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화 따라 읽기 이건희 에세이 (셋) 반도체 사업의 시작
내가 기업 경영에 몸담은 것은 66년 동양방송에서부터였다. 처음 입사한 그때부터 지금까지 많은 어려움을 겪고 결단의 순간을 거쳤지만, 지금 와서 보면 반도체 사업처럼 내 어깨를 무겁게 했던 일도 없는 것 같다.
사실 나는 어려서부터 전차와 자동차 기술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일본 유학 시절에도 새로 나온 전자제품을 사다 뜯어보는 것이 취미였다. 수많은 전자제품을 만져보면서 나는 자원이 없는 우리나라가 선진국 틈에 끼어 경쟁하려면 머리를 쓰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특히 73년에 닥친 오일 쇼크에 큰 충격을 받은 이후 한국은 부가가치 높은 하이테크 산업에 진출해야 한다는 확신을 가졌다.
74년 마침 한국반도체라는 회사가 파산에 직면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무엇보다도 ‘반도체’라는 이름에 끌렸다. 그동안 내 나름대로 첨단 산업을 물색하면서 반도체 사업을 염두에 두고 있던 중이었다. 시대 조류가 산업사회에서 정보사회로 넘어가는 조짐을 보이고 있었고, 그 중 핵심인 반도체 사업이 우리 민족의 재주와 특성에 딱 들어맞는 업종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우리는 ‘젓가락 문화권’이어서 손재주가 좋고, 주거생활 자체가 신발을 벗고 생활하는 등 청결을 중시한다. 이런 문화는 반도체 생산에 아주 적합하다. 반도체 생산은 미세한 작업이 요구되고 먼지 하나라도 있으면 안 되는, 고도의 청정 상태를 유지해야 하는 공정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은 사실 일본과 큰 차이가 없지만 내가 착안한 것은 식생활 문화였다. 우리는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숟가락을 사용한다. 찌개와 탕을 먹기 위해서다. 밥상 한가운데 찌개나 탕을 놓고 공동으로 식사한다. 그것은 결국 팀워크가 좋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이 점에서 일본에 비해 우리에게 강점이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한국반도체를 실제로 조사해 보곤 실망이 컸다. 이름만 반도체지 트랜지스터나 만드는 수준이었다. 언제 LSI(대규모 집적회로), VLSI(초대형 집적회로)를 만들 수 있을지 알 수 없었고, 더구나 한미합작이어서 인수한다고 하더라도 여러 제약이 많을 것으로 예상했다.
상당한 고민 끝에 인수를 결심했다. 전자 산업뿐만 아니라 자동차, 항공기 등의 분야는 핵심부품인 반도체 기술 없이는 불가능한데다, 한국반도체를 종자(種子)로 국내 하이테크 산업에 발판을 마련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당시 경영진은 TV 하나 제대로 못 만드는 형편에 최첨단으로 가는 것은 너무 위험하고 시기상조라고 하면서 회사 인수에 강하게 반대했다. 결국 나는 그해 사재를 털어 내국인 지분을 인수했다.
반도체 사업 초기는 기술 확보 싸움이었다. 선진국에서 기술을 들여와야 하는데 그것이 쉽지 않았다. 오일 쇼크의 여파로 각국이 기술 보호주의를 내세우고 있었고, 특히 미국은 일본의 산업 스파이가 반도체 기술을 훔쳐갔다며 우리에게까지 노골적으로 적대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선진국과 기술 격차가 크고 막대한 소요 자금, 라이프사이클이 짧은데 따르는 위험성, 전문인력 부족 등 당시 우리 실정은 사면초가와 다름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서든 기술을 확보해야 했다.
일본 경험이 많은 내가 나서서 반도체 공장과 일본을 오가며 기술 확보에 매달렸다. 거의 매주 일본으로 가서 반도체 기술자를 만나 그들로부터 조금이라도 도움될 만한 것을 배우려고 노력했다. 지금 와서 얘기지만 그때 일본 기술자를 그 회사 몰래 토요일에 데려와서 우리 기술자들에게 밤새워 기술을 가르치게 하고, 일요일에 보낸 적도 많았다.
그런 노력 끝에 81년 초 컬러TV용 색(色) 신호 IC를 개발했다. 이는 트랜지스터나 만들던 기술 수준을 한 차원 올려놓은 것으로 VLSI 기술 개발의 발판을 마련했다.
처음에는 반도체 사업 진출에 주저하던 선친도 관심을 보여 적극 지원하기 시작했다. 선친은 82년에 27억 원을 들여 반도체연구소를 건립했고 83년에 마침내 반도체 사업 진출을 공식 선언했다. 구멍가게 같은 공장에서 개인사업으로 시작한 반도체가 10년 만에 삼성의 핵심 사업의 하나로 인정받은 것이다.
이때부터 삼성은 전문가들의 예상을 뒤엎고, 영하 15℃의 혹한 속에서 6개월 만에 기흥공장을 완공하고 일본이 6년이나 걸려 개발한 64K D램을 6개월 만에 개발했다. 이후로 미국과 일본의 반도체 업체를 따라잡기 위해 전력을 다했고, 마침내 반도체 사업을 시작한 지 20년 만인 93년에 메모리 분야에서 세계 정상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