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 사구게, 니까야에도 있었네!
우리나라 스님들의 법문을 들어 보면 금강경에서 단 한 발자국도 못 나가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거의 대부분의 선사들이 금강경의 한 구절 또는 사구게를 이용하여 법문을 펼치는데, 법문을 많이 듣다 보면 어느 스님이나 똑 같은 구절, 똑 같은 게송을 재차 언급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불교경전에 금강경만 있는 것일까.
불자들의 필독서
한자로 5,249자에 불과한 금강경에는 대승불교의 보살사상과 초기공사상이 압축되어 표현되어 있다. 하지만 그 뜻이 오묘하여 누군가 설명을 해 주지 않는 한 스스로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매번 법문을 들을 때마다 새롭고, 때로 법문하는 사람들의 근기에 따라 해석 또한 다양한 경우가 허다하다.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조계종의 소의경전이기도 한 금강경은 스님들 뿐만 아니라 불자들의 ‘필독서’이다. 불교교양대학에서 경전공부를 한다고 말하면 거의 대부분 금강경이 빠지지 않는데, 이는 금강경이 불교공부를 하는데 있어서 출가자와 재가자에게 있어서 선택이 아닌 ‘필수과목’처럼 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교에는 금강경 뿐만 아니라 수 많은 경전이 있다. 특히 부처님의 원음이 잘 담겨 있는 니까야에는 법구경이나 숫따니빠따등이 있는데, 모두 8만4천가지 법문으로 이루어져 있어 지혜의 창고와도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불교에서는 스님들 뿐만아니라 불자들 역시 금강경에서 한 발자국도 앞으로 못 나가고 있는 것은 금강경의 프레임에 갇혀 있다고 볼 수 있다.
금강경 사구게 네 가지
금강경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무엇일까. 아마도 사구게가 가장 많이 알려져 있을 것이다. 금강경에서 사구게는 대체로 다음과 같은 네 개가 가장 잘 알려져 있다.
금강경사구게
1) 凡所有相 皆是虛妄 (범소유상 개시허망 ) 2) 3)
4)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
위 네 개의 사구게는 금강경을 대표하는 문구로서 불자들에게 가장 많이 애송되고 있다. 그런데 이 들 사구게가 처음부터 금강경에 들어 있었던 것일까.
대부분의 불자들이 오로지 금강경만 공부하다 보니 이들 사구게가 금강경에서 시작된 것인 줄 안다. 하지만 금강경에서 조금 더 나아가 초기불교경전 즉, 니까야를 보면 그런 생각은 깨진다.
사례1, 여벌유자법상응사
금강경에 실려있는 사구게는 오리지날이 아니다. 금강경에 뗏목의 비유가 나오는데, 이는 맛지마니까야에 있는 알라갓두빠마경(Alagadd?pama Sutta, 뱀에 대한 비유의 경, MN22)에 있는 내용과 매우 유사함을 발견하였다. 다음의 내용을 보면 금강경의 내용과 거의 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수행승들이여, 어떻게 해야 그 사람이 그 뗏목을 제대로 처리하는 것인가?
수행승들이여, 그 사람은 저 언덕에 도달하였을 때 ‘이제 나는 이 뗏목을 육지로 예인해 놓거나, 물속에 침수시키고 갈곳으로 가면 어떨까?’라고 생각했다.
수행승들이여, 이와같이 해야 그 사람은 그 뗏목을 제대로 처리한 것이다.
이와 같이, 수행승들이여, 건너가기 위하여 집착하지 않기 위하여 뗏목의 비유를 설했다. 수행승들이여, 참으로 뗏목에의 비유를 아는 그대들은 가르침마저 버려야 하거늘 하물며 가르침이 아님것임에랴!
<맛지마니까야 MN22, 알라갓두빠마경(Alagaddupama sutta, 뱀에 대한 비유의 경),전재성님역>
금강경에 ‘如筏喩者 法尙應捨 何況非法(여벌유자 법상응사 하황비법)’이 있다. 이를 해석하면 “뗏목의 비유로 알아 들어서 물을 건넌 뒤에 뗏목을 놓고 가듯이 법에 대한 집착을 벗어야 하리니 하물며 법 아닌 것이야 말해 무엇 하리요”라는 의미이다. 이 부분과 관련하여 니까야의 내용과 거의 같음을 알 수 있다.
이 게송과 관련하여 니까야에서는 뗏목을 버려야 하는 이유가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바로 이런 점이 5,249자의 금강경과 다르다. 참고로 맛지마니까야는 무려 1,600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경전이다.
금강경과 맛지마니까야 금강경은 한자로 5249자이고, 맛지마니까야는 152경에 1,600페이지에 달한다.
무엇을 버려야 하나
금강경에서 뗏목의 비유를 잘못 해석하면 선법 그 자체를 버리라는 것으로 오해 할 수 있다. 그래서 선악에 걸림없이 ‘막행막식’하는 요인이 될 수 있고, 도덕적 ‘허무주의’에 빠질 수 있다.
이점에 대하여 전재성박사는 맞지마니까야 주석에서 “진리는 부처님의 말씀이고 그 진리를 올바르게 이해해서 실천하는 것이 진리를 버리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포기해야 될 것은 선한 진리에 대한 집착을 포기하라는 말이지, 선한 진리 그 자체를 포기하라는 말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선한 진리에 대한 집착이 뗏목과 같은 것이어서, 선법이 실천 되었을 때 더 이상 집착은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버려야 할 뗏목과 같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뗏목을 불살라버리거나 부수어 버리지 말라고 한다. 강가까운 곳에 예인해 놓거나 물에 침수 시켜 놓으라고 한다. 왜 부처님은 그렇게 말씀 하셨을까.
빠알리경전에 있는 예불문중의 하나인 라따나경(보배경)을 외웠다. 모두 17개의 게송으로 이루어져 있는 빠알리어 라따나경을 외우는데 거의 한 달 가까이 걸렸다. 외우는 과정에 있어서 프린트된 종이를 활용하였다. 모두 세 부를 출력하여 사무실에 하나, 차에 하나, 집에 하나두고 틈만 나면 외웠다.
도저히 외워지지 않을 것 같은 빠알리어문구를 마침내 모두 다 외우게 되었을 때 더 이상 프린트된 종이는 필요하지 않았다. 외우기까지 어떻게 하면 빨리 외울까 하는 집착이 매우 강하였으나 막상 다 외우고 나니 집착도 사라졌다. 이때 프린트물과 집착은 뗏목과도 같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 프린트물과 외워야 한다는 집착을 완전히 버릴 수 없다. 왜냐하면 몇 일만 암송을 중단해도 자꾸 잊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 때 다시 프린트물을 보고 막혔던 부분을 다시 되새김 함으로서 언제 어디서나 꺼내 볼 수 있도록 노력한다. 아마도 이런 점이 뗏목을 불살라버리거나 부수지 말고 물 가까이에 놓으라고 말한 것이 아닐까.
사례2, 일체유위법여몽환포영
금강경이 기원 전후에 성립되었다면, 니까야는 기원전 3세기 3차 결집후에 완성된 것으로 본다. 따라서 금강경에 있는 내용과 니까야에 있는 이야기가 중복 되어 있다면 이는 니까야에서 비롯된 것이라본다.
금강경에서 보는 사구게 역시 니까야에 실려 있는데, 불자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게송이 아마도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일 것이다. 그런데 일아스님의 '한권으로 읽는 빠알리경전'을 읽다가 다음과 같은 유사한 문구를 발견하였다.
물질은 거품 덩어리 같고 느낌은 물거품 같고 지각은 아지랑이 같고 형성은 파초와 둥지와 같고 의식은 마술과 같다. 이와 같이 태양의 후예가 가르치셨네.
(상윳따 니까야 :21 칸다 상윳따 95, 일아스님의 ‘한권으로 읽는 빤알리경전’에서)
상윳따니까야에서 오온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색수상행식을 거품, 물거품, 아지랑이, 파초둥지, 마술에 비교하여 설명한 것이다. 이를 금강경에서 ‘일체 현상계의 모든 생멸 법은 꿈과 같고, 환상과 같고 물거품과 같고, 그림자 같으며, 이슬과도 같고 번개와도 같으니 응당 이와 같이 관해야한다”라고 설명한 것과 유사하다.
차이가 있다면 니까야에서는 ‘오온’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활용하였고, 금강경에서는 유위법 즉 ‘현상’을 설명한 것이 다르다. 하지만 오온이나 유위법이나 모두 ‘형성되어진 모든 것은 덧 없다’는 것에 있어서는 의미가 같다고 볼 수 있다.
사례3, 응무소주이생기심
금강경 사구게중에 또 하나 유명한 것이 ‘應無所住 以生其心(응무소주 이생기심)’에 관한 게송이다. 이 게송은 남종선의 시조라 불리우는 혜능선사와 매우 관련이 깊다. 일자무식 혜능선사가 이 게송을 듣고 바로 깨달았다고 하는데, 이 게송 역시 금강경이 오리지날이 아니라는 것이다.
‘응무소주 이생기심’에 관한 단순한 해석은“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생각을 내라”고 되어 있지만, 별도의 해설을 해 주기 전에는 진정한 뜻을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이에 대하여 향봉스님은 “한 생각이 일어났거든 그것에 너무 집착하지 말라”로 바꿔보자고 어느 인터넷불교신문에서 말하였다. 마음이라는 것이 저절로 일어났다가 사라질 뿐인데, 일어난 불선한 마음에 너무 집착하지 말자는 이야기이다.
이는 마음을 항상 현재에 놓자는 말과 같다. 또 다른 말로 ‘지금 여기’에서 알아차리자는 말과 같다. 그런데 이와 유사한 이야기를 불교TV 사이트에서 들었다. 정신과 전문의 ‘전현수박사’가 진행하는 ‘마음테라피’가 그것이다. 그 강좌에서 전박사는 초기경전을 예를 들어 설명하였는데 다음과 같다.
지나간 과거를 슬퍼하지 않고 오지 않은 미래를 열망하지 않고 현재에 충실하기 때문에 얼굴빛은 그렇게 평온하다네.
<상윳따니까야1, 데와따 상윳따, 아란냐경(Aranna Sutta, 숲속의 경)>
마음이 과거에 가 있으면 후회와 회한, 아쉬움이 주류를 이룬다. 행복했던 순간보다 후회스럽고 아쉬운 것이 더 많기 때문에 마음이 과거에 가 있으면 항상 괴롭다는 것이다. 반면 마음이 미래에 가 있으면 어떨까. 역시 괴롭기는 마찬가지이다. 마음이 미래에 가 있으면 항상 근심과 걱정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음이 항상 현재에 머물러 있다면, 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래에 대한 걱정이 없어서 숲속의 수행자처럼 하루 한끼만 먹어도 얼굴빛이 맑고 평온하다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초기경전의 내용과 유사한 것이 후대에 편찬된 금강경에서 볼 수 있는 유명한 사구게중의 하나인 ‘應無所住 以生其心(응무소주 이생기심)’과 매우 유사하다는 것이다.
사례4, 약이색견아이음성구아
금강경의 사구게중에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약이색견아 이음성구아 시인 행사도 불능견여래)’가 있다. 이 게송 역시 초기경전인 니까야에 비슷한 문구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불교TV사이트에서 ‘아상가교수’의 강의를 듣다가 위 사구게의 원형이라여겨지는 이야기를 들었다. 강의 내용중의 일부를 녹취하였는데 다음과 같다.
붓다의 제자중 와깔리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와깔리는 붓다의 용모에 반해서 줄곧 부처님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와깔리에게 물어 볼 수 밖에 없으셨겠지요.
“왜 내 몸만 바라보지요? 내 육신을 보지말고 나의 가르침을 보세요. 가르침을 보는 것이 진정 저를 보는 것입니다.”
(아상가교수, 불교영어도서관특강, 근본불교의 가르침, 제2강 불자가 된다는것의 의미_)
부처님의 제자중에 왁깔리(Vakkali)비구가 있었는데, 붓다의 용모에 반하여 가르침을 듣기 보다 부처님의 얼굴만 쳐다 보고 있다는 내용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자신의 육신을 보지 말고 자신의 가르침에 주의를 집중하라고 말하는 장면이다.
아상가교수의 명품강의
아상가교수는 스리랑카의 불교학 교수이다. 불교TV사이트에서 강의한 내용을 보면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에 대한 진수를 보여 주는 것 같다. 그런 아상가 교수의 강의는 명품강의인데, 출가자와 재가자 할 것 없이 반드시 들어야할 이 시대의 최고의 명강의라 생각한다. 참고로 아상가교수의 강의에 대하여 링크를 걸어 놓았다.
아상가교수의 근본불교의 가르침
제8강 부처님 가르침의 사회적 적용 및 현대 사회와의 관련성 제7강 불교명상 제6강 업과 재생 제5강 연기(緣起) 제4강 사성제의 가르침 (2) 제3강 사성제의 가르침 (1) 제2강 불자가 된다는것의 의미 제1강 부처님의 생애
(출처: 불교TV, 불교영어도서관특강, 근본불교의 가르침)
아상가교수는 강의에서 부처님의 제자중의 하나인 와깔리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왁깔리(Vakkali)를 찾아서
그런데 왁깔리비구 이야기는 금강경에 나오는 게송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약이색견아 이음성구아 시인 행사도 불능견여래)’와 매우 유사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와깔리경은 어떤 것일까.
‘와깔리’가 나오는 경을 찾기 위하여 키워드로 인터넷검색을 하여 보았으나 찾을 수 없었다. 여러번 시행착오를 거친 끝에 와깔리가 아니라 ‘왁깔리(Vakkali)’임을 알고 검색하자 원하는 자료를 찾을 수 있었다.
왁깔리는 ‘상윳따니까야 왁깔리경’과 ‘법구경의 381번 게송의 인연담’에 등장한다. 상윳따니까야와 법구경은 부처님당시의 가르침이 고스란히 담겨 있어서 초기경전중에서도 가장 ‘고층’에 속한다. 이는 금강경 보다 성립연대가 훨씬 더 빠르기 때문에 오리지날은 초기경전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상윳따니까야에 나오는 왁깔리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법을 보는 자는 나를 본다
전재성박사가 역주한 상윳따니까야에 따르면 왁깔리는 사왓띠의 바라문 가문에서 태어나 세 가지 베다에 능통했다고 한다. 그런 왁깔리는 부처님의 외모에 반하여 마침내 부처님이 계시는 곳으로 출가하여 비구가 되었다.
그런데 왁깔리는 출가한 후에도 담마를 공부하기 보다 부처님의 용모를 처다 보는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런 왁깔리에게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왁깔리여, 그만두어라. 나의 부서져 가는 몸을 보아서 무엇 하느냐? 왁깔리여, 법을 보는 자는 나를 보고 나를 보는 자는 법을 본다. 왁깔리여, 참으로 법을 보면 나를 보고 나를 보면 법을 본다.
(상윳따니까야 바깔리경-Vakkali Sutta,SN22.87, 전재성님역)
왁깔리경(Vakkali Sutta).docx 왁깔리경_Vakkali Sutta.pdf
이것이 부처님과 왁깔리의 대화 가운데 인구에 회자되는 유명한 구절이라 한다.이를 빠알리어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yo kho vakkali dhammam passati so mam passati, yo mam passati so dhammam passati. dhammam hi vakkali passanto mam passati mam passanto dhammam passati.
이 게송은 금강경에서 “만약 형상으로 나를 보거나 음성으로 나를 구하면 이 사람은 삿된 도를 행함이니 능히 여래를 보지 못한다”와 매우 유사한데, 겉모습에 집착하지 말고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라는 뜻이다.
법구경에서도
왁깔리와 부처님의 대화에 대한 이야기는 법구경에서도 등장한다. 법구경 인연담에 따르면 왁깔리는 나이 스무살 때 사왓띠에서 탁발하시는 부처님의 모습을 보고 한 눈에 반하였다. 그래서 항상 “저렇게 거룩하신 분을 항상 바라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생각한 것이다.
마침내 비구가 된 박깔리는 항상 부처님과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아서 부처님의 용모를 원없이 바라 보았다. 그는 부처님의 용모만 바라볼 뿐 공부를 소홀히 하였다. 그는 자신의 모든 시간을 부처님을 우러러 보는 일에 다 바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사실을 안 부처님은 적당한 시간이 되자 “왁칼리 빅쿠여, 소위 여래의 몸이라고 불리우는 이것은 온갖 부패물로 가득 찬 것에 지나지 않으니라. 네가 이 몸만을 일심으로 바라봄으로써 무슨 이익이 있겠느냐? 왁칼리여, 담마를 보는 자가 진실로 여래를 보느니라”라고 말 하였다.
부처님의 경책에 박깔리는 마침내 크게 깨달아서 아라한이 되었는데, 부처님은 그러한 공덕을 찬탄하여 다음과 같은 게송을 읊었다고 한다.
빅쿠로서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해 신심이 깊고 기쁨이 가득하면 닙바나의 고요함에 이르러 모든 현사의 조건들을 다스려 행복하리라. (법구경 281)
법구경인연담-왁칼리 테라 이야기 (게송 381).docx 법구경인연담-왁칼리 테라 이야기 _게송 381.pdf
왁깔리는 부처님의 아름다운 모습에 매료 되었다. 32상80종호로 표현되는 신체적 조건만을 보고 감탄한 것이다. 그러다보니 부처님이 법문을 할 때 법문의 내용은 들어오지 않고 줄곧 부처님만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부처님의 말씀하는 가르침을 받아 들여 내것으로 만들어야 하는데, 공부는 뒷전이고 그저 모습만 바라 본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왜 내 몸만 바라보지요? 내 육신을 보지말고 나의 가르침을 보세요. 가르침을 보는 것이 진정 저를 보는 것입니다.”라고 말한 것이다.
“왜 내 몸만 바라보지요?”
왁깔리 비구처럼 몸만 보고 마음을 읽지 못한 경우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큰 차이가 없을 것이다. 누구든지 미모와 몸매등 뛰어난 용모에 현혹 되어 본질을 놓쳐버리기 쉽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특히 이미지관리를 잘하는 정치인에게서 볼 수 있다.
젊고 잘생기고 매력있는 사장후보에게 표를 몰아 주었지만, 정작 결과를 보면 기대에 크게 미치지 못한 경우가 있다. 또 잘 살게 해 주겠다고 말하는 대통령 후보에게 표를 몰아 주었지만 더 못살게 된 경우도 있다.
이 모두 얼굴과 말에 의한 이미지에 속아 넘어간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래서 금강경에서 말하기를 “만약 형상으로 나를 보거나 음성으로 나를 구하면 이 사람은 삿된 도를 행함이니 능히 여래를 보지 못한다”라고 하였다. 이는 이미지에 속지 말고 본질을 꿰뚫어 볼 것을 주문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법사나 스승이 강의 할 때 얼굴만 쳐다 보면 어떻게 될까. 아마도 내용은 하나도 들어 오지 않을 것이다. 이런 현상에 대하여 금강경에서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라는 사구게로 표현하였고, 이 보다 더 고층인 상윳따니까야에서는 "왁깔리여, 그만두어라. 나의 부서져 가는 몸을 보아서 무엇 하느냐? 왁깔리여, 법을 보는 자는 나를 보고 나를 보는 자는 법을 본다.”’라고 하였다.
하지만 가장 마음에 와 닿는 법문은 이를 현대어로 표현하여 설명한 아상가교수의 “왜 내 몸만 바라보지요? 내 육신을 보지말고 나의 가르침을 보세요. 가르침을 보는 것이 진정 저를 보는 것입니다.”라고 말한 것이라 여겨진다.
금강경의 프레임에서 벗어나기를
초기불교의 전통을 잘 간직하고 있는 테라와다불교 전통에서는 3차 결집후 완성된 빠알리삼장을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대승불교전통에서는 대승보살사상을 구현하기 위하여 별도의 경전을 편찬하게 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초기불교경전에서 사용되던 문구와 비유, 게송등을 가져가 변형하여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오로지 대승경전만을 공부하던 불자들은 유명게송이 모두 대승경전에서 비롯된 오리지날인 것인줄 알고 있다. 그러나 최근 초기불교경전이 번역되어 유통됨에 따라 대부분의 유명게송이나 문구가 니까야에서 유래하고 있다는 사실이 하나씩 둘씩 밝혀 지고 있다. 그런면으로 보았을 때 이제 스님들과 불자들은 금강경의 프레임에서 벗어나 초기불교경전을 공부할 때가 되었다.
2011-09-18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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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 고뇌의 강을 건너 원문보기 글쓴이: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