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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비스님의 금강경 핵심 강좌 제7회 ( 제6.정신희유분 )< 바른 믿음은 희유하다>
제6. 정신희유분
이 시대에 있어서 올바른 믿음을 갖기란 희유한 일이다.
<바른 믿음은 희유하다>
모든 것을 다 드러내어서 사람들로 하여금 남김없이 알게 하였다. 그래서 더욱 어렵고 희유한 일인 것이다. 눈앞에 보이는 저것은 부처가 아니다. 그러므로 눈앞에 보이는 저 모든 것이 다 여래다. 이 도리를 바로 믿어 안다는 것은 참으로 희유한 일이다. 기쁘고 즐거운 일이다. 상에 매달리지 않으면 무한히 자유로울 수 있다. 상에 집착하지 않으면 우주적인 삶을 살 수가 있다. 법이니 진리니 하는 것에도 매달릴 일이 아니다. 하물며 법이 아니고 진리가 아닌 것에야 말해 무엇 하겠는가. 그러므로 부처님은 “나의 설법을 물을 건널 때만 필요로 하는 뗏목처럼 알라.”라고 하셨다. 이렇게 믿고 이해하는 지혜의 삶이란 과연 어렵고 희유한 것인가.
6. 정신희유분(제6 깊은 믿음)
수보리 백불언 세존 파유중생 득문여시언설장구 생실신 부
須菩提 白佛言. 世尊 頗有衆生 得聞如是言說章句 生實信 不.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습니다.“세존이시여 이와같은 말씀을 듣고 진실한 믿음을 내는 중생들이 있겠습니까?”
불고 수보리 막작시설. 여래 멸후 후오백세 유지계수복자 어차장구 능생신심 이차위실.
佛告. 須菩提 莫作是說 如來 滅後 後五百歲 有持戒修福者 於此章句 能生信心 以此爲實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말 하지 말라. 여래가 열반에 든 오백 년 뒤에도 계를 지니고 복덕을 닦는 이는 이러한 말에 신심을 낼 수 있고 이것을 진실한 말로 여길 것이다.
당지 시인 불어 일불이불 삼사오불 이종선근
이어무량 천만불소 종제선근
當知 是人 不於 一佛二佛 三四五佛 而種善根
已於無量 千萬佛所 種諸善根
이 사람은 한 부처님이나 두 부처님 서너 다섯 부처님께 선근을 심었을 뿐만 아니라 이미 한량없는 부처님 처소에서 여러 가지 선근을 심었으므로
문시장구 내지 일념생 정신자.
聞是章句 乃至 一念生 淨信者
이 말씀을 듣고 잠깐이라도 청정한 믿음을 내는 자임을 알아야 한다.
수보리 여래 실지실견 시제중생 득여시무량복덕
須菩提 如來 悉知悉見. 是諸衆生 得如是無量福德.
수보리여! 여래는 이러한 중생들이 이와 같이 한량없는 복덕 얻음을 다 알고 다 본다.
하이고 시제중생 무부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무법상
역무비법상
何以故 是諸衆生 無復我相 人相 衆生相 壽者相. 無法相
亦無非法相
왜냐하면, 이러한 중생들은 다시는 자아가 있다는 관념, 개아가 있다는 관념, 중생이 있다는 관념, 영혼이 있다는 관념이 없고, 법이라는 관념이 없으며 법이 아니라는 관념도 없기 때문이다.
하이고 시제중생 약심취상 즉위 착아인중생수자. 약취법상 즉착아인중생수자
何以故 是諸衆生 若心取相 卽爲 着我人衆生壽者. 若取法相 卽着我人衆生壽者
왜냐하면, 이러한 중생들이 마음에 관념을 가지면 자아, 개아, 중생, 영혼에 집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법이라는 관념을 가지면 자아,개아,중생,영혼에 집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이고 약취비법상 즉착아인중생수자
何以故 若取非法相 卽着我人衆生壽者
왜냐하면 법이 아니라는 관념을 가져도 자아. 개아. 중생,영혼에 집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시고 불응취법 불응취비법
是故 不應取法 不應取非法.
그러므로 법에 집착해도 안 되고 법 아닌 것에 집착해서도 안된다.
이시의고 여래상설 여등비구 지아설법 여벌유자. 법상응사 하황비법
以是義故 如來常說 汝等比丘 知我說法 如筏喩者. 法尙應捨 何況非法.
그러기에 여래는 늘 설했다. 너희 비구들이여! 나의 설법은 뗏목과 같은 줄 알아라. 법도 버려야 하거늘 하물며 법 아닌 것이랴!”
第六 正信希有分
제육 정신희유분
第六 正信希有分 (二. 斷因果俱深無信疑)
제육 정신희유분
須菩提가 白佛言하사대
수보리 백불언
世尊하 頗有衆生이 得聞如是言說章句하사옵고 生實信不잇가
세존 파유중생 득문여시언설장구 생실신부
佛이 告須菩提하사대 莫作是說하라
불 고수보리 막작시설
如來滅後後五百歲에 有持戒修福者가 於此章句에 能生信心하야 以此爲實하리니
여래멸후후오백세 유지계수복자 어차장구 능생신심 이차위실
當知是人은 不於一佛二佛三四五佛에 而種善根이라
당지시인 불어일불이불삼사오불 이종선근
已於無量千萬佛所에 種諸善根하야 聞是章句하고 乃至一念生淨信者니라
이어무량 천만불소 종제선근 문시장구 내지일념 생정신자
須菩提야 如來가 悉知悉見하노니 是諸衆生이 得如是無量福德이니라
수보리 여래 실지실견 시제중생 득여시무량복덕
何以故오
하이고
是諸衆生이 無復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하며 無法相하며 亦無非法相이니라
시제중생 무부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 무법상 역무비법상
何以故오 是諸衆生이 若心取相하면 則爲著我人衆生壽者니
하이고 시제중생 약심취상 즉위착아인중생수자
何以故오 若取法相이라도
하이고 약취법상
卽著我人衆生壽者며 若取非法相이라도 卽著我人衆生壽者니라
즉착아인중생수자 약취비법상 즉착아인중생수자
是故로 不應取法이며 不應取非法이니라
시고 불응취법 불응취비법
以是義故로 如來가 常說호대 汝等比丘가 知我說法을 如筏喩者라하노니
이시의고 여래 상설 여등비구 지아설법 여벌유자
法尙應捨어든 何況非法가
법상응사 하황비법
第六 正信希有分
제육 정신희유분
그다음 제육 정신희유분(正信希有分)입니다.
‘정신희유분(正信希有分)’, 참, 우리보고 뭔가 마음에 새기게 하죠.
‘바른 믿음은 희유하다’
그렇습니다. 참 바른 믿음은 쉽지 않습니다. 내가 그동안 이렇게 주욱 살아오면서 보니까 뭐 수십 년 불교에 몸 담고, 불교 경전도 아주 잘 알아요. 다른 사람들에게 많이 가르쳐. 저를 포함해서입니다 이거는. 딴 사람에게 많이 가르쳐. 경전번역도 많이해. 그러면서 정작 불교를 아느냐, 불교를 아느냐 라고 생각했을 때 이건 또 아닌 거야. 이 정신(正信)이란 말은 제대로 된 불교를 아는 사람, 이건 뭐 유식무식하고 관계없습니다.
또 이제 뭐 승랍이 낮다 높다 이거 하고도 관계없고, 승속에도 관계없어요, 사실은. 관계없이 제대로 정말 불법에 대한 그런 그 마음이 있는가? 불법을 제대로 이해하려고 하는가? 불법을 정말 애착하는가? 불법을 진정 사랑하는가? 이런 문제가 딱 봉착하면요 그 사람 경력하고 아무 상관없어요. 그 사람 지식하고도 아무 상관 없는 문제더라구요.
‘정신희유(正信希有)’, 차암!~ 바른 믿음은 희유하다!
정신희유분(正信希有分)!
第六 正信希有分
제육 정신희유분
須菩提가 白佛言하사대
수보리 백불언
世尊하 頗有衆生이 得聞如是言說章句하사옵고 生實信不잇가
세존 파유중생 득문여시언설장구 생실신부
佛이 告須菩提하사대 莫作是說하라
불 고수보리 막작시설
須菩提가 白佛言하사대 世尊하
수보리 백불언 세존
수보리가 석가모니부처님께 사뢰되, “세존이시여!
‘파유중생(頗有衆生) ’파(頗)자 이게 별 글자도 아닌데 늘 걸리죠. 많은 중생들이 있어서, 이렇게 이해하면 됩니다. 자못· 파(頗)자인데 ‘약간’, 또 경전에서 ‘약간’이란 말은 ‘많다’는 뜻이에요, 보면은. 대개 그런 뜻이라. ‘작은’ 뜻으로 우리 국어에는 약간하면‘조금’이런 뜻인데 ‘많다’는 뜻이에요, 대개 보면은.
頗有衆生이
파유중생
이것도 많은 중생이 있어서,
得聞如是言說章句
득문여시언설장구
如是言說章句
여시언설장구하고 ,
이와 같은 언설, 이걸 말씀으로 했을 때에는 ‘언설’이고, 글로 써놨을 땐 ‘장구’예요. 그런 뜻입니다.
이와 같은 뭐 부처님 설법하시면 ‘언설’이고.
이미 이것이 성문화 됐기 때문에 그래서 ‘장구’라고 하는 말을 붙였습니다.
부처님 뭐 글도 없고, 글로 기록도 안 할 그런 시절같으면 그냥 ‘언설’이라고만 했겠죠.
이와 같은, 이게 뭡니까?
凡所有相이 皆是虛妄이니 若見諸相非相하면 卽見如來니라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第五 如理實見分(제오 여리실견분)>
‘若見諸相非相하면 卽見如來(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5.如理實見分(여리실견분)>’
이말 말입니다.
모양 떠나서, 모양 떠나서 여래를 본다라고 하는 이 사실.
우리가 천불 만불을 조성하잖습니까? 천탑 만탑을 조성 하고, 그저 부처님, 잘 생긴 부처님 있으면 그냥 껌벅 넘어가고.
어디 뭐 저기 뭐 무석에 영산대불 근사하게 조성해놨다 하면 그 그냥 갔다 와서 신심이 나가지고 그냥 칭찬을 막 늘어놓고, 그럼 또 가서 보고, 또 가서 보고. 이게 우리 중생이라. 보통 사람의 심성이라구요. 상견중생(相見衆生)이야. 상을 봐야 속이 시원한 그런 속성을 가진 그런 인간이 우리거든요.
그런데 이 부처님이 상이 아니라니, ‘상(相)을 상(相)으로 보지 않아야 여래(如來)를 볼 수 있다’니,
이런 말을 듣고, 여시언설장구를 듣고,
生實信不잇가
생실신부
(진실한 믿음을 내겠습니까?”)
진실한 믿음을 내겠느냐, 이말이야. 진실한 믿음을.
아, 이건 자신없어요, 저도. 솔직하게 자신없어.
어느 날 부처님 좋은 형상이 있으면, 옛날에 나 건강할 때 중국 여행을 가면은, 뭐 저기 인도나 이런데 가면 불상 사오다가 볼일 다 봤어요. 여행 경비, 콜라 하나 사먹을 거 안 사먹고 전부 불상만 다 사왔어. 그 얼마나 무겁습니까? 동으로 된 것. 그런데 인도 같은데 가면 티벳에서 만들어진 불상, 우리 돈으로 예를 들어서 뭐 한 2~3만원만 주면은 우리나라에서 수십만 원 줘도 조성을 못할 그런 불상을 사오는 거야. 우리 같은 사람은 막 그냥 환장하는 거지. 그래서 무거워서 어떻게 감당도 못하면서 막 샀어.
그렇습니다. 그런 믿음 가지고 진실한 믿음 내겠느냐 이거예요.
뭐 그때 이 범소유상(凡所有相)이거 안 읽어서 그런 것도 아니야. (일동웃음)
生實信不(생실신부)잇가
참, 수보리도 이런 말 못 받아들이겠다, 이거야.
佛이 告須菩提하사대 莫作是說하라
불 고수보리 막작시설
佛이 告須菩提하사대
불 고수보리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시되,
莫作是說하라
막작시설
“그런 말을 하지 말라.
그런 소리 하지 마라 말이야.
그럼 희망이 없잖느냐, 이런 뜻이 포함되어 있어요, 이게.
사실은 모든 사람은 근본적으로 불성인간인 까닭에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한 생각 돌이키면 다 뭐 석가모니 부처님 못지않은데, 그런 소리 하지 마라, 또 희망을 가져야 된다.
如來滅後後五百歲에 有持戒修福者가 於此章句에 能生信心하야 以此爲實하리니
여래멸후 후오백세 유지계수복자 어차장구 능생신심 이차위실
그랬어요.
이것으로써 진실을 삼는다[이차위실(以此爲實)].”
후오백세(後五百歲), 이거 이제 우리가 흔히 이제 오백 년, 오백 년, 오백 년으로 이렇게 잘라서 이야기를 하는데 왜 오백 년이란 말이 이 금강경뿐만 아니라 어디에도 많아요. 대승경전에는 많습니다. 다른 경전에는 별로 없는데 대승경전에는 오백 년이라는 말이 많아요.
이게 이제 부처님 열반하시고 오백 년 전후를 해서 대승불교 운동이 제대로 일어났어요. 불교다운 불교가, 오백 년, 부처님 열반하시고 오백 년 경에서부터 비로소 대승경전이 막 곳곳에서 탄생하고 그리고 정말 승단중심의 어떤 권위주의에 떨어져 있던 그런 사람들이 정신을 차리게 되고, 또 이제 재가 불자들이 그런 어떤 그 권위주의에 떨어져 있던 승단을 배격하고, 또 무시하기도 하고, 그래서 유마경 같은 것이 그냥 기라성 같은 십대제자들이 유마거사에게 사정없이 박살나는 이유도 거기에 있어요. 그게 우정 그거는 이제 ‘대승불교운동의 선언서’다 라고 이야기하는데, 우정 그런 그 대승경전이 탄생하는 것입니다.
부처님 십대제자가 어찌 그 유마거사에게 무슨 소견이 그렇게 부족하겠어요? 부족할 까닭이 없는데 우정, 유마거사라고 하는 세속 거사를 등장시켜가지고 출가한 승단의 그 권위주의적인 그런 사람들의 어떤 그 아집, 이것을 깨뜨리는 그런 내용이라고 볼 수 있는 거죠.
그것 때문에 그런가 틱낫한 스님[ Thich Nhat Hanh 베트남 스님 1926년 10월 11일~ ]
‘유마경을 안 좋아한다, 나는 ’, 그런 글이 있어요. 보면
後五百歲
후 오백세,
‘해탈견고(解脫堅固)’, ‘선정견고(禪定堅固)’, ‘다문견고(多聞堅固)’, ‘탑사견고(塔寺堅固)’, ‘투쟁견고(鬪爭堅固)’, 이렇게 하잖아요?
이걸 이제 나는, 아, 사실은 뭐 우리 같이 이렇게 말세에 사는 사람으로서는 이런 말을 들을 때 별로 아닙니까? 우리는 뭐 2500년 이후니까 ‘투쟁견고(鬪爭堅固)’하고도 남는 그런 시대인데, 물론 그런 시간적인 관계도 없는 것은 아니야, 사실은.
있지마는 그것보다는 저는 역으로 그래 생각해요.
‘투쟁견고(鬪爭堅固)’라고 하는, 제 5 오백년 ‘투쟁견고(鬪爭堅固)’라고 하는 것은 무슨 뜻이냐?
세속적인 관념이야. 세속적인 상식이라. 우리가 세속에 있을 때 세속의 그 관계라고 하는 것은 모든 게 갈등과 투쟁 뿐 이라.
그러다 어느 날 절에 왔다 말이야. 절에 와 보니까 아, 건물도 근사하고, 탑도 근사하고, 불상도 좋고, 여러 가지가 뭐 선경 같거든. 그게 뭔고 하니 ‘탑사견고(塔寺堅固)’야. 제 4 오백년.
거기에 신심을 내는 거야. 그 전에는 어떤 그 세속의 시시비비 갈등, 투쟁, 이것만 관심을 갖고 있다가 사찰에 와 보니까 사찰의 어떤 그 성스런 그런 그 도량이 너무 근사해 보인다. 거기에 일단 마음이 한번 움직이게 돼요. 그런데 이것 뿐 인가? 그건 아닐 거다, 이거지.
그 다음에 여기에 무슨 가르침이 있느냐? 불교는 뭐냐? 이렇게 들어가는 거 아니에요?
우리가 행자 때부터 걸어온 길을 생각하면 꼭 맞습니다.
세속에 있다가 행자로 들어와서 행자에서 불교를 공부하는 것.
그게 ‘다문견고(多聞堅固)’야. 불교 공부, 이런 공부하는 것이죠. 아, 불교는 이러한 것이고 저러한 것이고, 어떠한 경전이 있고 어떤 공부가 있고, 이러한 것들을
불교 상식을 전부 공부하는 게 그게 ‘다문견고(多聞堅固)’라구요.
그리고 다문만 이제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제대로 이제 수행정진해야 된다, 그게 ‘선정견고(禪定堅固)’아닙니까? 그래 선정이 깊어지면 해탈로 나아가는 건 이건 당연한 일이라.
그래서 해탈 [해탈견고(解脫堅固)], 선정[선정견고(禪定堅固)], 그 다음에 다문[다문견고(多聞堅固)], 탑사 [탑사견고(塔寺堅固)], 투쟁 [투쟁견고(鬪爭堅固)],
이렇게 이제 5백년으로 주욱 내려가게 되어있는 것을 세속의 어떤 상식에서부터 해탈에 이르기까지의 우리의 정신적인 그 역정을, 정신적인 여정을 그렇게 이제 거슬러서 해석을 하면 아주 너무 딱 들어 맞아요.
시간적으로 너무 하면은 문제가 또 많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런 식으로 생각합니다.
비록 투쟁견고시대에 산다하더라도, 이런 이야기죠. 후오백년(後五百年)이라 하더라도
有持戒修福者가
지계수복자,
어떤 이가 지계수복하는 사람이 있다면은
於此章句에
어차장구
이 장구에, 말하자면 ‘약견제상비상 (若見諸相非相)하면 즉견여래(卽見如來)’라고 하는 이 장구에서
能生信心하야
능생신심
능히 믿음을 낼 것이다. 능생신심(能生信心)하야,
믿는 마음을 내어서
以此爲實하리니
이차위실
이것으로써, 아, 이거야 말로 참 진실한 가르침이다, 라고 하게 될 것이다.
當知是人은
당지시인
마땅히 알아라!
不於一佛二佛三四五佛에 而種善根이라
불어일불이불삼사오불 이종선근
이 사람은 일불이불삼사오불(一佛二佛三四五佛)에 선근(善根)을 심었을 뿐만 아니라
已於無量千萬佛所에 種諸善根하야 聞是章句하고 乃至一念生淨信者니라
이어무량 천만불소 종제선근 문시장구 내지일념 생정신자
已於無量千萬佛所에 種諸善根하야
이어무량 천만불소 종제선근 이라
그랬어요.
그래서 이 장구를 듣고는 오랫동안 청정한 믿음을 낼 수가 있어.
乃至一念生淨信者니라
내지일념 생정신자
그러나 한 순간만이라도 또 청정한 믿음을 낸다.
내지일념(乃至一念)이라도 생정신자(生淨信者)니라, 그랬습니다.
여기에 이제 또 짚고 넘어가야 할 게 ‘무량 천만불소(無量千萬佛所)’라고 하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무량 천만 불’.
이 대승불교에 들어오면은 소승불교에서는 보살도 석가모니 부처님의 과거생, 그 한분에 한에서만 보살이라고 하지, 그 외에는 보살 인정 안 합니다. 보살이란 말도 없고, 보살이란 말이 있지만 그것은 ‘석가모니 부처님 부처되기 이전까지의 삶을 보살의 삶’이다, 이렇게 말해요.
심지어 보살도 그런데 부처는 더 말할 나위 없습니다.
부처에 대해서는요, 오로지 석가모니, 유일신처럼, 유일 부처님으로만 인정합니다. 여기에서 이제 대승경전에 오면은 ‘무량천만 불’이라고 하는 말이 그냥 심심하면 나와요. 법화경이나 화엄경같은데는 말 할 것도 없고, 온 천지가 그냥 부처님으로 그렇게 나옵니다. 그래 이게 이제 무슨 말이고 하면은 제가 자꾸 주장해샀는 ‘인불사상’, ‘사람이 그대로 부처님이다’ 라고 하는 그 사상에 근거한 말입니다.
사람사람을 모두 부처님으로 생각하지 아니하면 무량천만 부처님, 뭐 무량천만억 부처님, 무량무수(無量無數)불가설불가설불찰미진수(不可說不可說佛剎微塵數)부처님, 이런 대승경전에 수없이 나오는 그런 표현을 이해할 길이 없어요. 당장에 금강경에 ‘무량천만 불’이란 말을 우리는 이해 못합니다. 그전 상식 가지고는.
그래 이것은 ‘모든 사람이 부처님’이다, 하는 그런 정신이 깔려있다고 하는 그런 뜻입니다. 그런 해석이 아니고는 답이 없어요. 아~무리 찾아봐야 우리 역사적으로 석가모니 부처님 한 분 겨우 알고, 그 외 뭐 아미타불이니, 무슨 뭐 아촉불(阿閦佛)주1)이니, 무슨 서방정토 극락세계 뭐 어쩌고, 경전 상에 나오는 천불 명호도 있고, 삼천불 명호경도 있고, 만불명호경도 있고, 부처님 명호가 무수히 많은데 그 분은 다만, 경전에서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해서 우리가 소개받은 부처님일 뿐이야.
역사적이 사실만 가지고 따지면 그렇게 냉정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거야.
석가모니 부처님을 통해서 소개받은 부처님이지, 어디에 가서, 어디 계셨단 말입니까? 아닌거예요, 이거는.
그렇게 해석하면 안 된다 이거지. 그렇게 해석하면.
그래서 모든 사람 사람 나아가서 모든 생명, 심지어 화엄경 정신이라면 모든 존재가 ‘유정무정 개유불성(有情無情皆有佛性)’뭐 이런 말도 있고, 산천초목(山川草木) 두두물물(頭頭物物)이 전부 부처 아님이 없다라고 하는, ‘명명백초두(明明百草頭)에 명명조사의(明明祖師意)’주2)라, 이런 표현을 우리가 선불교를 통해서 뭐 쉽게 쓰듯이 그런 정신입니다. 그런 사상이 깔려있어요.
그런 모든 사람을 부처님으로 받들어 섬기고 선근을 심어서, 그래서 이러한 장구를 듣고는 한 순간 만이라도 청정한 믿음을 낸다.
[已於無量千萬佛所(이어무량 천만불소)에 種諸善根(종제선근)하야
聞是章句(문시장구)하고 乃至一念生淨信者(내지일념 생정신자 )니라]
須菩提야 如來가 悉知悉見하노니 是諸衆生이 得如是無量福德이니라
수보리 여래 실지실견 시제중생 득여시무량복덕
須菩提야 如來가 悉知悉見하노니
수보리야! 여래가 실지실견하나니
여래는 ‘실지실견한다’, 다 알고 다 본다.
是諸衆生이 得如是無量福德이니라
시제중생 득여시무량복덕
이 모든 중생이 득여시 무량복덕이니라,
이 모든 중생들이 이와 같은 한량없는 복덕 심은 것을, 복덕 있는 것을 안다.[悉知悉見(실지실견)]
何以故오 是諸衆生이 無復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하며 無法相하며 亦無非法相이 니라
하이고 시제중생 무부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 무법상 역무비법상
何以故오 是諸衆生이
하이고 시제중생
無復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하며
무부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
無法相하며 亦無非法相이니라
무법상 역무비법상
무법상하며 무비법상이다, 그래서 이제 ‘6상’ 그러죠. 앞에서는 ‘4상’, 여기서는 이제 법상과 비법상이 이제 합해져서 ‘6상’ 그렇게 합니다.
그것 까지도 없다, 이래요. 뭐 ‘4상’은 우리가 없다고 하면 이해가 되겠는데, 여기에 오니까 ‘법상도 없다’, 하, 우리는 법을 얼마나 법을 존중합니까? 불법승 삼보의 법도 법이요, 이 법이라고 하는 것은, 아주 의미가 제일 많은 글자가 사실은 불교에서 ‘법’자입니다. 뭐 규칙도 법이고, 가르침도 법이고, 진리도 법이고, 이치도 법이고, 뭐 법 아닌 게 없죠. 그러나 여기서는 ‘부처님의 설법’을 두고 이야기합니다.
왜 그런고 하니, ‘汝等比丘(여등비구)가 知我說法(지아설법)을 如筏喩者(여벌유자)라하노니’라고 바로 뒤에 나오거든요. 그 설법이라고 하는 내용은 결국은 부처님이 진리를 깨달았고, 말하자면 참된 이치를 깨달았고, 참된 이치를 깨달으신 대로 설하신 거니까, 그걸 여기서 단순하게 우리가‘법’이라고 이해하고 넘어가야 돼요.
그럼 참된 이치인데 참된 이치도 없고, 또한 참된 이치가 아닌, 비법, 잘못된 이치의 상도 없다, 이런 말이에요.
無法相(무법상)하며 亦無非法相(역무비법상)이니라,
법상도 없고, 비법상도 없다.
이 하나의 그 상이 없어지면은요, 따라서 일체 상이 없어지고 또 하나의 상이 생기면은 따라서 일체 상, 모든 상이 다 따라오게 되어 있는 것,
그 얘기가 금강경에 또 있습니다. 뭐 아상은 있는데 인상, 중생상, 수자상은 없다
또 법상도 없고 비법상도 없다, 그건 있을 수 없는 거예요.
어떤 상이든지 조그마~한 상이 있게 되면 덩달아서 일체 상이 다 따라온다.
금강경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도 그럴 이유가 있는 거죠.
何以故오 是諸衆生이 若心取相하면 則爲著我人衆生壽者니
하이고 시제중생 약심취상 즉위착아인중생수자
그랬잖아요.
若心取相하면
약심취상
만약에 마음에 어떤 상이라도 아~무것도 아닌, 아~무것도 아닌 그런 어떤 상이라도, 마음의 상을 취할 것 같으면
則爲著我人衆生壽者니
즉위착아인중생수자
저절로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저절로 따라오게 돼. 거기에 집착하게 되어 있고.
何以故오 若取法相이라도 卽著我人衆生壽者며
하이고 약취법상 즉착아인중생수자
若取法相이라도
약취법상
아, 부처님 법, 그거는 우리가 존중해야지, 그거는 애지중지해야지, 그거는 애착해야지. 하~ 그건 우리가 보호하고 사랑하고 아끼고 해야지, 아 좋은 말이지, 신심있는 말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만약에 신심의 차원에서 우리가 보호하고, 아끼고, 사랑하는 것 까지는 좋으나 그러나 거기에 집착심이 있다고 한다면은, 그것은 법을 취하게 되는 거야[取法相(취법상)].
아주 고급이죠, 이거는. 정말 뭐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은 없어도 좋겠는데 법상은 나는 있어야 되겠다.’ 뭐 우리 상식은 그렇습니다, 사실은.
그런데 아니야. 만약, 법상을 취한다 하더라도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까지 절로 따라 오게 된단 말이야.
卽著我人衆生壽者며
즉착아인중생수자
그렇게 되어있습니다.
아무리 훌륭하고 좋은 거라 하더라도 거기엔 집착이 따르면 이것은 말하자면
다른 아주 지저분한 것 까지, 지저분한 그런 상까지 다~ 따라오게 되어 있더라.
아~ 이것도 참 깊은 의미가 있고, 우리가 참 잘 새겨봐야 할 그런 내용입니다.
何以故오 若取非法相이라도 卽著我人衆生壽者니라
하이고 약취비법상 즉착아인중생수자
(何以故)오
하이고 (금강경사가해 파일엔 미기재, 강좌에는 언급하심)
若取非法相이라도
약취비법상,
若取法相(약취법상)이라도 그렇고, 非法相(비법상)을 취한다 하더라도,
법상(法相)아닌 것을 취한다[取非法相(취비법상)], ‘아, 그럼 반대로 안 좋은 것은 뭐 괜찮지 않느냐? 안 좋은 것은’ ‘천만에’ 란 말이 돼요.
진리 아닌 것, 그것을 취한다 하더라도,
卽著我人衆生壽者니라
즉착아인중생수자
곧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저절로 따라 오게 된다. 저절로 거기에도 집착이 가게 되어 있다 이 말이야.
돈이 수백억 재산 가진 사람이, 수백 억 재산 가진 사람이 그 사람이 쓸 때 뭐 천만원 수표만 쓰는 게 아니야. 때로는 백 원도 쓰고 천 원도 써.
수백 억 재산을 가진 사람도 천원 가지고 싸울 수가 있어요. 안 그렇겠어요?
아, 우리가 보기에 ‘수백 억 재산을 가진 사람이 그까짓 거 만원짜리만 쓰지 뭐 천 원짜리 그걸 쓰느냐’고.
천 원짜리 택시타고도 만 원짜리 쓱 줘야 할 텐데, 아니야. 거슬려서 9,000원 다 받아가. 고렇게 비유하면 딱 맞죠.
법상과 비법상과 그리고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법상이라고 하는 것은 수백억 재산가라고 생각한다면은 나머지는 관심없을 것 같지? 천만에. 천원짜리도 관심있어.
수백억에 관심이 집착하는 것이나, 천원에 집착하는 것이나, 집착하기는 똑 같다. 이 뜻이에요. 훤 하죠 이제. 시원하게 되었잖습니까.
그런 뜻이에요, 이게. 사실 그렇습니다.
어떤 배우가 뭐, 신을 뭐 수 백 커리(켤레), 그것도 뭐 몇 백만 원짜리 수백 커리(켤레)를 가지고 있는데 누가 그 한 커리(켤레) 달라고 해보십시오, 주는가. 안 줘요. 만약에 주게 되더라도 아주 섭섭해 해. 아주 섭섭해 한다구.
그런 이치입니다.
그 뭐 인간의 심성을, 이거 잘 들여다보면 우리 인간의 심성을 너무 참 꿰뚫고 있는 그런 말씀이에요. 그래서
是故로 不應取法이며 不應取非法이니라
시고 불응취법 불응취비법
참 근사한 말이죠.
不應取法이며
불응취법
응당히 법도 취하지 말것이고,
不應取非法이니라
불응취비법
법아닌 것도 취하지 말라.
以是義故로 如來가 常說호대 汝等比丘가 知我說法을 如筏喩者라하노니
이시의고 여래 상설 여등비구 지아설법 여벌유자
法尙應捨어든 何況非法가
법상응사 하황비법
以是義故로
이시의고
이러한 의미 때문에, 이러한 의미가 있어서, 이시의(以是義), 의(義)자가 이거 참, 이러한 이치, 이러한 이치가 있어서, 이러한 의미가 있어서,
如來가 常說하대(하사대)
여래 상설
여래가 항상 말씀하시기를
汝等比丘가 知我說法을 如筏喩者라하노니
여등비구 지아설법 여벌유자
너희들 비구들이여! 내 설법을 이해하기를, 내 설법에 대해서 이해하기를 뗏목의 비유처럼 이해하라, 뗏목의 비유처럼 알아라. 여벌유자(如筏喩者)라!
法尙應捨어든 何況非法가
법상응사 하황비법
법도, 하! 법!
귀불(歸佛)· 귀법(歸法)아닙니까? 귀불(歸佛)·귀법(歸法)이야!
법이 있음으로 해서 사실은 부처님이 존재하는 것을 우리가 압니다. 부처님보다 법이 우선이에요. 엄격하게 따지면 부처님으로부터 법이 나왔지마는, 법이 없으면 부처님도 존경 못 받아요. 그런 법이야!
그런데, 법상응사(法尙應捨)어든 하황비법(何況非法)가!
법도 응당히 버려야 하거늘 그 외 다른 법이겠는가!”
그 뭐 수백억도 버려야 하는데, 뭐 일,이 천원이야 당연히 버려야지.
수백 억 원에 그냥 관심 없으면서 일,이 천 원에 집착할 수는 없는 거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뗏목이 뭡니까? 뗏목은 강을 건너가는데 하나의 수단이라. 강을 잘 건너졌다고 해서 그걸 뗏목을 짊어지고 갈 사람도 없고, 가다가 돌아보지도 않아. 돌아보지도 않는다고. 그런데 여기서 이제 부처님의 설법을 방편으로 이해하라, 그런 의미가 스며있어요.
그런데 우리는 끊임없이 그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야 되는데, 이 방편이라고 하는 것을, 이 방편이라고 하는 뗏목을 타고, 강을 건너려고 처음에는 출발했다가 오르락내리락 하면서 강 구경하고, 저 언덕으로 슬쩍 갔다가, 이쪽 언덕으로 돌아오고, 오르락내리락하다가 도로 뗏목을 타고 출발했던 그 자리에 와서 내리는, 그런 현상입니다. 우리가 하고 있는 게.
사실은 뗏목을 탔으면 어떻게 하더라도 강을 건너가야 되고, 뗏목에는 미련이 없어야 되는 그런 가르침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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