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자샤안(샤론의 장미)은 낯선 남자를 품에 안고 그에게 젖을 물린다. 사내는 오히려 그녀의 젖가슴을 피하려 도리질을 치며 어색해 한다. 그러나 그녀는 끝내 그에게 젖을 물리며 신비로운 미소를 짓는다.
존 스타인벡은 1930년대 경제공항이 한창이던 시기에 미국 오클라호마의 농사꾼 조드 일가의 삶의 여정을 '분노는 포도처럼'에 담았다. 당시 미국 전역을 휩쓴 경제 공항의 여파로 살 길이 막연해진 조드일가는 캘리포니아로 이주한다. 그러나 그 곳은 이미 각지에서 흘러든 노동자들로 과일 따기 품팔이 조차 구하기 힘든 실정이었다. 노동자들을 착취하는 고용주들과 그 앞잡이들의 횡포가 날로 심해지자 선교사 캐시가 주동이 되어 파업을 일으킨다. 그러나 캐시는 고용주의 앞잡이인 폭력단에게 살해된다. 그 장면을 목격한 조드가(家)의 장남 톰은 캐시를 죽인 남자를 살해하고 정처 없는 유랑의 길을 떠난다.
이 소설은, 몰락한 소작농 조드 가족의 분노를 통해 풍요를 꿈꾸던 자본주의 아래 모든 꿈을 잃어버리고 고통하고 신음하던 약자들의 삶을 그리고 있다. 그들의 분노는 가진 자들에 대한 분노였고 헤어날 수 없는 가난에 대한 분노였다. 하지만 조드 가족을 삼킨 분노는 여전히 이 시대 우리 사회의 약자와 소외된 자들을 통해 반복되고 있다.
비록 오늘의 분노가 절대적 빈곤의 그늘에서 자란 것이 아니라 해도 여전히 육체적인 배고픔과 정신적인 목마름에서 자라고 있음을 알수 있다. 1930년대 대공황의 위기와 오늘날의 위기를 동일시 할 수는 없을테지만 포도처럼 영글어가고 있는 분노의 뿌리는 별반 다르지 않다는 말이다. 당시 한계상황으로 내몰린 조드 가족들은 분명 배고프고 목말랐다. 그런데 지금도 한계상황으로 내몰리고 있는 또 다른 현대판 조드 가족들이 여전히 배고프고 목마르다. 오히려 이들의 기근과 허기는 더 깊은 정신적 기근과 허기를 지니고 있다. 문명이 발달하면 할수록 상대적 박탈감은 더 커지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분노’는 더 위험한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그게 바로 칼막스가 예견한 자본주의의 몰락이라는 현상과 무엇이 다를까?
여하튼 조드 일가가 보여준 인간적인 면모, 어쩌면 오늘날 우리가 갖추어야 할 인간상이 아닐까? 소설 속 짐 케이시 목사는, “모든 사람은 누구나 다 커다란 영혼의 일부를 지니고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의 말에 감화를 받은 조드 일가는 고통을 받으면 받을수록 서서히 자신과 가족만을 생각하던 ‘나’라는 차원에서 벗어나 타인을 형제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우리’라는 차원으로 도덕적 성장을 이루게 된다.
강인한 정신력과 모성애를 가진 조드일가는 점차 이웃과 공동체, 나아가 인류를 생각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우리 모두에게 밝은 미래를 제시해 준다. 특히 조드의 또 다른 분신인 그의 딸 로자샤인이 보여주는 행위는 감동 그 자체이다. 로자샤인이 아기를 사산하자 식구들은 망연자실 어쩔줄 몰라하는 데 오히려 로자샤인은 고통을 극복하고 아사 직전의 낯선 사내에게 자신의 젖을 물린다. 이러한 그녀의 극적인 행위는 어쩌면 ‘모든 살아있는 것에 대한 존중과 배려’를 실천한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남에 대한 관심과 배려, 그것은 단지 작품속 주제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자신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한 따스한 울림같은 자비로움, 이제 그걸 끄집어내어야 할 때가 도래하고 있다. 타인에 대한 관심과 배려가 많으면 많을수록 나에 대한 존중과 배려 역시 증가할 테니 말이다.
그런데 오늘의 현실은 본질적 욕구조차 충족되지 않고 있다. 특히 밥벌이를 위한 아카데미아가 우리를 소외시키고 있는 현실이 우리를 사상의 공동묘지로 내몰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우리에게 ‘대학이란 과연 무엇인가’라는 물음까지 던지고 있지 않은가? 거짓과 위선으로 가득찬 욕망이 넘실대는 곳, 관념의 틀에 갇혀 헤어나지 못하는 패러데이의 새장, 그게 바로 오늘 우리가 송장처럼 누어있어야 하는 ‘죽은 대학’이라면 너무 억울하고 한심하지 않은가?
삶에 대한 기본적 욕구조차 채워지지 않아 여기저기 원망의 소리가 아우성으로 증폭되고 있다. 원망은 그래서 점차 분노로 변하고 있다. 어쩌면 지금쯤 그 분노는 서서히 저주로 성장해 가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마치 신비한 ‘콩나무’가 거인들이 사는 하늘위 세상까지 자라듯이...
이제 그동안 우리가 잊고 있던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한 따스한 울림같은 자비로움을 기억하라. 그리고 그것을 끄집어 내라. 그리하여 수원대학교가 민주화를 이룰수 있는 ‘마지막 비상구’를 놓치지 않도록 투쟁하라. 그리고 승리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