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마카 7,1.20-31; 루카 19,11ㄴ-28
+ 찬미 예수님
오늘은 성녀 체칠리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입니다. 라틴어 ‘첼룸’은 천국이라는 뜻인데요, ‘릴리아’가 백합이기 때문에 첼룸과 릴리아를 합치면 천국의 백합이라는 뜻이 됩니다. 또한 ‘라오스’는 ‘사람들’이라는 뜻인데, 첼룸과 라오스가 합쳐져서, ‘사람들에게 천국이라 불리는 체칠리아’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전승에 따르면 체칠리아 성녀는 발레리아노라는 사람과 약혼하였는데, 체칠리아의 영향으로 발레리아노도 개종했고, 동생인 티부르시오와 함께 순교했다고 전해집니다. 발레리아노는 체칠리아 성녀가 방에서 천사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을 보았는데, 천사가 장미와 백합으로 된 두 개의 월계관을 하나는 체칠리아에게 하나는 발레리아노에게 주었다고 합니다. 오늘 영성체 후 기도에서 ‘체칠리아에게 동정과 순교의 두 월계관을 함께 씌워 주셨으니’라고 기도하는데, 이 전승과 연관된 것으로 보입니다.
성녀는 3세기에 순교하셨는데, 모든 재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준 후 당신의 집을 성당으로 해 달라는 말씀을 남기셨고, 로마에 있는 ‘싼타 체칠리아 인 뜨라스떼베레’라는 성당이 원래 성녀의 집이었다고 전해집니다. 비올라 또는 오르간을 연주하시는 그림이 많이 그려졌고 음악의 수호 성녀로 공경받고 계십니다.
오늘 1독서에서는 일곱 형제와 어머니가 함께 체포되어 율법에 금지된 돼지고기를 먹으라는 강요를 받습니다. 결국 모든 아들들과 함께 어머니도 죽임을 당하는데요, 어머니는 아들들을 격려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에게 목숨과 생명을 준 것은 내가 아니다.” 여기에서 목숨으로 번역된 그리스어 ‘프네우마’는 숨 또는 영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너희에게 숨과 생명을 준 것은 내가 아니다”로 번역할 수 있는데, 이 숨은 하느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실 때 불어 넣어 주신 것입니다. 하느님의 숨은 사라지지 않는데, 우리가 불멸의 존재인 이유는 하느님의 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신약성경은 이 ‘프테우마’를 ‘영’이라는 뜻으로 씁니다. 즉 ‘성령’은 ‘거룩한 프네우마’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지난 주일 복음 말씀과 비슷한데요, 지난 주일은 마태오 복음에 나오는 탈렌트의 비유 말씀이었고, 오늘은 루카 복음에 나오는 미나의 비유 말씀입니다. 한 탈렌트는 노동자의 20년 품삯이지만, 한 미나는 100일의 품삯으로서, 미나는 탈렌트의 60분의 1정도에 해당하는 돈입니다. 그 외에도 두 복음 말씀에는 몇 가지 차이점이 있습니다만, 눈여겨볼 것은 두 복음에서 셋째 종의 말과 행동이 매우 비슷하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수건에 싸서 보관해 두었습니다. 주인님께서 냉혹하신 분이어서 가져다 놓지 않은 것을 가져가시고 뿌리지 않은 것을 거두어 가시기에, 저는 주인님이 두려웠습니다.”
신학교에서 신학생에게 가장 무서운 말이 ‘판단력 부족’이라는 말인데요, 왜나하면 신학생을 내보내 놓고 이유가 뭐냐고 물을 때, 그 사람의 프라이버시를 보호하기 위해 외부에는 ‘판단력 부족’이라고 말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판단력 부족’이라는 말을 들으면 ‘너 신학교 나가라’는 말처럼 들렸습니다.
그런데 이 셋째 종의 말을 보면 정말 판단력 부족입니다. “주인님, 죄송합니다. 제가 그간 주인님을 오해했나 봅니다. 저는 이것만이라도 잘 지키고 싶었습니다.” 이렇게 대답해도 모자랄 판에 “주인님은 냉혹한 분이어서, 가져다 놓지 않은 것을 가져가시고, 뿌리지 않는 것을 거두어 가시기에”라고 말합니다. 아니, 행동을 잘못했으면 말이라도 잘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지금 어쩌자는 겁니까?
그런데 이 종은 단순히 말을 잘못한 것이 아니라, 주인을 그렇게 바라보고 있던 시선 자체가 문제였습니다. 그리고 다른 종들이 열 미나, 다섯 미나를 버는 것을 보면 그들에게 물어봤어야 했고 상의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주인의 뜻을 모르는 것도 모자라 스스로 고립되어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단절했습니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라는 신비가는 “하느님은 우리가 당신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우리를 바라보신다”고 얘기했는데요, 우리가 하느님을 아버지로 바라보면 우리는 하느님의 아들, 딸이고, 주님으로 바라보면 그분의 소유, 그분의 백성이지만, 폭군으로 바라보면 노예가 됩니다. 그 노예 생활을 만들어 낸 것은 하느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입니다.
성녀 체칠리아와 1독서의 일곱 아들과 어머니는 하느님을 숨과 생명의 주인으로 보았기에 자신의 목숨을 바칠 수 있었습니다. 복음의 종은 냉혹한 분으로 보았고 노예처럼 살았습니다. 우리가 삶을 어떻게 살지는 하느님을 어떤 분으로 보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https://youtu.be/MYJWjmYuGeo?si=wN6NQNwiRnzrlIoB
* 샤를르 구노, 성녀 체칠리아 장엄미사 곡 중 '상투스'(거룩하시도다)
- 조르주 쁘레뜨르 지휘,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첫댓글 예전에 '마태오복음 탈렌트 비유'와 루카복음 미나의 비유'를 읽을 때면
늘 결과에 대한 평가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금은, 평가가 결과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결과를 내는 과정에 충실한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세번째 종은, 정말 아무것도 시도조차 하지 않았기에 비난 받음이 당연한데...
왜? 저를 많이 닮았을까요?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