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람의 부르심 (창12;1)
우리는 창세기 11장에 까지에서 지금가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절대하심과 심판의 엄위하심에 관해서 총론적으로 살펴보았습니다.
창세기에는 아담이후 아벨,에녹,노아,아브라함,이삭,요셉,야곱. 이 일곱 사람의기록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부분과 여러모양으로 말씀하신 하나님(히브리서1장1절)에서 아벨의 제물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속죄하신 어린양의 피에 대해서 말씀하시고 에녹을 통해서 주님안에서 구원받은 성도의 성별된 삶과 휴거를 말씀해 주셨고 노아를 통해서 심판의 경고와 구원되신 예수님의 모형인 방주와 또 구원의 인도자 되시는 예수님의 모형인 노아의 여덟 식구를 말씀했습니다.
그 내용이 곧 구약에 나타나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모형입니다. 이제 여인의 후손으로 밴(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하시겠다(창3장15절)고 하신 하나님의 선포가 점점 윤곽이 역사적으로 선명해지는지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 계시가 점진적으로 역사속에서 완성되시는 만큼 하나님의 계시를 인위적으로 주관적 방법으로 해석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고 어리걱은 행동입니다.(창12장1절)말씀에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친척,아비지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 내가 너를 큰민족을 이루겠고 네게 복을 주어 네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하나님께서는 여인의 후손인 에수님의 허락을 위하여 아벨,에녹,노아를 거쳐 셈의 계통으로 그 약속의 완성을 위하여 아브람을 택하셔서 자기의 백성으로 삼으신 것을 우리가 알게 되는 것입니다.
육에 속한 유대인들의 오해와 같이 오늘도 거듭남의 체험이 없는 분들은 아브라함의 소명에 대해서 그의 종교적인 인품과 그의 순종성의 공로로써 잘못인식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롬4장2절)은 단적으로"아브라함이 행위로서 의롭다함을 입었으면 자랑할 것이있으려니와 하나님앞에서는 없느니라'라고 그의 공로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부르심의 근원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구원계획에 대한 [은혜언약]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느혜미야9장7절) 느헤미야는 주는 하나님 여호와시라 엣적에 아브람을 택하시고 갈대아 우르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아브라함"이란 이름을 주시고 (언약을 세우신" 하나님이라고 밝히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초대는 아브라함에게나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나 동일한 것을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아브람)자기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음것 같은 것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 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아니하고 믿음에 견고 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후사 즉 이삭곧 그리스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 하였으니 그러므로 이것을 저희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저에게 의로여기셨다 기록된 것을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주를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믿는 자니라(롬4장19~24절) 아브라함의 이 믿음의 축복은 얼마후 독자 이삭을 모리아산에서 번제로 바치는 기초가 됩니다. 여러분 (롬11장29절) 읽어 봅시다. " 하나님의 은사와 부루심에는 후회함이 없느니라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시고 구원의 은혜를 주심에는 여러분의 행위를 보신 것이 아닙니다. 전혀 후회함이 없으신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롬11장33절)은 "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을 찾지 못할 것이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계획의 오묘하심은 노아에게 방주를 지으라고 그 설계만 지시해 주시고 친히 방주를 지어주시지 않으셨습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자기 손으로 방주를 지었습니다. 모세에게 성막을 지으라고 그 도형을 보여 주시고 이스라엘로 하여금 그 성막을 짓게 하심과 같이 우리 구원의 완성도 "믿으라" 는 명령 뿐으로 우리가 그 사실을 믿을 때 우리가 새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엡2장21절)의 말씀같이 "그리스도의 터위에 성도들이 서로 연결하여 하나님의 거하시는 집으로 지으져간다"고 말씀하고 있는 오묘함을 깨닫으시기 바랍니다.
이와 같이 아브라함을 부르신 하나님께서는 먼저 아브라함에게"너희 본토,친척,아비집을 떠나 내가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명령하십니다. 성경전체를 관통하는 교훈은 하나님의 주권과 거룩을 위해서 부르신 자기 백성에게 대한 요구는 언제나 분리인 것입니다.
(시편45편10절)딸이여 듣고 생각하고 귀를 기울지어다 네 백성과 아비집능 잊어 버릴지어다. 그리하며 왕이 너의 아름다움을 사모하실지라.(고후6장17절) "그러므로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저희중에서 나와서 따로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말라 "
(요한계시록18장4절)"내백성들아 거기서 나와 그 죄에 참예치 말고 그 받을 재앙을 받지말라"
아브함이 살았고 그 아비 데라가 살던 땅 지방에 대해서 (여호수아24장2절)은 여호수아가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 조상 곧 아브라함의 아비 나홀의 아비 데라가 강 저편에 거하며 다른 신들을 섬겼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이름은 신약의 복음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것을 우리가 기억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가 창세기14장까지는 "아브람"즉 고귀한 족장이였으나 15장 부터는 "아브라함"즉 많은 민족의 조상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는 이유는 성경은 우리에게 밝히 해석하고 있습니다. 아브람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떠났으나 하나님의 요구하심을 따라 떠난 것이 아니었던 것을 우리가 보게되는 것은 아비(우상숭배자)와 조카 롯(육에 속한다)이 같이 떠난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의 완강한 대적은 언제나 (육)입니다. 육의 생각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지 못합니다.(롬8장8절) 또 아브람을 부르신 하나님은 영광의 하나님이시라고 (사행7장2절)에 밝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아브람을 부르신 그하나님이 영광의 하나님이신 줄 깊이 깨닫았으면 (우상숭배의 요소)가 하란에서 죽은 다음 비로소 하나님의 지시하시는 가나안 땅을 가게 됨같이 오늘의 그리스도인들도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께서 영광의 하나님이심을 진정 믿는자라면 세상의 상속과 세상의 권위와 모든 물욕 (마음의 우상)을 버릴 것임에 틀림 없습니다.
그런데 유감 스럽게도 우리 마음 가운데 아직 데라가 살아있어 가나안과 그 방향을 달리 걷고 있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라고 아니할 수없습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우리주 예수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이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1장17~19절)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육정의 단절은 죽음밖에 없습니다. 데라가 하란에서 죽은것처럼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 회원여러분도 우리를 대신하여 죽은 예수그리스도 를 믿는 순간 우리속의 데라가 주와 함께 죽는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회원여러분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그와 함께 장사되었음을 믿으십시오(롬6장4절) 그러면 동시에 영광의 하나님께서 나의 아버지 되심을 믿음으로써 되는 것입니다.
데라가 죽기전에는 하나님이 지시한 땅을 알지 못했으나 데라가 죽은 후 가나안 땅을 향한 발걸음 천국가는 길목이 밝아졌습니다. 그는 그의 부르심과 ㄱ의 축복에 대해서 눈으로 보지 못했지만 마음으로 믿었고 그 믿음은 그 영혼의 생명과 의지가 되어 가나안 으로 향한 발걸음의 방향이 명랑해졌고 ㄸ 바로 잡혀진 것을 우리가 알게 됩니다. 이와 같이 우리속에서도 데라가 죽은 다음에 우리의 신앙생활의 방향을 바로 잡지 못했던 방향을 바로잡게 되어지는 것입니다.우리의 신앙생활에 크게 방해되는 데라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밑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죽어지게 될때 우리도 발걸음이 명랑해 지며 찬송이 시작되는줄 압니다.
여러분! 우리속에 가득차 있는 데라!
그 이름의 뜻과 같이 천국가는길을 늦추는 이 육신의 소욕이 죽고 명랑한 생명의 길인 천국가나안을 다같이 걸어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권면 드립니다.
작성자:야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