하다가, 혼자 몰래 떠나는 처지에 호들갑이 싫어서 그냥 버텨보기로 했다.
비행기 출발을 정확히 1시간10분을 남겨놓은 상태에서 인천공항에 도착을 한 것이다. 배낭을 들쳐 업다 시피하고 계단을 뛰어올라 보딩패스 부스를 찾아갔다. 부스에서의 체크와 수화물 운송 등 보딩패스 업무가 마무리되고 창구 문을 닫고 있었다. 땀에 젖은 채 헐떡이는 내 표정을 보고 오히려 직원들이 당황했을 정도였다. 무전기가 불이나기 시작했고, ‘혹시 사정이 생기면 짐(배낭)은 다음 비행기에 실어질 수도 있습니다’라는 전제로 시작해 거의 기적적으로 보딩패스를 했다. 출국 심사대까지 직원의 안내를 받으며 어쨌거나 입장을 했다. 그러면서 ‘저희가 좌석을 세미 비즈니스 석으로 무료 업그레이드 시켜드렸습니다’라는 말을 듣기는 들었는데, 하도 경황이 없던 처지라 그때는 그것이 무슨 말인지 이해도 못한 처지로 그저 ‘어쨌거나 비행기에 태워주기는 태워주는구나’하는 심정으로 ‘감사합니다’만 연발했던 기억이 전부다.
출국 소속을 마치고 게이트로 향하는데 정복차림의 무전기를 든 한 남자가 불쑥 나타나 내 신원을 확인을 한다. 그와 동시에 항공사 직원과 나의 마라톤이 시작되었다. 뛰고 또 뛰어서 게이트에 도착하니 탑승 수속을 담당하는 서너 명이나 되는 직원들이 오로지 나의 도착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게이트를 통과해 트랩에 들어가서도 역시나 정복차림의 무전기를 든 직원이 비행기까지 앞장서서 안내를 해주고, 비행기에 들어서는 순간 이번엔 러시아 항공기 승무원들이 좌석까지 서둘러 안내를 해준다. 수많은 사람들이 일제히 나를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느끼기에 충분했을 정도였다. 자리에 앉아 안전벨트를 매자마자 기장의 항공기 이륙 안내방송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비행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거야 완전....... 내가 무슨 CIA나 MI6의 스페셜 에이전트로 긴박하게 비밀 해외작전에 긴급 투입되는 장면을 방불케 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내가 조금만 더 능력이 있는 요원이었다면 전용비행기나 군용기를 사용했을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제임스 본드가 아니라면 이단 헌트가 나랑 닮았나?
한참이 지나서야 내가 앉은 좌석이 오리지널 비즈니스 석은 아니지만, 그동안 쭈욱 사용해 온 이코노미 석과는 많이 다른 세미 비즈니스 석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일단 넓고 훨씬 안락하고, 심지어는 기내 서비스까지 차이가 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뭘 잘했다고 항공사가 내게 이런 배려를 해주는 거지? 뛰어다닌 게 보기 안쓰러웠나?’라고 다소 의아해하기는 했지만 더 이상 관심을 두지는 않았다. ‘공짜라는데 뭐. 내게 손해가 날 것은 없지 않겠어?’라면서 말이다.
하지만, 이 같은 일이 결코 마냥 행운이랄 수 없으며, 오히려 대기업의 횡포에 의해 훨씬 더 많은 여행자들에게 심각하게 피해를 파생시키고 있는 오버부킹(Overbooking. 초과예약) 이라는 것을 여행을 마치고 나서야 깨닫게 되었다.
나처럼 행운이랄 수 있을 정도로 혜택을 보는 경우는 빙산의 일각이라고 한다. 나머지 빙산의 전부가 대부분 고스란히 선한 여행자들의 피해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그제야 겨우 깨닫게 된 것이다. 하여 나는 이 오버부킹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나름 오보부킹의 피해를 당하지 않으려는 나름의 공부를 했다. ‘나는 당하지 않으련다.’
오버부킹은 항공사의 얄팍한 상술에서 처음 시작되었다.
항공 사업은 어차피 기종에 따라 한정된 좌석 수에 의해서 판가름된다. 예약을 통해 좌석을 모두 완판한 채로 비행기가 이륙했다. 그런데 인생살이가 다 그렇듯이, 이런저런 이유로 항공권을 구입해 놓고도 그 비행기에 타지 못하는 승객들 숫자가 꾸준히 나타났던 것이다. 텅 빈 좌석을 비워놓은 채 비행기를 하늘로 날려 보낸 항공사들은 그 비어있는 좌석이 그렇게 아까울 수가 없었다. 좌석의 하나하나가 곧 머니(달러)였기 때문이다. 항공사들은 일제히 머리를 맞대고 묘수를 찾아내기에 혈안이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아니면 말고 식의 똥배짱 장사’를 시작하게 되었으니, 그것이 바로 오버부킹(초과예약)인 것이다.
일 년 전부터 사전 예약제로 싸게 항공권을 팔기 시작해서(절대로 손해 보거나 공짜는 없다) 비행 날짜가 가까워질수록 턱없이 비싸진다. 물론 항공사가 여러 여행사에 사전에 제공하고 파는 기존의 가격에는 상한선이 정해져있지만, 항공권을 사다가 되파는 중간상인(여행사)의 이익 추구권에는 한도라는 게 아예 없다. 그것이 그들의 시세차익인 것이다. 그리고 그 차익에 눈이 멀어 항공기의 제한된 좌석수를 넘어서 대충 120% 정도의 초과 판매를 일상처럼 자행하고 있는 것이다. 이미 돈을 받은 탑승객이 무슨 이유로든 공항에 오지 못하면 못할수록, 오버 부킹한 20%의 승객을 골라서 태우면 태울수록 그만큼 고스란히 이익으로 남게 되는 것이다. 그럼, 예약한 탑승객이 100% 탑승하게 되면 나머지 20%는 어떻게 되느냐? 항공운항 법에 의해 자연재해나 응급상황 발생에 대비해 마지막까지 법률적으로 비워두어야 하는 좌석을 우선 이용하고, 나처럼 무료 업그레이드라는 명목으로 팔리지 않은 비싼 비즈니스 석을 선물처럼 이용한다. 그래도 남겨지는 고객들에게는 다음 비행기 편이나 협력 항공사의 가장 가까운 노선으로 안내를 한다. 물론 그 해당 항공사의 여분 역시 오버부킹의 영역에 한해서 말이다. 대부분의 항공사들이 이미 서로 짜고 치는 고스톱이었기에 고객들의 항의나 클레임 처리에는 서로 적극적으로 도움을 나누며, 아울러 이익도 나누어 가진다. 이런 파행이 어쩌다 한 번이 아니라, 이젠 의례히 벌어지는 당연한 장사의 일부분이라 여겨지니, 이제는 각 항공사나 여행사마다 이런 오버부킹의 피해에 항의하는 소비자들의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 전문 해결사들을 고용해 전담케 하고, 그 노하우를 항공사들끼리 공유하는 세상이 되고만 것이다.
항공기를 이용한 여행 사업에 오버부킹(Overbooking. 초과예약)이 만연하게 되자, 그 별도 수입이라는 달콤한 열매를 나누어 가지던 여행사업자들이 이번엔 숙박업에 오버부킹을 끌어들이게 되었다. 모두가 여행사의 영역이었던 것이다. 호텔을 사전에 적당한 가격에 예약을 받는다. 여기도 역시나 여행날짜가 가까워질수록 가격이 오르기 마련이다. 석 달 전에 광복절 휴일에 맞추어 팔만원에 예약을 마쳤는데, 일주일 가까이 되니 십오 만원에 라도 예약을 하겠다는 소비자들이 나타난 것이다. 그러면 호텔업자는 사전 판 팔만원 예약자를 인근의 수준이 비슷하거나 좀 떨어지는 동종 업자들에게 은근슬쩍 양도를 해버리거나, 심지어는 예약 호텔의 수리나 보수 등의 내부사정을 이유로 예약을 파기해버리는 정도에 이르고 말았다. 그 또한 사기 비슷한 행위를 전담하는 특별 부서까지 두고서 말이다. 그래도 시기가 닥쳐서 비싼 가격에 되파는 이익이 훨씬 짭짤했던 것이다. 여기에 양심이나 상도덕이나 건전한 여행업계의 미래는 어디에도 없다. 이미 돈에 노예로 전락한 승냥이들의 본능뿐인 것이다.
오버부킹(Overbooking. 초과예약)을 무조건 모두 사악한 장사속이라고 할 수는 없겠다. 버려지는 빈자리나 빈방을 정도껏, 부득이 누군가 허겁지겁 급하게 필요한 사람들에게 충분히 소중하게 쓰여 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만행된 오버부킹의 피해는 99% 정도가 해악이라고 나는 그동안의 경험을 통해 결론을 내렸다.
멀리까지 집 떠나온 여행자들에게....... 사용자와 소비자 모두에게 신뢰라는 성스러워야 할 영역을 파괴해 버렸으며, 여행을 사기 치려는 자와 사기 당하면 안 되는 자들의 전쟁터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이다.
지극히 높은 곳에 계신 분에게 나는 이 대목에서 내방식으로 이렇게 간절한 기도를 드리고 싶다. ‘오버부킹의 폐단을 없애 주십시오. 오버부킹으로 이익을 이미 보았고 또 그런 악행을 거듭거듭 반복하는 여행사 운영자나 업무에 실제로 관여하는 모든 사람들을 잘 기억하셨다가, 언제고 그들이 여행자가 되어 길을 나섰을 때, 꼭 닮은 오버부킹의 경우로 다섯배 열배의 피해와 고통을 당하게 해 주십시오. 조금 더 바라기는...... 그들에게는 오버부킹의 손해를 넘어서 재산까지 거덜나는 소매치기를 당하거나, 후유증이 오래가는 노상강도를 당하게 해 주십시오. 하늘의 정의와 인과응보를 몸소 체험하게 하여 주십시오. 간절하게 기도드립니다. 아멘.’
이렇게........ 적어도 여행에 관한한 어느 정도의 레벨(?)에 올라있다고 자부하는 별종(?)인 나에게 바르셀로나의 한 호텔이 도전을 해 왔다.
이번 여행의 마무리 단계에서 만나게 되는 바르셀로나는 파밀리아 성당의 일요 미사를 제외하고는 그냥 아무런 계획이나 일정 없이 도심 산책이나 하면서 여유롭게 쉬다가 떠나기로 이미 마음을 먹고 찾아왔었기에, 걸어서 다니기에 편안한 에스파냐 광장 부근의 호텔을 두 달 전에 사전 예약을 해두었다. 4년 전에 바르셀로나를 아주 열심히 죽지 않을 만큼 뛰어다니면서 어느 정도 누려보았기에 어떤 바램이나 여행적인 욕심도 없었다. 우리에게 바르셀로나는 이미 고모 댁이나 이모 집처럼 여유롭고 안락한 휴식처였기 때문이다. 그새 버스 노선이나 지하철 노선이 새로워진 것이 아니라면 바르셀로나는 이미 우리 손바닥 안에 있었던 것이다. 몬주익 언덕을 빼고는 이미 걸어서 대부분을 돌아본 처지였으니 말이다.
그런데 바로 어제...... 세테 <해변 묘지>를 돌아보고 있었을 때, 바르셀로나 예약 호텔 측으로 부터 메시지가 도착했다. ‘호텔의 내부 사정으로 인해 부득이 예약을 해지 하거나,아니면 인근에 소개해 드리는 비슷한 수준의 서너 개 호텔 중에서 골라 새롭게 계약을 하면 비용의 차감 없이 그대로 순조롭게 이용에 불편이 없도록 안내를 해주겠다’는 그야말로 오버부킹의 전형적인 사례의 장난질을 나에게 감행해 온 것이다.
즉시 나는 이번 계약의 주무 대행사인 세계적인 호텔 연결체인 ‘부킹닷컴(Booking.com)’에 짧게 요청서를 호텔에서 보내온 메시지의 카피와 함께 보냈다.
‘나는 이제 와서 부킹닷컴의 체인업체인 바르셀로나 모 호텔 측이 제기해 온 일방적 계약 파기를 받아드릴 의사가 전혀 없다. 부킹닷컴의 철저한 지휘감독을 요구한다. 나는 이 계약 파기가 오버부킹의 전형적인 사기행위라고 생각한다. 나는 내일 계약된 호텔을 찾아가겠다. 오버부킹의 폐단인지 아닌지는 직접 방문해 보고 판단하겠다. 만약 오버부킹이 입증된다면 나는 부킹닷컴이 책임지고 열배의 배상을 해 줄 것을 사전에 분명히 밝혀둔다. 지금 보내고 받는 문자와 모든 자료는 차후에 나의 법적 대응에 증거로 제출할 것이기에, 부킹닷컴의 분명하고 책임 있는 답변과 해결책을 바란다.’라고 보냈다.
그때부터 부킹닷컴으로부터 국제전화가 거듭해서 걸려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받지 않았다. 몽펠리에 숙소에 도착하고 나서야 부킹닷컴의 전화를 받았다. 순전히 동배짱 아닌가? 내일 당장 바르셀로나에 가야만 하는 상황에 느닷없이 방이 없어졌는데도 말이다. '내가 가진것은 시간과 배짱뿐인걸.' 이라는 사실을 그들은 미처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정중한 사과가 있은 다음에 모 호텔 측과 충분히 소통을 했으며, 객실 내부의 습기로 인한 곰팡이가 심각해 현재 철거작업 중이라면서 서너 장의 사진까지 보내왔다. 거듭 양해를 구하면서 모 호텔에서 소개하는 장소 중에서 골라 이용하면, 처음 이동하는 교통비와 부득이 발생하는 비용까지를 자신들이 책임지고 보상하겠다는 내용을 열심히 설명해 왔다.
항공사와 여행사가 비싼 돈을 들여서 별도의 (오버부킹 대응 팀)까지 꾸며서 운영하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그들에게 도배를 새로 하거나 호텔의 외벽을 수리하고 화장실을 뜯어고치는 행위 정도는 가장 흔한 명분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평소 예약한 호텔을 찾아가서 서류 수속을 마치고 나서야 동급의 여러 개의 객실 중에서 하나를 배정받아 오지 않았던가 말이다. 예약 당시부터 캠핑장처럼 2구역 D-17번을 배정받는 것이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그 호텔 전체거나 일부 층이 모두 폐쇄되고 수리에 들어간 상태여야지, 방 하나가 곰팡이로 수리중인데 그게 아직 찾아가지도 않은 마당에 내 방이라는 법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하여 나는 다시 이런 내용을 부킹 닷컴에 보냈다.
담당자의 이런 저런 구질구질한 설명을 단칼에 자르고 새로운 협상안을 단호하게 제시했다. ‘에스 오아 노우’중에서만 선택하고 끝내자고 했다.
‘내가 모 호텔을 선택한 이유는 우선 에스파냐 광장 주변이라는 위치가 중요해서였고, 주방 시설이 꼭 필요해서고, 전용 화장실과 전용 욕실이 필수조건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루 전에서야 모 호텔 측이 일방적으로 계약 해지를 요청해 왔고, 오버부킹 문제라는 나의 이의 제기에 부킹닷컴은 아무런 확인도 해주지 못하고 있다. 나는 바르셀로나에 가야만 하고 내가 바라는 호텔이 꼭 필요하다. 나는 이제 그것을 당신들인 부킹닷컴을 통해 분명하게 확인시켜 주려고 한다. 비용에 상관없이 모 호텔을 계약했던 조건에 부합하는 새로운 호텔을 부킹닷컴 사이트를 이용해 지금 바로 예약을 할 것이다. 그 결과로 파생되는 비용의 차이는 당연히 부킹닷컴과 모 호텔이 책임을 져야만 할 것이다. 나의 계약이 만약 후불제였다면 나름 당신들에게도 여지가 있겠지만, 내 계약은 선불제였고 나는 분명히 이미 전액을 결재했다. 내게 문제가 생겨서 계약을 이행하지 못했다면 나는 100% 그 돈을 날렸을 것이다. 그렇다면 반대로 당신들도 일방적 계약 파기에 대한 책임을 모두 져야만 한다. 내게 시간적 정신적 손실과 공황상태를 만들어 주었으며, 추가적인 여러 비용을 유발 시키게 되기 때문이다. 더는 말하지 않겠다. 지금 당장 새로운 바르셀로나 호텔을 예약하고 결재를 할 것이다. 모든 것은 당신들의 책임이다.’
나는 즉석에서 부러 한 단계 높은 레벨의, 위에 제시한 조건들에 맞추어서 골라 예약을 했고 결재를 했다.
처음 내가 예약한 호텔의 요금은 사전에 좀 저렴할 때 미리해서 1박에 5만7천원 정도였다. 여행을 마치고 3주 지나서 부킹닷컴으로부터 차액에 대한 보상으로 기어코 143.000원을 배상 받아내고야 말았다. 대충 환율이고 뭐고 1박에 4만 7천 원 정도씩 사흘간 추가 비용이 발생한 것이다.
그랬음에도 부킹닷컴(Booking.com)에서의 내 신원은 ‘Genius Level 3’단계에 올라 있다. 가맹 업체에서 15~20% 할인을 받고, 우선 상담과 예약을 받을 수 있고, 호텔에서 무료 조식을 제공받을 정도의 자격을 유지하고 있다. 4단계가 최고로 높은 것이다.
오버부킹(overbooking)에서는 끝내 소비자위 정당한 권리를 관철 시켜서 승리를 따냈지만, 에스파냐 광장 주변을 선택해 이번 바르셀로나 여행을 쉽고도 편리하게 하려던 애초의 계획은 깨지고 말았다. 추가 보상까지 더해서 숙소를 얻고자 했지만 당면한 상황에서 에스파냐 광장 주변의 호텔들은 그보다 더 높은 비용을 요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4년 전의 여행에서는 숙소를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에서 횡으로(왼쪽) 네 블록 떨어진(지하철 두 정거장) 세인트 존 거리에 머물렀었는데, 이번엔 왼쪽으로 다시 여섯 블록 떨어진 오거스트 거리(Via Augusta 167)에 아파트 형태의 호텔을 숙소로 얻은 것이다. 나름 호텔은 깨끗하고 조용하고 마음에 들었다. 다만 애초의 바람과는 다르게 람블라스 거리를 비롯한 도시여행의 중심에서 한참이나 많이 떨어졌다는 사실이다. 시내버스 정류장과 지하철이 호텔 문 앞에 바로 놓여있어서 전혀 문제될 것은 없겠으나, 4년 전에도 바르셀로나의 대부분을 씩씩하게 걸어서 다니던 사람이 지금 옆에 꼭 붙어 있다는 사실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아니나 다를까? 이제부터 나설, 도착 첫날의 외출과 중간에 한 번, 그리고 귀국 비행기 타러 공항에 가는 순간을 제외하고는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 본 적이 없었다. ‘우리가 당장 어디를 꼭 가야겠다는 특별한 계획이 있는 것도 아니지. 가진 것은 튼튼한 두 다리에다가 시간과 배짱이 전부지. 그러니 걸어야지. 가다가 쉬고 또 가다가 뭐라도 먹고, 또 가다가 싫어지면 걸어서 돌아오면 되는 거지 뭐. 안 그래?’
‘헐!!!!!’
바르셀로나에서 무지하게 걸어 다녔다.
바르셀로나를 다녀 본 아는 사람만 안다. 예를 들어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에서 콜럼부스 동상까지 걸어가자면 얼마난한 거리이며 얼마나 시간이 걸리고, 그게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이렇게 말한다. ‘어쨌거나 바르셀로나에 왔으니 높은데서 죽어라 아메리카만 쳐다보고 있는 콜럼부스랑 인사는 해야 될 것 아니야? 가서 만나 보자구?’하면서 앞장서서 길을 걸어가기 시작한다. 점심때가 지나서 숙소에 돌아와 쉬다가 말고, ‘콜럼부스 뒤편 옛날 세관구역 마리나에 대형 쇼핑몰이 생겼다며? 그 주변에 맛 집도 많다고 하던데 가봐야 하지 않겠어? 신발 끈이 끊어져 불편한데 새로 하나 사야 할까봐. 가보자구?’하면서 아침나절 갔다 온 그 길을 또 앞장서서 걸어간다. 지하철도 한 번 이용해 줄 법도 하건만, 시내버스를 타고 도심 구경도 해 볼만 하겠던데....... 또 발품을 기어코 파시겠단다. 문타네르(Muntaner - Via Augusta) 역에서 콜럼버스 동상까지가 거리가 4.7km에 택시로 17분, 대중교통으로 30분이나 걸리는 거리인데...... 그것도 오전 오후로 나누어 한 번씩 두 번을 가자신다. ‘길에 드러눕자’ ‘편도는 몰라도 두 번 왕복 코스는 죽음이다’
‘아이고!!!! 어디 다소곳이 뒤만 졸졸 따라다니는 여자 할망구 없나?’
‘지금 여기서 죽어 볼래?’하는 시선으로 빨리 쫓아오라고 재촉하는 눈치였다. 이틀째 되었던 그날 말이다.
어쨌거나...... 바르셀로나에 도착해 호텔에서 짐을 풀고나니 시간이 참으로 어중간 했다.
야간 여행을 각오하고 람블라스 거리까지 나가서 돌아다니다가 외식을 하고 바르셀로나의 야경을 구경하다가 좀 늦었다 싶을 즈음에 돌아오는 것이 좋겠다 싶었다. 그런데 아내가 지금 몸살 기운이 약간 시작되는 것이 가까운 산책이나 좀 하다가 저녁을 숙소에서 해결하고 일찍 푹 쉬고 싶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가볍게 동네 산책을 하기로 했다.
숙소가 이쪽 외곽으로 바뀌어 버린 마당에 불쑥 떠오르는 생각이...... 4년 전 여행에서 한 번 다녀올까 생각은 있었지만 여러가지 사정으로 포기했던 장소가 비교적 인근에 있다는 기억을 떠올린 것이다. 시내버스로 15분 정도면 충분히 찾아갈 수가 있겠다 싶었다. 그래서 동네 산책을 그곳으로 다녀 오기로 하고 옷차림을 좀 두둑히 한 후에 숙소를 나섰다.
벙커(Bunkers del Carmel)는 언제부터인가 젊은 여행자들 사이에서 바르셀로나에 가면 한 번은 꼭 찾아가 볼만한 명소로 입소문이 나기 시작하더니, 지금은 하나의 여행상품으로 등장했을 정도로 유명세를 타고 있다. 아마도 바르셀로나를 찾아오는 젊은 자유배낭여행자들에게는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이나 카사 밀라. 카사 바트요 못지않은 핫 플레이스이자 배낭여행 성지로 인정받고 있는 새로운 관광 명소가 되었다. 벙커에서 노을을 바라보면서 친구나 연인과 나누는 한 잔의 와인이나 캔 맥주 하나가 이미 대세로 정평이 나있을 정도다.
지금 우리는 바로 그 벙커를 찾아 길을 나선 것이다.
바르셀로나의 야경을 360도 파노라마 뷰로 즐길 수 있는 최고의 전망대를 찾아서 말이다.
바르셀로나를 북쪽에서 병풍처럼 에워싸고 있는 세 개의 산봉우리(Tres Turons)는 어느 오래된 도시에서나 그랬듯이 도시를 방어하는 방공포대로 만들어졌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오늘 우리가 찾아가고 있는 벙커(Bunkers del Carmel)다. 과거에는 비밀스럽게 감추어진 군사시설이었지만 지금은 바르셀로나 최고의 전망대(해발 262m)로 360도의 파노라마를 여행자들에게 선물해주고 있다. 스페인 내전 당시까지 아주 중요한 군사 요새였지만 세월이 변해가면서 군대가 철수했고, 바르셀로나가 급격하게 발전해가면서 부동산 가격이 치솟고 빈부의 차가 극심해지면서, 도심에서 밀려난 극빈자들이 여기 산꼭대기 벙커 시설에 둥지를 틀고 움막생활을 시작했다. 몰려드는 사회제도에서 밀려난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판자촌 마을이 생겨나게 되었다. 사회에서 격리되다시피 한 부랑자들과 버려진 공간을 가리키는 용어가 벙커(Bunkers)로 이 지역에서는 통용되었던것이다. 가우디를 거치면서 바르셀로나는 세계적인 관광명소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백 년이 지났음에도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은 여전히 종탑 공사가 한창이었고 도시는 몰라보게 커져 갔다. 그런 와중에 여행자들 사이에 입소문을 타고 ‘변모해 가는 바르셀로나를 한눈에 가장 잘 바라볼 수 있는 명소가 벙커야. 야경이 정말 끝내준다고.’ 은밀하게 퍼져나가기 시작했던것이다.
상황이 이쯤되자 바르셀로나 시 정부로서도 더 이상 모른체 방관만 하고 있을 수 없게된 것이다.
낡은 대공포를 철거하고 과거 군사요새로서의 부정적 이미지를 가진 잔재를 말끔하게 제거해 버렸다. 다만 과거에 이곳이 군사 요새인 방공포대였다는 것을 인식시켜 줄 정도의 역사성을 가진 흔적은 부러 남겨 놓았다. 판자촌도 철거하여 주민들을 산자락 아래의 지역으로 이주하도록 했고, 산 위의 마을도 대대적으로 정비를 마쳤다. 도로를 정비하고, 버스노선을 설치하여 그곳의 마을을 한 노선버스의 종점으로 만들었다. 산사태 지역으로 난간과 철조망을 설치했고 가파른 길에 계단을 놓았다. 그리고 나머지는 좀 먼 과거의 70년대 풍경처럼 모두 그대로 두었다. 그러자 그곳으로 수많은 젊은이들과 배낭여행자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옛스러운 과거의 시간과 장소속에서 초현대적인 바르셀로나의 전경을 내려다보고, 도시를 물들이는 아름다운 노을을 바라보고, 밤하늘의 별들이 지상에 내려와 깔린듯한 바르셀로나의 아름다운 야경을 모두 볼 수 있는 새로운 최고의 관광명소로 재탄생한 것이다.
벙커(Bunkers del Carmel)에 따라붙는 카멜은 특별한 의미가 없는 단어다. 과거에 이곳에 있던 판자촌을 부르던 이름이었다. ‘판자촌 마을의 벙커’라 불렀는데, 판자촌이 사라진 지금에도 명칭에 그대로 남아 따라붙어 다니고 있을 뿐이다.
벙커를 여행하자면 몇가지 유념할 것이 있다.
벙커는 바르셀로나에서 유일하다고 할까 아니면 바르셀로나에서 가장 치안이 안 좋은 지역이라고 해야 할까 하는 우범지역에 속한다. 벙커를 찾는 사람들의 20% 정도는 새벽에 일출을 보러 이곳을 찾는다. 그리고 20% 정도가 한낮에 올라와 보거나 일부 여행사 프로그램이 주로 낮을 택한다. 나머지 60% 정도가 거의 해가 지는 시점을 시작으로 노을을 보고 야경을 보고 내려가는데, 그러다 보면 거의 밤 9시를 넘기는 정도가 대부분이다. 한적하고 외진 산자락 꼭대기에 외길을 아니지만, 주도로로 만든 골목길 하나에 곁가지로 몇 개의 임시도로가 전부다. 가파른 나무 계단과 돌계단이 항상 병목현상을 유발한다. 가로등이 거의 없다시피 한 상황이라 야경을 보려는 여행자들은 필수로 개개인이 랜턴이나 조명기구를 반듯이 휴대해야만 한다. 하산하려는 사람이 밀리는 혼잡함 속에서 소매치기가 극성을 부리고, 가끔 뒤늦게 떨어진 사람들을 상대로 강도 사건이 빈번하게 벌어지기도 한다. 하산시 극심한 혼잡을 각오해야만 한다. 연인이나 친구와 벙커에서 노을이나 야경을 바라보면서 마시는 와인이나 캔맥주를 아주 멋진 추억이라고들 이구동성으로 말하는데...... 과도한 음주는 여러가지 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만은 꼭 기억해주었으면 하고 바란다.
보호자를 동반하거나 무리를 지어 움직이는 방문이 좋고, 개인 조명기구 소지는 필수이며, 너무 늦은 방문을 삼가며, 모든 소지품은 놓고 가벼운 차림으로 오는 것이 좋다. 그렇다고 특별히 겁을 내거나 방문을 꺼릴 필요까지는 없다고 생각한다. 약간의 사전 각오와 준비만 챙긴다면 그것들을 충분하게 보상해 줄 만큼 아주 멋진 바르셀로나 여행의 최고 명소이기 때문이다.
벙커에 가기 위해선 산 파우 지하철역(Guinardó Hospital de Sant Pau)이나 엘 카멜역(El Carmel)에서 내려 벙커 표지판을 따라 걸어서 올라가는 방법도 있지만, 그라시아 거리에서 24번 버스를 타고 종점까지 가거나, V17번 버스를 타고 공원 입구에서 내려 계단을 올라가는 방법을 주로 택한다. 거주인구 1백 오십만 명의 바르셀로나에 코로나 사태로 잠시 주춤하기는 했지만, 다시 한 해에 약 1.200만 명의 여행자들이 방문하고 있다. 이는 곧..... 여행자들에게는(여행관련 사업자 포함) 천국일 수 있겠지만, 순수한 바르셀로나 거주인들에게는 점점 지옥으로 변해가고 있는 지극히 현실적인 상황인 것이다. 이런 뜻밖의 사회적 현상을 오버투어리즘(Overtourism)이라고 한다. 오버부킹처럼 이 또한 매우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용어인 것이다. 많은 유명 여행지들이 지금 오버투어리즘에 심한 몸살을 앓고 있다. 이 이야기는 차차 하기로 잠시 미루어 두어야겠다.
우리는 알맞게 때를 맞춰 벙커에 도착했다.
무척이나 많은 여행자와 연인들이 산등성이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실제로 치즈와 소시지와 비스킷을 놓고 와인잔을 기울이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서서히 해가 서산에 기울면서 하늘이 붉게 물들어가기 시작했는데...... 아뿔싸! 아내의 표정이 일그러지고 갑자기 컨디션이 안 좋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몸살 기운에 근육통까지 번지기 시작했다. 거기다가 저녁 무렵에 접어들면서 이 산등성이에 제법 매섭게 한겨울 같은 바람이 세차게 불기 시작했으며, 기온이 급격하게 떨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주변 사람들 중에서 추위를 호소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더 이상은 무리지 싶어졌다. 우리의 여행이 오늘이 마지막은 아니고 아직 이틀이나 남아있지 않은가? 우리는 서둘러 하산하기로 결정했다. 노을과 야경이 무척 아쉽기는 하지만 그보다는 건강을 추스르고 컨디션을 회복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여행을 통해서 이미 깨달았고 충분히 절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을에 도착하니 막 내려가려는 차가 있어서 올라탔다. ‘이제 본격적으로 노을이 시작될테인데 일찍 내려가시네요?’라고 운전 기사가 묻는다. ‘낮에 일찍 올라온 데다가 저녁 약속이 있어서요.’라고 대답해 준다.
찬바람을 피했을 뿐인데 숙소에 돌아오니 아내의 컨디션이 그새 많이 올라오고 있음이 느껴져 무척 다행이었다. 혼자서 다시 나가 조금 떨어져 있는 대형마트로 향했다. 시장을 보아야 했기 때문이다. 오늘 저녁은 내가 챙겨야 하겠다. 야채 샐러드랑, 빠에야 조리식품이랑 덥히면 되는 국물이 있는 스튜에다가 과일과 와인을 두 병 샀다 (결국 우리는 벙커에서 누릴 수 있는 노을과 야경을 끝내 보지 못했다. 하지만 요즘 핫플레이스로 떠오르고 있는 벙커를 이 글을 읽어주시는 분들에게 보여드리기 위해, 구글을 통해서 몇 장의 사진을 퍼날라 게재하였다. 늘 전제하듯이 오로지 글의 내용을 쉽게 전달하거나 이해를 돕기 위한 방편으로서 말이다. 그런 사진에는 몽펠리에에서 (MMT) 표기를 남겼듯이, 바르셀로나에서는 구글에서 가져왔으므로 (google) 표기를 남기도록 하겠다. 상업적 이용이나 다른 의도가 없음을 사전에 분명하게 남기면서 말이다.)
그렇게 바르셀로나의 밤이 깊어만 가고 있었다.
아침 산책으로 혼자서 4년 전 방문했을 때 머물렀던 세인트 존 거리의 녹지 공원을 걸었다. 여러 가지로 감회가 새로웠다. 새벽 시장도 찾아온 계절이 달랐음에 야채와 과일에 약간 변화가 있었을 뿐, 짚으로 엮은 꾸러미에 담긴 달걀까지 거의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 창문이 굳게 닫힌 2층 숙소를 올려다보면 오늘은 어느 나라 어떤 손님이 묵고 있을까 하고 궁금해지기까지 한다. 이른 아침 바르셀로나의 현지인들이 주로 사는 거주지역은 한산하고 고요했다. 청소일을 하는 분들만 여기저기 보이고, 이른 출근이나 등교를 하는 사람들이 종종걸음으로 지하철을 향하고 있다.
여행자들이 주로 찾는 바르셀로나 명소들이 어떻게 보자면 점점 테마파크처럼 변해가는 변화에 점점 소외감과 불편을 호소하는 이렇게 주로 외곽에 거주하는 현지인들은 테마파크처럼 변한 도시 놀이공원의 느낌을 혐오하기 시작했다. 조용하고 여유로웠던 자신들의 삶의 공간이 점차 훼손을 넘어서 여러가지 불편한 것들로 심각하게 침해를 받기 시작했다고 깨달았던 것이다. 외곽의 주택가가 아니면 이제 바르셀로나에서 조용하고 깨끗하고 한적한 아침 산책과 운동을 할 수 있는 공간이 거의 사라졌다. 밤새 왁짜지껄 시끄럽고 아침이면 사방에 오물과 쓰레기가 넘쳐나고 사람과 자동차가 서로 얽혀서 혼란스러운 아수라로 점차 변해가기 시작한 것이다. 철제 발코니에 걸터앉아 아침햇살을 느끼며 진한 에스페레소 한 잔을 즐기던 진정한 ‘카탈류냐의 아침’이 언제부턴가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럼에도 4년만에 바르셀로나를 다시 찾은 나의 시선엔 여전히 카탈루냐 특유의 매력들이 넘쳐나고 있다.
짧은 경험뿐인 내가 바르셀로나를 어떻게 평가내릴 수는 없겠지만 굳이 바르셀로나를 정의하자면....... 스페인스럽다는 마드리드의 남성적 스타일에다가 프랑스 파리가 가지고 있는 고혹적 우아함과 하나의 주제로 통일시킨듯한 도심 정취가 절묘하게 섞여서 새롭게 만들어내는 멋과 맛이 바로 바르셀로나가 아닐까 싶다.
서둘러 숙소를 나와 우리는 또 하루를 걸으면서 시작한다.
오늘은 바르셀로나 중심가로 도심투어를 하는 날이다. 어디로는 눈길이 가고 발길이 쏠리는 대로 걷다가 어디 멋진 노천카페라도 나타나면 뜨거운 아메리카노 한 잔에다가 스페인식 아침대용 빵을 하나 고르면 되는 것이다. 여기는 프랑스가 아니다. 아메리카노를 주문하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그런 아메리카노라 나온다. 크로아상이 아니라 조금은 거친 크기가 다양한 구수한 빵들이 다양하게 나온다. 굳이 빠게트 빵을 찾지 않아도 된다. 왜? 여기는 엄연한 스페인이니까 말이다. 여기에서는 길을 걷다 보면 빵을 파는 전문 제과점이랄까, 파리빠게트나 투레쥬르가 아니라, 그냥 빵만 전문으로 만들어 카페나 레스토랑에 납품하는 빵 공장을 자주 볼 수 있다. 이른 아침에는 일부러 찾아보지 않아도 아주 쉽게 만날 수 있다. 대부분 그 동네에서 가장 먼저 문을 열고 일찍부터 빵을 굽기 때문이고, 근처에만 가면 벌써 행복 가득한 냄새가 전해오기 때문이다. 우리 숙소가 있는 불록의 코너를 돌면 두 번째 가게가 바로 빵공장이다. 6시에 주인이 나오고 직원들은 6시반에 출근한다. 정확히 7시에 문을 열고 아침 빵을 판매한다. 어떻게 내가 그리 잘 아느냐고? 산책 나갈 때 인사하고 돌아오면서 매일 빵을 샀으니까 잘 알 수밖에........
‘아니다. 그래도 바르셀로나에 왔는데, 오늘은 노천카페가 일찍 열었으면 추로스(churros)로 모닝커피를 대신해 볼까?’
‘그러면 제대로 스페인식 아침이 되지 않겠어?’
‘추로스는 포루투갈이 원조 아니야?’
‘그런가? 어쨌거나 벌써 초콜릿에서 라틴 버터 냄새가 나잖아. 아무렴 어때? 여기가 리베리아반도인걸. 개네들 옛날엔 같은 하나의 나라였어.’
그렇게 걷다보면 카탈루냐 광장이 나온다.
지하 계단은 지하철 탈 때나 내려갈 일이지, 지하철을 탈 것도 아니면서 툭하면 내려갔다 다시 올라갔다는 반복한다. '좀 무단횡단 좀 하면 안돼?'
그러다 보면 바르셀로나를 찾는 자유여행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람블라스 거리가 나온다. 보케리아 시장도 있고, 우리가 행복했던 KFC와 맥도널드 매장도 그곳에 있다. 우리가 이 지역을 가장 좋아하는 이유는 여기 이 람블라스 거리 뒷쪽으로 바르셀로나의 고딕 지구가 펴쳐져 있기 때문이다. 대성당도 이곳에 있고, 중세풍의 좁은 골목길이 사방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어서 그야말로 시간여행을 하는 듯한 기분을 안겨주기에 충분한 아주 매력적인 장소다.
사실 나는 대성당과 여러 왕궁들이 빼곡히 옛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채 현재에 까지 늠름하고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이 고딕지구가 가장 좋다.
오늘은 이 고딕지구를 마음껏 활보하고 한없이 누려보고 싶다.
고딕지구(Barri Gòtic)란 말 그대로 고딕 양식의 건물들로 빼곡한 역사지구로 라는 말이다. 로마 시대의 성벽에서 시작되는 바르셀로나의 역사 자체라 할 수 있으며, 그 중심에 배꼽처럼 14세기에 건립된 대성당(Cathedral of Barcelona)이 자리 잡고있는 유서 깊은 지역이다. 이곳에 오면 어디를 바라보든 어디를 걷던 사방에서 고딕 냄새가 팍팍 풍겨 나오고 고딕에 흠뻑 취하게 된다. 그것은 아마도 옛 정취이며 역사의 향기다. 분위기가 사뭇 장엄하고 웅장한 광장과 아르누보 기념품들이 가득한 상점들과 고서적상이나 골동품 가게들, 옛스런 멋이 가득한 노천카페와 고풍스런 와인바와 클래식한 레스토랑들이 곳곳에 들어서 있다. 카탈루냐 민요를 연주하는 거리 악사가 있고, 최신 음악을 들려주는 버스킹 팀과 공연을 펼치는 비보이들과 열광하는 관중들이 뒤섞여 있는 아주 매력적인 장소다. 좁은 골목길이 끝없이 이어지고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석축 건물의 위용이 잠시 방문자의 발걸음을 멈칫거리게도 하지만, 멋스런 돌출형 창문과 석축 위로 삐죽 튀어나온 발코니와 거기에 매달려 있는 등불과 매달린 나무 상자에 들어있는 여러 가지 꽃들이 그야말로 환상적인 섬세한 디테일로 다가온다.
어디에서 시작해 어디를 향하던지 고딕 지구를 거닐다 보면 누구나가 종국엔 누구나 '왕의 광장( King Square in Barcelona)'에 닿게 되어 있다. ‘고딕이 무엇인지 궁금하다면?’ 이 광장의 계단에 가만히 앉아서 한동안 멍때리기를 해보면 고딕이 무엇이며 어떤 아름다움이 있고 어떤 향기가 묻어나는지 저절로 알게 될 것이다. 굳이 말이나 글로 써서 가르쳐주지 않아도 스스로 눈과 가슴으로 자연스레 느끼고 깨닫게 될 것이다.
‘설마?’
‘아니다. 정말로 그렇게 된다.’
그리고 이 고딕의 숲길을 마냥 걷다보면 골목길이 만나는 조금 너른 공터(작은 광장)에서 자주 화가들을 만날 수 있다. 그들에게선 예술가의 향기가 은은하게 풍겨 나온다. 파리의 몽파르나스 언덕에서 만나는 화가들의 분위기와는 완전히 다른..... 스페인만의 어떤 멋스러움이 느껴진다. 멋있다. 파리 몽파르나스 언덕의 화가들 분위기 보다 바르셀로나 고딕지구의 화가들 분위기가 훨씬 매력적이다. 파리가 다소 실험적이라거나 상업적인 분위기라면 바르셀로나는 어떤 미술 아카데미 같은 분위기가 느껴진다. 진지함과 여유가 배어있다. 그런것을 예술혼이라고 표현해야 하는 것일까? 단적으로 표현해서 아마추어와 프로의 느낌 차이라고 해야할까?
콜럼버스 기념비(Columbus Monument)는 카탈루냐 광장에서부터 시작된 람블라스 거리가 끝나고 지중해가 시작되는 해안 경계지점의 교차로 중앙에 마련된 광장에 60m 높이의 기둥이 설치되었고, 그 위에 다시 7.2m의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Christopher Columbus) 청동상이 올려져 있다.
이탈리아 제노바 출신인 콜럼버스는 바스코다마가 희망봉을 돌아 인도로 향하는 신항로를 개척하는 것에 자극받아, 자신은 대서양을 돌아 인도에 이르는 신항로를 개척하겠다고 생각하고 멀리 포르투갈로 달려가 해양왕 엔리케 왕자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하지만 그 요청은 거절되었고, 콜럼버스는 레콩키스트 운동으로 통일 스페인을 완성한 이사벨 여왕이 코르도바에 머물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거기로 달려갔다. 모든 사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여왕은 콜럼버스의 탐험계획을 수락하고 지원을 마다하지 않았다. 1492년 콜럼버스의 인도 신항로 개척을 위한 콜럼버스의 선단은 세비야 항구를 출발했다. 어쨌거나 진짜 인도는 아니었지만, 중남미의 도미니카 공화국 인근의 신대륙에 도착하기는 한 것이다. 금값보다 비싼 인도산 향신료를 가져오진 못하였지만, 소량의 금과 은덩이에다가 바나나와 빵나무와 토마토와 감자를 비롯한 유럽에 없는 것들을 가지고 귀국길에 올랐다. 하지만 대서양을 돌아 지중해로 들어서는 시점에서 풍랑을 만나 파손된 배를 타고 파도에 떠밀려 다니다가 겨우 도착한 곳은 스페인이 아니라 포르투갈의 리스본이었다. 새로운 항로와 신대륙 소식을 접한 엔리케 왕자는 콜럼버스에게 포르투갈에 귀화할 것과 탐험의 결과를 포르트갈에 바칠 것을 요청하였으나 콜럼버스가 이를 거절했다. 당시 포르투갈이 스페인에 맞설 정도의 국력을 가졌다면 콜럼버스의 성공은 어쩌면 포르투갈의 차지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엔리케 왕자의 야심이 아무리 컸다 해도, 이슬람 세력을 유럽의 영토에서 완전히 몰아낸 직후의 이사벨 여왕이 통치하는 스페인과 대적할 정도의 자신은 없었기에, 배를 수리하고 선원들을 치료해 주고 순순히 다시 스페인으로 보내 주었다. 콜럼버스는 다시 출항지였던 세비야 항에 무사히 도착했다. 하지만 여왕이 그곳에 없었다. 코르도바에도 없었다. 당시 여왕은 바르셀로나에 머물고 있었던 것이다. 스페인 통일왕국을 이룩하고 이슬람을 리베리아 반도에서 몰아내기 위하여 스페인의 두 봉건왕조가 정략결혼을 한 것이, 카스티야 왕국의 이사벨 여왕과 아라곤 왕국의 페리디난도 왕의 결혼이었던 것이다. 카스티야 레온왕국은 마드리드를 중심으로 스페인의 중북부 대부분을 차치하고 있는 최고의 봉건영주였고, 아라곤 왕국은 바르셀로나를 중심으로 발렌시아와 피레네 산맥을 넘어 프로방스의 서쪽 해안을 지나 코르시카 같은 지중해의 섬들과 이탈리아 반도의 나폴리 왕국과 시칠리아 왕국을 실질적으로 식민지로 다스리는 봉건 왕국 이었다. 하여 지금 여왕부부는 남편 왕국의 수도인 바르셀로나에 머물면서 통일 스페인을 순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콜럼버스는 다시 배를 몰로 바르셀로나로 향했다. 여왕에게 탐험 성공의 보고를 올려야 했던 것이다. 콜럼버스의 귀국을 놓고 왕국이 시끄러워졌다. 사실적으로는 퉂자에 비해 그 성과가 지극히 미미했던 것이다. 중요한 인도산 후추는 어디에도 없었다. 신항로라고는 하지만 아직 미개척 상태인 그 신대륙에서 더 무엇이 나올지 장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칭찬과 처벌을 놓고 치열하게 설전이 벌어졌다. 심각한 위기에 몰린 콜럼버스에게 여왕의 후한 상이 내려졌다. 탐험의 결과만으로 공과를 따진 결과가 아니었다. 지금 여왕은 이슬람 세력을 유럽 영토에서 몰아내고 기독교(로마 가톨릭)을 구출한 당대 최고의 여걸이었던 것이다. 여왕에게 그 지위와 명성에 어울릴법한 품위와 아량과 너그러움이 있다는 것을 세상에 보여주기에 더없이 좋은 기회였던 것이다. 더욱이 콜럼버스가 포르트갈 엔리케 왕자의 회유를 뿌리치고 자신에게 왔다는 사실은 여왕의 위상을 한껏 높여주기에 더없는 호재였던 것이다.
여왕은 콜럼버스에게 귀족의 작위를 내리고 영지와 재산을 내려주었다. ‘내가 바로 이사벨 여왕이야. 누구든지 나에게 충성을 다하면 언제든지 이 정도는 베풀어 줄 수 있는 여왕이야. 이 여왕의 스케일을 똑똑히 잘 보아두라고.’ 하는 고도의 숨겨진 정책적 배려에서 나온 것이다.
이때까지의 콜럼버스는 그런대로 보아 줄 만했다.
그러니 이 시기를 상징하고자 만들어 놓은 기념비나 청동 조각상도 그냥 보아주고 넘어가 주기로 해야할까 보다.
하지만, 이시간 이후로의 콜럼버스는 결코 아니올시다 였다.
그는 탐욕자였고, 잔인한 침략자였으며, 전대미문의 약탈자이고, 인간을 돈의 가치로 환산이 가능하게 만든 노예 상인의 원조였던 것이다. 이때까지의 탐험가이며 개척자였던 콜럼버스는 이 순간 이후로 인류 문명의 커다란 실책이자 수치로 변모하는 것이다. 그렇게 노예 상인이었으며 약탈자이며 무자비한 침략자인 콜럼버스를 코르도바 대성당에 있는 화려하고 놀라운 무덤 속의 개척자이자 영웅의 모습으로 둔갑시킨 것이 모두....... 어쩌면........ 백인 우월주의 식민사관의 결과가 아닐까 나는 생각하고 있다.
바르셀로나 도시여행 가이드들은 까마득히 높은 곳에 우뚝 서있는 콜럼버스가 왼손으로는 지도 두루마기를 들고 있으며, 오른손은 그가 발견한 신대륙을 가리키고 있다고 늘 똑같이 이야기들을 늘어놓았다. 다들 그런 줄 알았다. 또 그게 당연할 것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한 이탈리아 여행객이 그 손이 가리키는 곳이 고향인 이탈리아 제노바라고 주장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냥 애국심에서 벌어진 쉽게 웃어넘길 해프닝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을, 엉뚱하게 이게 심각한 분쟁으로 비화가 된 것이다. 이 청동상을 만든 라파엘 아체(Rafael Atché)는 거기에 대해서 아무런 자료도 남겨놓지 않았던 것이다. 하여 일부 전문가들이 항공 장비까지 동원해서 진짜로 그 손가락 끝이 가리키는 방향을 확인해 보았더니 엉뚱하게도....... 아프리카 알제리의 콘스탄틴(Constantine) 시의 외곽 어딘가를 가리키고 있었다고 한다. 뜬금없이 웬 아프리카? 노예를 사러 갔다가 누군가와 눈이 맞아서 거기에 숨겨 놓기라도 했었던 것일까? 아니면, 현장 책임자가 방향에 대해서는 별도의 아무런 지시사항이 없이 그냥 ‘바다 방향’이라고만 적혀 있어서 대충 방향을 맞춰놓은 것은 혹 아닐지 모르겠다.
콜럼버스에 대한 연구와 재평가는 지구 곳곳에서 이 순간에도 매우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콜럼버스 동상의 철거를 요구하는 시위와 법적 제기가 꾸준히 계속되어 오고 있다. 특히 바르셀로나에서 두드러 진다. 지방 자치 의회를 통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는데 시장이나 정부의 반대로 실질적 집행단계까지는 아직은 이르지 못하고 있다. 점점 항의와 시위는 거세지고 있지만 그나마 다행인 것은 기념탑을 훼손하거나 파괴하려는 행위까지는 아직 발전하지 않고 있다. 일부 시의원들과 시위 주체 세력들은 콜럼버스 동상의 자리에 백인들로 수탈당한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과 신대륙으로 끌려간 아프리카 노예들을 추모하는 기념비로 대체할 것을 거듭 요구하고 있다.
‘봐도 봐도 저 싸가지는 하나도 안 변하네? 비둘기들이 잔뜩 배설물을 싸 놓은 것만 빼고는. 하도 높이 해놔서 청소도 쉽지 않겠지? 비둘기야 빨대 꽂아서 주둥이 안에다 싸주면 안 되겠니? 더러워서 스스로 내려오게.........’
‘내려오던 말던....... 여기가 바르셀로나인건 이제 분명하게 확인을 했으니....... 뭐라도 먹어야 하잖아? 오늘은 람블라스 거리 노천 레스토랑에서 스페인식으로 분위기 한번 살려보면 어떨까?’
--- 에고 에고 벌써 글쓰기 1회 용량을 초과해 버렸네요. 몇 회로 나누어야 할까 보네요, 기다려 주세요. 감사합니다. 피안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