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제1차 유대전쟁(A.D.66-74).
-- 로마에 대한 유대인들의 반감이 점차 고조되어 갔고, 소요가 계속되었다.
-- 특히 유대공동체와 헬라공동체 간에 적대감이 뿌리깊게 박혀 있었다. 마침 가이사랴에서 헬라주민들이 한 회당 옆에다가 헬라식 정원을 건설하여 회당이 부분적으로 막히자 두 집단 사이에서 싸움이 일어난 사건이 생겼다. 이 싸움이 네로에게 보고되었을 때 네로는 헬라주민들의 편을 들어 주었다(61년). 이 일이 계기가 되어 도시에서 시가전이 벌어질 정도로 양편의 싸움을 극한 대결로 치달았다.
-- 총독 플로루스가 성전금고로부터 17달란트를 빼내 오도록 명령했다. 이에 화가 난 일부 주민들이 길가에 운집하여 플로루스를 조롱했다. 플로루스는 조롱한 주민들을 처벌하려고 했으나 저항이 너무 거세서 플로루스는 예루살렘에 보병대 하나만을 남겨두고 도시의 지도자들에게 치안책임을 맡기고는 가이사랴로 철수했다.
-- 마침내 숫자적으로 증가한 열심당이 대다수의 주민들의 지원을 받으면서 싸움을 시작했다. 이두매인들과 사마리아인들도 싸움에 합류.
-- 사태가 심각해지자 알렉산드리아에 머물고 있던 아그립바2세가 예루살렘으로 귀환하여 중재를 시도했고, 헤롯왕의 지지자들도 평화회복을 위하여 할 수 있는 한의 모든 일을 다했다. 바리새인들은 열심당편에 서서 전투에 참가하기도 했다. 열심당은 마사다를 포함한 요새들을 정복했고, 대제사장의아들인 엘레아잘은 로마로부터 탁월한 기능을 갖춘 성전에서 황제에게 매일 희생제사드리던 것을 중지시켰다.
-- 아그립바2세의 중재시도가 실패로 돌아간 직후 아그립바, 베레니체, 대제사장의 왕궁, 예루살렘의 문서보관소 등이 불에 타 버렸다. 안토니아요새가 점령된 후 도시전체가 로마로부터 해방되었다. 예루살렘 밖의 팔레스타인 시골지역에서도 유혈사태가 벌어져서 이 지역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유대인들에 의하여 이방인들이 잔인하게 살해당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 로마의 시리아 총독 세스티우스 갈루스(Cestius Gallus)가 66년 가을에 팔레스타인 원정을 시도했으나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고, 퇴각하는 도중 벧호른 부근의 협곡에서 전멸당했다.
-- 갈루스의 패배이후 예루살렘의 지도부는 재편성되었다. 줄곧 친로마정책을 펼쳐 온 제사장들은 반로마정책으로 입장을 바꾸지 않으면 살아남기 힘들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반로마편에 섰다. 산헤드린이 행정적인 권력을 위임받았고, 고위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 의하여 주도되는 민회가 최고관청으로 자리잡았다.
민회는 갈릴리군의 최고사령관인 플라비우스 요세푸스가 맡고 있었는데, 그는 후일 역사가가 되었다. 그러나 요세푸스는 온건한 정책을 펼친 결과 로마와 협상을 하고자 한다는 의심을 받기도 했고, 도시민들보다 훨씬 더 민족주의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던 갈릴리사람들의 무장항거를 초래하기도 했다.
-- 네로는 베스파시안 장군을 팔레스타인에 파견해 질서를 회복시키도록 했다. 베스파시안의 로마군에는 아그립바2세, 나바테아의 왕 말쿠스2세로부터 온 원군이 포함된 3개의 군단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갈릴리로 진군한 베스파시안의 강력한 군대 앞에서 유대군은 연패당했고, 요세푸스도 티베리아스로 퇴각했으며 요타파타의 요새로 도망했다.
요타파타는 베스파시안에 의해 47일동안 포위당했다가 마침내 로마의 수중에 떨어져서 주민들이 죽임을 당하거나 노예로 잡혀 갔고 모든 방어시설이 파괴당했다(67년6-7월경). 67년이 끝나갈 무렵 로마는 갈릴리 전역을 되찾았다. 기살라의 요한은 지지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도망했다.
-- 사태가 긴박해지자 예루살렘 내부에서는 패전의 책임을 둘러싼 공방전이 전개되다가 열심당이 구테타를 일으켜 전면에 나섰다. 69년 여름 베스파시안에 의하여 추방당한 시몬 바르기오라와 그의 추종자들이 예루살렘에 도착했고, 기살라의 요한 일파로부터 갈라져 나온 제사장 엘르아잘 벤 시므온 일파도 예루살렘에 도착했다.
예루살렘 안에서는 세 집단 사이에서 권력투쟁이 있었고, 이와 동시에 예루살렘 방어벽을 강화하는데 모든 노력이 집중되었다. 불행하게도 이 무렵 예루살렘의 곡물창고가 불에 탔는데, 이는 이후 전개될 로마와의 대결에서 치명적인 영향을 끼쳤다.
예루살렘은 세 곳의 요새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고지대와 저지대는 시몬 바르 기오라, 성전언덕은 기살라의 요한, 성전내부의 안뜰은 엘르아잘이 담당했고, 디도장군은 예루살렘을 에워쌀 준비를 하고 있었다.
-- 노련한 베스파시안은 예루살렘 안에서 권력투쟁이 진행되고 있는 동안 직접 공격을 피하고 우회하여 베뢰아와 이두메 등의 영토들을 정복하고, 사마리아와 세겜을 손에 넣었다. 가이사랴에 돌아간 베스파시안은 네로가 죽었다는 소식(68년6월)을 듣고 로마 동부군의 지지를 얻어 로마황제로 등극했다(69년7월1일). 팔레스타인에는 베스파시안의 아들 디도가 남아 로마군대를 지휘했다.
--70년 초에 디도는 마침내 유월절 절기가 시작되기 몇주 전에 예루살렘 포위작전을 시작했다. 디도군에는 한때 유대군 사령관이었던 요세푸스와 전 총독 티베리우스 줄리우스, 알렉산더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런 와중에도 예루살렘 내부의 열심당 당파 간의 권력투쟁이 계속되었다.
세 당파 중에 하나였던 엘르아잘파가 유월절을 지키기 위하여 모여든 사람들을 위하여 성전 앞뜰의 문을 열었을 때 기살라의 요한파에 의하여 공격을 받아 참패하고 말았다. 이로서 예루살렘은 기살라의 요한파와 시몬파 두 파가 있었다. 마침내 로마군이 북쪽 끝의 성벽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유대군은 사태가 심각함을 깨닫고 내분을 중지하고 대응하기 시작했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로마군은 예루살렘 시 전체를 돌 성벽으로 빙 둘러싸고 야간공격을 감행하여 예루살렘 성전 안 높은 지대에 있던 안토니아성채를 함락시켰다. 엄청난 숫자의 예루살렘 주민들이 학살당했고 성전은 함락당하여 불에 탔다. 예루살렘이 멸망당한 후에 700명의 청년들이 로마로 끌려 갔고, 다른 사람들은 이집트의 광산에서 일하게 하거나 노예로 팔렸다. 요한과 시몬은 지하수로에 숨어 있으려고 했으나 곧 사로잡혀 로마로 끌려 갔다. 시몬은 처형당하고 요한은 남은 여생을 감옥에서 보내야 했다.
-- 디도가 유대인들을 포로로 끌고 가서 승리의 행진을 하고 있을 때 헤로디움, 맛사다, 마케루스의 요새는 함락되지 않았다. 남은 요새들을 정복하는 과제는 새로운 유대총독인 섹스투스 루실리우스 바수스에게 위임되었다. 헤로디움은 쉽게 정복되었고, 마케루스는 자유로운 통과를 할 수 있도록 보장한다는 약속을 받고 로마군에게 항복했다.
-- 마사다를 정복하지 못한 채 바수스는 죽었고, 그 뒤를 프라리우스 실바가 인계받았다. 실바는 73년초에 마사다 공격을 시작했다. 이때 마사다는 갈릴리 유다의 손자인 엘르아잘의 지휘를 받고 있었다. 이들은 방공호를 만들과 오랫동안의 포위를 견뎌내기 위하여 식량과 물과 같은 보급물자를 비축했다.
-- 실바는 마사다를 둘러싼 마사다와 같은 높이의 성벽을 쌓고 성벽 위에는 불화살을 쏠 수 있는 망대를 세웠다. 실바는 토성공격으로 마사다를 함락시키는데 성공했다. 로마군이 마사다에 진입했을 때 포위당한 유대인들은 모두 자결했고, 두 여인과 다섯 어린아이들만 살아 남아서 탈출에 성공했다(73-74).
-- 제1차 유대전쟁의 결과.
a. 어마어마한 인명살상. 인국가 격감했다.
b. 유대교의 종교적 중심지가 사라져 버렸다. 큰 절기 때 더 이상 예루살렘으로 순례오는 일도 없어졌다.
c. 희생제사가 더 이상 드려지지 않았다.
d. 유다는 이제 로마의 독주가 되었고, 로마군이 고정적으로 주둔했다.
e. 도시들이 철저하게 파괴당했고, 토지들이 로마인들에게 양도되었다. 엠마오는 800명의 전쟁 퇴역군인들이 있는 요새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