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청제국을 멸망에 이르게 한사람이 서태후라면 나라의 기초를 다진이는 효장 문황후이다.
효장문황후는 청태종의 후궁으로 들어 왔다.그녀는 몽골출신으로 뛰어난 미인이며 지혜로운 여성이었다.
1636년 청태종은 만주의 팔기군을 이끌고 내려와 조선 인조의 항복을 받아내었다.이듬해 효장문황후는 청태종의 아들 복림을 출산한다.이때 청태종에게는 장성한 8명의 아들이 있었다.
1643년 청태종이 뇌출혈로 사망했다. 갑작스런 죽음이어서 후사에 대한 한마디 언급도 없었다.
후계를 놓고 청태종의 이복동생 도르곤과 청태종의 장자 호격이 정면 대립했다. 중원정벌을 눈앞에 두고 청나라는 내분으로 스스로 무너질 위기에 처했다.
이 때 만주족 특유의 의정제도가 놀라운 합의를 이끌어냈다.
후계 황제는 뜻밖에도 효장의 아들 복림이었다. 이제 여섯 살 꼬마이다.
코흘리개 소년이 총명해서 황제가 된 것이 아니다. 도르곤도, 호격도 상대가 즉위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절충안으로 선택된 추대였다.
정국은 불안정했지만 어찌됐든 청태종없는 세상에서 도르곤은 최고 실력자가 됐다. 효장은 도르곤을 찾아간다.어린 아들 복림이 황제의 자리를 보존할수 있도록 섭정해 줄것을 부탁한다.
최고 실력자 도르곤은 효장과 아들 복림을 거두어 복림이 훌륭한 황제로 성장하도록 든든히 지켜주는 금강역사가 된다.
만주족의 오랜 풍습인 형수취수 (형이 죽으면 형의 아내를 동생이 취하는 일)제도가 그때도 존재했기 때문에 효장을 차지하는 것이 흉한 일도 아니었다.
효장이 새 남편 도르곤의 여인이 된지 7년 복림이 장성해 친정을 하기 시작했다.
섭정 권력을 내놓은 도르곤이 사냥을 나갔다가 불의의 사고로 죽었다.
여인의 자존심을 내던지고 황제로 만든 아들이 순치황제로 알려진 복림이다. 그는 어머니 효장의 기구한 사연을 외면하듯 스물네살 나이에 9살된 아들 현엽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오대산으로 출가하였다. 유명한 순치황제 출가시는 복림이 출가하여 그의 심정을 읊은 시이다.
효장은 출가한 아들을 슬퍼할 겨를도 없었다.이제 손자 현엽을 지켜야 했다. 효장의 손자 현엽이 중국 오천년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군주로 평가받는 청나라 4대 강희황제이다.
효장문황후는 청나라를 반석위에 올려놓고 76세의 장수를 누렸다.육신을 떠나면서 그는 청태종릉에 합장하지 말고 손자 강희황제 곁에 묻어달라고 유언하였다
효장문황후는 청태종의 후궁에서 아들 복림을 청나라 3대황제로 옹립하고 최초로 자금성을 접수하여 대륙을 직접 통치하였다.손자 현엽을 위대한 군주 강희제로 키워 청나라를 반석위에 올려놓은 것이다.
서울 고궁 박물관에서는 만주족의 발상지 심양의 아침 특별전을 열고 있다.
청태조 누루하치와 청태종이 친정을 펼치던 궁궐이다.
대륙을 정벌하고 자금성으로 옮겨 갔지만 강희.옹정.건륭.가경제등은 만주족의 고향인 심양궁궐을 찾아 조상들을 받들었다.
청황실의 유물들은 청나라 황제들의 깊은 불심을 느낄수 있는 불교유물들이 대부분이다.
그들은 앞머리는 삭발하고 뒷머리는 세갈래로 꼬아서 댕기를 땋다.모자에는 부처를 모시고 가슴에는 백팔염주를 둘렀다.
그들은 지혜롭고 용맹한 문수보살의 아들.딸이란 뜻으로 스스로를 만주족으로 불렀다.문수보살의 산스크릿트 표현이 만주슈리이기 때문이다.
특별히 효장문황후 진영과 도르곤의 진영을 가까이 살펴보고 그들의 러브스토리가 역사를 어떻게 움직였는지 생각해본다.
사진 1번 청나라건국의 기초를 다진 효장문황후 진영이다.
사진 2번 순치황제 섭정왕 도르곤 진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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