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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성경 벌레들 원문보기 글쓴이: 성경 벌레
5장1-12(팔복 강해 설교)
성경본문 : 마태복음 5:1-12
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2.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 심령이
3.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9.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10.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11.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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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아가는 세월
미국의 한 자동차 회사가 새차를 광고하면서 “이 차는 당신이 태어나서 40세가 된 만큼 빨리 달릴 수 있습니다”라는 문구를 사용했다.
거기다 덧붙이기를 “중간고사 시험장에서 잠시 졸다가 깨어보니 직장을 다닌지 20년째이고 아내와 두 아이까지 있지 않느냐?”라고 했다.
흔히 20대는 시간이 기어가고, 30대는 걸어가고, 40대는 빠른 걸음으로 걷고, 50대는 뛰며, 60대는 날아간다고 말한다.
그러나 사실 시간이란 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한결같은 속도로 지나간다. 특정한 시점이라고 더 빨라지는 법은 절대 없다. 단지 지나고 나서 보니까 세월이 자기 생각보다 빨리 지나간 것 같을 뿐이다. 거기다 누구에게나 인생은 한번뿐인 기회이므로 더 빨리 지나간 것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그런 후회가 생기는 원인은 시간의 속도에 달린 것이 아니라 그 시간 안에 본인이 반드시 이루기를 원했고 또 이뤄져야만 했던 일들이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난 세월이 후회 되고 시간을 낭비한 것 같아 빨리 지나갔다고 느끼는 것이다. 자기가 소원했던 일을 제대로 이룬 자는 비록 시간은 빨리 지나갔을지 몰라도 지난 세월을 후회하는 법은 없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 신자마저 똑 같이 이런 후회를 한다는 것은 좀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신자는 무슨 일이든 하나님께 기도하여 인도함을 받는데 왜 후회가 따르는가? 자신에게 주신 하나님의 소명도 제대로 확신하지 못하고 세상 사람처럼 살았다는 의미이지 않는가? 진정으로 자신의 소명을 실천하면서 산 자는 미처 다 이루지 못한 일에 대한 아쉬움은 있을 수 있지만 지난 과거에 대해선 후회하지 않는 법이다. 과거의 순간순간을 주님 은혜 가운데 동행하고 그 뜻대로 살았기 때문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거의 대부분의 신자가 제사장 나라로서 세상을 변화시킬 소명에는 관심이 없다. 오직 본인의 도덕적 성화나 영적인 성장에만 신앙 생활의 모든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보다 더 안타까운 것은 평생을 두고 목표로 삼는 신자 개인의 내적 성장마저도 제대로 달성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모든 신자가 항상 갖고 있는 불만은 “왜 이리 신앙이 자라지 않지? 거룩과 신령과는 갈수록 거리가 멀어지고 그저 조금만 힘들어도 불안과 염려는 없어지지 않으니…”이다. 거기다 “비록 궁핍한 가운데서도 여건이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 나름대로 정성과 열심을 다해 믿었는데 왜 현실은 항상 고달프지? 뭔가 믿은 것에 대한 보상은 있어야 하지 않는가?”라는 의심도 늘 따라 다닌다.
흔히 하는 말로 ‘영육간(靈肉間)에 강건’하지 못해 괴롭다는 것이다. 믿음과 현실사이의 모순과 갈등이 깊어지고 그 괴리감이 갈수록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늘어난다. 신앙 생활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와 축복을 누리며 기쁨이 넘치고 즐거워야 함에도, 정기적으로 갚아야 할 의무인 양 마지 못해 쥐어짜듯이 하고 있다. 말로는 넉넉하게 승리하길 소원하지만 그냥 단순한 승리도 못하고 항상 패배하고 있다.
그럼에도 이 고질적인 문제에 대한 원인과 해법을 잘못 진단하여 엉뚱한 대책을 실천하고 있다. 그것도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평생을 두고 그 문제가 없어지지 않는다. 한 마디로 신자에게 생기는 모든 문제는 말씀 보지 않고 기도하지 않아서 그렇다는 것이다. 물론 일부 측면에선 맞는 해결책일 수 있다. 그러나 해가 바뀔 때마다 성경 읽고 기도하겠다고 새롭게 결심하지 않는 신자가 과연 한명이라도 있는가? 그러나 그 중에 과연 몇 %나 제대로 성공하는지만 따져 보아도 뭔가 잘못된 대책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기도하지 말고 말씀 보지 말라는 뜻은 절대 아니다. 매년 실패만 거듭하다 보면 나중에는 “올해는 괜히 실천도 못할 계획은 세우지 않겠습니다. 하나님 그저 지금껏 보살펴 주셨던 것처럼 올 한 해도 큰 사고 없이 무사하게만 해 주시옵소서”로 주저 앉을 수 있다는 것이다. 아마 아주 많은 신자가 실제 그렇게 하고 있을 것이다. 나아가 기도하고 말씀 보는 재미와 열심만 잃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능하신 응답에 관한 믿음(어쩌면 자신감이 더 맞는 표현일 수 있다)마저 잃어버리게 된다.
팔복을 통한 영적 성장
예수님의 팔복 강화는 많은 신자들의 바로 그런 고민에 대한 올바른 해답이다. 처음 이 강해를 시작할 때에 예수님은 팔복을 “어떻게 하라. 그러면 이런 저런 복을 주겠다”고 ‘조건과 응답’ 내지 ‘명령과 보상’의 구조로 말씀하지 않았다는 것을 지적했다. 마음이 가난해야 천국을 보거나, 의에 주려야 하나님의 축복을 누릴 수 있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이다.
팔복 전부가 마음이 가난한 자, 애통한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케 하는 자, 핍박을 받은 자처럼 신자의 이미 변화되어진 어떤 상태를 말하고 있다. 마음이 가난해져라(명령), 혹은 마음이 가난해지면(조건)이 아니다. 명령과 조건은 아직 그 상태가 이뤄지지 않았고 미래에 이뤄질 일이지만 팔복은 전부 현재의 상태다. 심지어 마지막 복은 핍박을 ‘받은’이라고 해서 이미 과거에 어떤 일이 일어난 상태를 말한다.
요컨대 팔복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을 알고 믿게 된 자의 바뀌어진 상태, 생각, 가치관을 말한다. 예수님은 팔복을 통해 신자가 갖는 믿음의 핵심과 내용을 구체적으로 설명해 준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신자라면 필연적으로 팔복의 상태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첫번째 복은 심령이 가난한 것인데 단순히 소박하고 겸손한 마음씨가 아니다.
도저히 자기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며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살 수 없다는 가난이다. 하나님 앞에 완전히 벌거벗고 엎드려 항복한 상태가 되어지지 않고는 신자라고 말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가난한 마음을 첫번째 복으로 말씀하신 의미도 그것이 바로 믿음의 출발이라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팔복의 구조를 자세히 살펴 보면 예수님이 무작위 순서로 배열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우선 첫째 마음이 가난한 상태에서 출발해 마지막 핍박을 받은 상태로 끝나는 것만 봐도 쉽게 알 수 있지 않는가? 말하자면 이 팔복이 신자가 된 후 바뀐 상태를 말하고 있긴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신자도 인간인지라 연약하고 불완전하며 때때로 죄와 사단에게 넘어가기 때문에 그 믿음이 자라야 할 부분이 있고 또 그런 성장이 여러 단계에 걸쳐 이뤄진다는 것이다.
그 말은 예수님은 팔복 안에 영적 성장의 비결을 숨겨 놓았다는 뜻이다. 많은 신자가 아무리 오랫동안 신앙 생활을 해도 자기 믿음에 자신이 없는 것이 기도와 말씀에 등한해서가 아니라 바로 이 팔복의 순서대로 그 믿음을 점검하고 그대로 자라려고 노력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단순히 기도하고 말씀 많이 본다고 믿음이 자라는 것이 아니라 팔복의 순서대로 자라기 위해서 기도하고 말씀을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껏 구체적으로 살펴 본 8가지 복들을 간단하게 재조명해 보기로 하자. 과연 주님이 주신 영적 성장의 단계가 어떤 순서로 구성되어 있는지 다시 확인한 후에 자신이 지금 어느 단계에 머물러 있는지 솔직하게 점검해서 다시는 “왜 믿음이 자라지 않지?”라는 후회를 하지 않기로 하자. 말하자면 예수님이 신자라면 중풍병이나 문둥병이 나은 것과 비교도 할 수 없는 훨씬 더 좋은 복 8개를 누릴 수 있다고 하셨는데 그 중에 우리가 과연 몇 개나 가지고 있는지 확인해 보자는 것이다.
(1)심령이 가난한 자의 복;
본문에 쓰인 헬라어 ‘가난’은 수입이 적은 상대적 빈곤이 아니라 나면서 앉은뱅이나 소경 같이 돈을 벌 수 없어 오직 다른 사람의 구호에만 의존해야 하는 절대적인 빈곤이다.
그래서 영적으로 스스로는 절대 충만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에만 전적으로 의지해야 하는 마음 상태를 말한다. 단순히 도덕적으로 겸손하고 예의 바르고 소박한 정도가 아니라 자신은 영적으로 완전히 파산되어 더 이상 낮아질래야 더 낮아질 데가 없다는 것이다.
신앙의 출발이 자기가 기독교라는 종교를 선택하고 예수를 믿기로 결심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성전 한쪽 구석에서 하늘을 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가슴을 쥐어 뜯으며 “저는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이라고 자신의 전 존재를 걸고 하는 고백이 심령 깊숙한 곳에서부터 절로 나와야 한다. 철저하게 부패된 너무나 더럽고 추한 영혼이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이 아니고는 깨끗해질 수 없음을 처절하게 자각해야 한다.
세상과 사람 앞에서 부귀영화를 추구했던 과거의 인생이 너무나 헛된 것이었기에 그런 사고 방식, 가치관, 생활태도와 습관으로부터 완전히 되돌아 서야 한다. 자기 인생을 이끌어 가며 전 우주를 운행하는 주인이 따로 있음을 확신하여 남은 삶과 일생을 완전히 그 분께 의탁하여 그분 뜻대로 살기로 헌신해야 한다. 다른 모든 것은 없어져도 좋은 반면에 오직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만 구하는 심령이다.
크리스찬 개그로 천국 가서 세 번 놀라는 이야기가 있다.
반드시 와 있어야 할 것 같은 경건한 장로님은 없고,
또 도저히 와서는 안 될 것 같은 교회의 말썽꾸러기 집사는 와 있어 놀란다.
마지막으로 어찌 자기 같은 죄인이 천국에 와 있을 수 있는가 하고 놀란다고 한다.
하나님은 십자가를 통해 인간의 조건, 자격, 공적과는 상관 없이 오직 자신이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임을 인정한 자, 즉 심령이 가난해진 자를 구원해 주신다. 그래서 심령이 가난한 자가 받을 복은 천국이 자기 것이 되는 것이다. 예수를 처음 믿어 그 믿음이 출발하는 복이다.
(2) 애통한 자의 복;
애통한 것이 성격이나 기질이 인정이 많고 여려서 잘 우는 감상적인 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심령이 너무나 가난한 것에 애통해지는 것이다.
다른 현실적 상처, 고통, 환난으로 슬퍼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히 채워져 있지 않는 가난한 심령을 두고 애통해 하는 것이다. 죄와 세상과 사단으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왜곡되고 멀어진 것을 슬퍼하는 것이다.
처음 예수 믿을 때에 하나님을 모르고 살았던 불신자 시절이 얼마나 헛되었는지 정말 전 심령이 뒤집어질 정도의 애통을 겪는다. 그러나 신자가 된 후에도 여전히 죄와 시험에 넘어져 일시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질 때도 있다. 그럴 때마다 신자는 가장 먼저 가난해진 심령이 되어 자신의 상태를 애통해 해야 한다. 신자에게는 언제나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 고통 중의 고통이며, 그분과 멀어진 것이 슬픔 중의 슬픔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분과의 관계 회복을 애끓는 심정으로 절실히 소원해야 한다.
그럴 때에 어떤 복을 받는다고 했는가?
위로다.
너무나 당연한 축복이지 않는가? 애통하는 자에게는 그 슬픔을 달래주는 위로가 절실하며 그러기 위해선 그 슬픔의 원인이 되었던 것을 제거해주어야 한다. 하나님과 관계가 멀어진 것을 슬퍼하고 그 회복을 원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당연히 가까이 임재하여 관계를 회복시켜 주시지 않겠는가?
(3) 온유한 자의 복;
온유 또한 일반적으로 이해하듯이 성격이 온순하고 착해서 남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위로를 이미 받았기에 어떤 세상의 죄악과 사단의 시험이 위협할지라도 그분이 지켜 주심을 확신하고 흔들리지 않는 심령의 평강을 유지하며 그것들에 당당히 맞설 수 있게 된 것이다.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알기에 이제는 세상의 것들이 내 불안의 근거가 되지 못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의와 세상의 죄를 분명히 구별할 줄 알기에 그 각각에 맞는 정당하고도 정직한 반응을 할 줄 아는 것이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것을 기뻐하고 하나님이 싫어하는 것을 싫어하도록 생각뿐만 아니라 행동도 바뀐 것이다. 하나님과 항상 동행하기에 그분 외의 어떤 힘도 신자에게 영향을 주지 못하는 것이다.
따라서 온유한 사람의 가장 좋은 예는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고 내려온 모세다. 성경은 그를 두고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민12:3)고 증언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우리가 생각하는 온유와는 달리 오히려 성격이 너무나 급한 자였다. 아론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음란하게 숭배하는 것을 보고 불 같이 화를 내며 십계명이 적힌 돌 판을 깨트리고 또 금송아지를 가루로 만들어 마시게 만들었다.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이 부드러운가 아닌가로 온유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신자가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온유다.
신자가 하나님의 뜻을 모르면 아무리 믿음이 있어도 자기 뜻대로 하게 되고 그럼 절대 온유해지지 못한다. 인간의 뜻이란 항상 불완전하므로 그 뜻대로 하는 모든 일도 불완전하다. 신자가 하나님의 뜻대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할 때만이 온유해진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대로 실행하는 자가 받을 복은 하나님이 주시는 땅이다. 땅은 하나님의 유업인데 이 땅에서 신자가 형통함을 얻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소명을 받는 것이다. 하나님의 거룩한 소명대로 자기 인생을 실현하면 신자가 가는 곳마다 하나님의 왕국은 확장되고 당연히 받을 복도 그 확장된 만큼의 하나님 왕국이다.
(4)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복;
이 복은 온유한 자가 하나님의 땅을 기업으로 받게 되면 다음 단계로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나타날 수 있는 반응이다.
내가 가진 여유로 남을 도와 주는 정도의 단순한 도덕적 의가 아니라 신자의 삶과 인생 전체를 통해 오직 하나님의 일만 하고 싶은 소망으로 가득 차게 된다. 예수님은 그 소망을 주리고 목이 마를 정도 즉 허기에 차서 굶주릴 정도라고 표현했다. 사흘을 굶은 거지가 먹을 것을 만나듯이 하나님의 의가 눈에 뜨이기만 하면 바로 차지하고 실현하겠다는 것이다.
굶주린다는 것은 반드시 채워져야 하고 채워지지 않으면 끝까지 그 허기로 인해 다른 일은 안 중에도 없게 된다는 뜻이다.
교회 일이나 종교적 행사에 열심으로 참석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향해 갖고 있는 뜻을 분별하여 자기의 삶 속에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다. 주위에 그 영혼이 미혹되어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자, 예수를 알 되 여전히 심령이 가난해지지 않거나 또 하나님과 관계가 잠시 멀어져 있는 자들을 찾아 나서서 주님의 사랑으로 섬기고 그분의 은총이 내려지기를 간구한다. 상처 받고 눌려 있고 매인 심령들을 찾아 나서는 사냥꾼이 된다.
그런 자에게 주는 복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의로 배가 부르게 된다고 한다. 돈으로 배 부르게 해주겠다고 하지 않았다. 상한 심령을 찾아 나선 사냥꾼에게 먹이를 배부르도록 많이 만나게 해준다는 것이다. 예수를 믿고 난 후의 가장 큰 변화 중의 하나는 주위의 하나님을 모르는 모든 사람들이 그들의 현실적 형통 여부와는 관계 없이 다 불쌍하게 보인다는 것이다. 또 현재 심령이 상해 고통 중에 있는 영혼들이 이상하게 눈에 잘 뜨이게 된다. 예수를 믿기 전에는 아예 무관심으로 대했거나 어쩌면 원수로 지냈던 자도 이제는 그들을 향해 안타까운 마음이 들고 애틋한 사랑마저 생기게 된다.
팔복 강해가 ‘조건과 응답’ 혹은 ‘명령과 보상’의 구조가 아닌 것이 신자가 받을 복이 사실은 신자가 이미 소원한 것을 그대로 주신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처음 세가지 복을 살펴보라. 심령이 가난한 자란 자신이 완전히 낮아져 예수를 믿기 시작한 자인데 천국을 준다고 했다. 예수 믿는 것이 바로 구원 받는 것이지 따로 더 보태어진 것이 없다. 마찬가지로 애통해 하니까 당연히 위로가 따라오며, 하나님의 뜻을 확신하니까 그 뜻을 보여주시고 실현하도록 하나님의 땅을 기업으로 주신다고 했다.
이 네 번째 복에도 하나님의 의에 주리고 목마르니까 당연히 소원했던 의로 부르도록 채워준다. 하나님이 요구하거나 명령한 것을 잘 따라 했더니 그것과 관계 없는 다른 것을 주셨다면 이는 보상이다. 신자들이 기대하듯이 열심히 기도하고 말씀 보면 현실에 형통도 따르게 되면 별도의 부상이다. 하나님의 일하시는 원리는 그렇지 않다. 신자가 진정으로 소원하는 것을 주신다. 돈이 부족하고 꼭 필요하면 차라리 돈을 달라고 솔직히 구해야 한다. 괜히 잘 믿었으니까 주시겠지라고 혼자 김칫국부터 마시지 말아야 한다.
(5) 긍휼히 여기는 자의 복;
긍휼이란 하나님이 인간을 대하는 마음이자 죄인을 다루는 태도다.
그분은 당신께 가난한 마음으로 나오는 모든 죄인을 끝 없는 자비로 용서하며 사랑과 은혜를 베푼다. 하나님의 의로써 배가 부르게 된 자도 당연히 주위의 불쌍한 영혼을 예수님의 심장을 가지고 긍휼히 여기게 된다. (팔복이 마치 톱니바퀴 맞물려 돌아가듯이 정교하게 짜여진 순서에 따라 나열되었음을 또 다시 확인할 수 있지 않는가?)
예수님의 심장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 질적으로 최고 높은 도덕적 수준에 올랐고 양적으로 최대한의 자비를 베풀 수 있게 되었다는 단순한 뜻이 아니다. 오히려 죄인을 죄인 된 모습 그대로 두고서도 그를 긍휼히 여기고 자비를 베풀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 죄인을 뜯어 고치려 하는 것보다 사랑으로 대해 주는 것이 먼저다. 예수님은 우리의 체질이 진토 같으며 그 영혼이 사단에게 붙잡혀 부패 되어 있음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신자도 마찬가지로 불신자에게서 바로 자신의 옛날과 너무나 똑 같은 모습을 발견하게 되어 얼마나 불쌍한지 잘 알게 된다.
그래서 참 신자란 불신자를 전도할 때에 교리를 전하여 교회로 끌고 오려 하기 이전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여주고 베푼다.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가 없으면 도저히 그 인생에 아무 소망이 없고 영원한 실패로 끝날 것임을 너무나 확신하기에 제발 예수님 저 영혼에게 빛을 비춰달라고 소원한다. 그들이 예수를 모르는 것이 그들에게는 아무런 감각이 없고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닐지라도, 오히려 신자에겐 슬픔이 되어 그것으로 인해 가슴이 쓰리며 심지어 밤에 잠을 못 이룬다. 새벽마다 그 영혼을 붙들고 주님의 십자가 아래 나가 눈물로 간구한다.
이런 신자가 받을 복은 긍휼히 여김을 받는다고 한다. 신자는 이미 하나님의 긍휼히 여김을 받은 자다. 그런데 또 다시 긍휼히 여김을 받는다고 한다. 받은 복 위에 쌓을 곳이 없도록 또 채워주신다는 뜻인가? 긍휼은 하나님이 인간을 대하는 마음이다. 한 마디로 하나님의 마음 그 자체다. 그래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으로 인정 받게 된다는 것이다.
나아가 긍휼을 제대로 아는 자라야 다른 자를 긍휼히 여길 수 있고 또 그 본인도 자꾸만 더욱 긍휼을 소원하게 된다. 말하자면 불신자도 불쌍하지만 여전히 죄성과 욕심이 남아 있는 신자 자신도 불쌍하다. 남을 불쌍히 여기며 제발 저들에게 제가 받은 하나님의 긍휼을 베풀어 달라고 간구하는 동시에, 본인도 여전히 하나님의 긍휼이 없으면 제대로 신자답게 살 수 없고 하나님의 뜻도 실현할 수 없음을 실토하는 것이다. 남에게 긍휼을 더 베풀려면 자신에게도 긍휼이 더 채워져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신자의 그런 소원을 마다할 리가 있겠는가?
(6) 마음이 청결한 자의 복;
신자가 하나님을 알고 예수를 믿었으니 착하고 거룩해졌을까?
나쁜 생각은 전혀 들지 않고 깨끗한 마음씨로 변했을까? 라스베가스나 슈퍼 로토를 아주 우습고 헛되다는 생각이 들까? 아니다. 예수를 알고 난 후에 청결해진 마음은 두 마음이 안 되고 오직 한 마음이 되어 하나님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자신의 인생을 당신만의 신비한 섭리 아래 전적으로 주관함을 믿기에 자기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도 하나님의 온전한 은혜임을 한 치도 의심하지 않는 마음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이 없이는 어떤 영혼도 실패요 결국은 멸망에 이를 수밖에 없음을 확신하기에 사나 죽으나, 무엇을 먹으나 마시나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산다. 예수님의 향기가 자기의 삶을 통해 세상에 전해지기만을 자기 인생의 목표로 삼은 자다. 차라리 문지기로 있더라도 오직 여호와의 궁정에 속하기를 갈망하며 또 그렇게 사는 자다.
그래서 학생은 학업으로, 직장인은 일로, 주부는 가정을 돌보는 것으로, 예술가는 창작 활동을 통해, 누구라도 자기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로 바쳐서 일상적인 삶 속에 하나님이 임재하는 것이 분명한 모습으로 드러난다. 세상과 사람 앞에 진정으로 예수 믿는 자답게 서는 것이다.
신자가 그랬을 때에 받을 복은 하나님을 보는 것이다. 초자연적인 이적을 체험을 한다는 것이 아니다. 물론 때에 따라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주위 사람과 세상의 환경에 흔들리지 않고 일심으로 하나님을 사모하며 그 뜻대로 살기에 그분의 열매가 삶의 모든 부문에서 맺혀지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은 당연하다. 주님의 빛 가운데로 걸어가는 자는 흑암은 전혀 볼 수 없고 오직 보이는 것이라고는 그 분의 영광의 광채뿐인 것이다.
(7) 화평케 하는 자의 복;
화평은 싸움을 잘 뜯어 말리고 대인 관계가 좋아 누구와도 원만하게 잘 지내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물론 신자라면 언제 어디에서나 분쟁을 일으키거나 가담하기보다 주위 사람의 신뢰를 받고 사리 분별이 분명해 분쟁을 조정하는 역할(peacemaker)을 맡아야 한다. 그러나 그런 일은 믿음 없이도 얼마든지 잘 하는 분들이 있다. 성경이 말하는 화평은 항상 하나님과 죄인과의 화평이며 신자 또한 “화목하게 하는 직책”(고후5:19)을 맡은 자이다.
불신자들을 볼 때에 불쌍하게 여기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찾아가 섬기고 전도하여 하나님과 화목하게 한다. 나아가 자기 인생에서 가장 큰 목적이 이제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 된다. 꼭 선교사나 목회자가 되어야 할 필요는 없다. 자기가 하는 일을 통해 예수 믿는 자답게 그 향기를 드러내는 것으로만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신자답게 살아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하나님이 우주만물의 주인임을 알게 하는 것은 간접적인 전도에 머물 수 있다.
이제는 자기가 만나는 모든 사람을 하나님이 자기를 통해 주께로 인도하라고 부쳐 준 사람이라는 확신을 갖고 그런 원칙과 관점에서 현실적 관계를 이어가는 것이다. 자기가 만나는 모든 불신자들이 자기의 양 떼가 된다. 종교적 직분과 상관 없이 평신도라도 목자의 자리에 서서 세상과 사람 앞에 제사장 나라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항상 주위에 하나님과 화평시킬 대상이 있으며 그 대상과 어떤 교제가 이어지든 간에 목적지는 그 사람으로 하여금 예수를 주라 시인하게 만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지상 명령으로 주신 말씀(마28:21)이 자신의 삶의 가치요 의미가 되어 세상 끝 날까지 땅 끝까지 그 일에 자기의 전부를 거는 자가 되는 것이다. 예수님의 참 제자가 되어 예수님이 다 이루지 못한 지상사역의 나머지 부분을 감당하는 자다. 필요하다면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직접 전하고 선포해야 한다.
그리고 그런 자에겐 정말 독사의 독을 마셔도 죽지 않고 기도한 즉 병이 나으며 오병이어의 이적들이 따르는 권세가 따른다. 요컨대 예수님 대신에 예수님의 모습으로 세상 사람 앞에 서는 것이다. 그가 받을 복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는 것 외에 또 무엇이 필요하겠는가?
(8) 핍박을 받은 자의 복;
일곱 가지 단계를 거친 후에 받을 궁극적이며 최고로 좋은 복이 무엇인가? 세상으로부터 받는 핍박이다. 예수님은 신자가 핍박을 받을 때에 오히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했다. 하늘에서 선지자의 반열에까지 올려주실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핍박을 받은 신자는 죽은 후에 천국에 가면 모세, 여호수아, 이사야, 에레미야 같은 자들과 동급의 위치와 신분으로 대우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 위해 회교권 선교사로 순교하거나 하나님을 위해 거창한 업적을 이룰 필요는 없다. 신자가 세상과 다르게 살아서 세상으로부터 욕을 들어먹기만 하면 된다. 빛을 싫어하고 흑암을 더 좋아하는 그들과는 정반대로 흑암을 싫어하고 빛을 좋아하면 된다. 하나님의 기준에서 옳은 것은 옳고, 틀린 것은 틀렸다고 분명하게 이야기하고 또 그 기준에 따라 살면 된다는 것이다. 세상에서 결국은 썩어 없어질 것들과 짝하지 말고 영원한 하늘의 가치대로 살아라는 것이다.
나아가 모든 사람들을 예수님과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수행할 때에는 반드시 핍박이 따르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신자에게 세상의 핍박이 없으면 오히려 이상하고 신자답게 살고 있지 못하다는 증거다. 언제까지나 세상은 예수님과 그에 속한 자를 미워하게 마련인데 신자가 하나님께 궁극적인 복을 받느냐 못 받느냐는 세상의 미움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달렸다는 것이다.
그 미움이 싫고 힘들어서 미움을 줄이려면 하나님과 등지게 되고 반면에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여 그 뜻대로 따르면 세상의 미움은 늘어나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기쁨과 세상의 기쁨 둘 중에 어느 것을 택할지 매 순간순간마다 자신과 싸워야 한다. 그 싸움에 기꺼이 하나님의 기쁨과 함께 세상의 미움을 택한 자는 필연적으로 세상을 향해선 선지자가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당신은 어느 단계인가?
이제 8가지 단계를 한 문장으로 합쳐 보자.
1)심령이 가난해지면 구원을 얻어 거듭난 영혼의 성장이 시작하게 되어,
2) 현실적 환난과 상처로 괴로워하는 것이 아니라 불신자 시절의 헛된 세월과 믿은 후에도 하나님과 관계가 멀어진 것을 애통해 하며 그럴 때에 하나님의 위로를 받고,
3)하나님의 위로를 받았기에 주님의 함께 하심을 확신하여 어떤 경우가 닥쳐도 요동치 않고 온유한 자가 되어서 하나님이 주시는 자기 일생에 대한 소명을 갖게 되고,
4) 그 소명이 자기 삶을 통해 실현되기를 간절히 소원하게 되기에 하나님은 그 소원대로 더욱 풍부한 은혜와 권능으로 그 일이 이뤄지도록 채워주시며,
5) 그런 하나님과의 교제가 깊어짐에 따라 죄인 된 인간에게 유일하게 필요한 것은 그분의 긍휼뿐임을 알아 주위에도 오직 하나님의 긍휼을 베풀고 자신도 하나님의 긍휼 속에만 거하게 되며,
6) 이제는 오직 하나님을 향한 마음으로만 가득 차서 사나 죽으나 하나님의 영광만 드러나고 빛 가운데로만 걸어감으로써 하나님과의 동행과 연합이 완전하게 이루어지며,
7) 언제 어디에 있든 자신의 삶의 목적이 오직 복음을 증거 하는 자로 바뀌어 예수님 대신에 세상 앞에 서게 되며,
8)그래서 주님이 당했던 동일한 핍박을 진정한 기쁨과 자원함으로 당당히 감당함으로써 천국의 면류관을 차지하는 것이다.
그럼 솔직히 내 신앙의 상태는 어느 단계에 와 있는가?
첫번째 복이라도 제대로 누리는가 아니 통과라도 했는가?
하나님 앞에서조차 자신이 단순히 도덕적 죄인에 불과한 것은 시인했으되 세상 사람들 보다는 상대적 의인임을 자랑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자신이 정말 완전히 발가벗고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 없이는 도저히 진홍 같은 죄가 희어질 수 없음을 절감하고 십자가 앞에 엎드려 본 적이 있는가?
그래서 예수를 알기 전과 후가 조금 나아진 것이 아니라 완전히 새 사람으로 바뀌었다는 것을 확신하며 또 그렇게 살고 있는가 말이다.
그래서 최소한 세상에서 부족한 것으로 괴로워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은혜가 멀고 그분의 말씀이 들리지 않는 것을 애통해 하는 자가 되었는가?
‘최소한’이라고 한 이유는 우리 중에 거의 대부분이 아직도 이 두 번째 단계에도 도달 못했다는 의미다.
교회 안에 교인은 많아도 팔복의 첫째 복도 누리지 못하는 자가 태반이고 또 그 중에서 둘째 복으로 넘어가지 못한 자가 대부분이니 기독교가 힘을 잃을 수 밖에 없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어떤 상황에서 누구에게 말씀하셨는가?
4장 마지막에서 모든 병을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 낸 후에 그런 기적을 맛 보았거나 직접 목격한 허다한 무리 앞이다. 그럼 무슨 뜻인가? 하나님을 믿는 것이 병이 낫고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팔복에서 하나님이 주신다는 복에 현실의 형통을 약속한 것은 단 하나도 없다.
그리고 이 팔복 강화가 끝난 후에 곧 바로 어떤 말씀과 이어지는가?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빛이다”라고 하셨다.
신자는 팔복을 누려야 할 뿐 아니라 그 복을 세상에다 올바로 증거하고 전파하여 가정과 사회와 국가가 부패하지 않고 빛 가운데로 나가도록 영향을 주라는 것이다. 그럼 우리의 신앙은 이 성경의 순서에 따르면 과연 4장과 5장의 어디쯤에 해당되는가? 아직도 4장 마지막의 허다한 무리에 숨어 있는가? 5장 3절의 가난한 심령은 지났는가? 5장 13절 이하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충실히 감당하고 있는가?
팔복에 대한 오해들
물론 8복이 꼭 그 순서대로 이뤄져야 하는 법은 없다.
신자는 천국에 가서 주님의 자리에까지 영화롭게 되기 전까지는 아무리 믿음이 좋은 신자라도 실수하고 죄를 짓고 영적으로 불완전하다.
그래서 어떤 때는 첫 단계에서조차 실족하여 하나님은 멀리한 채 자기의 의를 뽐내며 한껏 마음이 교만해지기도 하고, 또 다른 때는 마지막 핍박의 단계에서 아주 기뻐하며 당당하게 승리하기도 한다. 그리고 여러 단계를 동시에 거치기도 하고 순서를 뒤바꾸어 가며 자라기도 한다. 한 단계에서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오랫동안 머물러 있을 수 있고 갈’ ‘지(之)’ 자로 왔다 갔다 할 때도 많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 신앙의 본질이 열심히 기도하여 자신이 갖고 있는 현실적 어려움을 해결 받는 것은 아니다. 한국의 시내 버스 운전석 앞에 보면 예쁜 소녀가 기도하느라 두 손을 모은 그림 옆에 “오늘도 무사히”라는 글귀가 적혀 있듯이 신앙을 생각해선 안 된다. 왜 예수님이 십자가에 그렇게 처참하고 수치스러운 모습으로 죽을 수 밖에 없었던가에 대해 자신의 전 존재와 인생을 걸고 분명한 해답을 갖고 있어야 한다.
개인적으로 그 주님 앞에 자신의 옛 사람이 완전히 깨어지고 성령으로 거룩하게 지어진 새사람으로 변화 받는 체험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바뀐 후에 누리는 복이 중풍병이나 문둥병이 낫는 것과는 도저히 비교할 수 없는 복중의 복(至福) 8가지를 얼마든지 누릴 수 있는 신분이 되었음을 확신하고 또 실제로 누려야 한다. 예수 믿는 자만이 세상의 빛이요 소금으로 이 땅을 거룩하게 변화시킬 능력이 있음을 알아 무엇을 하든 누구 앞에서 어디에 있든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한다.
그래서 8복의 주제는 처음부터 끝까지 ‘천국’이다.
죽은 후에 가는 천국이 아니라 이 땅에 실현해야 할 천국 즉 하나님의 왕국이다. 말하자면 8가지 단계로 성장하면 죽은 후에 천국에서 복을 준다는 의미가 아니라, 이 땅에 신자라면 반드시 자신의 삶을 통해 실현시켜야 할 천국의 형상 8가지를 나타낸 것이다.
따라서 8복이 신자의 도덕적 수련, 인격의 도야, 품성의 개선, 기질의 변화 등으로 이해되어선 안 된다. 하나님은 신자에게 죄 안 짓고 착하게 살며 이웃과 다툼 없이 사이 좋게 지내는 정도를 요구하고 계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 대신에 이 땅을 거룩하게 변화시키고 당신의 백성들로 채우라는 것이다.
그래서 8가지 복 전부가 신자 개인과 하나님과의 일대일의 인격적 관계이자 영적 교제를 의미한다. 예수님은 팔복을 의도적으로 아주 적절한 단계에 따라 배열하여 신자가 이 땅에서 반드시 이루어야 할 영적 성장을 가르쳐 주셨다.
비록 신자가 불완전하여 8단계의 순서가 뒤바뀔 수 있을지라도, 절대로 바뀔 수 없는 원칙이 하나 있다.
처음과 마지막이 그것이다.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을 때, 그래서 영적 성장을 시작하고자 할 때는 가난한 심령이 안 되면 아예 출발 자체가 안 된다. 그리고 마지막 종착역은 우리를 위해 목숨을 내어주신 바로 그 분을 위해 우리의 목숨마저 기꺼이 드리는 것이다.
또 그러기 위해선 당연히 그분의 의에 주리고 목말라야 한다.
자신을 통해 주님의 영광이 드러나길 소원해야 한다. 말하자면 어떤 형태가 되었든 자신이 주님의 도구로 기꺼이 쓰이겠다는 내어드림이 있어야만 한다. 나아가 마지막 최고의 복을 소유하기 위해선 핍박을 참아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에서 핍박 당하는 것을 기뻐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영적인 성장을 이 팔복이 대변한다고 해서 각 단계를 방법론적(方法論的)으로 접근해선 안 된다.
마음이 가난해져야지, 애통해야지, 의에 주려야지, 의도적으로 그런 상태에 도달하려고 노력하면 자칫 성격이나 기질의 변화밖에 오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가난함을 절감하여 주님과의 관계가 깊어지기만 소원해야 한다. 세상의 더럽고 추함을 볼 줄 아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가난하고 애통한 심령을 내어 드리면 주님이 은혜를 채워 주셔서 나머지 복들로 당신이 우리를 인도하신다.
성경의 모든 말씀이 다 그렇듯이 팔복도 매뉴얼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나에게 보여 주시고 들려 주시며 만지게 해 주신다. 당신의 뜻을 말씀을 통해 계시하신다. 말씀 속에 하나님이 좌정하고 계시기에 결과적으로 말씀은 방법이 아니라 실제 역사하는 능력이 된다.
말씀을 방법으로 적용해선 안 된다는 것은 신자가 받는 모든 복의 근거가 신자의 노력이 아니라 다른 데 있다는 뜻이다. 물론 그것은 당연히 예수님의 십자가다. 하나님이 신자를 축복하는 유일한 이유는 그 분이 죄인인 우리를 대신해 죽으셨기 때문이다. 다른 이유는 전혀 없다. 그래서 심지어 신자가 기도하고 말씀 본다고 자동으로 복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공로가 없었다면 인류 모두에게 기다리는 것은 오직 죽음 뿐이었다.
그렇게 오랫동안 신앙 생활하고 기도와 말씀에 열심을 내어도 “신앙이 왜 아직 이 모양인가?” 자신이 없는 이유는 기도와 말씀을 마치 복을 받는 수단으로 착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 신앙에선 주문, 염불, 공적, 열심, 치성 같이 인간의 노력으로 하나님의 복을 획득할 수단은 절대 전혀 없다. 오직 예수님의 공로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뜻이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신자가 기도하고 말씀 보는 유일한 목적도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을 더 깊이 갈망하려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면 나머지 모든 문제의 해결은 신자가 죽든 살든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달려 있다. 그리고 하나님 당신을 갈망하면 할수록 그래서 그분과 동행과 연합이 온전해질수록 그분의 인도와 은혜로 반드시 8가지 복을 누릴 수 있게 된다.
마지막 질문
이제 마지막으로 몇 가지만 물어보자.
팔복이 진정으로 신자가 누려야 할 지복인 것을 확신하는가?
팔복이 암이 낫고 사업이 흥왕하고 자식이 잘 되는 것과 도저히 비교조차 못할 정도로 좋다고 확신하는가?
하나님과 멀어짐이 세상 사람과 멀어짐보다 더 애통한가?
그래서 그분과 가까워지기 위해선 현실적으로 어떤 손해라도 감수할 준비와 자신이 있는가?
심지어 그분은 생명까지 내어 놓으라고 요구할 자격이 있는 분이고 또 그런 때에 기꺼이 예라고 순종하겠는가?
별로 자신이 없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아직 예수님과 하나님을 미처 모르고 있다.
말하자면 자신의 입술로는 신자인지 몰라도 하나님이 보실 때는 전혀 신자가 아니다.
그럴 때는 다른 질문을 자신에게 해 보아야 한다.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완전히 벌거벗고 하나님 앞에 항복한 적이 있는가?
일대일로 그분을 대면하고 자신의 주인으로 완전히 받아 들인 적이 있는가?
단순히 기도하여 환난을 해결하려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전 존재, 삶, 일생을 온전히 그 분의 뜻에만 전적으로 의지하여 완전히 내어 드린 적이 있는가 말이다.
혹시 이 두 번째 질문에는 분명히 ‘예스’인데도 아직 첫번 째 질문에는 자신이 없는가?
구원의 감격은 있는데 그 분의 은혜를 더 많이 받지 못한 것이다.
재삼 재사 강조하지만 현실의 문제가 해결되는 은혜가 아니다.
팔복에는 현실적 형통이 하나도 없음을 주목해야 한다.
팔복은 하나님 당신의 성품에 참예하여 자신의 영혼이 거룩하게 변화되며 이 세상을 영적인 차원에서 볼 줄 알게 되는 차원이다.
그분의 긍휼을 알기에 주위를 볼 때에 그 분의 긍휼함에 동참할 수 있는 은혜다. 하나님 당신의 의에 목마르게 되는 은혜다. 그럼 하나님은 반드시 당신의 의로 배부르도록 채워주시며 신자도 필연적으로 핍박을 기꺼이 받는 복을 누릴 수 있다.
혹시 두 번째 질문에도 ‘예스’를 할 수 없는가?
그렇다면 그 해결책은 하나다.
하나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구원해 달라는 기도를 간절히 하는 것이다. “예수님 저를 찾아와 주셔서 당신을 보여 주시고 그래서 저를 십자가 앞으로 이끌어 가주소서”라고 소원하는 수 뿐이다.
지금 당신은 팔복의 어는 단계에 있는가?
아직도 암이 나은 허다한 무리 가운데 있는가?
빛과 소금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는가?
이 마지막 두 가지 질문에 대해 어떤 대답을 할 수 있는가?
출처: 죽으면 산다 /카페에서 공개된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