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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녘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북한 생활문화사 1945-2019
정창현 평화경제연구소 소장
1. 남과 북의 다름과 ‘있는 그대로의 북한’ 이해
남과 북은 ‘다름을 통해 소통된다
분단 70년이 넘는 세월, 1945년 처음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위해 38선이 그어질 때만해도 분단이 이렇게 오래 갈 것이라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분단 후 남과 북은 다른 체제와 이념, 다른 환경 속에서 살아왔다. 여전히 언어와 정서라는 측면에서 같음을 공유하고 있지만 70년을 넘게 떨어져 살면서 가치관이나 생활방식 면에서는 많은 다름이 나타났다.
해방 후 미군이 진주한 남쪽에는 미국식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수용돼 개인과 시장경제가 최상의 가치로 자리 잡았다. 반면 소련군이 진주한 북쪽에는 인민 민주주의와 사회주의가 선택되어 집단주의와 계획경제가 중요 가치로 자리 잡았다. 세월이 흘러 서로의 체제가 안착되고, 일제강점기와 해방공간의 경험을 공유한 세대가 사라지면서 이제는 만나도 낯설기만 하다. 더욱이 전쟁과 냉전의 시기를 거치면서 장기간에 걸쳐 적대의식이 뿌리를 내렸고, 남과 북은 서로를 비난하는데 익숙해졌다.
자본주의 생활방식에 익숙한 남쪽 사람들은 북녘을 방문해도 사회주의 삶에 익숙한 그들을 쉽게 받아들이기 어렵다. 남녘을 방문한 북쪽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남과 북의 생활방식이 다르다고 해서 상대방이 잘못됐다는 틀림의 시각으로 서로를 보면 대화와 교류가 어렵다. 서로간의 차이와 다름을 인정하고 서로의 만남과 교류, 토론을 통해 접점을 마련해 나가려는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물론 북한의 정치체제는 '다름'의 차원을 넘어 논란과 불가의 대상이지만, 중국의 정치체제와 비교해 보면 또 다른 차원의 ‘다름’이다.
그런 점에서 분단 55년에 열린 2000년 남북정상회담은 남과 북의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공존․공생의 새로운 시대를 여는 계기였다. 남북장관급회담이 정례화 되고, 개성공단 조성 등 다양한 분야의 협력이 활성화 됐다. 특히 1998년 금강산관광 뱃길이 열린 지 5년만인 2003년 육로관광이 시작돼 매년 20~30만명의 관광객이 금강산을 방문했고, 그해 서울과 평양을 잇는 순수관광 목적의 하늘길도 처음으로 열렸다. 그리고 2005년 1만여 명의 남쪽 사람들이 〈아리랑〉공연을 보기 위해 평양을 방문하기도 했다. 2007년 12월에는 개성 육로관광이 열려 2008년 11월 중단될 때까지 11만명이 다녀왔다. 이러한 만남을 통해 남과 북은 반세기 동안의 단절을 뛰어넘어 서로에게 다가갔다.
안타깝게도 이명박, 박근혜 정부 시절 남북관계는 여러 요인으로 급속히 냉각돼 제대로 된 남북 당국회담도 열리지 않았고, 개성공단․금강산관광도 중단돼 버렸다. 그리고 젊은 세대들에게 북녘은 다시 낯선 타인이 되어가고 있다. 시도 때도 없이 북한 붕괴론, 체제 급변론이 등장하고, 안보논리가 득세하면서 통일로 함께 가는 할 동반자 북한에 대한 객관적 인식은 사라진 채 걸핏하면 종북론이라는 시대착오적인 색깔론이 횡행했다. 물론 북한의 핵개발과 도발이 주요한 요인으로 작용했지만 우리 스스로도 부족한 점은 없었는지 성찰해 보아야 한다.
2018년 4월 27일과 5월 26일, 두 차례 남북정상회담이 전격적으로 판문점에서 열렸다. 4.27 판문점선언은 ‘평화의 새로운 시작(출발)’을 표방했지만 내용적으로 보면 ‘종전선언’인 동시에 남북연합의 문을 여는 ‘통일선언’이다. 이와함께 역사적인 첫 북미정상회담이 성공적으로 끝나면 70년 이상 우리를 짓누르고 있던 ‘냉전’이 완전히 끝나고 항구적 ‘평화 정착’의 길로 들어서게 될 것이다.
이제 서로에게 자신의 체제와 이념을 강요하고, 싸움을 통해 상대방을 흡수할 수 있는 시대는 지나갔다. 치열한 ‘국가경쟁’,경제전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남과 북이 서로 협력의 길, 함께 번영의 길을 모색해야할 시점이다.
우리 사회에는 북녘을 보는 다양한 시각이 존재한다. 당연한 현상이다. 문제는 북녘을 보는 시선이 너무 단편적이고 편견에 사로잡혀 있다는 점이다. 나무는 보데 숲을 보지 못하는 한계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70년 넘게 떨어져 살아온 북녘사회와 북녘 사람들을 이해 또는 파악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들의 다름을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가 다른 나라에 가게 되면 그 나라의 다른 사회구조와 다른 삶의 방식을 수용하거나 이해하려고 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남과 북은 삶의 정서가 같지만 사회의 운영체계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따라서 단편적인 현상으로 북녘 사람들을 평가하거나 적대의식으로 북녘사회를 바라본다면 북녘의 진면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게 된다.
진면목(眞面目)은 송나라시대의 시인 소동파가 천하절경으로 이름난 중국 장시(江西)성의 루산(廬山)을 둘러본 후 남긴 칠언절구(七言絶句)에서 유래한 말이다. 橫看成嶺側成峰 횡간성령측성봉 /遠近高低各不同 원근고저각부동/ 不識廬山眞面目 불식여산진면목/ 只緣身在此山中 지연신재차산중.이리 보면 고개요 저리 보면 봉우리라/ 원근고저 보이는 건 모두가 다르구나/ 여산의 참모습은 알기가 어려워라/ 내 몸이 이 산중에 들어 있기 때문이리.
조선시대 추사 김정희는 바라보는 위치와 시각에 따라 바뀌는 산의 모습을 보고 지식과 경험에 의존하는 인간의 어떠한 인식도 결코 사물의 실상과 본질을 올바르게 파악할 수 없다는 진리를 이 시가 말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실상과 본질을 깨닫기 위해서는 산처럼 첩첩한 자신의 주관을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북녘사회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전쟁과 냉전, 적대관계에서 형성된 선입견과 편견을 경계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남과 북이 만나야 한다. 남과 북의 사람들이 오가며 막힌 소통의 장을 다시 열어야 한다. 우공이산(愚公移山:우공이 산을 옮긴다는 뜻으로, 어떤 일이든 끊임없이 노력하면 반드시 이루어짐을 이르는 말)이라고 했다. 한 번의 만남으로 70년의 다른 삶을 극복할 수 없겠지만, 자주 만나다보면 소통이 이뤄지고 다름을 넘어 같음을 넓혀나갈 수 있을 것이다. 만남이 통일의 지름길이다. 다행스럽게도 판문점선언에서는 “남과 북은 민족적 화해와 단합의 분위기를 고조시켜 나가기 위하여 각계각층의 다방면적인 협력과 교류 왕래와 접촉을 활성화하기로 하였다”라고 합의했다.
북녘의 변화를 제대로 이해하고, 그 변화를 촉진하려면 자주 오고가야 한다. 그러나 많이 오고간다고 해서 북녘 사회와 사람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전에 준비된 만남이 필요하다. 시대적 흐름과 북한의 변화를 정확히 읽을 수 있는 통일교육이 필요한 이유다. 2018년 4월 27일 생중계된 4월 판문점회담은 그 자체로 생생한 통일교육의 현장이었고, ‘다름’을 부지불식간에 느끼는 체험현장이었다.
‘있는 그대로의 북한’ 이해는 가능한 것인가?
북녘사회도 지난 15년 동안에 많이 달라졌다. 지식경제시대에 맞는 경제건설을 표방하며 세계적 추세와 실리 추구가 강조되고 있고, 가는 길 험난해도 웃으며 가자는 구호가 자기 땅에 발을 붙이고 눈은 세계를 보라는 구호로 바뀐 지 오래다. 농민시장이 종합시장으로 바뀌고, 휴대폰과 컴퓨터가 급속히 보급되면서 북녘 주민들의 생활이 근본적으로 바뀌고 있다. 북녘도 바야흐로 스스로 장기적 계획을 세워 추진하는 개발과 개방의 시대에 접어들고 있는 것이다.
변화하는 북한사회를 편견 없이 ‘있는 그대로 보자’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있는 그대로의 북한을 보자’는 이야기는 1980년대부터 간간히 나왔지만 최근 이 문장을 가장 자주 쓰는 인물은 역설적이게도 1990년대 1차 북핵위기 때 미국의 국방장관으로 재직하며 북폭을 주장했던 월리엄 페리(William J. Perry)이다.
월리엄 페리는 미국 카터 정부 때 국방부 차관을 했고, 클린턴 1기 정부 때 국방부 부장관으로 시작해서 국방부 장관을 역임했다. 클린턴 2기 정부에서는 대북정책조정관을 맡아서, 북핵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페리 프로세스’를 제안했고, 직접 이끌었다. 그는 ‘페리 프로세스’를 만들면서 2가지 전제에 기초했다. 첫째는 한미연합군은 매우 강력하며, 따라서 대북억지력은 여전히 강하다. 그러나 이 억지력은 북한이 핵과 미사일을 개발할 경우 흔들릴 수 있으며, 따라서 이를 방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둘째는 북한정권이 붕괴할 것이라고 전제하면 안 되고, 우리는 북한 정부를 있는 그대로 두고 다뤄야 한며, 우리가 그렇게 되기를 원하는, 희망 섞인 눈으로 봐서는 안 된다. 이러한 전제 위에서 그는 북한이 핵과 장거리 미사일 문제를 해결하면 미국은 북한과 정상적인 관계로 나가야 한다고 권고했다. 최근에도 그는 다시 충고했다.
“지난 15년여 간, 6자회담이라는 것을 진행했으나 그 사이 달라진 건 북한이 핵무기 보유 수가 0에서 10으로 늘어났다는 것뿐이다. 이 결과를 놓고 볼 때 6자회담이 성공적이라고 보기 어렵다. 그렇다면 왜 실패했는가. 북한을 있는 그대로 다루지 않았기 때문이다. 17년 전 북한과의 협상 테이블에서 나는 북한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대하려고 노력했다. 북한의 목표는 무엇이고, 북한이 성취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직시하고자 했다는 뜻이다. 외교관의 가장 큰 자산은 입이 아니라 귀다. 상대방이 원하는 바를 들어야 한다는 의미다. 나는 많은 시간을 그들이 하는 말을 듣는데 할애했다.”
그러나 페리와 같은 대북인식이나 대응방식은 미국 내에서 소수이고, 한국 내에서도 찾아보기 쉽지 않다. 그러다보니 지난해 북한의 경제성장률이 3.9%(한국은행 발표)였다는 것에 대해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반응을 보인다. 그러면서 미국은 ‘중국역할론’을 내세우고, 중국에 책임을 돌린다. 북한이 중국에 경제적으로 ‘종속 내지 의존적 나라’라는 정도의 인식수준이다.
한국 내에서도 북한이 지난해 경제성장을 한 것은 전년도에 마이너스 성장을 해서 상대적으로 플러스 성장을 한 일시적인 현상이라거나 북한 내부의 ‘시장화’가 기여한 측면이 있다는 주장이 대세를 이룬다. 북한 내부의 ‘시장화’가 경제성장에 기여했다면 우리의 ‘전략적 선택’은 북한의 시장화를 더욱 촉진하는 방향으로 가야하지만 현실은 개성공단을 폐쇄하고 북한의 돈줄을 막는(북한의 시장화에 부정적인) 방향으로 나타났다.
여전히 우리 사회 내부에는 북한에 대한 편견과 무지[일부 학자는 북맹(北盲)이라고 표현]를 ‘예측불가’라고 포장한다. 예를 들어 김정은 위원장과 북한 지도부를 보고 ‘예측불가’와 ‘통제불능’이라고 평가하며, 김정은체제의 북한이 불안정하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다. 과연 그럴까?
북한은 2013년 노동당 전원회의를 열고 ‘경제 건설과 핵무력 건설 병행노선’을 채택했다. 이 결정사항을 비밀로 한 것도 아니고 대외적으로 공공연히 선포했다. 그리고 이 노선에 따라 한 편으로는 경제에 재정투입을 늘이고, 다른 한편으로 핵과 미사일 능력을 빠르게 높여나갔다. 북한은 2018년 4월 노동당 전원회의를 열고 병진노선에서 ‘경제건설 총력집중노선’으로 전환했다.
이 노선의 실패와 성공 여부를 떠나 북한은 회의를 통해 이렇게 결정했고, 그 결정대로 가고 있을 뿐이다. 예측 불가가 아니라 페리의 말처럼 ‘우리가 그렇게 되기를 원하는, 희망 섞인 눈’으로 북한을 보기 때문에 그렇게 단정하는 것은 아닌지 한번쯤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있는 그대로의 북한’을 보는데 또 다른 어려움은 북한사회에 존재하는 다양한 현상이나 모습을 어떤 비중으로 다뤄야 하는지를 판단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2. 남과 북이 가까워지고 있다 – 북한의 집단주의 생활방식과 변화
남과 북 다름의 핵심은 집단주의
평양의 아이들 모습에서 남쪽과의 다름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정서적으로도 남쪽의 아이들과 비슷하다. 다만 사교육 의존도가 심각한 남쪽과 달리 북쪽에서는 국가가 학생들의 방과 후 활동을 전적으로 책임진다. 학생소년궁전이나 학생소년회관을 통한 과외활동은 국가가 인민의 생활을 책임진다는 북의 집단주의 원칙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사실 평양을 방문했을 때 가장 낯선 모습이 바로 북녘의 집단주의 생활방식이다. 개인주의 생활방식에 익숙한 남쪽 사람에게 북녘의 집단주의는 참 다가서기 어려운 다름이다. 특히 국가가 인민의 생활을 책임지는(현재는 개인의 자율성을 높여가고 있지만) 집단주의 사회 운영방식에 낯선 것 같다.
1945년 해방 후 소련군의 진주와 함께 소련의 사회주의이론과 생활문화가 이북에 들어왔다. 학생들은 일어 대신 러시아를 배우기 시작했다. 1946년 3월 전격적으로 ‘토지개혁’이 단행되고, 8시간 노동제에 기초한 노동법령 제정, 남녀평등법 제정, 주요 산업의 국유화 조치 등이 이어졌다. 지주와 농민의 삶의 방식을 송두리째 바꾼 토지개혁 실시 이후의 심정에 대해 소설가 이기영은 「개벽」이란 소설에서 이렇게 상반되게 표현했다.
“토지를 농민들에게 값없이 나눠준다니 세상에 이런 일도 있을까? 실로 이것은 고금에 처음 듣는 말이다. 하건만 사실로 그렇다는 데야 어찌하랴! 그것도 내년이나 그 후년 일이 아니라 바로 지금 당장 실행을 하여서 올해 농사부터 짓도록 한다니 더욱 희한한 노릇이다. 이게 과연 정말일까. 참으로 그들은 황홀한 심정을 걷잡을 수 없었다.”
“이놈들 어디 보자! 이렇게 악을 쓰는 지주도 있었지만 그것은 이불을 쓰고 활갯짓하는 격이었습니다. 그들은 홧김에 술을 먹거나 그렇지 않으면 머리를 싸매고 누웠었다. 기껏해야 땅바닥을 치며 애고지고 저 혼자 비통할 뿐이었다. ……세상이 아무리 변한다 하더라도 땅덩이가 떠나갈 줄은 몰랐다. 천지개벽을 하기 전에야 그런 일이 없을 줄 알았었는데, 토지개혁이란, 정말 눈에 안 보이는 개벽을 해서 하룻밤 사이에 이 세상을 뒤집어엎었다.”
또한 1946년부터 북한은 “인민문화향상은 문맹퇴치로 부터!”라는 구호와 내걸고 강력한 ‘문맹퇴치운동’을 전개해 ‘문맹(文盲)’이 없는 사회로 변모했다.
1950년부터 3년간 전개된 전쟁 동안 북녘 전역은 폐허로 변했다. ‘구석기시대’로 돌아갔다는 평가가 나올 정도였다. 북한은 농업협동화를 통해 나눠줬던 토지를 ‘협동조합’(후에 협동농장)에 귀속시켰다. 전 사회적으로 집단주의 생활방식이 정착되는 결정적 계기였다.
1950년대에 북녘에 사회주의제도가 정착되면서 이후 북녁 주민의 생활에 큰 변화가 생겼다. 사회주의와 집단주의에 맞는 사상과 문화, 생활방식이 주민들 사이에 보급되고 식량배급제가 정착된다. 정치, 경제, 사회, 교육 등 모든 분야의 운영구조도 집단주의 방식으로 바뀌었다. 이에 따라 북녘에는 주민의 일상화된 조직생활, 국가가 주민의 의식주생활을 보장하는 체계가 자연스럽게 들어섰다.
주민들의 생활과 사고도 변화했다. 유치원 다니는 어린 시절부터 일상생활에서 개인주의, 이기주의를 버리고 집단주의 원칙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을 도덕적 덕목으로 가르쳤다. 북은 사회 전체를 하나의 가정으로 보고 수령-당-인민의 관계를 아버지-어머니-자녀의 관계와 같다고 하는 사회주의 대가정론을 강조했다. 이를 통해 주민들 사이에서는 하나는 전체를 위하여, 전체는 하나를 위하여란 구호 아래 먼저 국가와 집단의 이익을 우선하는 집단의식이 자리 잡았다.
북한의 곳곳에서 “하나는 전체를 위하여, 전체는 하나를 위하여!”라는 구호를 볼 수 있다. 이 구호는 북한에서 1950년대 말 생산증산을 위한 대중운동인 ‘천리마작업반운동’을 전개하면서 처음 나온 뒤 현재까지도 중요한 가치로 통용되고 있고, 헌법에도 명문화 되어 있다. 북한은 모든 주민들이 조직과 집단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복종해야하며 개개인보다 사회와 집단이 더 우선해야 한다는 생활이념을 강조한다.
북한에서 사람은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사회와 집단의 한 성원으로서 살아간다고 보고 사회와 집단을 위해 얼마나 헌신하는가 하는 것이 가치 척도이자 활동 원칙으로 되어 있다. 개인주의는 철저히 배척되고 집단주의적 인생관만이 공산주의자들이 지녀야 할 참다운 신조라고 역설한다. 또한 북한은 집단주의적 인생관을 이른바 ‘사회정치적 생명체론’과 연결시키면서 개인의 육체적 생명보다 집단의 사회정치적 생명이 더 귀중하다고 주민들을 교양하고 있다.
시간이 흐르고, 세대가 변화하며 북한의 모든 정치·사회제도는 집단주의에 기초해 운영되는 방식으로 변모했고, 개인 및 사회생활의 구석구석에 집단주의방식이 적용되고 있다. 북한주민들은 하루 일과 후 생활총화를 한다. 이 생활총화가 집단주의 생활방식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협동농장을 통한 농업의 집단화, 노력경쟁운동, 군중집회 등도 집단주의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현상들이다. 학습활동에서도 ‘집체학습’과 ‘집체토의’ 방식이 이루어지며, 전체가 참가하는 ‘집체적 지도’를 강조한다.
집단주의는 일상적인 단체․조직생활을 통해 자연스럽게 몸에 배게 된다. 북녘 주민들은 어린아이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조직생활이라고 하면 싫어도 늘 충실하게 해야 하는 것으로 인식하며 이 대열에서 빠진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로 여긴다.
평양을 방문해 식당이나 호텔에 근무하는 여성봉사원들과 공식적으로 찍자고 하면 혼자 찍는 것에 대해 대단히 부담스러워 한다. 하나보다는 전체를 우선하는 북녘의 생활문화 때문이다. 지난 70년간 떨어져 자본주의 생활방식에 익숙한 남쪽 사람들은 북을 방문해도 이를 쉽게 받아들이기 어렵지만, 북녘 어디서나 집단주의 생활방식을 쉽게 목격할 수 있다.
북한은 ‘집단주의’를 ‘전체주의’라고 규정하는 것에 대해 비판적이다. 북한의 ‘집단주의’는 개인의 이익을 존중하면서 집단 공동의 이익을 귀중히 여기는 사상으로 ‘전체주의’ 이념과는 다른 개념이라고 주장했다. 집단주의가 반대하는 것은 개인의 이익 자체가 아니라 집단의 이익보다 개인의 이익을 더 기본으로 내세우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면서 전체주의는 “개인은 전체에 복종해야 한다는 미명 아래 통치계급의 탐욕적인 이익을 위하여 근로인민대중의 이익을 희생시키는 반동적 이념”이라고 비판한다.
최근 북한은 ‘유연한 집단주의 체계’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북한 스스로 “지향점은 현실 발전에 보다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는 집단주의 체계의 확립”이라고 밝힌 것이다.
‘고난의 행군’과 실리 사회주의의 등장
1990년대 중반 북한은 사회주의권이 붕괴된 데 이어 연이어 자연재해가 발생하면서 최악의 경제난인 ‘고한의 행군’시기를 겪게 된다. 내부적으로는 이미 그 이전부터 노동과 산업생산성이 급격히 떨어지고 있었다.
무너진 사회체계를 복원하고, 세계 흐름에 적응하려면 변화가 필요했다. 북한은 ‘강성대국 건설’이라는 거창한 구호를 내걸고, 2002년 7월 1일을 기해 단행된 사회주의경제관리 개선 조치(7․1조치)를 단행했다. 이 조치에 대해 북쪽 사람들은 해방직후 단행된 토지개혁에 비견될 수 있을 정도로 획기적인 것이라고 평가했다. 어느 날 갑자기 쌀값이 550배, 임금이 20배 정도 올랐으니 북녘 주민이 받았을 충격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2002년 8월 평양에서 만난 사람들은 이제 건달꾼은 허용되지 않는다라는 말을 공공연히 했다. 일하지 않아도 놀고먹고 살아갈 수 있는 사회가 사회주의가 아니라고 말했다. 흔히 공산주의는 능력에 따라 일하고 수용에 따라 분배를 받는다고 하지만 그러한 사회는 이제까지 있어본 적도 없고, 가까운 앞날에 실현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은 듯 했다. 사실 1990년대 들어와 북의 신문들에서는 이미 사회주의 완전승리, 공산주의란 단어가 점차 사라지기 시작했다.
대신 등장한 말이 실리 사회주의이다. 실리보장이 사회주의경제관리의 기본원칙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정책 변화는 1980~90년대 북녘이 당면했던 국내외 위기상황과 맞물려 있었다. 북한은 경제재건에 나서며 경제운영 방식에 대대적인 수술을 단행했다. 특히 분배방식을 획기적으로 변화시키기 시작했다.
물질적 평가에 정치적 평가를 잘 결합시켜 노동의 양과 질이 높은 사람은 물질적․정치적으로 응당한 평가를 받게 하며 분배에서 평균주의를 철저히 배제해야 합니다. 현실의 변화발전에 따라 노동에 대한 새로운 평가 및 분배방법을 연구․도입하여 사회주의 노동보수제를 더욱 개선하고 완성시켜 나가야 합니다.… 경제생활에서 공짜가 많은데 이런 것들을 정리해야 하고 무상공급, 국가보상, 기타 혜택들도 검토해서 없앨 것은 없애야 합니다. 앞으로 식량과 소비품 문제가 풀리면 근로자들은 자기 수입으로 식량도 제값으로 사먹고 살림집도 사서 쓰거나 온전한 사용료를 물고 쓰도록 해야 하며, 이를 위해 쌀값을 바로 정하고 이를 기준으로 다른 상품가격과 생활비를 전반적으로 고쳐 정해야 합니다. 무료교육, 무상치료, 사회보험 등 사회주의 우월성을 집중 보여주는 것들을 제외한 일부 불합리한 사회적 시책들은 현실적 조건에 맞게 정리해야 합니다.
<표1> 사회주의경제관리개선조치의 영향
2001년 10월 3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현실 발전의 요구에 맞게 사회주의경제관리체계를 개선할 데 대하여〉란 제목의 논문은 7월 1일에 단행된 북의 경제개선 조치의 방향을 압축적으로 잘 보여준다. 일한 것만큼, 번 것만큼 분배는 분배원칙을 과거와 달리 원칙대로 적용하겠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계획목표를 초과 달성해 더 많은 수익을 거둔 기업소와 협동농장들은 그에 상응한 분배를 받기 시작했다.
분배정책의 변화와 함께 기업소와 공장에 완전한 독립채산제를 도입하고 기업경영의 자율권을 확대했다. 독립채산제의 도입은 채산성이 낮은 기업의 계획을 폐지하는 등 각 공장의 경영관리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며 각 기업이 실적에 따라 이익을 가질 수 있게 하는 조치로 볼 수 있다. 또한 농업분야에서 토지사용료가 생기고 분조단위의 분배가 이뤄지게 됐다.
북의 주민들은 과거 국가의 배급과 국영상점망을 통해 물품을 구입했다. 그러나 1990년대에 북이 경제난에 처하면서 국영상점망을 통해 물자가 제대로 공급되지 못했고, 부족한 물자를 구입하기 위해 주민들은 평양의 각 구역(남쪽의 구에 해당)이나 군에 있는 농민시장에서 필요한 물품을 구입했다. 문제는 국정가격과 농민시장 가격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는 점이다. 7․1조치직후 북에서 나온 해설문건에서는 이에 대해 지금 국가가격이 농민시장가격보다 눅은(값이 싼)데로부터 장사행위가 성행하여 국가에는 상품이 부족하나 개인들에게는 상품이 쌓여 있는 현상이 초래되고 있다라며 이렇게 지적했다.
농민시장에 가보면 쌀을 비롯한 식료품으로부터 공업품에 이르기까지 생활에 필요한 거의 모든 상품들이 다 있다. 심지어 차 부속품과 국가적인 주요원자재들까지도 많이 거래되고 있다. 그 대부분이 눅은 가격공간을 리용하여 국가물자들을 뭉태기로 빼내여 비싸게 팔고 있는 것들이다. 그래서 생산은 국가가 하는데 상품이나 돈은 거의 다 개인들의 손에 들어간다. 솔직히 말하여 지금 국가에는 돈이 없지만 개인들에게는 국가의 2년분 예산액이 넘는 돈이 깔려 있다.
원칙적으로 농민시장에서 쌀과 공산품들이 거래되는 것은 2003년 3월 국가가 시장을 공식화하기 전까지는 불법이었다. 북 당국은 쌀을 농민으로부터 82전에 수매해 8전에 주민들에게 배급함으로써 엄청난 재정적자를 감수했는데, 일부 간부층, 노동자, 농민들 사이에서 공산품이나 식량 등을 농민시장에 비싸게 팔아 불법적으로 부를 축적하는 층이 존재했던 것이다.
이를 시정하기 위해 북은 경제사업에서 실리를 보장하고 생산자들을 우대하는 원칙에서 가격을 전반적으로 다시 제정했고, 2003년에는 주민들이 이용하는 농민시장을 종합시장으로 합법화했다.
그러나 예상보다 식량증산이 이뤄지지 않았고, 국제사회의 대북제재로 해외자본 유치가 부진하면서 7․1조치는 안착되지 못했다. 10년이 지난 2012년 김정은시대를 맞아 북은 이같은 조치를 더욱 강력하게, 확대해 시행하기 시작했다. 김정은 위원장은 새로운 경제관리방식을 ‘사회주의기업 책임관리제’라고 명명했다.
2000년대 중반부터 북한은 장기적인 계획을 세우고 평양부터 재개발을 시작했다. 평양 재건설사업은 2012년 김정은시대에 들어와 그 성과가 눈에 띄게 나타났다. 평양 중심지역인 만수대지구의 대규모 아파트를 비롯해 만경대구역의 광복지구상업중심(슈퍼마켓), 대성구역 안학궁터 주변의 평양민속공원 완공 등 지역마다 맞춤형 개발이 추진됐다.
이를 통해 평양의 각 구역마다 현대적인 식당과 슈퍼마켓 및 전문상점이 들어서기 시작했고, 평양호텔․창광산호텔․류경호텔, 개선청년공원 유희장, 만경대유희장 등이 리모델링 됐다. 특히 2012년 창전거리에는 수십 동의 고층 아파트들이 들어서 평양의 풍경이 완전히 변화됐고, 이러한 흐름은 미래과학자거리, 여명거리 조성으로 확대되었다.
컴맹, 흡연, 음치는 21세기 3대 바보
광복 직후 문맹퇴치 운동을 벌일 때처럼 정보기술과 콤퓨터(컴퓨터)를 열심히 배우자. 오늘날 정보과학의 시대, 21세기에는 콤퓨터를 모르는 사람이 콤맹이라 불리며 문맹자로 취급당하고 있다.
2005년부터 북은 콤맹이란 콤퓨터를 다룰 줄 모르는 것 또는 그런 사람을 우스개로 이르는 말이라며 컴맹탈출과 컴퓨터 보급에 적극 나서기 시작했다. 북한은 컴맹을 흡연, 음치와 함께 21세기 3대 바보라고 규정했다.
이에 따라 북은 정보기술(IT)을 강조하면서 컴퓨터 프로그램 경연대회, 전자도서관 건립, 컴퓨터 활용 교육 등에 적극 나서고 있다. 북녘의 인터넷은 아직 외부세계와 연결돼 있지 않다. 그렇다고 북의 청소년층 사이에 게임과 채팅 문화가 없다고 판단하면 오산이다. 최근에는 인트라넷을 이용한 동영상 강의나 화상채팅도 이뤄지고 있고 심지어는 해커까지 등장해 네티즌을 긴장케 하고 있다.
북의 인터넷망은 해외와 연결이 되지 않은 채 내부 인트라넷 형태로 운영된다. 남산에는 영어교육, 원격주문, 음악감상, 대화실, 거래정보 등의 아이콘이 있다. 북녘의 네티즌이 애용하는 포털사이트는 내나라(www.naenara.co.kp)와 광명이다. 이 사이트는 최근소식, 정보기술, 전자상점, 전자게시판, 전자우편, 원격교육, 실시간대화, 음악감상 등을 비롯해 프로그람봉사, 비루스왁찐, 신문주제기사, 민속장기 등을 서비스한다. 인기 서브사이트들인 김일성종합대학, 조선상업회의소, 평양광명정보기술사 등의 홈페이지가 링크돼 있다. 《로동신문》, 《민주조선》 등 주요 신문기사들도 검색과 열람이 가능하다. 북의 네티즌들은 이 사이트에 접속해서 이메일을 주고받거나 채팅을 한다.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하는 북녘의 네티즌들도 점차 컴퓨터 망에 접속하는 것을 하나의 일과처럼 여기게 됐다. 특히 북녘의 젊은 네티즌들은 대화실을 이용해 프로그램의 공동개발을 진행하는 등 사이버 공간이 제공한 만남을 활용하기 시작했다.
북의 네티즌들은 초기에 주로 대학, 기관 등의 컴퓨터소조실(전산실)을 이용했다. 청진 등 주요 도시에도 정보통신기술판매소(남쪽의 PC방과 유사)가 생겨 청소년들이 게임을 하거나 전자우편, 채팅을 할 수 있다. 가정에 컴퓨터가 있고, 첨단을 걷는 네티즌은 화상채팅까지 하고 있다. 1대1 채팅, 번개모임을 즐기는 네티즌도 늘고 있다. 스타크래프트 게임을 즐기는 게임매니아도 생겨나고 있다고 한다.
아직까지 북녘의 컴퓨터 이용과 네티즌 문화는 교육과 학습, 제한적인 정보교류에 치우쳐 있지만 갈수록 남쪽과 비슷해지고 있다. 이러한 변화의 바람은 개인 컴퓨터의 보급 학대와 전국적으로 이용 가능한 인터넷망 개설로 한층 가속화될 것으로 보인다. 지난 몇 년간 북의 젊은층과 기관에 정보화의 거세게 바람이 불면서 생활에 변화를 주었고, 앞으로 더 큰 변화를 몰고 올 것은 분명한 것 같다.
휴대전화 보급 – 생활문화를 바꾸다
컴퓨터와 함께 북녘 주민들의 일상생활에 큰 변화를 가져온 것이 휴대전화(손전화)의 보급이다. 2010년 북의 휴대전화 가입자는 2009년에 비해 4배 이상 늘어 30만명을 넘어섰다. 휴대전화 서비스 지역도 평양을 포함한 12개 주요 도시와 42개 소도시, 22곳의 고속도로 및 철도 구간 등으로 확대됐다.
북과 합작회사 고려링크를 세워 휴대전화 서비스를 하는 이집트 통신회사 오라스콤이 지난 2008년 북에서 3G 휴대전화 서비스를 시작할 당시만 해도 전문가들은 휴대전화 서비스가 북녘의 엘리트층과 수도 평양에 제한될 것으로 전망했다. 그러나 이 전망은 완전히 빗나갔다. 2013년 북녘의 휴대폰 가입자가 250만명으로 증가했기 때문이다. 2018년 현재는 500만대 전후로 추정된다.
1990년대 후반 북녘의 전화 보급 대수가 100만대 정도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가히 통신혁명이라고 할만하다. 북은 낙후된 유선전화 보급보다는 3세대 이동통신(3G)으로 바로 넘어가는 방식을 선택한 셈이다.
북의 휴대전화 가입자들은 음성통화, 문자메시지, 웹 브라우징을 이용할 수 있다. 휴대전화로 유희(게임)를 할 수 있고 다매체(동영상)촬영과 편집도 가능하다. 특히 젊은층 사이에서는 휴대전화가 필수품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휴대전화 외에도 컴퓨터(노트북), 태플릿PC, 디지털카메라, 소형단말기(PDA), DVD플레이어, MP3 등의 전자기기 보급이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이집트 오라스콤과 합작으로 세운 고려링크에서 판매하는 휴대전화 단말기는 가입비와 함께 초기에는 기종에 따라 대당 250~400달러에 팔렸고, 최근에는 100~200달러에 팔리고 있다.
스마트폰인 아리랑(400달러), 평양터치(700달러)에 이어 최근에 나온 ‘진달래’는 더 고가에 판매되고 있다. 사용요금은 전신전화국이나 우편국에 납부하는데, 선불로 최소한 북녘 돈 5,000원 이상을 납입한 뒤 필요할 때마다 5유로, 10유로씩 충전해서 쓴다.
이동통신사업이 8년째로 들어서면서 관련 사업도 함께 성장하고 있다. 우선 북 자체로 조립생산하는 휴대전화가 등장했다. 북은 2012년 4월 10일부터 한 달간 진행한 국가산업미술전시회에서 10여종의 휴대전화 도안을 공개했다. 이 전시회에선 특히 휴대전화 부문의 다양한 도안을 선보였는데 터치식, 접이식, 어린이용, 노인용, 부부용 등 16종에 달했다. 공개된 도안 중에는 삼성전자, LG전자, 노키아, 애플 등 세계적인 휴대폰 업체에서 출시했던 제품과 유사한 도안도 있었다. 더불어 휴대폰 액세서리와 휴대폰 케이스 도안 30여 개도 공개했다. 북은 초기에 주로 중국 등에서 생산된 휴대전화 단말기를 수입해 판매하거나 중국, 대만 등에서 부품을 들여와 조립한 후 평양, 류경 등의 자체 상표를 붙인 제품을 보급했다.
실제로 북은 최근 스마트폰과 유사한 신형 휴대전화를 출시해 주민들에게 판매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음성팟기, ‘지능형 손전화’로 불리는 신형 휴대폰(600달러 정도)은 국제인터넷 접속 기능을 제외한 TV시청, 음성 인식, 터치 펜, 게임, 외국어 사전 등의 기능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네이버 길찾기와 유사한 길찾기 웹도 등장했고, 로동신문도 휴대폰으로 볼 수 있게 됐다.
2009년부터 시작된 음성 및 문자메시지(SMS) 서비스 이용이 꾸준히 증가하고 있고, 영상 통화 서비스도 젊은 층을 중심으로 이용이 늘고 있다.
설날 아침이었어요. 신호음이 울리기에 전화를 들었더니 손전화 화면에 선생님! 새해를 축하합니다. 희망찬 새해를 맞으며 선생님과 온 가정의 건강을 바랍니다. 새해에는 선생님의 당부를 잊지 않고 제가 맡은 CNC화 연구과제를 꼭 성공하겠습니다. 철수 올림이라는 글이 올라 있는 것이 아니겠어요.
북녘의 주간 《통일신보》와 인터뷰에서 한덕수평양경공업대학 김순영 교원이 한 말이다. 평양에서도 글쪽지(문자메시지) 문화가 확산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중국의 한 학자는 2012년 평양을 방문해 고려호텔에 묶었는데, 상점 판매원부터 찻집 봉사원까지 상당수가 휴대전화를 사용하고 있어 놀랐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6년이 더 흘렀다. 평양을 비롯해 지방의 주요 도시까지 공공장소, 버스 안에서 휴대폰 소리가 들리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상으로 됐다. 평양에서 합작사업을 하고 있는 한 재미교포는 북에도 디지털혁명이 일어나기 시작했다며 디지털문화의 확산이 주민들의 일상생활과 의식의 변화를 가져올 수밖에 없고, 사회 전반의 개방 흐름에도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젊은 세대의 의식변화와 남북동질감(?) 회복
북에서 자체 생산된 판형콤퓨터(태블릿PC)도 젊은층 사이에서 인기상품으로 등장했다. 북은 4~5년 전부터 태블릿PC 제작을 본격화해 현재 삼지연과 아리랑, 아침 등 3가지 제품이 생산되고 있다. 북에서 생산되는 태블릿PC는 주로 학생들의 학습과 일반인들에게 정보를 제공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북 조선중앙 TV는 판형컴퓨터에는 6개 나라 다국어사전을 비롯하여 정보기술용어사전, 조선말사전, 그리고 중소학교 학생들을 위한 교재와 참고서들이 들어 있어서 교과서를 따로 지참하지 않고 다녀도 가지고 다니면서 유용하게 이용할 수 있는 최신 정보기술 제품입니다라고 태블릿PC를 소개했다.
삼지연의 경우 7인치 화면을 탑재했으며 해상도는 1024X768 픽셀이고, 운영체제(OS)는 안드로이드 4.0 아이스크림이며 8GB와 16GB 모델이 있다. 가격은 구글의 최신 버전 태블릿인 넥서스7보다 싼 200달러 정도. 평양 거리 곳곳에서 휴대전화 통화를 하는 젊은이들이 많이 보여 놀랐다. 북은 지난 12년보다 최근 1년 반 동안 더 많이 변했다. 앞으로 북을 이끌어 갈 신세대는 대부분 해외 유학 경험이 있고, 컴퓨터 등 통신기기에 익숙하다.
지난 1997년부터 의료봉사를 위해 23차례 평양을 방문했던 인요한(미국명 존 린튼) 연세대 국제진료센터 소장은 2011년 12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북녘 내부에 부는 변화의 바람에 놀라움을 표시했다. 김정은시대에 들어와 해외 파견, 교류, 유학 등을 통해 해외문화를 접하는 사람들이 늘면서 북녘의 문화와 사고방식에서도 뚜렷한 변화가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특히 북녘이 세계적 추세를 점차 수용하면서 남과 북 젊은 세대의 생활문화가 가까워지고 있다.
3. 변화하는 북한도 보자
북한에서 김정은체제가 등장한 지도 7년이 넘었다. 2009년 본격적으로 후계자활동을 시작한 때부터 따지면 10년이 넘는 기간이다. 2008년 말 ‘3대세습’의 형태로 김정은을 후계자로 결정한 북한은 새로운 지도자의 노선과 정책을 준비하면서 김정일시대의 비정상적인 국가운영 상태를 정상상태로 바꿔나갔다. 2016년 5월 6일부터 나흘간 열린 조선노동당 7차대회는 ‘당·국가’체제가 완전히 정상화 됐다는 것을 잘 보여줬다.
1990년대 중반 최악의 경제난을 겪은 고난의 행군 시절 북한은 계획경제이면서도 다음해 재정계획을 제대로 세우지 못할 정도로 어려웠다. 1998년 강성대국 건설이라는 국가적 목표를 제시했지만 10년이 지난 2007년에 와서야 강성대국의 구체적 목표와 시한 을 발표할 수 있었다. 그나마도 ‘강성대국’의 완성이 아니라 2012년까지를 강성대국의 대문을 여는 해로 설정했을 뿐이다.
이러한 최악의 경제조건에서 북한은 당․정․군을 ‘비상상태’로 운영할 수밖에 없었다. ‘선군정치’를 표방하면 체제위기에 대응했던 북한은 2009년부터 김일성시대를 모델로 사회 정상화에 나섰다.
2009년부터 2010년에 걸쳐 이뤄진 당, 정, 군에 대한 조직개편이후 김정일시대에 들어와 공개적으로 소집되지 않던 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 정치국 회의, 당중앙군사위원회가 정상적으로 가동되기 시작했다.
다음으로 북한은 새로운 노선과 정책의 기준이 될 ‘사상적 방향’을 제시했다. “자기 땅에 발을 붙이고 눈은 세계를 보라!는 모토다. 2009년 12월 17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준공식을 앞둔 김일성종합대학 전자도서관에 보낸 ‘친필명제’의 한 구절이다.
북한은 이 말에 대해 제 정신을 가지고 제 힘으로 일떠서면서도(일어서면서도) 배울 것은 배우고 받아들일 것은 실정에 맞게 받아들이며 모든 것을 세계최첨단수준으로 발전시켜 나간다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 구호는 김정일 위원장의 이름으로 제시됐지만 사실상 김정은시대를 염두에 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자기 땅에 발을 붙이고는 김일성․김정일시대의 계승을, 눈은 세계를 보라는 김정은시대의 지향성을 드러낸다.
김정은 제1위원장의 등장이후 그의 행보와 북한사회의 변화양상은 자기 땅에 발을 붙이고 눈은 세계를 보라!는 구호에 집약돼 있다. 눈은 세계를 보라는 구호는 단순히 세계적인 것을 받아들인다는 차원에 그치지 않고 기존의 사고방식을 바꾸고, 모든 분야의 변화를 이끄는 기준점이 되고 있다.
북한이 개혁개방으로 나갈 수 있는 출발점인 사상과 이념의 변화는 없었다. 중국의 경우 개혁개방에 앞서 덩샤오핑(鄧小平)의 주도로 이념의 변화가 선행됐지만 북한에서는 김정은시대에도 그런 변화는 이뤄지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김정일 위원장의 핵심유훈으로 강조되고 있는 이 구호는 김정은시대에 북한이 변화를 추구할 수 있는 기준으로 작용할 수 있다. 이념의 해방은 이뤄지지 않았지만 정책의 해방은 가능해졌다는 것이다. ‘정책의 해방이 장기적으로 이념의 해방을 가져올 지도 관심거리다.
인민이 다시는 허리띠를 조이지 않게 하겠다는 김정은 위원장의 2012년 첫 공개발언은 북한이 향후 경제건설에 주력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를 위해서는 시장경제적 요소의 부분적 도입과 대외개방이 필수적이다. 최근 북한은 경제 건설과 핵무력 건설 병진노선을 ‘경제총집중노선’으로 변경했다. 다만 북이 생각하는 변화의 폭과 우리가 기대하는 개방의 수준이 다를 뿐이다. 성공여부는 좀 더 지켜봐야 하겠지만 북 주민들은 김정은시대에 들어와 진행되고 있는 변화를 상당히 충격적으로 받아들이는 한편, 기대감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1990년대 후반 북의 3~4세대들은 고난의 행군이라는 혹독한 경제난을 경험한 만큼 경제 재건에 대한 열망 또한 크다고 할 수 있다.
사회주의 경제운영방식의 변화 -사회주의 기업책임관리제 실시
북한의 경제운영 방식의 변화는 김정은 위원장이 공식 취임한 직후부터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김 위원장은 2012년 경제관리방법을 결정적으로 개선하도록 하여야 하겠습니다라고 발언한 후 2013년 신년사에서도 현실발전의 요구에 맞게 경제지도와 관리를 개선하여야 합니다라고 밝혔다.
2013년 3월 전원회의에서는 현실발전의 요구에 맞게 우리 식의 경제관리방법을 연구완성하여야 합니다라고 지시했다. 경제관리 개선과 관련된 발언 내용이 경제관리방법의 개선→경제관리방법의 연구완성→경제관리방법 확립으로 강조점이 변화된 것이다.
그리고 2014년 5월 30일 김 위원장은 <현실발전의 요구에 맞게 우리 식 경제관리방법을 확립할데 대하여>란 글을 발표함으로써 새로운 경제운영 방식의 전면실시를 공식화했다. 새로운 경제운영의 핵심은 ‘사회주의기업 책임관리제’다.
“사회주의기업책임관리제는 공장, 기업소, 협동단체들이 생산수단에 대한 사회주의적소유에 기초하여 실제적인 경영권을 가지고 기업활동을 창발적으로 하여 당과 국가앞에 지닌 임무를 수행하며 근로자들이 생산과 관리에서 주인으로서의 책임과 역할을 다하게 하는 기업관리방법입니다.”
“기업체들은 로동에 대한 평가와 분배방법을 사회주의원칙대로 하여 근로자들이 누구나 다 일한 것만큼, 번 것만큼 보수를 공정하게 받도록 하여야 합니다.”
‘사회주의기업 책임관리제’는 2002년 7월 1일 단행된 사회주의경제관리개선 조치(7․1조치)이후 10년간의 논쟁과 경험을 결산하고, 변화된 국내외 상황에 맞게 개편한 경제관리방식의 핵심개념이다.
북한은 경제관리방식의 개선을 안정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우선 국가의 계획적이며 통일적인 지도를 내세우며 경제사업을 내각이 확고하게 책임지도록 했다. 내각책임제는 김일성, 김정일시대에도 지속적으로 강조돼 왔다는 점에서 새로운 방침은 아니다. 주목할 대목은 김정일 국방위원장도 시행하지 못했던 국가재정의 단일화, 집중화를 김정은 위원장이 구체적으로 추진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이 성공한다면 북한 재정운용에 큰 변화가 일어나는 셈이다.
둘째로 북한은 해당 단위의 독자적인 경영목표 입안과 전략 수립을 위해 공장․기업소, 협동농장 등에 상대적 독자성(자율성)을 강화했다. 북한에서는 공장․기업소 및 협동농장들의 경영활동에서 제기되는 여러 문제들을 자체로 처리할 수 있는 일정한 권한을 부여하고 있는데, 그 권한을 대폭 확대하겠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북한에서는 몇 년 전부터 경영전략이라는 새로운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계획경제의 전통적 방식과는 달리 기업의 경영전략을 중시하는 경영학적 방식의 도입을 고려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변화라고 볼 수 있다. 각 공장․기업소별로 임금 및 소득 격차를 인정하다보니 기업소의 경영전략이 중요해진 것이다. 생산성을 올릴 뿐만 아니라 잘 팔아야 함으로 경영과 판매전략을 고민하게 된 셈이다.
셋째로 기업들의 수익증대를 위해 경제특구 설치를 전국적으로 허가했다. 2013년 5월 29일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는 경제개발구법을 제정 공표했다. 경제개발구에는 다른 나라의 법인, 개인과 경제조직, 해외동포가 투자할 수 있으며 기업, 지사, 사무소 같은 것을 설립하고 경제활동을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규정했다. 중앙 정부차원이 아닌 지방 정부차원에서도 경제개발구(특수경제지대=경제특구)를 설치할 수 있는 법제 토대가 마련된 것이다.
서서히, 그러나 과거보다 빠르게 변화하는 북한 주민의 경제생활
김정은시대에 들어와 북한도 민심을 반영하고 인민생활 향상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내부 문제점을 적나라하게 지적한 문건을 발표하고, 간부들의 타성을 질타한 내용을 언론매체에 공개하기도 했다. 북한도 ‘적폐 청산’ 없이는 권력 유지가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는 듯하다.
2012년 6월 2일 《로동신문》은 정론을 통해 지금은 밖에서 밀려오는 적이 무서운 게 아니라 사회주의 요람 속에서 성장한 일꾼(간부)의 관료화․귀족화가 문제라고 비판했다. 과거 북한 내부의 어려움을 외부(주로 미국) 탓으로 돌리던 관성에서 벗어나 내부의 문제점에 눈을 돌리기 시작한 것이다.
북한은 최근 몇 년 사이에 주민들의 편의봉사, 문화시설을 대대적으로 확충하고 있다. 휴대폰, 인라인스케이트장, 유희장, 극장․영화관, 전문상점 및 슈퍼마켓 등이다.
슈퍼마켓과 전문상점의 등장은 공장, 기업소의 생산 활성화와 새로운 유통망 확보란 측면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초기에 광복거리상업중심에서 팔리는 상품의 80% 정도가 중국을 비롯한 외국산이었다. 종합시장과 군소 장마당에서 팔리는 제품의 다수도 중국산이다. 그러나 최근 국제사회의 경제재재가 강화되면서 광복거리슈퍼마켓과 시장의 상품이 북한산으로 변화되고 있다. 북한은 이미 전문상점을 건설하면서 국내산 비중을 점차 높여왔다.
특히 2015년 초부터 북한 ‘인민봉사총국은 식료품이나 경공업 제품을 취급하는 전자상업 봉사체계(온라인 주문시스템) ‘옥류’를 운영하고 있으며, 국가망을 통해 전자결재카드(나래, 고려 등)로 물품을 구매할 수 있게 됐다.
또한 협동농장에는 포전담당책임제가 실시되면서 가족영농제와 유사한 형태가 도입됐다. 포전담당책임제는 협동농장의 기본 생산단위인 분조별로 일정한 경지(‘포전’)를 배정하여 책임지고 농사를 짓도록 하는 제도이다. 2015년 4월 7일 자 노동신문에는 선천군 석화협동농장의 경험을 소개한 흥미로운 기사가 실렸다. 석화협동농장에서는 모든 농장원 세대의 의견과 요구를 반영하여 포전담당책임제 시행세칙을 마련하였으며, 그 결과 “분조들을 한 집안 식구들이 함께 일하는 것을 위주로 재구성”하였다고 한다. 이처럼 개별 협동농장이 정책 집행상의 자율권을 가지고 실질적인 가족농 제도를 운영할 수 있다면, 앞으로 협동농장 운영에 상당한 변화가 이뤄질 것으로 예상된다.
북한의 변화와 통일교육
북한은 김정은시대에 들어와 눈은 세계를 보라며 스스로 변화를 모색하면서도 핵 보유를 전제로 대외정책을 구사했다. 그러나 2017년 11월 ‘핵무력 완성’을 선언한 후에는 역설적으로 평화체제 정착과 북미관계정상화를 전제로 ‘완전한 비핵화’를 수용했다. 향후 북한의 기본방향은 ‘세계적 추세’ 적극 수용과 ‘실리 추구’가 될 가능성이 크다.
우리는 기본목표는 무엇인가? 한반도를 비핵화지역으로 만들고 안정적인 평화체제를 구축하는 것이야 한다. 전쟁이 아니라 대화와 협력을 통해 장기적으로 통일을 이룩하는 것이야 한다. 전쟁수단을 배제한다면 남은 해법은 과정으로서의 한반도비핵화와 과정으로서의 통일(사실상의 통일)을 추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한반도비핵화와 평화협정 체결을 통한 평화체제 수립을 동시에 추구하는 방안이다. 그러면서 북한 스스로 추구하고 있는 변화의 폭이 넓어지도록 국제환경과 내부 조건을 조성해 주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의 북한’을 본다는 것은 어떤 측면에서 관성적인 대북인식에 혼란을 안겨주고, 다른 측면에서 ‘당혹감’을 느끼는 과정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평화와 통일로 가는 여정에서 언젠가는 반드시 통과해야 할 터널이다. 판문점선언이후 남북관계는 화해와협력단계와 남북연합단계가 혼재돼 빠르게 진행될 것으로 예상된다. 남북 철도 도로, 항로가 연결되면, 현장 중심의 통일교육도 가능해 질 것이다. 시대의 흐름에 맞는 ‘통일교육’에 대한 고민이 시급한 시점이다.
<참고>
정창현, 2013 『평양의 일상-사진으로 북녘 생활을 엿보다』 역사인
정창현 외, 2013 『북한사회, ‘다름’을 만나다』선인
정창현, 2014 『키워드로 본 김정은시대 북한』선인
권영경, 2014 「김정은시대 북한 경제정책의 변화와 전망」『수은북한경제』봄호
정영철, 정창현, 2017 평화의 시선으로 분단을 보다」 유니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