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혁재 1일 ·
2023.12.19 #손혁재_정치이야기 #선거 #4대대선 #315부정선거 #이승만 #친일파
부정선거, 시민의 분노, 정권의 몰락, 스스로 문 닫은 국회
이승만 대통령은 권력의 확보 유지 확대를 위해 행정력을 총동원했습니다. 그 선두에 선 것은 경찰이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으로서는 자신을 위해서라면 불법과 폭력을 서슴지 않는 경찰을 소중히 여겼습니다. 독립운동가 고문으로 악명이 높았고, 평양경찰서장까지 한 노덕술이 반민특위에 잡혀가자 아예 반민특위를 무력화시켰습니다.
반민특위에 잡혀갈까 전전긍긍하던 노덕술은 다른 친일 경찰들과 모의해 반민특위 관계자들을 암살하려 했습니다. 김병로 대법원장, 권승렬 검찰총장, 신익희 국회의장까지 암살하려 했습니다. 그런데도 이승만 대통령은 “노덕술은 반공투사이니 석방하라”고 요구했습니다. 노덕술 석방을 거부하자 반민특위 비난 담화를 다섯 차례나 발표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 지시를 받은 친일 관료 장경근 내무차관이 무장경찰을 동원해 반민특위를 습격해 특경대를 해체시켰습니다. 이 대통령은 풀려난 노덕술을 영전시켰고, 한국전쟁 때 육군 범죄수사단장으로 대공업무를 담당했습니다. 수사단장 재직 중 뇌물을 받은 것이 드러나 군법회의에서 유죄를 받아 파면되지 않았다면 더 출세했을 지도 모릅니다.
33세에 치안국장이 된 김종원도 이승만 대통령이 중용했던 악질 경찰입니다. 김종원은 관동군 출신으로 10.19 여수순천 사건 때 잔혹한 학살을 저질렀습니다. 한국전쟁 때도 잔혹한 학살을 저질렀고, 전투에서 번번이 패배했습니다. 그러나 이 대통령은 그를 “애국 충정이 대단한 사람으로서 충무공 이순신과 견줄 만하다”며 오히려 승진시켰습니다.
거창양민학살사건을 은폐하려 국회조사단에게 총격을 했던 김종원은 군법회의에서 실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종찬 육군참모총장 등의 반대에도 김종원을 특별사면하고 경찰로 특채했습니다. 장면 부통령 저격사건을 배후조종했는데 흐지부지 넘어갔다가 4.19 혁명 후 옥살이를 했습니다. 병보석으로 풀려나 투병하다 세상을 떠났습니다.
선거 때마다 어려움을 겪고, 국회에 시달리던 이승만 대통령은 친일파를 자신에게 절대 충성할 지지집단으로 끌어들였습니다. “친일파에 대해 오해하면 안 된다 ... ”, “일제 때 아무리 악질적인 행위를 했어도 그 사람이 지금 나라를 위해서 좋은 일을 하면 그 사람은 훌륭한 사람”, 친일파라고 공격해선 안 된다”는 특별담화까지 발표했습니다.
제3대 총선을 계기로 친일파를 공개적으로 앞장세웠습니다. 많은 친일파가 공천을 받았고 정부 요직도 더 많이 차지했습니다. 자유당 강경파 대부분이 친일파였고, 제4대 총선의 불법·부정·관권·경찰선거를 지휘했던 이근직도 친일파였습니다. 제4대 대선 3.15부정선거를 기획·실행한 ‘6인 위원회’도 친일파들이 주도했습니다.
제3대 국회 개원 직후인 1958년 6월 26일 조병옥 민주당 의원 등이 불법 부정을 규탄하는 대통령경고결의안이 발의했지만 헛수고였습니다. 자유당은 제4대 대선에서 더 큰 불법과 부정을 저지를 계획을 세웠습니다. 현직 국무위원들로 구성된 6인 위윈회는 공무원 동원에 그치지 않고 4할 사전투표, 3인조 투표 등도 기획했습니다.
3.15 대통령선거는 사상 최악의 부정선거였습니다. 조병옥 민주당 후보가 갑자기 병사하는 바람에 부정선거는 부통령선거에 집중됐습니다. 경찰 5만 명을 동원해 선거관리를 편파적으로 했습니다. 폭력, 야당 탄압, 사전투표, 개표부정, 야당참관인 쫓아내기 등 온갖 불법 부정이 저질러졌고 자유당 이승만·이기붕 후보가 압도적 득표로 당선됐습니다.
시민 학생은 분노했습니다. 정부의 무능과 3.15 부정선거에 대한 시민의 분노는 4.19 혁명으로 이어졌고, 마침내 이승만 정권은 무너졌습니다. 제4대 국회 의석 분포도 바뀌어 자유당은 48석으로 줄었고 민주당은 68석으로 늘었습니다. 제4대 국회는 헌법절차에 따라 개헌과 제2공화국 수립과정을 마무리하고 2년 2개월 만에 스스로 문을 닫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