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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룡 장군은 경북 상주 은척의 아차골이라는 곳에서 왜군을 막은 장군입니다. 평성 건너편에 ‘그늘개’라는 지명이 있는데 이곳은 ‘군울개’가 변한 말로 이말은 ‘군이 울었다’는 뜻이 담긴 말이였습니다. 당시 아군이 패망하고 울었다는 이 계곡에서 퇴각한 아군은 투구가 없어서 종이로 투구 모양을 만들어 그기다가 먹물을 칠해서 발라 고걸 투구로 대신해서 쓰고 싸워야만 했다고 합니다.
"상주 정기룡 장군 유적지의 기념비"
장군은 원래 남해 진주 사람으로 어렸을 때부터 줄곧 골목대장을 했었는데, 말 타기, 궁술 등을 연마하며 실제 군사들을 다루듯 아이들과 병정 놀이를 했다고 합니다. 골목대장 시절 그때 장군은 군법을 시행한다며, 엄한 벌을 주다 한 아이를 죽인 적도 있었다는 데...어느 여름날에 들에서 웃통을 벗고 장수싸움 놀이를 하는데 그때 갑자기 하늘에 먹구름이 끼고 뇌성벽력이 치는 것이었습니다.
"골목 대상 시절의 장군"
그래서 아이들과 함께 바위굴에 숨으로 들어갔는데 굴 안에는 커다란 호랑이가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누구 하나는 천사 잡혀먹혀야 할 상황이라!그래서, 누구를 희생타로 할가?을 결정 하기 위해서, 아이들의 저고리를 모두 벗겨서 하나씩 던져보았습니다. 그랫드니 말이다 호랑이는 다른 아이들 것은 앞발로 쳐서 땅에 떨어뜨리더니 장군의 저고리는 물고 놓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호랑이 굴"
그래서 장군은 자기를 잡아 먹겠다는 것으로 알고 호랑이 입 앞에 어깨를 들어밀었습니다. 그러나 호랑이는 잡아먹지 않고 장군의 옷을 꼭 물고는 바위굴 밖으로 끌고 나갔다고 합니다. 그 때 번개가 굴 안으로 치더니 굴 안에 있던 아이들은 모두 죽고 말았습니다.이 기적을, 모든 사람들은 다만 하늘은 조선을 지켜야할 영웅이 누군 가?를 다 알기 때문에 이르난 기적이라고만 말합니다. 장군은 아버지 없이 어머니가 홀로 키웠지만, 그런것에 하등 구애받지않고 스스로 병법을 익히고 그걸 아이들에게 연습시키며 놀았습니다.
"골목 대상 시절의 장군"
그러다가 영남의 난을 자력의 힘으로 막았지만,그러나 고게 임금이 시킨 명령이 아니란 이유로 그의 승전은 포상도 받지 못했지만, 글을 배우지 못해서 그래서 상소를 올리지 못했고 역사상에도 크게 오르지 못했습니다. 정기룡 장군이 추풍령에서 싸울 적에 6월 중순께 장마가 져서 하늘은 먹물을 들인 듯 검고, 적은 쳐들어오는데 투구없는 병사들에게 종위에다 먹물을 발라 만든 투구를 쓰고 낮이나 괭이등을 들고도 싸워야 했다고 하니, 그런 투구와 병기 하나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아군 병사들만으로는 완전 무장을 한 왜군을 상대해서 도져히 싸울 수가 없었습니다.
"왜군들의 진지"
그래서 장군이 생각타 못해 꾀를 내어 근방의 소를 전부 모아 소꼬리에 기름을 먹여 그 꼬리에 불을 붙이고 왜적들을 향해 달아나게 쫓았 보냈드니, 꼬리에 불이붙은 소때가 꼬리의 불때문에 앞만 보고 왜적들의 진지로 돌진하니 이를 감당하지 못한 왜군들은 도망가는데... 왜군의 막사는 소 꼬리의 불들로 인해 큰불이 나서 그래서 왜군들의 진지를 지키던 병사들은 우왕좌왕 하다가 전멸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다보니 아군은 장군의 계략(計略)인 소들의 덕으로 한 명도 다치지 않고 대승을 하게 되었습니다. 정기룡 장군은 이 싸움에서 승리한 후 그들이 버리고 간 군수품인 투구와 병기들로 병사 모두를 무장시켜서, 그 후론, 60여차의 왜병과의 싸움이 있었습니다만 한번도 패전한 적이 없었다는데... 장군의 승전과는 아래와 같습니다.
그러나,이런 맹장인 장군도 경남 통영 진중에서 순직하고 말았습니다.그러나 그 장군의 유해는 유언에 의해 장군의 고향이 아닌,경북 상주시 사벌면 금흔리, 아래의 옛격전지인 장소에다 안장되었습니다.
"상주에 있는 정기룡 장군의 묘소와 유적비"