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산의 의미와 배경
등산을 처음 시작한 사람들의 동기는 대개 단순해서 "등산이란 무엇이며, 언제 시작
되었으며, 왜 산에 오르는가?" 하는 의문을 가지고 시작하지는 않는다.
또한 이런 사연이나 내용을 알아보았자 등산을 시작하는 재미가 증가된다고 할 수도
없다.
그러나 이러한 의문에 대한 해답을 알고 등산을 시작한다면 등산의 의미는 보다 뜻깊어질
수 있을 것이다.
실제 현재와 같은 의미의 등산을 인류가 시작한 것은 불과 200여 년 전의 일이다.
그 전까지는 동서고금을 통해 종교적인 목적이나 군사적인 목적으로 산에 올랐다고 할 수
있다.
현재와 같은 의미를 가진 최초의 등산은 1786년 8월 8일 의사인 미셸 파카르(Michel Paccard)와 농부인 자크 발마(Jacques Balmat)에 의한 알프스 최고봉 몽블랑(Mont Blanc 4807m)의 등정이었다.
이 등산의 동기는 현상금을 타기 위한 다소 불순한 목적이 있기는 했으나, 이 등산의 성공은 등산의 보편화를 가져왔다.
이후 알프스를 오르는 행위는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그리고 로마문자권에서 등산을 표현하는 알피니즘의 기원이 되어 영어(alpinism)나 프랑스어(alpinisme)나 독일어(Alpinismus) 그리고 이탈리아어(alpinismo)에서 모두 등산을 알피니즘으로 표현하게 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인류의 등산 행위는 세계 각처에 산재한 높은 산에서 숱한 비극과 영광을 기록하며 마침내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Everest, 8848m)가 8번에 걸친 영국원정대의 도전 끝에 1953년 5월 29일 에드먼드 힐러리(Edmond Hillary)와 셰르파 텐징 노르게이(Tenzing Norgay)에게 정상을 내주어 지구상에서 더 이상 높이 오를 대상이 없어졌다.
우리에게는 서구적인 의미의 등산이 전래된 지 이미 반세기가 넘어 한세기에 가깝다.
서구에 비해 그 역사는 짧으나 그동안 국내에서의 활발한 산악활동은 물론,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에 많은 원정대를 파견한 나라 중의 하나가 되었다.
등산은 왜 하는가? 아니면 산에 왜 가는가? 이런 똑같은 뜻의 물음에 1924년 에베레스트 정상으로 떠난 후 행방불명된 조지 멀로리(George Mallory)가 말한 '산이 거기에 있으니까!'는
진부한 대답이 된 지 오래다.
그렇다고 진정한 의미에서 등산이란 무엇인가라는 의문을 가질 때 알맞은 대답이 없다는 것이 안타까운 현실이다.
이러한 의문에 대해 등산이라는 운동(스포츠)이 생긴 지 200여 년이 지나도록 많은 등산가
들이 노력해왔지만 한마디로 정의내릴 수 없는 장님 코끼리 만지는 식의 막연하고 추상적인 대답만을 해온 것이 사실이다.
'산이 거기 있어서 간다'는 말처럼 눈가리고 아웅하는 식의 대답은 이제 설득력을 잃었다.
이러한 대답은 20세기 초처럼 미지의 땅이 남아있을 때나 통했던 대답이며 미지의 땅이
없어진 지금 현대인들은 또다른 목적을 가지고 산으로 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탈리아의 변호사이자 등산가였던 쥬스토 제르바수티(Giusto Gervasutti)는 자신의 등반기에서 "알피니즘을 정의하려는 나의 기도(冀圖)가 헛된 결말밖에 남기지 못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왜냐 하면 객관적인 알피니즘 같은 것은 존재치 않기 때문이다"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등산의 본질에 대해서만은 이렇게 설명할 수 있다.
인간의 본성 깊숙한 곳에는 자신이 있는 곳보다 높은 곳에 오르려는 욕망이 잠재되어 있다.
어린이들이 집안의 책상이나 벽 그리고 나무 등에 기어오르려는 데서 그 욕망을 읽을 수
있다.
이러한 욕망은 본능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본능이 결국 자라서 성인이 되면 건강이나 또다른 원인으로 인해 산에 오르는 것으로
변한다.
현대인들은 산업화된 사회에서의 탈출행위로 등산을 시작한다고 볼 수 있다.
지구상에 있는 8000m 급 산 14개를 처음으로 모두 오른 금세기 최고의 등산가 라인홀트
메스너(Reinhold Messner)는 “등산은 문화나 세계관과 관계가 없다.
특수한 육체적 조건을 전제하거나 돈의 영향을 받지도 않는다. 등산은 시작하면 된다"고
했다.
이 말처럼 등산은 시작하면 된다.
등산은 흔히 집을 나서는 순간 시작해 집으로 돌아올 때 끝난다고 한다.
그러면 이 등산의 시작과 끝을 어떻게 할 것인가가 중요한 것이고 이것을 해결해 나가는
방법을 배우고 알아야할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흔히 등산이 거주지 주변의 약수터나 동산 등에 아침 운동 삼아 오르는
데서 시작된다.
유럽처럼 대륙 한가운데 알프스가 솟아있어 여름 한철 휴가를 이용, 작심하고 산에 오르기
위해 평소에 훈련을 해서 오르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자신이 생기면 점차 근처의 높고 험한 곳을 오르고 싶어한다.
프랑스 등산가인 가스통 레뷔파(Gaston Rebuffa)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산들이 시시각각으로 내보여주는 천만가지 즐거움을 하나라도 거절해서는 안된다.
무엇이든 배척도 제한도 하지말고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굶주림과 목마름도 경험해보고
빨리도 느리게도 걸을 줄 알고 때로는 명상에도 잠겨본다.
예측할 수 있는 무한한 변화야말로 인생의 맛이 아닌가."
이 말처럼 산이 높아지고 험한 곳을 오르려면 많은 장애와 고생이 뒤따른다.
따라서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해서 산정에 올라서려면 인내가 필수요건이다.
그래서 폴란드의 등산가 보이테크 쿠르티카(Voytek Kurtyka)는 '등산은 인내의 예술'이라고 했다.
이렇듯 등산에 관한 모든 질문과 답 그리고 방법을 서양사람들이 했다. 이는 등산이 서양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본격적인 등산의 역사는 산업혁명의 역사와 같다.
그래서 산업화되어가는 사회일수록 등산인구는 늘어간다.
그러다보니 무작정 산으로 뛰어드는 경우도 간혹 생겨 조난이라는 비극으로 빠져든다.
이런 현상은 산업화된 사회에 대한 반발과 도피라는 면을 띠고 있지만 두가지 모두가 현대인들에게는 필요한 심리기도 하기 때문에 무작정 탓할 수만은 없다.
다만 이런 비극적인 결과를 피하기 위해 산이 가지고 있는 여러가지 장애에 슬기롭게 대처해 나가는 방법을 미리 알고 산으로 향해야 한다.
등산은 정신적으로 높은 수준의 운동이라고 한다.
이런 말을 증명하듯이 프랑스 등산가 야닉 세뇨르(Yannick Seigneur)는 "알피니즘은 행동의 스포츠이기 전에 지성과 깊은 사고의 스포츠다"고 했다.
그가 이런 말을 한 이유는 등산에 심판과 규칙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등산은 등산자 자신이 선수이자 심판 그리고 관객이기도 한 특별한 운동이기도 하다.
역시 프랑스의 은행가이자 등산가인 뒤몽 쉘(R.T. Dumont Sel)은 "알피니즘이 고귀(高貴)의 칭호를 획득할 수 있는 것은 쓸데없는 위험추구에 있는 것이 아닌 반대로 엄한 제재(制裁)에 의한 것이다"고 했다.
이처럼 심판과 규칙 그리고 관객이 없는 대신 규칙을 어겼을 때 입는 제재는 엄청난 비극으로 나타난다.
이런 비극은 200여 년 동안 이어져온 등산의 역사 속에 기록된 수많은 조난사고가 증명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등산은 늘 깊이 생각하고 폭넓은 지식을 필요로 하는 광범위한 운동이기도
하다.
현재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과거와는 달리 미지의 세계가 없어졌다.
그리고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새로운 장비가 개발되고 정확한 지도가 발행되어 산에 오르는
일이 쉬워졌다고 할 수 있다.
대신 그만큼 자연을 얕잡아 보는 경향이 생겨났다.
그렇다고 해도 자연은 여전히 인간이 대항해서 승리할 수 있는 대상은 아니다.
인간이 자연을 극복한 것은 극히 미미한 수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예로 국내외에서 일어난 많은 조난사건들을 분석해 보면 자연을 경시한 태도에서
기인하는 것이 많다.
비행가이자 체험작가였던 생떽쥐뻬리는 "대지는 우리에게 만 권의 책보다 더 많은 것을
가르쳐준다.
왜냐 하면 대지는 우리에게 저항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의 말대로 대자연은 인간이 도전하면 저항한다.
그렇기 때문에 위대하다.
이렇게 위대한 대자연의 일부인 산을 대하는 마음가짐에 대해 1992년 경남산악연맹 낭가
파르바트(Nanga Parbat, 8125m) 원정보고서의 한 귀절로 대신한다.
"자연은 우리들로부터 떨어져 있는 것도, 훈련으로 정복되어야 하는 대상도 아니다.
그것은 우리들의 한 부분이며 만물에 이어진 아름다움과 장엄이다.
산에서 우리는 깨달음을 얻고 삶의 의미를 배운다."
첫댓글 항상 유익한 정보, 너무 감사하고 많은 도움이 되네요, 즐거운 저녁 되세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