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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권고 “주님의 말씀” 해설
“말씀”
엉뚱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저는 계시 헌장을 읽으면 꼭 성탄 구유가 떠오릅니다. 사실, 친구처럼 인간에게 말을 걸어오시는 하느님의 자애로우심이 가장 직접적으로 느껴지는 때는 바로 성탄 밤입니다. 계시헌장에서도 말하듯이,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의 완성이고 절정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주님의 말씀” 서론의 끝부분(5항)에서 베네딕토 16세 교황님은 말씀의 육화를 선포하는 요한 복음 서문을 이 문헌 전체의 기본 틀로 제시합니다.
그런데 이 서문에서 요한 복음서의 본문만이 아니라 그 복음을 쓴 제자, 바로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에게도 주목한다는 점은 의미가 깊습니다. “말씀”이라는 것을 넓은 의미로 이해할 때 거기에는 성경에 글로 적힌 말씀만이 아니라 주님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모든 체험,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그분과의 만남과 사귐이 모두 포함된다는 점에서 말입니다. 예수님의 제자인 요한은 그분의 사랑을 체험했고 그 체험을 우리에게 전달해 준 사람이며,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도 “말”만이 아니라 그 친교를 전달해 주고 우리가 그 친교를 함께 누리도록 이끌어주는 안내자가 됩니다.
말씀으로 신호를 보내시는 하느님
문헌의 제1부는 “하느님의 말씀(Verbum Dei)”이라는 제목으로 되어있습니다. 계시 헌장의 본래 제목이 바로 “하느님의 말씀(Verbum Dei)”이었지요. 사실 문헌 제1부는 많은 부분에서 계시헌장을 따르면서 여러 측면에서 더 깊이 발전시키고 있습니다. 눈에 띄는 점이라면, 계시헌장이나 그 이전의 신학에서처럼 계시라는 추상적 단어에서 시작해서 자연적 계시와 초자연적 계시 등에 대한 이론적 설명을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말씀”, “대화”라는 인격적인 개념들에서 시작하고 또한 영원으로부터 계신 그 말씀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시라는 점을 강조한다는 것입니다.
제1부는 처음부터 계시헌장을 인용하며 시작합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넘치는 사랑으로 마치 친구를 대하듯이 인간에게 말씀하시고, 인간과 사귀시며, 당신과 친교를 이루도록 인간을 부르시고 받아들이신다.”고 말하는 계시헌장 2항은, 계시에 대해 말할 때에 언제나 인용되는 유명한 구절입니다. 번역문에서는 드러나지 않지만 원문의 첫 단어는 하느님께서 “…하기를 원하셨다, …하고 싶으셨다.”는 것인데, 매우 중요한 단어입니다.
이 한 단어가,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어떤 의무에 의해서가 아니라 당신의 원의에 따라, 당신의 선하심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깊은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싶으셨습니다. 아주 인간적으로 표현해서, 우리와 사귀고 싶으셔서 우리가 당신을 알아챌 때까지 계속 우리를 향해서 신호를 보내셨던 것입니다.
그 모든 신호를 말씀이라고 한다면, “말씀”이라는 표현은 근본적으로는 공통된 의미를 지니면서도 여러 가지로 사용된다고 하겠습니다. “주님의 말씀” 7항에서는 이를 지칭하여, “하느님 말씀”이라는 표현이 유비적으로 사용된다고 말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2008년에 세계주교대의원회의를 마치면서 회의 참석자들이 발표한 메시지를 참조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메시지는 모두 4장으로 구성되는데, 자세한 내용을 지금 다루지는 않겠지만 각 장의 제목만 보아도 여기에서 “말씀”이라는 단어를 얼마나 넓은 의미로 사용하는지 볼 수 있습니다. 메시지 1장 제목은 “말씀의 소리 : 계시”이고, 2장은 “말씀의 얼굴 : 예수 그리스도”, 3장은 “말씀의 집 : 교회”, 4장은 “말씀의 길 : 선교”입니다.
그런데, “말씀”을 이렇게 넓은 의미로 이해할 때에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 넓은 의미의 “말씀”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신다는 점입니다. 요한 복음서의 서문에서 말하듯이, 말씀이신 그리스도는 한처음부터 계셨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다시 생각하기로 하고, “하느님의 말씀”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말씀은 이 세상 만물을 지탱하는 기초
먼저는 “자연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하늘은 하느님의 영광을 이야기하고 창공은 그분 손의 솜씨를 알리네.”(시편 19,2)라는 시편 구절이 떠오르지요. 작은 기계 하나도 사람이 잘 고안해서 만들어놓았기 때문에 비로소 어떤 목적에 맞게 작동할 수 있다면, 이 세상 전체가 하느님의 계획 없이 우연히 만들어졌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요? 날마다 해가 뜨고 지는 것을 보면서, 별들이 일정하게 하늘을 도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이 세상에 하느님의 지혜가 새겨져 있음을 알아봅니다.
이 세상의 만물이 하느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기에, 온 우주에는 하느님의 자취가 깃들어 있고 우리는 이성적인 능력으로도 그것을 알아보고 적어도 어느 정도는 하느님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혜서 13장에서는, 피조물의 아름다움과 웅대함을 보면서도 그것을 만드신 분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지탄합니다. “세상을 연구할 수 있을 만큼 많은 것을 아는 힘이 있으면서 그들은 어찌하여 그것들의 주님을 더 일찍 찾아내지 못하였는가?”(지혜 13,9)
인간 역시 하느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고, 더구나 인간은 하느님의 모습에 따라 만들어졌기에 이성과 자유를 지니고 있고 또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그러한 선물을 주셨다는 것을 인식할 수도 있습니다. 동물과 식물도 하느님의 말씀으로 만들어졌으나, 인간은 자기 자신 안에서 하느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진 업적을 알아보고 또한 하느님께서 사람의 마음에 새겨주신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다는 점에서 창조 안에서 유일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창조로 시작된 하느님과 세상의 사귐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이어집니다. 하느님은 역사 안에서 활동하시면서 인간에게 끊임없이 구원의 손길을 보내시며, 또한 예언자들을 통하여 당신 말씀을 선포하게 하심으로써 인간을 이끄십니다.
결국, 말씀은 바로 이 세상의 만물을 지탱하는 기초입니다. 세상 만물과 인간이, 그리고 그 인간의 역사가 하느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그 말씀을 바탕으로 살아가는 것이 바로 튼튼한 바위 위에 집을 짓는 것이 됩니다. 말씀에 귀를 막고 이 세상의 온갖 것들로 자기 자신을 가득 채우려고 할 때 인간은 결국 실망하게 될 것입니다. 선로를 벗어난 기차가 목적지에 도달할 수 없듯이, 말씀으로 창조된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벗어나서는 제 길을 갈 수 없고 완성에 이를 수도 없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
이렇게 포괄적인 의미를 지니는 “하느님의 말씀”은,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 한 분 안에 축약됩니다. “하느님께서 예전에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여러 번에 걸쳐 여러 가지 방식으로 조상들에게 말씀하셨지만, 이 마지막 때에는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히브 1,1-2).
이제 말씀은 목소리만이 아니라 얼굴을 지니신 분이 되십니다. 구약성경 전체에서 이미 시간과 공간의 제한된 조건 안에 사는 인간과 사귀려고, 그 인간에게 맞추어 당신 자신을 낮추셨던 영원하신 하느님은, 이제 우리가 직접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볼 수 있는 분(1요한 1,1-4), 우리 손으로 붙잡을 수 있는 작은 아기가 되시는 것입니다.
신학적으로 좀 더 숙고가 필요한 부분은, “말씀”의 이러한 다양하고 유비적인 의미를 요한 복음서 서문과 연결시켜 볼 때, 한편으로 하느님의 말씀이 과거에 다른 방식들로 우리에게 계시되어 오다가 마지막 때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최종적으로 계시되었다는 것과 다른 한편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한처음부터 계신 아버지의 말씀이셨다는 것의 연관,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완성되는 하느님 계획의 단일성에 대한 이해입니다.
문헌에서는 말씀의 그리스도론적 차원을 이전보다 더 강하게 부각시키려고 하는데, 현대에 이르러 구약과 신약의 관계, 예언과 성취의 관계에 대한 이해가 더욱 깊어지고 있는 것과 같은 선상에서 이러한 주제에 접근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교황권고 “주님의 말씀” 해설
‘영감’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듣던 제자들보다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더 많이 알아듣지요?” 작년 이맘때 제가 구약입문 수업시간에 했던 질문입니다.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학생들이 멀뚱멀뚱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아직도 많지만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주실 것이다.’(요한 16,12-13)라고 하셨는데, 성령께서 오셔서 2천 년 동안이나 일하셨잖아요.” 이것이 설명이었습니다.
성령께서 헛수고를 하셨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분명 제자들보다 예수님의 말씀을 더 많이 알아들을 것입니다. 그럴 것 같지요?
앞으로 여러 달 동안 우리는 이렇게 교회 안에서 활동하시는 성령에 대해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은 그 첫 번째 단계로, 성령의 작용으로 말씀이 사람이 되시고 또 인간의 언어로 기록된 성경이 생겨나기에 이른다는 것을 볼 것입니다.
성령의 ‘영감’
지난달에 우리는 창조질서를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시며 당신 자신을 알려주시던 하느님의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을 통하여 그분 안에 집약되었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 육화가 바로 성령의 힘으로 이루어집니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루카 1,35).
그리고 인간적인 계획에 따라서가 아니라 성령의 힘으로 사람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삶은 성령에 의하여 인도됩니다. 세례 때에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사랑하는 아들이심을 밝혀주신 분이 성령이시고, 예수님께서 지상생활을 마치시면서 약속하시는 분이 성령이시고, 부활하신 뒤에 제자들에게 부어주신 분이 성령이십니다.
그 성령께서 제자들을, 교회를 인도하시며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맡기신 사명을 수행하게 하십니다. 사도행전의 첫 장면들이 떠오릅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두려워서 문을 닫아걸고 있던 제자들은 성령을 받고는 “성령께서 표현의 능력을 주시는 대로”(2,4) 말을 하기 시작합니다.
예언자들을 통해서 말씀하셨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말씀하신 하느님은, 이제 성령의 힘으로 제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하느님의 말씀이 교회 안에 머무르게 되고, 마침내는 그 성령께서 말씀이 기록되도록 성경 저자들을 감도하시기에 이릅니다.
여기에서 작용하는 것이 성령의 ‘영감’입니다. 쉽지는 않지만 영감이라는 것을 나름대로 설명해 본다면, 인간의 언어를 통해 하느님의 말씀이 표현되도록 하시는 성령의 활동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오해를 일으킬 수도 있지만 좀 더 쉽게 말한다면, 인간의 언어는 껍데기고 그 안에 담긴 하느님의 말씀은 알맹이입니다.
사람이 그냥 자기 생각대로 말을 하고 또 자기 생각대로 기록을 하면, 그 말이라는 ‘껍데기’ 안에는 그 사람의 생각이 담기겠지요. 그런데 인간이 말을 하고 글을 쓰지만 그 안에 하느님께서 말씀하고자 하시는 것이 담기도록 작용하는 것이 성령의 영감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껍데기’라는 말은 그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껍데기는 소중한 알맹이를 담고 있기에 소중합니다. 인간의 언어는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도구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껍데기 속에서 알맹이를 알아보아야 합니다.
성경의 ‘진리’
동화책에 나오는 토끼와 거북이 이야기를 읽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어느 날 토끼가 거북이에게 말했습니다.”라는 구절이 나오겠지요. 자연과학적으로 역사적으로 논리적으로, 우리는 토끼가 거북이에게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토끼와 거북이 이야기는 분명 진리를 담고 있고 우리는 그것을 알아듣습니다.
성경의 경우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성경 저자들에게 작용하신 성령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하시는 것을 표현하고자 인간의 언어를 사용하십니다. 자신의 능력을 믿고 게으름을 피워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을 전달하려고 토끼와 거북이 이야기를 하듯이 말입니다.
이와 연관된 것이 성경의 ‘진리’입니다. 성경이 진리를 담고 있다는 것은 정말 당연한 말처럼 들리지요. 그런데 갈릴레이 시대에 성경 말씀을 근거로 지구가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태양이, 하늘이 움직여야 한다고 여겼던 이들은 어떻게 된 것이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껍데기’ 속에서 ‘알맹이’를 올바로 알아보지 못한 것입니다. 동화책에서 “토끼가 거북이에게 말했습니다.”라고 말할 때에, 이 안에 진리가 들어있다고 해서 토끼가 거북이에게 실제로 말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시면 되겠습니다.
어린아이에게 윤리를 가르치고 철학을 가르치기 이전에 동물들이 나오는 동화 이야기를 먼저 하는 것은, 그것이 어린아이가 알아듣기에 더 적합하기 때문입니다. 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고자 하시는 것, 한 줄로 줄인다면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걸 알아듣게 하려고 창세기의 그 전설 같은(?) 이야기들을 보게 하시고, 구약의 그 복잡한(?) 역사를 보게 하십니다. 알아듣게 한 줄로 말씀하시지 왜 이렇게 어렵게 말씀하시냐고요? 우리가 알아듣게 하려면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사람이 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했습니다.
교회 안에서 성경을 읽어야
이렇게 해서 다시 예수님과 그 제자들에게로 돌아갑니다. 이번에는 말씀을 듣고 읽고 알아듣는 제자들을 떠올립니다. 말씀의 육화가, 또 말씀이 기록되는 것이 성령 안에서 이루어졌다면 그 말씀을 알아듣는 것 역시 제자들에게 부어진 성령 안에서 이루어져야 하지요. 성령께서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주시는 것입니다(요한 14,26 참조). 바로 이것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들보다 예수님의 말씀을 더 많이 알아듣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교회의 전통과 아무런 관계가 없이, 마치 이 세상에서 최초로 성경 말씀을 읽는 사람처럼 성경을 읽는다면 그는 그 말씀을 많이 알아듣지 못할 것입니다. 물론 제자들보다 많이 알아들을 수도 없을 것이고, 말씀을 잘못 알아들을 가능성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 성령이 활동하신다는 것을 믿는다면, 우리보다 앞서 2천 년 동안 그 말씀을 보존하고 읽어온 교회 안에서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말씀은 외떨어져 존재한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이 기록되게 하신 성령과 함께 교회 안에서 전수되어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교황님의 말씀이 아니라 제 경험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성경을 공부하다 보니, 하면 할수록 모르겠다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성령이 그렇듯이, 영감이 그렇듯이, 하느님의 말씀은 인간이 다 깨달아 알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버릴 수 없는 것임을 절감합니다.
그런데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교회 안에서 성경을 읽고 연구하는 모든 사람들의 수고가 소중하게 보입니다. 누구 한 사람이 마치 구구단을 배우듯이 성경을 다 배워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그 큰 신비의 한 조각이라도 조금 더 알아들으려는 노력이 더욱 값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교회에 맡겨졌고 교회 안에서 전수됩니다. 그 말씀을 알아들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을 성령께서 비추시고, 이를 통하여 그는 전승의 주체가 됩니다. 그 자신이, 교회 안에서 물려받은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이해를 교회에 다시 전수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내가 성경을 펴고 읽을 때에 성령께서 나를 비추시어 그 말씀을 한 조각이나마 더 알아듣게 하신다면, 이를 통하여 교회는 주님의 말씀을 어제보다 더 많이 알아듣고 주님을 조금 더 알게 됩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역할은 이렇게 소중합니다.
“주님, 제가 당신 얼굴을 찾고 있습니다. 당신 얼굴 제게서 감추지 마소서”(시편 27,8-9).
* 안소근 실비아 - 성 도미니코 선교 수녀회 수녀. 교황청립 성서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가톨릭대학교와 한국가톨릭교리신학원에서 성서 히브리어를 가르치고 있다. 주교회의 천주교용어위원회 총무이다.
교황권고 “주님의 말씀” 해설
말씀하시는 하느님께 응답하는 인간
“갑돌이와 갑순이는 한마을에 살았더래요. 둘이는 서로서로 사랑을 했더래요….” 이 노래 가사를 뒷부분까지 기억해 보시기 바랍니다.
갑돌이와 갑순이는 서로를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둘 다 짝사랑이었습니다. 아마 그 사랑을 표현하려고 각자 나름대로는 여러 가지 방법을 써보았을지도 모릅니다. 그게 그렇게 뚜렷하지 않아서 서로 못 알아들었을 겁니다. 알아들었으면서 어쩔 수 없었던 것이 아니라면 말입니다.
그 사랑의 표현들을 알아들을 수 있었더라면, 그리고 거기에 응답할 수 있었더라면 노래가 그렇게 끝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짝사랑이 사랑이 되려면 바로 그것, 사랑을 알아듣고 응답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인간에게 먼저 말을 걸어오시는 하느님
먼저 필요한 것은 사랑을 표현하려고 보내는 신호를 알아보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하시는 ‘말씀’들도 사랑의 표현입니다. 전에 우리는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는 방법들을 보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창조하신 자연 질서를 통해서, 당신 백성과 함께하신 역사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경을 통해서 우리가 당신을 알 수 있게 해 주십니다. 그렇게 우리에게 다가오시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런데, 먼저 말을 걸어오는 분은 언제나 하느님이십니다. 갑돌이와 갑순이 사이의 대화는 둘 중에 누구라도 시작할 수 있겠지만,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대화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시던 때에 이미 시작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알아듣지 못하고 있었을 때에도 그분은 언제나 사랑의 신호를 보내고 계셨습니다.
창세기 1장에서 보듯이 모든 것은 하느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고 창조된 모든 것 안에는 하느님의 말씀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시편에서는 하늘과 달과 별들을 “당신 손가락의 작품들”이라고 부릅니다(시편 8,4). 그 손자국을 알아볼 수 있다면 그 달과 별은 우리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해주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말씀으로 창조된 모든 피조물들 가운데에서도 인간은 하느님과 비슷하게,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되었고(창세 1,26), 그래서 하느님의 말씀을 알아들을 수가 있습니다. 인간 편에서 아직 하느님을 찾아나서지 않았고 주파수를 맞추지 않았기에 그분께서 말씀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하고 있을 수는 있지만, 하느님은 처음부터 인간에게 당신의 말씀을 들을 수 있고 그 말씀에 응답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응답을 통하여 하느님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 하느님의 대화 상대자로 창조되었다는 것이 모든 피조물 가운데 인간이 지닌 특전입니다.
하느님과 대화하기를 거부하는 인간
그러나 때로는 인간이 스스로 귀를 막습니다. 신호를 보내시는 것을 알지만 그 말씀을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 말씀이 사랑의 표시인 줄을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면 내가 내 마음대로 살지 못할 것 같아서 듣지 않는 것입니다. 교황님은, 현대에 많은 이가 하느님은 인간의 문제들에서 동떨어져 계시며 오히려 인간의 갈망들을 희생시키고 또 인간의 자율성을 위협한다고 생각한다는 점을 지적하십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산다는 것이 인간의 발전을 가로막는다는 생각이 퍼져있는 것입니다. 거창하게 무신론적인 사상들을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느님 뜻대로 살려면 다른 사람을 위해 내가 죽어야 하고 하느님의 창조물인 자연을 보전하고자 편리함을 어느 정도 포기해야 하며 나에게 짐스러운 사람을 나의 형제로 받아들여 지고 가야 합니다. 손해 아닌가요? 꼭 그렇게 해야 하는가요?
사실 인간은 자신의 자유로 하느님과 대화를 거부할 수 있는 가능성도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친교를 가로막는 죄입니다. 모든 사랑의 대화가 그렇듯이 사랑의 신호를 보내시는 하느님은 인간에게 응답을 강요할 수는 없으십니다. 강요하는 것은 대화가 아니고 사랑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많은 경우 실제로 사람들에게 거부를 당하기도 하십니다.
이러한 모습은 바로 태초의 인간에게서도 알아볼 수 있습니다. 뱀은 하와에게, 선악과를 따먹으면 “하느님처럼” 되리라고 말합니다(창세 3,5). 하느님의 말씀을 어김으로써 인간이 지금의 위치보다 더 올라가서 더 완전하게 자신을 실현할 수 있으리라는 것입니다. 이 바벨탑의 유혹은 오늘에도 계속됩니다.
왜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려 합니까?
이러한 시대에 필요한 일이, 하느님께서 인간의 목마름에 응답하신다는 것을 깨닫고 또 그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네가 하느님의 선물을 알고 또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 하고 너에게 말하는 이가 누구인지 알았더라면, 오히려 네가 그에게 청하고 그는 너에게 생수를 주었을 것이다”(요한 4,10). 마음에 새겨보아야 할 부분입니다. 많은 사람이 그 물이 어떤 물인지를 모릅니다.
왜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려 합니까? 왜 성경을 읽고 공부하려 합니까? 지금 이 글을 읽는 분이시라면 아마 하느님의 말씀에 적어도 관심은 가지고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때에는, 취미생활을 하듯이 성경을 공부하고 아니면 다른 학문들을 할 때와 다를 것 없는 태도로 성경을 연구한다는 느낌을 갖는 경우가 없지 않습니다. 알고 싶어하는 욕구들은 매우 강하지만 그것이 삶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을 정말로 알아듣으려면, 그 말씀이 나의 삶을 비추는 체험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사실 저는 저보다 연세가 많으신 분들께 강의를 하는 것이 참 부담스럽습니다. 삶의 경험이 더 풍부한 그분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저보다 더 깊이 알아들으시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한번은 기말고사에서, 시험 문제를 열두 개쯤 미리 드리고 각자 두 개씩 선택하시라고 했습니다. 꽤 많은 분이 “욥기와 인간의 고통”이라는 주제와 “코헬렛, ‘허무로다 허무.’라는 말과 ‘인생을 즐겨라.’라는 말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 하는 주제를 택하셨습니다.
답안지를 읽으며 속으로 놀랐습니다. 많은 분이 그 질문들을 택한 것은, 삶 안에서 한 번씩은 큰 고통을 겪으셨고 성경 안에서 그 답을 찾아가고 있으셨기 때문입니다.
말씀으로 끊임없이 창조되어야 할 우리
그렇지만, 우리의 질문에 대한 성경의 응답은 언제나 신앙을 요구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가만히 앉아서 논리적인 추론을 머리로 받아들이게 하지 않고, 과학적으로 명백한 사실을 입증해 보이지도 않습니다.
다만, 우리가 말씀으로 창조되었기에 우리 자신을 깊이 들여다보면서 그 말씀이 우리 자신에게 상응한다는 것, 우리를 완성시켜 더 온전한 하느님의 모상이 되게 한다는 것을 발견할 따름입니다. 그러고는 믿음으로 그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처음에 우리는 말씀으로 창조되었습니다. 지금도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끊임없이 창조되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그분의 사랑으로 알아들어 그 말씀으로 하루하루의 삶이 엮어지게 할 때, 우리는 창세기의 진흙처럼 하느님의 손으로 빚어지는 것이겠지요. 그것이 바로 믿음으로 응답하여 말씀이 사람이 되시는 데에 협력하신 성모님의 모습이기도 했습니다.
우리에게도 같은 역할이 맡겨져 있습니다. 교황님은, 신앙을 지닌 모든 그리스도인은 어떤 의미에서 자신 안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수태하고 출산하는 것이라는 암브로시오 성인의 말씀을 인용하십니다. 말씀대로 살아가는 우리의 삶을 통해, 말씀은 오늘도 이 세상에 육화하시는 것입니다. 말씀은 오늘도 우리에게 응답을 요구합니다. 우리의 응답이, 우리의 삶이 없이는 그 말씀이 사람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교황권고 “주님의 말씀” 해설
성경을 읽는 교회 공동체
여러 해 전에, 요한 묵시록을 40년 동안 가르치시고 정년퇴임을 하시던 신부님께서 마지막으로 학생들과 함께 드린 미사에서 강론 때 하신 말씀이 떠오릅니다. 로마에서 교수신부님들 정년은 75세이고 학생들은 보통 30대였으니, 신부님 보시기에는 아직도 한참 ‘어렸을’ 제자들에게 남겨주신 말씀이었습니다.
그것은, 성경은 우리에게 주신 하느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그 가장 작은 부분 하나하나라도 있는 힘을 다 들여서 연구할 가치가 있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지금은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 모를 거라고, 그러나 나중에는 알게 될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일로 평생을 보내신 분의 말씀이었기에 그만큼 더 진실하게 다가왔습니다.
이번 달에는, 하느님의 말씀을 알아들으려고 노력하는 교회에 대해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교회의 살아있는 전통”
지난해에 “주님의 말씀”을 처음 읽으면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이 “교회의 살아있는 전통”이라는 표현이었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계시헌장 “하느님의 말씀” 사용되었던 표현이지만, 유난히 많이 강조되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이 문헌 전체에서는, 교회의 신앙 안에서 성경을 읽고 해석해야 한다는 것을 여러 차례 되풀이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원칙적으로 말한다면, 교회의 신앙을 전제하지 않고도 성경을 읽을 수는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든다면, 언어를 연구하는 사람은 성경의 고대 히브리어를 알려고 오직 그 언어적 측면에만 초점을 맞추어 성경을 읽을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신앙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역사학을 연구하는 사람도, 성경을 글자 그대로 역사서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옛 시대의 자료를 얻으려고 성경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때에 성경은 고대의 다른 문헌들과 특별히 구분되지 않을 것입니다. 성경을 하나의 문학작품으로 읽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닙니다. 사실 성경에서 어떤 책들은 문학적으로 상당히 훌륭한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성경을 읽는 것은 그 책을 ‘성경’으로서, 곧 거룩한 경전으로서 읽는 것은 아닙니다. 경전이 무엇인지 사전적으로 정의한다면 우리의 신앙에 기준이 되는 책들이지요. 앞에서 말한 여러 방법으로 성경을 읽는다면, 그때에 성경은 신앙의 규범이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경전이라는 것에 대해서 좀 더 근본적으로 생각해 본다면, 그 책들이 경전이 되고 신앙의 기준이 되는 것은 3월호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것이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된 하느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교회 공동체의 신앙으로
그렇다면 성경을 성경으로, 하느님의 말씀으로 올바로 읽고 알아들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를 위해서 무엇보다 먼저 전제해야 하는 것이 교회 공동체의 신앙입니다. 성경은 신앙의 책이고 신앙 안에서 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성서학을 하나의 학문으로 연구하는 사람들 편에서는 때로 의구심을 품기도 합니다. 신앙을 전제한다면 성경을 객관적으로 해석해 낼 수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신자 여러분은 그런 경우를 별로 접해보지 않으셨을 수 있겠지만, 더 좁게 말해서 주석학을 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신학적’이라는 말조차 비학문적이라고 생각해서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저와 같은 학년이었던 한 학생이 어떤 주제로 논문을 쓰겠다고 했더니, 지도교수가 “그건 좀 신학적이지?”라고 말했답니다. 부적절하다는 뜻이지요. 지금 교황님은 이러한 경향을 염두에 두고 계시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왜 성경 해석이 교회의 신앙을 전제해야 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성경이 처음 생겨난 것부터가 교회의 신앙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생겨나려면 먼저 하느님 편에서 당신 자신을 계시하셔야 했는데, 이것부터가 인간과 사귀려는 하느님의 사랑에서 이루어진 것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구약의 역사에서 비롯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교회의 첫 순간이 기록된 것은 신앙 안에서였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역사적 사실의 기록이 아니었습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어떤 사건들이 있었다고 할 때, 성경을 기록한 사람은 성령의 비추심에 따라 그 사건들을 하느님의 계시로 알아보고 그 신앙 안에서 그것을 기록하였습니다. 그래서 성경의 기록 안에는 신앙이 녹아 있습니다.
역사적 사건과 그에 대한 신앙, 인간적인 요소들과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계시가 서로 분리될 수 없이 결합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 성경을 신앙이라는 요소를 배제하고 해석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교황님은 “하느님의 말씀” 12항을 인용하시면서, “‘성령을 통해 쓰여진 성경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읽고 해석해야’ 하며, 주석가들, 신학자들, 그리고 하느님의 백성 전체는 사실 그대로 인간의 말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으로서 성경에 다가가야 합니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교황님께서 인용하신 “성령을 통해 쓰여진 성경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읽고 해석해야 한다.”는 문장을 “하느님의 말씀”에서 처음 읽었던 때에 그 말이 얼마나 좋았던지요. 성령은 성경을 썼던 저자들에게만 작용하신 것이 아닙니다. 지금 성경을 읽는 우리를 비추어주시는 것도 성령이시고, 그 성령이 없이는 성경은 올바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이런저런 방식으로 성경을 들여다보고 찔러보고 한다 해도 말입니다.
교황님은 계속해서, “하느님의 말씀”에서 성령 안에서 이루어지는 성경 해석을 위하여 제시했던 세 가지 원칙을 상기시키십니다. 그것은 첫째, 성경 전체의 일체성을 고려하면서 본문을 해석할 것, 둘째, 전체 교회의 살아있는 전통을 고려할 것, 셋째, 신앙의 유비를 고려하라는 것입니다.
성경 해석의 세 가지 원칙
이 세 가지 원칙 가운데 “전체 교회의 살아있는 전통을 고려할 것”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교회의 살아있는 전통이란 바로 교회 안에 머무르시는 성령의 작용으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 전체의 일체성”이라는 것을 쉽게 이해하려면, 성경의 한 구절을 문맥에서 떼어내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를 생각하시면 됩니다. 아주 단적으로 말해서, 이단으로 빠지는 지름길이지요. 사람들이 서로 대화를 할 때에도, 앞뒤 이야기를 듣지 않고 한 마디만 가지고 오해를 하면 바로 싸움이 나지요. 같은 원리이겠습니다.
사실 성 이레네오가 “신앙의 유비”라는 원칙을 제시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였습니다. “성경 전체의 일체성”이라는 것이 성경의 한 부분을 해석할 때에 성경 전체의 문맥을 고려해야 하는 것이라면, “신앙의 유비”라는 것은 성경 해석이 벗어나지 말아야 할 최소한의 기준 내지 범위를 한정해 주는 것이 교회의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예를 들어 성경의 한 구절을 알아들으려면, 먼저 바로 앞뒤의 문맥을 고려해야 하고 다음으로 동심원처럼 점점 범위를 넓혀가게 됩니다. 그 책 전체의 (예를 들어 마태오 복음서, 창세기 등) 문맥을 고려해야 하며, 구약과 신약 전체를, 또 교회의 전승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 가장 넓은 범위가 교회의 신앙인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교회의 신앙이 성경에 규범을 부여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신앙이 성경의 계시를 따라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잘못 해석할 위험이 없지 않다고 한다면 여기에 울타리를 쳐줄 수 있는 것이 교회의 신앙입니다. 성 이레네오는 영지주의자들에 맞서서 이러한 원칙을 제시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성경의 몇몇 단락만을 떼어내어 마음대로 해석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사적인 신앙이 아니고, 성령도 내 안에서만 활동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의 신앙이라는 강 속에서 층층이 쌓여 이루어진 것이 성경이라면, 그 안에서 성경을 읽는 것은 성경을 가장 깊이 이해하기 위한 길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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