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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我, 나)’에 대한 이해>
‘아(我)’란 일반적으로는 정신과 육체의 결합체인 자기(自己)를 말한다. 그래서 대개 자아(自我)와 동의어로 본다. 이러한 아(我)에 대해 고대 인도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 고대 인도 브라만교의 우파니샤드철학에서는 주체로서 실재(實在)하는 것, 주재(主宰)하는 것으로서의
아(我, ātman)가 강조돼, 우주아(宇宙我. 梵)와 동일하다는 범아일여(梵我一如)를 주장했다.
• 고대 인도 수론학파(數論學派; Sāṃkhya학파)에서 세운 신아(神我―신비로운 자아).
순수정신, 영아(靈我, puruṣa). 범아(梵我) 등의 말이 있었다.
이와 같이 아(我)는 온갖 사물의 근원에 있으면서 개체를 지배하고 통일하는, 독립 영원의 주체로 봤다.
초기불교에서도 ‘아(我)’는 실체로서 ‘나’를 말하며,
이것은 브라만교에서 사용하는 아트만(atman)을 의미한다고 했다.
그리하여 초기불교 <아함경>에서는, 모든 것은 오온(五蘊)이 가화합(假和合)한 존재로서
아(我)의 본체는 없다고 하는 무아(無我, anatman)을 세워 제시했다.
그런데 일상생활에서 통용되는 ‘나’를 한자로 표시하면 아(我)가 된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아트만은 ‘자아(自我)’라고 하는 것이 옳다. 왜냐하면 아트만을 실체적 ‘아(我)’라고 하므로, 그렇다면 아트만은 ‘자아(自我)’라고 하는 것이 실재와 맞는다. 자구(字句)로 풀이해 봐도 아(我)와 무아(無我)가 상대적 개념이 아니라, 자아(自我)와 무아(無我)를 상대적 개념으로 표현하는 것이 적합하다.
현대철학에서도 ‘자아(自我)’는 고정불변의 독립된 개체(個體)로서 동일성(同一性)을 유지하면서 존재하는 실체로서의 ‘나’를 말한다고 하고 있다. 이것이 브라만의 “아트만”을 의미 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불교 철학의 사상적 저변에서 심화돼 온 것이 무아설(無我說)이라고 본다면, 종교적으로 실천적 폭을 넓힌 것은 윤회설(輪迴說)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불교의 전개과정에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무아설과 윤회설이 양립하면서 불교를 발전시켜왔다고 하겠다.
이상에서 나온 ‘아(我)’에 대해 좀 더 검토를 해보자.
일반적으로 ‘나(我)’라고 하는 것은 범부의 아(我)를 말한다. 이 ‘범부의 아’는 색(色)ㆍ수(受)ㆍ상(想)ㆍ행(行)ㆍ식(識)이라는 오온(五蘊)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색(色)은 육체이고, 수ㆍ상ㆍ행ㆍ식은 정신에 해당된다. 그런데 범부는 이와 같이 오온에 의해 이루어진 ‘아(我)’를 상주 불변하는 본질적인 자기로서의 ‘아(我)’라고 집착한다. 이렇게 무명(無明)에 의해 범부가 그릇되게 인식하고 있는 ‘아(我)’는 오온이 가합해서 이루어진 것이기에 가아(假我-거짓된 나)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 가아를 범부는 자아(自我)로서 집착한다는 말이다. 즉, 범부가 있다고 고집하는
아(我)는 바로 자아를 말한다.
그런데 이 자아(自我)는 '범부의 자아'일 뿐이며, 결코 상주 불변하는 자아가 아닌 것이다.
근본불교에서는 이러한 자아를 3종으로 구분하는데,
① 무아로서 부정되는 아(我).
② 거짓된 나(假我)라고 불리는 아(我).
③ 범부가 집착하는 아(我)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그리고 범부가 집착하는 ‘아(我)’가 바로 자아(自我)란 것이다.
이처럼 범부의 ‘아’는 자아로서, 범부들은 자아가 있다고 믿고 이것을 본질적인 자기로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러한 자아는 없다. 본질적인 자아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범부의 자아일 뿐이고, 바로 이러한 착각 때문에 범부는 윤회를 하는 것이다. 오온이란 끊임없이 변화를 하고 있기 때문에 무상한 것인데, 이것을 고정된 불변하는 자아로 알고 집착하기 때문에 윤회를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와 반대로 각자(覺者 : 깨달은 자)는 범부가 생각하는 자아의 실상이 거짓된 나(假我)라는 사실을 파악하고, 그리하여 자아의 실상을 확실히 알게 되면 윤회하는 주체인 자아의식이 없어지기 때문에 윤회를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다음은 초기불교 입장에서의 거해 스님 법문의 요약이다.
고대 인도 브라만교에서 ‘아(我)’라고 하는 것은 산스크리트어 아트만(Atman)으로서 영혼, 자아(自我), 자기(自己)라는 의미인데, 이러한 ‘아(我)’는 우리의 모든 것을 책임지고 우리의 미래를 연속시키며 절대적 불변, 영원, 불생불멸의 본질이라고 했다.
큰 것은 범(梵)ㆍ브라흐만ㆍ창조주ㆍ법신(法身)ㆍ천상에의 영생(永生) 등을 말하고 여기에서 파생된 작은 것이 ‘아(我)’라는 것이다.
‘아(我)’는 개개인의 심중에 존재해 있으며, 이 심중에 존재해 있는 것이 오랜 윤회 속에서 선업을 닦고 신에 기도하며, 제사하고, 공물을 바치며, 그의 이름을 외워서 찬탄하고 그럼으로써 깨끗해져서 마침내 창조신이나 범(梵)에 이르게 된다고 했다. 이렇게 해서 아(我)가 범(梵)에 이르는 것을 범아일여(梵我一如)라고 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무아(無我)를 가르치시고 위와 같은 ‘아(我)’에 사로잡혀 집착하는 것을 유아(有我)의 상견(常見;Sakkaya-ditthi)이라고 하셨다.
부처님 가르침이 다른 종교와의 차이점은 영혼ㆍ자아(自我) 즉, 아트만(Atman)을 인정치 않는 것으로서 종교의 사상사적 측면에서 사실상 독특한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에는 자아(自我)는 환상적인 것, 혹은 가공적(架空的)인 것으로 실재(實在)와 일치하지 않는 잘못된 신념 혹은 믿음이며, '나'라든지 '나의 것'이라는 것 때문에 탐ㆍ진ㆍ치가 일어나고 무명에 의한 생사윤회의 끝없는 고통이 따르게 되며, 갖가지 삿된 견해와 교만ㆍ속임수ㆍ이기주의ㆍ깨끗지 못함 등의 업을 익히게 되는 근본적인 원인이며, 이로 인해 세상의 모든 불선업(不善業)이 존재하게 된다고 하셨다.
어리석은 인간이 이와 같이 ‘아(我)’의 영원성을 강조하고 그것의 존재를 내세우는 것은, 곧 자기 보존적 집착이며, 의지의 나약함과 소유에 대한 허무를 메우기 위해서 갖는 보호적 욕구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나'라고 하는 그 주체가 없다면 한 생명의 모든 꿈과 의욕이 상실되고 삶의 의미가 없어진다고 여기는 것이 중생의 생각이다.
그리고 그 무엇, ― 자아라는 존재가 있다고 여기고, 이에 의존함으로써 안전과 안녕을 기약하게 되고, 그것을 위해서 노력하는 용기를 갖게 된다고 하는 것이 중생의 모습이다. 따라서 이러한 현상의 실제는 그 실상이 없음에 대한 두려움과 나약함에서 발생된 환상적인 것이다.
이 환상적인 유아(有我)가 사실적인 진리가 아님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이 위빠사나(Vipassana) 수행법이다. 그리하여 수행을 통해서 실상을 깨달을 때 자신의 성품과 모든 사물의 현상을 바르게 보는 법안(法眼)이 열리게 되고, 이를 정견(正見)이라 한다. 이로써 진리로부터 물러섬이 없게 되고, 아견(我見)과 망견(妄見)에서 벗어나게 되며, 그리하여 도(道)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위빠사나 수행은 지금 현재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의 자연스러운 관찰이다. 그리고 육체의 일어나고 사리지는 현상을 마음이라 이름 한 나마(nama)를 관찰했을 때, 그 나마(마음) 자체는 계속 변화하고,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일 뿐이다.
브라만교(힌두교)에서는 마음이라는 것이 심장에 자리하고 있다고 믿었으며, 지금도 ‘마음’이라 하면 흔히들 일반사회에서 심장을 가리킨다. 그러나 심장이 마음으로서의 기능을 하고 있지 않음이 현대의학의 심장이식 수술을 통해 증명되고 있다.
플라스틱의 인공심장이식으로 혈액을 순환시켜 살게 되고 (그것이 자연심장처럼 오래 가는 것은 아니지만) 또한 짐승의 심장을 이식해 인간심장기능을 하기도 한다. 그런데 심장이 진정 인간의 마음으로서 사고하고 분별하며 감정과 이성을 좌우하는 기능까지 가지고 있다면 어떻게 플라스틱 인공심장을 넣고 인간의 기능을 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사실로 봐도 마음은 심장 속에서 작용하는 것이 아니며, 심장 그 자체가 마음의 기능까지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님은 분명하기 때문에 마음이라는 것은 어떠한 특정 장소에 자리해 머무는 곳이 있는 게 아니라 여섯 가지 감각기관(안ㆍ이ㆍ비ㆍ설ㆍ신ㆍ의)의 기능에 따라 수시로 변화하면서 조건에 의해 나타나고 사라지는 현상에 불과함을 깨닫게 한다.
―――무아와 위빠사나―――
다음은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인 <무아경(無我經, Anatta-lakkhana Sutta ― Samyutta Nikaya XXII.59)의 앞부분이다.
『나는 이렇게 들었다.
붓다께서 이시파나타에 있는 사슴 공원, 베나레스에 머물고 계셨다. 붓다께서는 다섯 비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형상(色)은 내가 아니다. 만일 형상이 나라면 이 형상은 (나를) 고통으로 몰고 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형상에게 이렇게 할 수 있을 것이다. ; '나의 형상이여 이렇게 되라. 나의 형상이여 이렇게 되지 마라라.'
형상이 내가 아닌 까닭에, 그것은 고통으로 몰고 가는 것이다.
그 어느 누구도 형상에게 이렇게 할 수 없는 것이다. : '나의 형상이여 이렇게 되라, 나의 형상이여 이렇게 되지 마라라.'”
“비구들이여, 느낌(受)은 내가 아니다....
“비구들이여, 인지(想)는 내가 아니다....
“비구들이여, 형성(行)은 내가 아니다....
“비구들이여 식(識)은 내가 아니다. 만일 식이 나라면 이 식은 나를 고통으로 몰고 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식에게 이렇게 할 수 있을 것이다. : '나의 식이여 이렇게 되라, 나의 식이여 이렇게 되지 마라라.'
식이 내가 아닌 까닭에 그것은 고통으로 몰고 가는 것이다.
그리고 아무도 식에게 이렇게 할 수 없는 것이다. : '나의 식이여 이렇게 되라, 나의 식이여 이렇게 되지 마라라.‘”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이것을 어떻게 이해하느냐? : 형상은 영원한 것인가, 아니면 무상한 것인가?”
“무상한 것입니다. 세존시여.”
“그렇다면 무상한 그것은 고통스러운 것인가 유쾌한 것인가?”
“세존이시여, 그것은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영원하지 않은 것, 변화하므로 고통스러운 것을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 이것은 나의 것, 이것은 나, 이것은 나 자신.”
“옳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오온(五蘊)이 무상(無常), 고(苦), 무아(無我)임을 보여주다――
“비구들이여! 이 법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몸[色]이 영원한가? 무상한가?”
“무상합니다. 세존이시여.”
“이 법이 무상하다. 이 무상한 법이 고통인가? 행복인가?”
“고통입니다. 세존이시여.”
“이 무상하고, 고통이며, 변하기 마련인 것을 두고 ‘이 몸은 내 것이다. 이 몸은 나다. 이 몸이 나의 자아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타당하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비구들이여! 이 법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느낌[受]이 영원한가? 무상한가?”
“영원하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이 법이 무상하다. 이 무상한 법이 고통인가? 행복인가?”
“고통입니다. 세존이시여.”
“이 무상하고, 고통이며, 변하기 마련인 것을 두고 ‘이 느낌은 내 것이다. 이 느낌은 나다. 이 느낌이 나의 자아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타당하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비구들이여! 이법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인식[想]이 영원한가? 무상한가?”
“무상합니다. 세존이시여!”
“이 법이 무상하다. 이 무상한 법이 고통인가? 행복인가?”
“고통입니다. 세존이시여.”
“이 무상하고, 고통이며, 변하기 마련인 것을 두고 ‘이 인식은 내 것이다. 이 인식은 나다. 이 인식이 나의 자아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타당하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비구들이여! 이 법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정신적 의지 작용[行]이 영원한가? 무상한가?”
“무상합니다. 세존이시여.”
“이 법이 무상하다. 이 무상한 법이 고통인가? 행복인가?”
“고통입니다. 세존이시여.”
“이 무상하고, 고통이며, 변하고 무너지는 성품을 ‘나의 것, 나, 나의 자아’라고 생각하는 것이 타당하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비구들이여! 이 법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의식[識]이 영원한가? 무상한가?”
“무상합니다. 세존이시여.”
“이 법이 무상하다. 이 무상한 법이 고통인가? 행복인가?”
“고통입니다. 세존이시여.”
“이 무상하고, 고통이며, 변하고 무너지는 성품을 ‘나의 것, 나, 나의 자아’라고 생각하는 것이 타당하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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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무아경>을 위빠사나 수행과 연계해 좀 더 깊이 이해해 보자.
‘무아(無我)’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은 다른 교단에서는 찾을 수 없는 아주 독특한 법이다. 부처님 가르침을 삼학(三學), 즉 계(戒)ㆍ정(定)ㆍ혜(慧)로 축약해 볼 경우, 계율은 어느 교단에서든 나름대로 다 있다. 몸과 마음, 입으로 어떤 것을 하면 안 되고 또 어떤 것은 해야 하는지에 대한 가르침은 여느 종단에도 다 있는데, 그 계율이 완벽한 지혜를 바탕으로 한 것인지 아닌지는 교단마다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왜냐하면 그 기준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부처님 가르침에서 계율은 기본이고, 정(定), 즉 집중에 대한 가르침도 매우 중요하고, 지혜는 가장 중요하다고 가르친다. 이 지혜의 한가운데에 바로 ‘무아(無我)’가 있다. 다른 모든 가르침에서 ‘아(我)’를 가르치는 것과는 두드러지게 다른 점이 바로 이것이다.
이 무아(無我)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 무아의 여러 측면을 자세히 보도록 하자.
우리가 ‘나’라고 할 때 그 의미는 무엇인가.
• 먼저 ‘주인공인 나(自我)’가 있다.
즉, 모든 것이 내 뜻대로 된다고 착각해 내가 일어나고 싶으면 일어나고, 서고 싶으면 서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고, 내 뜻대로 된다고 보는 것이 자아(自我)이다.
그리고 이 몸과 마음에 대해 내가 주인공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은 모든 것이 원인과 결과(연기한 것)인데, 그런 걸 모르고 내 뜻대로 되고 내 뜻대로 하는 내가 주인공이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우리가 열심히 관찰해 일어나고 사라지는 모든 것을 알고 있는데, 다시 뒤에서 다른 어떤 자가 전체적으로 다 알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경우가 있다면, 그것은 수ㆍ상ㆍ행ㆍ식 중에서 ‘식(識)’에 해당된다. 그런데 그 앎인 식에 ‘나’를 갖다 붙여서 아는 내가 주인공이라고, 그것이 ‘나’라고 착각한다.
• 두 번째 ‘나’는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변하지 않고 유지되는 ‘나’가 있다고 착각하는 ‘나’이다.
무상(無常)을 제대로 알고 있어야 무아(無我)도 바르게 알 수 있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전부터 지금까지 계속 살고 있는 ‘나’가 있다고 느낀다. 이런 아상(我相)은 수ㆍ상ㆍ행ㆍ식 중에서 ‘상(想)’과 관련이 많다. 상(想)은 인식하고 상상하는 것이다. 과거를 인식하고 미래를 인식하면서 그것을 ‘나’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몸이라는 물질과 정신은 계속 변해 영원한 것은 아무 것도 없고 다만 상상으로 그렇게 여길 뿐인데, 그것 때문에 내가 있다고 착각하게 되는 것이다.
• 세 번째는 ‘~을 하는 사람’ 즉 무언가를 하는 그것을 ‘나’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보는 것도 내가 보는 것이고, 생각하는 것도 내가 생각하는 것이며, 수행하는 것조차도 내가 수행하고 있다고 보는 등 일체를 내가 하고 있다고 보는 것인데, 이것은 아주 강한 ‘나 ― 자아의식’이다. 아는 것도 내가 아는 것이고, 모르는 것도 내가 모르는 것이며, 모든 행하는 것을 ‘나’라고 착각한다. 이것은 수ㆍ상ㆍ행ㆍ식 중에서 ‘행(行)’과 관련이 많다. 수행할 때도 ‘내가 노력하고 있다.’, ‘내가 게으르다.’, ‘아, 내가 성장하고 있구나.’ 하면서 모든 행위에 ‘나’를 붙여서 생각한다.
그러나 집중이 깊어져서 지혜가 높아 가면 그렇지 않음을 알기 시작한다. 모든 행, 모든 일을 하면서 계속 ‘내가 하고 있다.’고 하는 것이 바로 아상(我相)이다. 수행하고 있는데 집중이 깊어져서 지혜가 좋아지면 법을 보기 시작한다.
수행이 깊어져서 법을 많이 보게 되면 ‘무아’를 확실하게 깨닫게 된다. 위빠사나 지혜가 있어서 계속 일어나서 사라짐을 보고 있고 알고 있으면 거기에 아(我)가 붙지 못한다.
• 네 번째는 그때그때 가지게 되는 느낌을 아(我)라고 보는 것이다.
행복할 때 행복한 나, 괴로울 때 괴로운 나, 즐거울 때 즐거운 나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아(我), 자아(自我)라고 할 때에는 위와 같은 네 가지의 ‘나(我)’를 이해하고 있어야 무아(無我)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면 사실은 어떠한가?
우리의 몸과 마음은 단지 색ㆍ수ㆍ상ㆍ행ㆍ식인 오온일 뿐인데, 이 오온에 강하게 집착함으로써 그것을 자아, ‘나’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몸이 있고 영혼이 있으며 이 몸은 영혼이 시키는 대로 하고 있다고 착각한다. 그리고 이 몸이 죽어도 영혼은 계속 다른 몸을 받아서 산다고 착각한다.
그리고 오온인 색ㆍ수ㆍ상ㆍ행ㆍ식 중에서 수(受)는 느낌이어서 행복한 느낌, 괴로운 느낌 등을 말하는데, 그 느낌에 ‘아’를 붙여서 행복한 사람, 행복한 나라고 보는 것이다.
수행으로 깊이 관찰하면 사실은 그와 같이 행복이라는 느낌만 있을 뿐, 행복한 자는 없고 괴로움의 느낌은 있어도 괴로운 자는 따로 없음을 알게 된다. 괴로움은 괴로움이라는 느낌일 뿐인데 괴로운 자가 있고 그것이 자기 자신이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원인에 따른 결과일 뿐 나도 아니고 내 것도 아니다.
색ㆍ수ㆍ상ㆍ행ㆍ식 모든 것이 변하고 사라진다. 위빠사나 지혜가 없어서 모를 뿐 위빠사나 지혜가 일어나면 그 오온이 뚜렷하게 하나 하나 생겼다가 사라지고 다시 하나가 생기고……, 오직 그럴 뿐이다.
느낌(受)도 뚜렷하게 하나 다음에 하나이다. 한꺼번에 여러 개의 수가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한 느낌이 사라지고 나서 다시 다른 느낌 하나, 그 하나하나가 계속 변해가기 때문에 무상하고 그것에 ‘나’라고 할 것이 없다. 생겨난 모든 것은 곧바로 사라지는 것인데, 관찰하는 힘이 약해서 그 변화를 못보고, 그것에 ‘나’라는 생각을 붙이고 집착하고 착각하는 것이다.
위빠사나 지혜가 일어나지 않는 사람들은 수(受)에서 항상 ‘나’를 동시에 만든다. ‘행복하면.’ ‘내가 행복한 것이다.’, ‘괴로우면’ ‘내가 괴로운 것이다.’
이렇게 수(受)에 대해 아(我)가 생긴 것, 수에 대한 아상, 이것은 아주 미묘한 것이어서 수행을 안 하고서는 알 수가 없다.
수행을 하면, 수라는 느낌에 ‘나’라는 생각을 붙여 놓고 있던 것이 계속 무너지는 것을 본다. 수는 수일 뿐 그것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나’가 아니라는 것을 차츰 알게 된다. 행복함은 있는데 ‘행복한 나’가 따로 없고, 괴로움이 있는데 ‘괴로운 나’는 따로 없음을 보기 시작하면서 법을 바로 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