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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보는 두 렌즈
1. “무조건 믿어!” vs. “믿어져야 믿지!”
사람마다 하기 쉬운 일이 있고 하기 어려운 일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성경을 글자 그대로 믿는 것이 쉽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그것이 매우 어렵습니다. 전자의 사람들은 ‘믿음’을 강조하면서 “무조건 믿어!”라고 합니다. “믿기 어려운 것까지 믿는 것이 참 믿음”이라고 합니다. 이에 대해 후자의 사람들은 “믿어져야 믿지!”라고 답합니다. “믿고 싶은데도 믿어지지 않으니 어쩌란 말이냐”는 것입니다. 믿어져야만 믿을 수 있는데 무조건 믿으라니, “무조건 믿어!”라는 외침이 참으로 공허하게 들린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편에 속합니까? 어느 입장에 더 가깝습니까?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렌즈’를 통해서 읽습니다. 즉, 자기 나름의 관(觀:view)을 가지고 성경을 읽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무조건 믿어라!” 하는 것도 성경을 읽는 일종의 렌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렌즈는 20세기 후반부터 문제를 일으키기 시작했습니다. 이 렌즈를 통해 성경을 읽고는 “도대체 믿어져야 믿지!”라고 불만을 표시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점점 늘어갔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는 새로운 렌즈가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2. 성경을 보는 “과거의 렌즈”
과거의 렌즈는 성경에 관한 세 가지 근본 문제-성경의 기원과 성경의 권위 그리고 성경 해석법에 대해 다음과 같은 입장에 서 있습니다.
① 기원: 성경은 성령의 감화를 받아 쓰인 하나님의 말씀이고 따라서 신성하다. 그 이유는 성경은 다른 여느 책들과는 달리 인간이 아닌 하나님께로부터 왔기 때문이다.
② 권위: 따라서 성경은 그 근원에서부터 진리이고 권위가 있다. 성경은 우리가 무엇을 믿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궁극적인 권위를 가진 하나님의 보증서이다.
③ 해석: 성경은 역사적으로 또 사실적으로 진리이다. 즉 성경은 역사 속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일에 대한 기록이다. 따라서 문자적으로 읽고 해석하면 된다.
이에 반해 새로운 렌즈는 성경의 기원과 성경의 권위 그리고 성경 해석법에 대해 다음과 같은 입장에 서 있습니다.
⑴ 기원: 역사적 산물
성경 읽기의 근본은 성경의 기원(origin)을 어떻게 보느냐에 (달리 표현하면 성경의 저자를 누구로 보느냐에) 달려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성경의 각 구절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씌어졌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고 봅니다. 이는 성경을 하나님의 작품(divine product)으로 보는 견해입니다.
하지만 이와는 달리 성경을 인간의 작품(human product)으로 보는 시각이 있습니다. 성경을 인간의 작품이라고 할 때, 이는 성경이 고대의 두 공동체의 산물임을 뜻합니다. 즉, 구약성경은 고대 이스라엘의 산물이며, 신약성경은 초기 기독교운동의 산물입니다. 이 두 공동체의 산물로서의 성경은 그들이 그들의 삶의 자리(Sitz-im- Leben)에서 하나님과 관계 맺으며 살았던 삶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성경을 인간의 작품이라고 보는 것이 하나님의 실재를 부인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실재하시고, 우리는 그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하는 모든 표현은 인간적인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할 때, 우리는 인간의 언어나 인간이 갖고 있는 개념, 사상, 상징, 이야기 등을 통해서 표현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의 하나님 체험은 언어의 영역을 넘어서고 언어의 한계를 초월하는 것이지만, 우리가 그 체험을 남에게 전달하기 위해서는 한계를 가진 인간의 언어에 담아서 전달할 수밖에 없습니다. 즉, 하나님은 실재하시지만, 그 하나님을 체험해 전달하고 있는 성경은 인간의 언어로 표현된 인간의 작품입니다.
따라서 성경은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성경은 과거의 각기 다른 두 사회 구성원들이 하나님을 체험하고, 그 체험을 기록한 응답(신앙고백)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하나님‘의’ 이야기가 아니고,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이야기입니다. 즉, 그들이 본 하나님의 뜻과 품성에 관한 이야기이며,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기도요 찬양이고, 그들이 본 인간의 곤경과 그 곤경에서 벗어나는 길을 이야기한 것이며, 그들의 종교관이자 윤리관이며, 하나님께 신실하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하는 그들의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인간의 작품으로 이해하지 않을 때, 우리는 엄청난 혼돈에 빠질 위험이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입니다. 만일 우리가 성경을 하나님의 작품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이야기는 창조에 관한 하나님의 이야기가 됩니다. 하나님의 이야기이기에 그 창조 이야기는 결코 틀릴 수가 없습니다. 이 논리를 더욱 확장하면 우리는 창조과학의 문제를 다루어야 하고, 학교 생물시간에 진화론과 함께 창세기를 가르쳐야 할 것인지에 대한 논쟁에까지 도달하게 됩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창세기의 처음 몇 장을 고대 이스라엘의 창조 이야기로 이해한다면, 우리는 고대 이스라엘도 다른 모든 문화권에서처럼 그들 자신의 창조 이야기를 갖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바울 서신은 사도 바울이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기록한 것인가, 아니면 사도 바울이 보고 느낀 바를 기록한 것인가?
⇒창조 이야기는 천지창조에 관한 하나님의 이야기인가, 아니면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의 이야기인가?
⇒율법은 하나님의 법인가, 아니면 옛 이스라엘의 법인가?
레 18:22 너는 여자와 동침함 같이 남자와 동침하지 말라 이는 가증한 일이니라
레 20:13 누구든지 여인과 동침하듯 남자와 동침하면 둘 다 가증한 일을 행함인즉 반드시 죽일지니 자기의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동성애에 관한 우리의 생각이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의 생각과 같아야 하는가?
레 19:19 너희는 내 규례를 지킬지어다. 네 가축을 다른 종류와 교미시키지 말며 네 밭에 두 종자를 섞어 뿌리지 말며 두 재료로 직조한 옷을 입지 말지며
※이 금기사항을 지금도 지켜야만 하는가? 아니라면 율법을 지키고 안 지키고의 기준은 무엇인가? 어떤 것은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이고, 어떤 것은 인간의 글이란 말인가?
※성경은 사람의 작품이기에 인식의 오류가 포함되어 있을 수 있다. 띠라서 성경 구절을 어떻게 읽고 해석하며 어떤 가치를 부여할지는 전적으로 우리 몫이다.
(2) 권위: 거룩한 경전
과거의 렌즈와 마찬가지로 새로운 렌즈 역시 성경을 “거룩한 경전”으로 봅니다. 그러나 과거의 렌즈가 ‘성경은 하나님에게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거룩한 책이라는 지위를 갖게 되었다’고 보는 것과는 달리, 새로운 렌즈는 ‘역사적 과정의 결과로 성경이 거룩한 책이라는 지위를 갖게 되었다’고 봅니다. 여기서 말하는 역사적 과정이란 정경화(canonization) 과정입니다.
현재의 성경을 구성하고 있는 문서들은 처음 기록되었을 당시에는 거룩한 문서들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고대 이스라엘과 초기 기독교는 그 문서들을 거룩한 문서들이라고 선포했습니다. 이 과정이 구약성경에서는 500년 정도 걸렸으며(율법서는 주전 400년경, 예언서 주전 200년경, 성문서 주후 100년경에 정경으로 인정), 신약성경에서는 300년 정도 걸렸습니다(주후 100년경 모든 문서 집필 완료, 주후 367년에 지금의 정경 목록 첫 등장). 이 문서들을 거룩한 문서들이라고 선포함으로써, 우리 신앙의 조상들은 이 문서들을 자신들이 알고 있는 가장 중요한 문서들이라고 선포했던 것입니다.
이렇듯 성경이 수백 년에 걸쳐 경전으로 인정받게 되었다는 사실은 성경의 기원과 성경의 지위 및 권위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즉, 성경이 거룩하다는 말은 그 ‘기원’이 거룩하다는 말이 아니고, 기독교에서 갖는 성경의 ‘지위’가 거룩하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을 거룩한 경전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성경이 우리가 아는 가장 중요한 문헌을 모아놓은 책이라는 뜻에 다름 아닙니다. 이 책은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규정지어 주고, 개인적으로 또 공동체적으로 우리의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일러줍니다. 또 이 책은 지금까지 그랬듯이 앞으로도 우리 삶의 틀을 마련해 줄 것입니다.
성경이 그 기원 때문이 아니라 그 지위 때문에 거룩하다고 보는 견해는 성경의 ‘권위’까지도 다르게 보게 합니다. 성경이 차지하는 지위가 거룩하다는 것은 성경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삶의 기초문서임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인들이 끊임없이 계속해서 대화를 해야 할 중요한 글들이 성경에 담겨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대화의 계속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에 매우 중요한 것이고 또한 본질적인 것입니다. 이런 대화가 끊기거나 미미해질 때,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거룩한 경전인 동시에 인간의 산물이기에 그 대화는 ‘비판적인’ 대화여야 합니다. 성경에는 우리가 존중하지 않아야 하거나, 존중할 수 없는 구절들도 많기 때문입니다. 그런 구절들은 그것이 씌어졌던 과거 당시에는 적절한 내용이었을지 모르나 오늘날에는 적절하지 못하거나 아니면 하나님의 뜻이라고 판단할 수 없는 구절들입니다. 예를 들어 성경에는 두 가지 씨앗을 같은 밭에 뿌리는 것을 금지한 법(레위 18:22, 20:13)과 두 가지 천으로 짠 옷을 입지 말라는 법(레위 19:19)이 명시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 가운데 혼방 옷을 입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런 율법은 옛날에는 적절한 내용이었을지 모르나 오늘날에는 적절치 못하거나 아니면 하나님의 뜻이라고 판단할 수 없는 구절입니다.
성경과 비판적인 대화를 한다는 것은 독자가 성경의 내용에 대해 비판적인 판단을 할 수 있다는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성경이 우리를 비판하는 것에 자신을 열어놓는 것도 포함합니다. 즉,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는 비판적인 지혜만 필요한 것이 아니고, 성경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 기울일 수 있어야 합니다. 잘 읽으려면 잘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을 들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즉 내가 성경을 읽는 차원을 넘어 성경이 나를 읽는 차원으로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성경이 규정지어주는 세계 속에서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이 일러주는 것을 귀담아 듣고, 그 의미를 되새겨 이를 통해 우리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성경이 고백하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 하나님과의 관계에 신실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현실과 삶 자체를 규정지어주는 정신과 영혼을 성경을 통해 가다듬어야 하며, 나아가 우리가 속한 공동체도 이에 의해서 규정되어지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성경을 거룩한 경전으로 받아들이고, 이와 끊임없이 대화해야 하는 목적이 이보다 덜 할 수는 없습니다. 이렇듯 성경의 권위는 바로 성경이 그 ‘기능’에 있어서 옛날부터 우리의 주된 대화 상대였다는 점에 있습니다.
(3) 기능: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는 매개체=성례전(Sacrament)
이처럼 성경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는 그리스도인의 비전과 정체성을 규정해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이 가진 또 다른 중요한 역할은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는 매개체”로서의 역할입니다. 신약성경 학자인 마커스 보그(Marcus J. Borg)는 이를 일컬어 성경의 성례전(Sacrament)적 기능이라고 부릅니다.
기독교에서 쓰는 영어 낱말인 Sacrament는 성례전을 뜻하는데, 특별히 개신교에서는 세례식과 성찬식을 일컫습니다. 그런데 종교학에서는 이 Sacrament라는 낱말이 보다 넓은 의미로 쓰이는데, 그것은 “은총의 수단이며 신성한 존재의 매개”라는 뜻입니다. 즉 Sacrament란 이를 통해 하나님의 실재를 알게 되고, 이를 통해 성령을 체험할 수 있는 수단을 뜻합니다. 이렇듯 종교학에서, 성례전이란 신성한 것의 매개자로서 그것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임재하는 수단입니다. 그런 뜻에서 이 낱말은 세례식과 성찬식을 포함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는 다른 모든 수단과 방법도 포함합니다. 즉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는 계기가 되고, 성령의 임재를 실감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적으로 알 수 있는 모든 것이 이 낱말로 표현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서 이런 역할을 해왔고, 또 기독교 역사를 통해서 중요한 사람들의 개종과 변화 체험에서 이런 역할을 해 왔습니다. 예를 들어 어거스틴, 마틴 루터, 존 위슬리 같은 이들은 성경을 통해 성령이 들려주시는 살아있는 음성의 체험했던 사람들입니다. 이런 뜻에서 마커스 보그는 성경을 성례전(Sacrament)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을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는 매개체로 본다는 것은 이미 이야기한 성경이 인간의 산물이라는 개념과 연계되어 있습니다. 성찬식에서 쓰는 빵과 포도주는 틀림없이 사람이 만든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닌 인간 누군가가 빵과 포도주를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 빵과 포도주는 ‘완전한’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성찬식 때의 표현을 빌리면, 사람이 만든 그 빵과 포도주를 통해서 그리스도가 우리와 함께 계심을 증언하게 됩니다. 이와 같이 성경은 하나님의 산물이 아니라 인간의 산물이지만, 한계를 가진 그 인간의 언어를 통해서도 우리는 성령께서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4) 성경: 하나님의 말씀
성경을 성례전으로 보는 것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말의 뜻을 이해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줍니다. 기독교는 전통적으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겨왔습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말을 영어로 옮기면 “Word of God”입니다. 분명히 말하지만, “words of God”(하나님의 말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들(words of God)”이란 말은 성경의 모든 구절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암시합니다. 즉, 성경은 “하나님의 작품”(divine product)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기독교의 전통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들”(words of God)이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Word of God)이라고 불러왔습니다. 즉, word의 W를 대문자로, 그리고 복수가 아닌 단수로 표기해 왔습니다. 이는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words of God이 아니라 Word of God이라고 표기했다는 것은 Word를 글자 그대로의 뜻이 아니라 특수한 의미로, 즉 은유적인(metaphorical) 표현으로 사용했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말(word)이란 자기를 표현하는 수단입니다. 또 말은 나와 남 사이에 교량 역할을 하여 의사를 전달하고 소통하게 하는 수단이기도 합니다. 기독교 전통이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Word)이라고 표기한 것은 이런 뜻을 내포할 뿐만 아니라, 그 이상을 포함합니다. 먼저 성경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나타내는 수단입니다. 이를 신학 용어로는 “하나님의 계시”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성경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하면서, 하나님의 영이 오늘날에도 우리들에게 계속해서 말씀하시도록 하는 수단이기도 합니다.
이상을 요약하면, 기독교의 전통이 성경을 “하나님의 말들”(words of God)이라 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Word of God)이라고 불렀던 것은, 성경은 그 ‘기원’ (origin)에 있어서가 아니라 그 ‘기능’(function)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이렇듯 성경은 그 시작이 인간에게서 비롯된 책이지만, 그 지위와 기능에 있어서는 거룩한 책입니다.
과거의 렌즈 | 새로운 렌즈 | |
성경의 기원 | 하나님의 작품 (성서무오설, 축자영감설) 하나님‘의’ 이야기 | 하나님 체험에 대한 인간(고대의 두 공동체)의 응답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 |
성경의 권위 | 신적 권위(기원) 하나님의 말들 words of God 성서=거룩한 백과사전 | 거룩한 경전(지위) (기초문서, 정체성문서, 지혜전통) 하나님의 말씀 Word of God |
성경의 기능 | 교리와 윤리의 계시 (생활지침서, 사용설명서) | 성례전적 기능 (은총의 수단, 하나님 체험 매개체) |
성경 해석법 | 문자적-사실적 성서문자주의 진리/진실(true)=사실(fact) 사실적으로 참되다 | 역사적-은유적 진리/진실(true)>사실(fact) con(with)-text more-than-literal meaning 상호보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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