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차나부리로 관광객들이 모이는 이유는...유럽인들은 콰이강의 다리 때문이고 우리나라 사람들은 골프장을 찾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 콰이강의 다리로도 유명해 졌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미얀마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요충지라고도 할 수 있다.
1833년 라마 3세가 미얀마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해 세운 성벽 도시가 이곳 칸차나부리의 기원이라고 할 수 있는데 현재의 칸차나부리는 이 성곽도시에서 약 18Km떨어진 곳에 새롭게 건설된 시가지를 일컬는다.
칸차나부리는 끝없이 펼쳐진 넓은 평야지대 뿐만 아니라 울창한 산악지대가 있어 태국의 다른 어느 곳 보다도 골프장이 많은 지리적 요건을 갖고 있다.
방콕에서 이곳 리버콰이 까지 네 시간 넘게, 때로는 지루할 정도로 긴 시간을 오게 되는데 넓은 평야가 이어지다가 어는 순간 멀리 산이 보이기 시작하면 리버콰이가 가까워지고 있다는 증거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중요 산물로는...쌀농사가 제일 으뜸이고 그 외에 펄프 담배, 북부지역에서는 루비와 사파이어등의 생산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칸차나부리를 유명하게 하는 건 콰이강의 다리다.
2차 세계대전중 일본군이 태국과 미얀마간 철도 건설에 영국, 오스트리아등 연합군의 전쟁포로를 강제동원하면서 많은 사장자 를 낸 장소가 이곳 콰이강의 다리다.
1942년, 일본은 인도까지 침략할 작정으로 계획을 세우고 그 사전작업의 일환으로 전쟁물자 보급로를 확보하는데 총력을 기울렸다. 그리고 그 보급로의 핵심은 미얀마와 태국을 연결하는 철도건설에 있었다.
칸차나부리 지역은 험한 산악지대이고 특히나 콰이강의 다리가 있는 주변지역은 깍아지른 절벽들이 있어 철도건설은 절대 불가능 하였다. 허나 일본은 강제 동원한 포로들을 동원하여 공사를 강행하였는데 통상 5년 정도 걸려야 완성될 공사를 불과 1년 3개월 만에 끝냈다.
그 기간 동안 연합군의 포로 약 9만 4천여 명이 부상과 영양실조, 풍토병 때문에 목숨을 잃었다.
이처럼 엄청난 희생을 치루면서 만들어진 철도이기에 ‘죽음의 철도’라는 이름으로 불리우기도 한다.
이런 희생을 치러가면서 완공된 다리는 결국 연합군에 의해서 무너지고 만다.
현재의 다리는 당시 건설되었던 목조 다리가 아니라 전쟁 후 새롭게 복구한 다리다.
영화, 콰이강의 다리는 이러한 실제 상황에 픽션을 가미하여 만든 것이다.
줄거리를 대충 요약해 보면...
미국, 영국, 일본의 장교들가 대립되는, 즉 자기들의 입장에서 각자의 임무에 충실하는 군인 정신의 표본을 보여주는 전쟁영화로 꾸며졌다.
콰이강의 다리를 건설하려고 강제 동원된 포로들의 우두머리 격인 니콜슨 대령은 제네바협정을 내세워 정당한 처우개선을 요구하며 작업을 거부한다.
작업이 늦어지자 수용소장인 사이토 대령은 처우개선을 약속하고 니콜슨의 지휘권을 인정한다. 결국 니콜슨은 영국군의 우수성을 과시하고 병사들을 추슬러 공사에 적극협력하면서 다리를 완성시킨다.
드디어 철도가 완성되는 날 과거 이 수용소를 탈출한 미국 시미즈소령은 영국의 요청으로 다리 폭파를 위한 스위치를 누르려다 총에 맞아 폭파장치 위에 쓰러져 포로들의 피와 땀으로 만든 다리는 결국 파괴되어 버린다는 내용이다.
미, 영, 일본군의 장교들이 자신의 입장에서 최선을 다하는 군인정신의 표본을 보여주는 영화이다.
오래전 보았던 이 영화의 주제를 따라 콰이강을 찾는 이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유럽 관광객들은 메모리얼의 개념이 강해서 이곳을 찾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자신들의 조상이 전쟁포로로 이곳에 끌려와 노역을 하다가 사망한...그 흔적들이라도 직접 보고 싶어서, 혹은 이곳 어디엔가 살아 있지나 않을까? 하는 확인 할 수 없는 사실의 끄나풀이라고 잡을 수 있을까 하는 맘에서 이곳에 온다고 한다.
어디 유럽포로들 뿐이겠는가?
일본이 유럽 포로들을 끌어다 이 다리를 건설 할 때 제일 문제가 되었던 것이 언어 소통이었고 통역을 할 사람으로 영어를 할 줄 아는 조선 청년 300여명을 불려들어 이들에게 포로들의 감시원을 맡겼다. 당시에 영어와 일어에 능통한 한국인이라면 당연히 최고의 지식인이었음은 두말할 여지도 없을 것이다.
동원된 한국인 통역들은 일본군 장교의 지시에 따라 강제노역의 진두지휘를 맡았다
이후 일본이 패망한 뒤 연합군이 들어오자 한국인 퉁역들은 일본군으로 간주되 전범 재판을 받았다. 그리고 그들 대부분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죽음을 넘나드는 노역의 현장에 강제 동원 되었다가 연합군이 들어오자...이제는 그리던 고향에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에 설레던 한국인들.
그들이 기다리고 있던 것은 고향의 산천괴 가족들이 아니라 추악한 전쟁이라는 오명과 함께 떨어진 사형선고 였던 것이다.
요즘 이 콰이강의 다리 주변엔 많은 기념품 상가들과 레스토랑등이 있어 유명 광관명소가 되었음이 물론이다.
또한 죽음의 철도라 불리었던 콰이강의 철교는 이제는 태국인들의 일상생활에 없어서는 안 안 될 중요한 교통수단으로 이용되고 있다.
이곳 리버콰이 골프장에 머무는 사람들 거의 다가 콰이강의 다리를 한 번 이상씩은 다녀왔으리라 본다.
나도 몇 차례 다녀왔지만 이번에 갔을 때(2013, 11, 28)너무 놀라운 광경을 목격하였었다.
철교 저쪽 켠, 즉 강을 건너에(이곳엔 중국인들이 세운 기념비 같은 것도 있다) 욱일 승천기가 펄럭이는 것이 보였던 거다.
세상에 이럴 수가 있을까?
아무리 태국인 일본과 가까이 지내고 있다 하여도 이건 아니다 싶었고 절로 분통이 나왔지만 어찌 할 방법은 모르겠고.
유럽인 관광객들도 보았을 터인데...
보고 온 곧바로 인터넷에 올렸고...내 머릿속으로 파뜩 떠오르는 사람이...가수 김장훈 이었다.
뉴욬의 빌딩에 ‘독도는 우리 땅’이라고 쓴 커다란 휘장을 내 걸었던 그가...생각난 거다.
그리고 다시 열흘 쯤 뒤, 처음 이 골프장을 오게 된 남편의 친구 분 부부와 다시 마트와 백화점엘 가는 길에 들른 콰이강의 다리.
그때는 지난번처럼 그 욱일승천기가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당시 보았던 다른 관광객들도 나와 같은 마음이었을 께다.
첫댓글 아주 잘보았습니다
좋은 정보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정보 잘 보았습니다.
매우 훌룽한 글 솜씨 이십니다
잘 읽었습니다^^
글 잘읽었습니다. 2월초 운동하러 가는 기회에 콰이강을
가봐야겠다고 마음 먹었습니다. 정보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 합니다.
알고 가면 그 감동이 더 하지요.
또 그곳에 가시면 작은 기차가 있어요, 한 참을 가다가 다시 돌아오는 기차인데 한번 타보실 만 합니다.
일인, 이십바트구요, 대략 그곳에서 한 시간의 여유 시간을 주는데 기차를 타도 충분한 시간입니다.
좋은 시간되세요.
영화를 본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참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저도 다녀 왔는데 그때는 그 깃발이 안 보였었는데...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