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나나에 대한 추억
유옹 송창재
오늘 식자재 마트에서 문자가 왔다.
주말 할인판매를 한다며 할인품목의 사진들과 할인된 가격을 함께 띄웠 보냈다.
내가 이사 온 이 곳은
소위 역세권이라나 뭐라나해서 지금도 아파트들이 계속 들어서고 있다.
상가는 조성되어 있으나 아직은 아파트 주민들이 많지가 않아
다양한 먹을거리들이나 편익시설들이 적다.
그런데 장래를 예상하는 선견지명으로 식자재 마트가 크게 들어섰다.
그리고 고객 유인책으로 휴일 세일을 한다.
그러면서 2만원이상 구입 고객에게는 아파트단지 주민에 한하여 배달 서비스를 해 준다.
나는 목발을 집고서 양손에 뭘 들고 다닐 수가 없으니 필요한 것들이 있어도 주말을 기다려 함께 모아서 주문을 시킨다.
그랬더니 단골 고객이 되어서 주말이면 꼭 연락이 온다.
편리하기도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과소비를 하게된다.
어쩔 수가 없다.
직접 들고 올 수가 없으니.
그래서 단골 상위고객이 된 것이다.
이제 전화를 하면 우리 집이 몇호인지 먼저 알아버리니.,.
오늘은 바나나 한 송이와 귤 한 박스를 주문하였다.
그리고 돼지등뼈와 막걸리 다섯 병을!
돼지등뼈는 세일품목이고 막걸리는 두병이 있지만 어차피 주중에 나가야하니…
이래서 과소비가 되는 것이다.
바나나와 귤을 주문하면서
예전에 바나나와 귤은 아픈 추억들이 있는 과일들 이었는데
이제는 흔한 과일이 되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였다.
나는 바나나를 구경한 것이 국민학교 5학년 때였다.
우리 반에 잘 사는 어떤 애와 짝이 된 적이 있었다.
물론 남자 애였다.
고학년 부터는 '남녀 고학년 부동석'때 였으니까.
하루는 그 애가 자기 집에 가서 숙제를 하자고 했다.
집에 바나나도 있다고 하며 나를 유혹하는 것이었다.
나는 말로만 듣고 노래와 그림책에서 본 바나나의 실체를 보고 먹어 볼 욕심이 생겨서
공부도 되게 못하는 그애하고 숙제를 하기로 하고 따라 나선 것이다.
물론 그애가 바나나를 준다거나 하는 말은 안 했고 바나나가 있다고만 했는데...
내가 빠른 사고력으로 줄 것이라고 짐작하고 따라 나선 것이다.
김칫국 먼저 마신 것이다.
그때 그애의 아버지는 경찰이었고, 계급이 높다는 것만 풍문으로 들었었다.
그래서 호기심 반, 바나나에 대한 욕심 반으로 따라 나선 것이다.
원숭이도 아니면서.
가난한 우리 집보다 훨씬 부자여서 테레비도 있고 자기 방도 있었다.
우리 시에서는 잘 사는 동네로 소문이 있던 일본식 적산가옥들이 있는 동네였다.
지금와서 생각하니 반민특위대상인 적폐세력이었던 것 같다.
아무튼 그 때는 난 애국자는 아니고 바나나에만 눈이 어두워 있었던 때라 언제나 바나나가 나오나만 온 신경이 쓰이고 있었을 뿐이다.
그런데 이 애가 바나나는 내놓을 생각은 안하고 국어 숙제도 다하고 사회 숙제도 다 해 주었는데도, 바나나는 고사하고 사과 한 쪽도 내어 놓지를 않는 것이다.
나는 그때 속아서 이녀석 숙제만 해 주고 있다는 생각이 순간 떠 오른 것이다.
그러니 먹을 것에 눈이 어두워 경찰아저씨네 골방에서 인질로 숙제를 해 주고 있으니, 쪽 팔려서 석방되어서 나가도 누구한테 말도 못 할 것이고,
이미 구속되었으니 탈옥도 틀렸고, 이제는 죽으나 사나 주면 먹고 안 주면 집에나 그대로 보내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이 녀석이 이번에는 산수 숙제를 부탁하는 것이다.
이것은 부탁이 아니라 이제는 순 강제라는 기분이 드는 것이다.
그런데 어쩌랴! 아버지가 경찰 높은 사람이라는데.
이제는 이 녀석이 문제가 아니라 제복입은 지 아버지의 모습만 떠오르는 것이다.
그러니 얼마나 심리적압박을 느꼈겠는가? 조그만 국민학생 꼬마가.
울고 싶었다.
그래도 바나나라도 나오면 조금 치유가 되련만, 이쯤되면 바나나를 몽땅 준다고 해도 전혀 치유 불가능할 것 같았다.
'바나나도 싫다. 나에게 자유를 다오! '외치고 싶었는데,
풀기싫은 산수숙제까지 시키니!
문제 푸는 척, 고민하는 척 하면서 이 자식을 골탕먹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구속되었으니 골탕 먹인다고 형량이 더 무거워 지지는 않을거라 생각하고는!
이녀석이 멍청한 걸 보니 지아버지도 별로 일 것 같아서 숙제 검사해도 발각이 안 될 거라고 생각하고, 산수를 건성건성 풀어서 생색만 내기로 하였다.
그렇게 대충 거의 다 했더니 이 녀석이 그때에야 바나나라고 뭘 조금 주는 것이다.
나는 그때까지 바나나 구경을 못해서 바나나가 그렇게 생겼는 줄 알았다.
노래에서 '바나나는 길다.'고 해서 제법 먹을 것이 있겠다 싶었더니.
지금으로 치면 몽키바나나라고 하는 내 손가락만한 바나나 한 개를 주는 것이다.
그러면서 지 이모가 하와이라던가 브라질이라던가 하는 곳으로 시집갔는데, 거기 밖에 없다면서 생색을 내는 것이다.
이러니 그 말이 귀에 들어 오겠는가?
한방 먹였으연 좋겠는데, 지아버지 계급장이 보이니 그럴 수도 없고..
그래서 배가 갑자기 아파서 집에 가서 변소에 가야겠다고 하며, 그 바나나를 주머니에 넣고 나왔다.
얼마나 열이 받던지.
개새끼 하면서 욕을 했더니, 진짜 개가 옆에 있었다.
그래서 주머니에 있는 바나나인지 무말랭이 인지하는 놈을 개에게 던져 주었다.
그랬더니 개도 희한한지 냄새를 맡아 보더니, 나 한번 쳐다 보고 바나나 한번 쳐다 보고 번갈아 보더니 저리 가버리는 것이다.
'이 개새끼가 개도 안 먹는 것을 나한테 주고 숙제는 다 시키고.,' 하면서 욕만 바가지로 퍼 놓으며 집에 왔다.
'바보새끼 낼 산수숙제 검사하면 꼬라지 좋겠다.
이제 학교에서 내가 해 줬다고도 못 하고 선생님한테 당할 꼴이나 구경해야지!' 하니 분이 좀 풀렸다.
그래서 요즘은 바나나를 사면 될수록 큰 것을 위주로 사서 두개씩 먹는다.
나의 바나나에 대한 첫 인상은 이렇게 아주 고약했다.
지금 우리 개도 바나나 주면 안 먹던데…
바나나의 아픈 추억이었다.
물론 오늘 배달되어 온 바나나는 두개를 먹은 것은 당연한 일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