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4월 25일 부활 팔일 축제 내 월요일
두려워하지 마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서 나를 만나게 될 것이다." (마태오 28,8-15)
"Do not be afraid. Go tell my brothers to go to Galilee, and there they will see me."
말씀의 초대
베드로 사도는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돌아가신 예수님을, 하느님께서 죽음에서 일으키신 부활 사건을 목소리 높여 담대하게 전한다. 그는 구약의 예언자들의 입으로 예고된 하느님의 구원 계획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졌음을 선포한다(제1독서). 예수님을 간절히 그리워하던 여인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서 부활의 증인이 된다. 그러나 경비병들은 수석 사제와 원로들에게 매수된다. 주님의 부활은 이렇게 힘없고 가난한 여인들에게서 선포된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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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옛날 우리 나라는 남성 중심의 전통적인 유교 윤리관을 갖고 있었습니다. 아직도 이런 문화는 우리 사회 곳곳에 남아 있습니다. 우리의 할머니 세대만 하더라도 ‘여성’이기 때문에 가슴에 많은 상처를 안고 살아야 했습니다. 이렇게 치유되지 않은 상처와 해결되지 않는 억눌린 심정을 우리는 ‘한’(恨) 이라고 불렀습니다. 유다 사회의 여성도 이런 한스러운 삶을 살았습니다. 예수님 시대에는 더욱 강한 남성 중심의 율법주의에 빠진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구약 시대보다 여성의 지위는 더욱 열악했습니다. 그 사회에서 여성은 어리석고 우상 숭배에 잘 빠지는 열등한 존재로서 때로는 물건이나 종처럼 팔릴 수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유다 사회의 여성은 우리 나라의 옛 여성보다 훨씬 더한 상처와 한을 안고 살았던 것입니다. 그런 사회 분위기에서 예수님만은 달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성에 대한 아무런 편견도 없으셨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결혼관에서 볼 수 있듯이 예수님께서는 여성을 남성의 욕망에 침해당할 수 없는 동등한 인격체로 회복시키셨습니다(마르 10,6-12 참조). 토라에 대한 배움의 기회가 전혀 없는 사회 환경을 깨고 마리아를 발치에 앉혀서 가르치셨고(루카 10,39 참조), 부도덕하다고 낙인찍힌 여성조차도 예수님의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을 수 있게 하셨습니다(루카 7,38참조). 오늘 복음에서 유다 사회의 여성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납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상처에서 해방되었던 여성들이 예수님 부활의 증거자가 됩니다. 불어에서 ‘상처’와 ‘은총’은 같은 어원에서 비롯되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이제 여성뿐만 아니라 우리의 모든 상처를 은총으로 바꾸어 놓습니다. 이것이 예수님 부활의 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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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소식을 접하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여인들과 경비병들입니다. 그들은 모두 빈 무덤의 ‘천사’를 만났습니다. 여자들에게는 기쁨의 체험이었지만, 경비병들에게는 두려움 그 자체였습니다. 마음자세가 달랐기 때문입니다. 여인들에게는 믿음이 있었지만, 경비병들에게는 의무감뿐이었습니다. 한쪽은 사랑이었지만, 한쪽은 ‘그저 그랬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천사를 만나고도 서로 다른 태도를 취합니다. 보통 인간이 어떻게 ‘천사’를 목격할 수 있을는지요? 그런 행운을 잡았지만 경비병들은 놀라기만 했습니다. 그런데 경비병들의 말을 듣는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은 더 어이가 없습니다. 그들은 아예 경비병들을 이용해 거짓말을 퍼뜨립니다. 왜 그랬을까요? 귀찮아서 그랬을 겁니다. 그냥 덮어 버리면 될 것이라 판단했기에 그랬을 것입니다. 전형적인 무사안일한 태도입니다. 축복이어야 할 주님의 부활이 그들에게는 ‘독’이 되고 있습니다. 이렇듯 부활을 대하는 자세는 여러 형태입니다. 위대한 신앙의 사건도 ‘왜곡될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우리는 어떠한지요? 복음의 여인들처럼 ‘확실한 마음’이 되어야 기쁨의 부활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어정쩡한 마음’이면 결과 역시 언제나 어정쩡해집니다. 주님의 부활을 깨달았다면 신앙의 변화는 이미 시작된 것입니다. 끊임없는 변화를 시도하라고 예수 부활 대축일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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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이 짧은 두레박으로는 깊은 우물의 물을 길을 수 없습니다. 억지를 부린다고 되는 일이 아닙니다. 잘못하면 다칠 수 있습니다. 줄이 짧으면 당연히 줄을 늘이거나 다른 샘을 찾아야 합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무지와 게으름 때문입니다. 복음의 경비병들은 기적을 목격했습니다. 천사들이 무덤의 돌을 치우는 것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상부에 보고합니다. 그런데 지도자들은 조작을 시도합니다. 경비병들을 매수하여 거짓 정보를 흘리도록 합니다. 짧은 줄로 우물의 물을 길으려 억지를 부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어찌하여 비겁한 행동을 지시하고 있는지요?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이 귀찮았던 것입니다. 현실의 삶을 방해하는 것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인류를 구원하신 업적이 이렇듯 엉뚱한 사건으로 오해되고 있습니다. 그런 일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부활은 이론이 아닙니다. 지나가 버린 ‘사건’도 아닙니다. 부활은 믿음이며 은총입니다. 주님께서 깨달음을 주셔야 가까이 갈 수 있는 신비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단순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의 이끄심을 만날 수 있습니다. 노력 없이 은총을 바라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짧은 줄로 ‘우물의 물’을 길으려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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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 나오는 대로,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은 경비병들을 매수합니다. 그들은 빈 무덤의 원인을 제자들의 절도로 돌립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 갔다고 소문을 퍼뜨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가장 위대한 사건이 가장 치사한 방법으로 왜곡되고 있습니다.
수석 사제들은 당시 종교 지도자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무슨 연유로 비겁한 행동을 지시하고 있는지요?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이 귀찮았던 것입니다. 죽음으로 끝나 버린 사건에 다시 연루되는 것이 피곤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부활 자체를 믿지 않았습니다. 빈 무덤 사건 역시 제자들의 절도로 짐작하였습니다. 물증이 없었기에 경비병을 매수해 증인으로 만들었을 뿐입니다. 인류의 운명을 바꾼 사건을 이렇듯 당시 지도자들은 각색하였습니다.
부활은 속임수가 아닙니다. 논쟁의 대상도 아닙니다. 학문과 이론의 대상은 더욱 아닙니다. 부활은 믿음과 깨달음의 차원입니다. 단순하게 받아들이면 누구라도 새로움의 은총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짧은 지식으로 부활의 은총을 멀리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동식물들 중에서는 아주 오래된 옛날부터 존재해서 내려오는 종이 있는 반면, 지금은 완전히 멸종되어 볼 수 없는 종도 있습니다. 그런데 왜 멸종 동물과 멸종 식물이 있는 것일까요? 그 이유에 대해 사람들은 우리 인간들이 하도 잡아 죽여서 또는 환경오염 때문이라고 간단히 말하곤 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이유는 이렇다고 합니다. 즉, 다른 종들과 함께 살아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종은 멸종했고, 그에 반해 다른 종들과 함께 살아가는데 최선을 다한 종들은 오늘날까지 살아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남과 손을 잡지 않았기 때문에 멸종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문득 우리 인간 역시 마찬가지라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만약 인간만 이 세상에 살겠다고 하면 어떨까요? 아니 자기 혼자만 이 세상에 살아있다면 어떨까요? 도저히 살 수가 없습니다.
하루 중에 여러분 혼자서 살아간 시간은 얼마나 될지를 생각해보십시오. 한 마디도 한 적이 없기 때문에 혼자 살 수 있다고요? 아닙니다. 내가 쓰고 있는 물건들, 정말로 필요한 물건들을 따져 보았을 때,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들은 내가 알지 못하는 그 누군가의 덕택에 살고 있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도 과연 혼자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혼자서 살 수는 절대 없습니다. 다른 이들의 손을 잡으면서 함께 어울려 살아야 하는 세상인 것입니다. 특히 이 모든 것을 다 관장하시는 주님을 외면하고서 혼자서 살아갈 수 있을까요? 무늬만 신앙인인 어떤 형제님으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신부님, 성당은 왜 이렇게 형식적입니까? 그냥 시간 날 때, 자유롭게 기도하면 되잖아요? 왜 미사라는 형식이 있어서 사람을 지루하게 만드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저는 성당 나올 때마다 항상 고민입니다. 이렇게 형식적으로 참여하면서 시간 낭비만 하는 것 같아서요.”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몇 시간을 소비해도 아깝지 않다고 생각하는 우리들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위해서는 단 몇 초 쓰는 것도 아깝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이러한 마음 때문에 주님과 함께 살아가지 못하고, 자기 혼자만 살아가려 합니다. 그런데 정말로 혼자서 살아갈 수 있을까요?
과거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수님 없이 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죽었던 그분께서 다시 부활하셨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그들이 취한 모습은 무엇입니까? 자신의 말을 합리화시키기 위해 거짓을 행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거짓이 주님과 자신들을 더욱 더 멀어지게 만듭니다.
이 세상은 함께 걸어가는 곳입니다. 특히 주님과 함께 걸어갈 때,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기쁨과 희망을 간직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주님과 함께 할 때, 거짓으로부터 멀어지고 대신 참 진리의 길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마음은 팔 수도, 살 수도 없는 것이지만 줄 수 있는 보물이다(플로베르).
“그들은 다가가 엎드려 그분의 발을 붙잡고 절하였다.”
-양승국신부-
<붙잡지 마십시오>
부활하신 예수님을 자신들의 눈으로 목격한 여자들의 특별한 행동을 한번 보십시오. 잽싸게 다가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립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발을 꼭 붙잡고 놓아주지 않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씀드렸겠지요.
“주님, 주님께서 계시지 않았던 며칠 동안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십니까? 주님 없는 이 세상은 그저 슬픔과 눈물의 골짜기였습니다. 너무 울어 눈물도 말라버렸습니다. 주님 없는 이 세상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날들임을 알았습니다. 앞으로는 절대 저희를 떠나지 말아주십시오. 저희와 늘 함께 계셔주십시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그리고 이어진 잠시 동안의 스승 부재 체험으로 인한 충격은 너무나 컸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다. 꿈결조차 그리웠던 예수님께서 자신들의 앞에 생생하게 나타나신 것입니다. 너무나 뜻밖의 행복이었기에, 그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예수님을 꼭 붙잡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런 그 여인들의 애틋하고 간절한 마음을 아시는지 모르시는지, 조금은 엉뚱한 말씀을 건네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
사실 여인들의 예수님을 향한 열렬한 사랑과 각별한 마음은 높이 평가할 만합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도 알아야 할 사실 한 가지가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 열혈 여인들의 주님이기도 하지만, 거기에 그쳐서는 안 될 주님이십니다.
그분의 말씀은 갈릴래아뿐만 아니라 온 이스라엘 전체, 세상 방방곡곡으로 퍼져나가야 할 것이며 그분은 유다인들의 주님뿐만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민족들의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여인들이 예수님의 발을 붙잡았는데, 그 ‘붙잡음’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가까이 두고 싶은 마음, 더 이상 떠나보내고 싶지 않은 마음, 나만 소유하고픈 마음, 결국 일종의 집착이 되겠습니다.
세월이 아무리 바뀌어도 늘 통용되는 세상의 이치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이런 것입니다. 그 누구든, 그 무엇이든 꼭 붙잡으려고 하면 할수록 멀리 도망간다는 것입니다. 집착하면 할수록 상처와 괴로움은 커져만 갑니다. 그래서 일상적으로 필요한 노력이 놓은 일입니다. 비우는 일입니다. 포기하는 일입니다.
한 며칠 내린 비에 속절없이 떨어져 내리는 꽃잎들을 바라보며 더 확연히 느끼는 바입니다만, 꽃, 나무들이 자유롭고 아름다운 것은 자연의 이치에 순응하기 때문입니다. 욕심을 버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발을 꼭 붙잡는 여인들의 마음이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정말 감동적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거기에 머무르지 말고 한 걸음 더 나아갈 것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그 큰 부활의 감동을 너희만 누리지 말고 아직 어둠 속에 앉아있는 제자들에게로 나눠주라고 당부하십니다.
이 좋으신 주님, 그 주님의 아름답고 감동적인 이야기, 부활 사건을 이웃들에게 열심히 선포하는 부활시기가 되면 좋겠습니다.
평화의 길
-정영숙 수녀-
“평안하냐?” 죽음을 넘어 부활하신 주님께서 건네신 첫 인사입니다. 주님은 여인에게도 제자들에게도 “평안하냐?”라고 물으시며 참평화의 근원을 바라보도록 초대하십니다. 당신이 평화의 주인이심을 선포하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루카 24,36) 십자가 위에서 평화의 길이 되신 주님을 바라봅니다. 이 평화의 길은 주님의 넉넉한 사랑의 마음, 인간을 조건 없이 환대하는 마음을 닮는 길입니다. 환대받는 이의 마음 안에 변화의 공간을 마련해 주는 길입니다. 사랑을 먹고 새 생명으로 거듭나는 재창조의 길입니다. 평화가 폭력을 당하는 세상입니다. 인간 존재 깊은 곳에 자리한 이 어둠의 창고에 빛을 보내며 예수님은 먼저 찾아오십니다. 거짓 평화 속에서도 마음이 불편하지 않은 세상에, 사람을 억압하는 구조를 만들면서도 사람을 위하는 길이라 믿는 사람들 안에 찾아오십니다. 진정한 평화의 길은 어떤 갈등도 없거나 항상 고요한 마음을 유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축복해 주시는 평화는 존재의 중심에 있는 평화입니다. 삶의 중심을 잃은 제자들에게 당신이 누구신지를 깨닫게 해 주시며 자신과 주변의 세상을 위한 변화의 에너지를 찾게 해 주는 평화입니다. 오늘도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나의 깊은 두려움과 불안의 자리에 나타나시어 똑같은 인사를 건네시며 축복해 주십니다. “평안하냐? 평화가 너와 함께!”
부활의 기쁨을 나누고 기뻐하는 오늘
- 여진천-
용기 있고 호쾌한 기개가 있던 이중배 (마르티노) 는 친구를 따라 천주교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의 열심은 타오르는 불과 같았습니다. 그는 대담하게 행동하면서 천주교인이라는 사실을 남들이 아는 것에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1800년 부활절, 그는 사촌 원경도 (요한) 등과 함께 큰 소리로 부활 삼종기도를 바친 후 고기와 술을 먹고 마시고 성가를 부르면서 예수님의 부활을 축하했습니다. 그는 얼마 후 체포되어 여주 감옥에 갇혔습니다. 의술을 갖고 있던 이중배는 감옥에서도 병에 대해 묻는 사람이 있으면 먼저 주님께 기도한 후 침을 맞거나 약을 쓰도록 했는데 낫지 않는 이가 없었습니다. 심지어 고을 관장도 병이 나면 약에 대해 물었습니다. 그래서 병을 치료하기 위해 찾아온 사람들로 옥문이 장터 같을 정도였고, 그 효험을 보지 않는 이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어느 날 옥리 (獄吏) 가 와서 의학책을 보자고 했을 때, ‘나는 의학책이 없소. 다만 천주님을 공경할 뿐이오. 당신도 의술을 배우려거든 마땅히 주님을 믿으시오.’ 라고 했습니다. 옥리가 ‘천주교 책들은 다 불태워 버렸는데, 무엇을 가지고 배운단 말이오 ?’ 라고 묻자, 그는 ‘내 가슴 안에 타지 않는 책이 있으니, 오히려 남들을 가르쳐 천주교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기에는 충분합니다.’ 라고 했습니다. 그는 감옥에 있으면서 여러 차례 형벌을 받았으나 결코 신앙이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6개월 옥중 생활 동안 그는 교회 서적을 필사하거나 기도를 했으며, 다른 사람들한테 교리를 가르치면서 권면했습니다. 그러자 옥졸 하나가 마음이 움직여 믿고 따랐으며 열심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여주에서 순교한 이중배 순교자처럼 부활의 기쁨을 나누고 기뻐하는 오늘이었으면 합니다.
‘갈릴래아로 = 처음으로’
-김종성 신부-
오늘 복음은 참 이상도 하다. 천사가 여인들에게 주님의 부활 소식을 알려주면서 갈릴래아에서 그분을 뵙게 될 것이라고 하여, 여인들이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소식을 전하러 달려가는 중이었는데, 갑자기 예수님이 또 나타나 갈릴래아로 가라 하신다. 왜 그러셨을까?? 천사가 잘못 전달했을까 봐?? 막달레나가 보고 싶어서?? 혹시 여인들이 너무 정신을 뺀 나머지 갈릴래아로 가라는 중요한 말을 전하지 않을까 봐 걱정하신 것일까?? 작년 용산 참사 현장에 부활소식을 전하러 갈 때의 내 마음이 그랬다. 유가족 앞에 차마 기쁜 소식을 전하러 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지푸라기라도 잡고자 가난한 마음으로 성지를 찾아오는 분들에게 섣불리 희망이라는 단어를 남발하기 죄송스러운 마음이 그랬다. 그렇게 내키지 않는 마음에도 어쩔 수 없이 전해야 할 말이 바로 ‘갈릴래아로 = 처음으로’?다. 시간으로 돌아갈 수 없는 처음이라면, 공간으로나마 처음 장소로 가라는 것이다.
사순 시기의 주제가 ‘회개와 변화’?라면, 부활 시기의 주제는 ‘의심과 믿지 않음’?이 아닐까?? 줄곧 ‘나타나심’?과 ‘그래도 믿지 않음’?이 번갈아 나오고 심지어 ‘보고도 믿지 않음’?도 등장한다. 으레 해마다 반복되는 사순과 부활이 그다지 새로울 것도 없는 속물들에게, 제발 처음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는 것을 믿어보라고, 어차피 스스로 부활하는 게 아니라 ‘일으켜지는 것’?이니 무엇이 일으켜질지 기대나 해보라고, 그 중요한 것을 전하고자 재차 나타나신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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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세 종류의 바보가 있다고 합니다.
1. 안 될 일을 된다고 믿는 바보.
2. 될 일도 안 된다고 해서 진짜 안 되게 하는 바보.
3. 되는 일도, 안 되는 일도 모르는 바보.
물론 작년 선종하신 김수환 추기경님께서 스스로 ‘바보’라고 칭하셨지만, 이는 겸손의 또 다른 표현이라고도 볼 수 있지요. 그러나 위에 나오는 세 가지 바보의 모습은 우리가 반드시 피해야 할 바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이 바보의 모습에서 그 다지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특히 두 번째인 될 수 있는 일도 안 된다고 하는 그래서 정말로 안 되게 만드는 경우는 너무나도 자주 범하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이천년 전 예수님의 죽음을 목격한 사람들은 모든 것을 포기했습니다. 이제 다 끝났다고,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은 이제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단지 한 순간의 해프닝에 불과했다고 생각하면서 좌절 속에 빠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다시금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는 이미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세 차례나 미리 예고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부활에 대해서도 말씀하셨지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제까지 죽었다 살아난 사람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믿지 않았습니다. 이 모습이 바로 앞서 이야기한 ‘바보’의 모습이 아닐까요?
이런 바보의 모습을 끝까지 간직한 사람은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해도 기쁠 수가 없습니다. 이를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쉽게 볼 수가 있지요.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온 여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하게 되지요. 그리고 그들은 큰 기쁨을 안고 제자들에게 이 소식을 알려줍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한 사람은 이 여인만이 아니었습니다. 그곳을 지키고 있었던 경비병들도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했지요. 그렇다면 그들은 어떠했을까요?
그들은 무덤을 찾아온 여인들과는 달리 기쁨보다 두려움에 떨면서 수석사제들에게 알립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수석사제들이 시키는 대로 거짓을 세상에 알리는 역할을 담당하게 됩니다. 앞서 이야기한 ‘바보’가 된 것이지요.
우리는 이러한 바보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 보여주신 그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실제로 이루어짐을 굳게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에 기쁜 소식을 전달하고 또한 내 자신도 큰 기쁨 속에서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본능은 대개 머리가 생각해내기 한참 전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 말해준다(마이클 버크).
“그때에 여자들은 두려워하면서도 크게 기뻐하며 서둘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소식을 전하러 달려갔다.”
-양승국신부-
<진정한 부활의 경축>
요 몇 년 사이 참으로 큰 스승들께서 우리 곁을 떠나셨습니다. 이렇게 한 시대가 가는가 봅니다.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우왕좌왕 갈팡질팡하는 우리에게 정확하게 이정표를 제시해주시던 분들, 지난 시대 우리들의 빈약한 정신세계를 그나마 정화시켜주시던 분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 마더 데레사 수녀님, 선우경식 원장님, 김수환 추기경님, 법정 스님...
그런데 이런 분들을 머릿속에 떠올릴 때 마다 참으로 특별한 느낌 한 가지가 마음에 남습니다.
분명 그분들은 더 이상 이 세상에 계시지 않습니다. 의사로부터 명확하게 물리적, 신체적 죽음이 판명되었고, 우리들 눈앞에서 장례를 치뤘고, 땅에 묻혔습니다. 분명히 그분들은 더 이상 여기, 이 세상에, 우리들 눈앞에 안계십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분들은 분명히 우리들 가운데 살아계십니다. 우리 마음 안에, 우리 정신 안에, 우리 영성 안에, 우리의 사고 안에 생생히 살아 숨 쉬고 계십니다.
그분들이 살아 생 전 우리에게 보여주셨던 그 절절한 사랑, 그 따뜻한 인간미, 그 소박함, 그 인자로움, 가난한 이웃들을 향한 측은지심은 아직도 생생하게 제 기억 속에 남아있습니다.
저는 이런 현상 앞에 어렴풋하게나마 부활이 무엇인지를 가늠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경축한다는 것,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다는 것, 과연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분의 자취가 우리 안에 남아있다는 것이 아닐까요? 그분께서 남겨주셨던 사랑의 삶을 우리 생활 안에 재현시키는 일이 아닐까요? 그분께서 온 몸으로 보여주셨던 섬김과 봉사의 삶이 내 삶 안에서 되풀이되는 일이 아닐까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자신의 몸을 겹겹이 둘러싸고 있던 수의를 한 꺼풀 한 꺼풀 벗겨낸 후 빈 무덤에 남겨놓고 무덤 밖으로 걸어 나오셨듯이, 우리도 우리를 겹겹이 둘러싸고 있는 껍질(불신의 껍질, 의혹의 껍질, 죄의 껍질, 죽음의 껍질, 교만의 껍질..)을 하나하나 벗겨내고 힘차게 일어선 후 밝은 세상을 향해 걸어 나오는 것이 우리 각자가 이뤄내야 할 부활이 아닐까요?
비관적이고 수동적이고 적대적이던 우리의 사고방식을 빈 무덤 속에 내려놓고 긍정적이고 호의적이고 수용적인 사고방식으로 새 출발하려는 마음이 우리 각자에게 해당되는 부활이 아닐까요?
아무리 큰 풍파가 닥쳐온다 할지라도, 아무리 상황이 꼬이고 꼬인다할지라도 관대한 시선, 낙천적인 태도, 너그러운 마음으로 내 삶을 직면하려는 모습이 부활의 영성을 살아가는 길이 아닐까요?
전에는 땅에 근본을 두고 살았다면 이제는 하늘에 근본을 두고 살려는 마음, 전에는 육에 몰두하고 살았다면 이제는 영에 몰두라고 살아가려는 마음, 전에는 자기중심적으로 살아가려고 발버둥 쳤다면 이제는 하느님과 이웃을 중심에 두고 살아가려는 마음이 내 안에 부활을 되살려내는 길이 아닐까요?
왜곡
-이영훈 신부-
명확한 진실를 두고 누가 맞니 틀리니 하는 논쟁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분명 누군가는 거짓을 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누구도 자기가 틀렸다고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런 왜곡은 예수님 시대에도 있었으니, ‘예수님 시신 도난 사건’이 바로 그것입니다. 복음서는 분명 ‘빈 무덤’이 ‘부활’의 증거이며, 동시에 당시 팽배해져 있던 사회적 인식, 즉 예수 부활이 제자들이 꾸민 이야기라는 진실 왜곡에 대한 사실을 전합니다. 그리고 왜곡된 진실을 ‘참진리’인 양 믿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음을 전합니다. 이 이야기는 진리를 왜곡했을 때 그 파괴력이 얼마나 큰지를 잘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하느님의 진리마저도 왜곡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유다 지도자들의 ‘교만과 이기심’이 어찌 그 당시만의 문제라 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우리 사회 안에서 진리를 왜곡하고 있는 이들이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그것을 하느님께서 알고 계시고, 그 자신도 잘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욕심으로 가득 찬 교만의 늪에서 나오길, 그래서 더 이상 진리를 왜곡하며 세상이 고통 받지 않길 기도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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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이는 힘과 살리는 힘
-김찬선신부-
“여러분에게 넘겨지신 그분을 여러분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죽음의 고통에서 풀어 다시 살리셨습니다.”
주님의 부활체험을 한 베드로의 이 말은 언제나 저에게 힘을 줍니다. 인간은 죽게 해도 하느님은 살리신다는 말씀.
이것은 베드로가 아주 절절히 체험하고 한 말입니다.
그가 체험한 한 편은 인간에 대해서이고 죽음에 대해서입니다. 인간은 유한한 존재로서 누구나 죽음을 피할 수 없을뿐더러 존재를 파괴하고 죽이는 존재라는 점입니다.
파괴의 힘은 미움에서 나오고 미움은 자기중심성에서 나옵니다. 사랑과 미움은 관계적인 힘이라는 면에서는 같습니다. 둘 다 인격적인 관계 에너지이지만 그러나 사랑은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에너지라면 미움은 파괴적인 에너지입니다.
그러니 에너지의 양으로만 치면 무엇을 파괴할 정도라면 미움도 굉장한 에너지를 쏟는 것입니다. 그리고 에너지를 쏟은 만큼 파괴의 에너지도 커집니다. 그러나 그 에너지를 자기중심적으로 쓰는 것이 문젭니다. 간단하게 이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한 도예공이 있습니다. 온갖 정성을 다 해 도자기를 빚고 구웠습니다. 그런데 자기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이 나왔습니다. 이때 그는 그 도자기를 사정없이 깹니다. 별로 기대도 하지 않았고 그래서 대충 만들었다면 자기 마음에 들지 않아도 파괴까지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기대와 정성이 컸기에 파괴의 에너지도 컸던 것입니다.
그런데 개인의 파괴 에너지도 문제지만 집단의 파괴 에너지가 더 큰 문제입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말씀하셨듯이 인간은 죽음의 문화를 형성합니다. 문화의 요소는 집단성과 향유입니다. 그러니까 문화란 집단적으로 즐기는 것이고 죽음의 문화란 집단적으로 죽이는 것을 즐기는 것이지요. 다른 동물도 집단적으로 다른 존재를 파괴하고 죽이지만 모두 다 생존을 위해서입니다. 인간만이 생존이 아닌 다른 이유, 즉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즐기기 위해 또는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즐길 수 없으니 파괴를 하고 그 파괴와 가학의 즐거움을 집단적으로 즐기기도 합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죽이는 것까지는 인간이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살리는 것은 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만이 죽이실 수도 있고 살리실 수도 있습니다. 완전한 사랑의 힘이고 그 힘의 승리인 것입니다. 이것이 베드로가 체험한 다른 한 편입니다. 하느님과 생명에 대해서말입니다.
그러니 인간이 살리는 것에 참여하는 것은 이 사랑에 참여할 때뿐입니다. 이 완전한 사랑의 힘에 의해서만 인간은 죽었던 자신을 다시 살릴 수 있을 뿐 아니라 다른 존재도 살릴 수도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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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깨끗한 이는 행복하다
-전삼용신부-
김연아 선수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커다란 기쁨과 희망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김연아 선수가 잘 할수록 기분 나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아사다 마오에게 지나친 애정을 지닌 팬들은 김연아 선수가 받은 높은 점수를 받아들이려하지 않고 또 안 좋은 동영상을 만들어 인터넷에 올리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어찌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기도 합니다. 한 번 안 좋게 보기 시작하면 아무리 잘 해도 안 좋게 보이는 것이 사람의 눈인가 봅니다.
예수님의 부활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사람들만이 기쁨을 누릴 수 있었는데 예수님은 당신을 더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순차적으로 당신을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기쁘지 않다면 그것은 어쩌면 아직 부활한 주님을 만나보지 못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이번 주 복음은 예수님께서 발현하시는 장면들이 계속 나옵니다. 누구에게 발현하시고 어떻게 발현하시는지 한 주 동안 잘 묵상하면 우리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더 빨리 만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셔서 여인들에게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두려움에 떠는 여인들에게 제자들에게 가서 전하라고 이렇게 일러주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
사실 이 말씀은 실제로 갈릴래아로 가라는 말씀이 아니십니다. 실제로 제자들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었고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그들에게 발현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갈릴래아로 가라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저는 이 말씀을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하고 좀 더 명확하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지도를 한 번 펴서 보십시오. 맨 위에 갈릴래야 호수가 있고 그 호수 밑으로 요르단강이 흐릅니다. 요르단강은 사해에서 끝나게 됩니다. 차를 타고 갈릴래아 호수에서 사해로 계속해서 내려왔습니다. 때는 2월 말이라 가장 아름다운 봄철이었습니다. 갈릴래아 호수는 그야말로 에덴동산을 연상시켰습니다. 꽃과 나무와 물고기들이 풍부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물이 풍부하기 때문입니다.
물이 풍부하니 아무리 요르단강으로 물을 흘려보내도 계속 채워집니다. 주위에 높은 산들이 있어서 끊임없이 물이 흘러내려와 모이고 비도 적당히 와 주기 때문입니다. 갈릴래아 호수는 해수면보다 210미터 정도 더 아래에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사해가 더 낮기 때문에 물이 사해로 끊임없이 흘러들어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사해는 해수면보다 390미터 정도나 낮기 때문에 주위에 있는 모든 물을 끌어들입니다. 그러나 더 낮은 곳이 없기 때문에 그 물이 빠져나갈 곳이 없습니다. 마치 지옥을 연상시킵니다. 물이 계속 흘러들어와 빠져나가지 못해서인지 그 곳은 온통 소금으로 뒤덮여졌습니다. 소금 사막입니다. 물에도 염분이 너무 많아 생물이 살 수가 없습니다. 성서학자들은 사해가 있는 자리에 이전에 소돔과 고모라가 있었고 그 주위에 유황불이 떨어져 그렇게 죽은 땅이 되어버렸다고 합니다.
이렇게 지리적으로도 갈릴래아는 천국을 나타내고 사해는 말 그대로 죽음의 바다, 즉 지옥을 나타냅니다. 그 차이는 물에 있습니다. 갈릴래아에 있는 물은 생명의 물이고 사해의 물은 죽음의 물입니다.
성경에서 생명의 물은 성령님을 상징합니다. 요한은 예수님께서 “목마른 자는 내게로 와서 마셔라. 내가 생명의 물을 거저 주리라. ... 이 생명의 물은 예수님께서 주실 성령님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다.”라고 쓰고 있습니다. 즉, 성령님으로 충만한 사람들의 마음이 바로 하느님나라요 갈릴래아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성령님을 충만하게 받아 그 안에 하느님나라를 만들 수 있는 사람입니까? 바로 죄 없는 사람입니다. 오직 원죄 없이 잉태되신 티 없으신 성모님만이 ‘은총이 가득’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은총이 가득 하실 수 있었던 이유는 죄가 없으셨기 때문입니다. 은총은 성령님의 선물입니다. 즉, 인간은 죄 때문에 성령님의 선물을 잃게 되었지만 성모님만이 깨끗하시어 성령님으로 충만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마음이 갈릴래아가 되려면 성모님처럼 깨끗한 마음을 먼저 지녀야한다는 뜻입니다. 죄 없이 깨끗해진다면 그 사람은 자신 안에서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부활과 성탄 이전에 꼭 고해성사를 보도록 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면에서 성모님이 성경에 나타나지는 않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첫 번째로 뵌 분임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기 위한 가장 첫 번째 조건은 성모님처럼 죄 없이 깨끗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하신,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는 말씀은, “마음이 깨끗한 이는 행복하다, 그는 하느님의 얼굴을 뵈올 것이다.”라는 말씀과 본질적으로 같은 것입니다.
짧은 묵상 - 완전한 봉헌
오늘 복음에서 여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발을 붙잡고 절하였다고 나옵니다. 그런데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나타나셨을 때는 당신이 아버지께 가셔야한다고 그녀가 당신을 만지는 것을 금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는 시간상으로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발현하시고, 아버지께 가셨다가, 다시 오늘의 여인들에게 나타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 가시기 위해 아무리 깨끗한 인간이라도 당신을 만지는 것을 허락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아무리 성인이라도 성모님을 제외한 누구나 죄의 더러움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 먼저, 당신의 ‘흠 없는’ 부활한 몸을 보여드리고 싶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흠 없이 깨끗한 가장 좋은 것을 주고 싶은 것이 당연합니다.
우리도 하느님께 되돌려 드려야 할 것을 지니고 있습니다.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작게는 성체 앞에 무릎을 꿇을 때마다, 혹은 마지막 날 우리 자신을 그 분께 봉헌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아버지께 돌아가기 위한 예수님의 자세에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얼마나 깨끗하게 가꾸어 나가야할지를 배우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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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하냐?' 라고 물으시며, 우리를 위로하시는 예수님
-김기현신부-
어제 아는 자매님들이 저희 본당에 오셨습니다. 아이들도 데리고 오셨는데, 그 중에 한 아이가 냉담을 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인데, 교리 선생님에게 어떤 이유로 상처를 받았나 봅니다. 그래서 두 달 정도 성당에 안 나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어떤 신부님, 어떤 신부님은 거짓말쟁이라고... 마음이 아프고 괴로울 때, 예수님이 위로해 주신다고 했는데... 내가 이렇게 상처받고 아파서 마음이 찢어지고 너덜너덜해졌는데, 예수님이 위로도 안 해 주시고 돌보아 주시지도 않는다고... 그래서 신부님들은 거짓말쟁이라고... 그 말을 듣고 저도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습니다. ‘아이가 얼마나 마음이 아팠으면 그런 말을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이뿐만 아니라 우리들도 살아가면서 상처를 받고 갈등을 겪으며 살아갑니다. 아플 때마다 예수님께서 위로해 주시고 치유해 주시고 돌보아주시면 좋겠는데, 예수님의 손길이 느껴지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가까이 계시지 않은 것 같을 때도 있고, 방관하시는 듯이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상처받아 아픈 것보다, 나를 사랑해 주셔야 할 예수님이 성실하지 못한 것 같아 배신감에 더 아파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마음을 차분히 하고 내 주위를 돌아보면 예수님이 주시는 위로의 손길을 느낄 수 있습니다. 뜻 밖에 걸려온 반가운 전화나 아는 사람의 따뜻한 미소, 그리고 내가 존경하는 사람의 사려 깊은 조언, 그리고 밝고 기쁘게 살아가는 모습으로 나에게 새로운 의지를 불어넣는 사람들... 그들 모두가 예수님이 나에게 보내주시는 위로의 손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뿐만 아니라 기도와 미사와 말씀 안에서 위로와 감동들이 있습니다. 기도 안에서 내가 사랑받을 만한 존재라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될 때가 있고, 미사 안에서 이유 없이 주어지는 감동과 위로를 받을 때가 있습니다.
또 성경 말씀 안에서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위로와 비전을 체험할 때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내가 힘들어할 때 주님이 나에게 주시는 위로와 사랑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여인들도 절망의 순간에 뜻밖의 큰 위로를 체험합니다. 곧 부활하신 예수님의 발현을 체험하고 예수님의 위로를 받은 것입니다. 오늘 복음 9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예수님께서 마주 오시면서 그 여자들에게 “평안하냐?” 하고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여인들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절망 속에 있는 여인들이 희망할 수 있도록, 좌절하지 않고 일어날 수 있도록 여인들에게 나타나시어 그들을 안심시키고 그들을 위로하셨습니다. 그러자 여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발현을 체험하고, 예수님에게 다가가 엎드려 그분의 발을 붙잡고 절을 합니다. 얼마나 기뻤을까요? 얼마나 행복했을까요? 더 이상 혼자가 아니고 절망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그들에게 얼마나 큰 희망이 되었을까요? ...
그 저학년 아이도 아는 수녀님과의 짧은 상담을 통해 상처가 많이 치유된 것 같다고 합니다. 다시 밝아졌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늘 우리 곁에서 나를 응원하고 나를 위로해 주시는 분임을 믿을 수 있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힘들고 어려울 때, ‘평안하냐?’ 라고 물으시며 나에게 도움을 주시는 분이심을 체험할 수 있으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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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은 가까이 가서 그의 두 발을 붙잡고 엎으려 절하였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그 여자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서 나를 만나게 될 것이다.>하고 말씀하셨다."
-양승국신부-
<과감한 슬라이딩 태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 부활의 첫 목격증인인 여인들은 "이게 꿈이냐? 생시냐?"하면서 스승 예수님의 두 발을 붙잡고 엎드려 절합니다.
축구 시합 중에 슬라이딩 태클이라도 하듯이 과감하게 대시를 시도해서 가장 먼저 스승의 발을 붙잡은 여인은 막달라 여자 마리아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최초로 대면한 마리아가 처음 취한 행동-예수님의 두 발을 붙잡고-은 참으로 의미심장한 행동이었습니다.
그렇게도 사랑했기에 꿈결조차 그리웠던 주님, 그 고달프고 비참했던 시기, 세상 모든 사람들이 떠나가던 순간에도 끝까지 삶의 버팀목이 되어주셨던 분, 바로 그 주님께서 돌아가시던 순간, 세상이 끝난 것 같았던 마리아였습니다.
"설마 그럴 리가?"하면서도 하루 이틀 사흘이 지나면서 예수님의 죽음은 기정사실화 되었고, 마리아는 역시 이제 슬픔과 분노의 단계를 넘어 체념 상태에 도달했던 것입니다.
그런 마리아 앞에 예수님께서 생전과 똑같은 모습으로 발현하십니다. 마리아는 너무나 놀랍기도 하고 기쁘기도 해서 앞뒤 생각하지 않고 무조건 예수님 앞으로 돌격합니다. 솔개가 먹이 감을 낚아채듯이 예수님을 발을 두 팔로 감싸안았습니다. 혹시라도 다른 여인이 먼저 잡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에 인정사정 없습니다.
놀람과 기쁨과 감사의 마음,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다시는 예수님을 놓치지 않겠다는 단호한 마음의 외적 표현이 바로 예수님의 두 발을 붙잡는 행위인 것입니다.
"붙잡는다"는 표현은 "어떤 실재를 확인하고 소유하려는 인간적인 행위"입니다.
우리는 늘 무엇인가, 또는 그 무엇인가를 소유하고 싶고 붙잡아두고 싶은 욕구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부활의 첫 목격증인인 여인들도 그전에 늘 하던 방식대로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려 그분을 붙잡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십니다.
"나를 붙잡지 말아라. 두려워하지도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서 나를 만나게 될 것이다."
이 말씀은 이렇게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마리아야, 미안하지만 나 예수는 이제 더 이상 나자렛 예수가 아니란다. 나 예수는 이제 더 이상 이전에 너희들과 함께 식탁에 앉아 소박한 기쁨을 주고받던 유다인 예수가 아니란다.
나는 세상 모든 사람을 구원해야할 만민의 예수, 세상 끝까지 이름이 전해져야 할 세상의 구원자 예수란다."
마리아야, 아쉽겠지만 이제 더 이상 나에게서 그 옛날 나자렛 예수를 기대하지 말거라.
이제 네가 나를 위해 할 일은 갈릴래아를 비롯한 온 유다 지방에 그리고 세상 곳곳에 내 이름과 영광을 알리는 일이란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제 나만의 예수님, 우리만의 예수님이 아니라 만민의 주님, 삼라만상의 하느님이 되신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향한 보다 성숙한 시각과 성숙한 인식, 그것이 오늘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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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료들에게 왕따 당하던 제자가 있었습니다. 실의에 빠진 그는 스승에게 상담을 요청했습니다. “스승님! 저는 견딜 수가 없습니다. 동료들이 나를 따돌리는데, 아무래도 저는 너무나 비천한 존재인 모양입니다. 죽고 싶습니다.”
조용히 듣고 있던 스승은 벽장 속에서 주먹 만한 돌 하나를 꺼내주며 이르기를 “이 돌의 가치가 얼마나 될 것 같은가? 시장에 나가 여러 사람들에게 물어보고 오너라.”라고 하셨습니다.
제자가 시장에 나가 채소장수에게 물었지요. 채소장수가 말합니다. “옛끼! 돌덩이가 무슨 가치가 있어! 갖다 버려!”
정육점에 갔습니다. “보통 돌은 아닌 것 같고……. 돼지고기 두어 근 값은 쳐 주겠소!”
이번에는 방앗간에 갔더니 “내가, 돌을 볼 줄 아는데……. 이 돌은 보통 돌이 아니군! 쌀 한말 값은 나가겠어!”라고 말씀하십니다.
마지막으로 그는 돌아오는 길에 보석가게에 갔습니다. 보석상 주인은 무심결에 한번 흘낏 쳐다보다가 깜짝 놀라 돌을 정밀감정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이마에 땀을 흘리며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당신이 받고 싶은 액수가 얼마요? 얼마를 부르든 내가 다 주고 사리다. 이 돌은 사실은 가격을 매길 수 없을 만큼 엄청나고 희귀한 보석이요. 부르는 게 값이요.”
이제 스승이 제자에게 말했습니다.
“보아라! 네 동료들이 너를 돼지고기 두어 근이나, 쌀 한말, 아니면 하찮은 돌덩이 취급을 한다고 해도 너의 가치는 네가 값을 매기는 그대로다. 너는 너를 얼마짜리로 생각하느냐?”
여러분들도 한 번 생각해 보시죠? 여러분은 스스로를 얼마짜리로 생각하십니까? 내가 나를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나의 가치도 달라지는 법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소중하게 생각하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소중하게 다루어야 합니다. 즉, 세상의 물질적인 것들에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에 맞게 움직일 때 나의 가치는 더욱 더 커집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여인들이 나옵니다. 그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에 무덤을 갔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이 여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으로 만나는 영광을 얻게 되고, 여인들의 가치는 역사에 이렇게 회자될 정도로 높아졌습니다.
한편 예수님의 무덤을 지켰던 경비병들도 나오지요. 그들 역시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수석사제들이 준 돈에 매수되어 헛된 소문만을 던졌습니다. 그 결과 이 경비병들의 가치는 한없이 아래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처럼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뜻에 맞게 생활할 때 자신의 가치는 자연스럽게 올라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나의 가치는 어떤 것 같나요? 혹시 물질적인 것에 쉽게 흔들려서 내 가치가 계속해서 하락하는 것은 아닐까요?
참된 사랑은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고 아무런 보답도 바라지 않으며 자기 자신의 모든 애정을 쏟아 주는 것이다.(플로렌스 스코멜 쉰)
일상의 자리가 만남의 자리
-남상근 신부-
예루살렘에서 전개된 스승님의 체포와 판결과 처형으로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명운을 함께하겠다던 약속과 다짐은 지켜지지 못했습니다.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떠나서 예수님과 한길을 걷겠노라는 서약은 그저 말뿐이었던 것이지요. 그러니 주님의 십자가 이후 제자들은 가능하면 멀리 도망쳐 숨어버린 것입니다. 그분과 함께 지냈다는 사실이 알려질까 두려웠던 것이지요. 여인들에게 나타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도록 전하라 하셨습니다. 갈릴래아는 제자들이 예수님을 만난 곳입니다. 주님과 제자들이 곳곳을 다니면서 사람들을 만나고 복음을 전하면서 하느님 나라를 구현한 일터였습니다. 그러니 갈릴래아로 돌아가서 당신이 하셨던 구원과 생명을 전하는 일을 이제 제자들더러 지속하라는 예수님의 당부이신 것이지요. 제자들이 앞으로 해야 할 일은 별다른 일이 아니라 예수님의 일을 보존하고 확산시키는 것입니다. 갈릴래아는 그 사실을 생생하게 일깨워주는 공간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신앙과 일상이 별개인 삶을 살아갑니다. 성당 안에서만 그의 믿음이 떠돌 뿐 교회 담장 바깥, 그가 일하고 만나고 살아가는 일상의 공간과 영역에서는 맥을 못 추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당에서 강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세상에서 강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나는?
-김찬선신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사람들을 둘로 갈리게 합니다. 재림을 주님의 오심으로 기꺼이 맞이하는 부류와 재림을 심판자의 오심으로 맞이하기를 두려워하는 부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도 사람들을 갈리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뻐하고 널리 알리려는 부류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당황하고 감추려는 부류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아무 상관없는 부류입니다.
나는 진정 어떤 부류일까 생각해봅니다. 저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당황하고 그런 사실을 감추려하는 사람은 분명 아닙니다. 그럼 오늘 복음의 여인들과 같습니까? 그렇지도 않은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의 여자들을 보면 두려움이 있고 그러나 두려움도 있지만 크게 기뻐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어 서두릅니다.
두려움은 여인들이나 수석 사제들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두렵지 않은 부류는 예수님의 죽음이나 삶이 자신들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경비병들뿐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움은 어떤 식으로든 상관이 있는 사람들에게 있는데 수석 사제들의 두려움은 존재의 안위가 위험하거나 죄상이 드러나는데서 오는 두려움입니다.
그렇다면 여인들의 두려움은 어떤 두려움인가? 예수님께서는 여인들에게 두려워말고 형제들에게 전하라 하시는데 이때의 두려워말라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너무 엄청난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할 때의 두려움입니다. 하느님 체험의 한 면이 두려움이고 다른 면이 기쁨입니다. 하느님 체험의 강도만큼 두려움도 엄청나고 기쁨도 엄청납니다. 이 두려움은 존재의 위협감이 아니라 존재의 壓度感입니다. 엄청난 양의 고기를 잡은 베드로가 느낀 바로 그 압도감입니다. 보통의 인간인 줄 알았는데 엄청난 기적에 하느님을 목도하며 느낀 압도감입니다. 그래서 기적을 보기 전에는 스승이라고 부르던 것이 기적을 체험하고 난 뒤에는 주님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체험한 사람의 두려움은 압도감이며 이런 사람은 하느님께 압도되어 하느님 현존에 의해 꼼짝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현존 체험은 두려움만큼 기쁨도 큽니다. 이것이 인간 재회와 다른 점입니다. 인간 재회는 슬픔만큼 기쁨이 큰데 하느님 현존 체험은 두려움만큼 기쁨이 큽니다. 다시 말해서 그 기쁨은 잃었던 연인을 다시 찾은 기쁨 정도가 아니라 하느님을 비로소 만난 기쁨이며 그에 의해 나의 존재가 앗기어도 기쁜 그런 기쁨입니다. Passion이 그를 위해 죽어도 좋은 사랑이고 죽고 싶을 만큼 강렬한 사랑이듯이 하느님의 현존 체험은 하느님을 만나면 내가 죽을 것 같아도 만나고 싶고 하느님을 만나면 모든 것을 잃어도 만나고 싶은 만남이며 하느님 현존 체험의 기쁨은 그런 만남의 기쁨인 것입니다.
이런 하느님 체험은 이제 다른 사람에게 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 존재에 내가 압도되어 전할 수밖에 없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너무 기쁘기 때문에 더 정확히 얘기하면 너무 기뻐 가만히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인들의 부활체험을 묵상하는 이 새벽, 자신들이 체험한 주님의 부활 체험을 제자들에게 알리기 위해 서둘러 달려가는 여인들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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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도`를 분명히 하면서 가야 하는 길
- 양옥자 수녀-
예수님의 부활이라는 엄청난 사건 앞에 선 두 부류의 사람들이 우리 앞에 서 있다. 한 부류는 예수님의 시신에 향료를 바르러 간 여인들로 부활의 증언자가 되고, 또 한 부류는 무덤을 지키는 경비병들로 부활의 은폐자가 된다. 그들이 느낀 두려움도 달랐다. 천사의 부활 소식을 듣고 되돌아가는 여인들의 마음을 가득 채운 것은 하느님의 놀라우신 일에 대한 두려움이었기에 희망차고 기쁨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경비병들이 느낀 두려움은 어떤 것이었을까? 복음에 그에 관한 자세한 기술은 없지만, 그들이 대사제에게 달려가 보고를 드렸다는 말에서 그들이 부담감을 갖고 있었던 것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현실에만 급급한 근시안적 눈에는 예수님의 부활 사건조차 그저 현실적 안위에 불편을 끼치는 것 정도밖에 될 수 없었다.
같은 자리에 선 이들의 태도가 다른 것은 그들의 내면 상태가 다르고 체험이 다르고 관심사가 다르기 때문이 아닐까? 이 ‘태도’라는 것에 따라 우리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삶을 살아간다. ‘태도’는 단순히 외적인 형식이나 표현이 아닌 우리 내면의 상태가 그대로 반영되어 나오는 우리 존재의 표현이다. 좋은 태도, 긍정적인 태도, 생명을 주고 기쁨과 행복을 주는 태도는 그 안에 그러한 지향과 그러한 마음 터 닦음의 여정이 전제되어 있다. 닦고 있는 토양 위에 하느님의 은총이 내릴 때 우리는 빛을 주는 태도, 생명을 불러일으키는 태도로 살게 되고, 우리 삶의 크고 작은 부활 체험을 통해 예수님이 참으로 부활하셨음을 힘 있게 증언하는 증거자로 살게 된다. 증언자와 은폐자의 얼굴이 우리 안에 공존하고 있어 현실을 뚫고 부활의 진정한 가치에 한 발 먼저 눈을 두는 참 믿음의 생활에 늘 깨어 있도록 경각심을 주고 있다.
두 여인과 경비병들이 달려간다. 함께 열심히 달리지만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혀 다른 목적을 갖고 달리고 있다. 우리도 열심히 삶을 살고 있다. 달리고 있다. 하지만 잠깐씩 멈추어 서서 생각하면서 갈 일이다. 증언자의 길인지 은폐자의 길인지, 빛을 주러 가는 길인지 그 빛을 가리러 가는 길인지, 기쁨을 주러 가는 길인지, 분열을 주러 가는 길인지 잠깐씩 ‘태도’를 분명히 하면서 갈 신앙 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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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을 열며
- 조명연신부
어느 중학교에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몸이 불편한 학생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학교에서 ‘세상에 다시 태어난다면’이라는 제목의 글짓기를 했는데 이 학생의 글이 너무나도 인상적이었다고 하네요. 사람들은 이 학생의 몸이 불편하니까 당연히 몸이 불편하지 않은 비장애인으로 태어났으면 좋겠다는 식의 글을 쓸 줄 알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학생은 이렇게 글을 썼습니다.
“다시 태어난다면 내 어머니의 어머니로 태어나고 싶다. 그래서 이 생에서 내가 받은 그런 고마움을 어머니의 어머니가 되어서 무조건 보답하면서 살고 싶다. 이 생에서 내가 어머니의 고마움에 보답하며 사는 건 너무나 힘들기에 제발 다음 생에선 내 어머니의 어머니로 태어나서 그 무한한 사랑과 정성을 갚고 싶다.”
어머니에 대한 학생의 사랑을 느낄 수 있는 글이 아닌가 싶습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이 학생과 같은 사랑을 간직하지 못하지요. 내 자신의 처지를 남과 비교하면서 남의 탓을 외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한 가운데에서 불신이 싹트게 되고, 그 불신이 더 나아가 미움의 감정으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못 박아 돌아가시게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 그들은 예수님께서 살아계실 때부터 메시아라는 사실을 인정했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여러분도 한 번 생각해보세요. 지금 여러분 곁에서 어떤 사람이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다.”라고 말하면서 다닌다면 어떻게 대처하시겠어요. 그의 말과 행동을 보고 판단하면서 정말로 아니라면 한낱 미친 사람의 말로 치부하고 신경 쓰지 않으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과민반응을 하지요. 끊임없이 예수님의 행동에 신경을 쓰고 있다는 것은, 바로 메시아라는 사실은 확실한 것 같은데 믿기 싫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불신이 끝내 미움으로 확장되어 예수님을 제거했던 것이지요.
이제 예수님께서 정말로 부활하면 어떻게 할까 라는 불안감이 작용했지요. 그래서 그들은 무덤 입구를 막은 돌문을 봉인하고 삼엄한 경비병을 세우는 등 완벽한 안전조치까지 취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셨어도, 원로와 대사제들은 이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체포할 때에도 유다에게 돈을 주어 매수했는데, 이번에는 경비병들을 돈으로 매수합니다. 분명히 자신은 틀렸지만, 그 틀린 사실을 인정하지 않기에 계속해서 불의한 행동을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믿는 자들에게만 나타나셨습니다. 사실 믿지 않는 자에게는 모든 증거가 필요 없었지요. 그들은 불신과 미움으로 모든 증거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지금 나는 과연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요? 그분께 대한 굳은 믿음을 얼마나 가지고 있는지요? 나의 불신이 그리고 나의 미움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할 수도 있음을 잊지 맙시다.
부모님을 위한 사랑의 기도를 바쳐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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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네와 남정네의 부활
-김찬선신부-
오늘 복음, 마태오 복음 28,9-15절에는 두 대조되는 무리가 등장합니다. 하나는 9-10절에 나오는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이고, 다른 하나는 11-15절에 나오는 경비대원들과 원로들입니다.
이것은 마치 영화나 연극에서 주인공을 부각시키기 위해서 반대편을 더 대조되게 등장시키는 것과 같고, 그림에서 중심인물이나 주제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 다른 부분을 어둡게 처리하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을 때 여인네들은 사랑을 만나는데 남정네들은 부활한 사건을 만납니다. 여인네들에게는 인격적인 만남이 이루어지는데 남정네들에게는 인격적인 만남은 이루어지지 않고 당황스러운 사건, 해결해야 할 사건이 그들 앞에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인들에게 인사말을 건네시고 여인네들은 예수님께 다가가고 그분의 발을 붙잡는 인격적인 만남이 이루어집니다. 요한복음은 예수께서 막달라 마리아에게 붙잡는 것을 허용치 않는 것으로 묘사하는데 비해 마태복음은 예수께서 붙잡는 것을 허용하시는 것으로 묘사함으로 이런 인격적 만남을 더욱 분명히 보여줍니다. 그리고 마태오 복음은 다른 복음에는 없는 남정네들의 이야기를 덧실음으로 남정네와 여인네의 차이점을 분명히 합니다.
그리고 여인네들이 돌아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음을 알리고 드러내는 동안 경비병들은 일어난 일을 원로들에게 알리고 원로들은 사건을 숨기는데 여념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한 여인네들은 예수님을 중심으로 사실을 그대로 드러내지만 자기중심적인 남정네들은 사실을 은폐하고 자기 멋대로 조작합니다. 정치나 사업에서 남자들이 부정을 많이 저지르고 여자들이 비교적 정직한 것과 비슷한 현상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부활이 나에게는 어떤 것인지 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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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워하지 마라.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
-양승국신부-
<왜 하필 갈릴래아입니까?>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왜 하필 제자들을 갈릴래아로 집합시키셨을까요?
이왕이면 유다 본산인 예루살렘 광장 한 가운데로 가라고 하지 않으셨을까요? 당신을 십자가형에 처한 정치인들, 종교지도자들 앞에 당당히 부활하신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셨으면 훨씬 ‘뽀대’나고, 홍보효과도 클 텐데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하십니다. 갈릴래아는 어떤 곳이었습니까?
예수님 시대 당시 갈릴래아 지방은 유다 여러 지방 가운데서 경제적으로 가장 낙후된 지역이었고, 또한 ‘촌구석’이었습니다. 그래서 별 볼일 없는 지방으로 사람들의 머릿속에 인식되어 있었습니다. 그 지방 출신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가면 다들 ‘촌놈’ 왔다고 떠들어댔습니다.
갈릴래아 사람들! 가난했기에, 못 배웠기에, 낙후되었기에, 로마 식민 통치 하에서 고통과 압박을 가장 크게 느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수도 예루살렘이 아니라 가장 ‘외진 곳’ 갈릴래아로 먼저 가십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래아로 먼저 가셨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수님께서 가난한 사람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하셨다는 것을 말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유다 왕실에, 정치 1번지에, 초고층 호화 아파트에 부활하신 것이 아니라 가난한 백성들의 슬픔 한 가운데로 부활하십니다. 고통 받는 백성들의 절망 한 가운데로 부활하십니다. 상처 입은 백성들의 탄식과 눈물 한 가운데로 부활하십니다. 바로 우리들의 삶 한 가운데로 부활하십니다.
오늘날 갈릴래아는 어디입니까?
구차스런 우리의 삶 한 가운데입니다. 짜증나는 우리의 일상 한 가운데입니다. 상처투성이인 우리 인간관계 한가운데입니다.
이번 부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다른 곳이 아닙니다. 바로 우리 삶 한 가운데 부활하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우리 각자 역시 부활하기를 바라십니다.
우리 각자는 어떻게 부활할 수 있습니까?
알렐루야만 크게 외치면 부활하는 건가요? 부활계란만 실컷 먹으면 부활이 가능한가요?
이런 말씀 드리는 저도 이번 부활, 계란 엄청 많이 먹었습니다. 혹시 효과가 있을까 해서...^^
결국 부활은 죽어야 가능합니다. 죽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자존심을 최대한 멀리 던져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크게 한번 양보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번 크게 물러서는 것을 의미합니다. 큰마음 먹고 용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과 만나는 자리
-조성풍 신부-
오늘 복음에서 여인들에게 부활하신 주님은 ‘갑자기’ 다가오십니다. 여기서 ‘갑자기’ 다가오셨다는 것은 뜻밖의 순간에 오셨음을 일깨워줍니다. 여인들이 기대하지 못한 순간에 주님께서 당신 부활을 드러내고 계신 것입니다. 이처럼 부활하신 주님과의 만남의 자리, 즉 부활 체험은 기대하지 않은 곳에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나를 둘러싼 사람들과 환경 안에서 부활하신 주님은 함께 계시고, 당신을 드러내보이십니다. 그러고는 우리들에게 평화롭게 지내기를 바라는 인사를 건네십니다. 마치 여인들에게 ‘평안하냐?’ 하고 인사를 건네신 것처럼 말입니다. 주님은 우리 모두가 부활의 기쁨과 평화를 누리길 바라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자신 안에 간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부활을 체험하고 간직한 나 자신을 주님의 도구로 봉헌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나로부터 이웃에게로 부활의 평화가 퍼져나가도록 해야겠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여인들에게 ‘갑자기’ 나타나셔서 놀라움을 선물하신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가장 가까운 사람들로 하여금 부활의 기쁨을 ‘갑자기’ 느낄 수 있도록 놀라움의 선물을 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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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갈릴래아
-이동훈 신부-
오늘부터 며칠 동안 고속도로 휴게소나 명승지에서 사제나 수도자를 만날 확률이 높다. 언제부터 시작된 전통인지는 모르지만 부활 대축일 다음 날 많은 성당에서 엠마오를 떠나기 때문이다. 사순절 기간 내내 그리고 부활 대축일을 지내기 위해 함께 고생한 이들과 부활의 기쁨을 나누기 위함일 것이다. 일에서 해방되어 좀 더 자유로움을 만끽하며 전례를 치르느라고 그야말로 초죽음이 된 몸과 마음을 회복하는, 다시 말해 자신의 부활을 만끽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훌쩍 어딘가로 떠나 자연 속에서 맛있는 음식과 함께 회포를 풀며 참다운 파스카를 만끽한다. 여인들을 통해 예수님의 말씀(10절)을 전해 들은 제자들이 갈릴래아로 돌아가는 길목인 엠마오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에 붙여진 엠마오라는 행사는 다분히 복음적 착상에서 생겨난 것이다. 무덤에 묻혀 있을 예수님을 만나러 간 여인들에게 예수님은 “갈릴래아로 가면 나를 만날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갈릴래아는 어떤 곳인가? 그곳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만날 때까지 생업에 종사하며 살던 곳이요, 예수님을 처음으로 만난 곳이다. 처음 본 예수님의 말씀에 두 말 없이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의 제자로 나섰던 곳이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실의에 잠긴 제자들에게 갈릴래아는 새롭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새롭게 삶의 의미와 방향을 찾는 곳이다. 부활한 예수님은 더 이상 십자가 위에 계시지 않는다. 우리 삶의 현장 깊숙한 곳으로 다가오셨다. 갈릴래아는 우리 삶의 현장이다. 유원지나 놀이가 있는 즐거운 곳이 아니라 생명력 넘치는 삶의 현장인 것이다. 엠마오라는 행사는 우리 신앙의 첫 시작점을 돌아보고 하느님께 향한 첫 마음을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참된 부활을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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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 악을 통해서도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섭리 -경규봉 신부 -
오순절에 성령을 가득히 받은 사도 베드로는 유다 백성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한다.
하느님께서는 영원에서부터 예수님을 통하여 인류를 구원하실 계획을 가지고 계셨다. 이러한 하느님의 계획을 인간이 바꿀 수는 없다. 악이 하느님의 계획을 방해하기 위하여 유대인들이 악인들의 손을 빌어 예수님을 죽였을지라도, 하느님께서는 그 모든 것까지도 당신 계획안에 넣으셔서 예수님을 되살리시고 인류를 구원하신다(에페 1,19-20).
예수님께서는 여러 가지 기적과 표징을 통하여 당신이 하느님께로부터 오신 분이심을 보여주셨다. 예수님께서는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셨으나 죄가 없으시므로(히브 4,15; 9,28 ;1베드 2,21)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것이다(1고린 15,4-6). 하느님께서 다윗에게 메시아를 약속하셨는데(2사무 7,11-16), 그가 곧 예수 그리스도이다.
예수님의 부활은 곧 다윗에게 하신 예언이 이루어진 것이며, 사도들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증인들이다(3,15; 5,32; 10,39-41; 13,30-31). 하느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당신 오른편에 앉히시어 당신의 전능과 권능에 참여하도록 하셨고, 예수님께서는 약속하신 성령(1,5; 요한 14,16; 16,13)을 아버지로부터 받아 우리에게 보내셨다고 사도 베드로는 선포한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전지전능하심과 사랑으로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 당신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이 여러 가지 악에 휩싸이고 때로는 당신을 거스를 것까지도 다 아시고 창조하셨다. 인간이 얼마나 약하고 이기적이며 탐욕이 많은지도 다 아시고 창조하셨다.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영원에서부터 인간의 죄악까지도 모두 감안하시고 인간을 구원하실 계획을 세우시고 창조하셨다. 이 세상 모든 것은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 이루어진다.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만드신 모든 것을 섭리를 가지고 지켜보시며 지배하신다. 하느님께서는 자비로서 모든 것을 하신다."(제1차 바티칸 공의회 DS. 3003)
하느님의 외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것도 하느님의 계획안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때문에 예수님께서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하시고자만 하시면 무엇이든 다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주소서.”(마태 26,39) 하고 기도하셨지만 하느님께서는 그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으시고,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라는 기도를 들어주시어 예수님으로 하여금 십자가에 못 박히시도록 하셨다.
이는 예수님의 고통과 죽음을 통해서 인류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기 위한 당신의 계획을 이루기 위함이었다. 나아가 예수님으로 하여금 고통과 죽음을 통해서 인류를 구원하실 뿐만 아니라 더욱 더 큰 영광을 누리도록 하시기 위함이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으로 하여금 십자가상의 죽음을 통하여 부활의 영광을 누리도록 하셨고, 당신 오른편에서 당신의 권능과 전능에 동참하도록 하신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고통과 죽음이라는 악을 통해서 죄의 용서와 부활의 영광이라는 더욱 더 큰 선을 이끌어내신 것이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그처럼 사랑의 하느님이시며, 고통과 죽음을 통해서 더 큰 기쁨과 영광을 주시고, 악을 통해서도 선을 이끌어내시는 하느님이시다.
때때로 우리는 고통과 괴로움에 시달리고 악이 기승을 부릴 때,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을 받곤 한다. 예수님께서도 고통 가운데에서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태 27,46) 하고 부르짖으셨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전능과 사랑을 믿고 하느님의 섭리를 아시기 때문에 “아버지, 제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루가 23,45) 하고 당신의 모든 것을 하느님 아버지께 맡기셨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머리카락 하나까지도 낱낱이 세어두셨고, 우리의 모든 것을 하나도 빠짐없이 간직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때때로 우리가 극심한 괴로움과 고통 속에서 예수님처럼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부르짖을지라도 예수님처럼 “아버지, 제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라고 기도하는 신앙인이 되자. 하느님 아버지를 믿고, 하느님의 섭리에 모든 것을 맡기는 신앙인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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