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롬 13:8~10
제목: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 기독교는 사랑이 율법의 완성이라고 믿고 사랑을 실천하는 신앙입니다.
롬13:10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
율법의 완성인 사랑을 실천하는 이유는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받고자 하는 율법주의나 행위구원론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칭의되어 구원을 받은 성도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을 믿는 것은 기본이고 더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요14:15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
십계명을 보면 1~4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5~10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들이) 가족과 이웃 등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신앙적인 본능으로 주기도문(마6:9~13)이 복음인 것을 느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주기도문은 다름 아니라 십계명을 요약한 것입니다. 칼빈은 주기도문이 십계명 두 돌 판의 요약이라고 설명한 바 있습니다.
마 6: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
그리스도께서 주신 기도문은 여섯 가지의 간구로 이루어져 있다. 처음 세 가지의 간구는 우리와는 상관이 없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과 관련되어 있는데, 우리는 이 점을 꼭 알아야 한다. 그리고 나머지 세 가지의 간구는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꼭 필요한 것들과 관련되어 있다. 하나님의 율법이 두 개의 돌 판으로 나뉘어져 있어서, 첫 번째 돌 판은 경건의 의무들(pietatis officia)을 담고 있고, 두 번째 돌 판은 사랑의 의무들(caritatis officia)을 담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기도문을 통해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고려하고 구하라고 명하심과 아울러,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의 유익들을 구하는 것도 허락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과 우리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간절히 구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가장 우선시하는 마음이 되어 있을 때에만, 올바르게 기도할 수 있는 마음 상태에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의 유익을 구하는 데만 마음이 팔려서, 그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하나님의 나라를 도외시하는 기도를 드린다고 한다면, 그것은 본말(本末)이 전도(顚倒)된 정말 너무나 터무니없는 일일 것이기 때문이다. ←『칼빈주석: 공관복음』. |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사랑이고 이웃 사람을 사랑하는 것도 사랑이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경건이라고 구분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그냥 사랑이라고 합니다. 전자의 사랑인 경건은 후자의 사랑인 이웃 사랑으로 이어져 완성이 됩니다. 간음, 살인, 절도, 탐심 등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자도 일반은총의 영역에서 도덕으로 억제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자는 도덕을 포함하여 믿음의 영역에서 경건의 연장인 이웃 사랑을 실천합니다.
롬13:9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
십계명의 5~10계명, 주기도 여섯 간구 중 나머지 세 간구들(두 번째 돌판)과 롬13:9의 ‘사랑하라’는 말씀은 같은 맥을 가진 말씀들입니다. 주기도문의 앞의 세 간구들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합당한 방식과 관련된 계명들(첫 번째 돌판)이고, 나머지 세 간구들(두 번째 돌판)은 이웃 사랑과 관련된 것인데, 이것이 초신자에게는 조금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나머지 세 간구들(두 번째 돌판)의 시작은 마6:11입니다(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왜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것이 이웃 사랑과 관련된 두 번째 돌 판에 들어갈까요? 그 이유를 소박하게 추론하면 하나님이 성도를 먹여 살리신다는 확신과 믿음이 있을 때 다른 사람의 것을 탐내거나 도둑질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6:12(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도 언뜻 보면 첫 번째 돌 판으로 보이지만 잘 보면 두 번째 돌 판에 해당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신다는 확신과 믿음이 있어야만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롬13:10(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확신이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않고 선을 행하는 원인이 되는 것을 알려 줍니다.
● 오늘 본문은 사랑의 빚 이외에는 아무 빚도 지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롬13:8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
전세사기를 자행하고 묻지마 투자를 하는 자들에게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빚 이외의 빚을 잔뜩 진다는 것이고, 진 빚을 안 갚으려는 탐심과 도둑 심보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참 철지난 이론인 레버리지 효과니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경제관념도 취약하고 학력도 낮은 어리석은 자들이 빚을 내어 투자를 하다가 먼저 자신이 망하고 연관된 가족과 이웃을 함께 망하게 합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은 일만 악의 뿌리가 됩니다.
딤전6:10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
돈과 간음이 결합하면 매춘이 되고 돈과 미성년자 간음이 결합하면 원조교제가 되며 돈을 뺏으려고 살인을 하면 살인강도가 되며 부채(보증금)와 전세가 결합하면 전세사기가 되어, 돈을 원인으로 하여 일만 개 정도의 죄악의 경우가 파생할 수 있습니다. 롬13:8과 딤전6:10을 믿는 성도들만이라도 성경 말씀을 그대로 믿고 사랑을 실천하면 사회의 앞날도 조금은 밝아질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천국과 지옥을 상상만 하는데요. 지옥과 천국에 가기 전 이 세상에는 말세가 옵니다. 말세의 특징은, 돈을 사랑하고 주기도문의 이웃 사랑과 관련된 나머지 세 간구들(두 번째 돌판)이, 십계명의 5~10 계명 등이 무시되고 사람들이 사악해집니다.
딤후3:1.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2.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3.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4.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5.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
말세가 언제인지? 이 세상의 종말이 언제인지? 그것을 하나님 외에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런데 막연하게 추정할 만한 간접적 단서가 있다면 위의 말씀입니다. 이것이 직접적이고 정확한 근거는 못 되지만 희미한 그림자 정도는 될 수 있습니다. 딤후3:1~4에 나오는 행태가 경건의 모양은 있지만 경건의 능력은 없는 것입니다. 왜 설교를 잘 하던 목사가 간음과 성범죄를 저지릅니까? 경건의 모양은 있지만 경건의 능력은 없기 때문입니다. 신앙서적과 주석서가 차고 넘치는데 왜 이단에 미혹된 불쌍한 영혼들이 많습니까? 경건의 모양은 있지만 경건의 능력은 없기 때문입니다. 십계명의 1~4계명, 주기도문의 첫 번째 돌 판을 확실히 믿는다면,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지는 않을 겁니다. 십계명과 주기도문은 우리의 영혼과 심령의 상태를 점검하고 회개하는 진단키트가 될 수 있습니다.
● 하나님 사랑이든 이웃 사랑이든 사랑의 시작은 하나님이십니다.
요일4:10.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11.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 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사랑의 시작과 출발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인정하고 믿기 때문에 확신을 가지고 실천하는 것으로서, 인본주의가 아닌 신본주의의 확장판입니다. 이 묵상을 읽은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고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웃을 사랑하는 축복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첫댓글 초신자나 바쁘신 분은 위에 올린 묵상 본문만 읽으셔도 됩니다.
더 다양한 이해나 심화학습을 하고자 하는 분은 아래에 첨부한 주석을 읽으시면 됩니다.
네, 참고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호크마 주석: 로마서>
=====13:8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 본문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첫째는, 성도들이 살아가는데 있어 갚지 않고 남겨두는 빚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고 둘째는 사랑이란 성도들이 지불해야 하는 빚으로서 '다갚음'이 없는 영원한 부채라는 것이다. 한편 '아무에게든지'라는 표현은 사랑의 빚을 갚아야 하는 대상이 '성도들'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들에까지 확장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 '다 이루었느니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페플레로켄'(* )은 현재완료형이다. 이는 사랑하는 순간 율법을 이룬 것임을 말해준다. 여기서 바울이 율법을 무시하지 않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율법은 폐기되는 것이 아니라 완성되는 것이다. 이것은 다수의 가르침과 일치한다(마 5:7).
=====13:9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 바울은 율법의 예로 십계명을 들고 있다(6, 7, 8, 10계명).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율법인 십계명의 조항을 들어 그가 말하려고 하는 바,
사랑이 얼마나 결정적인 것인가를 말해주려고 한다. 인용에 있어서 부모 공경과 거짓 증거하지 말라는 조항은 생략했는데, 이는 바울이 자신의 논리 전개상 불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Calvin). 즉 바울은 사랑과 관련하여 이웃과의 관계에서 두드러지는 항목들을 선택했거나, 아니면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항에 해당되는 율법 조항을 들어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한편 여기서는 '...을 하지 말라'하는 금령(禁令)이 '사랑'이라는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규범으로 대치되고 있음도 주목해야 할 것이다.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 바울은 레 19:18을 예증 문구로 인용하면서 사랑의 결정적인 가치를 강하게 부각시키고 있다. 이 계명은 이웃과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며 율법의 핵심이고 완성임을 명백히 보여준다(막 12:31;갈 5:14;약 2:8).
=====13:10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 본문은 사랑의 소극적인 의미이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성도들은 이런 의미에서의 사랑도 실천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따라서 이런 소극적인 의미에서의 사랑도 강조되어야 한다. 사랑은 능동적인 것이고 따라서 모종의 행동을 필연적으로 유발시키지만 그것이 결코 이웃을 해롭게 하는 것으로 나타나서는 안 되는 것이다. 본문에서의 '완성'(* , 플레로마)은 '충만'으로 번역될 수도 있으나 8절의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와의 조화를 생각할 때 전자의 번역이 더 분명한 의미를 드러낸다고 본다. 그러나 사랑으로 율법이 충만해진다고 하는 것도 의미있는 것이다.
@장코뱅 성경원어도 나오고 더 전문적인 설명인데요. 같이 참고하겠습니다.
<매튜 헨리 주석>
롬13:8-10
... Ⅱ. 사랑. "아무에게든지 아무것도지지 말라"(ofeivlete)하는 식으로 읽는 사람도 있다. "네가 어느 누구에겐 진 것이 무엇이든 이 사랑의 빚이라는 말로 다 표현 할 수 있다. 서로 사랑하는 것은 항상 갚고 갚아도 또 갚아야 할 빚이다." 사랑은 빚이다. 하나님의 율법과 인류의 이익이 바로 그렇게 만들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자유로 안 해도 좋은 무엇이 아니라 서로에게 빚지고 있는 모든 임무의 원칙이요 종합이다. 왜냐하면 사랑은 "율법의 성취"이기 때문이다. 물론 완전한 것은 아니지만 그것에로의 진 일보인 것이다. 이것은 둘째 돌판에 새겨진 모든 것을 종합하는 것이니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요일 4:20). 만약에 사랑이 진지하다면 그건 "율법의 성취"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이 "사랑"이란 말이야말로 우리의 모든 본문을 한 마디로 간략하게 함축하고 있는 말이요 우주의 미와 조화가 아닐 수 없다. 사랑을 주고 받는 일이야말로 이성적인 존재의 기쁨과 행복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은 사랑"(요일 4:16)이요 사랑은 영혼에 박힌 그의 형상이다. 이것이 있는 곳에 그 영혼은
제 모양을 갖추며 마음은 온갖 선한 일에 적합하게 된다. 사랑이 율법의 성취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 그는 다음 두 가지를 소개하고 있다.
1. 개별적인 교훈의 소개(9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에 다 포함되어 있는 십계명의 후반부를 그는 나열하고 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곧 같은 분량이 아니라 같은 성질의 사랑이다. "그 정도가 똑 같을 수는 없지만 네 자신을 사랑하는 동일한 정성으로" 네 이웃을 사랑하라. 자기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자는 자기 이웃의 몸, 재산, 명성도 자기 것처럼 잘 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이 기초에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황금률이 서 있다. 이런 면에 있어서 인간의 율법의 제지가 없었던들, 처벌도 없었을 것이요(이것은 인간의 악의 때문에 다 필요하게 된 것이다) 사랑의 율법만으로도 이 모든 잘못과 상처를 방지하고 우리들 가운데 평화와 질서를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여러 계명을 나열하는 데 있어서 그는 제 7계명을 제 6계명 앞에 놓고 있다. "간음하지 말라." 이 간음이라는 말이 흔히 사랑이라는 미명 아래 진행되고 있지만(이 좋은 말이 그렇게까지 악용되는 것은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은 살인이나 도둑질과 마찬가지로 사랑을 어기는 것이다. 진정한 형제애는 우선 형제의 영혼을 사랑하는 것이다. 남들로 하여금 죄를 짓도록 유혹하고 그들의 마음과 양심을 더럽히는 자는, 비록 더없이 열렬한 사랑의 핑계를 대겠지만(잠 7:15, 18), 실제에 있어서는 영혼을 거슬려 싸우는 악마와 같이 그들을 미워하고 있는 것이다.
2. 형제애의 성격에 관한 일반적인 교훈. "사랑은 악을 행하지 않는다"(10절). 사랑 가운데 걷는 자는, 곧 사랑의 원리의 지배를 받고 사는 자는 "악을 행하지 않는다." 그는 "이웃에게" 어떠한 악을 품지도 실천하지도 않는다. 그뿐 아니라 자기와 관계를 맺고 있는 누구에게나 마찬가지다(ouvk eVrga,zetai). 따라서 악을 도모하는 걸 가리켜 침상에서의 악의 실천이라 부르고 있다(미 2:1). 사랑은 어느 누구에게도 악을 품거나 계산하지 않으며 어떠한 종류의 편견이나 상처를 주는 일을 일체 반대한다. "악을 행하지 않는다." 어떠한 종류의 악이든 반대한다는 얘기다. 표현되어진 것보다 표현되지 않은 것에 더 많은 의미가 담겨 있다. 사랑은 악을 행하지 않을 뿐 아니라 가능한 한
모든 선을 강구한다. 왜냐하면 이웃에게 악을 꾀하는 것뿐 아니라 마땅히 선을 베풀어야 할 자에게 선을 보류하는 것도 죄이기 때문이다(잠 3:27-29). 이것이 곧 사랑은 율법의 성취요 율법의 모든 목적에의 해답이라는 걸 입증하는 것이다. 이것 말고 우리에게 악을 억제하고 선을 행하도록 강요하는 게 또 다른 게 없지 않는가? 사랑은 전 율법에 대한 순종의 살아 있는 적극적인 원리다. 사랑의 법이 있는 곳에는 전 율법이 씌여 있다.
@장코뱅 주석이지만 한편의 설교 같은 느낌도 듭니다. 잘 읽었습니다.
<박윤선 주석>
롬 13:8
피차 사랑 - 이것은 헬라 원어로 토 아가판 알렐루스니, "서로 사랑함"을 의미한다. 이것은 우선 신자들끼리의 사랑을 가리켜 말하나, 역시 그 밖의 사람들을 제외하는 것은 아니다. 사랑은 언제나 서로 협동해야 풍성해진다. 일방에서만 나오는 사랑은, 고독하여 끊기기 쉽고 열매를 적게 맺는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서 무조건적 사랑을 받으려고 기대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서 오는 작은 사랑이라도 고맙게 여겨서 그것을 보답해야 된다. 그리 할 때에 그 사랑이 힘을 얻어 더욱 풍성해진다.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 이것은, 사랑에 대하여는, 우리가 무한 책임(無限責任)을 져야 된다는 것이다. 기독 신자에게는, 사랑의 책임을 완전히 이루었다고 할 시간이 언제나 오지 않는다. 신자는, 그 원수에게 대해서도 사랑의 책임을 지고 있다. 그는, 그가 전에 극력(極力) 사랑해 준 사람에게도 계속하여 사랑의 책임을 지고 있다.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 여기 "남을 사랑하는 자"란 말은, 현재 분사(現在分詞)로
된 명사이다. 이것은, 사랑의 행동을 몇 번만 실행한 자가 아니고 계속하여 사랑의 생활을 하는 자를 가리킨다.
롬 13:9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 여기 관설된 계명들은, 모두 사람이 사람에게 대한 것이고 하나님에게 대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것들은, (1)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만이 참으로 지킬 수 있다. 우리가 사람을 사랑할 때에도, 하나님을 순종하는 동기(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동기)로 해야 된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사랑하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2) 이 계명들이 아무리 복잡해도 신자가 사랑하는 동기로 그것들을 실행하면, 그 실행이 기쁘고 또 어렵지도 않다. 그 이유는, 사랑은 수고를 수고로 여기지 않는 까닭이다.
롬 13:10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 니즈렌(Nygren)은 런덴시안(Lundensian)학파의 사람으로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란 말을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곧, "사랑이 있는 곳에 율법의 계명들이 있을 자리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해석이다. 여기 바울이 말한 "율법의 완성"이란 말은, 적극적 의미를 가진다. 곧, 율법이 사랑으로 말미암아 제외(除外)된다는 것이 아니고 도리어 성취된다는 것이다.
@장코뱅 네, 니즈렌이 헤맸네요.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는 명시적 말씀이 있는데요.
주기도문이 십계명 두 돌판의 요약인 것을 알고 신비하다는 느낌마저 듭니다.
구원파나 세대주의자들이 십계명과 주기도문에 대한 오해를 버려야하겠습니다.
네, 공감합니다.
시의 적절한 좋은 묵상입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능력은 없는 요즘의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말씀인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꿰뚫은 사도 요한의 복음을 귀담아 들어야겠습니다. 사랑은 하나님에게서 온 것으로써, 먼저 하나님을 믿고 사랑함으로써 나 자신을 포함한 이웃을 사랑할 수 있음을 십계명, 주기도문이 말씀하고 있고, 바울과 요한도 강조하고 있네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경건의 능력이 있는 자가 아니면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고 오히려 각종 해를 입히고 사회 악을 저지르게 되는 무서운 현실을 자주 목격하곤 합니다. 딤후 3장의 말세의 징조들이 갈수록 심화하고 있네요.
목회자 뿐 아니라 교인들의 범죄도 많아지고 있는데 전형적으로 경건의 능력이 부족한데서 오는 문제라는 걸 짚어주셨는데 깊이 공감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닮아 서로 사랑하는 존재로 지음 받았다는 것에 감사하고 마음에 잘 새깁니다. 감사합니다.
네, 좋은 분별과 요약을 해주셔서 잘 참고하겠습니다.
사랑은 율법을 완성하는 것, 성취인데, 예수님이야말로 율법의 모든 계명을 성취하시고 완성하신 분으로서, 사랑의 끝판왕이시네요!! 예수님을 보고 모두들 와서 구원 받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라고 하시는 건데 이걸 모르고 지금도 여전히 헤매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있다는 게...마음 아프네요.
매우 공감합니다.
공감합니다ㅠㅠ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